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자동차상식

수퍼카를 만드는 행복한 사나이 - Loris Bicoc.. 2009-04-16
우린 시절 어머니는 나 때문에 속을 썩였어요. 걸핏하면 람보르기니 공장 출입문 앞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죠. 3시간만에 겨우 차 한 대를 본 적도 있어요. 어느 날 보브 월리스가 람보르기니 이슬레로를 몰고 나오더군요. 쭈그려앉은 내 앞에서 요란스럽게 엔진을 부르릉거렸어요.” 로리스 비코치(Loris Bicocchi)의 말이다. 약 40년이 흐른 지금 이태리 산타가타 출신의 이 소년은 수퍼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엔지니어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이력에는 파가니 존다, 코닉세그 CCX, 부가티 EB110, 베이론 등이 끼어 있다. 람보르기니를 대파시킨 18세 소년그는 람보르기니 공장이 코앞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자동차 실력이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하는 논쟁을 블러일으키기도 했다. 비코치에게 물어보았더니 빙그레 웃으며 “이 일을 위해 태어났다”고 짤막하게 대꾸했다. 비코치의 마음속에는 지금도 차에 대한 정열이 불타고 있다. 작고 날씬한 몸매에 머리가 희끗한 50대 남자.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그는 오랜 세월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50대에 접어든 이제는 좋아하는 일을 골라 할 수 있는 느긋한 처지가 되었다. 그는 열흘 전 어느 대형 메이커의 제안을 거절했다. “나를 마케팅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더군요.” 비코치는 이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연히 그의 첫 일자리는 람보르기니였다. 16살에 학업을 포기하고 개발부 창고지기로 들어간 것. 그러자 집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때가 1970년대 초였다. “나는 일단 람보의 문 안에 한발을 들여놨다고 생각했어요.” 사실이 그랬다. 그는 미캐닉의 작업복을 입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오래지 않아 뜻을 이뤘다. “나는 공장 안을 열심히 돌아다녔어요. 허리를 질끈 동여맨 작업복에 때를 묻히고요. 그런 다음 집으로 가서 자랑했죠. ‘엄마, 보세요. 제가 미캐닉이 됐어요.’” 18세 때 돌파구가 열렸다. 비코치는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자원해서 잔파올로 달라라의 작업장으로 갔다. 달라라는 당시 람보르기니의 자문역을 맡고 있었고 지금은 인디카 섀시를 공급하는, 이태리를 대표하는 레이싱 컨스트럭터. 비코치는 월터 울프의 카운타크 앞 브레이크 캘리퍼를 갈게 되었다. “일요일 오전 11시에 일이 끝나서 달라라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가 묻더군요. ‘자네 그 차를 몰 수 있겠나?’” “순간 눈앞에 내 일생이 번개처럼 스치더군요.” 달라라는 비코치가 람보르기니를 몰 자격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싶어 테스트 트랙을 몇 바퀴 돌 것을 주문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어요. 막 운전면허를 땄을 때였으니까요.”화요일에 작업장으로 돌아간 그는 몹시 힘겨운 하루를 보냈다. 람보르기니를 몰다가 대파시킨 사고를 냈기 때문이다. “상사인 피오리니의 사무실이 훤히 들여다보였어요. 오전 11시 달라라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나는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생각했어요. 내가 그 차를 날려버렸으니 람보르기니에서 보낸 2년의 고생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고요. 오후 4시에 피오리니가 손을 씻고 따라오라고 했어요.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울기 시작했어요.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격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더군요. 5분 뒤쯤 울음을 그치자 그는 뜻밖에 이런 제안을 하는 거예요. ‘자네 테스트 드라이버를 하겠는가?’”“나는 농담인 줄 알았어요.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이렇게 대답했어요. ‘내가 멍청하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하더군요. ‘로리스, 진정하라구. 많은 사람들이 자네 이야기를 하고 있어. 우리는 자네가 천천히 발전하기를 바랬어. 이제 자네를 가르치는 방법을 생각해야겠네. 이제부터 자네는 모든 것을 배워야 해.’” 차의 일부가 된 듯 행복했던 시간들비코치는 그대로 했다. 고속 운전법을 배웠고, 기계부문의 이론을 철저히 익혔다. 그러면서 차츰 자신이 하는 일을 이해하게 되었다. “차와 함께 일하고 있으면 그 차의 일부가 된 것 같아 행복했어요. 요즘에는 그렇게 차와 접촉할 기회가 없어 아쉬울 정도입니다.” 비코치의 말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월리스와도 일했다. “약간 뒤쳐져 항상 그의 곁을 따라다녔지요. 그럼에도 정말 황홀했어요! 시간이 나면 그의 차를 닦았지요. 월리스는 훌륭한 드라이버였지만, 위대한 스승은 아니더군요.”몇 년 뒤 비코치는 인생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1989년 기술이사 파울로 스탄차니가 부가티 EB110 사업에 그를 끌어들인 것. “스탄차니가 말하더군요. ‘좀더 좋은 차를 몰아봐요.’ 처음에 공장 청소를 하고 벽에 페인트를 칠했어요. ‘내가 미쳤나봐.’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지요. 한데 1년 반 뒤 첫차를 만들었고, 그때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고 깨달았어요. 거기서 내 일생에 가장 좋은 교육을 받았답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어요.”비코치는 네바퀴굴림을 비롯한 신기술을 배웠고, 또다른 선생을 만났다. 바로 부가티의 비정규 자문역인 장-필립 비테코크다. 그는 미쉐린에 튼튼한 연줄이 있었다.황홀한 5년이 지나고 1994년에 부가티는 파산했다. 아내와 어린 자녀가 있는 비코치는 실직했다. 페라리가 일자리를 제의했지만 거절했다. 아내 마리안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필립이 하는 일을 하고 싶소.” 그래서 미쉐린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타이어와 서스펜션의 차이, 그리고 타이어 기능을 3주일 동안 배울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다. 당연히 그렇게 했다. 페라리에서 일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사람이 많다. 그런데 비코치가 덤벼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유명한 수퍼카 메이커에는 한번도 들어간 적이 없는 이유는? “나는 페라리를 아주 존경하지만 작은 팀을 원해요. 대형 메이커에는 브레이크부, 서스펜션부 등 많은 부서로 나누어져 있지요. 모두 훌륭한 일을 하지만 나는 조화로운 차를 원했습니다. 대형 메이커에서는 모델 전체를 빚어낼 기회가 없어요.”그 기회가 1996년에 찾아왔다. 그때 호라치오 파가니가 비코치를 불러 완전신형 수퍼카 존다 C12를 맡겼다. 10여년이 흐른 지금 나이 50인 비코치는 손자까지 보았다. “나는 이 직업에 일생을 투자했어요. 오랜 기간 아주 적은 수입으로 살아야 했지요.”부가티와 파가니에서 일하는 중간에 비코치는 모나코 레이싱팀에서 일했다. 부가티가 직접 만든 유일한 EB110 경주차를 투입했다. 동시에 1년 중 5개월은 브루나이로 건너가 국왕의 차를 관리했다. 브루나이 왕은 1천800대가 넘는 자동차 컬렉션을 자랑했다. 그는 전시차를 관리하며 관리 목록을 작성했다.“그의 컬렉션에는 다우어 962가 5대, 부가티 EB110 SS 5대, 람보르기니 37대가 들어 있어요…. 모두 에어컨이 나오는 룸에 전시되어 있어요. 