RENAULT F1 - 노란색으로 물든 혁신과 도전의 역사
2010-11-14  |   22,723 읽음

10월 24일 역사적인 창설전을 치르게 된 코리아 그랑프리. 아직 F1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한국에서는 어떤 팀, 어느 선수를 응원해야 할지 고민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페라리나 맥라렌은 세계적으로도 팬이 많고 한국에서도 비교적 잘 알려진 이름.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이름도 낯설고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다. 자고로 열성적인 응원을 위해서는 자국팀이나 자국인 드라이버의 존재가 절실한 법. 물론 한국 팀이나 한국인 드라이버는 없지만 잘 살펴보면 한 다리 건너 사돈의 팔촌보다는 가까운 F1 팀이 있으니, 바로 노란색 보디가 산뜻한 르노팀이다.

F1 최초로 터보 엔진을 사용
우선 한국 자동차 메이커가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현대와 기아, 르노삼성, GM대우 그리고 쌍용이 떠오를 것이다. 이 중 현대/기아를 제외하면 해외자본의 외국계 기업이지만 모두 그 뿌리와 시작은 한국이었다. 특히 르노삼성의 경우 외환위기 때 삼성자동차의 지분 80.1%를 르노가 인수했지만 여전히 19.9%를 삼성이 소유하고 있으며 삼성이라는 이름을 굳이 고집하고 있다.

모기업 르노는 잘 알려진 대로 프랑스 자동차 메이커. 1899년 루이 르노에 의해 창업된 후 자동차 역사 초창기부터 명성을 누려왔다. 그런 르노가 F1 그랑프리에 발을 들인 것이 1977년. 랠리와 르망 24시간에서도 활약했던 르노 스포르(Renaulet Sport)가 이 중책을 맡았다.

다만 데뷔는 개막전이 아니었고 후반기 5개 레이스에 경주차도 한 대만을 투입했다. 드라이버는 장 피에르 자부이유. 1976년 유럽 F2 챔피언이었던 그는 르노의 야심찬 F1 프로젝트의 일원으로서 F1 사상 최초의 터보 엔진 개발에 한 축을 담당했다. 프랑스 메이커 르노는 프랑스인

J. P. 자부이유를 기용하는 한편 미쉐린 타이어와 엘프 연료를 사용한 ‘올 프렌치’ 체제를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자연흡기 엔진에 비해 강력한 파워를 얻을 수 있었던 터보는 당시 아직 신뢰성이 부족했다. 데뷔전이었던 10전 영국 그랑프리에서는 예전 21위, 결선에서는 터보차저 트러블로 리타이어했다. 나머지 4전을 포함해 리타이어 4번, 예선 탈락 1번의 초라한 성적표였다. 빡빡한 예산과 인력으로 내구 레이스와 F1을 동시에 진행한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이듬해인 1978년에는 3전부터 참가했는데, 전반적으로 신뢰성이 낮아 시즌 통틀어 완주가 4번에 불과했다. 최고 순위는 4위.

제대로 된 팀 체제와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들어서부터다. 우선 전경기에 출장했을 뿐 아니라 르네 아르누를 영입해 2대 체제를 꾸렸다. 특히 3전 남아공 GP가 열린 칼라미 서킷은 공기가 옅은 고지대여서 터보 엔진의 위력이 배가되며 폴 포지션을 잡았다. 이윽고 8전 프랑스 GP에서 우승을 차지해 ‘프랑스 서킷에서 프랑스 드라이버가 프랑스 타이어와 연료를 사용한 프랑스 경주차를 타고 차지한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팀 첫 우승이자 F1 최초의 터보차 우승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신뢰성은 여전히 아킬레스건이었다.

81년 르노팀은 맥라렌에서 데뷔전을 치른 F1 새내기 알랭 프로스트를 자부이유 대신 앉혔다. 나중에 ‘프로페서’라는 별칭을 얻으며 가장 위대한 F1 드라이버 중 하나로 추앙받게 되는 프로스트는 빛나는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RS01의 터보 엔진도 점차 신뢰성이 안정되던 시기. 프로스트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이태리를 잡으며 종합성적 5위를 기록했다. 1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팀이 자연흡기 엔진을 사용했지만 81년에는 르노 외에 페라리와 톨레만이 터보 엔진을 얹으면서 터보 세력이 늘어났다.

