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그랑프리 더욱 활성화되다 1972년(상)- 여러 명문팀, 유명 기업과 스폰서 계약 맺어
2000-04-27  |   10,793 읽음
에머슨 피티팔디는 1946년에 상파울로에서 라디오 리포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68년에 유럽으로 건너가 포뮬러 포드와 F3 경기에 참가했고, 70년 영국 브랜즈 해치에서 F1 레이스에 데뷔했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25세의 나이로 최연소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다른 어떤 드라이버도 이처럼 짧은 시간에 조용하고 빠른 드라이버가 된 적은 없었다.
총 12회가 열린 제23회 월드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새롭게 태어난 로터스 72(정확히 말하면 로터스 72D)를 타로 다섯 경기의 우승트로피를 품에 안은 피티팔디가 월드 챔피언을 차지했다. 재키 스튜어트는 티렐-포드로 4번의 우승을 차지하는데 그쳤고, BRM의 잔 피에르 벨토이즈와 페라리의 재키 익스, 맥라렌-포드의 데니스 헐름 등은 단지 한 번씩의 우승을 차지했다.

명문팀들 담배회사와 스폰서 계약 맺어
서티스, 경주차 개발 위해 레이서 은퇴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기 전 많은 F1팀들이 팀을 재정비했다. 피티팔디는 세컨드 드라이버인 데이브 워커와 함께 로터스팀에 톱드라이버로 계속 남았다. 콜린 채프먼이 라이네 비젤과 재계약 맺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워커가 세컨드 드라이버가 되었던 것이다. 그 해 존 플레이어 담배회사가 유명한 경주차 로터스 72s의 모델 독점권을 산 이후로 쐐기 모양에 라디에이터를 콕피트 옆에 단 이 레이싱카의 이름은 공식적으로 `존 플레이어 스페셜스`로 바뀌었다. 머신은 존 플레이어 스페셜 담배갑처럼 검정색 바탕에 금색 줄이 들어간 디자인이었다.

데렉 가드너가 디자인한 티렐의 머신은 비록 프랑스 F2 드라이버 파트릭 데파예가 시즌 중 두 경기를 몰았지만, 재키 스튜어트와 프랑수아 세베르가 다시 탔다. 니키 라우다는 로니 페터슨을 마치팀에 영입했다. 오스트리아 빈의 대기업가의 아들인 라우다는 오스트리아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기 위해 F1 레이스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페라리팀의 재키 익스와 클레이 레가조니, 마리오 안드레티 등은 계속해서 팀에 남았다. 그리고 아르투로 메르자리오와 나니 갈리가 시즌 중 각각 두 번과 한 번씩 그랑프리에 참가했다.

필립 모리스 담배회사가 1년 동안 BRM 경주차를 말보로-BRM이라 부르기 위해 BRM팀에 2백만 프랑을 투자했을 때 팀 안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매 경기에 5대의 경주차가 참가하는 계획이 세워져 팀의 공식적인 세 명의 드라이버에 말보로 내셔널 팀의 두 명의 선수가 추가되었다. `A팀`드라이버는 잔 피에르 벨토이즈와 새로운 뉴질랜드 드라이버 하우든 갠디, 피터 게딘, 그리고 다른 차들은 오스트리아 드라이버 헬머트 마르코와 알렉스 솔러로이크가 맡았다. 라이네 비젤도 개인적인 이유로 BRM의 선수로 뛰게 되었다. 그 중 벨토이즈는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우승해 팀의 사기를 크게 높였으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BRM의 역사에서 마지막 우승으로 남았다.

마트라는 재정적인 이유로 72년 시즌에 크리스 아몬이 모는 단 한 대의 경주차만 그랑프리에 출전시키기로 결정했다. 반면 데니스 헐름은 맥라렌팀의 톱드라이버이자 아메리칸 피터 레브슨팀의 세컨드 드라이버로 활동했다. 그 해 맥라렌팀은 야들리 화장품과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영국인 드라이버 브라이언 레드만은 맥라렌의 세 번째 드라이버로 경기에 몇 번 참가했다. 유능하고 젊은 남아프리카 드라이버 조디 쉑터 또한 그 해 후반에 테스트를 받았다. 존 서티스는 좀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의 경주차 개발과 팀 경영에 투자하기 위해 현역 드라이버에서 은퇴했고, 그의 TS9s는 마이크 헤일우드와 팀 쉔켄, 안드레아 드 아다미크가 몰았다.윌리엄스팀는 프랑스인 앙리 페스카롤로와 1971년에 F2 레이스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던 젊은 브라질 인 카를로스 파세 등과 계약을 맺었다. 이태리 인형제조업체 폴리토이즈는 이 작은 팀의 스폰서가 되었고, 경주차는 폴리토이즈-포드라고 불렀다. 이 차는 포드 엔지니어 렌 베일리가 윌리암스팀을 위해 디자인했고, 72년 한 해 동안 매 경기에 등장했다. 윌리엄스팀은 시즌 중 마치-포드 경주차에 아주 크게 기대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F1 그랑프리에 새로 등장한 테크노
예선용 타이어 나오고, 브레이크 발전