맥라렌 F1을 비롯해 모든 차를 몰아봤습니다. 나는 장난감 가게에 들어간 어린애 같았지요. 게다가 보수도 두둑했답니다.”1996년 호라치오가 전화를 걸어왔다. 실력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 미쉐린·빌스타인과 힘을 합쳐 목표를 달성했다. “존다는 내게 진정한 첫 프로젝트였어요. 파가니와 함께 일할 때가 정말 재미있었지요. 그는 완벽한 것을 원했어요.” 비코치는 지금도 이 차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2년이 흐른 지금도 아주 뛰어나요.” 과연 그렇다. 호라치오 파가니는 최고의 수퍼카를 설계·제작했다. 그리고 로리스 비코치가 그 작업의 대부분을 담당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균형을 살렸고, 경탄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 아직도 열정 넘치는 그, 후계자 찾고 싶어이번에는 신생 소규모 수퍼카 메이커 코닉세그가 그를 불렀다. 비코치는 2004년까지 신형 부가티 베이론을 개발하던 폭스바겐에서 일하는 틈틈이 스웨덴의 코닉세그와 작업을 했다.  베이론의 섀시는 달라라가 공급했다. 비코치는 1천 마력짜리 엔진 개발에 참여했다. 그의 임무는 1천 마력을 살리고, 드라이버가 그 파워를 다스릴 자신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퍼카 개발에는 위험이 따른다. 이태리의 나르도 테스트 트랙은 1주 11.3km. 거기서 시속 388km로 달리다 왼쪽 앞 타이어가 터진 경험도 했다. 떨어진 윙과 보닛이 윈드실드에 걸려 시야를 막았다. 그 순간 베이론은 아름코 가드레일을 들이받았고, 헬멧이 옆창을 깨뜨렸다. 이때 기압이 뚝 떨어지면서 한쪽 고막이 찢어졌다. 속도를 줄이기 위해 가드레일을 긁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다시 가드레일에 접근했지만 각도가 너무 커 튕겨나오고 말았어요. 두 번째는 매끈하게 각도를 잡아 가드레일을 따라 달리다 멈췄지요.” 그는 스티어링 비중과 감각에 집착하는 운전자세가 문제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베이론에서는 스티어링 토션바에 접근하려면 내부 아치의 플랩을 통해야 하는데 그 플랩이 타이어를 쓸면서 사태가 벌어졌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감칠맛 나는 섀시의 기본 요소는 무엇인가? 스티어링 피드백과 노면의 접촉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비코치는 말한다. “스티어링이 좋으면 다른 부분도 모두 좋아지는 느낌이 들어요. 다음으로 앞뒤 밸런스, 뒤이어 제동 때의 수직 조정력과 안정성이에요.”물론 모든 것이 비코치의 머릿속에 담겨 있다. 30년간 힘들여 쌓은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다. “지금 나는 50이에요. 그냥 즐기고 싶네요. 내가 원하는 바를 거의 결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요즘에는 작은 시티카를 개발하고 있다. 그립을 줄여 연비를 높이면서도 안정성을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후계자를 키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기술과 경험을 물려주고 싶다. 하지만 아직 순수한 정열을 품은 후보를 찾지 못했다. 비코치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드라이빙을 사랑하는 자세에도 변함이 없다. “차를 몰고 산길을 오르면 지금도 벅찬 감동을 느껴요. 팔의 솜털이 곤두선답니다. 그렇지 않을 때가 되면 일을 그만둬야지요.”
[ 도쿠다이지의 초보운전교실8]대낮보다는 신중하게 - .. 2009-04-10
밤길에서는 낮에 비해 시력이 떨어진다. 헤드램프를 켜서 밝은 범위가 제한되고, 현실적으로 시가지에서는 로빔만으로 달리게 되는 경우가 많아 하이빔을 켤 때보다 시야가 더 좁다. 불빛이 없는 자전거와 검은색 옷을 입은 보행자도 알아보기가 힘들다.주위가 잘 보이지 않아 예측하기가 어려우므로 밤길에서는 속도를 줄이고 달리는 것이 상책이다. 낮 운전보다 신중하게, 주위를 잘 살피면서 운전해야 한다. 자기 차의 존재를 주위에서 알게 하는 것도 중요하므로 헤드램프로 자기 차를 어필한다. 특히 같은 도로라도 밤에는 낮과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 두자. 따라서 운전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밤길운전에서는 다른 차를 헤드램프 빛의 움직임만으로 알아 봐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룸미러와 사이드 미러에 나타나는 헤드램프 빛만으로는 정확한 거리를 알 수 없다. 되도록 상대 차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상대에게 자기 뜻을 알리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헤드램프 불빛에만 의지하면 위험할 수 있다. 언제 보행자가 뛰어나오고 자전거가 달려들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신중하게 운전하자. 헤드램프를 켜고 달린다01 헤드램프는 조금 일찍 켜자저녁 무렵, 주위의 차들이 헤드램프를 켜고 있지 않아도 조금 일찍 켜는 것이 안전하다. 스몰 라이트만 켜고 달리는 것은 좋지 않다. 02 하이빔과 로빔 바꿔 켜기보통 때는 로빔, 어두워서 앞이 제대로 안 보이는 도로에서는 하이빔으로 상황에 따라 바꿔 가며 쓰는 것이 좋다. 하이빔으로 달릴 때는 마주 오는 차가 생기면 로빔으로 바꾸는 것이 운전매너이다. 밤길운전에서 조심할 일01 자기 차의 존재를 알려야헤드램프는 자기 차의 존재를 알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저녁 무렵 이른 시간대부터 헤드램프를 켜고, 신호를 기다릴 때도 끄지 말자. 02 깜빡이는 조금 일찍 켜자주위의 차들에게 자기 차의 움직임을 알리기 위해 깜빡이를 조금 일찍 켜는 습관을 들이자. 뒤차뿐 아니라 마주 오는 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03 실내등은 되도록 꺼 놓아야실내등을 켜면 앞창을 통한 시야가 나빠진다. 달릴 때 필요하면 최소한으로 켜고, 장시간 켜 놓는 일은 없도록 한다. 04 마주 오는 차의 헤드램프가 눈부실 때는?마주 오는 차의 헤드램프가 하이빔이어서 눈부실 때는 불빛을 직시하지 않게 눈길을 조금 옆으로 피하고 지나치면 된다. 핵심은 빛이다01 미러의 빛으로 상대를 인식빛으로 다른 차의 움직임을 파악한다. 되도록 일찍 상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02 보행자와 자전거불빛이 없는 자전거나 검은색 옷을 입은 보행자는 알아보기 힘들다는 점에 유의하며 운전한다.03 증발현상에 주의해야자기 차와 대향차의 헤드램프 사이에 있는 사람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증발현상이라 한다. 도로를 횡단 중인 보행자가 센터라인 부근에 서 있으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기 쉬운데, 아주 위험하다. 보행자가 빛 속에 들어가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대향차가 오면 무조건 속도를 낮춘다. 이런 곳에서는 주의하자01 코너 안쪽이 잘 안 보인다코너에서는 안쪽에 있는 보행자가 잘 안 보인다는 점을 꼭 명심하자. 02 뜻밖에 무서운 저녁나절밝기가 급하게 변하는 저녁나절은 눈이 쉽게 적응하지 못하므로 조심해서 운전한다. 03 술 취한 사람도 조심해야밤에는 예기치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 술 취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무엇보다 신중해야 한다. One Step Up밤에는 빛으로   커뮤니케이션 한다운전에서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이다. 밤길운전에서는 헤드램프와 테일램프, 경고등처럼 빛을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이 큰 구실을 한다. 조금 일찍 켜는 깜빡이도 다른 차에 이쪽 움직임을 예측시키기 위한 것이고, 헤드램프를 깜빡거려 상대에게 길을 양보하거나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다른 차와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면 베테랑 드라이버에 가까워진다.    
