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카를 만드는 행복한 사나이 - Loris Bicocchi Supercar Engineer
2009-04-16  |   15,404 읽음

우린 시절 어머니는 나 때문에 속을 썩였어요. 걸핏하면 람보르기니 공장 출입문 앞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죠. 3시간만에 겨우 차 한 대를 본 적도 있어요. 어느 날 보브 월리스가 람보르기니 이슬레로를 몰고 나오더군요. 쭈그려앉은 내 앞에서 요란스럽게 엔진을 부르릉거렸어요.”

로리스 비코치(Loris Bicocchi)의 말이다. 약 40년이 흐른 지금 이태리 산타가타 출신의 이 소년은 수퍼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엔지니어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이력에는 파가니 존다, 코닉세그 CCX, 부가티 EB110, 베이론 등이 끼어 있다.

람보르기니를 대파시킨 18세 소년
그는 람보르기니 공장이 코앞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자동차 실력이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하는 논쟁을 블러일으키기도 했다. 비코치에게 물어보았더니 빙그레 웃으며 “이 일을 위해 태어났다”고 짤막하게 대꾸했다.

비코치의 마음속에는 지금도 차에 대한 정열이 불타고 있다. 작고 날씬한 몸매에 머리가 희끗한 50대 남자.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는 오랜 세월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50대에 접어든 이제는 좋아하는 일을 골라 할 수 있는 느긋한 처지가 되었다. 그는 열흘 전 어느 대형 메이커의 제안을 거절했다. “나를 마케팅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더군요.” 비코치는 이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연히 그의 첫 일자리는 람보르기니였다. 16살에 학업을 포기하고 개발부 창고지기로 들어간 것. 그러자 집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때가 1970년대 초였다. “나는 일단 람보의 문 안에 한발을 들여놨다고 생각했어요.” 사실이 그랬다. 그는 미캐닉의 작업복을 입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오래지 않아 뜻을 이뤘다. “나는 공장 안을 열심히 돌아다녔어요. 허리를 질끈 동여맨 작업복에 때를 묻히고요. 그런 다음 집으로 가서 자랑했죠. ‘엄마, 보세요. 제가 미캐닉이 됐어요.’”

18세 때 돌파구가 열렸다. 비코치는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자원해서 잔파올로 달라라의 작업장으로 갔다. 달라라는 당시 람보르기니의 자문역을 맡고 있었고 지금은 인디카 섀시를 공급하는, 이태리를 대표하는 레이싱 컨스트럭터. 비코치는 월터 울프의 카운타크 앞 브레이크 캘리퍼를 갈게 되었다. “일요일 오전 11시에 일이 끝나서 달라라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가 묻더군요. ‘자네 그 차를 몰 수 있겠나?’” “순간 눈앞에 내 일생이 번개처럼 스치더군요.” 달라라는 비코치가 람보르기니를 몰 자격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싶어 테스트 트랙을 몇 바퀴 돌 것을 주문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어요. 막 운전면허를 땄을 때였으니까요.”

화요일에 작업장으로 돌아간 그는 몹시 힘겨운 하루를 보냈다. 람보르기니를 몰다가 대파시킨 사고를 냈기 때문이다. “상사인 피오리니의 사무실이 훤히 들여다보였어요. 오전 11시 달라라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나는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생각했어요. 내가 그 차를 날려버렸으니 람보르기니에서 보낸 2년의 고생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고요. 오후 4시에 피오리니가 손을 씻고 따라오라고 했어요.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울기 시작했어요.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격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더군요. 5분 뒤쯤 울음을 그치자 그는 뜻밖에 이런 제안을 하는 거예요. ‘자네 테스트 드라이버를 하겠는가?’”

“나는 농담인 줄 알았어요.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이렇게 대답했어요. ‘내가 멍청하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하더군요. ‘로리스, 진정하라구. 많은 사람들이 자네 이야기를 하고 있어. 우리는 자네가 천천히 발전하기를 바랬어. 이제 자네를 가르치는 방법을 생각해야겠네. 이제부터 자네는 모든 것을 배워야 해.’”

차의 일부가 된 듯 행복했던 시간들
비코치는 그대로 했다. 고속 운전법을 배웠고, 기계부문의 이론을 철저히 익혔다. 그러면서 차츰 자신이 하는 일을 이해하게 되었다.