프로스트와 윌리엄즈의 황금기
혼다와 BMW가 터보 엔진을 공급하면서 83년 시즌은 본격적인 터보시대로 접어들었다. 프로스트와 미국인 에디 치버를 내세운 르노는 데뷔 후 최고의 해를 보냈다. 1, 2전을 망쳤지만 3전 프랑스에서 프로스트 우승, 치버가 3위로 시상대를 독점했고 프로스트는 이후 3번의 우승과 2위 두 번, 3위 한 번으로 선두로 나섰다. 하지만 막판 추월을 허용하며 손에 넣었던 챔피언 타이틀을 넬슨 피케에게 헌납하고 말았다. 네덜란드와 이태리, 최종전 남아공 등 막판 3개 그랑프리에서 리타이어한 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챔피언 확정을 의심치 않았던 르노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고 프로스트와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결국 프로스트는 83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맥라렌으로 이적했다. 1984년 D. 워윅과 P. 탐베이를 기용했지만 이미 터보 엔진 노하우를 손에 넣은 라이벌들은 르노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특히 프로스트가 가세하고, TAG 포르쉐 엔진을 손에 넣은 맥라렌의 기세가 무서웠다.
1985년이 되자 경쟁력은 더욱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경영부진이 심각하던 모기업 르노가 국유화되고 말았다. 이때 새로이 CEO로 취임한 조르쥬 베세는 F1 활동을 중단시키고 86년 로터스와 리지에, 티렐팀에 엔진을 공급하도록 했다.

잠시 공백기를 가진 르노는 1989년 윌리엄즈팀 엔진 공급자로 활동을 재개했다. 데뷔 당시 터보차저라는 신병기를 선보였던 르노는 이번에는 공압식 밸브라는 신기술에 도전했다. 나날이 회전수가 높아지는 F1 엔진들은 스프링과 캠을 사용하는 전통적 구조로는 정확한 밸브 작동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기계적인 스프링 대신 공기압력을 이용해 밸브를 움직이도록 한 것. 이 시스템 덕분에 1만4,000rpm이라는 경이적인 회전수가 가능해졌다. 티에리 부첸은 새로운 르노 RS1 엔진을 얹은 윌리엄즈 머신을 타고 6전 캐나다와 최종전 호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르노 엔진의 가능성을 확인한 윌리엄즈는 공급계약을 연장했고, 그들의 신무기 액티브 서스펜션을 더해 강력한 머신을 완성했다. 92년 만셀, 93년 프로스트가 윌리엄즈-르노 머신으로 챔피언에 오르는 동안 팀은 3년 연속 컨스트럭터즈 챔피언(92~94)을 차지했다. 95년에는 베네톤팀에서 챔피언이 된 M. 슈마허부터 상위 4명이 모두 르노 엔진(베네톤과 윌리엄즈팀)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97년까지 계속되었다.

97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르노가 다시 F1을 떠나면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은 윌리엄즈와 베네톤의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2년 후인 2000년, 마침내 르노가 워크스팀으로 F1에 복귀신고를 하기에 이른다. 플라비오 브리아토레가 이끌던 베네톤팀을 1억2,000만달러에 매입한 르노는 베네톤의 G. 피지켈라와 A. 부르츠를 그대로 기용했다. 엔진은 구형 르노를 베이스로 프랑스 수퍼텍이 개량한 버전(플레이라이프)을 얹었다. 하지만 컨스트럭터 등록기한을 넘겨 2001년은 ‘베네톤 르노’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다. 