경과실 사고도 형사처벌 받을 수 있다 - 교특법 위헌 .. 2009-04-10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은 자동차사고 피해자가 가해운전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국가에서도 형사처벌할 수 없도록 규정한 법이다. 1982년부터 시행된 이 법에 따라 가해운전자가 종합보험(대인배상Ⅱ)에 가입했을 때에도 피해자와 합의한 것으로 간주하여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다만 사망 및 뺑소니 사고이거나 음주운전, 신호위반, 중앙선침범, 과속 등의 11대 중과실사고는 제외됐다. 그런데 최근 헌법재판소가 피해자가 중상해를 입었는데도 종합보험 가입 등을 이유로 가해운전자에 대한 공소를 제기할 수 없도록 한 부분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위의 13가지 외에 경과실 사고라 해도 피해자가 중상해를 입었다면 가해운전자는 형사책임을 지게 된다.적극적인 응급조치가 중상해를 막는다‘중상해’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검찰은 ‘중상해’에 대한 임시 적용기준을 발표했다. 첫째는 뇌 또는 주요 장기에 대한 중대한 손상, 둘째는 사지절단 등 신체 중요부분의 상실이나 중대변형 또는 시각· 청각·언어·생식 등 신체기능의 영구 상실, 셋째는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중증의 정신장애, 하반신 마비 등 완치가능성이 희박한 중대 질병을 가져온 경우 등이다. 즉 치료기간과 노동력상실률, 의학전문가의 의견과 사회통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개별 사안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일로부터 해당 법조항은 무효화됐기 때문에 이제는 피해자에게 중상해를 입히는 교통사고를 내면 비록 경과실사고라도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운전자는 사고를 내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평소 교통법규를 준수하며 조심 운전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고는 운전자가 조금만 여유를 갖고 차분하게 운전을 하면 막을 수 있는 것들이다. 만약 부득이하게 사고를 냈다면 신속하고도 정성껏 피해자를 구호해야 한다. 적극적이고 적절한 응급조치에 따라 피해자가 ‘중상해’로 악화되지 않고 ‘경상해’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성어린 구호활동은 피해자가 나중에 감정악화로 인해 고액의 형사합의금을 요구하는 사례를 막아 주기도 한다. 가해운전자가 공소를 제기당하지 않으려면 형사합의를 해야 하는데 일찍부터 피해자의 감정을 건드려서 좋을 일은 없다. 그러므로 교통사고가 나면 즉시 정차하여 피해자 과실이나 위법성 여부를 따지지 말고 피해자 구호부터 해야 한다. 다만 뒤에 분쟁이 생길 때를 대비하여 증인이나 증거를 철저히 확보할 필요는 있다. 최소한 경찰 신고, 목격자 연락처 확인, 사고현장 촬영(표시) 등은 꼭 해 두어야 나중에 억울한 일을 피할 수 있다. 간혹 일부러 자동차와 경미한 접촉사고를 낸 뒤 경찰 미신고를 미끼로 운전자를 협박하거나 ‘보험회사에 신고만 해 주면 된다’는 식으로 선심 쓰는 듯한 자해공갈범이 있다. 이번 결정에 따라 자해공갈범이 ‘3주 이상 진단이면 중상이다’며 협박을 해올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단순히 3주 이상의 진단만 가지고 ‘중상해’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 두자. 피해자 측의 동기가 의심스러울 때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경찰 신고를 하겠다고 역공(?)하거나 보상직원에게 알려 긴밀하게 협조(조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도로교통법상 인사사고는 경찰신고가 의무화되어 있음). 아울러 인사사고를 냈을 때의 벌금과 형사합의금을 보상하는 보험상품(운전자보험 등)에 미리 가입해 두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전상귀 변호사의 알쏭달쏭 법률이야기 - 집 나간 아내의.. 2009-04-10
Q. 알아주는 미인인 초선은 중고자동차 판매를 하는 두보와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선은 결혼하기 전에 사귀던 이백을 결혼 후에도 계속해서 만나고 있습니다. 두보는 내심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초선이 너무 미인이고 집안 살림도 잘하므로 모른 척 하고 있었습니다. 중고차를 수입해서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기는 하지만 초선의 행동에 허전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초선은 이백과의 정이 더욱 깊어졌고 대낮에도 아이들을 팽개치고 이백과 밀회를 즐기곤 했습니다. 두보는 이런 초선의 외도에 마음이 상하여 술을 마시며 질투심에 서시라는 여자도 사귀어 보았지만 초선에게 궂은 소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두보는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술에 빠져 들었습니다. 두보는 이태리와 일본에서 수입한 자동차 20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나빠지면서 자동차 매매가 잘되지 않아 두보의 영업은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초선은 아예 집을 나가 이백과 동거를 시작했지만, 용기가 없는 두보는 초선에 대하여 아무 말 못하고 속만 끓이고 있습니다. 사업도 안 되고 가정생활도 파탄이 난 두보는 시름시름 앓다가 완전히 병상에 누웠습니다. 1년이나 병원에 있었지만 초선은 문병 한 번 오지 않고 아이들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초선이 집을 나간 지 2년이 되어 갈 무렵 두보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두보에게는 이태리 및 일본차가 10대씩 있었고, 빚은 얼마인지 잘 모릅니다. 두보가 사망했다는 소문을 들은 초선은 이백과 함께 자신이 상속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미 집을 나가서 다른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초선에게 상속권이 있을까요? 또 측정되지 않은 빚이 있을 경우 상속인은 어떠한 조치를 해야 할까요?| 해설 | 이백과 동거를 하고 있더라도 초선은 두보의 상속인이 됩니다. 도덕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호적을 기준으로 상속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에 초선은 두보의 아이들과 함께 상속을 받게 되고, 그녀가 법정대리인으로서 아이들의 상속분을 관리하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또한 두보의 돌발부채를 감안하여 초선은 법원에 한정승인신청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와 같은 불합리한 결과가 난 것은 두보가 이혼소송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용기가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문의 (02)2693-3004글 전상귀(변호사 jerry-honey@hanmail.net)일러스트 이은경
수퍼카의 한계를 다시 쓰는 튜너 - Edo Compet.. 2009-04-09
