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자동차상식

IMF 시련으로 경제형차 인기 얻고 메이커들 구조조정.. 2004-08-13
1997년 우리나라는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전국민이 고통을 겪었다. 대기업들의 잇따른 부도로 하루하루가 불안했고, 달러당 800원대에서 1천 원을 넘어선 환율이 국내 경제를 압박했다. 직장을 잃은 실직자들과 취업박람회장을 가득 메운 구직자들의 마음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직장에 사표를 내던지고 창업의 길을 떠나는 직장인들이 부지기수였고, 유학이나 재취학, 이민 등으로 돌파구를 찾는 사람도 많았다. 끝을 모르고 곤두박질한 주가는 자살과 공금횡령 등의 극한 상황을 몰고 왔고, 만신창이가 된 경제 때문에 실의에 빠진 국민들은 실망스러운 정치판 대신 야구의 박찬호, 골프의 박세리 등 스포츠 스타에 열광했다. 하지만 스포츠로도 IMF의 우울한 자화상을 떨쳐버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아 법정관리 등 위기 맞은 자동차업계 국내 자동차 등록대수 1천만 대 넘어서 1997년 IMF 위기의 그늘이 자동차업계에도 짙게 드리우면서 온갖 루머가 나돌던 재계 8위(자산기준)의 기아가 결국 부도를 내고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7월 15일 기아는 부도유예협약 대상기업으로 지정되었지만, 10월 22일 법정관리로 결정이 나기까지 정부와 경영진, 채권단, 노조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며 맞서 계열사와 협력업체, 나아가 나라 전반의 경제가 어려움에 빠졌다. 자동차에 주력해온 기아그룹이 부도유예협약대상이 된 원인은 자동차 내수불황과 계열사의 경영난, 인수합병 관련 악성루머 등이 겹치면서 자금난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부도 이후 기아그룹은 ‘기아 살리기’에 나선 국민의 성원을 업고 임직원 월급 반납과 감원, 부동산 매각과 계열사 합병 등 자구책을 찾아 나섰다. 채권단은 추가지원 조건으로 김선홍 회장의 퇴진과 노조의 감원 동의서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수출환어음매입 중단, 협력업체의 어음할인 거부 등 금융제재조치를 내려 사태해결을 더욱 어렵게 했다. 8월 21일 정부는 기아그룹 협력업체의 연쇄도산을 막기 위해 7천억 원을 긴급 지원했지만 기아와 채권단의 대립이라는 사태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급기야 기아는 정부에 화의신청을 냈고 노조의 파업과 조업중단이 반복되는 가운데 기아그룹이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선홍 회장이 10월 29일 사퇴하고, 11월 5일 재산보전관리인으로 진 념 전노동부장관이 선임되었다. 사태가 일단락 되자 기아는 국내 첫 독자 모터쇼를 열고 9개의 새 모델을 선보이는 등 제기를 위해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다. 97년 7월 15일 국내 자동차 등록대수가 1천만 대를 넘어섰다. 85년 5월 7일 100만 대를 넘어선 후 12년만에 10배의 양적 성장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내 자동차시장의 상황은 낙관적이지 못했다. 96년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내수정체와 수출환경 변화에 이어 97년에는 경기침체 및 불황까지 더해지면서 메이커들의 재고는 10만 대를 넘어섰다. 재고부담을 줄이기 위해 각 업체들은 조업을 단축하고 무이자 할부판매를 통해 출혈경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현대는 97년 하반기에 월 300억 원 이상의 적자를 내는 등 국내 메이커들의 수익성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자동차 1천만 대 시대의 사회적인 부작용도 심각했다. 교통체증과 자동차밀도가 세계 최고였고, 도로와 주차장 등 사회간접시설은 그에 반비례했다. 자동차 배기가스로 인한 환경오염지수는 세계 4위였고, 교통사고 역시 남아프리카공화국, 슬로베니아, 중국에 이어 세계 4위의 불명예를 안았다. 기술자립, 애프터서비스의 질 향상, 교통질서 지키기, 운전문화의 성숙, 교통체계 손질 등 자동차 1천만 대 시대에 풀어 나가야 할 과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상습적인 음주운전자 처벌 규정 강화해 휘발유값 급등해 운전자들의 부담 늘어 97년 4월 24일∼5월 1일, 95년에 이어 서울모터쇼가 코엑스(KOEX)에서 개최되었다. 11개국 147대의 자동차 및 관련 용품 메이커가 참여한 ’97 서울모터쇼는 세계자동차공업협회(OICA)가 인정하는 공식 국제모터쇼로 치러져 의미가 컸다. 당시 전세계에서 열리는 200여 모터쇼 가운데 공인을 받은 행사는 25개에 그쳤다. 모터쇼에서는 현대 HMX와 티뷰론 컨버터블, 캐딜락 카테라, 벤츠 C200T 왜건 등이 국내에 처음 공개되고 다양한 부대행사가 열려 볼거리가 풍성했다. 그러나 전시면적이 부족해 대형 상용차나 특장차가 출품되지 못하고 출입구가 비좁아 관람객들의 불만을 사는 등 ‘95 서울모터쇼에서 보인 문제점을 여전히 안고 있었다. 음주운전으로 3회 이상 적발되면 구속하는 ‘삼진아웃제’가 생긴 것은 97년 7월의 일이다. ‘삼진아웃제’는 상습 음주운전자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 마련한 법규로, 사고여부에 관계없이 음주적발 전력과 혈중 알코올농도에 따라 구속여부가 가려졌다. 즉 3년 이내 2회 이상 혹은 5년 이내 3회 이상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운전자가 또다시 음주운전으로 적발되면 혈중알콜농도 0.05% 이상일 때 구속되는 등 법규가 한층 강화되었다. 연초부터 휘발유 값이 크게 인상된 것도 97년에 일어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96년 교통세 인상여파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오른 휘발유값은 운전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기업들이 자동차 유지비 지원을 중단하거나, 기름값 부담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세금인상과 가격자유화 때문에 97년 1월 1일 휘발유 X당 기준값은 827원에 달했고(96년 같은 날은 624원), 이후 정유사들이 가격인하 경쟁을 벌여 8월 잠시 800원대 아래로 내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원유값 상승과 환율급등으로 12월에 900원을 돌파하는 등 고유가 행진이 이어졌다. 휘발유값이 오르자 가짜 휘발유를 파는 주유소가 적발되고 경유를 사용하는 지프형차의 판매가 크게 늘어나기도 했다. 97년은 수입차가 개방된 지 10년이 된 해였다. 97년 수입차 베스트셀러는 690대가 판매된 포드 토러스 LX였고, 닷지 스타라투스 LX(468대)와 포드 몬데오(393대), BMW 528i(207대), BMW 523i(206대), BMW 318i(204대), 닷지 스타라투스 LE(201대), 볼보 850 GLE(183대), 볼보 940 GL 터보(176대), 포드 익스플로러 XLT(171대)가 그 뒤를 이었다. 당시 수입차 판매 1∼3위는 미국차가 휩쓸었고, 미국 베스트셀러 모델인 포드 토러스는 한국에서도 가장 잘 팔렸다. 96년 베스트셀러 10위에 단 하나의 모델도 올리지 못했던 BMW는 97년 3개의 모델을 한꺼번에 4∼6위로 올렸다. 대우가 쌍용, 현대가 기아·아시아 인수해 기아 인수에 실패한 삼성, ‘독자생존’ 밝혀 97년에 이어 98년에도 IMF 관리체제가 이어지면서 경기침체와 구조조정이라는 화두와 힘겨운 씨름을 벌였다. 98년 초 100만 명이던 실업자 수는 98년 말 200만 명을 넘어섰고, 외환과 토지, 기업 인수합병 시장 등이 모두 개방되었다. 특히 국내 자동차산업은 내수 50% 감소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수입차 역시 97년에 비해 판매가 1/3 이하로 곤두박질치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특히 IMF 이전 난립했던 병행수입업체들이 98년 대부분 부도를 내고 자취를 감추었다. 수입차업계는 한미 자동차협상 타결과 경기회복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고, 크라이슬러, BMW, 포드, GM, 사브 등은 직판체제를 갖추었다. 수출시장의 상황은 국내보다 나았다. 97년 10월말 현재 국내 업체들은 104만5천806대의 차를 수출해 97년 같은 기간의 실적을 0.6% 뛰어넘었다. 특히 대우는 미국, 유럽 등에 새차들을 내놓으면서 수출을 33.2%나 늘려 전체 수출실적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IMF로 인해 기업간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국내 자동차산업의 판도가 크게 바뀌었다. 98년 2월 초 대우가 쌍용을 인수함으로써 시작된 구조조정은 현대가 기아, 아시아의 최종낙찰자로 선정되면서 2강(현대, 대우) 1약(삼성) 구도가 되었다. 98년 초 첫차 SM5시리즈를 내놓고 중형차시장에서 강세를 보인 삼성은 오랫동안 잡음을 일으켰던 기아 인수를 포기한 뒤, 후속모델 선정, 제2공장 건설 등의 현안을 해결하고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독자생존의 길을 가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현대의 기아·아시아 인수는 국내 산업전반을 뒤흔들 만큼 큰 사건이었다. 우선 규모면에서 세계 13위의 자동차생산 능력을 지닌 현대가 기아·아시아를 인수하면서 비약적인 도약이 기대되었다. 당시 현대가 밝힌 청사진은 99년 189만여 대를 생산해 세계 12위 메이커에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2000년 220만 대, 2003년 280만 대를 생산해 세계 9∼10위의 자동차 메이커로 도약한다는 것이었다. 현대는 기아를 독자 브랜드로 유지하면서 양사의 수출, 판매체제를 효과적으로 종합, 운영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해나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편 현대의 기아 인수는 한국 자동차산업은 물론 현대, 기아, 대우, 쌍용, 삼성 등 국내 5대 그룹간 빅딜(대규모 사업 맞교환)의 본격적인 신호탄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었다. 기아가 현대 산하로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표적인 과잉설비 분야로 꼽히던 국내 자동차산업이 현대-대우 2사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기아 인수에 실패한 삼성자동차는 독자생존 방침을 밝혔으나 정부의 퇴출 압력과 침체된 시장상황 등 미래를 낙관하기에는 걸림돌이 많았다. 디젤·LPG·경차 등 경제성 높은 차 인기 한미 자동차 협상 타결로 무역분쟁 일단락 IMF의 한파는 기업들간의 구조조정에 그치지 않았다. 96년까지 내수시장 1위를 차지했던 중형차 현대 쏘나타가 98년 경차인 대우 마티즈에 1위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대우 마티즈뿐만 아니라 현대 아토스도 판매 3위에 오르는 등 98년에는 경제성이 뛰어난 경차의 판매가 크게 늘었다. 특히 중형차 판매대수는 전년도에 비해 60% 이상 줄어든 데 반해 경차 판매대수는 97년 두 배 이상 늘어 자동차시장의 무게중심이 중형차에서 경차로 옮겨졌다. 당시 조사결과에 따르면, 중형차를 타다가 차를 바꾼 소비자의 32.6%가 경차를 선택했고, 소형차에서 경차로 바꾼 비율은 27%, 경차 소유자가 다시 경차로 바꾼 비율은 51%에 달했다. 현대와 대우가 승용차 판매 1위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인 것도 눈길을 끈다. 98년 5월 대우는 25년만에 현대를 제치고 국내 승용차 판매 1위에 올랐다. 일등공신은 단연 경차 인기에 힘입은 마티즈였다. 98년 초 대우가 쌍용의 판매 및 정비망을 흡수 통합한 것도 현대를 제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으로 풀이되었다. 경차 붐과 함께 경제형차로 분류되는 디젤, LPG, 린번차의 약진도 돋보였다. 수차례 기름값 인상에 시달린 오너들은 고유가시대의 해법으로 LPG와 디젤, 린번차 등으로 눈을 돌렸다. 특히 98년 초 데뷔한 현대 엑센트 린번(연비 18.9km/X)은 한번 기름을 넣고 서울-부산을 왕복할 수 있는 소형차로 눈길을 끌었다. 현대 엑센트는 전체 판매의 40% 이상이 린번 모델이었고 98년 5월에 나온 현대 아반떼 린번도 침체된 준중형차시장에서 아반떼의 판매대수를 늘리는 데 공헌했다. 연료비가 싼 LPG와 디젤차 역시 호황을 누리면서 현대 싼타모, 기아 카니발 등의 RV도 인기를 끌었다. 모터스포츠 분야에서도 어려워진 경제환경을 실감할 수 있었다. 레이스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많은 드라이버가 서킷과 트랙을 떠나면서 경주 참가 드라이버의 수가 크게 줄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국모터챔피언십은 이명목과 윤세진 선수의 경쟁, 금호와 한국의 타이어 경쟁 등이 불을 뿜으면서 박진감 넘치는 경기와 볼거리를 제공했다. 관중수도 크게 늘어 모터스포츠 전망을 밝게 했다. 자동차관련 세금의 변화와 보험료 자유화도 오너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1가구 2차 중과세 등 구입단계의 세금이 폐지되거나 줄어들었지만 교통세 등 운행단계의 세금은 오히려 늘어났다. 10월에는 또 자동차세 인하 및 과세기준 조정, 관세 8% 고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한미 자동차협상이 타결되었다. 이 협상을 통해 97년 10월 미국의 통상법 수퍼 301조 발동 이후 빚어진 한미 양국간 자동차 분쟁이 해소되어 보복관세 부과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라는 최악의 무역분쟁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자동차시장 본격 개방하고 차종 다양해져 되돌아.. 2004-07-13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이해 정부는 1926년에 건립된 옛 총독부 건물(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의 첨탑을 제거했다. 또한 일제가 전국 각지에 박아놓은 쇠말뚝 20개를 뽑고 교묘하게 일본식으로 바꾸어놓은 129곳의 지명을 우리 식으로 고치는 등 일제 잔재 청산에 나섰다. 같은 해 쓰레기 종량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서울 서초구에 자리한 삼풍백화점이 붕괴해 500여 명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고도 일어났다. 1996년에는 무궁화 2호 인공위성의 발사에 성공하고 OECD에 가입하는 등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한발 다가섰다. 강원도 고성에서는 큰 산불이 일어나 가옥 70채와 삼림 3천ha가 불타고 16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강릉에서 북한 잠수정이 발견되어 무장공비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우리 군과 민간인 등 10여 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1995년 국내 첫 국제모터쇼 서울서 개최 자동차협상 타결로 수입차 문턱 낮아져 1995년 국내에서는 첫 국제모터쇼가 열렸다. 5월 4∼1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자동차! 움직이는 생활공간, 풍요로운 삶의 실현’이라는 주제로 열린 서울모터쇼에는 7개국 202개의 자동차 메이커 및 관련업체가 참가하고, 7일 동안 70여만 명의 관람객들이 다녀가 관람객 수로만 보면 유명 국제모터쇼에 뒤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서울모터쇼는 소규모의 국내모터쇼로 기획되었다가 외국업체들의 뒤늦은 요청으로 미국 빅3과 EU 8개사가 참가, 국제모터쇼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현대는 HCD 시리즈와 넥스트 원, FGV-Ⅰ, 현대정공은 HRV-21 등을 선보이고, 기아는 KEV-4, KMX-3과 스포츠카 L96, 아시아는 네오마티나와 레토나, 대우는 넘버1과 뷔크란, DACC-Ⅱ, 쌍용은 CCR-1과 CRS, 솔로Ⅲ 등의 컨셉트카 및 새차를 내놓았다. 적극성을 보인 국내 메이커와는 달리 미국 빅3을 비롯한 벤츠, 시트로엥, 볼보 등의 외국 메이커는 컨셉트카나 새차 없이 국내에 수입되는 모델만 전시해 아쉬움을 남겼다. 1984년부터 자동차사업을 추진해온 삼성이 상용차에 이어 95년 승용차사업체인 ‘삼성자동차(주)’를 설립했다. 3월 설립등기를 마친 삼성자동차는 4월 부산 신호공단에서 기공식을 가져 10년 전부터 추진해온 자동차사업의 꿈을 현실화했다. 95년 9월에는 난항을 거듭한 한미자동차협상이 타결되어 수입차의 장벽이 크게 낮아졌다. 이때 확정된 주요 내용은 ①대형자동차세 인하 ②형식승인 및 검사절차 개선 ③TV광고 신규물량 우선배정 ④자동차 할부금융회사에 대한 외국인 지분제한 철폐 ⑤소비자 인식개선을 위한 노력 등이다. 당시 한미자동차협상은 미국 통상법 수퍼301조의 위협 속에 이루어져, 애초부터 우리나라의 양보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었다. 수퍼301조가 동원되면 우리는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되어 무역보복과 함께 WTO에 제소될 상황이었다. 한미자동차협상을 통해 자동차세는 2천500∼3천cc는 cc당 410원에서 310원, 3천cc 이상은 630원에서 370원으로 크게 내리고, 성능검사 면제기준은 1천 대로 줄어들었다(시행은 96년부터). 특소세 역시 2천cc 초과 때 25%에서 20%로 내렸지만 수입관세는 94년에 낮춘 8%를 유지하기로 했다. 당시 협상은 미국산 자동차에 주로 해당하는 2천cc 이상 자동차의 부담을 줄여주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2천cc 미만 중·소형차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다. 협상은 일단락 되었지만 미국은 95년에 끝낼 예정이던 수퍼301조의 시한을 2년간 연장하고, 수퍼301조 우선협상관행지정에서 한국의 자동차시장을 다시 지정함으로써 언제라도 개방압력을 행사할 여지를 남겨 놓았다. 협상이 타결되자 수입차와 국산대형차는 96년부터 시행될 특소세 5% 인하분을 미리 적용하는 등 적극적인 판매경쟁에 나섰다. 수입차업체들의 지방 공략 가속화 교통범칙금과 주차요금 크게 올라 95년 국내 자동차시장은 새차수요가 줄면서 25년만에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지만 수입차는 95년 상반기 기준으로 판매가 142.4% 늘어나는 등 시장규모가 커졌다. 수입차 판매증가와 때를 같이해 국내 수입차업체들이 공동의 관심사를 논의하기 위해 한국수입자동차협회를 창립했고, BMW는 수입차 메이커로는 처음으로 국내에 판매법인을 설립했다. 여러 수입업체들이 지방매장을 경쟁적으로 늘리기 시작하고, 미국에서 생산된 일본차를 수입하는 업체도 하나 둘 늘어갔다. 94년 처음 시행되어 성공을 거둔 고속도로 버스전용차선제는 95년부터 명절연휴나 연말연시, 휴가철 등은 물론 주말에도 시행되었다. 대상은 17인승 이상 상업용버스에서 6인 이상이 탑승한 9인승 이상 승합차로 확대되었고, 경부고속도로의 버스전용차선 구간도 상하행선 모두 양재∼회덕으로 연장되었다(길이 139.8km). 경찰은 전용차선제의 정착을 위해 신고제를 도입하고 위반차를 적발하기 위해 헬리콥터와 경찰차를 동원한 입체단속을 펼쳤지만 승합차의 승차인원을 확인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95년 현대는 국내 자동차 메이커로는 처음으로 공개리콜을 실시했다. 대상 차종은 94년 10월∼95년 3월 사이에 판매된 그레이스와 포터, 갤로퍼로, 제너레이터 진공펌프의 이상이 리콜 이유였다. 공개리콜은 선진국에서 이미 자리잡은 제도였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 자동차 메이커들은 자칫 품질이나 성능의 결함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비공개적이고 소극적으로 리콜을 실시해왔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통상산업부도 리콜제도를 강화하는 내용의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마련하고 관계부처와 협의에 들어갔다. 95년 3월에는 교통범칙금과 도심 주차요금이 크게 올랐다. 운전자의 신호 위반, 중앙선침범, 과속, 앞지르기 위반, 횡단보도 보행자 통행방해, 고속도로 갓길통행 등은 종전 2만∼3만 원에서 6만 원으로 오르고, 버스전용차선 위반, 안전거리 미확보, 주정차 위반, 교차로 통행방법 위반 등은 5천∼3만 원에서 4만 원으로, 차선 위반과 안전벨트 미착용도 1만 원에서 3만 원으로 올랐다. 또한 서울시내 공영주차장 요금이 66∼100% 인상되고 시간대별 요금산정도 30분 단위에서 15분 단위로 바뀌는 등 크게 올랐다. 교통범칙금과 주차요금의 인상으로 운전자의 부담은 커졌지만 교통위반 건수가 줄어들고 대중교통 이용이 느는 효과도 있었다. 96년 각종 혜택 주는 자동차카드 등장 국내 메이커들의 해외 생산 크게 늘어 1996년, 신용카드의 이용실적에 따라 새차를 살 때와 가맹점을 이용할 때 혜택을 주는 자동차카드가 처음 등장했다. 5월 삼성부터 시작해 현대, 대우 등으로 번진 자동차카드는 메이커들의 새로운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잡으면서 10∼11월 기준으로 삼성 130만 명, 현대 92만 명, 대우 80만 명이 가입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들 카드의 가장 큰 매력은 평소 적립한 포인트만큼 새차를 살 때 할인혜택을 준다는 것이었는데, 가입비가 비싼 편인 데다 웬만큼 사용해서는 실질적인 혜택이 될 만큼의 포인트를 적립하기가 어려워 ‘빛 좋은 개살구’라는 불만의 소리도 나왔다. 96년 11월, 서울 남산 1, 3호 터널을 통과하는 2인 이하 탑승 승용차에 대해 2천 원의 통행료를 징수하는 ‘도심 혼잡통행료’가 시행되었다. 통행료 징수시간은 평일 오전 7시∼오후 9시, 토요일 오전 7시∼오후 3시로, 돈을 내지 않고 통과하다 적발되면 1만 원의 과태료를 물렸다. 도심의 교통체증을 부채질하는 ‘나홀로 승용차’를 줄이기 위해 시행한 제도였지만 취지와는 달리 우회하는 차들로 한강로 일대가 몸살을 앓기도 했다. 96년에는 국내 자동차 메이커는 물론 수입차 메이커도 정부의 직접검사 때 결함이 발견되면 의무적으로 리콜을 하도록 법규가 마련되었다. 이를 이해 건교부는 97년부터 예산을 확보, 제작상의 오류나 차의 결함에 따른 사고를 막기 위해 판매기간에 관계없이 문제점이 나타난 차를 직접 사서 성능시험연구소에서 구조 및 안전검사를 통해 결함여부를 가리기로 했다. 검사 결과 정상운행과 안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면 제작회사에 강제리콜 명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면 최고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기로 했다. 한편 96년 무렵부터 국내 자동차 메이커의 해외생산이 활발해졌다. 국내 메이커가 96년 해외공장에서 생산, 판매한 자동차는 14만8천여 대(10월말 기준)로 전체 수출분 91만여 대의 16%를 차지했다. 내수시장 증가폭이 줄고 덤핑제소 등 수출시장 변수가 많아짐에 따라 해외공장을 통한 KD수출 확대가 국산차의 활로를 찾기 위한 적극적인 대안으로 떠올랐다. 현대는 보츠나와, 짐바브웨, 태국 등지에 현지공장을 세워 엘란트라, 쏘나타 등을 생산했고, 기아는 대만, 베네수엘라, 이란 등지의 공장에서 프라이드, 아벨라, 세레스를 연 1만5천∼3만 대 생산했다. 대우는 베트남, 중국, 우즈벡공화국 등에서 르망, 에스페로, 씨에로를 생산하고 이란과 폴란드에도 거점을 마련했다. 인도네시아, 기아 세피아 국민차 선정 일본에서 생산한 일본차 수입 첫 허용 96년 기아 세피아가 인도네시아의 국민차로 선정되었다. 세피아의 현지 이름은 ‘티모르’로, 현지 생산은 기아가 훔파스 그룹과 합작해 설립한 ‘기아 티모르 모터스’에서 맡게 되었다. 합작회사가 생산능력을 갖추기 전에는 기아가 1년간 4만5천 대의 세피아를 인도네시아에 반조립 방식으로 수출하고, 96년부터 합작회사가 현지에서 조립생산을 시작해 공장이 완공되는 98년 4월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기로 했다. 기아는 3년간 인도네시아 국민차사업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97년 4월 현지생산 이후 1년 이내에 국산화 20%, 2년내 40%, 3년내 60%를 이루며 이를 어기면 그동안의 모든 특혜를 반납하는 내용의 계약을 맺었다. 일본차가 인도네시아 자동차시장의 95%의 점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메이커인 기아가 인도네시아 국민차사업의 파트너로 결정된 것은 큰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인도네시아가 일본 기업을 제쳐두고 한국 기업을 파트너로 결정하자 미국과 일본정부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양국은 96년 반조립 방식으로 수출되는 세피아에 면세혜택을 준 것을 문제삼아 기아를 WTO에 불공정 무역행위로 제소하는 등 압력을 행사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95년 5월 마련된 경차 지원책이 9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자 당시 유일한 경차 대우 티코가 91년 6월 데뷔 이래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96년 한해 티코는 95년 실적의 두 배가 넘는 10만 대 이상이 팔렸고 덩달아 중고차 값도 회복되었다. 당시 경차가 받는 혜택은 ‘1가구 2차 중과세 면제’, ‘등록세 2.4%로 인하’, ‘면허세 인하’, ‘지역개발공채 매입액 50% 인하’, ‘고속도로 통행료 50% 할인’ 등이었다. 97년부터는 자동차보험료 소형차 대비 10% 인하, 공영주차장 요금 50% 할인, 보도블록에 반쯤 걸치는 개구리주차 허용 등의 혜택이 추가될 예정이었다. 이 같은 혜택에 힘입어 티코의 판매가 늘자 현대와 기아도 경차 개발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이밖에 자동차 운전면허시험제도가 15년만에 크게 바뀌었다. 새 제도는 1, 2종 구분 없이 학과시험을 법령 94%, 고장식별요령 6%로 통일하고, 코스와 주행으로 나뉘어 있던 기능시험도 실제 도로를 축소한 형태의 700m 코스에서 한꺼번에 치르도록 했다. 또 자동차운전 전문학원제도가 생겨 면허시험장에 가지 않고 학원에서 기능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일본산 일부차종의 직수입이 허용된 것도 96년의 일이다. 87년 수입차시장이 개방되었지만 일본에서 생산된 일본차는 여전히 수입선다변화품목에 묶여 있어 미국에서 생산된 일본 브랜드 자동차만 수입할 수 있었다. WTO체제가 출범하면서 일본차를 수입선다변화품목에서 차츰 제외하기로 한 정부는 96년 우선 1.5X 초과 2.5X 이하 디젤 세단과 3.0X 이상 왜건의 직수입을 허용했다. 사실 이 차들은 국내시장 수요가 거의 없는 차들이었지만, 직수입 허용은 꽉 막혀 있던 일본차의 국내 판로를 열고 가까운 미래의 전면개방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세계 군용 4WD의 발전사 지프에서 험비로 대표되는.. 2004-07-13
