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용차 타고 다니던 시절
2016-02-23  |   45,560 읽음

요즘에는 대부분의 SUV가 도심형으로 만들어지지만 초창기에는 오프로드 주행이라는 용도에 맞추어 개발되었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전장을 누비던 군용차와 만나게 된다. 2차대전 시기, 아메리칸 반탐이 설계한 군용차가 지금의 지프 브랜드가 되었다거나 영국 로버의 모리스 윌크스가 지프 차체를 개조해 최초의 랜드로버를 만든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독일의 겔란데바겐에서 파생된 메르세데스 벤츠 G클래스와 미군용 험비를 민수화한 허머 브랜드도 빼놓을 수 없는 군용차 베이스의 오프로더들. 잘 닦인 도로가 아닌, 극한 상황을 염두에 둔 군용차의 설계는 뛰어난 험로주파성과 내구성을 전제로 하는 만큼 오프로드 마니아들에게 남다른 매력으로 다가선다. 특히 G클래스는 이런 고객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대표적인 모델로 꼽힌다. 지금까지 몇 번의 업데이트가 있었음에도 프레스로 대충 찍어낸 듯한 사각형 보디 패널 디자인을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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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비를 대체하는 오시코시의 JLTV. 도로에서 타고 다닐 물건은 못 된다

 


AM 제너럴에서 시작해 1998년 GM에 팔렸다가 2009년 경영위기 때 사라진 허머는 현대 군용 오프로더 중에서도 돋보이는 존재다. 오래된 군용차를 대체할 목적으로 미군이 계획했던 ‘고기동 다용도 자동차’ 개발계획은 AM 제너럴의 안이 채택되어 M998 험비(HMMWV)가 되었다. 이것을 민수화한 것이 허머(HUMMER)다. 너비 2.2m, 휠베이스만 3.3m가 넘는 거대한 박스형 차체에 V8 5.7L~6.6L 엔진, 포탈 액슬을 사용한 40cm의 최저지상고 등 도로에서 굴리기에 부담스러울 만큼 박력 넘치는 차였던 허머는 GM에 인수된 후 모양만 비슷한 H2, H3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판매 신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종되고 말았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한번 허머 팬들에게 슬픈 소식이 날아들었다. 군용으로 꾸준히 사용 중이던 험비마저도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어느새 미군의 상징이 되어버린 험비는 매우 다양한 버전으로 만들어져 30년간 활약했다. 1970년대 말 설계된 차임을 생각하면 충분히 오래 사용된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전장의 상황이 달라졌고 무엇보다도 IED(급조폭발물)에 대한 높은 방호능력이 요구되고 있다. 급한 대로 험비에 덕지덕지 추가장갑을 붙여 대응했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하고야 만 것에 험비를 대체하기 위한 미군의 새로운 JLTV(Joint Light Tactical Vehicle)에는 보잉-밀렌웍스, 제너럴 다이내믹스-AM 제너럴, 록히드 마틴-BAE 등 다양한 군사기업들이 참여했고 이 중 오시코시(Oshkosh)의 L-ATV가 2012년 우선 선정된 이후 길고 긴 테스트 과정을 거쳐 최근 차세대 미군 전술차로 최종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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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차를 바탕으로 1979년 태어난 G클래스는 지금도 거의 이 모습 그대로다

 

14만 대나 생산되었다는 험비를 대체하는 신차는 5만4,600대가 계획되어 있다. 턱없이 부족해 보이지만 험비보다 덩치가 크고 장갑을 강화하느라 무게가 6톤이 넘는다. 그러면서도 C-130 허큘리스 같은 수송기에 쏙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로 만들었다. 구동계는 GM의 V8 6.6L 듀라맥스 디젤에 앨리슨 자동변속기를 조합해 네바퀴를 굴린다.


이 차는 험비의 후계차이지만 허머의 후계차가 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전장에 맞추어 진화한 새로운 군용차는 지뢰나 대전차 미사일까지 막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에 맞추어 점차 현실성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현재 중동 지역에서 운용 중인 지뢰방호차(MRAP)를 보면 도로에 매설된 폭탄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차체 바닥에 보트처럼 V자 형태의 장갑판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외모는 당장이라도 디셉티콘으로 변신할 것처럼 험악하다. 테러 위협에 시달리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물건을 도로에 타고 나올 리는 없을 것이다. 군용차를 도로에서 몬다는 호사는 이제 지프와 허머, G클래스 초창기에나 가능했던 추억 속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20년 후 우리 아이들에게 ‘그때는 군용차를 민수용으로 타고 다닐 수 있었어’라고 얘기해줄지도 모르겠다. 전쟁이나 테러 위협이 없는, 그래서 예전처럼 군용차를 멋으로 타고 다니던 평화로운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이수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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