초반 3년간의 성적은 부진했다. 2001년 J. 버튼, 2002년 J. 트룰리가 새롭게 합류했다. 그리고 2003년 버튼 대신 인상적인 테스트 기록을 남겼던 스페인 출신의 신예
F. 알론소를 영입했다. 브리아토레의 파격적인 기용에 화답하듯이 알론소는 그 해 헝가리 그랑프리에서 르노에게 복귀 후 첫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1983년 오스트리아 GP 이후 10년 만의 감격이었다. 2005년 트룰리는 모나코에서 우승하며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팀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최종 3전을 남기고 토요타로 이적하고 말았다. 반면 알론소는 표창대에 4번 오르며 종합 4위에 올랐다.

르노 모터스포츠의 산실
르노 스포르

르노 스포르(Renault Sport) 혹은 RST(Reanult Sport Technologies)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르노의 모터스포츠 담당 부서. 1970년대 르망 24시간을 필두로 한 유럽의 내구레이스와 투어링카 레이스, 랠리는 물론 F1까지 담당해왔다. 2000년대 들어 르노가 F1에 복귀할 때에는 베네톤팀을 인수함으로써 이제는 F1과 별개의 부서가 되었다. 하지만 포뮬러 르노와 월드 시리즈 바이 르노 등 하위 포뮬러에서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순수한 모터스포츠 활동 외에 르노 고성능 버전도 제작해 판매해왔다. 대표적인 모델이 메가느 르노 스포르와 르노스포르 클리어 197. 소형 해치백 메가느와 클리오를 바탕으로 제작한 핫해치들이다. 3세대 메가느를 바탕으로 2009년 선보인 메가느 르노스포르 250(왼쪽 끝에서 시계방향으로 2번째)은 4기통 엔진에 트윈 스크롤 터보를 달아 출력을 250마력으로 높이고 6단 수동변속기, 전용 에어로파츠, 리어 디퓨저 등 서킷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진하게 담아냈다.
 
반면 메가느 트로피(사진 맨 왼쪽)는 모습은 메가느지만 내용물은 순수 레이싱카. 튜브 프레임에 복합소재 보디를 씌우고 미드십에 V6 3.5L 360마력 엔진을 얹었다. 구형을 대신해 원메이크 레이스인 유로컵 메가느 트로피에 사용된다.

알론소와 2년 연속 더블 타이틀 차지
경주차의 성능이 숙성되고 알론소의 실력이 눈부시게 발전한 2005, 2006년 시즌은 르노팀 역사의 황금기가 되었다. 2004년 말 트룰리의 빈자리를 J. 빌르너브로 메웠던 르노팀은 G. 피지켈라를 알론소의 파트너로 영입했다.

당시 F1은 페라리와 슈마허의 황금 콤비가 서킷을 휩쓸던 시기. 2004년 슈마허는 18전 중 무려 13전을 챙겨 압도적인 차로 챔피언에 올랐다. 팀동료 바리첼로가 2승을 챙겨 컨스트럭터 점수에서 2위와 무려 143점 차로 2배 이상이었다. 하지만 알론소는 7승으로 슈마허(페라리)와 라이코넨(맥라렌)을 밀어내고 챔피언에 올랐다. 또한 사상 최연소 월드 챔피언 기록(이 기록은 2008년 해밀턴에 의해 갱신되었다)까지 갈아치웠다. 개막전을 잡은 피지켈라의 활약까지 더해 컨스트럭터즈 타이틀까지 손에 넣었다.

르노의 기세는 이듬해에도 계속되었다. 2005년의 타이어 규정이 변경되면서 페라리가 부진한 덕분에 어부지리를 얻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2006년 시즌의 활약은 이런 평가를 일축하기에 충분했다.

슈마허는 2006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 마지막 타이틀을 놓고 알론소와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알론소가 9전까지 6승, 2위 3번으로 앞서갔지만 슈마허 역시 4~5전, 10~12전을 잡으며 응수했다. 타이틀의 향방은 최종전 직전 벌어진 17전 일본 GP에서 결정되었다. 116점으로 동일 포인트, 하지만 승수에 따라 슈마허가 근소하게 리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37주째 슈마허의 페라리 머신이 데그너 커브 근처에서 엔진 트러블로 멈추어 서면서 승리의 여신은 알론소에게 미소를 보냈다. 르노팀은 2년 연속 드라이버와 컨스트럭터 타이틀을 차지했다.