아시아를 제외한 전세계를 전쟁의 화마 속으로 몰아넣은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의 생활상은 물론 사상까지 바꾸어 놓았다. 또한 이때부터 기차와 자동차가 병력과 군수품을 실어 나르는데 쓰이기 시작하면서 이전까지 전쟁의 필수품이던 ‘말’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버렸다. 특히 2차대전 중에 선보인 4WD는 군 수뇌부의 생각을 바꾸는 큰 역할을 했다. 4WD가 개발되기 이전, 자동차는 좁은 길이나 사막, 진흙탕을 가리지 않고 갈 수 있는 말과 달리 길이 조금만 나빠도 제대로 달릴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군 수뇌부들은 자동차를 돈이 많이 드는 쓸모 없는 물건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차를 살 돈으로 힘세고 튼튼한 준마를 몇 필 더 장만하거나 대포를 몇 문이라도 더 만드는 데 투자하는 것이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자동차보다 훨씬 뛰어난 험지 돌파능력을 자랑하는 4WD가 등장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중간 중간 쉬어야하고 잠도 자야하며 먹이도 먹어야하는 말과 달리 자동차는 연료만 넣어주면 얼마든지 달릴 수 있고 야간운행도 가능했다. 물론 살아있는 말처럼 다치는 일도 없었다. 4WD는 곧 전세계 군대의 말을 빠르게 대체해갔고 이후 자동차 없이 전쟁을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다. 4WD의 살아있는 신화, 지프 지프(Jeep)는 현대적인 군용 4WD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지금은 지프가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어 ‘지프형 자동차’라는 차종까지 생겼지만, 원래 지프는 트럭으로 분류된다. 군대에서 쓰는 지프의 정식 명칭 역시 ‘1/4톤 다용도 전술 트럭’으로, 장비 및 인력의 수송, 경계, 정찰, 수색 등 모든 종류의 전술행동에 사용할 수 있는 차를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일에도 시작은 있는 법. 자그마한 상자처럼 생긴 지프가 처음 등장했을 때 반응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사람들이 선뜻 지프에 몸을 맡기려 하지 않자, 지프의 개발사는 군장성들을 모아 놓고 주행테스트를 했다. 미국의 밴텀사에서 개발해 윌리스 오버랜드사와 포드사가 만든 지프가 테스트를 통해 놀라운 장애물 돌파력과 경쾌한 주행성능,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다목적성을 선보인 이후, 지프는 유럽전선은 물론 태평양 한가운데의 작은 섬에서까지 널리 사용하는 군용차가 되었다. 특히 군용 4WD는 예나 지금이나 고급 승용차를 즐겨 타는 고위층 인사들조차도 타기를 주저하지 않는 차로 유명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과 맥아더 장군, 박정희 전 대통령도 모두 지프의 애호가들이었다. 지프가 큰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지프의 뛰어난 주행성능을 들 수 있다. 판 스프링과 쇼크 업소버의 조합은 편안한 온로드 주행성능과 강력한 오프로드 돌파력을 함께 충족시켰다. 또한 출력이 그리 강하지 않지만 무게가 가벼워 경쾌한 성능을 내고 튼튼한 엔진과 트랜스미션, 꼭 필요한 장비 외에는 과감히 생략해버린 단순한 구조 등이 군용 지프의 매력을 더한다. 두 번째로는 뛰어난 범용성과 확장성이다. 고정식 지붕이 없기 때문에 지프에 기관총을 달면 무장 정찰차가 되고, 들것을 달면 앰뷸런스가 된다. 또한 짐칸을 늘리면 수송용 트럭, 급수장비와 소방호스를 설치하면 소방차, 심지어 타이어 대신 철도 폭에 맞춘 바퀴를 달면 철길을 달리는 전용 자동차로 쓸 수 있는 놀라운 확장성도 지프의 성공비결이다. 미군의 지프는 종종 독일군이 사용한 비슷한 크기의 퀴벨바겐과 비교되지만, 사실 퀴벨바겐은 4WD가 아닐 뿐더러 전천후 트럭이라기보다는 장교용 스태프 카(staff car)에 가까운 차로 봐야 한다. 독일군이 쓴 군용차 가운데 지프와 비슷한 차를 꼽으라면 궤도식 모터사이클인 케텐크라트를 예로 들 수 있다. 케텐크라트는 모터사이클에 뒷바퀴 대신 궤도를 달아 놓은 것으로, 운전자를 포함해 3명밖에 탈 수 없지만 ‘기계 노새’라고 불릴 만큼 짐이나 병력 수송에 많이 쓰였다. 역설적으로 이 두 군용차만 비교해보면 2차대전에서 독일이 왜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에게 패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는 기계 한 대를 만들어내는데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철저함을 추구한 독일의 장인정신보다는 최대한의 생산성을 추구한 미국의 공업력이 앞섰다. 다시 말해 지프는 이 같은 미국 공업생산력의 저력을 보여준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프는 2차대전 이후 큰 변화 없이 한국전쟁에서도 활약했다. 당시 한국은 제대로 된 도로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고, 이때 험로를 종횡무진 달리는 지프를 본 한국인들의 뇌리 속에 지프는 ‘못 가는 곳이 없는 무적의 차’, ‘군인이나 높은 사람이 타는 차’로 각인되었다. ‘길이 아닌 곳’ 전문인 랜드로버 미국에 지프가 있다면 영국에는 랜드로버가 있다. 랜드로버 역시 지프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영국차답게 시대가 바뀌어도 전통적인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2차대전 때 랜드로버는 안 쓰인 곳이 없었지만, 특히 사막에서의 활약이 가장 눈부셨다. 영국의 특수부대 SAS가 선택한 랜드로버는 차 곳곳에 무기 거치대를 얹고 냉각수를 재활용하는 장치를 추가해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을 누비고 다녔다. 해가 질 무렵 사막은 황색이 아니라 핑크색을 띠는데, 이를 감안해 SAS 랜드로버는 차체가 핑크색으로 칠해져있었다. 그래서 ‘핑크팬더’라는 애칭이 붙은 이 차는 지금까지도 군용차 애호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다. 이후 영국군은 세계 각지의 식민지에 파견된 병사들의 발로 랜드로버를 애용했다. 각각의 사용목적이나 환경에 따라 다양한 파생 모델이 생겨났지만, 어떤 곳에서도 랜드로버는 완벽하게 적응했다. 아프리카의 사막에서부터 유럽의 진창길, 말레이시아의 정글까지 못 가는 곳이 없다보니 랜드로버는 결국 길이 아닌 곳을 전문으로 달리는 군용차가 되어 버렸다. 랜드로버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군대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지프가 전후 민간용으로 나와 레저 생활과 4WD 레포츠 활동의 불씨를 당겼다면, 랜드로버는 전문적인 탐험가들의 동반자로 대륙횡단이나 극지 및 오지 탐험 등을 통해 명성을 더해갔다. 특히 민수용으로 인기가 대단해서, 지금도 영국 시골에 가면 동네 차들 가운데 70%는 랜드로버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다. 쟁기를 달면 밭을 가는 트랙터로 변신하고, 짐칸을 달면 화물차, 가족이 외출할 때는 훌륭한 패밀리카가 되는 범용성과 막강한 성능은 랜드로버가 ‘노동자와 도전하는 자들을 위한 차’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1991년, 제1차 걸프전이 발발했을 때 필자는 BBC뉴스를 통해 방송된 한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예전에 비해 다소 달라지긴 했지만, 현지인의 복장과 관습을 따르는 전통에 따라 SAS 부대원들이 머리와 입을 ‘체체’라 부르는 아랍식 두건으로 가리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쓴 SAS 부대원들이 60여 년 전 그들의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랜드로버를 타고 사막을 누비는 모습은 랜드로버의 카리스마를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4WD군용차의 역사를 다시 쓴 험비 세계 각국의 군대는 대부분 앞서 말한 두 대의 4WD자동차, 지프와 랜드로버를 그대로 도입해 쓰거나 그 영향을 받아 자체적으로 제작한 군용차를 쓰고 있다. 아시아와 북미 국가들은 미국의 지프를, 영연방 국가들과 아프리카, 유럽국가들은 자연스레 랜드로버를 군용차로 썼다. 그러나 영국은 ‘랜드로버’라는 명품을 지금까지 잘 쓰고 있는 반면, 미국은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군용 4WD의 개념을 다시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지프로 시작해 M38, M38A1, M151 무트(MUTT)로 이어져 온 미군의 1/4톤 4WD차는 나날이 발전하는 현대 무기체계를 따라가기 힘든 상태였다. 특히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나 전쟁이 심화되면서 지붕이 없거나 소프트톱을 씌운 4WD군용차로는 자체 방어력이 너무 부족했다. 병사들은 탑승자를 위한 아무런 보호장비가 없는 지프 계열의 군용차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차 주변에 모래주머니를 쌓거나 조잡한 장갑 철판을 둘러야만 했다. 이같은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미군이 GM에 의뢰해 개발한 험비(Humbee, Hummer)는 이전의 4WD군용차와는 차별화된 몇 가지 특징들을 갖고 있다.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모듈화를 통해 변신할 수 있는 기본구조다. 험비는 전통적인 소프트톱 형태는 물론이고 화물수송에 알맞은 카고형, 병력수송용 일반형, 무장을 강화한 화력지원형 등 다양한 용도로 변신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특히 빈약하나마 금속으로 된 지붕이 있는 일반형은 병사들에게 다소의 위안을 안겨주었다. 애초 험비는 뛰어난 험지 주파력과 강력한 파워, 방어력 등을 염두에 두고 개발되었지만 실전을 겪으며 더욱 발전하게 된다. 금속으로 된 지붕에 안도했던 병사들은 막상 소말리아와 제1차 걸프전 등의 실전을 겪으며 험비의 방어력이 형편없다는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FRP와 알루미늄으로 만든 보디는 고작 권총탄과 파편 정도만 막을 수 있을 뿐 실제로는 간단한 소총 공격에도 맥없이 뚫려버렸고, 특히 RPG나 수류탄 공격을 받으면 여지없이 불쏘시개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무지막지한 괴물로 보였던 험비에도 아킬레스건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앞쪽 서스펜션 암과 구동축 부분이 약해 전장에서 말썽을 부리는 차가 많았다. 이런 실전경험들을 토대로 마침내 험비는 철판을 두른 장갑강화형이 나오게 되었고, 지금은 대부분의 전투용 험비들이 강화형으로 대체되었다. 몇몇 문제점들이 있음에도 험비는 현재 가장 성공한 군용차 가운데 하나가 되었는데, 이 같은 인기는 민간용 버전과 할리우드 영화를 통한 효과가 크다. 특히 험비의 남성적이고 저돌적인 디자인이 4WD 매니아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다. 험비는 많은 부분이 이전의 지프와 다르면서도 지프의 상징과도 같은 세로줄무늬 모양의 그릴과 둥근 헤드램프를 그대로 사용해 현대와 전통을 교묘하게 조합시켰다. 둥근 헤드램프와 세로 모양의 그릴은 크라이슬러로 넘어간 지프의 특허품이기 때문에 GM은 라이선스 요금을 물고 난 다음에야 이 같은 전통적인 지프 스타일을 쓸 수 있었다. 일본판 험비로 통하는 자위대 고기동차 미국에 의해 패전국이 된 일본은 전후 미제 지프를 군용차로 많이 썼다. 그러나 73년 지프를 국산화한 73식 지프를 개발해 90년대 초까지 군용차로 썼고, 지난 93년 낡은 4WD군용차를 대체하기 위한 신형 고기동차(High Mobility Vehicle)를 개발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도요타가 만든 고기동차는 최근 일본의 이라크 파병으로 인해 TV 뉴스에 자주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군의 고기동차는 별명이 ‘재피니즈 험비’일 정도로 험비를 닮았다. 그러나 일본군 고기동차는 까다롭고 비싸면서도 쓸데없는 것을 만드는 경향이 있는 일본 군수산업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기왕 베낄 요량이라면 험비를 그대로 베끼는 게 속 편했겠지만 이 차는 설계는 물론이고 부품의 구성이나 제원까지도 험비와 완전히 다르다. 그러면서도 디자인이 험비와 비슷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즉, 적에게 발각될 확률을 줄이기 위해 차체를 낮추면서도 최저지상고를 높이다보니 자연스럽게 가운데로 쏠린 섀시 양옆에 시트를 배치한 험비 스타일의 레이아웃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험비의 기본형이 4인승 좌석과 화물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일본의 고기동차는 2인승 좌석 뒤에 8명이 병렬로 탈 수 있는(우리나라 수송용 트럭 같은) 구조다. 즉, 험비는 용도에 따라 후방의 화물칸을 다양한 형태로 변형할 수 있지만 일본의 고기동차는 단순히 병력수송용으로밖에 쓸 수 없다. 또한 험비처럼 간단한 방어용 지붕도 없이 소프트톱만 달리고 변형 모델도 전혀 없으니 그야말로 앞뒤가 꽉 막힌, 군용차로는 0점짜리 차이지만 군용차이면서도 오디오가 달려 있을 정도로 내장재와 엔진 성능은 험비보다 뛰어나다. 현재는 단종된 이 차의 민간용 버전(도요타 메가크루저)이 군용버전과 색상만 다를 뿐 거의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고기동차의 인테리어 수준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은 고기동차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2000년 ‘경장갑 기동차’라는 이름으로 장갑을 보강한 차를 내놓았는데, 이 차는 93년에 나온 고기동차의 차체와 엔진 일부를 제외한 모든 부분을 다시 만들어 세금낭비라는 원성을 샀다. 스위스 군대가 운용하고 있는 군용차 ‘이글’은 미국의 험비를 라이선스로 도입해 자국 실정에 맞게 새로 설계했다. 이처럼 새차를 개발하는 경제적 부담을 줄여 실속을 챙긴 스위스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막대한 개발비를 낭비한 일본의 군용차는 무척 대조적이라 할 수 있겠다. 대한민국 국군의 4WD군용차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을 겪은 후 미군이 사용했던 모든 종류의 군용차를 빼놓지 않고 다시 쓴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당시 국내 자동차기술이 부족한 탓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는 4WD차에 관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자체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이것이 밑받침되어 우리나라의 첫 국산 4WD군용차인 아시아 K-100 시리즈가 탄생했다. 비록 K-100은 M-38과 M151 무트 시리즈의 장점들을 뒤섞어 만들고 상당부분 일본 기술을 이용해 개발한 차이기는 하지만, 30년 가까이 국군의 발 노릇을 훌륭하게 해왔고 지금도 현역에서 뛰고 있다. 물론 현재는 K131 시리즈에 바통을 넘긴 상태이지만, K-100 시리즈가 없었다면 K-131도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신형 K-131은 우리나라의 두 번째 소형 4WD군용차로, K-100에 비해 현대적인 기술을 많이 써서 만들었지만 정작 현장에서의 반응을 종합하면 그리 성공적이라 할 수 없는 것 같다. 운전병들의 말을 들어보면, K-131은 생각보다 힘이 부족하고 하체가 너무 낮아 기동에 불편을 느끼는 일이 많다고 한다. 이전의 K-100 시리즈는 출력이 낮았음에도 작고 가벼운 차체 덕분에 야전에서 무리 없이 운용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지금의 K-131은 몸집이 너무 비대해져버렸다. 더욱이 제조사인 아시아가 수익성을 고려해 애초부터 민수용 모델을 고려해 군용차를 만들다보니 K-131은 정작 야전에서 필요한 험지 돌파능력과 내구성이 크게 희생되었다. 다만 이웃 일본과는 달리 K-131은 처음부터 무반동포나 토우미사일 등을 얹은 변형모델이 나오고, 일반 시장에서도 기아 레토나로 판매되어 실패하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나라가 아직 ‘다목적 경장갑 소형 4WD’라는 현대적인 4WD군용차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K-131은 장교들의 스태프 카 구실만 할 뿐 보병들이 효과적으로 이동하고 전투차로 활용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에 하루 빨리 고기동차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물론 국군 역시 이런 계획을 진작부터 세우고 테스트 차도 만들었지만 예산과 관심의 부족으로 아직 이렇다할 진전이 없는 상태다. 현대전은 더 이상 구태의연한 보병들의 진격만으로는 힘들다. 기계화된 쾌속 진격작전이 주를 이루는 현대전의 교리를 감안하면, 우리 군도 신형 4WD를 보유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겠다. 앞서 잠깐 언급한 스위스의 ‘이글’도 참고할 수 있을 듯하다.
내수와 수출 호황으로 국내 자동차산업 ‘제2의 도약기.. 2004-06-08
건국 이래 최대의 교통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고속철도의 차종이 1993년 TGV로 결정되었다. 프랑스 알스톰사의 TGV와 독일 지멘스사의 ICE를 놓고 경제성, 금융조건, 계약조건, 운영경험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였다. 이로부터 11년 후인 올해 4월 고속철도는 ‘KTX’란 이름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93년 한국 정부는 유엔평화유지활동단으로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에 상록수 부대를 파견했고, 대전에서 개최된 엑스포는 1천400여만 명의 관람객을 유치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1994년 서울시는 ‘서울 정도 600년의 해’를 선포했고, 정부는 광천음료수(생수)의 판매를 공식적으로 허가했다. 같은 해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오자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무르익기 시작했지만, 7월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자 정상회담은 물거품이 되었다. 산악인 허영호는 한국인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했고, 마라토너 황영조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남자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편 93∼94년은 각종 대형사고로 얼룩졌다. 93년 구포역 열차 탈선사고(3월)를 시작으로 아시아나항공 비행기 목포 추락(7월), 서해 훼리호 침몰(10월) 등이 일어났고 94년에도 서울 성수대교 붕괴와 서울 아현동 도시가스지하저장소 폭발사고 등이 잇따랐다. 하늘과 땅, 물위에서 각종 대형사고가 일어나자 ‘안전’을 무시한 채 고도성장만 추구해온 한국사회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높아지기 시작했다. 1993년 ‘자동차 600만 대 시대’ 열어 자동차 3사 애프터서비스 경쟁 치열 1993년 국내 자동차 보유대수는 600만 대를 넘어섰고, 생산 200만 대를 돌파하면서 한국은 세계 7위의 자동차 생산대국이 되었다. 자동차 수출은 제2의 도약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상최고치를 경신했다. 이 같은 수출증가에는 부품을 내보내는 KD(녹다운 방식)수출이 큰 역할을 했다. 89년 캐나다 브로몽에 국내 첫 해외 현지공장을 세운 현대는 13개국에 17개의 현지조립공장을 운영 또는 건설추진하고, 대만과 필리핀, 베트남, 이란,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 등 6개국에 진출한 기아는 94년 말까지 해외생산 10만 대 구축을 목표로 분주히 움직였다. 특히 기아는 한중수교 이후 대만에 대한 완성차 수출이 거의 중단되는 상황에서도 부품수출형태인 KD수출을 지속해 단교 이전과 비슷한 수준인 2만여 대를 수출하기도 했다. 대우는 우즈벡공화국과 이란, 필리핀 등 3개국에 진출하고, 쌍용은 베트남에서 코란도를 녹다운 조립한데 이어 스페인과 헝가리에서도 코란도를 조립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국내 자동차업체의 수출국가 역시 171개국으로 크게 늘어났다. 각 메이커들은 북미와 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남미·아프리카 등지로 시장을 넓혀갔다. 당시 수출이 크게 늘어난 중국과 동유럽은 ‘떠오르는 시장’으로 주목받았다. 연이은 새차 데뷔로 4WD시장 달아올라 준중형차도 ABS와 에어백 달기 시작해 93년은 현대·기아·대우 등 자동차 3사의 애프터서비스 경쟁이 유난히 치열해진 해이기도 하다. 3사는 잇따라 무상점검코너를 마련하고 순회정비를 비롯한 다양한 서비스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같은 서비스경쟁은 90년대 초부터 자동차 내수시장이 고도성장기를 넘기고 저성장시대에 들어가면서 공급자 주도에서 소비자 주도로 바뀌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현대는 보증수리와 안전점검을 받을 수 있는 새차 점검코너를 62곳에서 200곳으로 늘리고, 기아도 750억 원을 투자해 서비스망을 300개에서 461개로 늘리고 기동서비스차와 정비인력을 확충했다. 대우는 현대와 기아보다 더욱 공격적인 애프터서비스를 펼쳤다. 대우는 92년 24시간 정비서비스제도를 실시한데 이어 주말정비교실, 세차 서비스, 고객대기실 마련 등 한 차원 높은 고객서비스를 펼쳤고, 그 결과 93년 내수시장에서 92년에 비해 25% 이상 성장하고 수출 역시 146%나 늘었다. 한편 93년 10월 국내 첫 자동차 전용 서킷인 용인 자연농원 모터 파크(현 에버랜드 스피드웨이)가 완공되었다. 모터 파크의 완공은 한국 모터스포츠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밖에도 93년에는 유연휘발유의 공급이 중단되면서 주유소에서 무연휘발유만 팔게 되었고, 6개 대도시에서 주유소간 거리 제한이 폐지되면서 주유소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93년 7월 기아가 스포티지를 선보이면서 4WD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기아가 진출하기 전 쌍용(코란도)과 현대(갤로퍼), 아시아(록스타) 등 3사가 벌이던 시장다툼이 기아가 가세하면서 4파전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스포티지에 이어 9월 쌍용이 코란도 훼미리에 이은 두 번째 고유모델인 무쏘를 선보이고 우성산업이 92년 하반기부터 지프를 수입해 팔기 시작하면서 4WD의 선택 폭은 더욱 커졌다. 특히 지프형 차는 94년부터 승용차로 분류될 예정이어서 서둘러 4WD를 사려는 사람들이 93년 줄을 이었다. 지프형 차는 94년 승용차로 분류되면서 특소세가 붙어 차값이 올랐고, 배기량에 관계없이 연간 10만 원만 부과되던 자동차세 역시 배기량에 따라 부과되면서 크게 올랐다. 93년 초 쌍용과 벤츠의 협력은 자동차업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빅뉴스였다. 2월 쌍용은 승용차 기술이전과 독자모델 생산에 관해 벤츠와 합의하고 96년부터 벤츠와 기술제휴해 1천800∼3천200cc급 중대형 승용차를 생산하기로 했다. 벤츠가 해외에 기술을 이전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 벤츠와 쌍용의 제휴는 세계 자동차시장의 침체로 유럽의 고급차들이 일본의 대중차에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유럽 고급차 메이커가 전략수정을 하게된 첫 사건이었다. 그동안 4WD와 트럭, 버스 등을 생산해온 쌍용은 벤츠와 손잡은 것을 계기로 승용차시장까지 넘보며 종합 자동차 메이커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1994년 1월 1가구 2차 중과세 도입 고속도로 버스전용차로 신설해 단속 한편 삼성의 승용차시장 진출 움직임은 93년에도 계속되었다. 그동안 숱한 소문을 불러왔던 삼성의 승용차시장 진출을 이건희 회장이 공식화하면서 삼성의 발걸음은 더욱 바빠졌다. 특히 삼성생명이 기아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일이 일어나자 업계 전문가들은 “삼성의 승용차시장 진출이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분석했다. 93년 무렵부터 자동차의 기능과 안전성, 편의성을 높여주는 다양한 편의장비들이 국산차에도 속속 쓰여지기 시작했다. 또한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이들 부품의 국산화작업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특히 고급차에나 쓰이던 ABS나 에어백 등의 값비싼 안전장비가 중형차와 중소형차에까지 달리게 된 부분에 주목할 만하다. 현대는 89년 그랜저 V6 3.0에 ABS를 처음 쓴 이후 중형차인 쏘나타에 이어 93년 준중형차 엘란트라에도 얹기 시작했다. 대우 역시 수퍼살롱과 프린스에 얹던 ABS를 93년형 에스페로에 얹기 시작했다. 이밖에 DOHC와 전자제어식 서스펜션, ECU 등의 고급장비가 중형차 혹은 소형차에까지 활발하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1994년 1월 1일부터 1가구에서 2대 이상의 차를 보유하면 두 번째 차부터 등록세와 취득세를 2배로 물어야하는 복수보유중과세(1가구 2차 중과세)가 도입되었다. 자동차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것을 막아보자는 수요억제정책으로 실시된 1가구 2차 중과세는 내용이 충분히 홍보되지 않은 채 시작되어 초기에 적지 않은 혼동을 일으켰다. 중과세법은 대가족에게 불리하고 핵가족 특히 돈이 많은 사람에게 유리하다는 허점을 안고 있었고, 다른 대안 없는 수요억제는 근본적인 자동차대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중과세법의 여파는 상당히 컸다. 새차 계약을 취소하는 사람이 많았고, 승합차로서 과세대상이 안 되는 9인승 지프형 차나 밴의 수요가 늘어났다. 전국의 비법인 영세 자영업자들은 버거운 대가를 치르는 반면 부유층들은 중과세를 물고도 여전히 두세 번째 차를 사들여, 효과는 없이 영세민의 세금부담만 늘려놓았다는 지적의 소리가 높았다. 94년 10월 서울 성수대교가 붕괴되는 충격적인 사고가 일어났다. 10월 21일 오전 7시 40분 성수대교의 북단 5번째와 6번째 교각 사이 상판 50여m가 갑자기 내려앉으면서 다리 위를 지나던 자동차들이 20여m 아래로 추락했다. 사고 당시 성수대교는 출근길 차들로 붐비는 상황이어서 대혼란을 불렀고, 특히 등교길 학생들을 가득 태운 시내버스가 뒤집히면서 추락해 48명이 목숨을 잃었다. 충격과 분노를 안겨준 이 사고는 무리하게 신공법을 쓴 원천적인 부실시공과 준공 이후 설계하중을 초과하는 과부하의 지속, 취약한 접합부위의 방치 등이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인재였다.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새 다리가 완공될 때까지 1조 억 원이 넘는 교통비 손실도 가져왔다. 한편 94년 8월부터 고속도로 전구간에서 통행료 징수방법이 선불제에서 기계식 후불제로 바뀌었다. 후불제가 시행되기 이전에는 고속도로에 진입하면서 목적지까지의 통행료를 선불로 내야 했다. 새로운 제도 시행 초기에는 전국 고속도로의 톨게이트가 통행료 선불제에 맞게 설계된 곳이 많아 비좁은 출구 방향 톨게이트 앞에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명절·연휴 때의 만성적인 교통체증 문제를 해소시키기 위한 고속도로 버스전용차로제가 처음 시행된 것도 94년의 일이다. 7∼8월 여름 휴가철에 세 차례의 시범운행을 거쳐 추석연휴인 9월 17∼21일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일부구간에 고속도로 전용차로제가 실시되었다. 새 제도는 연휴 기간에 승용차로 8∼9시간 걸리던 거리를 버스로 2∼3시간만에 달린 성과를 거두었고, 이 기간 동안 고속버스로 귀향하기 위해 열차 입석표나 심야표를 가진 사람들이 무더기 환불하는 사태가 벌어져 서울에서만 2만6천 장의 철도승차권이 반환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밖에도 고속버스전용차로제는 연휴기간동안 고속버스 이용객을 14% 늘리고 수도권 하행선의 자가용 통행을 5.5% 줄이는 성과도 거두었다. 엑센트와 아벨라 등 신세대 소형차 늘어나 국내 수입차시장, 미국 업체가 50% 차지해 94년 1월 쌍용은 코란도 훼미리로 파리-다카르 랠리에 참가해 종합 8위를 차지한데 이어 10월에는 국내 메이커로는 처음으로 파라오 랠리에 무쏘로 출전해 4WD 부문 1위, 종합 2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국산차가 국제규모 랠리에서 세계의 유명 자동차와 겨뤄 상위권에 오른 첫 쾌거였다. 파라오 랠리는 매년 열리는 국제적인 오프로드 경기로, 파리-다카르 랠리의 주관단체인 TSO가 주최한다. 코스는 파리-다카르 랠리의 1만3천km보다 짧지만 비슷한 환경에서 치러지기 때문에 파리-다카르 랠리 참가에 뜻을 둔 많은 팀들이 사막 적응과 경주차 성능 점검을 위해 참가하는 랠리로 유명하다. 한편 3월 기아 아벨라, 4월 현대 엑센트가 데뷔하면서 기아 프라이드, 대우 르망, 현대 스쿠프 등과 함께 국내 소형차시장이 다양해졌다. 신선한 스타일의 아벨라와 엑센트가 구심점이 된 소형차시장은 한층 젊은 분위기로 바뀌었고, 그 결과 소형차를 찾는 주 고객들도 자동차를 처음 사는 20대 신세대로 변했다. 이들 두 차종은 거리 분위기를 바꾸는 데에도 큰 몫을 했다. 두 차 모두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강렬하고 개성 있는 원색 컬러를 썼기 때문. 그러나 새 소형차의 등장에도 국내 소형차시장은 침체를 벗지 못했다. 당시 내수시장은 준중형차와 중형차의 판매가 크게 늘어나는 차급 상급화의 추세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수출시장에서는 여전히 소형차가 주력인 것과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한편 선진국의 시장개방 압력이 커지면서 수입차에 대한 관세가 10%에서 8%로 낮아졌다. 외제차에 대한 거부반응도 줄기 시작해 수입차는 94년 한해 3천865대가 팔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내수시장 점유율 0.34%에 불과한 수치지만 3천865대는 자동차시장 개방 7년만의 최고기록이었다. 업체별로 보면 판매 1위는 포드, 이하 크라이슬러, 벤츠, 볼보, 푸조, BMW, 사브, 폭스바겐/아우디 순이었고 모델별로는 머큐리 세이블, 볼보 940GL, 지프 체로키, 아우디 100, 벤츠 C180, 푸조 405SRi, 닷지 캐러밴 2.5, 벤츠 E200, 벤츠 C200이 베스트셀러 10 안에 들었다. 유럽과 일본산 수입차가 많이 팔리는 지금과는 달리 94년에는 비교적 값이 싼 미국차가 전체 수입차 판매의 50% 이상을 차지했다. 94년 5월에는 삼성이 15톤 덤프트럭을 선보이면서 국내 자동차시장에 진출했다. 삼성으로서는 자동차사업에 진출할 뜻을 비춘 지 근 20년만에 이룬 성과였고, 상용차개발에 들어간 지 5년, 자동차사업 진출계획을 공식화한 지 2년만의 일이었다. 삼성은 상용차에 그치지 않고 94년 4월 닛산과 승용차 생산기술 제휴협정을 맺었고, 같은 해 11월 통상산업부로부터 승용차사업 진출을 공식적으로 허용 받았다. 94년에는 또 운전면허시험 관할지역제가 폐지되어 주소지에 관계없이 전국 어디에서나 면허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지체장애인도 특별측정시험을 통과하면 영업용차를 몰 수 있는 1종 면허를 발급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 서해안 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이 개통되어 서해안 시대의 개막을 예고했고, 수도권에서는 과천과 분당을 오가는 전철이 개통되어 신도시 주민들의 교통편의성이 높아졌다.