국내에서 튜닝은 크게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니다. 튜닝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소비자들이 많고, 차종의 다양성도 아직 확보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튜닝하는 차들도 현대의 스포츠카가 대부분이고, 튜닝 내용도 바퀴와 서스펜션 등으로 극히 한정적이다. 또 튜닝 기술이 선진국에 많이 뒤진 상태이고 변변한 튜너도 없다. 하지만 미국이나 독일에서는 완성차 메이커보다 훨씬 많은 튜너들이 존재한다. 튜너의 종류도 다양해 완성차와 협연관계를 맺고 있는 워크스 튜너(works tuner)를 비롯해서 외관, 내장, 엔진, 구동계 등의 전문 튜너, 소규모 개라지 형태, 완성차 업체에서 프레임과 엔진 등을 따로 사와 차를 만드는 튜너도 있다.  특히 고성능 모델이 많은 독일에는 기술력이 뛰어난 튜너들이 많다. 지난 1월호부터 본지에 소개한 브라부스와 겜발라, 하만도 독일 튜너이다. 독일은 완성차뿐만 아니라 튜닝사업에서도 세계 최고 기술력을 자랑하고, 튜닝의 사업적 역량에서도 가장 앞서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에도 컴페티션(Edo Competition)도 독일 튜너이다. 너무 독일 튜너에게 치중된 감이 있지만, 독일은 그만큼 튜닝에 있어서 선도적인 입장에 있다.  엔진계통 튜닝의 최고봉에도 컴페티션도 다른 독일 튜너와 마찬가지로 모터스포츠에서 출발했다. 창업자인 에도 카라페코비치(Edo Karabegovic)는 독일의 유명한 페라리 워크숍(Ferrari Workshop)을 수료했다. 그리고 세계 각지를 돌며 레이싱 팀을 만든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페라리와 포르쉐 모델의 동력 및 구동계를 강화하고 비주얼을 바꾼 레이싱 모델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8~2000년 에도 컴페티션은 유럽의 자동차경주인 ‘팀 페라리 포르쉐 챌린지’(Team Ferrari Porsche Challenge)에서 그들이 튜닝한 모델로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다. 2001년에는 레이싱을 접고 레이싱 기술을 바탕으로 한 스트리트 머신 포르쉐 911(966) GT3R을 발표한다. 이 모델이 에도 컴페티션 최초의 판매 모델이다. 이후 에도 컴페티션은 모터스포츠에서 출발한 튜너인 만큼 강력한 주행성능을 내는 특화된 모델들을 내놓는다. 하지만 에도 컴페티션은 아무 차나 손을 대지 않고 고성능의 정점에 있는 페라리, 포르쉐, 람보르기니, 마세라티 등의 차들만 튜닝한다. 튜닝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대중 모델을 튜닝해야 하는데, 에도 컴페티션은 ‘스트리트 모터스포츠’를 표방하며 모터스포츠에서 그들이 쌓아온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튜닝카를 고가에 판매하고 파츠도 따로 팔아 돈을 번다. 에도 컴페티션의 튜닝 프로그램은 다양하다. 림과 휠 세트, 에어로다이내믹 보디 키트, 스포츠 섀시, 흡ㆍ배기 시스템, 엔진 출력 강화 시스템 등의 특별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독특한 인테리어도 만들고 있다. 2006년 만든 마세라티 MC12 XX를 예로 들면 V12 6.0L 630마력 엔진을 170마력 높여 800마력으로 만들었다. 실린더와 피스톤을 강철로 주조해서 다시 만들고, 캠샤프트와 밸브 스프링, 커넥팅 로드, 오일 쿨링 피스톤 파이프, 배기 매니폴드를 새로 만들었다. 여기에 스포츠 촉매와 컨버터, 에어 필터를 달고 오일펌프와 개스킷, 베어링 등도 모두 갈아 끼웠다. 엔진 자체를 새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브레이크 시스템도 세라믹으로 만들어 앞 396mm, 뒤 360mm를 끼웠다. 휠도 경량 고강성으로 바꿨다. 결과적으로 MC12 XX는 최고시속이 390km에 이르고 0→시속 100/200km 가속은 3.2/9.0초이다. 시속 300km까지도 19.0초에 달린다. 마세라티 MC12는 단 25대만 생산됐다. 여기에 ‘XX’가 붙은 모델은 MC12 중에서도 가장 빠른 차다. 터보나 수퍼차저를 붙이지 않고도 170마력이나 끌어 올릴 정도로 에도 컴페티션은 엔진계통 튜닝에 특화된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술력이 그들의 가장 큰 강점이고, 그들이 튜닝한 차는 같은 모델 중에서 가장 높은 출력을 낸다. 수퍼카를 ‘울트라 수퍼카’로 만드는 튜너가 에도 컴페티션이다.  에도 컴페티션 www.edo-competition.de에도 컴페티션 주요 모델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 LP710 아우디지에르(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 LP640)엔진 V12 6.5L 0→시속 100km 가속 3.2초 최고출력 710마력  최고시속 360km 벤틀리 컨티넨탈 GT 스피드엔진 W12 6.0L 바이터보 0→시속 100km 가속 4.2초 최고출력 680마력 최고시속 340km 페라리 FXX(엔초 페라리)엔진 V12 6.3L 최고출력 800마력 최고시속 347km 포르쉐 카레라 GT엔진 V10 5.7L0→시속 100km 가속 3.4초 최고출력 670마력 최고시속 345km
심금을 울리는 리얼 인생역전 스토리 - 자동차판 신데렐.. 2009-04-07
안방극장을 강타하는 드라마 스토리는 뻔하다. 대부분 나쁜 놈이 좋은 놈을 괴롭히다가 전세역전으로 끝나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약간의 양념을 넣어 맛깔스런 스토리를 완성한다. 좋은 놈의 통쾌한 복수를 돕는 ‘실장님’은 신데렐라 동화에 나오는 ‘왕자님’의 대리인으로 이야기의 큰 축이다. 지어낸 것이 아니라 현실에 그대로 녹아든 이야기라면 감동은 배가된다.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가 실장님(든든한 모기업)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나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자동차 회사들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람보르기니이태리의 열정을 사랑한 페르디난트 피에히“당신은 차를 모르니 트랙터나 모시오.” 엔초 페라리의 이 빈정거림이 오늘의 람보르기니를 있게 했다. 람보르기니의 삶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1916년 이태리 북부의 농가에서 태어나 기계 만드는 것을 즐겼던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볼로냐 기술학교를 마치고 2차대전 때 정비병으로 복무하면서 기술을 익혔다. 전쟁이 끝나자 망가진 군용차를 이용해 트랙터를 만들어 팔면서 재미를 보았고, 1954년 무렵에는 이태리에서 가장 큰 트랙터 회사의 주인이 되었다.   기계라면 모든 것을 즐겼던 람보르기니는 당시 스포츠카의 대명사로 군림했던 페라리 모델을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250GT를 즐겨 탔는데 종종 클러치가 말썽을 부렸다. 매니아의 한 사람으로 이를 개선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직접 엔초 페라리(페라리 설립자)를 찾았으나 트랙터나 만들라는 소리를 듣자 페라리를 능가하는 수퍼카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페라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람보르기니의 이런 말을 곧이듣지 않았고 심지어 미친 사람이라는 핀잔까지 주었다. 하지만 람보르기니는 1962년부터 수퍼카 프로젝트를 차근히 진행해 1963년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딴 ‘오토모빌리 페루치오 람보르기니’(Automobili Ferrucio Lamborghini)를 설립했다. 페라리를 뛰어넘어야 할 숙명을 타고 났기에 그의 첫 작품인 350GTV는 V12 3.5L 360마력 엔진에 5단 수동변속기를 썼다. 4단 수동변속기와 V12 3.3L 엔진을 얹었던 페라리의 기함 275GT를 능가하는 성능이었다. 이듬해 등장한 양산차 350GT는 발표와 동시에 2년치 주문이 밀릴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람보르기니는 350GT의 성공을 기회삼아 매년 새 모델을 내놓는 등 공격적인 모습이었다. 