“차와 함께 일하고 있으면 그 차의 일부가 된 것 같아 행복했어요. 요즘에는 그렇게 차와 접촉할 기회가 없어 아쉬울 정도입니다.” 비코치의 말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월리스와도 일했다. “약간 뒤쳐져 항상 그의 곁을 따라다녔지요. 그럼에도 정말 황홀했어요! 시간이 나면 그의 차를 닦았지요. 월리스는 훌륭한 드라이버였지만, 위대한 스승은 아니더군요.”

몇 년 뒤 비코치는 인생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1989년 기술이사 파울로 스탄차니가 부가티 EB110 사업에 그를 끌어들인 것.

“스탄차니가 말하더군요. ‘좀더 좋은 차를 몰아봐요.’ 처음에 공장 청소를 하고 벽에 페인트를 칠했어요. ‘내가 미쳤나봐.’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지요. 한데 1년 반 뒤 첫차를 만들었고, 그때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고 깨달았어요. 거기서 내 일생에 가장 좋은 교육을 받았답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어요.”

비코치는 네바퀴굴림을 비롯한 신기술을 배웠고, 또다른 선생을 만났다. 바로 부가티의 비정규 자문역인 장-필립 비테코크다. 그는 미쉐린에 튼튼한 연줄이 있었다.

황홀한 5년이 지나고 1994년에 부가티는 파산했다. 아내와 어린 자녀가 있는 비코치는 실직했다. 페라리가 일자리를 제의했지만 거절했다. 아내 마리안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필립이 하는 일을 하고 싶소.” 그래서 미쉐린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타이어와 서스펜션의 차이, 그리고 타이어 기능을 3주일 동안 배울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다. 당연히 그렇게 했다.

페라리에서 일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사람이 많다. 그런데 비코치가 덤벼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유명한 수퍼카 메이커에는 한번도 들어간 적이 없는 이유는?

“나는 페라리를 아주 존경하지만 작은 팀을 원해요. 대형 메이커에는 브레이크부, 서스펜션부 등 많은 부서로 나누어져 있지요. 모두 훌륭한 일을 하지만 나는 조화로운 차를 원했습니다. 대형 메이커에서는 모델 전체를 빚어낼 기회가 없어요.”

그 기회가 1996년에 찾아왔다. 그때 호라치오 파가니가 비코치를 불러 완전신형 수퍼카 존다 C12를 맡겼다. 10여년이 흐른 지금 나이 50인 비코치는 손자까지 보았다. “나는 이 직업에 일생을 투자했어요. 오랜 기간 아주 적은 수입으로 살아야 했지요.”

부가티와 파가니에서 일하는 중간에 비코치는 모나코 레이싱팀에서 일했다. 부가티가 직접 만든 유일한 EB110 경주차를 투입했다. 동시에 1년 중 5개월은 브루나이로 건너가 국왕의 차를 관리했다. 브루나이 왕은 1천800대가 넘는 자동차 컬렉션을 자랑했다. 그는 전시차를 관리하며 관리 목록을 작성했다.

“그의 컬렉션에는 다우어 962가 5대, 부가티 EB110 SS 5대, 람보르기니 37대가 들어 있어요…. 모두 에어컨이 나오는 룸에 전시되어 있어요. 맥라렌 F1을 비롯해 모든 차를 몰아봤습니다. 나는 장난감 가게에 들어간 어린애 같았지요. 게다가 보수도 두둑했답니다.”

1996년 호라치오가 전화를 걸어왔다. 실력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 미쉐린·빌스타인과 힘을 합쳐 목표를 달성했다. “존다는 내게 진정한 첫 프로젝트였어요. 파가니와 함께 일할 때가 정말 재미있었지요. 그는 완벽한 것을 원했어요.” 비코치는 지금도 이 차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2년이 흐른 지금도 아주 뛰어나요.” 과연 그렇다. 호라치오 파가니는 최고의 수퍼카를 설계·제작했다. 그리고 로리스 비코치가 그 작업의 대부분을 담당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균형을 살렸고, 경탄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