엔진 기술자립 이루고 자동차 대중화시대 열어 되돌.. 2004-05-11
1991년 미국이 이라크를 전면 공격하면서 걸프전이 발발했다. 미국 CNN 방송은 바그다드에 포탄이 떨어지는 광경을 실시간 방송으로 전세계에 내보냈고, 시청자들은 안방에 앉아 사상 첫 ‘전쟁 생중계’를 지켜보았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제주도를 찾아 노태우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노 대통령은 “한국은 핵무기를 제조, 보유, 저장, 사용하지 않겠다”는 비핵화 선언을 했다. 1992년 한국은 국제 스포츠계에서 연이은 승전보를 울렸다. 축구대표팀이 64년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본선 진출권을 따냈고, 2월 프랑스 알베르빌에서 열린 제16회 동계올림픽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쇼트트랙 부문에서 금메달을 따내 ‘쇼트트랙 강국’이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황영조는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해 ‘몬주익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밖에 국내에서는 영종도 신공항과 경부고속전철 기공식이 열렸고, 미국 LA에서는 흑인 폭동이 일어나 한국 교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1991년 국내 첫 국민차 대우 티코 탄생 독자 엔진 개발로 기술 자립 기반 닦아 1991년 대우국민차 티코의 탄생은 큰 화제를 모았다. 5월 모습을 보인 배기량 800cc의 국내 첫 경차 티코는 기본형이 360만 원이었다. 티코는 국내에서 가장 작은 차체로 날로 심각해지는 교통체증과 주차난을 완화시키고 X당 24km의 뛰어난 연비로 에너지 절약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서민들의 주머니를 열기에는 조금 비싼 편이었지만 데뷔 첫해 5만 대가 판매되며 인기를 끌었다. 사실 국민차 계획이 처음 나온 것은 80년대 중반이지만 구체화된 것은 89년이다. 당시 정부가 ‘배기량이 작고 값싼 차를 만들어 모든 국민이 탈 수 있게 하겠다’면서 여러 지원책을 내놓아 국민차 생산계획이 급물살을 탔다. 전문가들은 국민차가 ‘작고 값싼 차’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모터리제이션이 뿌리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91년은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이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해였다. 현대가 알파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개발해 오랜 숙원이었던 독자적인 엔진 및 트랜스미션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차체와 섀시 등은 자체 설계능력을 갖추었으나 승용차의 핵심부분인 엔진 및 트랜스미션은 기술력 부족으로 외국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알파 엔진의 개발로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이태리, 영국, 스웨덴에 이어 세계 8번째 자동차 엔진 독자개발 생산국이 되었고, 대당 5만∼6만 원을 물었던 로열티를 절약해 연간 500억 원을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알파 엔진은 1.5X급 3밸브 휘발유 엔진으로 자연흡기식(NA)과 터보(TC) 2종류로 개발되었고, 91년 4월 자연흡기 엔진을 처음 얹은 스쿠프 알파가 나와 순수 우리 기술에 의한 국산 고유모델 1호를 기록했다. 현대에 이어 대우와 기아도 자체기술로 엔진개발에 성공해 91년은 우리 자동차공업이 기술자립을 선언한 원년으로 기록된다. 걸프전 여파로 승용차 강제 10부제 실시 북미 수출 줄자 유럽과 중동으로 눈 돌려 한편 90년 시작된 국내 승용차의 고성능화와 DOHC 열풍은 91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8월 현대가 쏘나타 2.0에 DOHC 엔진을 얹으면서 준중형차에서부터 시작된 DOHC 물결이 중형차에까지 확대되었다. 또한 10월에는 현대 스쿠프 터보가 등장해 국내 터보 자동차 시대의 막이 올랐다. 그러나 DOHC 물결은 이후에도 꾸준히 전차종으로 퍼져 나갔지만 터보 엔진은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국내 자동차업체들은 91년 한해 전세계 45개국의 자동차 생산국(조립 포함) 가운데 생산 세계 9위, 수출 세계 8위를 기록했다. 전국의 자동차 대수는 400만 대, 운전면허 인구는 900만 명을 넘어섰다. 자동차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시내 도로는 항상 붐볐고 고속도로 역시 넘치는 차로 기능을 잃어버렸다. 당시 경부고속도로(4차로)의 하루 통행량은 4만2천 대가 적정선이었지만 하루 평균 27만 여대가 경부선을 오갔다. 고속도로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경인·경수 고속도로의 2인 이하 승용차 통행제한책도 나왔으나 국도 마비와 생업 위협 등을 들어 반대여론이 들끓자 계획이 전면 취소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90년 8월부터 시작된 페르시아만의 긴장사태가 91년 1월 걸프전쟁으로 터졌다. 정부는 걸프전에 따른 1단계 에너지 절약시책으로 승용차 10부제 운행, TV 방영시간 단축, 등유 제한판매, 전기 사용제한 등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자가용 승용차와 전세관광버스, 관용버스가 1월 18일부터 4일간의 계몽기간을 거쳐 강제 10부제 운행에 들어갔고, 위반차는 10만 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했다. 10부제로 인해 당시 서울에서만 하루 37만X의 기름(약 1억7천600만 원)을 절약할 수 있었고, 출퇴근 때는 주행속도가 빨라지고 대기오염이 줄어드는 등 부수효과도 챙길 수 있었다. 10부제 운행은 걸프전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어 교통정책으로 정착될 조짐을 보였다. 10부제 운행으로 쉬는 차들은 전국적으로 하루 25만 대꼴이었지만 매일 2천 대의 새차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4∼5개월 후면 10부제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갈 상황이었다. 또한 10부제가 1가구 2차를 부채질하고 자동차를 생업에 쓰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준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3월 18일 승용차 10부제 운행이 전면 해지되었다. 삼성, 상용차 생산으로 자동차시장에 첫발 캘리포니아주법 대비 무공해차 개발 러시 한편 수출시장에서 국산차는 부진을 겪고 있었다. 88년 57만6천 대를 기점으로 89년 수출이 크게 줄어든 후 90∼91년 42만 대의 수출목표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같은 수출부진은 91년 초 일어난 걸프전과 미국의 경기침체, 자동차 수요위축 등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갈수록 떨어지는 국산차의 값과 품질경쟁력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현대는 91년 스쿠프, 엘란트라를 미국에 투입해 판매차종을 늘리고, 아시아는 록스타 휘발유 모델을 유럽에, 대우는 에스페로를 수출에 투입하는 등 수출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각 자동차업체들은 대미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91년 상반기 중 20개국, 하반기 중 40여 개국에 진출하면서 유럽·중동을 새로운 수출시장으로 개척해갔다. 국내 유통시장이 개방되어 외국 자동차 메이커가 국내에서 직접 승용차를 팔 수 있게 된 것도 91년의 일이다. 유통시장 개방 이전 정부는 수입차의 관세를 높게 매기고 수입을 하더라도 한국 대리점을 통해 팔게 함으로써 국내업계를 보호해왔다. 유통시장의 개방으로 전자 등 기타 분야는 초긴장 상태에 빠졌지만 현대·기아·대우 등 국내 자동차 메이커들은 의외로 느긋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 본토에서 생산된 일본차는 수입다변화 품목에 묶여 수입이 금지되어 있었고 수입차와 국산차의 값 차이도 컸기 때문이다. 또한 무역적자와 수입증가에 대한 해결책으로 과소비 추방운동이 펼쳐져 대형차와 수입차를 타는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한편 91년 9월 고속도로 통행료가 1km당 20원에서 27원(1종 자동차 기준)으로 인상되어 운전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통행료의 기습 인상으로 서울­부산간 승용차 통행요금은 8천500원에서 1만1천400원으로 올랐다. 또한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지역 자동차는 200만 대를 넘어섰고, 정부고시제로 운영되던 유류 판매가격이 주유소별로 자율화되었다. 1992년에는 국내 자동차업계의 판도에 큰 변화가 있었다. 90년 일본 닛산 디젤로부터 상용차 생산기술을 도입하겠다는 신고서를 냈으나 반려된 삼성중공업이 상용차사업에 진출하게 된 것. 업계에서는 삼성이 이를 교두보로 삼아 곧 승용차 생산에도 참여할 것으로 내다봤다. 대우는 신진시절부터 관계를 맺었던 오랜 파트너 GM과 결별하고 일본 혼다와 기술제휴를 맺었다. 대우는 먼저 부평 제2공장에 생산라인을 설치하고 트랜스미션 등 주요부품을 혼다로부터 공급받아 3.2X 엔진을 얹은 레전드를 생산하기로 했다. 쌍용 역시 벤츠와 기술 및 자본제휴관계를 맺고 휘발유 엔진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해 승용차사업에 뛰어들 준비를 했다. 고급차 메이커인 벤츠와 쌍용이 손잡고 국내 승용차 생산에 뛰어들면 대형승용차시장은 어느 곳보다 판도변화가 클 것으로 예측되었다. 이밖에 한라중공업이 이태리 이베코와 손잡고 대형트럭시장에 뛰어들었다. 1.5X 승용차 세금 7억 아파트 재산세와 같아 현대정공 갤로퍼, 쌍용 4WD 독주 제동 걸어 92년 10월 전국의 자동차대수는 500만 대, 서울의 자동차는 150만 대를 넘어섰다. 특히 서울시내의 자동차는 90년 100만 대를 돌파한 후 2년만에 50%가 늘어났다. 또한 운전면허 인구도 92년 1천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전체 인구의 23%로 국민 4.3명당 1명꼴이었다.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만 18세 이상 국민을 기준으로 보면 32.8%, 3명당 1명꼴로서, 운전면허가 신분증을 대신하는 시대가 시작된 셈이었다. 92년 국내 승용차 생산능력은 연간 200만 대를 넘었고, 우리나라는 세계 7위의 자동차생산국이 되었다. 91년까지만 하더라도 생산능력은 115만여 대로 영국(123만여 대)에 뒤졌었다. 영국을 제친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에 이어 세계 7위의 승용차 생산국으로 자리를 굳혔다. 한편 눈부신 양적 성장을 계속하던 국내 자동차업체들은 92년 잇달아 무공해차 개발경쟁에 나섰다. 석유가 동날 것에 대비하고 자동차 공해를 줄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98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시행할 무공해차 판매 의무화가 큰 자극이 되었다. 캘리포니아주법을 미국의 다른 주들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세계 최대 자동차시장인 북미를 놓치지 않으려면 휘발유 대체차의 개발이 시급했다. 국내에서는 기아가 91년 7월 국내 첫 메탄올 자동차를 개발해 무공해차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후 대우가 압축천연가스(CNG) 자동차를 선보였고 현대는 91년 11월 전기자동차 1호를 발표했다. 초저연비 린번 엔진 개발에도 힘을 쏟은 현대는 92년 2월 알코올자동차를 개발해 브라질에 수출하기도 했다. 92년 1.5X 소형 승용차에 부과되는 자동차세가 시가 7억 원짜리 아파트 재산세와 같은 것으로 드러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미국의 10.1배, 일본의 2.4배로 자동차 보유세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92년 한해 거둬들인 자동차관련 세금은 모두 6조6천억 원으로 전체 내국세수액의 20% 이상을 차지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 세금이 도로 확장 등 교통관련 시설에 쓰인 비율이 50% 미만인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이웃나라 일본은 자동차로 거둔 세금을 교통개선 등 자동차관련 사업에 투자하는 비율이 94%에 이르렀다. 국내 대형차시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80년대 말부터 메이커들이 잇달아 3천cc 대형차를 선보이면서 국산 고급차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 중에서 현대 그랜저가 독주하는 분위기였다. 89년 3월 데뷔한 대우 임페리얼과 기아가 OEM 방식으로 들여온 머큐리 세이블은 판매면에서 그랜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기아는 현대 그랜저와 맞붙기 위해 88년 10월 개발에 들어가 2천억 원을 들여 3년 6개월만에 완성한 새 대형차 포텐샤를 4월에 선보였다. 포텐샤가 등장하자 현대는 대형차시장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 그랜저 후속 모델인 ‘LX 프로젝트’를 서둘러 진행시켜 92년 9월 뉴 그랜저를 내놓았다. 쌍용이 독주하던 4WD시장에 판도변화가 생긴 것도 92년이다. 신진-거화-동아-쌍용의 독주로 이어져 오던 국내 4WD시장은 89년 7월 산업합리화조치가 해제되어 자유경쟁시대에 접어든 상태였다. 코란도와 훼미리로 국내 4WD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쌍용에 먼저 도전장을 던진 업체는 아시아자동차다. 10여 년간 군용 지프를 만들어 오던 아시아는 90년 록스타를 선보였지만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92년 10월 현대정공이 미쓰비시 파제로를 기본으로 갤로퍼를 선보이자 상황이 바뀌었다. 갤로퍼는 4WD시장의 선두주자인 쌍용의 코란도와 훼미리를 제치면서 ‘올해의 빅 히트상품’으로 선정되는 등 큰 인기를 모았다. 한편 기아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디자인과 섀시를 자체 개발한 기아의 첫 고유모델 세피아로 준중형차시장의 베스트셀러 현대 엘란트라에 도전장을 던졌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운전자가 자동차로 엽기적인 행각을 벌여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91년 정신질환을 앓는 20대 청년이 여의도 광장에서 살인질주를 한 데 이어 92년에도 정신질환에 걸린 택시기사가 여의도 광장에서 고의로 차를 몰아 22명을 다치게 했다. 사람들은 정신병원 신세까지 진 사람이 1종 면허를 발급 받아 6년이나 개인택시 영업을 해왔고 정기적성검사와 사업면허 갱신을 받을 때도 적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밖에도 92년 1월 수입차 관세가 20%에서 17%로 내렸다. 91년 7월 휘발유 특소세가 30∼35% 오른 데 이어 92년 1월 다시 9∼10% 오르면서 기름값이 크게 올랐고, 기름값 부담이 커지자 경제성이 뛰어난 대우 티코는 판매에 날개를 달았다. 좌석수를 줄이고 시트의 크기를 키운 우등고속버스와 기본요금이 3천 원인 모범택시가 등장(서울)한 것도 92년이다.
모터리제이션 가속화되고 역기능도 속속 불거져 .. 2004-04-12
1989년 국내에서는 대학생 과외가 전면 허용되고 TV 과외방송이 처음 등장했다. 구정 명칭이 ‘민속의 날’에서 ‘설날’로 바뀌고 가정의례준칙도 폐지되었다. 민간인의 북한 방문도 잇따랐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6·25 이후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이후 고 문익환 목사와 문규현 신부가 평양을 방문했고, 한국외대 학생인 임수경이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후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기도 했다. 정부는 분당과 일산지구 신도시 개발계획을 발표했고, 해외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역사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1990년 정부는 근로자의 최저임금을 16만5천600원으로 결정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범죄와 폭력을 추방하겠다고 선포했고, KBS는 문자다중방송을 시작했다. 새로운 민영방송(채널 6)이 서울방송으로 결정되고, 식목일과 국군의 날,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1989년 자동차 내수판매가 수출실적 앞질러 도로에 차 늘면서 ‘역기능’ 사회문제로 부상 1989년 자동차 관련 톱뉴스는 자동차시장의 역전현상, 즉 내수가 수출대수를 앞지른 일이었다. 지난 85년 이후 매년 70% 이상 급격하게 늘어나던 자동차 수출이 88년 57만6천134대를 기록한 이후 89년 35만7천 대로 35% 줄어들었다. 수출이 줄어든 원인으로는 87년부터 계속된 원화절상과 노사분규, 메이커의 제품 개발능력 부족, 미국 시장의 판매감소 등이 지적되었다. 수출이 줄어든 데 반해 내수시장이 큰 폭으로 성장해 자동차시장의 수출·내수 불균형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88년에 이어 89년에도 자동차 부품업계 및 완성차업체의 노사분규가 이어지면서 심한 생산차질을 빚었다. 특히 내수시장은 88년보다 52% 늘어나면서 최대호황을 맞았지만 생산차질로 차를 주문한 고객들이 길게는 서너 달 동안 기다려야 했다. 현대, 기아, 대우의 생산대수는 당초 목표치보다 28만 대가 줄어든 114만5천 대에 그쳤고, 현대는 여름부터 선적할 예정이던 새 엑셀을 하반기에야 미국에 실어보낼 수 있었다. 89년 말 전국 자동차 대수는 대략 260만 대로, 하루평균 1천200대의 자동차가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특히 인구가 밀집해있는 서울에서는 88년 중반 73만여 대의 등록대수가 89년 중반 92만여 대로 1년 사이 20% 이상 늘었다. 국내 자동차 대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역기능도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울 시내를 비롯한 대도시의 교통난이 심각한 수준에 다다랐고 교통사고율 역시 마찬가지였다. 89년 초 치안본부가 발표한 88년 교통사고 현황 공식집계에 따르면, 88년 한해 발생한 교통사고는 모두 21만6천719건으로 1만294명이 숨지고 27만239명이 부상을 입었다. 하루평균 529건의 교통사고가 꼬박꼬박 일어나고 매일 28명의 사망자와 738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셈으로,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자동차의 갑작스런 증가는 애프터서비스 문제도 심화시켰다. 89년 1월부터 6월까지 한국소비자연맹에 접수된 고발품목을 살펴보면 자동차가 271건으로 단일품목 중 1위였다. 이는 88년 같은 기간에 비해 146.5%나 늘어난 것으로, 보증기간 이내의 차가 63%, 5천km 이내에 문제가 생긴 차도 33%나 되었다. 새차의 결함이 많다보니 보증수리기간 안에 문제가 생긴 차들이 몰리는 직영정비공장은 늘 북새통을 이루었다. 특히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9월부터 자동차 무상보증 수리기간이 1년·주행거리 2만km에서 3년·6만km로 늘어났지만 국내 자동차 3사 직영정비공장의 수가 턱없이 부족해 보증수리를 받는 데에도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국내 3사 잇따라 3.0X 엔진 대형차 선보여 ‘해금기’ 맞은 대기업들 자동차분야에 관심 89년 7월에는 자동차보험 약관이 일부 바뀌었다. 새 보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고기록 점수제 도입이다. 즉 예전에는 지난 6개월간의 사고기록을 기준으로 보험료를 산정했으나 새 약관에서는 과거 3년 동안의 사고기록을 기준으로 삼았다. 또한 새 약관은 21세 미만의 남자는 100%, 여자는 50% 할증하는 등 사고위험이 높은 운전자의 부담을 늘리는 대신 무사고 운전자의 보험료 할인폭을 키우고 보험료도 2∼6회 나누어 낼 수 있도록 했지만 할증률이 지나치게 높고 세분화되어 운전자의 부담이 되레 커졌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89년은 국내 3천cc 대형차시장의 막이 오른 해이기도 하다. 89년 3월 대우가 6기통 3천cc 엔진을 얹은 임페리얼을 선보인 데 이어 9월 현대가 그랜저 3.0을 내놓았고, 이에 뒤질세라 기아도 10월부터 포드 머큐리 세이블을 OEM 방식으로 들여와 기아 세이블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외국기술 의존도가 높기는 했지만, 89년 한해 코리안 빅3 모두가 3.0X급 대형차를 라인업에 추가한 것이다. 국내 자동차 3사의 대형차 경쟁은 당시 연간 5천 대로 추정되던 국내 고급차시장에서 국산차 대 수입차의 제2라운드를 열었다. 한편 2·28 조치가 86년 해제되어 87년 초 기아가 승용차를, 현대·대우가 소형트럭을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정부는 86년 7월 새 공업발전법을 발효해 3년 동안 자동차산업에 새로운 업체가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89년 공업발전법의 금지시한이 풀리자 국내 대기업들이 속속 자동차사업 진출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4WD만 생산했던 쌍용은 스웨덴 볼보와 제휴해 91년부터 볼보 240을 국내에서 조립생산하며 승용차시장에 진출한다는 계획을 발빠르게 발표했다(나중에 무산됨). 또한 일부 특장차와 군용차를 만들어온 기아 계열의 아시아는 10월 군용 지프를 개선해 만든 록스타를 선보였고, 현대정공은 미쓰비시 파제로를 90년부터 생산하겠다고 밝혔다. 자동차 수입은 87년 개방되었지만 수입산 다변화품목 제한에 걸리는 일본차는 국내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아닌 미국 오하이오주 혼다공장에서 생산된 혼다 어코드가 6월 국내에 등장하면서 ‘수입차 개방 이후 공식 수입된 일본차 1호’란 타이틀을 얻었다. 1990년, ‘자동차 300만 대 시대’ 열어 안전벨트 착용과 음주운전 법규 강화 1990년 전국 자동차 등록대수는 300만 대를 넘어섰다. 60년대 말 3만1천300대, 70년대 말 12만6천700대였던 자동차 등록대수는 80년대 말 52만 7천700대를 기록하는 등 80년대 중반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85년 5월 100만 대를 넘어선 이후 86년 9월 150만 대, 88년 12월 200만 대, 90년 6월 300만 대를 기록했고, 본격적인 모터리제이션의 물결은 농촌 깊숙한 곳까지 밀어닥쳤다. 자동차의 증가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는 종일 러시아워로 몸살을 앓고 시민들은 매일같이 출퇴근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도심 주차난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불법주차로 인해 도로기능까지 마비되어 교통체증이 큰 문제로 떠올랐다. 교통문제는 일상생활의 불편뿐만 아니라 물류비 등 사회·경제적인 손실로 이어졌다. 경부선 컨테이너 수송시간이 87년 13시간에서 90년 17시간으로 늘어나고 물동량의 흐름이 더뎌지면서 재고를 늘리는 등 물류비용이 크게 늘어났다. 90년 서울의 자동차 대수가 100만 대를 넘어서는 등 대도시 도로는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심각한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90년부터 2001년까지 27조 원을 투자해 서울과 부산에 지하철을 늘리는 등의 대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대중교통시설을 늘리거나 이용 편리성을 높이는 단기 대책을 비롯해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과 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 등 6대 도시에 전철망을 확충하고 도시고속화도로 건설을 촉진한다는 중·장기 대책을 내놓았지만 교통시설 확충에 필요한 재원을 얻기 위해 3조5천억 원의 교통특별회계를 설치하려다가 관계부처의 반대에 부딪혀 법안 자체가 백지화되는 등 초반부터 고전을 겪었다. 대도시 교통문제 해결 방안의 하나로 90년 6월 교통방송(TBS, 주파수 95.1 MHz)이 개국했다. 교통방송 개국 이전에도 KBS와 MBC, CBS 세 방송국은 자체 교통정보 프로그램을 방송했지만 TBS의 개통으로 손수 운전자와 대중교통 운전자들은 라디오를 통해 보다 빠르고 정확한 교통정보를 안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90년 11월 안전벨트 착용에 관한 법률이 더욱 강화되었다. 안전벨트 착용법이 생긴 것은 80년이고, 87년 법규를 한 차례 강화하면서 정부가 숱한 홍보와 계몽을 폈음에도 별 효과가 없는 상태에서 더 강경한 대책을 내놓은 것이었다. 새 법은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뿐만 아니라 모든 일반도로에서 앞좌석 승객의 안전벨트 착용을 의무화했고 뒷자리 승객 역시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벨트를 매도록 했다. 음주운전 처벌기준도 크게 강화되었다. 11월 도로교통법의 개정으로 예전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만 원 이하의 벌금 규정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바뀌었다. 지하철공채 금액과 자동차세의 기습적인 인상도 1990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뉴스다. 서울과 부산의 지하철 건설비를 조달하고 승용차 증가를 억제시켜 대도시 교통난을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도입된 지하철공채의 금액 인상이 시행 당일인 9월 20일 조간신문에 기습적으로 발표되었다. 배기량 1.0∼1.5X는 6%에서 9%로 50% 올랐고, 1.5∼2.0X는 8%에서 12%로, 2.0X 이상은 10%에서 20%로 올랐다. 수입차는 그동안 배기량에 관계없이 새차로 등록할 때 299만 원, 중고차로 등록할 때 99만5천 원을 냈지만 새 법에 따라 실제 차값을 기준으로 공채를 사게 되어 3∼5배 부담이 커졌다. 지하철공채와 자동차세 기습 인상 국내 자동차시장에 고성능화 바람 공채액과 함께 배기량 단위(cc)로 부과하던 자동차세도 배기량이 높아질수록 cc당 세금을 높이는 누진제를 적용하면서 큰 폭으로 올랐다. 이에 따라 1.5X 엔진을 얹은 현대 엑셀은 22만5천 원에서 23만4천880원으로 4.4% 올랐지만 배기량이 큰 현대 그랜저 2.4는 37만4천400원에서 70만5천300원으로 88.4%나 올랐다. 반면 배기량이 낮은 프라이드 1.3은 22만5천 원에서 21만1천680원으로 자동차세가 조금 줄어들었다. 1990년은 국내 자동차시장에 고성능화 바람이 불었던 원년으로도 기록된다. 연초부터 다양한 새 모델들이 앞다퉈 선보이면서 DOHC 엔진과 차체를 그대로 둔 채 배기량을 높인 모델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DOHC 엔진을 얹어 가장 먼저 고성능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메이커는 기아다. 90년 5월 기아 캐피탈을 통해 DOHC 엔진이 국내에 소개된 이후 현대 엘란트라가 DOHC 엔진을 얹고 바통을 이어받았다. 대우는 1.5∼1.6X 엔진을 얹던 르망에 2천cc 엔진을 얹은 임팩트 버전을 선보였고, 현대와 기아는 1.5X 엔진을 얹던 스텔라와 캐피탈에 각각 1.8X 엔진을 추가했다. 중형차인 현대 쏘나타 역시 1.8∼2.0X 엔진 외에 2.4X 엔진을 더했다. 한편 현대가 국내 처음으로 스포츠 패션카 스쿠프를 선보여 거리풍경을 새롭게 바꾸어 놓았고 대우는 공기저항계수(Cd) 0.29의 혁신적인 스타일링을 자랑하는 첫 고유모델 에스페로를 내놓아 국내 자동차 디자인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기아는 프라이드의 고급형에 전자식 EGI 엔진을 더했고 11월에는 프라이드 노치백을 선보였다. 아시아는 3월 록스타로 쌍용이 독점하다시피 해온 4WD 시장에 도전장을 내던졌다. 이밖에 현대·기아·대우가 경쟁적으로 국민차 생산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듬해 첫 국민차인 대우 티코가 나올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다양한 새차의 등장으로 자동차 생산이 활기를 띠면서 각 메이커의 생산라인 증설도 잇따랐다. 제3공장을 준공한 현대는 연산 100만 대 규모의 자동차회사로 우뚝 섰고, 기아는 아산만에 30만 대 규모의 공장을 착공했다. Z