그 중에서도 1966년 발표된 미우라 P400과 1971년 등장한 카운타크(경영상의 어려움으로 양산은 1973년부터 시작되었다)는 페라리의 콧대를 꺾는 것은 물론이고 20세기 최고의 자동차로 꼽힐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눈덩이처럼 불어난 개발비는 부메랑이 되어 회사 재정을 바닥냈고 이때부터 시련이 닥쳤다. 1972년 스위스의 사업가 조르즈 앙리 로세띠를 시작으로 패트릭 밈람(1980년), 크라이슬러(1987년), 메가텍(1994년), 마이콤(1995년)을 거치는 동안 왕성했던 열정은 사라지고 디아블로를 빼곤 변변한 모델을 내놓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시련을 겪던 람보르기니에게 1998년 기회가 찾아왔다. 폭스바겐의 페르디난트 피에히 회장이 구호의 손길을 내민 것. 무모한 구색 갖추기라는 비난이 있었지만 보다 강력한 브랜드파워가 필요했던 피에히에게 람보르기니의 전통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피에히는 람보르기니를 폭스바겐 산하 아우디에 통합하고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희미해진 오리지널의 색깔을 찾도록 요구했다. 그의 전폭적인 지지를 업은 람보르기니는 연구개발팀을 2배로 늘려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한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페라리를 향해 다시 총구를 겨눈 람보르기니는 그 첫 번째 성과물인 디아블로 GTR을 1999년 볼로냐모터쇼에 선보였다. 피에히는 트랙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무너진 람보르기니의 자존심을 가장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디아블로 GTR은 서킷 전용 모델이었다. 람보르기니의 르네상스는 카운타크의 다자인을 바탕으로 독일의 장인정신이 결합된 무르시엘라고의 등장부터 시작된다. V12 6.3L 엔진으로 시속 330km를 돌파한 무르시엘라고는 미우라, 카운타크, 디아블로를 잇는 람보르기니의 기함이었다. 여기에 V8 리틀 페라리를 겨냥한 가야르도가 투입되면서 페라리와의 수퍼카 대결은 더욱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현재 람보르기니의 라인업은 어느 때보다 화려하다. 무르시엘라고 LP640이 기함의 자리에 우뚝 섰고 스페셜 모델 레벤톤도 수퍼카 컬렉터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가야르도는 스파이더와 쿠페로 새로운 고객을 꾸준히 람보르기니로 안내하고 있다. 비록, 포르쉐의 폭스바겐 지분 참여와 경기침체 등 최근의 상황이 람보르기니에게 이롭지만은 않지만 이러한 어려움은 수퍼카 메이커에서 흔한 일이다. 미니 꼬마, 숙녀의 향기를 품다오리지널 미니는 1950년대 불어 닥친 석유파동으로 탄생했다. 석유파동 이전 높은 인기를 누렸던 영국차들은 1956년 기름값이 치솟자 독일제 소형차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위기감을 느낀 BMC 레오나드 로드 회장은 알렉 이시고니스와 존 쿠퍼, 알렉스 몰트를 중심으로 프로젝트팀을 꾸려 경쟁력 있는 소형차 만들기에 나섰다. 작은 차체, 넓은 실내를 컨셉트로 앞바퀴굴림 방식에 가로배치 직렬 엔진을 얹어 1959년 8월 완성차를 내놓았다. 초기에는 BMC 산하의 오스틴 세븐과 모리스 마이너로 팔리다가 1969년부터 ‘미니’라는 독자적인 브랜드로 독립했다. 미니는 길이 3,050mm의 깜찍한 차체에 4명의 어른과 짐을 실을 수 있는 실내공간을 확보해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러나 모기업의 경영난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1975년 국유화되어 ‘브리티시 레이랜드’(BL)로 불리다가 1979년 BL공사로, 1986년에는 로버그룹으로 이름을 바꾼 데 이어 1988년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BAE)에 흡수되는 시련을 겪었다.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는 1994년 다시 BMW에 인수되었다. 럭셔리카 브랜드로 활약하던 BMW는 수익성을 높이고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경쟁력 있는 소형차 브랜드가 절실했다. 미니는 BMW가 찾던 유리공주와 같은 존재였다. 미니를 입양한 BMW는 클래식 미니의 기본 컨셉트를 유지하면서 BMW의 고급스러움을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초기 개발의 중심에는 로버 기술진이 있었지만 BMW가 로버를 영국 금융그룹에 떠넘기면서 거의 개발이 완성된 뉴 미니를 독일식으로 새롭게 바꿨다. 오리지널 미니와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사이즈를 키우고 직렬 4기통 1.6L 엔진 등 세련된 유닛으로 무장했지만 스타일은 레트로풍 미니 그대로였다. 다양한 보디 및 인테리어 색상과 옵션을 두어 꾸미며 탈 수 있는 맛도 잊지 않았다. BMW의 풍부한 자금력과 기술력을 등에 업은 미니는 해치백을 시작으로 컨버터블과 클럽맨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고 매년 20만 대 가까이 판매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리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다치아파리지엔느로 거듭난 시골 촌뜨기다치아는 1966년 공산국가였던 루마니아 국영 자동차 회사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르노의 12s를 라이선스로 조립 생산해 자급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1968~1972년 르노 8s를 다치아 1100으로 개조해 4만4,000대 생산했다. 몇몇 모델은 다치아 1100S로 생산되어 모터스포츠에 참가하거나 경찰차로 쓰였다. 1969년부터 생산한 다치아 1300은 여러 가지 개선을 거듭하면서 34년간 250만 대 이상 판매되어 루마니아의 도로 위를 활보하고 다녔다. 다치아의 시련은 정치적인 영향이 컸다. 1989년 다른 동유럽 국가들처럼 민주화혁명이 일어나 큰 혼란을 겪었고 정치적인 변화는 다치아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공산국가시절 별다른 경쟁자 없이 루마니아 내수 시장을 독식했던 다치아였지만 민주화가 되면서 마냥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결국, 경쟁력을 높이고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루마니아 정부는 다치아를 민영화하기로 결정했고, 프랑스 르노가 1998년 다치아의 주식 51%를 매입해 끌어안았다. 르노의 다치아 인수는 유럽 자동차 부품업체들을 루마니아로 끌어들여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르노는 다치아에 묻어 있는 공산국가 시절의 잔재를 떨쳐 버리고 효과적인 생산라인 정비를 위해 투자(2000~2004년 동안 4억8,900만 유로, 약 9,400억 원)를 아끼지 않았다. 2000년 노바(Nova)에 르노 클리오 직렬 4기통 엔진과 5단 수동변속기를 올리고 에어컨과 알로이 휠 등 편의장비를 보강한 수퍼노바를 선보였다. 르노의 지원으로 다치아는 2002년 내수 시장 점유율 50%를 유지할 수 있었다. 2004년 등장한 로간(Logan)은 다치아 1300 이후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지금까지 다치아의 베스트셀링카로 활약하고 있다. 이전의 모델들이 루마니아 내수용에 머물거나 동유럽으로 수출 지역이 제한된 것에 반해 로간은 서유럽과 동남아시아 등 전세계 시장을 무대로 뛰고 있다는 점이다. 몇몇 지역에서는 르노 로고를 붙이고 판매되기도 한다. 세단뿐만 아니라 왜건, 밴, 픽업 등 다양한 라인업으로 서유럽 메이커들이 다가설 수 없는 낮은 값과 뛰어난 품질을 모두 갖추고 있다. 지난 제네바모터쇼에 출품한 더스터(Duster) 컨셉트카는 SUV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는 증거다. 다치아는 루마니아인들에게 가장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로 떠올랐고 르노 그룹 내에서도 전략적 투자회사로 성장했다.
