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자동차상식

클럽 엑스트렉 동호회장 양길석 작은 변화로 DI.. 2004-01-19
어떤 사람이 벼르고 별러 새차를 사 놓고는 기분이 너무 좋아 한밤중에 자다 일어나 운전석에 앉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2004년 첫 번째 DIY 매니아로 소개하는 양길석(35) 씨도 새차와 얽힌 재미있는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2003년 5월 16일 기아 영업소 직원한테 번쩍이는 엑스트렉을 건네 받아 온가족이 저녁 드라이브를 마친 뒤였다. 그는 애써 덤덤한 척하고 있는데 부인이 밤 12시에 몰래 밖으로 나가 네 바퀴에 막걸리를 뿌리고 오더란다. 값싼 부품 골라서 쓰임새 배로 키워 양길석 씨는 좀더 적극적으로 새차 사랑을 표현했다. 5월 초 결성된 엑스트렉 동호회에 미리 가입해 이런저런 정보를 모은 것. 그는 벌써 동호인들 사이에서 ‘마당발’로 통하고 있다. 새차를 받고 1주일도 안 되어 회원수 4천600명을 넘긴 ‘클럽 엑스트렉 동호회’의 회장이 되었으니 알 만하다. 그는 회원들과 엑스트렉에 대한 정보를 나누다 DIY에 흠뻑 빠져 버렸다. 스스로 “매니아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지만 손수 작업한 내용을 차근차근 일러주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그가 가장 먼저 손을 댄 곳은 칼럼식 기어 노브. 디자인이 투박하다는 생각이 들어 쇠톱으로 잘라내고 용품점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새로 달았다. 대시보드에 있는 송풍구는 할인매장에서 1만2천 원에 산 대롱을 씌워 크롬도금을 한 것처럼 장식했다. 왼발을 놓는 발판은 투스카니용으로 4천 원에 사서 달았다. 엑스트렉은 계기판에 안개등 점멸표시가 있지만 스위치를 눌러도 불이 들어오지 않아 당장 계기판을 뜯어내고 전구를 달았다. 이제 스위치를 누르면 표시등에 불이 켜져 편리하다. 하지만 전구에 꼭 맞는 소켓이 없어 동네 정비소를 몽땅 뒤져야 했다. 양길석 씨가 꼬집는 엑스트렉의 가장 큰 단점은 차가 좌우로 흔들리는 롤링이 심하다는 점. 궁리 끝에 2만7천 원짜리 스트럿 바를 사서 끼웠는데, 이를 계기로 DIY의 참맛을 느낄 수 있었다. “엑스트렉은 롤링이 심해 코너에서 속도를 내지 못했지요. 스트럿 바를 끼우고 나서는 롤링이 줄었어요. 손쉬운 작업으로 차의 단점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 DIY의 매력 아닐까요.” 콘솔박스에는 1천400원에 산 에쿠스용 램프와 스위치를 달아 덮개를 열면 자동으로 불이 켜지도록 했다. 또 인터넷 쇼핑몰에서 개당 200원에 산 파란색 전구를 운전석 및 동반석 도어트림과 독서등 옆에 달았다. 뒷문을 꼭 닫지 않으면 경고음이 나도록 에쿠스의 경고음 장치도 사서 달고, 경음기도 고음과 저음이 따로 나는 제품으로 바꿨다. 스페어 타이어 보관함 아래와 보네트 안쪽에는 방음재를 덧대어 실내로 소음이 들어오지 않도록 했다. 이곳저곳 많은 부분을 손보았으면서도 아직도 보완할 것이 많다는 그는 DIY 세계의 무한함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이다.