브라밤팀의 새로운 경영자인 버니 엑클레스톤은 런던의 사업가로 이후 몇 년 동안에 F1에서 점차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된다. 엑클레스톤과 토라낙은 몇 년 후 회사에서 독립했는데, 성격차이란 말만 들렸을 뿐 따른 특별한 이유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유명한 맥라렌 M19A를 만든 랄프 벨라미도 레이싱카 디자이너로 영입했다. 엑클레스톤의 드라이버들은 그래이엄 힐과 아르헨티나 드라이버 카를로스 로이테만, 그리고 브라질인 드라이버 에머슨 피티팔디의 형인 윌슨 피티팔디 등이었다.

1972년 F1 그랑프리에는 테크노란 메이커가 새로이 등장했다. 카트 레이싱부터 시작한 이 작은 볼로냐 회사는 66년에 처음으로 F3 머신을, 68년에는 F2 경주차를 만들었고, 둘 다 모두 성공적이었다. 테크노의 사장 루치아노 페데르자니는 취미로 레이싱카를 만들기 시작한 사업가였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F1 그랑프리 경주차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 자신만의 섀시에 맞는 독자적인 엔진을 개발했다. 새로운 테크노 엔진은 페라리 이후로 12기통 2천996cc 엔진 모델이 되었고, 1만1천rpm에서 440마력의 힘을 냈다. 페데르자니는 F1에서 팀 스폰서로 주류제조회사인 마르티니&로시의 관심을 끌만큼 매우 운이 좋았고, 그들은 이미 장거리 레이스를 하는 포르쉐 스포츠카팀을 돕고 있었다. 1971년 말에 언론에 처음으로 소개된 테크노 PA123은 많이 쓰이지 않던 튜블러 스페이스 프레임을 썼다.

그러나 첫 테스트에서 좋은 성능을 내지 못해 다시 처음부터 작업을 시작했고, 다시 PA123이라는 똑같은 이름의 새로운 모노코크 보디를 만들었다. 테크노는 존 위어의 유명한 스포츠카 팀 출신의 데이비드 요크를 팀 매니저로 고용함과 동시에 나니 갈리와 데렉 벨을 드라이버로 영입했다. 새로운 경주차는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처음으로 월드챔피언십 경기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성능은 팀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72년 F1 그랑프리 경주차는 이전보다 리어 액슬 위로 더 큰 무게비율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새로운 BRM P180이 라디에이터를 좀 더 뒤쪽으로 놓은 것처럼 연료통이나 오일 쿨러 등의 다양한 구성요소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얻어진 결과였다. 윙은 리어 액슬 뒤로 더욱 뒤쪽에 달려 뒷바퀴에 더 큰 다운포스를 주었다. 그러나 경주차 앞쪽에 어떤 균형 잡힌 힘이 없으면 자동차는 코너에서 심한 언더스티어가 일어나 트랙 밖으로 곧장 벗어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균형 잡기 위해 쐐기모양의 노즈나 각진 노즈핀 등의 에어로다이나믹 디자인을 이용해 앞쪽에 다운포스를 증가시켜 균형을 맞추었다.

타이어 전쟁 또한 더욱 치열했는데, 굿이어와 파이어스톤은 더 부드러운 컴파운드를 가진 `예선용 타이어`라는 특수 타이어를 내놓았다. 이 타이어는 겨우 3∼4랩이면 모두 닳아 없어지는 단점이 있었으나, 예선에서 짧은 시간에 최대의 접지력을 제공해주어 베스트랩을 내는데 효과적이었다.
브레이크 시스템도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71년 시즌에 티렐이 개발한 트윈 디스크의 옆면에 구멍을 뚫은 새로운 시스템은 마트라와 브라밤, 테크노 등이 썼다. 그때까지 각각의 브레이크 디스크에는 냉각용 방사형 홈이 있었는데, 이 새로운 기술은 좀더 효과적으로 열을 방출시켰고 젖은 조건에서 더욱 효과가 있었다. 또 다른 발전은 전체적으로 브레이크 패드의 크기를 크게 해준 4-피스톤 캘리퍼를 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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