도쿠다이지의 초보운전교실(7) - 신중하게·결단력 있게.. 2009-03-14
초보운전자들이 애를 먹는 것 중 하나가 차선 바꾸기다. 특히 좌회전 차선에 들어서야 하는데 차가 많아 쉽지 않을 때는 진땀을 빼기 일쑤다. 차선을 바꿀 때는 미리 앞차와의 거리를 충분히 두고 옆차선에 공간이 충분하다 싶으면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들어선다차가 많은 곳에서 가장 많이 필요하면서도 애를 먹는 것이 차선 바꾸기다. 특히 좌회전을 위해서는 미리 생각해서 좌회전 차선에 들어서야 하는데, 차가 많을 때는 이것이 그리 쉽지가 않다. 또 공사 등으로 차선이 줄었을 경우도 이를 피하기 위해 차선을 바꿀 수밖에 없다. 차선을 바꿀 때는 어느 정도의 결단력이 필요하다. 다른 차가 차선을 비워 주기를 기다린다면 오래도록 뜻을 이루지 못한다. 끼어들기를 할 때는 이동하려는 쪽의 차선과 속도를 맞추면 부드럽게 들어설 수 있다. 왼쪽 차선은 일반적으로 오른쪽 차선보다 속도가 빠르다. 오른쪽 차선에서 달리던 속도로 왼쪽 차선으로 바꾸면 뒤차로부터 추돌당할 수 있다. 이런 때는 미리 앞차와의 차간거리를 두어 가속할 거리를 확보하도록 한다.화물차 조심하고 위급할 때는 클랙슨을교통량이 많은 곳에는 일반 승용차 외에도 택시를 비롯해 상용차, 덤프트럭 같은 대형 화물차까지 여러 차들이 달리고 있다. 이런 차들은 다른 차들이 예측하지 못하게 움직이는 경우가 많고 시야도 가리므로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좋다. 또 매너가 나쁜 차도 조심해야 한다. 특히 뒤에서 몰아세우는 점잖지 못한 차가 있더라도 흥분하지 말고 추월시키는 것이 좋다. 이런 때 흥분해 쓸데없이 클랙슨을 누르거나 옆차선까지 막아버리는 운전자가 있는데, 그러면 매너 나쁜 뒤차와 같은 꼴이고, 말썽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런데 매너가 나쁜 차도 정도가 지나치면 위험하다. 어거지로 끼어들기를 하는 차 때문에 위험해지면 주저하지 말고 클랙슨을 누르자. 클랙슨은 상대에게 ‘위험하다’고 알리기 위한 장치이다. 클랙슨을 안 울리면 상대방은 상황을 알지 못해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전손사고의 두 가지 예 - 차가 불에 타거나 도난됐을 .. 2009-03-14
자동차보험의 담보 종목에는 ‘대인배상’, ‘대물배상’, ‘자기신체사고’(자동차상해), ‘무보험자동차에 의한 상해’, ‘자기차량손해’가 있다. ‘자기차량손해’는 말 그대로 가입자의 자동차에 직접적으로 생긴 손해를 보상하는 보험이다. ‘자기차량손해’ 사고는 대부분 충돌, 접촉, 추락, 전복 등에 의해 일어난다. 드물긴 하지만 화재나 도난사고도 발생한다. 만일 화재로 자동차가 전소됐고, 복원수리비가 그 차의 가격(싯가)을 넘었을 때는 어떻게 될까. 이런 경우를 전손(전부손해)사고라 하는데, 보험회사로부터 ‘보험가액’에 해당하는 보험금을 받고 그 보험계약은 사고발생시점에서 종료된다. ‘보험가액’이란 보험개발원이 시장조사를 거쳐 별도로 정한 자동차가액기준표상 사고 당시 정한 최초의 자동차기준가액을 말한다. 보험은 기본적으로 ‘우연성’을 전제로 한 경제제도이므로 고의로 인한 사고이거나 일부러 자기 차에 불을 질렀을 때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자동차가 도난됐을 때도 마찬가지다. 도난이란 형법상 절도, 강도를 말하는 것이며 불법영득(不法營得)의 의사가 요건이 된다. 단순한 점유의 침해는 영득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서 절도, 강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일시 무단 사용은 도난으로 보지 않는다. 자동차가 도난됐을 때는 먼저 그 사실을 경찰관서에 신고하고, 자동차 말소등록을 한다. ‘자기차량손해’ 보험금을 청구할 때는 도난신고확인서와 자동차말소등록 사실증명서, 청구서, 인감증명, 각서, 등록원부, 권리양도증 등의 서류를 갖춰야 한다. 보험금 청구는 도난 사실을 경찰관서에 신고한 날로부터 30일 이후에 할 수 있는데, 이는 말소등록 후 다시 신규(부활) 등록을 할 때 별도의 비용이 들고, 통상 30일 이내에 찾는 일이 많아 차주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도난 사고 역시 ‘전손사고’이므로 사고발생시점에서 그 보험계약은 종료되며, 새차를 샀을 때는 당연히 새 자동차가액을 기준으로 새로운 ‘자기차량손해’ 보험계약을 맺어야 한다. 화재이든 도난이든 ‘전손사고’의 자동차보험금은 가입 당시의 가액이 아닌 사고 당시의 ‘보험가액’(보험개발원 공표)을 기준으로 보험금이 지급됨을 기억하자.