재미로 보는 교통관련 이야기 그때 그 시절엔 이.. 2004-03-17
우리나라 도로교통법의 모델은 일본이라고 하는데 일본은 좌측통행, 우리는 우측통행을 하고 있잖아. 왜 그럴까? 우측통행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 도로에서 우측통행을 해야 한다고 명시한 첫 법규는 1905년 12월 30일 제정된 경무청령 제2호 ‘가로관리규칙’이다. 경무청은 갑오개혁(1894년, 고종 31년에 개화당이 집권해 근대적 문물제도를 도입)으로 설립된 경찰기관으로 경찰 및 감옥 업무를 관장했다. 가로관리규칙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로교통법으로 1876년 개항 이후 외국인 거주자 및 전차와 같은 근대적 교통수단이 새롭게 등장함에 따라 서울의 교통체계가 바뀌면서 생긴 법규다. 가로관리규칙 제7조는 ‘성문과 교량 및 통행이 혼잡한 가로에서는 우측으로 통행해야 함’이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이때부터 우측통행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일제의 본격적인 정치적 간섭이 미치기 전이어서 서양문화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1890년 6월 21일 제정된 경시청령 제25호 도로단속규칙에서 영국식인 좌측통행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후 일제시대 때는 좌측통행이 기본 원칙이 된다. 일제에 의해 1938년 11월 17일 제정된 조선총독부령 제231호 도로취체(단속)규칙 제1조는 ‘도로의 통행은 본령에 별도로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도로의 좌측을 통행할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좌측통행 규칙은 해방 이후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우측통행으로 바뀐다. 1946년 3월 29일 만들어진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법령 제65호 제차, 도보자의 통행규칙 제1조에 따르면 ‘가도, 도로, 대로 또는 교량을 통행하는 제차 또는 우차는 그 도로의 중앙우측을 통행할 것. 1938년 11월부 제231호 제1조(좌측통행 원칙)는 본 조에 의하여 개정됨’이라고 되어 있다. 이때부터 국내에서는 우측통행을 하게 되었다. 자동차가 들어오고 도로교통법도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운전자도 있었겠지. 예전에도 운전면허가 있었을까? 운전면허의 효시는 1908년 8월 15일 제정된 경시청령 제3호 ‘인력거영업단속규칙’에서 찾을 수 있다. 도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1905년 12월 가로관리규칙을 정한 뒤 3년 만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력거 영업을 단속할 필요성이 생기면서 인력거영업단속규칙이 마련되었다. 이 규칙에서 오늘날 도로교통법의 운전면허 결격기준과 비슷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인력거영업단속규칙 제3조는 ‘인력거꾼은 연령 18세 이상 60세 미만의 신체 건강한 남자에 한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과 17세 이하 및 60세 이상의 남자는 인력거를 끌 수 없었다. 따라서 이 규정을 우리나라 운전면허의 효시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일제시대인 1914년 8월 18일 만들어진 경무총감부령 제8호 마차체취(단속)규칙 제4조는 ‘마부나 말 관리자는 만 20세 이상의 남자로 신체 건강하고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전염성 질환이 없는 자, 주벽이 없고 난폭하지 아니한 자’ 등 마부 자격 기준을 정하고 있다. 아무 ‘증’도 안주고 자격만 정한다고 운전면허라고 할 수는 없지. 지금처럼 시험도 보고 면허증도 주는 운전면허제도는 언제 시작된 걸까? 1908년 인력거, 1914년 마차를 끌 수 있는 자격을 정한 데 이어 1915년 7월 22일에는 일제에 의해 체계적인 운전면허제도가 도입된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령 제6호 자동차취체(단속)규칙 제7조는 ‘자동차 운전을 하려는 자는 본적, 주소, 성명, 생년월일과 이력서를 구비하여 거주지를 관할하는 경무부장에게 신고해야 함’이라고 적고 있다. 또 제8조는 ‘경무부장은 제7조의 신청이 있는 경우 기술시험을 시행하고 그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 자동차운전허가증을 교부함’이라고 되어 있다. 지금과 같은 운전면허제도가 생긴 것이다. 운전면허 종류를 보통면허와 특수면허 등으로 구분한 것도 일제시대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근거는 1934년 12월 29일 제정된 조선총독부령 제131호 조선자동차취체(단속)규칙에 나타나 있다. 조선자동차단속규칙 제4장 운전면허 제51조에는 ‘운전면허를 보통면허, 특수면허, 소형면허의 3종으로 구분함’이라고 명시하고 ‘보통면허를 받은 자는 보통자동차와 소형자동차를, 특수면허를 받은 자는 별도로 규정하는 종류의 특수자동차와 소형자동차를, 소형면허를 받은 자는 소형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특히 제52조에서는 ‘보통면허와 특수면허의 경우 18세 미만인 사람, 소형면허는 16세 미만인 사람’은 운전면허를 받을 수 없다고 정해 놓았다. 이는 현재 운전면허 종류와 비슷할 뿐 아니라 제1종 보통면허를 가진 사람이 16인승 이하 승합차뿐 아니라 승용차도 운전할 수 있는 규정과 비슷하다. 또 2종 소형면허 이상은 18세 이상, 2종 원동기장치자전거면허는 만 16세 이상 응시할 수 있는 연령제한도 같다. 이보다 앞선 1922년 12월 29일 만들어진 운전면허시험에 관한 조선총독부훈령 제61조에서도 오늘날과 같은 시험제도를 찾아 볼 수 있다. 훈령은 운전면허시험을 필기시험과 구술시험, 도로운전 시험 등으로 나누도록 했는데 내용이 지금과 거의 비슷하다. 필기시험은 원동기, 기계구조, 전자기, 연료의 일반개념에 관한 3문제 이상과 운전 및 자동차단속 관계법 각 1문제 이상을 내도록 했다. 구술시험도 필기시험과 내용이 비슷하다. 특히 도로운전 시험은 오늘날의 시험장내 시험과 비슷한 가설시험과 도로 주행시험에 해당하는 현장시험으로 나누었고, 가설시험은 8자형과 굴절노선 등에서 실시했다. 영화에서 보면 차가 많지 않던 당시에는 인력거가 주된 교통수단이었잖아. 그런데 사진을 보면 인력거꾼들이 너무 지저분하고 불결한 모습이야. 인력거꾼을 단속하는 법규는 없었나? 그렇지 않았다. 앞서 밝힌 인력거영업단속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에 찍힌 ‘지저분하고 불결한’ 복장의 인력거꾼은 당시의 법에 따라 10일 이하 감옥에 갇히거나 10환 이하의 벌금을 내야 마땅하다. 1908년 8월 15일 경시청령 제3호로 만들어진 인력거영업단속규칙 제10조는 인력거꾼이 영업 중에 지켜야 할 사항을 14가지나 정해 놓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인력거꾼은 불결하거나 단정하지 못한 복장을 입으면 안 되고, 허가증과 요금표를 가지고 다니다가 경찰관이나 승객이 요구할 때는 보여주어야 했다. 주차장 이외에서 손님을 기다리거나 길가에서 이유 없이 방황한다든가 오래 정차할 수도 없다. 또 행인에게 승차를 강요하거나 거만한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되고, 밤에는 인력거 등에 불을 켜야 했다. 손님이 특별히 지정하지 않는 한 주자창에 있는 인력거는 정열순서 또는 추첨으로 운행하며 손님이 내린 후 분실물이 있을 때는 즉시 가장 가까운 경찰서 또는 순사 주재소에 신고해야 했다. 회전시 충돌을 막기 위해 길모퉁이를 우회전할 때는 작게 돌고, 좌회전할 때는 크게 돌아야 한다는 조항도 있다. 여러 가지를 살펴볼 때 현재의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의 ‘운수종사자의 준수사항’과 비슷한 점이 많다. 참고로 인력거 영업은 1923년 절정에 이르러 전국 4천647대(서울 1천816대)를 기록했고, 일부 지방도시에서는 6·25가 끝난 뒤에도 얼마 동안 인력거 조합이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인력거뿐 아니라 짐을 싣는 마차도 많았는데, 마차를 단속하는 법규도 따로 있었을까? 언뜻 생각하면 짐마차를 단속하는 법규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소달구지가 짐을 운반하던 60, 70년대나 80년대 초에도 마차를 단속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시대부터 짐마차에 따로 적용하는 법규가 있었고, 그 내용도 매우 구체적이었다. 1912년 9월 30일 제정된 경무총감부령 제2호 하차(짐차)취체(단속)규칙에는 마차와 짐차의 크기부터 최대 적재량, 운전자격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마차와 우차를 포함한 짐차의 폭은 4자 8치(약 145cm), 길이는 멍에의 길이를 더해 모두 1장 7자(약 515cm)를 넘을 수 없었다. 최대 적재량은 우차 260관(1천40kg), 마차 200관(800kg)으로 제한했다. 또 15세 미만은 우마차를 부릴 수 없도록 했다. 지금은 자동차관리법 때문에 오너 마음대로 튜닝할 수 없잖아. 인력거나 마차는 자동차처럼 복잡한 기계가 아니니까 마음대로 뜯어고칠 수 있었겠지? 천만의 말씀. 1906년 4월 10일 제정된 경무청령 제4호 우차와 하마차 관리규칙에는 짐차는 물론 소달구지도 소유자의 이름과 주소를 차체에 적어 넣고(제1조), 차바퀴 구조와 기준을 정해 관할 경무관서의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제2조). 제1조에서는 ‘우차와 짐마차의 소유자는 주소 성명을 차체의 보기 쉬운 곳에 명기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이는 국내 최초의 자동차 번호판이라 할 만하다. 또 소달구지는 치폭(바퀴축의 직경) 4치(약 12cm) 이상, 짐마차는 치폭 3치(약 9cm)가 넘어야 했다. 소달구지나 짐차에 2량 이상 연결하거나 한 차에 두 마리 이상의 소를 쓸 때는 그 이유와 통로를 자세히 기록해 관할 경무관서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고무로 만든 바퀴와 번호판을 적은 호롱불도 차체에 붙이도록 했다. 만약 바퀴축 크기 규정을 어겼을 때는 제5조의 벌칙 조항을 근거로 10일 이하 감옥에 갇히거나 곤장 20대 이상을 맞아야 했다. 지금은 구조변경 승인을 받지 않고 개조했다가 적발되었을 때 대부분 벌금을 물지만 당시에는 감옥에 들어가거나 관청에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 1914년 7월 29일에는 인력거단속규칙을 마련했다. 여기에는 인력거의 구조 및 형식승인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인력거는 자가용이나 영업용 모두 본적, 주소, 성명, 생년월일을 적어 관할 경찰관서에 신고하고 1인승 인력거의 너비는 2자(약 60cm) 미만, 2인승은 2자 이상으로 정해 놓았다. 당시에는 비싼 값이 문제였겠지만, 그래도 자전거는 제한 없이 마음대로 탈 수 있었겠지? 소달구지와 짐마차에 관한 법규도 있었는데 자전거를 단속할 근거가 없었다면 넌센스다. 1900년대 초반에는 부유층을 중심으로 자전거가 보편적인 통행수단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자전거가 늘어남에 따라 1917년 10월 27일 자전거취체(단속)규칙도 등장했다. 이때 등장한 자전거 단속 규칙에는 12세 미만의 어린이는 운전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규칙 제3조는 ‘자전거의 소유자나 점유자는 12세 미만의 자로 하여금 도로 기타 공중의 방해가 될 만한 장소에서 승차하지 못하게 해야 함’이라고 적혀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첫 번째 조항이다. 1조는 ‘도로에서 자전거를 사용하는 때는 타인에게 경계를 줄 수 있는 경음기를 달아야 함’이라고 적고 있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로 시작되는 동요가 이유 없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제6조에는 종아리의 반 이상을 내놓고 타서는 안 된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 당시의 사회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도로 포장율이 낮은 당시에는 비가 내리면 흙탕물이 많이 튀었을 텐데 차에 흙받이는 달았을까? 흙받이를 달아야 한다는 내용이 처음 실린 법규는 1908년 8월 15일 제정된 인력거영업단속규칙 제5조다. 이때 인력거는 ‘흙받이, 고무로 된 바퀴, 기름칠을 한 가리개와 앞걸이를 부속품으로 달아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동차에 흙받이를 달도록 정한 것은 1934년 12월 29일 제정된 조선총독부령 제131호 조선자동차취체(단속)규칙이다. 도로 및 자동차의 정의부터 구조장치 등 자동차와 관련된 매우 근대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제26조는 ‘자동차에 의한 오수, 진흙먼지 등이 튀거나 날릴 우려가 있을 때 흙받이를 달 것. 단, 특별한 사유에 의해 도지사의 승인을 받은 자동차는 그러하지 않음’이라고 정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도로사정이 좋지는 않았는지 1940년에는 ‘…도지사가 흙받이를 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지정한 도로 구역 외에는 흙받이를 달 것’으로 바뀌었다. 재미있는 것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첫 번째 조항이다. 자전거 규칙 제1조는 ‘도로에서 자전거를 사용하는 때는 타인에게 경계를 줄 수 있는 경음기를 달아야 함’이라고 적고 있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로 시작되는 동요가 아무 이유 없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이밖에 제6조에 종아리의 반 이상을 내놓고 타서는 안 된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 당시의 사회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아메리칸 스포츠카, 그 길고도 짧은 역사 1911년.. 2004-03-12
왼팔을 창문에 걸친 채 한가로이 차를 모는 금발 남자의 머릿속에는 카지노에서의 ‘대박’ 꿈이 날개를 펴고, 롱보디의 컨버터블은 샛노란 먼지를 등에 이고 지평선 끝을 향해 달려간다. 미국 스포츠카라면 으레 이런 모습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한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을 듯 야무지고 단단한 독일 포르쉐의 핸들링 감각이나 페라리 레드의 정열과 과감함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길다란 보네트와 그 안에 담긴 5천cc 이상의 대배기량 푸시로드 엔진, 그리고 출렁이는 차체. 미국의 스포츠카에는 대륙적인 기질이 담겨 있다. 몇 날 며칠을 달려도 잘 닦인 도로의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대륙에서 태어난 그들의 스포츠카는 큰 배기량에 의존해 넉넉한 힘을 뽑아내고 무른 서스펜션으로 장시간의 크루징을 만족시켜야 했다. 자동차 산업의 태동기부터 정착된 레이스를 통해 기술력을 쌓고 훌륭한 스포츠카를 만들어온 유럽과 달리 제대로 된 스포츠카가 태어나기 어려운 토양이었던 셈. 하지만 이런 환경은 그 나름대로의 특색 있는 스포츠카 문화를 만들어냈다. 1950년대에 유행한 핫로드의 열풍은 60년대 고성능 머슬카의 탄생을 불러왔고, 포드 머스탱은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풍요로운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지지 속에 스페셜티카라는 새 장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50~60년대의 전성기를 지나 오일쇼크 등의 영향으로 70년대 중반부터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미국 스포츠카 시장. 그 볼모의 땅에 최근 순수 스포츠카로 꼽히는 시보레 코베트, ‘포니카’의 전설을 만든 포드 머스탱과 포드 수퍼카 GT 등 과거의 명차가 속속 새 모습으로 등장하고 캐딜락 XLR, 폰티액 솔스티스, 크라이슬러 ME 포 트웰브 컨셉트 등 화려하고 내실 있는 기대작이 쏟아지며 활기를 띠어가고 있다. 모터 스포츠의 황무지에서 태어나다 유럽에서는 이미 1900년대 초부터 르망 24시간, 타르가 플로리오, 밀레밀리아 등의 스트리트 레이스를 통해 경주차를 개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스포츠카를 선보여왔다. 이와 달리 오벌 레이스가 주를 이루고 몇 시간을 달려도 코너 하나 없는 잘 닦인 도로가 끝없이 이어지는 북미대륙에서는 1950년대 이전까지 번듯한 스포츠카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비소가 드물어 차체는 자가정비를 할 수 있는 간단한 구조로 제작되었고 큰 배기량과 부드러운 승차감도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 중 하나였다. 이런 배경은 광활한 대륙을 느긋이 여행할 수 있는 투어러나 오픈카의 탄생을 불러왔다. 1906년 등장한 스탠리사의 젠틀맨스 스피디 로드스터(Gentleman’s Speedy Roadster)는 증기 엔진을 얹고도 미국 초대 스포츠카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뛰어난 성능을 보였다. 2시터 보디에 지붕조차 갖추지 않은 원시적인 모델이었지만, 등유를 태우는 멀티튜브 보일러를 앞 보네트에 얹어 20마력을 냈고 휘발유차에 뒤지지 않는 가속력을 자랑했다. 모델 H라는 정식명칭을 지닌 스탠리의 로드스터는 그러나, 추운 날씨에 스티머 엔진의 물을 가열하는 데 몇 시간이나 걸리고 시동도 쉽지 않는 등 내연기관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져 이내 사라지고 만다. 대배기량 2인승 로드스터는 이후 머서와 스터츠, 듀센버그, 오번 등 소량생산·수작업 기반의 군소 메이커를 거쳐 1950년대에는 뷰익 스카이락과 캐딜락 엘도라도 같은 초호화 컨버터블로 이어지며 미국 자동차문화의 대표 아이콘으로 자리잡아갔다. 1911 Mercer Raceabout 1911년 등장한 머서 레이서바웃은 타입 35 설룬의 시리즈 모델 중 하나로 핀리 로버트슨 포터가 디자인했다. 스탠리의 오픈카와 달리 정밀한 도어와 방호용 장비까지 갖추는 등 제법 뛰어난 완성도를 보였다. 1915년까지 생산된 레이서바웃은 당시의 여느 스피드스터들처럼 크고 굼뜬 4기통 4.9X 55마력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112km를 냈지만, 승차감이 딱딱하고 핸들링이나 브레이크 성능도 특별할 것은 없었다. 1914 Stutz Bearcat speedster 스터츠사의 창업자인 헨리 스터츠는 1897년 만든 첫 차로 인디애나폴리스 레이스에 참가해 11위를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 경주차를 바탕으로 한 로드스터 베어캣은 1914년에 등장했다. 베어캣은 당시 미국차와 마찬가지로 꽤나 원시적인 차체를 지녔지만 4기통 6.3X 60마력 엔진으로 시속 128km까지 낼 수 있었고, 리어 액슬에 3단 트랜스미션을 결합해 뛰어난 핸들링을 보였다. 스터츠는 1차대전이 끝난 뒤 새로 세운 HSC사에서 베어캣을 베이스로 한 8기통 110마력의 블랙호크(1927년), DV32(1932년, 사진)를 내놓았지만 1935년 경영악화로 도산하고 만다. DV32는 8기통 4밸브 155마력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160km의 고성능을 내 수퍼 베어캣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1926~1937 Duesengerg Model J·SJ·SSJ 듀센버그는 미국차로는 처음으로 오버헤드 캠샤프트(OHC)와 유압식 브레이크 등의 첨단기술을 쓴 메이커. 1921년 프랑스 그랑프리와 1924, 25, 27년 인디500 레이스 우승 등으로 명성을 쌓은 듀센버그는 26년 E.L. 코드가 이끄는 오번 자동차에 합병된 뒤 모델 J와 SJ, SSJ 등의 명차를 만들어냈다. 당시 경주차에나 쓰이던 DOHC 방식을 도입한 듀센버그 모델 J(사진)는 직렬 8기통 6.9X 265마력 엔진으로 최고시속 186km를 냈다. 모델 SJ는 모델 J의 수퍼차저 버전으로 최고출력 320마력, 최고시속은 209km였다. SJ는 엔진룸에서 4개의 배기 매니폴드를 바깥으로 뽑아낸 세련된 디자인과 빼어난 성능으로 경제공황 속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1937년, 클라크 케이블과 게리 쿠퍼의 품에 안기며 더욱 유명세를 탄 SSJ는 당시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오스카상만큼이나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전해진다. 1928~1935 Auburn Speedster·851 Speedster 1차대전이 끝난 뒤 잇따른 경제공황으로 미국대륙에서는 값비싼 스피드스터가 차차 모습을 감추어갔다. 하지만 20년대 말 르망 24시간에서 벤틀리가 보여준 놀라운 활약은 미국 스포츠카의 부활에 불씨를 붙이는 계기가 되었고, 1928년 등장한 오번 스피드스터는 이런 미국인의 갈증을 풀어준 퓨어 스포츠의 하나다. 매끄럽고 스타일리시한 보트테일 보디에 직렬 8기통 4.5X 90마력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173km로 달렸지만, 싼값에도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2년 만에 생산을 중단했다. 오번의 대표작인 851 스피드스터는 1935년 선보였다. 8기통 4.6X 수퍼차저 150마력 엔진을 얹은 2인승 로드스터는 우아한 스타일과 매력적인 성능을 뽐냈고 대시보드에 100마일 사전테스트 인증마크를 붙이는 등 품질신뢰도를 높였지만 시장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번은 2년 뒤 문을 닫았다. 약동하는 아메리칸 스포츠카 30년대 오번-코드-듀센버그의 삼두마차가 해체된 뒤 미국 자동차 시장에는 내로라할 만한 스포츠 모델이 탄생하지 못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오히려 대형 엔진과 부드러운 서스펜션을 쓴 굼뜬 차가 부쩍 늘었고, 미국 내에는 여전히 유럽의 르망 24시간에 견줄 만한 스포츠카 레이스가 자리잡지 못했다. MG, 트라이엄프, 재규어와 같은 영국산 모델들이 활개치던 스포츠카 시장에 지각변동을 불러온 것은 커닝햄과 시보레, 그리고 포드였다. 1950년 이후 꾸준히 르망 24시간에 뛰어들며 유럽형 로드 스포츠카 제작을 꿈꿔온 커닝햄이 1952년 르망 경주차에 바탕을 둔 C3 컨티넨탈 쿠페를 내놓자 이에 질세라 시보레가 초대 코베트를 선보였다. 코베트에 대응하기 위해 포드가 선보인 선더버드는 미국 자동차 시장에 ‘퍼스널카’라는 새 장르를 유행시킨다. 