Keyword in 911 history 2005-02-24
901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포르쉐는 356 후계모델 개발에 온 힘을 기울였다. Kdf(후에 폭스바겐 비틀)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태어난 356은 여러 차례 개량을 거쳤지만 기본설계에 한계가 있어 새로운 플랫폼 개발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디자인은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손자이고 페리 포르쉐의 아들인 알렉산더 포르쉐(일명 부치)가 맡았다. 그는 356의 정신을 이어받으면서도 아버지가 원하는 신세대 스포츠카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다. 최종적으로 몇 대의 시작차가 완성되어 스타일링과 메커니즘이 시험되었다. 앞쪽 화물공간 확보를 위한 세로배치 토션바 맥퍼슨 스트럿(356은 가로) 서스펜션과 새로운 수평대향 6기통 엔진 등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최종적으로 대형 4인승 모델로 확정되었지만 커진 6기통 엔진과 4인승 시트를 갖춘 타입695 계획은 페리 포르쉐에 의해 제지되었다. ‘한눈에 포르쉐임을 알 수 있어야만 한다’는 그의 주장에 따라 뒷좌석 공간을 줄인 2+2 구성이 탄생했다. 알렉산더가 재디자인한 2+2 구성의 패스트백 쿠페 프로토타입은 휠베이스 2200mm로 356보다 실내와 화물공간이 넓고, 고성능과 안락성, 정숙성까지 목표로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보디와 한스 트라마가 완성한 수형대향 6기통 SOHC 엔진을 얹어 196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901’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356 때와 마찬가지로 901 역시 설계도면 번호를 차 이름으로 사용했다. 901은 보디 사이즈 4163x1610x1320mm, 휠베이스 2211mm로 356C에 비해 너비만 작을 뿐 사이즈가 모두 커졌고, 포르쉐 최초로 모노코크 구조를 체용했다. 901형으로 불린 엔진은 소렉스 카뷰레터를 달고 최고출력 130마력, 최대토크 16.7kg·m로 최고시속 200km를 어렵지 않게 넘겼다. 356 시절 최고시속은 185km. 서스펜션은 앞 세로배치 토션바와 맥퍼슨 스트럿, 뒤는 가로배치 토션바와 트레일링암 구성. 5단 수동 변속기와 356에서 가져온 ATE제 4륜 디스크 브레이크, 15인치 휠을 장비했다. 하지만 901이라는 이름은 사용할 수 없었다. 가운데 0이 들어간 세 자릿수 이름을 이미 푸조가 등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64년 선보인 양산형은 이름을 911로 바꾸었다. 다만 부품과 유닛의 형식번호에는 901이라는 이름이 계속 사용되었다. 912 비틀의 부품을 많이 활용한 356과 달리 911은 완전히 새로 개발한 차여서 가격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페리 포르쉐는 정평 있는 356C용 수평대향 4기통 1.6ℓ 90마력 엔진을 얹은 저가형 모델을 912라는 이름으로 선보였다. 1966년부터 69년까지 생산된 912는 최초의 숏휠베이스 버전 O시리즈와 A, B시리즈 등 3가지. 당시 911의 값은 356SC에서 30%나 상승된 2만1천 마르크였다. 356이 생산될 때는 별 문제 없었지만 911만 남게 되자 높은 값과 좁은 선택범위가 문제되었다. 결국 포르쉐는 356의 빈 자리를 채워 줄 저가형 912를 1865년 4월 발표했다. 이런 개발배경과 달리 판매는 순조로워 1966년 911이 1천710대 팔린 데 비해 912은 4천660대라는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911의 성능이 높아지고 초기의 문제점들이 해결되면서 판매 차이는 점점 줄어들었고, 3만300대 생산 후 1969년 모습을 감추었다. 7년 후인 1976년 갑작스레 등장한 912E(타입 923)는 미국시장을 위한 특별 버전으로, 1년간 2천대가 만들어졌다. 당시 유가상승과 속도제한으로 미국 판매 부진에 고민하던 포르쉐가 단종된 914용 엔진(수평대향 4기통)을 얹어 만들어 낸 저가형 모델이다. 79.5X의 연료탱크를 달아 600마일(966km)이 넘는 포르쉐 최고의 주행거리를 자랑했다. Carrera 지금은 911 기본형에 사용되는 이름 카레라. 하지만 70년대 포르쉐 카레라는 고성능의 상징이었다. 1973년 F시리즈 911을 바탕으로 태어난 카레라RS(아래 사진)는 그룹4 스페셜 GT 경주차 인증을 위한 한정생산 모델로 2.4X형 911의 보디를 경량화하고 배기량을 키워 성능을 높였다. 일종의 레이싱카의 로드 버전이었다. 당시 911S의 2.4X 엔진은 2천500cc 클래스(2천501~3천cc) 경주에 출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배기량을 늘이면서 무게를 줄이고 트레드를 넓히는 한편 에어로파츠를 새롭게 설계했다. 