스포츠 세단의 선구자 - BMW 328 2009-03-14
BMW는 1913년 항공기 엔지니어 칼 프리드리히 라프(Karl Friedrich Rapp)가 세운 항공기 엔진 회사였다. 독일이 1차대전의 패전국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더는 군수물자를 만들 수 없게 되자 BMW는 군수물자인 항공기 엔진 생산이 중단돼 큰 타격을 입는다. 이에 따라 궁여지책으로 항공기 엔진을 만들던 기술을 토대로 모터사이클을 만들기 시작했고, 어려운 경제 상황에 힘입어 모터사이클은 큰 인기를 끌어 자동차 회사보다 많은 수익을 올렸다. 모터사이클로 재정이 좋아지자 BMW는 1928년에 딕시(Dixi)를 인수했다. 딕시는 영국의 오스틴 세븐을 라이선스로 만들던 회사였다. 딕시의 인수는 BMW가 본격적으로 자동차 사업에 뛰어든 계기를 마련했고, 곧바로 BMW 로고가 붙은 3/15가 나왔다. 이후 1932년 BMW는 오스틴과 계약을 끝내고 고유 모델을 만들어 새롭게 자동차 시장에 진출할 계획을 세운다. 1933년 드디어 BMW가 자체 개발한 첫 모델인 3/20PS가 등장했다. 그리고 이듬해 오스틴의 직렬 4기통 엔진을 베이스로 직렬 6기통 1.2L 엔진을 얹은 303이 선보였다. 303은 BMW 처음으로 직렬 6기통 엔진을 얹은 모델이다. 이로써 BMW가 자랑하는 ‘실키식스’의 역사가 시작됐다. 양산 전, 트랙에서 성능 입증BMW가 자체 모델을 선보인 지 4년 만에 1930년대를 대표하는 차가 탄생했다. 디자이너 루돌프 슈라이처(Rudolf Schleicher)와 수석 엔지니어 프리츠 피들러(Fritz Fiedler)는 진정한 스포츠카를 만들기 위한 작업을 은밀히 진행했다. 그 결과 BMW 역사에 기본 틀이 되는 328이 빛을 보게 됐다. 328은 319의 스티어링과 서스펜션, 326의 브레이크와 엔진 블록을 베이스로 개발됐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기술을 쓴 328의 메커니즘은 지금까지 BMW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 강철 튜브를 사용해 만든 프레임과 견고한 리어 액슬, 예리한 핸들링을 돕는 랙 앤드 피니언 방식의 스티어링과 독립식 앞 서스펜션은 가볍고 날렵한 2인승 스포츠카를 더욱 빛나게 했다. BMW가 지금까지도 추구하는 ‘궁극적인 드라이빙 머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컨셉트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BMW의 아이덴티티로 자리잡았다.328 엔진은 오스틴 세븐의 직렬 4기통 747cc 엔진을 베이스로 했지만 전혀 새로운 엔진으로 거듭났다. 무게를 줄인 직렬 6기통 1,971cc 엔진은 주철로 만든 실린더 블록과 알루미늄 헤드를 사용했고 밸브는 실린더당 2개씩 달렸다. 3개의 카뷰레터와 반구형 연소실로 80마력의 최고출력을 냈으며, ZF 4단 수동변속기를 단 뒷바퀴굴림 차였다. 또한 차체 무게가 830kg에 불과한 완벽한 2인승 로드스터였다.당시 라이벌들은 과급기와 대배기량으로 출력을 올렸지만 BMW는 차체 무게를 줄이고 작지만 고성능 엔진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기본형 328의 엔진은 80마력이었으나 경주에 출전하는 차들은 간단히 100마력 이상으로 출력을 높였다. 328은 양산하기 전 트랙에서 먼저 신고식을 치뤘다. 1936년 6월, 뉘르부르크링크에서 열린 아이펠렌넨 경주에서 모터사이클 레이서 출신 에른스트 헨네는 2.0L 스포츠카 부문과 1.5L 경주차 부문에 326 프로토타입을 이끌고 출전해 평균시속 100km이라는 놀라운 속도로 우승컵을 안았다. 이 승리에 힘입어 이듬해인 1937년, 328이 로드스터와 쿠페 버전으로 양산됐다. 직렬 6기통 2.0L 엔진을 얹은 328은 BMW가 선보인 본격적인 스포츠카로,     시속 190km의 최고속도를 자랑하며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구석구석을 거침없이 내달렸다.328을 논하면서 스타일링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중 첫 번째가 카리스마 넘치는 앞모습. 328의 앞모습은 차체와 헤드램프, 펜더가 하나로 부드럽게 어우러져 당시로서는 무척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또 비행기 디자인을 응용해 공력특성을 충분히 고려한 유선형 차체도 인상적이었다. 카누와 같이 갈수록 좁아지는 보트테일로 마무리한 차 뒷부분도 돋보였다. 아울러 유선형 차체와 짧은 휠베이스는 보는 것만으로도 달리기 위해 태어난 스프린터임을 암시했다. 328은 1930년대에 나온 차 중 가장 우아한 유선형 스타일의 로드스터인 동시에 326과 327의 로드스터 버전과 더불어 오늘날까지 BMW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디라인을 가진 차로 평가받고 있다.달리기 위해 탄생한 328은 각종 경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독일 내 2.0L 클래스 경주는 물론 랠리, 스프린터, 힐클라임 등 1936년부터 1940년까지 130여 개 경주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1938년 1,000마일의 도로를 달리는 가혹한 이태리 밀레밀리아 경주에서 평균시속 166km로 우승해 높은 내구력과 스피드를 입증받았고, 1939년에는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40년 브레시아 1,000마일에서 종합우승의 영광을 안은 328은 카로체리아 투링의 경량 알루미늄 차체로 최고시속 220km를 자랑했다. 모터스포츠에서의 성과에 힘입어 328은 단숨에 세계의 명차 대열에 올랐다. 1936~1939년 겨우 462대밖에 생산되지 못했지만 328은 이후 나온 수많은 스포츠카의 중요한 교과서 역할을 할 만큼 많은 영향을 끼쳤다. 328은 BMW 로드스터의 시작이었고 스포츠 세단을 지향하는 컨셉트를 일구어 낸 기념비적인 차다.
전상귀 변호사의 알쏭달쏭 법률이야기 - 법인은 폐업해도.. 2009-03-14
Q 미나, 미현, 미옥 3자매는 자본금 2억 원으로 건설기계 렌트업을 하기 위해 (주)로마자동차를 세웠습니다. 영등포구청 부근에 사무실을 만들고 등기도 마쳤습니다. 로마자동차는 임직원이 단결해 열심히 영업을 한 덕분에 첫해인 2006년과 이듬해에는 큰 이익이 났습니다. 이에 미나 자매는 2008년에 사업을 더 키우기 위해 포클레인을 몇 대 더 샀습니다. 로마자동차는 (주)파리자동차에게 포클레인 값으로 2억 원을 빚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금융한파가 몰려왔고 건설경기가 멈칫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자동차는 영업을 위하여 열심히 뛰었지만 경기는 도대체 살아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로마자동차는 구조조정을 했습니다. 먼저 2008년 2월에 미나 자매에게 지급되었던 자동차를 팔고 3월에는 사무직 직원 2명을 해고했습니다. 5월에는 남아 있던 포클레인 2대를 팔았지만 10월에 적자가 누적되고 회사가 회생의 가망이 보이지 않자 폐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자동차는 (주)대왕성건설에 2억 원의 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왕성건설은 미나와 결혼을 할 조박이라는 사람이 실질적인 사주입니다. 대왕성건설에서 로마자동차에 돈을 지급해도 곧바로 파리자동차 등 채권자들에게 빼앗길 것 같아 돈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파리자동차는 로마자동차의 행태에 분개했습니다. 파리자동차는 로마자동차가 가지고 있는 대왕성건설에 대한 채권을 가압류 신청을 했습니다. 법원은 파리자동차의 소명자료를 읽어보고 가압류를 해주었습니다. 이에 로마자동차는 파리자동차에게 가압류만 하지 말고 소를 제기하라는 제소명령신청을 했습니다. 제소명령이 나자 파리자동차는 서둘러 로마자동차에게 채권 2억 원과 이자를 내라고 소를 제기했습니다. 이에 로마자동차는 자신들은 이미 폐업했으므로 파리자동차의 소는 기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연 파리자동차는 채권을 회수할 수 있을까요?| 해설 | 파리자동차는 채권을 회수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회사는 폐업했다고 하더라도 그 회사의 법인은 살아 있고 청산할 부분이 있다면 그 사무범위 내에서 회사는 존속하는 것입니다. 다만 파리자동차의 채권회수방법이 문제인데 로마자동차가 대왕성건설에 채권회수를 위한 권리행사를 전혀 하고 있지 않다면 대왕성건설의 부동산 등 재산에 가압류를 하고, 채권자대위소송을 통하여 직접 청구를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금융위기 이후 많은 업체들이 부도나거나 또는 위장 폐업을 일삼고 있으므로 채권회수를 하려면 믿을 수 있는 변호사 사무실 친해 두는 것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길일 것입니다. 문의 (02)2693-3004
전문성과 다양성 모두 갖춘 튜너 - HAMANN(1) 2009-03-14