1952 Cunningham C3 Continental Coupe 1920년대 미국의 올림픽 요트 선수로도 활동했던 브릭스 커닝햄은 유럽 스타일의 로드 레이서를 만들겠다는 포부 아래 1940년 벤츠 엔진과 뷰익 섀시를 조합한 첫 차를 만들었고, 1950년부터는 캐딜락 모델 61로 르망 24시간에도 도전했다. 유럽 레이스에서 얻은 노하우는 51년 첫 번째 도로용 스포츠카인 C2 커닝햄을 빚어냈고, 이듬해 팜비치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에서 시판 모델인 C3 컨티넨탈 쿠페가 완성되었다. 튜블러 섀시에 크라이슬러의 V8 5.4X OHV 210마력 엔진을 얹고 매끈한 쿠페 보디로 포장한 C3 컨티넨탈 쿠페는 최고시속 225km의 고성능으로 아메리칸 머슬카의 탄생을 불렀다. 이듬해 컨버터블 버전까지 더한 커닝햄 C3은 값이 매우 비싸 1955년까지 겨우 27대(쿠페 18, 컨버터블 9)만 팔렸다. 1953 Buick Skylack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은 승전국의 특혜를 누리며 전에 없던 호황을 누렸고, 이는 자동차 시장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연비 걱정 없이 넉넉한 힘을 뽑아내는 대배기량 숏 스트로크의 V8 OHV 엔진이 대세로 굳어졌고, 테일핀과 같은 화려한 장식도 대단한 유행을 일으켰다. 뷰익은 1953년 창사 50주년을 자축하며 캐딜락 엘도라도, 올즈모빌 피에스타와 메커니즘을 공유한 럭셔리 컨버터블 스카이락을 선보였다. 스카이락은 5천 달러에 달하는 고가였지만 2천400rpm의 중저속 영역에서 41.5kg·m의 토크를 뿜어낼 만큼 힘이 넘치는 V8 5.3X OHV 엔진과 할리 얼 디자인의 우아한 스타일로 큰 인기를 누리며 1천690대나 팔려나갔다. 1954 Kaiser Darrin 포드, GM, 크라이슬러의 미국 빅3에 맞서 자신의 돈을 온통 투자해 만든 헨리 J. 카이저의 2시터 스포츠 쿠페 다린은 ‘세계가 기다리던 스포츠카’라는 거창한 광고문구와 함께 54년 데뷔했다. 유럽 스타일의 동그스름한 톱과 날렵한 데크라인 등 세련된 스타일을 뽐냈지만, 보디패널 안쪽으로 들어가는 슬라이딩 도어는 제대로 안 닫힐 때가 많고 진보적인 글라스파이버 보디는 달리다 깨지기도 하는 등 품질이 현격히 떨어지고 잔고장도 많아 435대만 팔린 채 조용히 사라졌다. 윌리스 6기통 2.6X 90마력 엔진과 3단 MT를 조합해 시속 161km의 성능을 냈다. 1955 Chrysler 300 model series 크라이슬러가 55년에 선보인 2도어 5인승 쿠페 300(사진)은 당시 캐딜락조차 넘보지 못할 강력한 V8 헤미 엔진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헤미’란 반구형(hemispherical) 연소실에서 따온 크라이슬러 고성능 엔진의 명칭. 이듬해 시판을 시작한 300B는 V8 5.4X OHV 엔진으로 300마력을, 58년의 300D 모델은 6천423cc의 배기량으로 380마력의 최고출력을 냈다. 그리고 2년 뒤 등장한 300F는 헤미 엔진의 배기량을 6.4X까지 키워 400마력, 시속 225km의 괴력을 뿜어냈고, 0→시속 96km 가속 7.1초의 순발력과 유례 없이 훌륭한 핸들링을 자랑하며 60년대 대표적인 머슬카로 우뚝 섰다. 1959 Cadillac Eldorado Convertible : Pink Cadillac 1959년 캐딜락은 미국의 정점에 있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나라의 고속도로를 순항하는 캐딜락 컨버터블은 곧 부의 상징으로 통했다. ‘핑크 캐딜락’이라는 애칭을 지닌 59년형 캐딜락 엘도라도 컨버터블은 50년대 미국 버블경제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차체 길이가 무려 6.1m나 되고 로켓 모양의 테일램프를 담아둔 날개 같은 테일 핀, 그리고 2.8km마다 1X의 연료를 먹어치우는 V8 6.4X OHV 엔진은 과잉의 미학으로 가득 찬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했다. 1959 Chevrolet Corvair 시보레가 포드 선더버드에 맞서기 위해 코베트 아랫급으로 내놓은 보급형 스포츠카. 시보레 최초의 모노코크 보디와 수랭식 수평대향 6기통 2.3X 리어 엔진, 독립식 서스펜션 등 독특한 구성이 눈에 띄는 모델이지만 생산단가가 높고 컨셉트도 당시로는 지나치게 진보적이어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세미 트레일링 암 리어 서스펜션이 뒤 엔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오버스티어가 강해 ‘어떤 속도에서나 안전하지 못한 차’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1953 Chevrolet Corvette 재규어와 페라리, MG, 트라이엄프 등 수입 모델이나 눈에 띄던 전후 시대의 미국 스포츠카 시장에 53년 등장한 시보레 코베트의 성공은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다. 당시 GM 디자인 팀을 이끌던 할리 얼은 백조처럼 우아하고 힘찬 유럽 스타일의 2인승 스포츠카를 그려낸 뒤 박스 스타일의 섀시에 플라스틱 소재의 초경량 보디를 얹은 초대 코베트를 탄생시켰다. 데뷔 초에 얹은 엔진은 직렬 6기통 3.9X OHV 150마력. 55년 V8 4.3X 210마력으로 힘을 보탠 코베트는 미국 양산차로는 처음으로 최고시속 150마일(약 240km)의 벽을 허물며 정통 스포츠카 반열에 올라선다. 63년 등장한 2세대 스팅레이(Sting Ray, 가오리)는 코베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모델로 꼽힌다. 극단적으로 뽑아낸 날카로운 노즈, 리트랙터블 헤드램프와 유선형 루프, 둘로 쪼개진 뒷창 등 개성 강한 디자인은 이후 코베트 스타일의 밑바탕이 되었다. 68년 등장한 3세대 샤크는 73년과 79년의 두 차례 석유파동을 힘겹게 넘긴 뒤 83년 완전히 새로운 4세대 코베트로 진화해갔다. 4세대 코베트는 신뢰성 높은 V8 5.7X 230마력 엔진과 빼어난 핸들링, 공기저항계수 0.34의 매끈한 스타일로 포르쉐 928의 강력한 맞수로 떠올랐다. 5세대는 더욱 세련된 스타일과 한층 강화된 프레임, 푸시로드식의 구형 LS1을 개량한 V8 5.7X 350마력 엔진으로 97년 데뷔했다. 이듬해 북미 ‘카 오브 더 이어’에 뽑히기도 한 코베트 C5는 2001년 V8 7.0X 610마력의 레이싱 버전 CR-5, V8 385마력 LS6 엔진의 Z06을 더해갔다. 미국 스포츠카의 50년 역사를 지탱해온 코베트는 올해 캐딜락 XLR과 플랫폼을 공유한 6세대로 풀 모델 체인지했다. 에어로 다이내믹 스타일로 가다듬은 코베트 C6의 공기저항계수는 역대 모델 중 가장 뛰어난 0.28. V8 6.0X 400마력 엔진은 전통의 OHV 구성을 이었고 6단 MT를 조합해 최고시속 290km를 낸다. 1955 Ford Thunderbird 포드 선더버드는 시보레 코베트와 함께 50년대 아메리칸 스포츠카의 태동을 불러온 또 하나의 역작이다. 미국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뒤 유례 없는 풍요로움을 만끽하고 있었고, 코베트는 그들만의 스포츠카를 찾는 전후세대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시보레의 성공에 자극 받은 포드는 이에 맞설 스포츠카 개발을 서둘러 54년 디트로이트 오토쇼에 목업 모델을 내놓고 이듬해 양산형 선더버드의 시판에 들어갔다. 심플하고 우아한 라인, 절제된 이미지의 테일핀을 조합한 스타일로 신선한 충격을 안긴 선더버드는 코베트가 1대 팔릴 때 24대나 팔릴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특히 55~57년의 초기 모델은 아직도 팝송이나 영화 소재로 자주 쓰일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겨 50년대 미국 청년문화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진다. 스포츠 지향의 로드스터로 두 사람만이 타는 ‘퍼스널카’라는 장르를 개척한 선더버드는 이후 덩치를 키우고 화려함을 더하면서 럭셔리 투어러로 변질되어간다. 67년 랜도 하드톱의 4도어 4인승 쿠페 스타일로 탈바꿈한 선더버드는 더 이상 퍼스널 카의 대명사가 아니었고 예전만큼의 인기도 얻지 못했다. 쿠페형 선더버드는 89년 뒷바퀴굴림의 10세대로 모델 체인지하며 반짝 원기를 회복하기도 했지만 일본 라이벌들에 밀려 조금씩 설자리를 잃어갔고 97년, 42년의 긴 삶을 마감했다. 화려했던 T버드의 역사는 4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2001년 신형 선더버드로 이어졌다. 21세기의 선더버드는 55년형의 모습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복고풍 2시터 컨버터블. 링컨 LS와 공유하는 FR 플랫폼에 네 바퀴 독립식 서스펜션을 조합하고 코스워스와 공동개발한 V8 3.9X 4밸브 252마력 엔진을 얹는다. 풍요의 시대가 빚어낸 르네상스 1960년대의 미국 자동차 시장은 50년대 중반 시보레 코베트와 포드 선더버드가 일으킨 스포츠카 붐을 타고 ‘아메리칸 스포츠 르네상스’라 부를 만한 부흥기에 접어든다. 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드레그레이스는 폰티액 GTO의 등장을 계기로 메이커 주도의 머슬카 경쟁을 불러일으켰다. 머슬카는 뛰어난 핸들링을 자랑하는 유럽 스포츠카와 달리 강력한 엔진에서 뿜어내는 폭발적인 가속성능으로 미국 스피드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무렵 미국 시장은 50년대의 황금시대를 지나 내실 있는 성장을 꾀하던 중. 거품이 걷힌 시장에서는 포드 머스탱처럼 소형 세단에 출력 높은 엔진을 얹고도 값이 싼 보급형 스포츠 모델(스페셜티카)이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이후 머큐리 쿠거, 시보레 카마로 등 10가지 이상의 스페셜티카가 등장했지만 승자는 언제나 포니카 머스탱의 몫이었다. 1963 Studebaker Avanti 59년 소형차 라크로 큰 인기를 누렸던 스튜드베이커는 60년대 미국 빅3이 앞다퉈 컴팩트카 시장을 공략하자 명 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위에게 부탁해 새로운 스타일의 모델 아반티를 내놓았다. 라디에이터 그릴이 없는 프론트 마스크, 유럽 감각으로 다듬은 날렵한 파이버글라스 차체 등 아반티는 당시 어떤 모델과도 견줄 수 없는 스타일을 자랑했다. 초기 모델인 R1은 V8 4.7X 240마력 엔진으로 최고시속 193km를 내 폰티액 29 보네빌의 속도기록을 깼다. 아반티의 심장은 수퍼차저를 더한 R2와 R3 버전에서 각각 290, 335마력을 냈고, 실험적인 인젝션 방식의 R5 모델은 575마력을 자랑했다. 1965 Oldsmobile Toronado 1930년대 코드 810 이후 처음으로 앞바퀴굴림 방식을 쓴 올즈모빌의 하드톱 쿠페 토로나도는 당시 가장 독특한 미국차의 하나로 명성을 날렸다. GM 디비전의 리비에라 및 엘도라도가 형제 모델. 패스트백 타입의 매끈한 루프와 과감하게 둥글린 펜더 디자인, 팝업식 트윈 헤드램프 등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스타일도 눈길을 끌었다. V8 7.0X 385마력 엔진과 하이드라매틱 3단 AT를 조합한 토로나도는 재규어에 뒤지지 않는 가속성능과 컴팩트카만큼 훌륭한 핸들링을 지니고도 값은 싸, 수입 스포츠카와 저가의 스페셜티카 사이에서 제법 높은 경쟁력을 보여주었다. 1966 Pontiac GTO 60년대 중반 미국 스포츠카 시장에 머슬카의 유행을 몰고 온 주인공. GM이 고성능 차 개발을 기획했을 때 폰티액의 치프 엔지니어인 존 드로리안은 가벼운 미디엄 사이즈의 템페스트 르망 모델에 디비전 내에서 가장 큰 V8 엔진을 얹는, 당시 유행한 핫로드 방식의 자동차를 구상했다. 드로리안의 아이디어는 제대로 들어맞았고 템페스트의 가지치기 모델로 선보인 GTO는 레이싱카에 가까운 고성능과 로드홀딩 성능을 앞세워 호주머니가 가벼운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3년 동안 20만7천 대나 팔린 템페스트 GTO는 66년 오리지널 GTO로 분리된 뒤 디트로이트의 첫 번째 머슬카로 역사에 남았다. V8 6천374cc 335~360마력 엔진을 얹고 최강의 스프린트 레이서로 등극한 GTO는, 그러나 연방정부의 규제강화와 사회적 인식에 발목이 잡혀 67년 이후 조금씩 내리막을 걸었다. 1966 Chevrolet Camaro·1967 Pontiac Firebird GM은 코베트와 코베어 몬자 쿠페·로드스터로 충실한 스포츠카 라인업을 마련했지만 한 해 41만 대 이상이 팔린 머스탱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시보레 카마로(사진)와 폰티액 파이어버드는 ‘타도 포니카’를 외친 GM의 ‘F카 프로젝트’를 통해 66년과 67년 연이어 등장했다. 카마로는 쉐비Ⅱ 설룬에서 빌려온 섀시와 라이브 액슬 리어 서스펜션 위에 직렬 6기통 3.8X 140마력과 V8 6.5X 375마력의 두 가지 엔진으로 선택 폭을 넓혔고, 파이어버드에는 6기통 215마력, V8 6.6X 335마력이 올라섰다. 두 모델은 결국 머스탱의 판매를 앞지르지는 못했지만 카마로 RS, Z28 카마로, 파이어버드 트랜스앰과 같은 퍼포먼스 버전을 추가하며 80년대 이후까지 꾸준한 인기를 누렸다. 1966 Ford GT 40 이태리의 페라리 인수에 실패한 헨리 포드 2세가 영국, 독일의 유럽포드 힘을 빌어 만든 수퍼 스포츠카. 영국 포드가 개발한 미드십 플랫폼에 컴퓨터를 활용한 공기역학적 보디와 미국산 V8 4.2X OHV 350마력 엔진을 얹은 GT 40은 64년 완성되어 그 해 유럽의 르망 24시간을 두드렸다. 첫 출전에서 머신 트러블로 고배를 마신 포드는 V8 7.0X OHV 500마력의 GT 40 마크Ⅱ(사진)로 66년 르망 레이스에 재도전했고 다양한 버전을 투입해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포드 스포츠 스피릿’의 새로운 전설을 만들었다. 마크Ⅰ에서 Ⅳ까지 4가지 개량형을 선보인 GT 40은 67년에 약 30대 생산되어 팔리기도 했다. 로드카 타입의 GT 40은 V8 4.7X 335마력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264km와 0→시속 96km 가속 5초의 화려한 고성능을 뽐냈다. 1968 AMC Javelin·AMX 60년대 스페셜티카 경쟁의 정상에 오른 포드 머스탱의 또 다른 라이벌. AMC는 포드 스타일을 답습해 다양한 엔진을 마련했지만 자벨린(사진) 최상급 모델의 V8 5.6X 엔진이 낼 수 있는 힘은 고작 280마력에 불과했다. AMC는 2년 뒤 자벨린의 휠베이스를 줄인 2시터 버전 AMX를 선보였다. AMC AMX는 V8 6.3X 엔진으로 최고시속 225km의 뛰어난 성능을 내 코베트의 자리까지 넘봤지만, 경쟁 모델의 잇따른 업그레이드로 스포티한 달리기를 만족시키는 평범한 스페셜티 쿠페로 전락하고 만다. 1966~1968 Dodge Charger 폰티액 GTO의 등장으로 미국에서는 고속도로와 도심을 가리지 않고 도처에서 머슬카와 핫로드의 속도경쟁이 벌어졌다. 닷지는 66년 선보인 스포츠 쿠페 차저에 더욱 강력한 엔진과 단단한 하체를 버무려 GTO가 불씨를 지핀 머슬카 전쟁에 뛰어들었다. V8 7.2X 매그넘 375마력 엔진은 그 이름처럼 닷지 차저를 총알처럼 몰아붙였고 0→시속 96km 가속 7초 이하의 뛰어난 성능을 이끌어냈다. 매그넘과 함께 차저의 심장으로 쓰인 V8 7.0X 헤미 엔진은 425마력의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최고시속 251km는 물론 시속 100km에 이르는 스프린트 레이스를 5초 안에 끊을 만큼 화끈한 가속력으로 60년대 말 머슬카 출력경쟁의 정상을 차지했다. 1962 Shelby Cobra 289·427 쉘비 코브라는 영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자동차회사 AC의 섀시에 미국 포드의 V8 엔진을 결합한 앵글로 아메리칸 스포츠카다. 이질적인 두 자동차문화를 융합시킨 주인공은 50년대 후반부터 유럽에서 활약했던 미국의 명 드라이버 캐롤 쉘비. 1953년 AC가 선보인 에이스는 사다리꼴 섀시와 독립식 서스펜션의 조합으로 수준 높은 핸들링 성능을 보인 2인승 오픈 스포츠카였다. 에이스의 탄탄한 운동성능을 눈여겨본 캐롤 쉘비는 여기에 강력한 V8 엔진을 얹어 파워를 보강하자고 포드에 제안했고, 쉘비의 중재 아래 61년 AC와 포드의 빅딜이 성사되었다. 그 해 포드의 V8 3.6X 엔진이 영국 AC 공장에 전달되었고 이듬해 포드 엔진을 얹은 AC 스포츠카 프로토타입이 나왔다. AC의 시작차에 만족한 포드는 신형 V8 4.2X 엔진을 공급했고 이를 얹은 코브라 시판차가 62년 미국 시장에 상륙했다. 4.2X 250마력을 얹은 최초의 쉘비 코브라는 곧 V8 4천721cc 271마력의 289(배기량을 입방인치로 환산한 수치)로 발전했고, 쉘비의 레이싱 팀은 370마력까지 힘을 보탠 코브라로 미국 전역의 레이스를 휩쓸었다. 65년 빅블록 V8 7.0X 425마력 엔진의 427로 진화한 코브라는 최고시속 265km, 0→시속 100km 가속 4.2초의 괴력을 발휘하며 아메리카 대륙의 스피드 킹으로 떠올라 68년까지 1천 대 이상이 생산되었다. 코브라는 지금 포드를 통해 부활을 준비중이다. 올해 북미국제오토쇼에 등장한 쉘비 코브라 컨셉트는 개발과정에서 캐롤 쉘비의 입김을 불어넣고 V10 엔진과 알루미늄 섀시 등 첨단기술로 아메리칸 스포츠의 부활을 예고하고 나섰다. 1964 Ford Mustang ‘본격적인 스포츠카는 아니지만 날렵하고 스포티하며 값은 비싸지 않을 것.’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겨냥해 리 아이아코카가 구상한 자동차는 64년 머스탱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었다. 초대 머스탱은 베이스가 된 팔콘보다 휠베이스가 380mm나 짧은, 당시로는 가장 작은 미국차였다. 기본 엔진은 직렬 6기통 2.8X 101마력. 하지만 운동성능 강화를 위해 V8 4.2X 164마력과 V8 4.7X 210마력 엔진을 준비하고 수백 가지 부품을 옵션으로 마련하는 등, 머스탱은 점차 고객 취향에 맞춰 태어나는 퍼스널 카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64년 4월 뉴욕 오토쇼에 첫선을 보인 머스탱은 등장과 함께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2년 만에 100만 대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캐롤 쉘비가 개조한 GT350(1964)과 GT500(1967)은 더욱 강력한 성능으로 도로를 평정하며 머스탱의 인기몰이를 도왔다. 머스탱은 73년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출력이 줄어들었고, 새로운 스타일로 일신한 4세대(1979)부터는 젊은이들을 위한 스페셜티카라는 본래의 매력을 잃어갔다. 87년의 5세대를 거쳐 93년 등장한 6세대는 딱딱한 보디라인을 우아한 곡선으로 다듬고 3분할 리어 컴비네이션 램프 등 초대 머스탱의 이미지를 이어받으며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예전만큼의 열광적인 지지는 얻지 못했다. 포드가 자랑하는 포니카, 머스탱은 데뷔 40년째인 올해 7세대 모델로 풀 모델 체인지했다. 초대 모델을 꼭 닮은 신형 머스탱의 심장은 V6 4.0X 202마력과 V8 4.6X 300마력. 앞 맥퍼슨 스트럿과 60년대부터 써온 리어 리지드 서스펜션이 얼마큼 경쾌한 핸들링을 이끌어낼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클라이맥스를 지나 적막의 시대로 미국시장은 70년대 들어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쇠락기에 접어들었다. ‘포니카의 전설’을 만들어낸 포드 머스탱의 판매는 67년 이후 서서히 내리막을 걸었고, 73년의 3세대 모델부터는 덩치가 커지고 느려지기까지 해 스페셜티카의 본질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70년대 초 절정을 이룬 머슬카는 오일파동 이후 점차 모습을 감추었다. 많은 모델들이 여전히 큰 덩치를 자랑했지만 출력을 줄이며 시대의 흐름에 흡수되거나 소리 없이 사라져갔다. 캐딜락을 상징하던 호화 컨버터블 엘도라도 역시 76년 단종의 운명을 맞았다 1970 Chevrolet Monte Carlo '퍼스널카'의 대명사 포드 선더버드에 맞서 시보레가 1970년 ‘퍼스널 럭셔리’라는 슬로건 아래 내놓은 5인승 2도어 스포츠 쿠페. 한 해 전 데뷔한 폰티액 그랑프리 플랫폼을 바탕으로 한 몬테카를로는 세련된 롱노즈 숏데크 스타일과 고급스런 인테리어를 지녀 당시 시보레 차 중에서는 가장 화려한 모델이었다. 사이드 패널에 체커기까지 새겨 넣었지만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힌트를 얻은 디자인은 아니었다. V8 5.7X 250마력에서 V8 7.4X 360마력에 이르는 3가지 엔진을 얹은 몬테카를로는 선더버드보다 1천 달러 이상 싼값으로 5인 가족 단위의 중산층으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다. 1970 Plymouth Cuda 60년대 머스탱의 맞수로 등장했던 플리머스 바라쿠다는 70년, 모델 체인지와 함께 괴력의 머슬카로 업그레이드해갔다. 바라쿠다는 3가지의 가지치기 모델을 내놓았고 가장 강력한 퍼포먼스 버전인 쿠다도 이 때 선보였다. 닷지 챌린저와 공유한 롱노즈 숏데크 타입 보디는 클래식한 멋을 뽐냈고 부드럽게 감아 올린 오버행과 보네트에 자리한 공기흡입구로 농축된 힘과 속도감을 함께 전했다. 쿠다는 V8 7.0X 헤미를 포함해 335~425마력에 이르는 9가지 엔진 라인업을 갖추고 괴력의 머슬카 경쟁에 뛰어들었다. 1971 Buick Riviera 1963년 처음 모습을 드러낸 뒤 뷰익의 베스트셀러로 성장한 리비에라는 60년대 말 덩치를 키우고 럭셔리 스포티 쿠페로 체질을 개선, 쇠락해가는 포드 선더버드의 자리를 넘보았다. 71년 등장한 신형은 ‘보트테일’스타일의 뒷모습과 코베트 스팅레이로부터 영향을 받은 돔 스타일의 리어 윈도, 개성 강한 트렁크리드 등 드라마틱한 디자인이 강한 인상을 주었다. 부드럽고 민첩한 V8 7.4X 330마력 엔진을 얹고 0→시속 96km 가속 8.4초의 무난한 성능을 냈다. 1973 Pontiac Trans-Am 존 드로리안의 지휘 아래 60년대 중반부터 강력한 스포츠 모델을 선보여온 폰티액은 69년부터 포니카 파이어버드를 바탕으로 한 레이싱 타입 트랜스앰으로 머슬카 매니아들을 공략해갔다. 73년형 트랜스앰은 보네트 위에 그려진 ‘파이어버드’ 그래픽과 뾰족하게 솟은 노즈, 풀사이즈의 리어 데크 스포일러가 특징. V8 6.5X OHV 350마력 엔진에 강성 높은 섀시와 강력한 브레이크 시스템을 버무린 트랜스앰은 0→시속 97km 가속 5.4초의 저돌적인 달리기를 뽐내며 폰티액 최강의 스포츠카로 군림했다. 미국 스포츠카 문화를 관통한 핫로드 열풍 시보레 코베트와 포드 머스탱이 등장하며 절정을 이룬 50~60년대의 미국 스포츠카 시장에는 이미 가장 미국적인 자동차 문화인 ‘핫로드’가 자리잡고 있었다. 핫로드(Hot Road)는 ‘고성능을 위해 양산차를 개조해 만든 차’라는 뜻. 튜닝과 맥을 같이하는 핫로드는 2차대전 이전의 드레그 레이스에서 시작되어 종전 후에는 전장에서 돌아온 가난한 스피드 광과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붐을 이뤘다. 핫로드 매니아들은 자기 집 개러지에서 프레임 구조가 간단한 차에 큰 배기량의 V8 엔진을 얹고 감속비를 바꿔 오직 빠른 속도로 내달릴 수 있는 스프린트 머신을 만들어냈다. 본격 핫로드는 개조하기 쉬운 1929~32년형 포드가, 엔진은 값싸고 구하기 쉬운 포드 V8 플랫헤드와 시보레 V8 스몰블록이 주로 쓰였다. 60년대에 피크를 이룬 핫로드 문화는 메이커의 양산 머슬카가 등장하면서 자리를 넘겨주었다. 폰티액 GTO와 닷지 차저가 조성한 머슬카의 유행은 70년대 초 폰티액 트랜스앰과 올즈모빌 4-4-2, 시보레 카마로 SS396 등이 선보이며 전성기를 이뤘지만 정부의 강력한 규제와 자동차 보험업계의 요율인상, 73년의 오일쇼크 등 악재가 겹치면서 조금씩 모습을 감추어갔다. ‘마초카’ 바이퍼 등장하다 유럽, 일본의 북미 진출이 가속화되면서 아메리칸 스포츠카는 점점 설자리를 잃어갔다. 유럽산 스포츠카들은 서키트에서 다듬은 수준 높은 달리기로 고성능에 대한 기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고 닛산 Z 등 값싼 일본차들이 젊은 고객의 눈길을 돌려놓았다. 시보레 코베트, 포드 머스탱과 선더버드, 폰티액 트랜스앰과 GTO 등은 모델 체인지를 통해 꾸준히 명맥을 이었지만 50~60년대의 영광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오랜 침체기에 들어선 80년대의 미국 스포츠카 시장은 89년 혜성처럼 등장한 닷지 바이퍼에 모든 찬사를 쏟아부으며 훗날을 기약했다. 1981 DeLorean DMC 12 폰티액 GTO와 트랜스앰을 빚어낸 존 드로리안이 73년 독립해서 만든 첫 작품이며 마지막 모델. 빌 콜린스가 설계한 미드십 섀시는 로터스의 손길을 거쳐 완성되었고, 쥬지아로가 걸윙 도어를 갖춘 스타일리시한 쿠페 보디를 그려냈다. 81년 모습을 드러낸 DMC 12는 V6 2.8X 145마력 미드십 엔진과 5단 MT 조합으로 0→시속 100km 가속 8.5초, 최고시속 210km의 뛰어난 성능을 보였지만 도어잠금장치 불량이나 주행중 배터리 방전 등 심각한 품질문제도 안고 있었다. 생산공장 설립 때 진 빚을 감당하지 못한 드로리안이 마약산업에 손을 대 체포되면서 회사는 도산했고 DMC 12도 짧고 굵은 삶을 마감했다. 1984 Pontiac Fiero 84년 등장한 폰티액 피에로는 미국차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미드십 구성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반응을 불러왔다. 플라스틱 보디가 4기통 2.5X 92마력 엔진의 힘을 온전히 받쳐주지 못하고 차체구조도 지나치게 복잡했지만 데뷔 첫 해에 13만6천 대 이상 팔리는 대성공을 거둔 것. 하지만 피에로의 인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아 88년 V6 2.8X 135마력 엔진과 로터스 서스펜션으로 무장한 GT 버전을 마지막으로 폰티액 카탈로그에서 사라졌다. 값싸게 구할 수 있는 미드십 섀시 때문에 지금은 페라리 등 유럽 스포츠카 레플리카를 제작할 때 많이 활용된다. 1987 Cadillac Allante 유럽 및 일본 메이커와의 경쟁에서 패배의 쓴맛을 본 캐딜락이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87년 선보인 럭셔리 로드스터. 피닌파리나 디자인의 알란테 로드스터는 이태리 토리노에서 보디와 섀시를 만들고 디트로이트에서 V8 4.1X 170마력 엔진을 포함한 파워트레인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한 해에 겨우 2천여 대 정도만 만들어졌다. 93년 마이너 체인지를 거친 캐딜락 기함은 V8 4.6X 295마력 노스스타 엔진과 가변 댐퍼 시스템, 최신 트랙션 컨트롤 등 첨단기술을 담뿍 담아 화려함을 더했다. 1989 Chrysler TC by Maserati 크라이슬러의 리 아이아코카와 마세라티의 소유주 데토마소가 손잡고 만든 합작품. 