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그랑프리 뜨거운 경쟁이 시작되다 레이서들의 이적과 새로운 경주차들의 등장으로
2000-01-30  |   8,794 읽음
1970년 시즌 후반, 페라리의 수평대향 12기통 엔진이 뛰어난 성능을 보이자 전문가들은 이 엔진을 얹은 빨간색 페라리 경주차가 71년 월드 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동안 뛰어난 성능을 보여줬던 코스워스 DFV 엔진은 4년이나 된 노후 엔진이었기 때문에 우승할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스워스는 1만500rpm에서 440∼450마력의 힘이 나오는 새로운 V8 모델을 내놓았다. 페라리의 신형 12기통 엔진은 1만2천500rpm에서 480마력의 힘을 냈으나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새로운 코스워스 엔진은 출력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이전 모델의 문제점을 모두 해결해 다시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마트라와 BRM의 12기통 엔진들은 둘 다 440마력의 최고출력을 가지고 있었다.

시즌 시작 전 많은 선수들 팀 옮겨
레이스 시즌 비극적인 사고로 시작해


1970년 말, 페라리는 재키 스튜어트에게 스카웃을 제안했으나 그는 이에 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티렐에 남았다. 티렐의 탄탄한 조직력은 다른 팀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팀의 모든 구성원은 각각 임무를 가졌고, 팀 내에 조급함이나 혼란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데렉 가드너가 디자인한 경주차는 뛰어난 조직력을 바탕으로 최고의 성능을 냈다. 스튜어트의 티렐-포드 001과 002는 1971년에 총 11회 열린 월드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9회나 완주했다. 스튜어트의 운전기술은 경주차의 완벽함과 조화되어 그에게 여섯 번의 우승과 두 번째 월드 챔피언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그의 시즌 제패는 68년에 죽은 F1의 영웅 짐 클라크에 필적하는 기록이었다.

71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일상적인 변화같이 많은 선수들이 팀을 옮겼다. 70년 시즌의 실패로 신생팀 마치의 크리스 아몬, 조셉 시퍼트, 마리오 안드레티 등이 팀을 떠났다. 아몬은 마트라와 2년 계약을 맺었고, 시퍼트는 BRM에 새 둥지를 틀었다. 안드레티는 페라리로 옮겨 어려서부터 꿈꾸던 야망을 달성하게 되었다. 마치는 70년 시즌에 자동차 수집광 콜린 크랩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마치 701을 몰았던 스웨덴 출신 레이서 로니 피터슨과 2년간 계약을 맺었다. 독립팀을 만들려던 로브 워커는 팀을 세우는 것을 포기하고 존 서티스와 합쳤고, 여기에 브라밤의 드라이버였던 롤프 스토멜른도 합류했다.

그레이엄 힐은 워크스 드라이버로서 브라밤에 합류했고, 그의 팀 동료는 호주인 팀 쉔켄이 되었다. 잭 브라밤은 1970년 말 드라이버로 은퇴했고, 그의 친구 론 토래낙이 다음 해부터 혼자서 그의 F1팀을 관리했다. 장래성 있는 에머슨 피티팔디와 라이네 비젤은 로터스에 그대로 남았다. 반면 콜린 채프먼은 71년 시즌 후반에 호주 F3 전문 드라이버 데이브 워커를 영입해 F1에 출전시킴으로써 팀 성적을 올리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1971년 레이스 시즌은 1월에 부에노스아이레스 1천km 경기에서 이태리 드라이버 이그나지오 지운티가 자신의 페라리 312 스포츠 프로토타입 경주차에서 죽는 비극으로 시작되었다. 잔-피에르 벨토이즈가 몰던 마트라는 연료가 떨어져 드라이버가 차에서 내려 결승점 직선 구간을 가로질러 피트까지 경주차를 밀고 있었다.