튜닝사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량 양산차와의 차별화이다. 양산 모델보다 빠르고 강하게 달리고, 색다른 디자인을 원하는 소비자들을 위해 생겨난 사업이 바로 튜닝이다. 더불어 자동차 메이커가 사업성을 이유로 제작하지 않는 소량의 자동차를 만들어 불특정 소수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역할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튜닝사업은 규모가 그리 클 것 같지 않지만, 독일을 비롯해 미국과 일본의 튜닝사업은 자동차산업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자동차의 역사가 오래 되면서 자동차문화와 모터스포츠가 발달한 그들에게 튜닝은 단순히 멋을 부리고 성능을 높이는 것이라는 인식을 넘어 개인 맞춤화로 받아들여진다.차를 운전하는 습관이나 용도는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대량 양산차는 모두 똑같은 포맷으로 생산된다. 이에 개성파 오너들은 튜닝으로 자신의 운전습관과 특성에 맞게 차를 조율해서 재미있고 안전하게 타고자 한다. 대량 생산된 기성복을 내 몸에 맞게 다시 수선해서 입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바퀴가 가장 중요하다이렇게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튜너들은 다양한 제품을 내놓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튜닝카와 튜닝 용품은 판매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재정이 튼실하지 않은 튜너들은 제품개발과 생산을 많이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다. 또 생산을 하더라도 값이 너무 비싸지게 된다. 이처럼 다양한 제품 개발에 부담을 갖다 보니 특정 브랜드나 차종만을 전문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브랜드와 차종의 제약 없이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면서 많은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튜너도 있다. 독일의 하만(HAMANN)이 대표적인 예다. 독일 라이프하임에 위치한 하만은 1986년 리하르트 하만(Richard Hamann)이 만들었다. 리하르트 하만은 독일 모터스포츠에서 20년 넘게 활약해온 레이서였다. 1980년대 초반 피아트 127로 투어링카 레이스를 시작해 1984년에는 독일 F3 챔피언십에 도전했으며, 독일 투어링카 챔피언십에 출전하는 슈니처팀의 BMW M3 테스트 드라이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BMW의 스페셜카 M1을 타고 독일의 스페셜 투어링카 트로피(STT) 시리즈에서 세 번이나 우승한 훌륭한 레이서였다.  그는 레이서에서 은퇴하기 전부터 모터스포츠에서 쌓은 경험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1986년 하만 모터슈포르트(HAMANN MOTORSPORT)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튜닝사업에 뛰어들었다. 자신에게 우승을 안겨 주었던 BMW를 전문으로 사업을 시작한 그가 처음으로 만든 차는 M3(E30) 튜닝카. 직렬 4기통 2.3L 192마력의 기본 엔진에 터보차저를 붙여 최고출력을 348마력으로 끌어 올렸고, 0→시속 100km 가속이 5.1초, 최고시속이 273km나 되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수퍼카였다. 대부분의 튜너가 차의 내외관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것과 달리 하만은 처음부터 내외관뿐만 아니라 엔진과 구동계까지 손을 댔다. 리하르트 하만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터스포츠에서 노하우를 쌓은 덕분이다. 그가 레이서로 쌓아온 명성은 소비자들에게 큰 신뢰를 안겨 주었고, 이에 힘입어 판매량도 꽤 많았다. 이후 하만은 BMW의 모든 모델에 대한 다양한 튜닝 프로그램을 내놓기 시작한다. 간단한 ECU 튜닝부터 시작해 흡ㆍ배기 시스템, 서스펜션, 에어로파츠, 트랙션 컨트롤을 포함한 각종 전자장비까지 모터스포츠에 뿌리를 둔 만큼 강력한 성능을 내는 좋은 제품들을 만들었다. 특히 하만이 자랑하는 것은 고품질의 경량합금 휠. 자동차의 가장 기초적인 부품인 바퀴가 가장 뛰어난 성능을 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지킨 하만은 알루미늄 합금으로 무게를 줄이면서 강성을 높인 다양한 제품을 선보인다. 1피스 주조부터 3피스 단조 휠까지 갖추고 있고, 디자인도 단순한 5스포크에서 고급스러운 매시 타입까지 다양하다. 휠 제품군은 튜너들 중 하만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현재 하만의 휠에는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한국타이어가 끼워진다.BMW 전문 튜너로서의 역량을 확대해 가며 짧은 기간 동안 고속성장을 이룬 하만은 1990년 중반 AC슈니처, 하르트게 등을 제치고 가장 크고 유명한 BMW 전문 튜너가 된다.기술력이 다양성의 원천력1994년 하만은 BMW 전문 튜너에서 벗어나 한층 더 높은 기술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 도전한다. 바로 페라리 F40 튜닝카를 선보인 것. 시대를 대표하는 고성능 머신을 튜닝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은 하만은 이듬해에는 프랑크푸르트모터쇼에서 페라리 F512M 와이드 버전을 내놓아 또다시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후 엔초 페라리를 비롯해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 등 고성능 머신의 튜닝 프로그램을 내놓는다. 수퍼카의 영역에 도달한 차를 튜닝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수퍼카들은 높은 엔진 출력을 뽑아내면서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달리도록 조율된 차들이다. 이런 차를 튜닝해 출력을 높이는 것은 뛰어난 기술력을 지니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며, 결과물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회사 명성에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만의 엔지니어는 엔초에 하이 퍼포먼스 스포츠 배기 시스템과 촉매를 바꾸면서 48마력을 높여 최고출력을 660마력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서스펜션과 머플러를 바꾸고 에어로다이내믹 패키지를 붙여 수퍼카 이상의 수퍼카를 탄생시켰다.페라리 튜닝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더욱 높인 하만은 1997년에 자회사인 오페라 디자인(OPERA DESIGN)을 만들어 메르세데스 벤츠도 손대기 시작했다. 하만의 특별지시에 의해 설립된 이 회사는 짧은 준비기간을 거쳤지만 경험이 풍부한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에 의해 빠르게 벤츠 전문 튜너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특히 오페라 디자인의 에어로파츠는 그동안 벤츠 튜닝카에서 볼 수 없었던 우아하고 독창적인 디자인을 내세우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페라 디자인이 만든 SL500 그랑프리 스포츠 버전은 스포티하면서도 우아한 에어로 패키지를 덧댔고, 엔진은 최고출력 330∼420마력에 여러 가지 옵션을 마련했다. 그 중 420마력 튜닝카는 0→시속 100km 가속 5.2초, 최고시속 296km를 낸다. 하만은 독일 튜너들 가운데 비교적 신생업체에 속한다. BMW 튜너로 출발해 뛰어난 튜닝 기술을 인정받은 하만은 2000년부터 포르쉐, 랜드로버, 애스턴마틴, 마세라티, 피아트 등 차종과 가격대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브랜드의 차를 튜닝하고 있다. 또 사업적 역량을 넓혀 레이싱카 튜닝 및 신생 레이싱팀의 인프라 구축을 도와주는 한편, 라이프스타일 액세서리도 판매하고 있다. 하만이라는 이름 자체가 곧 상품이 될 정도로 브랜드 파워를 키운 것이다.  하만은 소비자의 욕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지금도 기술 및 상품성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브랜드와 차종, 차값에 국한되지 않고 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전문성과 다양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몇 안 되는 튜너가 바로 하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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