르바론 컨버터블을 바탕으로 데토마소의 터보 엔진을 얹은 프로토타입이 88년 시카고 오토쇼에서 데뷔했다. 마세라티의 2.2X DOHC 터보 200마력을 기본으로 90년에는 미쓰비시 V6 3.0X와 크라이슬러 2.2X 터보 2가지 엔진을 더했다. 마세라티-크라이슬러의 럭셔리 컨버터블은, 그러나 베이스 모델과의 스타일링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고 값도 3만3천 달러나 되어 그리 큰 인기를 얻지 못했고, 3년간 7천300대만 생산한 뒤 모습을 감췄다. 1989 Dodge Viper 80년대 중반 크라이슬러의 제품개발을 지휘하던 밥 러츠는 코브라의 부활을 테마로 한 스포츠카를 떠올린 뒤 캐롤 쉘비와 상의해 컨셉트를 완성해갔다. 새 스포츠카의 심장으로는 닷지 램 트럭에 얹을 예정이던 신형 V10 8.0X OHV 엔진이 선택되었고 람보르기니 기술진의 도움을 받아 400마력, 62.1kg·m의 활화산 같은 파워를 얻어냈다. 순수 스포츠카의 탄생을 갈망하던 미국인들은 89년 디트로이트 오토쇼에 모습을 드러낸 닷지 바이퍼 컨셉트의 강렬한 스타일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양산 모델인 바이퍼 R/T-10이 등장한 것은 지난 92년. 로드스터 타입의 R/T-10은 지붕도 없이 최고시속 260km의 고성능을 기록했고, 고정식 루프로 공력 특성을 높인 바이퍼 GTS 쿠페(1996)는 시속 300km에 가까운 성능을 냈다. R/T-10은 지난해 레이싱 버전을 바탕으로 한 SRT-10으로 진화했다. 강성이 31%나 향상된 스페이스 프레임에 전동 소프트톱을 더했고, V10 엔진은 배기량을 8.3X까지 키워 500마력, 72.6kg·m의 한층 폭발적인 성능을 자랑한다. 1천500rpm부터 최대토크의 90%를 뿜어내며 정지상태에서 4초 안에 시속 100km 가속을 마무리한다. 최고시속은 305km. 되살아나는 아메리칸 스포츠의 전설 90년대 초 미국 시장에는 마쓰다 미아타의 출현으로 경량 로드스터 붐이 일었지만 미국의 빅3은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한 채 ‘객들의 잔치’를 관망해야 했다. 벡터, 파노즈, 모슬러, 설린 등 간간이 터져 나온 소규모 제작업체의 수퍼카로 위안을 삼던 아메리칸 스포츠카 시장은 선더버드의 부활을 계기로 강력한 레트로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독일과 영국, 이태리에서 쏟아지는 다양한 모델에 비한다면 자국 스포츠카 시장은 여전히 황무지나 다름없는 수준. 시보레 코베트 C6과 7세대에 이른 포니카 머스탱, 확실한 카리스마의 닷지 바이퍼 SRT-10은 21세기 미국 스포츠카의 자존심을 지키는 삼각편대. 최근에는 캐딜락 XLR, 폰티액 솔스티스 등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GM의 신작들이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을 이끌 주역으로 손꼽히고, 벤츠의 후광을 등에 업은 크라이슬러의 약진도 눈여겨볼 만하다. 1991 Vector W8·M12 제럴드 위거트가 세운 벡터는 1978년 러닝 프로토타입을 처음 내놓지만 같은 해 등장한 람보르기니 카운타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양산형 벡터 수퍼카가 등장한 것은 한참이 지난 91년의 일. 1983년 W2 트윈터보라는 이름의 프로토타입을 선보인 벡터는 그 후 W3~7의 여러 시험차를 거쳐 양산형 W8(사진)을 완성해냈다. 쐐기형 스타일의 W8은 카운타크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노즈 끝으로 모이는 라인과 슬라이드식 사이드 윈도 등 참신한 개성도 가득했다. 시보레 V8 6.0X OHV에 트윈터보를 더한 미드십 엔진은 최고출력 625마력과 83.1kg·m의 활화산 같은 힘을 4단 AT를 통해 뒷바퀴에 전했다. 벡터는 92년 인도네시아 메가테크사에 인수된 뒤 람보르기니의 V12 5.7X DOHC 490마력 엔진을 얹은 새로운 모델 M12(1996)를 발표했지만 인도네시아의 정국 불안과 판매부진이라는 악재가 겹치면서 모기업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97 Plymouth Prowler 50~60년대 다양한 머슬카와 크라이슬러의 엔트리카를 내놓으며 독보적인 위치를 고수했던 플리머스는 90년대 크라이슬러의 몰락과 함께 존재 자체가 미미해져갔다. 플리머스는 93년의 프라울러 컨셉트를 97년에 거의 쇼카 모습 그대로 양산화하면서 반짝 활기를 띄기도 했다. 밥 러츠의 지휘 아래 60년대 핫로드의 이미지를 담고 태어난 프라울러는 독립된 알루미늄 펜더, 뒤쪽은 넓고 보네트는 뾰족한 차체 등 클래식한 보디라인에 실속 있는 V6 3.5X DOHC 243마력과 4단 AT를 조합했다. 앞 225/45 R17, 뒤 295/40 R20 사이즈의 광폭 타이어를 신은 현대적인 FR 핫로드는 스포티하고 경쾌한 핸들링을 자랑했다. 최고시속 230km, 0→시속 100km 가속 7.5초로 돋보이는 주행성능도 지니고 있었지만 2002년 판매부진으로 플리머스와 함께 크라이슬러의 타임캡슐 안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1999 Panoz Esperante 파노즈는 이태리 출신의 젊은 엔지니어 다니엘 파노즈가 세운 회사로 영국 코치빌더와 같은 수제작 방식으로 A/V 로드스터, 에스페란트(사진) 등의 순수 스포츠카를 만들어왔다. 파노즈의 최신작 에스페란트는 지난 99년 북미국제오토쇼에 첫선을 보인 뒤 2001년부터 미국 내 30개 딜러망을 통해 본격 시판되었다. 모듈러 알루미늄 섀시와 경량 알루미늄 보디 패널로 구성된 에스페란트는 2시터 로드스터를 기본으로 카본파이버 하드톱과 브렘보 브레이크 패키지까지 옵션으로 갖췄다. 머스탱 코브라의 것을 빌려온 V8 4.6X DOHC 엔진은 포드 SVT 출신 엔지니어가 손수 조립생산하고 최고출력 320마력을, 4천750rpm에서 32.1kg·m의 성능을 낸다. 뒷바퀴굴림의 에스페란트 럭셔리 로드스터는 트레멕 5단 MT를 조합해 0→시속 100km 가속 5.1초의 짜릿한 가속력을 이끌어낸다. 2000 Saleen S7 포드 튜너로 이름을 날린 설린은 지난 2000년 오리지널 디자인의 S7을 선보이며 ‘아메리칸 수퍼 스포츠’의 중심에 우뚝 섰다. 로 앤드 와이드의 매끈한 보디는 풍동실험을 통해 최소한의 저항과 최적의 다운포스를 얻어냈고 프론트 범퍼와 뒤 펜더 흡기구로 강력한 힘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스페이스 프레임과 알루미늄 허니컴으로 경량화한 섀시, 카본파이버 보디 등 레이싱 기술도 가득 담고 있다. 포드의 푸시로드식 V8 7.0X 미드십 엔진은 알루미늄 블록과 단조 피스톤, 드라이섬프 윤활 시스템 등을 더해 최고출력을 550마력까지 끌어올렸다. 현재 순수 미국산 양산 스포츠카로는 최고의 성능을 자랑한다. 2001 Mosler MT900 지난 2001년 무명에 가까운 모슬러가 내놓은 수퍼 쿠페 MT900은 단숨에 화제의 중심에 섰다. 상어를 떠올리는 날카롭고 매끈한 보디라인, 카본파이버와 알루미늄 허니컴 등의 소재를 쓴 1천174kg의 경량 차체, 그리고 시보레 코베트용 V8 5.6X OHV 345마력 엔진의 도움을 받아 정지상태에서 시속 60마일(약 96km)까지 3.5초 만에 돌파하는 경이로운 가속 성능……. 강력한 모슬러 수퍼 쿠페는 이듬해 쉐비 LS6 V8 5.7X 435마력 엔진을 미드십에 얹고 포르쉐 수동 6단 트랜스미션을 조합한 MT900S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미국 자동차 전문지 는 “가속은 민첩하고 브레이크는 무거우며, 매서운 코너링은 페라리 360 모데나 이상”이라는 표현으로 MT900의 빼어난 성능을 극찬하기도 했다. 2002 Chysler Crossfire 지난 98년 벤츠와 합병 이후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크라이슬러는 최근 미국 빅3의 자리까지 위협받고 있다. 2002년의 크로스파이어 쿠페는 벤츠의 전폭적인 기술지원 아래 만들어진 ‘크라이슬러발(發) SLK’에 다름 아니다. 바탕이 된 모델은 리트랙터블 하드톱으로 유명한 벤츠의 1세대 SLK 로드스터. 크라이슬러 FR 쿠페를 떠받친 더블 위시본, 멀티링크(각각 앞뒤) 서스펜션은 물론 3밸브 헤드의 V6 3.2X 215마력 엔진과 인테리어 일부 부품에까지 벤츠의 손길이 닿아 있다. 올해의 북미국제오토쇼에는 독일 카르만의 전동 소프트톱을 얹은 크로스파이어 컨버터블이 공식 데뷔했다. 2003 Cadillac XLR 80년대 이후 유럽과 일본의 럭셔리카 메이커에 압도되어 내리막을 걷던 캐딜락은 2000년 스포츠 세단 CTS를 선보이며 스타일과 성능, 가치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왔다. 지난해 시판을 시작한 럭셔리 로드스터 XLR은 99년의 이보크 컨셉트를 구체화한 모델로 엘도라도, 알란테로 이어지는 캐딜락 호화 오픈카의 계보를 잇는다. 코베트 C6과 함께 쓰는 FR 바탕의 퍼포먼스카 플랫폼은 수압성형 복합 스틸 프레임과 알루미늄 콕피트 구성. 뒷바퀴굴림용으로 새롭게 손본 신형 노스스타 V8 4.6X 320마력 엔진과 하이드라매틱 5단 AT를 조합해 0→시속 97km 가속을 5.8초에 마무리하고 전자제어식 가변 댐퍼가 최상의 핸들링과 솜털 같은 승차감을 뒷받침한다. 고성능 부문 강화하는 미국 메이커 유럽에 비해 유독 스포츠카 시장에 열세를 보여온 미국 빅3은 최근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전담 고성능 부문 강화를 재촉하고 있다. 포드는 지난 91년에 조직한 SVT(Special Vehicla Team, 사진)를 통해 머스탱 코브라와 F-150 라이트닝을 만들어냈다. 포드 SVT는 이후 코브라와 라이트닝 픽업, 컨투어 스포츠 세단, 포커스 등 여러 버전을 선보이며 10년 동안 10만 대 이상의 SVT 모델을 찍어냈다. 크라이슬러 닷지 디비전은 PVO(Performance Vehicle Operation)를 통해 SRT(Street and Racing Technology) 라인업을 내놓고 있다. 지난 99년 바이퍼 SRT-10을 성공적으로 데뷔시킨 PVO는 여세를 몰아 스포츠 쿠페 네온의 고성능 버전인 SRT-4와 픽업트럭 램 SRT-10까지 만들어냈다. 램 SRT-10은 바이퍼의 V10 8.3X 500마력 엔진과 트레멕 6단 MT를 조합하고 빌슈타인 모노튜브 댐퍼와 고탄성 스프링, 305/40 R22 피렐리 스콜피온 타이어로 하체를 단련했다. 세계 시장 넘버 1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GM은 사내 레이싱 부문에서 퍼포먼스 디비전을 분리해 시보레 라인업에는 60~7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SS(Super Sport) 패키지를, 최상급 캐딜락에게는 고성능 ‘V’ 시리즈를 선물했다. 퍼포먼스 디비전의 관리 아래 시보레는 임팔라와 몬테카를로, 실버라도 픽업 등 수퍼차저 엔진의 SS 버전을 마련했고, 캐딜락은 최근 V8 5.7X OHV 400마력의 CTS-V를 시판 목록에 더했다. 아메리칸 스포츠의 현주소 유럽과 일본, 한국 메이커의 거센 공세에 밀려 홈그라운드에서 고전하고 있는 미국 메이커는 90년대 후반부터 과거 거품경제 시대의 명차를 끄집어내 현재의 영화로 재현하려는 작업에 골몰하고 있다. 미국의 복고바람을 주도하는 메이커는 최근 넘버 2의 자리를 도요타에 내어준 포드. 20세기 말 선보인 선더버드와 포티나인 컨셉트가 미국 중장년층으로부터 대단한 관심을 사자, 포드는 60년대의 수퍼카 GT 40을 되살리고 더 이상 예스러울 수 없는 선더버드와 머스탱을 완성해냈다. 올해 북미국제오토쇼의 쉘비 코브라와 브롱코 컨셉트에서는 레트로 스타일로 ‘끝장을 보려는’ 포드의 집념이 느껴질 정도. 이와 달리 GM은 시보레 코베트의 체질개선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밥 러츠의 강력한 지휘 아래 폰티액의 스포츠성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머슬카의 시초로 불리는 GTO는 최근 홀덴 모내로를 바탕으로 수준을 업그레이드했고, 내년 중반에는 카파 플랫폼의 매력적인 2인승 컴팩트 로드스터 솔스티스(사진)가 시판에 들어갈 예정이다. 빅3의 막내 크라이슬러는 벤츠에게 모든 운명을 맡긴 듯한 모습. 스포츠 쿠페 크로스파이어와 크로스오버인 퍼시피카, 신형 300 세단을 벤츠 기술로 완성한 데 이어 이번 디트로이트 코보홀에는 V12 6.0X 쿼드 터보 엔진의 수퍼카 ME 포 트웰브까지 선보였다. 850마력의 최고출력과 최고시속 400km 이상을 예상한다는 크라이슬러의 미드십 수퍼카가 휑하게만 보이는 것은 구석구석에서 드러나는 벤츠와 AMG의 흔적 때문일 듯. 미국 스포츠카 매니아로서는 거친 야성미와 특유의 카리스마가 여전한 닷지 바이퍼 SRT-10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코리안 빅3’시대 개막과 수입차 개방 되돌아.. 2004-03-08
1987년 국내에서는 ‘동백아가씨’, ‘고래사냥’, ‘왜불러’ 등 공연금지가요 186곡과 ‘아침이슬’ 등 방송금지곡 500곡이 해금되었다. 북한을 탈출한 김만철 씨 일가 11명은 ‘따뜻한 남쪽나라’ 한국 땅을 밟았고, 배우 강수연 씨는 ‘씨받이’로 제44회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바그다드발 서울착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북한의 테러로 미얀마 랑군 상공에서 폭발해 탑승객 115명 모두가 사망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는 14대 대통령 선거 전날 서울에 옴으로써 대선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1988년은 제24회 서울올림픽이 장식했다.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0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서울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금 12개, 은 10개, 동 11개로 종합 4위를 차지했다. 또한 남극과학기지인 세종기지가 세워지고 논산훈련소 훈련병 면회제도가 29년만에 부활하기도 했다. 미국 맥도널드가 국내 패스트푸드 시장에 상륙했고 제2 민항 허가를 받은 금호 그룹은 항공사업 준비에 바빴다. 자동차업계 노사분규로 큰 충격에 빠져 수입차시장 개방에 따라 딜러 경쟁 가열 1987년의 톱뉴스는 노사분규로 인한 자동차업계의 장기휴업이었다. 지금은 자동차회사의 노사분규가 연례행사처럼 벌어지고 있지만 자동차산업 부흥기이던 당시에 일어난 대규모 노사분규는 국내 산업 전반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87년 국내 자동차산업은 내수와 수출이 모두 늘어 양적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임금인상과 처우개선, 노조개편 등을 초점으로 빚어진 대규모 노사분규는 완성차 메이커는 물론 부품공급업체에게도 큰 타격이 되었다. 현대와 기아, 대우, 동아, 아시아 등 국내 5개 자동차 메이커에서 8월 초순부터 9월까지 거의 같은 시기에 잇달아 분규가 일어났고, 8월 한 달만 해도 계획에 비해 7만9천 대를 감산, 모두 4억7천500억 원어치의 생산 차질을 빚었다. 당시 현대 엑셀에 이어 대우 르망과 기아 프라이드가 미국 시장에 막 진출한 때여서 2억5천만 달러의 금전적인 손실뿐만 아니라 대미 수출시장에서의 신용도에도 나쁜 영향을 미쳤다. 결국 한 달여 만에 노사분규는 진정되었고 근로자들의 임금은 20∼30% 인상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 자동차공업은 ‘싼 임금의 우수한 노동력’이 발전의 큰 힘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근로자 복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을 반기면서도 이제 막 수출을 시작한 상황에서 행여 국제경쟁력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우려했다. 86년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후 판매 신기록을 세운 현대 엑셀의 기록 행진은 87년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엑셀은 87년 4월 닛산 센트라를 누르고 미국 소형차시장에서 판매 1위를 차지했고 혼다 시빅이 센트라의 뒤를 이었다. 현대는 8∼9월 노사분규를 겪었음에도 연초에 세웠던 25만 대 판매목표를 2만 대 정도 초과 달성했다. 7월부터는 배기량 1천∼2천cc를 제외한 외국산 승용차에 대한 수입제한조치가 풀렸다. 그러나 수입선다변화 품목에 걸리는 일본차는 개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전까지 정부는 국내 자동차산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해 원칙적으로 외국산 승용차의 수입을 제한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와 개방정책을 내세운 정부는 외제 승용차 수입을 허용할 뜻을 내비쳤다. 특히 현대 엑셀이 미국 소형차시장을 휩쓸자 미국과의 무역적조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수입차 개방을 더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개방에 맞춰 해외 메이커와 딜러십을 맺기 위한 국내 업체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국내에 연고가 있는 GM은 대우를 통해 캐딜락 플리트우드 식스티 스페셜, 캐딜락 드빌, 뷰익 파크 애비뉴 등 3차종을 선보였고, 포드는 기아를 통해 링컨 컨티넨탈과 머큐리 세이블 2차종을 내놓았다. 그러나 수입차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차는 역시 유럽산 차였다. 벤츠는 한성자동차, BMW는 코오롱상사, 아우디는 효성물산을 파트너로 한국 시장에 첫발을 내딛었다. 운전면허 인구 500만 명 시대 맞이해 기아, 프라이드로 승용차시장에 복귀 1987년 8월 국내 자동차 등록대수는 150만 대를 넘어섰다. 100만 대를 넘어선 때가 85년 5월이니 불과 2년만에 50%가 늘어난 셈이다. 150만 대 시대의 자동차보유율은 국민 28명에 1대 꼴(승용차 기준으로는 53명에 1대 꼴)로 미국 1.4명, 독일(서독) 2.3명, 일본 2.7명에 비하면 여전히 차이가 컸다. 때를 같이해 87년 8월 운전면허 보유자도 500만 명을 넘어섰다. 이 수치는 전체 국민 8명 가운데 1명이 운전면허를 딴 것으로, 특히 도시에 사는 18세 이상 3∼4명 가운데 1명은 운전면허를 갖고 있는 셈이었다. 반면 도로증가율은 눈에 띄게 더뎠다. 특히 자동차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87년 유래 없이 혼잡했던 귀성길 정체는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국경일을 낀 추석 황금연휴 6일 동안 전국에서 2천514건의 교통사고가 일어나 134명이 숨지고 3천42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되었다. 추석 전날 서울을 빠져나간 차는 모두 5만2천989대에 이르렀고, 서울-부산간은 16시간, 서울-대전간은 9시간이 걸릴 정도로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87년 말(12월)에 개통된 중부고속도로는 단비와도 같았다. 서울 강동구 하일동에서 시작해 서부 중심권을 달려 충남 대전에 이르는 총연장 145.3km의 중부고속도로는 85년 4월 착공해 32개월만에 완공된 국내 10번째 고속도로다. 특히 중부고속도로는 노폭이 이전의 고속도로보다 1m 이상 넓고 곡선반경이 크며 도로경사를 완만하게 설계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제한속도가 시속 100km를 넘어선 110km인 것이 화젯거리였다. 새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고속도로와 가까이 있는 이천이 관광명소로 떠올랐고 서울에서 강릉으로 이어지는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하기에도 한결 편리해졌다. 한편 기아가 승용차시장에 6년만에 복귀함으로써 현대·대우와 함께 ‘코리안 빅3’ 체제가 갖추어졌다. 자동차 3사는 87년 한해 많은 새차와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선보이며 거리의 표정을 바꾸어놓았다. 현대는 당시 최대 배기량인 2.4X 엔진을 얹은 그랜저 2.4와 원박스카 그레이스를 내놓았다. 또한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동식 선루프를 단 프레스토 ETR과 모델 체인지한 스텔라와 쏘나타도 선보였다. 소형차 프라이드 3도어를 내놓은 기아는 8월 지붕을 열 수 있는 캔버스톱 모델을 더했고 10월에는 콩코드로 중형차시장을 두드렸다. 대우는 데뷔 후 10년만에 로얄 시리즈를 크게 바꾸었다. 로얄 살롱과 로얄 프린스, 로얄 듀크로 새 로얄 시리즈를 구성했고 로얄 살롱 윗급의 수퍼살롱은 로얄 시리즈에서 독립시켰다. 대우는 또 86년 선보인 르망의 실내외를 개선한 르망 살롱(GTE)을 내놓았다. 이밖에 쌍용이 자본참여하기도 했던 영국 팬더가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고성능 스포츠카 솔로Ⅱ를 선보였다. 87년에는 대우가 로얄 프린스로 세계일주를 하고 현대가 스텔라로 남·북미를 종단하는 등 자동차문화 발전에 밑거름이 될 만한 이벤트가 많았다. 파리-다카르 랠리에 한국인이 처음 참가해 완주하는 기록을 세웠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자동차 관련 모터쇼인 ‘국제 자동차부품·액서세리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올림픽 기간 중 시행한 짝·홀수제 성공 음주운전 면허취소 등 단속기준 강화해 88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은 자동차시장 성장의 빛과 그늘이 함께 했다. 국내 자동차생산이 처음으로 연간 100만 대를 넘어선 반면, 교통체증이 심화되고 교통사고가 급증했다. 특히 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축제를 앞둔 상황에서 69만 대의 차로 포화상태에 이른 서울이 제대로 올림픽을 치러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이때 나온 해결방안이 올림픽이 열리는 9월 15일부터 10월 2일까지 18일 동안 승용차 짝·홀수제를 시행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짝·홀수제, 5부제, 10부제 등을 시행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승용차 번호판 숫자의 끝자리를 기준으로 운행을 제한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강제성을 띠지 않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호소하는 짝·홀수제가 얼마만큼 성공을 거둘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시행 첫날인 9월 15일 45만 대에 이르는 서울시내 자가용 승용차 가운데 90% 이상이 격일제 운행을 지켰다. 또한 마라톤 등 특정 경기 때나 경기장 주변에서 교통통제를 하는 일이 많았지만 많은 운전자들이 불편을 참고 견디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였다. 국내 자동차 등록대수가 100만 대를 돌파한 지 3년여 만에 연간 자동차 생산대수가 100만 대를 넘어섰다. 88년은 그야말로 모터리제이션의 한 가운데 서 있던 시기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일본, 미국, 서독, 프랑스, 이태리, 영국, 스페인, 캐나다, 벨기에, 소련에 이어 자동차 생산 세계 11위에 올랐다. 음주운전에 대해 철퇴가 내려진 것도 빅 이슈였다. 9월 음주운전 단속을 강화하는 도로교통법 시행규칙 개정안이 발표되기 전에는 혈중알콜농도 0.5mg(0.05%) 이상인 음주운전자가 사고를 내지 않았을 경우 최고 100일의 면허정지처분만 받았다. 그러나 처벌이 강화되면서 혈중알콜농도가 1mg 이상이면 사고와 관계없이 무조건 면허를 취소하도록 처벌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운전자들이 자랑삼아 풀어놓던 ‘음주운전 무용담‘은 슬슬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88년 역시 87년에 이어 노사분규가 계속되어 자동차업계의 장기휴업이 이어졌다. 노사분규로 인해 연초에 세웠던 자동차생산 목표대수는 140만 대에서 110만 대로 크게 줄었고 계약 적체가 20∼70일에 달했다. 4월에서 6월까지 이어진 노사분규는 현대·기아·대우는 물론 여러 부품업체로 파급되었다. 87년에는 업체당 평균 분규기간이 7일로 짧았지만 88년에는 짧게는 40여 일에서 길게는 2개월에 걸쳐 지속되어 자동차산업 전체의 손해액은 9천800억 원에 달했다. 87년에 비해 발생건수는 줄었지만 분규가 장기화되고 더욱 첨예화되어 노사문제는 자동차업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었다. 이밖에 승용차 연비 표시 의무화가 3월부터 시행되었고 캐나다에서는 자국에서 싼값에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현대차의 덤핑 시비를 조사했으나 무혐의 판정을 내렸다. 6월에는 지리산 횡단도로가 완공되었고 국제유가가 계속 하락해 국내 기름값도 내렸다. 소형차를 넘어 중형차를 선호하는 경향이 심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미국에 상륙해 87년 수입소형차 판매 1위를 차지한 현대 엑셀이 8월 현대의 제휴사인 미쓰비시를 통해 일본에 처음 수출되었다. 예전 동아자동차가 코란도를 일본에 수출한 적이 있지만 소형차 왕국인 일본에 소형 승용차를 수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식 수출이 아니라 올림픽을 기념해 150대 한정판매한 것이었지만 호들갑스럽기로 유명한 일본 매스컴들은 일제히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한국차가 일본 자동차사회를 뒤흔들지 모른다’는 우려와 ‘일본 자동차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엄살이 주 내용이었다. 1년만에 수입차 관세율 25% 줄어들어 현대, 국내 첫 독자 엔진 개발에 성공 지루하게 이어지던 국민차 개발계획도 활기를 띠었다. 경승용차에 대한 세율인하 조정 등을 전제로 국내 자동차업체 3사가 국민차 개발에 적극 나서기로 한 것이다. 국민차 개발계획이 처음 나온 것은 70년대의 일로, 2차 석유파동을 겪은 후 83년부터 본격적으로 구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가 국민차 보급을 위한 세제개편 계획을 내놓지 않고 86년까지만 해도 국내 소형차시장 규모조차 10만 대에 못 미쳤기 때문에 메이커들이 경차 개발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세율 인하로 ‘국민차 메리트’가 생기자 현대는 합작선인 미쓰비시의 미니카, 기아는 마쓰다와 폭스바겐의 경차, 대우는 스즈키 알토를 바탕으로 하는 경차 개발을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한편 수입차 개방 1주년이 된 1988년, 정부가 외국과의 통상마찰을 줄이기 위해 수입차 관세를 50%에서 30%로 내리고 2천cc 미만의 소형승용차 수입도 허용하자 수입차시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자동차 수출 호황에 힘입어 국제 무역수지가 큰 폭으로 흑자를 낼 것이 확실시되고 이로 인해 외국으로부터의 통상압력이 거세질 것을 염려한 정부는 11월 관세율을 다시 5% 내렸다. 즉 1년 사이 수입차 관세율이 50%에서 25%로 줄어들었고, 그 덕택에 수입차의 차값은 적게는 수백만 원부터 많게는 수천만 원 싸졌다. 이밖에 국내 첫 모터쇼인 ‘88 서울국제자동차종합전시회’(SIMS 88)가 4월 8일부터 14일까지 코엑스(KOEX)에서 열렸다. ‘최초‘라는 의미 때문에 업계는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도 컸지만 국산차가 불참한 채 87년 이후 수입된 차들 중심으로만 부스를 꾸며 아쉬움을 남겼다. 벤츠와 BMW, 아우디, 폭스바겐, 르노, 피아트, 볼보 등이 19대의 차를 전시했고 7일 동안 37만 명의 관람객들이 행사장을 다녀갔다. 현대가 처음으로 1.5X 알파(α) 엔진을 자체 개발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현대차는 86년 이후 수출이 크게 늘었지만 미쓰비시 엔진을 얹은 탓에 비싼 로열티를 계속 물어야만 했다. 독자 엔진의 개발로 현대차는 가격경쟁력에서 한층 유리한 입장이 되었다. 또한 현대는 2년 전에 착공한 캐나다 브로몽 현지공장을 연말에 준공했다. 브로몽 공장은 우리나라 메이커가 해외에 세운 첫 자동차공장으로, 이듬해부터 연산 10만 대 규모로 엑셀과 쏘나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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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등록대수 100만 대 돌파하고 수출 물꼬 터.. 2004-02-06