당시 1위로 경기를 이끌던 지운티는 천천히 움직이는 파란 마트라 경주차를 보았으나 도로를 가로지르는 차를 피하기에는 너무 늦어 충돌하고 말았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지운티의 페라리는 불꽃에 휩싸였고, 그는 죽고 말았다. 아르헨티나 당국은 벨토이즈의 부주의한 행동으로 사고가 일어났다고 판결했고, 그에게 6개월 면허정지 처분을 내렸다.

많은 팀이 새로운 F1 경주차 만들어
타이어 기술 발전해 슬릭 타이어 등장


새로운 F1 그랑프리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많은 새 모델이 나왔다. 브라밤의 경주차를 디자인했던 랄프 벨라미는 BRM과 티렐 스타일로 차 옆에 연료통을 단 낮고 평평한 맥라렌 M19A를 내놓았다. M19A는 차체 안에 코일 스프링과 쇼크 업소버를 단 혁신적인 서스펜션 시스템을 썼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실제로는 큰 효과가 없어 시즌 후반에 다시 일반적인 서스펜션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페라리 312B2 또한 코일 스프링이 리어 액슬 위에 거의 가로로 놓인 새로운 서스펜션 디자인을 사용했다.

그러나 312B2는 섀시에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성능도 이전의 312B1보다 떨어졌다. 클레이 레가조니는 이런 열악한 조건을 가진 경주차로 3월에 브랜드 해치에서 열린 일반 레이스에 출전해 승리를 차지했다.

로빈 허드는 유선형의 차체제작 전문가 프랭크 코스틴과 함께 새로운 마치 711을 만들었다. 마치 711은 정면에 공기흡입구가 없는 대신 둥근 노즈를 가지고 있었고 그 위 중앙에 타원형의 윙이 달려 있었지만 실제로는 큰 성능을 내지 못했다. 디자인 자체가 엔진 냉각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또한 로터스팀의 테스트에서 마치 711은 앞 디스크 브레이크를 샤프트와 함께 휠 안쪽에 넣었으나 로니 피터슨이 샤프트 파손으로 사고를 당한 이후 다시 브레이크의 위치를 섀시 바깥쪽으로 바꾸었다.

론 토라낙은 바닷가재의 집게발처럼 노즈의 양 옆에 두 개로 나누어진 라디에이터 그릴을 가진 브라밤 BT34를 개발했다. 서티스 TS9는 TS7을 발전시킨 일부 수정 모델이었고, 마찬가지로 BRM P160도 P153의 접지력을 많이 향상시킨 것이었다.

알파로메오는 70년에 맥라렌과 협력한 이후로 71년에 마치와도 비슷한 협정을 맺었다. 그에 따라 영국 마치 경주차는 이태리 엔진을 얹고 알파로메오의 드라이버 안드레아 데 아다미크와 나니 갈리가 함께 달렸다. 그러나 바라던 F1 그랑프리의 우승은 이루지 못했다.

그랑프리 경기에서 던롭 타이어가 철수하자 그들의 테스트 드라이버였던 재키 스튜어트는 굿이어와 3년간 계약을 맺었다. 타이어 기술은 눈에 띄게 발전해 더욱 낮은 편평률을 가진 타이어가 나왔다. 당시 타이어가 경주차 전체 바람저항의 65% 원인이 된다는 연구결과로 인해 타이어의 넓이가 높이의 3배이고 편평율이 30인 타이어도 등장했다. 그러나 바람의 저항을 줄이지 못했고 무게도 크게 줄이지 못했다. 대신 많은 디자이너들은 뒤쪽 타이어를 15인치에서 13인치로 바꾸었다. 이런 노력에 따라 접지력이 많이 높아지고 경주차가 코너를 통과할 때 약 1.6g의 원심력 한계에 버틸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유럽 그랑프리 경기에서는 타이어의 트레드가 완전히 없어지기 시작했는데, 이 타이어를 슬릭 타이어라고 불렀다. 미국의 드래그 레이스용 자동차와 카트 경기에도 사용된 슬릭 타이어의 부드러운 접촉면은 최대의 접지력을 제공했으나 젖은 노면에서는 매우 위험한 단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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