아직도 열정 넘치는 그, 후계자 찾고 싶어
이번에는 신생 소규모 수퍼카 메이커 코닉세그가 그를 불렀다. 비코치는 2004년까지 신형 부가티 베이론을 개발하던 폭스바겐에서 일하는 틈틈이 스웨덴의 코닉세그와 작업을 했다.  베이론의 섀시는 달라라가 공급했다. 비코치는 1천 마력짜리 엔진 개발에 참여했다. 그의 임무는 1천 마력을 살리고, 드라이버가 그 파워를 다스릴 자신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퍼카 개발에는 위험이 따른다. 이태리의 나르도 테스트 트랙은 1주 11.3km. 거기서 시속 388km로 달리다 왼쪽 앞 타이어가 터진 경험도 했다. 떨어진 윙과 보닛이 윈드실드에 걸려 시야를 막았다. 그 순간 베이론은 아름코 가드레일을 들이받았고, 헬멧이 옆창을 깨뜨렸다. 이때 기압이 뚝 떨어지면서 한쪽 고막이 찢어졌다.

속도를 줄이기 위해 가드레일을 긁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다시 가드레일에 접근했지만 각도가 너무 커 튕겨나오고 말았어요. 두 번째는 매끈하게 각도를 잡아 가드레일을 따라 달리다 멈췄지요.” 그는 스티어링 비중과 감각에 집착하는 운전자세가 문제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베이론에서는 스티어링 토션바에 접근하려면 내부 아치의 플랩을 통해야 하는데 그 플랩이 타이어를 쓸면서 사태가 벌어졌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감칠맛 나는 섀시의 기본 요소는 무엇인가? 스티어링 피드백과 노면의 접촉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비코치는 말한다.

“스티어링이 좋으면 다른 부분도 모두 좋아지는 느낌이 들어요. 다음으로 앞뒤 밸런스, 뒤이어 제동 때의 수직 조정력과 안정성이에요.”

물론 모든 것이 비코치의 머릿속에 담겨 있다. 30년간 힘들여 쌓은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다. “지금 나는 50이에요. 그냥 즐기고 싶네요. 내가 원하는 바를 거의 결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요즘에는 작은 시티카를 개발하고 있다. 그립을 줄여 연비를 높이면서도 안정성을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후계자를 키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기술과 경험을 물려주고 싶다. 하지만 아직 순수한 정열을 품은 후보를 찾지 못했다.

비코치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드라이빙을 사랑하는 자세에도 변함이 없다. “차를 몰고 산길을 오르면 지금도 벅찬 감동을 느껴요. 팔의 솜털이 곤두선답니다. 그렇지 않을 때가 되면 일을 그만둬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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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89년]비코치는 카트로 운전을 시작했다. 16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람보르기니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처음에는 개발부의 창고지기였지만 곧 미캐닉으로 올라섰고, 20살이 되기 전에 테스트 드라이버가 되었다. 푸른 작업복을 입고 막강 람보르기니 LM002 및 카운타크와 포즈를 취했다[1989∼94년]비코치는 부가티 EB110의 테스트 드라이버(위와 왼쪽)로 발탁되었다. 엔지니어 몰리나리 및 부가티 EB110 프로토타입과 함께[1994∼96년]부가티를 나온 뒤 모나코 레이싱팀에 들어가 EB110 경주차를 몰았다. 경주차로 개조해 시속 344km를 돌파하자 동료들이 헹가래를 치고 있다[1996∼2000년]1996년 비코치는 호라치오 파가니의 제의를 받아들여 새로운 수퍼카의 섀시 개발 작업을 시작했다. 거기서 수퍼카의 새로운 벤치마크인 파가니 존다 C12가 태어났다[2000∼06년]그를 노리는 눈은 한둘이 아니었다. 크리스티안 폰 코닉세그는 C12 개발 엔지니어가 필요했다. 비코치가 바로 그 인물. 비코치는 코닉세그 경주차(사진)도 개발했다[2000∼04년]폭스바겐에서 부가티 베이론 개발작업을 도왔다. 개발과제는 운전자가 다룰 수 있는 1천 마력짜리 베이론을 만드는 것이었다. 비코치가 개발기술 자문역을 맡았다[2006∼08년]요즘 비코치는 자기 마음에 드는 일을 골라 할 수 있다. 최근의 프로젝트는 KTM X-Bow의 개발기술 자문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