1985년 국내에서는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와 예술공연단이 서울과 평양을 동시 방문해 분단 40년만에 첫 교류를 가졌다. 한국 축구가 32년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고 구정의 이름이 ‘민속의 날’로 바뀌면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해외에서는 미국이 유인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를 발사했고 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1986년 서울에서는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행사에 앞서 김포공항에서 폭발 사고로 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국내 첫 대규모 국제 이벤트인 서울 아시안게임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되고 카드사용 공중전화기가 설치된 것도 86년의 일. 해외에서는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73초만에 공중 폭발하는 사고도 있었지만 소련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소련군을 철수시킨다고 선언하는 등 밝은 소식도 많았다. 85년 국내 자동차 등록대수 100만 대 돌파 상공부, 자동차 수입자유화 시기 확정 발표 1985년 국내 자동차 등록대수는 100만 대를 넘어섰다. 5월 7일 전국의 자동차 등록대수가 100만430대로 집계된 것. 1903년 국내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도입된 이후 82년만의 일이다. 100만 대 가운데 승용차가 50여만 대로 절반을 차지했고, 85년 이후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국산차의 해외 생산도 시작되었다. 기아가 나이지리아에 봉고를 조립할 수 있는 부품과 설비를 수출했고 현지에서 기아 기술진의 지도 아래 봉고가 조립, 생산되었다. 완전한 의미의 녹다운 수출이 아닌 세미 녹다운(Semi-Koncked Down) 방식이었지만, 62년 닛산 블루버드를 SKD 방식으로 생산하면서 자동차공업을 일으키기 시작한 지 20여 년만에 우리나라가 자동차 기술을 수출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포르투갈과 미국에 TV와 전자레인지 생산공장을 준공하는 등 의욕적으로 사업을 펼치던 삼성은 자동차업계에 진출하기 위해 크라이슬러와 접촉하는 한편 경남 창원 일대에 10만 평의 공장부지를 확보했지만 정부의 규제 등 많은 난관으로 결국 한참 뒤(90년대 후반) 승용차 사업에 손대게 된다. 서울에서는 아시아와 동아자동차가 들여온 스카니아, 볼보 굴절버스가 장안의 화젯거리였다. 길이 18m에 달하는 굴절버스는 일반 시내버스의 2배에 달하는 170명을 실어 나를 수 있었으나 3개월간의 시험운행 결과 국내 도로여건 등이 문제가 되어 정식으로 도입되지는 않았다. 자동차 통합보험제도 실시되었다. 책임보험과 종합보험을 따로따로 들어야 했던 이전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두 보험을 하나로 합쳤고 이때 책임보험의 값이 크게 올랐다. 교통안전진흥공단은 자동차 정기점검 유효기간이 끝나기 15∼20일 전에 안내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84년 포니Ⅱ를 캐나다에 수출하기 시작한 현대는 85년 스텔라와 포니 엑셀을 잇달아 상륙시켜 캐나다 수입차시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던 혼다와 도요타를 위협했다. 현대는 또 미쓰비시와 함께 앞바퀴굴림 방식 고급 승용차를 내놓기로 하고 개발을 진행했다. 정부가 87년부터 국내 3개 자동차회사(현대, 기아, 대우)의 생산차종 제한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하자 기아는 포드와 제휴를 맺고 승용차 생산 준비에 들어갔다. 대우 역시 86년 선보일 월드카(르망) 생산을 위해 차관을 들여오는 등 분주한 한해를 보냈다. 한편 상공부는 자동차수입 자유화시기를 확정 발표해 외산차가 수입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확정안에 따르면 배기량 2천cc를 초과하는 차는 87년, 2천cc 이하는 88년부터 수입을 허용하기로 했다. 이밖에도 서울에서는 택시요금에 거리와 시간을 병산하는 제도가 처음 도입되었다. 미국 빅3, 잇따른 소형차 개발계획 발표 국가별 생산대수는 일본·미국·유럽 순 1985년 세계 자동차 생산대수를 메이커별로 살펴보면 GM이 846만 대로 1위를 차지했고 포드(555만 대), 도요타(354만 대), 닛산(238만 대), 크라이슬러(192만 대), 르노(167만 대), 피아트(163만 대), 푸조·시트로엥(162만 대), 혼다(136만 대)가 뒤를 이었다. 국가별로는 1천227만 대를 생산한 일본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미국(1천167만 대)과 서독(444만 대) 순이었다. 미국에서는 84∼85년 잇따라 전자회사와 정보처리회사를 인수한 GM이 유럽과 일본의 소형차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독자적인 브랜드 ‘새턴’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일본차가 매년 180만 대 이상 팔릴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미국 소형차시장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GM에 맞서 포드는 ‘알파’, 크라이슬러는 ‘리버티’라는 소형차 개발계획을 진행했다. 크라이슬러는 84년에 선보인 미니밴이 큰 인기를 끌어 행복한 비명을 질러댔다. 유럽에서는 빅6 가운데 절반이 흑자를 기록했다. 즉 유럽포드와 피아트, 폭스바겐은 흑자를 냈고, 르노와 푸조, GM 자회사들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특히 국영기업이 된 르노가 80년을 기점으로 점유율이 떨어지며 계속 적자를 보고 있었고 시트로엥은 BX의 성공으로 근근히 평균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푸조는 205로 재기를 노렸고 폭스바겐은 74년부터 생산한 골프의 700만 대째 모델을 85년 3월 찍어냈다. 미국의 자동차 전문지들은 매년 ‘올해의 차’를 선정해 발표하는데, 당시 는 최우수 차로 폭스바겐 GTi를 꼽았다. 다음으로는 닷지 랜서 터보, 크라이슬러 르바론 GTS, 뷰익 엘렉트라 T, 캐딜락 플리트우드, 시보레 아스트로, 폰티액 그랜드앰, 올즈모빌 캘리스, 올즈모빌 98, 뷰익 서머셋 등이 뒤를 이었다. 한편 최우수 차로 포르쉐 944를 꼽은 는 특이하게 ‘후진국 최우수차 10’도 선정했다. 후진국 우수차로는 중공(중국) 홍기 CA-770B, 소련(러시아) 질 114 리무진, 체코 스코다 래피드 등 대부분 공산권 승용차가 꼽혔는데 이 리스트에 한국 대우 맵시나도 올랐다. 유럽에서는 대우 르망의 전신이 된 신형 카데트가 ‘올해의 유럽차’로 뽑혔다. 2위는 르노25이고 란치아 테마, 혼다 시빅, 세아트 이비자, 오스틴 MG 몬테고 등이 뒤를 이었다. 미국에서는 첫 미드십 방식의 폰티액 피에로와 포드 토러스가 선보였다. 유럽에서는 벤츠 E시리즈(W124)와 포르쉐 959, 알파로메오 알파 75, 아우토비앙키 Y10, 일본에서는 경차 혼다 투게더, 기타 지역에서는 자스타바 유고 GV가 선보였다. 이밖에도 해외에서는 홍콩과 북경을 잇는 3천500km의 랠리가 열려 관심을 모았다. 1907년 처음으로 동서양(북경∼파리)을 달리는 자동차 경주가 펼쳐진 지 78년만의 일이다. 세계 주요 언론들은 78년만에 열린 자유 세계와 공산권을 잇는 모터스포츠 이벤트에 큰 관심을 보였다. 같은 해 중공에서는 첫 모터쇼(북경)가 열리기도 했다. 1986년에는 포니 엑셀의 미국 상륙이 단연 톱뉴스였다. 86년 2월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현대 엑셀은 4천995달러의 기본 차값으로 세계 최대의 자동차시장 미국을 노크했다. 엑셀의 미국 진출은 시기적으로 좋았다. 전통적으로 중형∼대형차가 주류를 이루던 미국 자동차시장은 두 차례 석유파동과 불경기, 인플레를 겪으면서 유럽차에 이어 일본 소형차에 크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일본차보다 값싼 현대 엑셀이 미국 소형차시장을 파고든 것. 현대는 북미에 앞서 84년 캐나다 시장에 상륙해 진출 2년만에 7만9천 대를 팔아 메이커별 판매실적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소형차 유고를 제외하면 미국에서 가장 싼값에 팔린 현대 엑셀은 북미 데뷔 첫해 10만 대가 넘게 팔린 첫 수입차가 되고 이 뽑은 ‘86 미국내 10대 상품’에 올랐다. 현대는 더욱 적극적으로 북미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캐나다 브로몽에 현지 조립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86년, 현대 포니 엑셀 북미 상륙 성공해 시트벨트 착용 의무화하고 어기면 벌금 한편 도로교통법이 개정되어 시트벨트 착용이 의무화되었다. 국내에서 착용법이 생긴 것은 80년의 일이지만 86년 이전에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운전자만 시트벨트를 매야 했다. 개정된 법에 따라 고속도로는 물론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운전자와 동승객이 시트벨트를 매야했고 이를 어기면 1만 원의 범칙금도 물어야 했다. 87년 7월부터는 2차선 이상 모든 도로에서 시트벨트를 매야 하는 것으로 법규가 강화되었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서울의 도로사정도 개선되었다. 행주대교에서 천호동까지 한강 남쪽 강변을 따라 서울 동서를 잇는 총연장 36km의 올림픽대로가 개통되어 이전까지 1시간∼1시간 반이 걸리던 행주대교∼천호동 사이를 30분대에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시안게임 개통시기에 맞춰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해 ‘졸속공사’란 혹평을 받기도 했다. 또한 호남고속도로도 4차선 확장공사가 끝나 대전∼광주간 교통 소통이 원활해졌다. 이밖에 한국인 김영철 사장이 운영하던 영국 팬더카의 칼리스타가 서울에 등장하고 거화 코란도가 일본에 수출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공업발전법에 따른 합리화 업종으로 자동차를 지정해 89년 7월까지 새로운 업체의 자동차시장 진입을 금지했다. 교통부가 승용차 색상을 자율화해 ‘새빨간’ 승용차도 거리를 달릴 수 있게 되었고 쌍용은 거화를 인수한 동아자동차를 사들이기로 합의했다. 현대·기아·대우가 잇따라 공장을 확장해 국내 자동차 생산능력이 100만 대를 넘어섰다. 자동차 탄생 100년 맞이한 뜻깊은 해 미국에서는 앞바퀴굴림 방식 차 유행 1986년은 자동차 탄생 100주년이면서 벤츠 탄생 100주년이었다. 독일의 칼 벤츠와 고틀리프 다임러가 처음으로 휘발유 내연기관을 얹은 차를 만든 때가 1886년. 이때부터 자동차의 역사와 벤츠의 역사는 함께 흘러왔다. 벤츠는 자사 탄생 100주년 겸 자동차 탄생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다채로운 행사를 열었다. 미국에서는 앞바퀴굴림 차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85년 캐딜락과 포드 토러스가 앞바퀴굴림을 쓴 데 이어 87년부터는 링컨이 앞바퀴굴림 컨티넨탈을 내놓는다고 발표하는 등 보수적인 미국차들이 잇달아 굴림방식을 바꾸었다. 한편 미국에서 거둔 현대 포니 엑셀의 성공은 미국 승용차시장에 ‘5천 달러 자동차’ 붐을 일으켰다. 미국의 빅3까지 5천 달러 안팎의 값싼 승용차를 잇따라 내놓기 시작한 것. 크라이슬러가 소형차 옴니의 값을 700달러 낮춘 ‘아메리카’ 버전을 선보이고 GM은 시베트 해치백 쿠페의 값을 현대 엑셀(4천995달러)보다 싼 4천915달러로 정하기도 했다. 86년에는 2인승 럭셔리 컨버터블 캐딜락 알랑테와 유럽포드의 기함 스코르피오, 볼보의 첫 앞바퀴굴림차 480SE, 피아트의 기함 크로마, 시트로앵 AX, 로버의 기함 800 등의 새차가 나왔다. 유럽포드는 베스트셀러 소형차 에스코트에 ABS 모델을 더하기도 했다. 도요타는 V6 3.0X DOHC 터보 230마력 엔진을 얹은 수프라를 선보였고 혼다는 경차 투데이와 시티를 내놓았다. 시티는 81년에 나온 혼다의 베이식카로, 키가 큰 톨보이 스타일을 지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이밖에 마쓰다는 풀 모델 체인지를 거친 사바나 RX-7, 혼다는 로버와 합작으로 개발한 레전드를 내놓았다. ‘유럽 올해의 차’는 포드 스코르피오가 차지했다. 스코르피오는 현대가 조립생산했던 그라나다의 후속모델이다. 2위는 란치아 Y10이 차지했고 벤츠 E200, 혼다 어코드, 사브 9000, 르노 에스파스, 르노5, 도요타 스타렛이 뒤를 이었다. 현대 포니 엑셀 85년 2월, 현대 포니Ⅱ의 후속모델로 엑셀이 데뷔했다. 당시 세계적인 흐름에 맞춰 앞바퀴굴림 방식을 택했고 조르제토 쥬지아로가 디자인한 말끔한 스타일이 돋보였다. 전 모델인 포니의 인기를 잇기 위해 엑셀 앞에 ‘포니’를 붙이다가 나중에 ‘엑셀’이란 이름으로 통일했다. 1.3X 77마력과 1.5X 87마력 두 가지 오리온 엔진을 얹고 1.3 모델에는 수동 4단 기어, 1.5 모델에는 소형차로는 국내 처음인 수동 5단 기어를 조합했다. 두 모델 모두 자동 4단 기어를 옵션으로 마련했다. 엑셀은 데뷔 이듬해 미국 수출을 시작해 지가 뽑은 ‘86 미국내 10대 상품’으로 뽑히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데뷔 당시 차값은 365만3천∼525만1천 원. 85년형 거화 코란도 신진 지프에 뿌리를 둔 거화는 1985년 2월 엔진과 실내외를 개선한 85년형 코란도를 선보였다. 80년부터 쓰기 시작한 2.8X 디젤 85마력 엔진 대신 이스즈의 2.2X 72마력 디젤과 2.0X 105마력 휘발유 엔진을 얹었다. 지프 고유의 겉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대시보드와 스티어링 휠 등 실내가 승용차처럼 쓰기 편하게 바뀌었다. 7월부터는 일본 수출을 시작해 일본에 진출한 첫 한국차가 되었다. 이후 거화는 동아에 인수되고 동아는 86년 쌍용에 인수되었기 때문에 85년형 코란도는 거화 이름으로 나온 마지막 모델이 되었다. 4, 5, 6밴, 패밀리9, 앰뷸런스 등 다양한 가지치기 모델이 있었다. 대우 맵시나 하이디럭스 85년 4월에 나온 85년형 대우 맵시나 하이디럭스는 소형차인 맵시나를 중형차에 버금갈 만큼 고급스럽게 꾸미고 새 엔진을 얹은 것이 특징이다. 대우의 최고급 모델인 로얄 살롱과 같은 격자형 라디에이터 그릴을 달고 크롬 도금을 많이 써 작은 고급차란 인상을 준다. 엔진은 로얄 XQ에 쓴 1.5X XQ 엔진을 얹고 각종 경고를 계기판에 표시해주는 로얄 시리즈의 계기판을 달았다. 값은 427만 원. 현대 스텔라 CXL 스텔라는 현대가 마크 시리즈 생산을 중단하고 83년 7월에 내놓은 첫 국산 고유모델 중형차. 초창기 1.4X와 1.6X 두 가지 엔진을 얹었으나 85년 1.5X 한 가지로 정리되었다. 스텔라 CXL(Canadian Export Luxury)은 4월 국내 판매를 시작한 캐나다 수출모델. 캐나다 법규에 따라 5마일 범퍼를 달고 헤드램프 크기를 조금 줄였다. 수동 5단 기어를 얹어 정숙성과 연비를 높였고 브레이크 부스터의 용량을 30% 키워 안전성을 끌어올렸다. 기아 봉고 타운 기아 봉고는 일본 제휴선인 마쓰다 봉고를 베이스로 태어난 원박스카로 길이×너비×높이 4천515×1천620×1천995mm의 3∼12인승 차다. 85년 6월에 데뷔한 봉고 타운은 1.4X 휘발유 엔진을 얹어 조용하고 진동이 적은 것이 특징. 진공배력장치와 디스크 브레이크로 보강한 2중 브레이크, 속도 경보음 장치, 도난방지를 위한 스티어링 휠 잠금장치 등을 갖췄다. 당시 차값은 549만5천 원. 현대 프레스토 85년 7월 엑셀의 세단 버전으로 태어난 현대 프레스토(앞)는 엑셀과 함께 앞바퀴굴림(FF) 쌍둥이차 시대를 열었다. FF 2박스 차를 기본으로 3박스 혹은 왜건 등을 내놓는 것은 당시 세계적인 추세였다. 트렁크 부분을 만들면서 길이만 17.4cm 늘어났고 메커니즘을 비롯한 실내는 포니 엑셀과 같다. 세단의 수요가 많은 국내 시장에서 인기를 모았고 86년 1월부터 포니 엑셀과 함께 미국 시장에 수출되기 시작했다. 현대 소나타 85년 11월 대우 로얄 살롱과 경쟁하기 위해 현대가 스텔라를 고급화해 선보인 중형차. 1.8X 100마력과 2.0X 110마력 두 가지 시리우스 엔진을 얹었다. 크루즈 컨트롤와 파워 스티어링, 전동식 사이드 미러 등 각종 전자장비를 달고 이중 접합 안전유리, 대형 우레탄 범퍼, 충격 흡수식 스티어링 등으로 안전성을 높였다. 또 국내에서 처음으로 자동 4단 기어를 얹고 알루미늄 휠을 표준장비로 마련했다. 기아 베스타 86년 3월 기아는 봉고의 후속 모델 베스타의 발표회를 열고 시판에 들어갔다. 베스타는 보네트 앞부분이 튀어나온 슬랜트 노즈 스타일과 충격흡수능력이 좋은 범퍼로 안전성을 높인 것이 특징. 승용차용 랙 앤드 피니언 방식의 스티어링 휠을 달고 서스펜션도 개선했다. 베스타의 심장은 2.0X 디젤 로나 엔진으로 최고출력 69마력/4천500rpm, 최대토크 13.2kg·m/2천500rpm의 성능을 냈다. 길이×너비×높이는 4천670×1천690×1천920mm이고 무게는 1천540kg. 시속 60km 정속주행 연비는 X당 20km이고 차값은 725만 원이었다. 풍속팬더 칼리스타 팬더는 한국인 기업가 김영철 진도그룹 전 부회장이 인수해 도산 위기에서 벗어난 영국의 백야드빌더. 86년 칼리스타 보디와 부품 생산을 맡은 부평 공장에서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칼리스타 2대를 수입했다. 당시 수입차는 규제 대상이었지만 84년 7월부터 배기량 2.6X 이상 스포츠카에 한해서는 규제가 풀린 상태였다. 팬더 칼리스타는 3월 29일부터 2주일간 서울 신세계 백화점과 동방플라자에 1대씩 전시되어 시민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새로운 주차 풍속 80년대 중반 대도시를 중심으로 입체 주차시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큰 건물에서 심심찮게 입체 주차시설을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낯선 풍경이었다. 국내 첫 입체주차 시설은 금성이 만든 하이파킹 1기(46대 주차)로 83년 1월 부산 태화 쇼핑센터에 들어섰다. 대우 로얄살롱 수퍼 대우 로얄살롱 수퍼는 로얄살롱을 고급화한 모델. 국내에서 처음으로 카뷰레터 없이 연료를 분사하는 전자제어 연료분사식 엔진과 액정 표기방식의 계기판을 달고 나왔다. 또한 엔진의 회전, 노면 상태, 주위의 온도 등을 종합 판단해 연료를 전자제어하는 컴퓨터를 갖춰 주행성능을 높였다. 이밖에 내장형 안개등과 흰색 방향지시등, 워셔와 와이퍼가 달린 헤드램프, 전동식 시트 등 고급 장비를 갖췄다. 값은 1천613만 원. 대우 르망 GM과 월드카 프로젝트를 추진한 대우가 오펠 카데트를 베이스로 개발한 소형차. 대우 첫 앞바퀴굴림 차로 86년 7월 국내에 선보였다. 87년부터는 폰티액 브랜드로 미국 수출을 시작했고 86년 말 해치백 3도어, 88년 해치백 5도어가 더해졌다. 베이스 모델인 오펠 카데트는 1.6X와 2.0X 모델이 주류를 이뤘지만 르망은 1.6X 엔진의 보어를 조금 줄인 1.5X 엔진을 얹었다. 르망의 길이×너비×높이는 4천260×1천663×1천362mm로 공기저항계수 0.32의 늘씬한 몸매를 자랑했다. 값은 고급형(GLX)이 485만 원, 최고급형(GSE)이 519만 원으로 97년 2월 단종될 때까지 100만 대 이상 팔렸다. 현대 그랜저 현대가 미쓰비시와 함께 개발한 국내 첫 앞바퀴굴림 대형차. 다중연료분사방식의 2.0X 120마력 MPI 엔진을 얹고 수동 5단 기어 또는 자동 4단 기어를 조합했다. 많은 전자장비를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인 그랜저는 컴퓨터가 14가지 기능을 제어하는 전자식 종합경보장치 에탁스(ETACS, Electronic Time & Alarm Control System)와 X자형 네바퀴 디스크 브레이크로 안전성을 높이고 수퍼 밸런스 서스펜션으로 부드러운 승차감을 이끌어냈다. 원하는 온도를 자동으로 유지하는 오토 에어컨과 풀플랫 시트, 높낮이가 조절되는 팝업식 스티어링 휠, 오토크루즈 컨트롤 등 편의장비도 풍부했다. 값은 1천690만 원. 현대 엑셀 AMX 삼총사 현대는 9월 중순 포니 엑셀과 프레스토의 미국 수출형 모델 ‘아멕스’(AMX, American Export)를 국내에 선보였다. 이때 포니 엑셀의 3도어 해치백 버전인 엑셀 스포트도 함께 나왔다. 미국 법규에 의해 보디 앞뒤에 5마일 범퍼를 달아 엑셀은 103mm, 프레스토는 106mm 길어졌다. 1.3X 고급형은 라디에이터 그릴을 검정으로 칠했지만 1.5X 수퍼형은 크롬으로 도금해 고급스러웠다. 스티어링 휠의 재질을 우레탄으로 바꾸고 스티어링 휠과 파워 윈도, 자동 안테나 등을 갖추었다. 대우 르망 레이서 10월말 대우 르망의 3도어 해치백 버전 레이서가 나와 국내 3도어 모델은 현대 엑셀 스포트, 대우 르망 레이서 두 가지로 늘어났다. 해치백을 기본으로 한 5도어 모델은 88년에 데뷔했다. 현대 스텔라 아펙스 86년 11월 현대는 스텔라 시리즈의 최고급 모델인 아펙스(APEX)를 선보였다. 아펙스 역시 캐나다 수출 모델로 5마일 범퍼를 달고 헤드램프와 리어램프를 손질했다. 스텔라 아펙스의 가장 큰 변화는 서스펜션과 브레이크. 앞 서스펜션을 이전의 위시본 타입에서 스트럿으로, 뒤 서스펜션을 4링크에서 5링크 타입으로 바꾸었다. 또한 앞바퀴의 디스크를 V디스크로 개선했다. 이밖에도 스테인레스 몰딩을 보강하고 타이머 기능이 있는 뒷유리 열선 등을 더해 편의성을 높였다. ‘드라이브 인’ 등장 차에 탄 채 음식을 시켜 차안에서 먹는 ‘드라이브 인’ 방식이 86년 3월 서울 신사동에 자리한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KFC) 도산공원 매장에 등장했다.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드라이브 인’ 판매는 이미 선진국 등에 보편화된 방식이었다
Buick 100년을 이어온 정통 아메리칸 풀사이즈.. 2004-01-15