2연속 챔피언이 된 알론소는 2007년부터 맥라렌으로 자리를 옮겼다. 르노팀은 테스트 드라이버 H. 코발라이넨을 승격시켰지만 전력 누수는 어쩔 수 없었다. 담배 광고가 금지되면서 마일드 세븐 대신 보험사 ING가 메인 스폰서로 바뀌는 등 변화가 많았다. R27 머신은 새로운 브리지스톤 타이어와의 상성 문제와 에어로다이내믹 설계 실수로 전투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일본 GP에서 코발라이넨의 2위가 최고 성적. 

맥라렌으로 옮겨갔던 알론소가 팀 적응에 실패하면서 2008년 시즌 다시 르노로 복귀, 드라이버 전력이 강화되었다. 세컨드 드라이버는 테스트 드라이버였던 넬슨 피케 Jr로 교체. 경주차의 성능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알론소의 실력을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에 화답하듯 최초의 나이트 레이스로 열린 싱가포르 GP에서 예선 15위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우승을 차지했다. 피케 Jr는 전반적으로 부진한 가운데 독일에서 2위에 올라 가능성을 보였다. 

부활의 가능성이 점쳐지던 2009년. 하지만 이 시즌은 르노 F1 역사상 최악의 해로 기록된다. 9전 독일에서 알론소가 3년 만에 최고속랩을, 10전 헝가리에서 3년 만에 폴 포지션을 따낼 때만 해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헝가리 GP를 마지막으로 팀에서 방출된 피케 Jr가 2008년 싱가포르에서 의도적인 사고로 알론소의 우승을 도왔다고 폭로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FIA 모터스포츠 평의회는 르노팀에 참가자격 박탈(집행유예 2년), 팀 감독인 브리아토레는 FIA가 주관하는 모든 모터스포츠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그 여파로 팀의 주요 스폰서였던 마투타 마힌드라와 ING 그룹이 모두 떠나고 말았다.

세계적인 경제위기까지 겹친 상황에서 F1 팀을 유지할 수 없었던 르노는 팀 매각을 결정했다. 2009년 12월 16일, 소유하고 있던 주식 대부분을 룩셈부르크 투자회사인 제니 캐피탈에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 중 1/4인 25%의 주식을 유지하기로 하고 여전히 엔진을 공급함으로써 F1으로 이어진 끈을 놓지 않았다.

위기 지나 새로운 도약 준비해
무엇보다도 르노 엔진(RS27-2010)은 강력한 파워와 안정적인 내구성을 갖추고 있어 르노팀 전력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팀 자체는 아직 크래시 게이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엔진을 공급하고 있는 레드불팀은 승승장구, 올해 드라이버와 컨스트럭터즈 더블 타이틀을 넘본다. 1980년대 르노 파워 황금기의 부활이 점쳐지고 있다.
감독이 파면되고 알론소도 떠났지만 르노팀은 레드불, 맥라렌, 페라리, 메르세데스에 이어 5위를 달리고 있다. 알론소 대신 영입된 헝가리 출신 쿠비자는 안정적인 달리기로 꾸준히 득점권을 지키고 있다. BMW의 퇴진으로 자리를 잃었던 쿠비자는 원래 2001년 포뮬러 르노를 통해 포뮬러 세계에 입문한 경력이 있다.

지난 1월 새로이 팀을 이끌게 된 에릭 부이에는 엔지니어 출신으로 프랑스 DAMS팀과 A1팀 프랑스 등에서 경력을 쌓은 인물. 러시아의 아브토바즈를 지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최초의 러시아 드라이버 V. 페트로프를 영입함으로써 라다와 비보르그 등 러시아 기업들을 스폰서로 끌어들였다. 위기를 넘어 황금기를 구가해온 지금까지의 역사처럼 그들의 새로운 도약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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