1903년 데이비드 뷰익이 설립한 뷰익은 올해로 그 자신의 두 번째 세기를 맞는다. 오늘날 GM을 있게 한 첫 번째 회사인 뷰익은 미국 중산층을 위한 고급 풀사이즈 세단 만들기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인 브랜드. 전쟁과 경제공황, 석유파동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새로운 기술과 우수한 품질로 극복하며 미국 자동차 시장을 이끌어왔다. 탄생 101주년을 맞은 뷰익은 최근 들어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정통 풀사이즈 세단 만들기에서 벗어나 SUV와 미니밴 등 새로운 세그먼트에 도전하는 한편, 좀더 윗급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는 캐딜락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모델 고급화에 힘을 쏟고 있다. 제너럴 모터스 설립의 주춧돌 뷰익을 설립한 데이비드 던바 뷰익(David Dunbar Buick)은 1854년 9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따라 2살 때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성공한 배관 발명가이며 생산자로 자리잡았다. 1890년대 후반 휘발유 엔진을 만들고 1901년에는 실험차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1902년 ‘뷰익 매뉴팩처링 컴퍼니’를 세웠으나 사업에 대한 안목이 부족하고 재무관리도 허술해 회사는 곧 자금난에 빠졌다. 브리스코 형제의 자금지원을 받아 1903년 5월 19일 다시 ‘뷰익 모터 컴퍼니’를 띄웠지만 브리스코 형제가 회사 경영에 흥미를 잃으면서 마차를 만들던 플린트 왜건 워크스사에 넘겨버렸다. 뷰익과 엔지니어인 월터 마, 유진 리차드는 1903년, 당시로는 획기적인 밸브 인 헤드 엔진을 만들었다. 이 엔진은 다른 엔진들보다 연소 효율이 좋고 배기량에 비해 출력도 높았을 뿐 아니라 가볍고 품질 신뢰성이 높았다. 1904년 회사는 첫 번째 자동차를 만들었다. 수석 엔지니어 월터 마와 데이비드의 아들 토마스 뷰익의 테스트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곧 생산에 들어갔고 그 해 말까지 모두 37대의 모델 B를 만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가 재정난에 빠져 또 다른 왜건 제작자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듀런트 도르트 왜건사의 사장 윌리엄 듀런트(William Durant)는 말이 끄는 마차와 달리 언덕을 잘 오르고 진흙길도 잘 지나는 자동차에 깊은 인상을 받아 곧 뷰익에 투자를 하고 회사 대표가 되었다. 듀런트는 듀런트-도르트의 대리점과 영업사원들을 기반으로 거대한 판매망을 만들고 1905년에는 뉴욕 오토쇼에서 1천 대의 주문을 따오는 등 경영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같은 해 회사를 잭슨으로 옮긴 뷰익은 700대가 넘는 모델 C를 생산했다. 뷰익 엔진의 탁월한 성능은 레이스 트랙과 대륙을 가로지르는 내구테스트에서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뷰익은 1906년 시카고-뉴욕간 1천 마일 레이스를 완주한 유일한 차였고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24일간 달리는 레이스도 거뜬히 치러냈다. 1912년에 나온 모델 28은 남미 전역을 도는 레이스를 완주한 최초의 차였다. 듀런트는 뷰익의 성공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정작 창업자인 데이비드 뷰익은 1906년 회사를 떠났다. 그는 석유 사업을 벌이기도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한동안 장의차와 프라이비트 카 만들기를 전전하다 1929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생을 마쳤다. 지금까지 3천500만 대 이상의 차가 뷰익 이름을 달고 팔렸지만 정작 데이비드 뷰익의 손에서 나온 차는 100여 대에 불과하다. 1908년 뷰익은 9천여 대의 차를 만들어내며 미국의 자동차산업을 이끌어갔다. 새로 나온 모델 10은 4천 대나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듀런트는 최고의 마차 생산업자에서 최고의 자동차 생산업자로 탈바꿈했고 뷰익의 성공에 힘입어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 GM)를 세웠다. 뷰익을 필두로 올즈모빌과 캐딜락, 오클랜드(폰티액의 전신)와 여러 작은 메이커들이 GM의 밑으로 속속 들어왔다. 뷰익의 생산량은 1910년 3만 대에 이르렀고 1915년에 4만4천여 대, 1916년에는 12만5천 대나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경기침체로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1923년 100만 대 생산을 돌파, 그리고 그 다음 100만 대를 파는 데는 채 5년도 걸리지 않았다. 1929년 대공황이 닥치자 뷰익도 큰 타격을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9년형 모델은 덩치가 크고 비대해져 ‘임신한 뷰익’이란 별명을 얻으며 실패작이 되었다. 다음해 보급형인 마르켓을 내놓았지만 1년을 넘기지 못했고 1933년 뷰익 판매대수는 겨우 4만 대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 해 말 AC 스파크 플러그사의 대표인 할로 커티스(Harlow H. Curtice)가 이전의 영광을 되찾고자 뷰익을 맡게 된다. 커티스는 모델 명을 숫자에서 다이내믹한 이름으로 바꾸고 스피드와 힘을 불어넣어 뷰익을 GM의 선두주자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또한 GM의 수석 디자이너인 할리 얼에게 디자인을 맡겼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36년 등장한 로드마스터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스페셜과 센추리, 리미티드 등도 태어났다. 한 해 생산은 20만 대에 달했고 기술 개발도 끊임없이 이루어져 38년 코일스프링과 다이나플래시 엔진, 세미 AT가 나오고 이듬해에는 GM 자동 변속기를 대표하는 이름 ‘하이드라매틱’도 등장했다. 전쟁과 불황을 발전 기회로 삼아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자동차 메이커들은 전쟁 전의 모델을 조금 손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뷰익은 42년 모델에서 새로운 디자인 흐름을 창조해냈고, 너무나도 유명한 육식동물을 연상시키는 팝아트 그릴도 이때 나왔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기간은 뷰익의 판매와 엔지니어링, 스타일에 있어 절정기였다. 48년 누적생산대수 500만 대를 돌파했고, 한 해 생산량도 50년 55만 대에서 55년 75만 대로 급격하게 늘어 시보레와 포드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48년에는 토크컨버터를 단 다이나플로우 변속기를 개발했다. 뷰익의 트레이드마크인 폭포수를 닮은 수직 그릴은 좀더 커졌고 이듬해에는 하드톱 컨버터블 스타일도 등장했다. 53년에는 50주년 기념 모델인 스카이락이 데뷔했다. 50년대 후반 뷰익은 스타일링과 품질 문제가 겹쳐 또다시 침체를 겪는다. 생산은 25만 대로 뚝 떨어졌다. 결정적인 변화가 필요했던 뷰익은 59년 모든 모델의 이름을 바꾼다. 이 때 등장한 이름이 르세이버, 인빅타, 엘렉트라 등. 뷰익은 다음해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V6 엔진을 대량생산하기 시작했고 이를 얹은 스페셜이 카 오브 더이어에 뽑혔다. 1963년 스포티하고 아름다운 스타일로 모던 클래식카의 시초라 여겨지는 리비에라가 선보였다. 뷰익의 판매는 계속 늘어났지만 10년 뒤인 73년 오일파동으로 다시 곤두박질. 80년대 초 미국의 자동차 메이커들은 높은 휘발유 값에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런 와중에서 79년 뷰익이 내놓은 첫 번째 앞바퀴굴림 차인 리비에라 S타입은 그 해 카 오브 더 이어에 뽑혔다. 리갈 그랜드 내셔널과 한정생산 모델인 GNX는 인터쿨러와 터보를 단 V6 3.8X 엔진으로 당시의 미국차 중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89년에 나온 시티는 J.D 파워의 기초품질 연구에서 미국 1위, 세계 2위를 차지했다. 이 시절 뷰익은 크고 부드러운 힘과 독특한 스타일을 강조했다. 1991년 파크 애버뉴 울트라가 좋은 본보기. 아름다운 곡선미를 자랑하는 이 럭셔리 세단은 V6 3.8X 수퍼차저 엔진을 얹어 90년대 말까지 미국 내 수퍼차저 승용차 시장의 선두를 달렸다. 뷰익은 여전히 품질에 대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미국 풀사이즈 세단 시장에서 10년 넘게 베스트셀러를 지키고 있는 르세이버와 또 다른 빅셀러 센추리는 J.D 파워의 품질평가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상위 랭커. 2000년 3천500만 번째 뷰익이 만들어졌고, 2002년에는 80년 만에 트럭 생산에 나서 첫 번째 크로스오버카인 랑데부를 내놓았다. SUV와 미니밴 시장 공략 나서 1950년대 컨셉트카는 드림카라 불렸다. 역사가들이 말하는 첫 번째 컨셉트카는 GM의 수석 디자이너 할리 얼이 디자인해 1938년에 나온 뷰익 Y-잡이다. Y-잡의 뒤를 이은 드림카는 51년에 나온 XP-300이고 이후 수많은 차를 거쳐 지금의 센티엠으로 계보를 잇고 있다. 지난해 디트로이트 오토쇼에 모습을 드러낸 센티엠은 뷰익 100주년을 기념한 모델. 뷰익의 최신형 드림카로 세단과 SUV의 특성을 조화롭게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았다. 양산 계획은 없지만 앞으로 나올 뷰익 모델들의 디자인 기초가 될 예정. 지난해 5월 19일 100주년을 맞은 뷰익은 3년 안에 완전히 새로운 5개의 새차를 내놓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고급차와 트럭, 크로스오버 등 다양한 세그먼트로 고객의 선택 폭을 넓히겠다는 포부. 새 모델의 초점은 힘과 스타일 변화에 있다. 대부분 V8 엔진을 얹고 뷰익 전통의 대담한 선을 살리며 인테리어는 우아하고 차분하게 디자인한다. 특히 뷰익의 트럭들은 좀더 편안하고, 달리기와 핸들링, 정숙성 등에서 온갖 장점을 살린 프리미엄 모델이 될 것이다. 랑데부로 80년 만에 트럭 시장에 진출한 뷰익은 올해 레이니어를 더할 예정이고 연말에는 7인승 프리미엄 크로스오버 스포츠 밴인 테라자를 내놓는다.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시장을 공략하게 될 GM의 최고급 디비전 캐딜락을 대신해 뷰익의 새 모델들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다. 2005년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르세이버와 리갈은 지금보다 한층 고급스러운 모습으로 완성될 듯. 2007년에는 리갈, 센추리보다 아랫급의 소형차를 한 해 6만5천 대 이상 만들 예정이다. Century 1981년 데뷔한 센추리는 장수 모델이 많은 미국에서도 꽤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4도어 6인승 패밀리 세단으로 뷰익의 엔트리 모델. 차체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6인승으로 쓰기에 부족함 없는, 전형적인 미국 취향의 세단이다. 97년에 지금 모습으로 바뀌었고 경쟁 상대는 시보레 임팔라, 마쓰다 6, 폭스바겐 파사트 등. V6 3.1X 175마력 엔진을 얹고 4단 AT와 조합한다. Regal 센추리와 르세이버의 사이를 메우는 리갈은 1987년 데뷔했고 센추리와 같은 플랫폼을 쓴다. 보수적인 센추리보다 젊은 취향의 모델. 패밀리 세단형의 LS는 V6 3.8X 200마력 엔진을 얹고 스포츠성을 더한 GS는 V6 3.8X 240마력 엔진을 달았다. 두 모델 모두 4단 AT와 조합한다. 시장에서의 라이벌은 어큐라 3.2TL, 볼보 S60, 벤츠 C클래스 등. 2005년에 이름을 라크로스로 바꾼다. LeSabre 1959년에 데뷔한 르세이버는 600만 대가 넘게 팔린 풀사이즈 세단의 베스트셀러. 뷰익 센추리에 이어 두 번째로 잘 팔리는 모델이다. 2000년에 지금 모습으로 바뀌었고, 내년 후반기 앞바퀴굴림 플랫폼을 쓴 새 모델로 바뀜과 동시에 새 이름을 달게 된다. 4도어 6인승 세단으로 커스텀과 리미티드 두 가지 트림으로 나뉘며, 205마력의 V6 3.8X 엔진을 4단 AT와 조합했다. Park Avenue 84년에 나온 기함 파크 애버뉴는 4도어 6인승 럭셔리 세단이다. 2000년에 지금 모습으로 바뀌었고 V6 3.8X 205마력 엔진의 스탠더드형과 240마력의 울트라로 나뉜다. 경쟁 상대는 어큐라 3.2TL과 렉서스 ES300, 볼보 S80 등. 캐딜락 수준의 럭셔리함에 합리적인 값이 최대 장점이다. 수퍼차저를 단 울트라는 전통적인 뷰익의 클래식함을 가장 잘 살린 모델이라 평가받는다. Rendezvous 2001년에 데뷔한 랑데부는 뷰익이 1923년 이래 처음으로 내놓은 SUV. 28개월에 걸쳐 개발된 랑데부는 신선한 스타일과 넓은 공간, 실속 있는 값이 장점이다. 미니밴과 같이 3열 시트를 달아 7명이 탈 수 있다. 시보레 블레이저, 도요타 RAV4 등과 경쟁하며 V6 3.4X 185마력 엔진을 4단 AT와 조합한다. 올 상반기 V6 3.6X 245마력 엔진을 더할 예정. Rainier 지난해 디트로이트 오토쇼에 모습을 드러낸 레이니어는 컴팩트 SUV 랑데부의 성공에 힘입어 나온 4도어 5인승 SUV. 시보레 블레이저, GMC 엔보이와 같은 플랫폼을 쓰며 SUV의 강한 이미지에 뷰익의 전통적인 디자인을 살렸다. 직렬 6기통 4.2X DOHC 275마력과 V8 5.3X 290마력 엔진에 4단 AT를 연결한다. 경쟁 모델은 GMC 유콘 XL과 폭스바겐 투아레그 등. Terraza 올 후반기에 데뷔할 테라자는 뷰익이 처음 선보이는 미니밴으로 SUV 스타일에 미니밴의 기능을 결합한 크로스오버카. 랑데부와 레이니어의 윗급으로 뷰익의 트럭 라인업을 완성하는 모델이다. CX와 CKL 등 두 가지 트림이 준비된다. GM의 롱 휠베이스 미니밴 플랫폼에 V6 3.5X 200마력 엔진을 얹을 예정이고 앞바퀴 또는 네바퀴를 굴린다.
Lotus 기술로 승부하는 불멸의 작은 거인 .. 2004-02-19
영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카 메이커 로터스는 1982년 5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콜린 채프먼에 의해 문 열었다. 세븐(7)을 비롯해 스포츠카 에스프리까지 많은 차를 내놓았고, F1 로터스 팀은 혁신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60∼70년대 그랑프리를 주름잡았다. 채프먼이 세상을 뜬 후 레이싱 팀도 활력을 잃고 회사 역시 도요타, GM, 부가티를 거쳐 말레이시아의 프로톤으로 넘어가는 비운을 겪었지만, 엔지니어링 부문의 뛰어난 개발 실적으로 줄곧 명성을 유지해왔고 엘리제로 명가의 자존심을 되살려가고 있다. 모터 스포츠의 새로운 역사 창조 콜린 채프먼은 1928년 5월 9일 영국 런던 근교에서 호텔 매니저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학생 시절부터 중고차를 사들여 파는 일을 하던 그는 48년 1930년형 오스틴7을 개조해 첫 번째 차를 만들고 Mk1이라 이름 붙였다. 1952년에는 연인 헤젤 윌리암스의 자금지원을 받아 친척인 마이클 앨런과 함께 로터스 엔지니어링을 설립했다. 로터스라는 이름은 자동차 제작에 몰두하는 것이 그리스 신화 속의 로터스 열매를 먹는 것처럼 황홀경에 들어가 속세의 시름을 잊게 해준다는 데서 착안한 것. 로터스의 엠블럼에는 채프먼의 이름인 ‘Anthony Collin Bruce Chapman’의 머리글자가 새겨져 있다. 채프먼은 우아하고 최대한 가벼운 차를 만든다는 철학으로 본격적인 자동차 제작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Mk6은 양산을 전제로 한 첫 모델로, 가격경쟁력을 위해 키트 형태로 팔리며 영국 키트카 시대를 열었다. 로터스의 역사는 곧 창업자인 콜린 채프먼의 생애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일생은 기술 개발과 모터 스포츠에 대한 열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굉장히 혁신적인 엔지니어로서 공학적 원리를 실현시킨 인물이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창의력과 로터스의 기술력은 스트럿 서스펜션, 모노코크 복합구조, 액티브 서스펜션 등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여러 기술들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채프먼은 초창기 레이스에 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자금을 얻기 위해 도로용 차를 만들었다. 1954년 로터스 팀을 꾸렸고 에어로 다이내믹 스타일의 스포츠 레이싱카 Mk8로 여러 경주에 출전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Mk8의 존재는 본격적인 모터 스포츠 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57년 등장한 엘리트(타입 14)는 경량화 기술을 바탕으로 배기량이 네 배나 큰 차들을 따돌리고 59년부터 6년 연속 르망 24시간 소형차 부문에서 우승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58년은 모터 스포츠 역사에 있어서도 기념비적인 해로 프론트 엔진을 단 로터스 타입 12가 F1에 진입했고, 60년에는 이전 시즌의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미드십 구조의 타입 18이 등장했다. 타입 18은 라이벌 쿠퍼를 압도하며 승승장구했고 롭워키 팀의 스털링 모스는 이 차를 구입한 지 1주일 만에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고출력의 페라리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한편 62년 등장한 타입 25는 스페이스 프레임 대신 혁신적인 모노코크 섀시를 도입하고 그동안 상식적으로 쓰던 부품과 보강재들을 최대한 줄이는 기술 혁신을 이뤘다. 전설적인 드라이버 짐 클라크와 함께 한 타입 25는 벨기에, 영국, USA, 멕시코 그랑프리에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67년에는 코스워스 포드 DFV V8 엔진을 얹은 타입 49가 투입되었고, 뛰어난 성능의 포드 DFV 엔진이 이후 10년 간 F1의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70년대 들어서는 혁신적인 F1 경주차 타입 72가 등장했다. 인보드 프론트 브레이크와 토션바 스프링을 쓰고 라디에이터를 차체 양옆으로 옮겨 앞부분이 납작한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였다. JPS 컬러의 타입 79 MkⅣ는 채프먼의 천재적인 기술력이 돋보인 모델. 차체와 바닥 사이의 공기 흐름을 이용해 다운포스를 일으키는 ‘그라운드 이펙트’를 실현시킨 차였다. 로터스 팀은 가볍고 성능 좋은 경주차와 짐 클라크, 그레이엄 힐, 요헨 린트, 에머슨 피티발디 같은 이름난 드라이버를 거느리고 6, 70년대에 7번의 F1 컨스트럭터스 챔피언과 6번의 드라이버 챔피언을 따냈다. 그 외에도 100여 개가 넘는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모터 스포츠의 명성을 로드카로 모터 스포츠에서 쌓은 로터스의 기술과 명성은 로드카 제작에 고스란히 이어졌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57년 탄생한 전설적인 로드카 로터스 세븐은 불필요한 장식을 없애고 낮은 값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디자인, 고성능을 이끌어내는 가벼운 차체를 바탕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로터스 이름을 달고 73년까지 생산되다가 엘리트 신형을 만들 자금 확보를 위해 캐이터햄에 넘어갔다. 이 모델은 영국 경량 스포츠카의 대표격으로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57년 런던 모터쇼를 통해 데뷔한 엘리트(타입 14)는 클럽 레이서 성격이 강했던 세븐과 달리 진정한 의미의 첫 번째 로드카라고 할 수 있다. 로터스 차 중 처음으로 지붕을 갖췄고 경량 신소재인 파이버글라스로 만든 모노코크 차체를 지녔다. 62년 등장한 엘란은 뛰어난 핸들링과 우아한 디자인으로 로터스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고 여기에 쓰인 스틸 백본 섀시가 에스프리로 이어졌다. F1 활동을 통해 미드십 엔진의 필요성을 깨달은 로터스는 1966년 1.5X 르노 16 엔진을 미드십에 얹은 유로파(타입 46)를 만들어냈다. 74년에 나온 쐐기 모양의 2세대 엘리트(타입 75)는 로터스 최초의 완전 4인승 모델이면서 F2 엔진에 기초한 새로운 직렬 4기통 2.0X 155마력 엔진을 얹었다. 이전의 로터스 차들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파이버글라스 보디에 새로운 VARI(Vacuum-Assisted Resin Injection)공법을 쓴 것도 특징. 이듬해에는 엘리트의 저가형 에크라가 더해졌다. 1972년 토리노 모터쇼 이탈디자인 부스에는 미드십 스포츠카 에스프리가 전시되었다. 이후 M70이라는 프로젝트 명으로 2년의 개발기간을 거쳐 74년 말 양산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졌고 이 차가 75년 10월 파리 오토살롱에서 에스프리(타입 79)라는 이름으로 정식 데뷔했다. 유로파에 이은 로터스의 두 번째 미드십 스포츠카로 직선에 기초한, 우아하면서도 강렬한 디자인을 지니고 77년 007 영화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 출연해 매력을 뽐냈다. 엘리트의 2.0X 160마력 엔진을 얹고 83년에는 2.2X 터보 210마력 엔진으로 성능을 업그레이드했다. 82년에는 엑셀, 84년에는 쥬지아로가 디자인한 컨셉트카 에트나가 버밍엄 모터쇼에 선보였다. 에스프리 아랫급 소형차가 필요했던 로터스는 1989년 런던모터페어에서 60년대 엘란의 영광을 잇는 후계차 엘란을 발표했다. 이 차는 뛰어난 핸들링과 주행안정성을 지녔지만 일제 이스즈 엔진과 앞바퀴굴림 구동계가 팬들의 거부감을 일으켰고, 더욱이 1세대 엘란을 본떠 만든 마쓰다 미아타가 싼값을 내세워 엘란의 자리를 잠식해 들어오면서 극심한 판매 부진을 겪다가 92년 생산을 중단했다. 이후에도 복스홀 칼톤(오펠 오메가)을 튜닝해 ‘가장 빠른 설룬’이라는 평을 받았던 로터스 칼톤과 엘란을 베이스로 한 미래지향적 스타일의 컨셉트카 스피드스터(M200)를 선보였다. 95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를 통해 데뷔한 엘리제는 백본 프레임+파이버글라스 보디를 대신하는 알루미늄 모노코크 기술로 초경량화(차체 무게 675kg)를 실현함으로써 로버 4기통 1.8X 118마력 엔진을 얹고도 빼어난 달리기 성능을 뽐냈다. 채프먼 이후의 부침과 부활 채프먼은 1982년 12월 16일 53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가 죽은 뒤에도 도전정신은 남아 로터스 엔지니어링에 계속 이어졌다. 83년 5월 롤링과 피칭을 줄이고 차체를 일정 높이로 유지해주는 액티브 서스펜션이 로터스를 통해 처음 선보였고, 이 기술이 87년 F1 경주차 99T에 쓰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세계 여러 자동차 메이커들의 첨단기술 연구와 특수한 개발 프로젝트를 대행하며 명성을 쌓은 로터스는 그러나, 두 차례 석유파동과 창업자의 죽음에 따른 영향으로 경영상태가 점점 악화되어갔다. 86년 GM으로 넘어간 로터스는 93년 부가티로 소속을 옮긴다. 하지만 이때도 부가티는 이미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앞날이 불을 보듯 뻔했다. 수익성이 좋았던 로터스 엔지니어링이 회사를 파산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부가티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새 주인을 기다리는 로터스 앞에 96년 말레이시아의 자동차 회사이며 F1 자우버 팀의 스폰서로 잘 알려진 프로톤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로터스는 스포츠카 생산과 엔지니어링 컨설팅으로 수익을 크게 늘리는 등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연간 800대를 찍어내던 엘리제의 생산대수가 3천 대로 부쩍 늘었고, 엘리제의 경량화 기술과 알루미늄 섀시를 바탕으로 애스턴마틴 뱅퀴시와 오펠 스피드스터 개발에 들어갔다. 이전 소유주였던 GM은 자사의 새차 생산을 로터스에 위탁해 연산 1만 대 규모의 공장을 노포크 부근에 세운다. 로터스는 한편 엘리제 베이스의 한정생산 모델 340R과 스포트 엘리제의 모양을 본뜬 엑시지 등 자체 모델을 계속 선보이고, 엘리제와 에스프리의 중간을 메울 미니 수퍼카 M250의 개발에도 착수했다. 축적된 기술로 세계 수많은 차들의 섀시와 엔진 설계를 담당한 로터스 엔지니어링은 3년간 직원 수가 1천300명에서 2천100명으로 늘고, 로터스 전체 수익의 70%를 창출할 정도였다. 하지만 4년여에 걸친 전성기는 2000년 말부터 다시 급작스런 변화에 부딪치게 된다. 로터스 엔지니어링이 진행중이던 뱅퀴시 프로젝트가 6개월 이상 지연되었고 품질 기준에 대한 GM의 압력으로 스피드스터 프로젝트도 제자리걸음을 계속했다. 따라서 애초 2002년 양산을 목표로 했던 M250 개발에 투입되어야 할 자금이 문제 많은 두 프로젝트로 흘러들었고, 엘리제 개조 계획이 차질을 빚으면서 판매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이런 와중에 프로톤이 로터스를 포드나 피아트에 팔아넘긴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로터스의 대표도 크리스 나이트에서 테리 플레일로 바뀌었다. ‘로터스 부활’에 사활을 건 플레일은 부임과 더불어 270명의 숙련된 엔지니어들을 해고했고, 코벤트리의 엔지니어링 시설들을 헤셀로 대체할 계획을 세웠다. 이와 함께 실용성이 떨어지는 전용 플랫폼과 영국 취향 디자인이라는 점을 문제삼아 M250 개발까지 중단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앞으로 판매 준비가 끝나지 않은 차는 공개하지 않고 회사에 피해를 줄 차는 만들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현재 엘리제는 미국 시장에 맞게 부분적으로 개조되어 2004년 미국 상륙을 앞두고 있다. 에스프리는 내년 초 28년간의 생을 마감하고 몇 년 뒤 같은 이름의 2인승 미드십 모델로 다시 태어날 예정. 로터스는 또한 시장이 원하는 2+2카를 개발중이라고 밝혔다. 로터스 시판 모델 Elise 1995년 데뷔한 엘리제는 명작 세븐과 엘리트, 유로파의 뒤를 잇는 소형 스포츠카.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 성능을 높인다’는 창업자 채프먼의 정신을 충실히 지킨 모델로 뛰어난 핸들링과 운동성을 지녔다. 하이드라 알루미늄사의 도움으로 개발된 엘리제는 압출식 알루미늄 섀시와 파이버글라스 콤포지트 보디, 알루미늄 엔진과 브레이크 패드 등을 써 차체 무게가 710kg밖에 안 된다(처음에는 675kg). 미드십 엔진으로 뒷바퀴를 굴리고 수동 5단 트랜스미션을 조합. 로버사의 K시리즈 4기통 1.8X DOHC 122마력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200km, 0→시속 100km 가속 5.7초의 성능을 낸다. 2001년 마이너체인지되었고 오리지널 엘리제를 바탕으로 111, MY2002, 타입 72, 스포트 135R, 스포트 160, 스포트 190 등 다양한 스페셜 모델이 나왔다. Esprit 1975년 데뷔한 에스프리는 로터스의 기함이며 영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카다. 데뷔 당시에는 쥬지아로 디자인의 날카로운 직선이 살아 있었지만 87년 로터스의 디자이너 피터 스티븐스의 손길을 거쳐 모서리를 둥글린 부드러운 모습으로 변했다. 이후 부분적인 손질을 계속 거쳐 지금 모습이 되었다. S2, S2.2, 터보, X180R, S3, S4S, 스포트 300/350 등 다양한 모델들이 등장했지만 지금은 오리지널 설계의 V8 엔진을 얹은 V8과 V8 GT만 남아 있다. 초기 모델은 4기통 2.0X 엔진을 얹은 경량 스포츠카에 불과했지만 점차 성능을 키워 수퍼카에 근접했다는 평을 받는다. V8 3.5X DOHC 트윈터보 353마력 엔진과 5단 수동 트랜스미션을 조합해 0→시속 100km 가속 4.9초, 최고시속 280km(GT는 272km)를 뽑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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