얇은 시트 메탈로 만든 보디에 독특한 덕테일 리어윙, 파이버 글라스로 된 엔진 후드, 경량 시트를 달았고 리어 시트는 형태만 남겼다. 배기개스 정화장치까지 떼어 버려 무게는 불과 900kg. 2천687cc로 배기량을 키운 엔진은 니켈-실리콘-카바이트 코팅된 알루미늄 실린더를 달아 210마력, 26.0kg·m의 힘을 냈다. 최고시속 240km, 0→400m 가속시간은 14.1초. 양산형은 911S와 같은 장비를 갖춘 투어링, 편의장비를 배제한 스포츠, 그리고 철저하게 경량화시킨 레이싱 등 세 타입으로 판매되었다. 원래 목표인 500대를 훨씬 넘겨 스포츠 버전이 1천36대, 투어링 버전도 600대나 만들어진 카레라RS는 수집가들 사이에서 클래식 포르쉐 최고 인기모델로 꼽힌다. 이듬해 911 기본형에 카레라RS 엔진을 쓰면서 카레라는 성능이 한 단계 올라갔다. 배기량을 3.0X로 키워 압축비 9.8에서 최고출력 230마력, 최대토크 28.0kg·m를 냈다. 최고시속 250km, 0→시속 100km 가속 5.3초의 고성능이었다. 새로운 대형 스포일러도 달라진 부분. 기본 상태로도 서키트 레이스가 가능할 만큼 고성능이었기 때문에 경주차 917에서 가져온 대구경 V디스크를 달았다. 74년형 카레라RS 3.0(위 사진)은 109대만이 생산된 초희귀 포르쉐. 이렇게 특별한 의미로 사용된 이름 카레라는 84년 모든 포르쉐에 붙기 시작해 리어 엔진 후드에 911 엠블럼 대신 ‘Carrera’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이후 지금까지 터보를 제외한 모든 911은 카레라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Ferry & Butzi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르쉐라는 이름에서 페르디난트 포르쉐를 떠올리지만 실질적으로 포르쉐를 키워 낸 사람은 그의 아들 페리(사진 오른쪽)였다. 정식 이름은 페르디난트 안톤 에른스트 포르쉐(Ferdinand Anton Ernst Porsche). 그가 태어난 1909년 아버지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 아우스트로 다임러사의 치프 엔지니어였다. 1923년 페르디난트가 독립해 슈투트가르트에 Dr. Ing. h. c. F Porsche KG라는 이름으로 엔지니어링 회사를 차린 후 히틀러의 요청으로 국민차 개발을 시작했고, 장성한 페리는 테스트 부문 책임자로 아버지 일을 돕기 시작했다. 2차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고,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페르디난트는 프랑스에 억류되었다. 누나 루이제가 아버지의 석방에 힘쓰는 사이 오스트리아 그뮌트에 터를 잡은 페리는 오랜 파트너 칼 라베 등과 함께 신차 개발에 착수했다. 아버지가 베를린-로마를 잇는 장거리 로드 레이스(2차대전으로 열리지 못했다)를 위해 개발한 타입60 K10을 바탕으로 한 RR 구성의 소형 스포츠 로드스터였다. 설계도면 번호를 따라 356이라는 이름이 붙은 최초의 포르쉐는 1948년 양산 프로토타입이 발표되었다. 49년 그뮌트에서 슈투트가르트로 돌아온 포르쉐는 356 생산을 시작했지만 노쇠한 페르디난트는 1950년 9월 3일 75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포르쉐는 아들 페리에 의해 착실한 성장의 길을 걸었다. 356은 356B와 356C로 진화하면서 성능을 인정받았고, 550과 1500RS 등 레이싱 모델이 서키트를 누볐다. 63년 페리의 구상과 큰아들 알렉산더(사진 왼쪽)의 디자인으로 완성된 911은 포르쉐를 세계적인 스포츠카 브랜드로 만들어 주었다. 결국 포르쉐의 설립부터 첫 모델 356과 대표작 911의 개발에 이르기까지 모두 페리의 손에 이루어졌지만 유명한 아버지의 그늘에 오랫동안 가려져 있어야 했다. 페리 포르쉐는 1972년 포르쉐를 주식회사로 개편하면서 경영에서 물러났고, 이때 가족 모두가 회사를 떠났다. 페리는 1998년 3월 27일,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포르쉐 가문 사람들이 모두 회사를 떠나던 1972년 페리의 장남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는 디자인회사 ‘포르쉐 디자인’을 세워 독립했다. 1935년생으로 애칭은 부치(Butzi). 911로 재능을 인정받은 부치는 독립 후에도 산업 디자이너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오리지널 브랜드의 시계, 선글라스, 지갑 등 패션 소품을 선보이고 있지만 주된 업무는 역시 디자인 개발용역. 삼성 카메라 ECX-1과 LCD 모니터 싱크마스터 151P/171P, 후지 디지털 카메라 파인픽스 4800/6800 그리고 스바루 레거시 B4 블리첸 등이 포르쉐 디자인의 작품이다. Flat 6 지금까지 911은 적지 않은 변화의 순간이 있었지만 변함없이 지켜오고 있는 전통도 있다. 바로 원형 램프와 2+2 시트 그리고 수평대향 6기통 엔진이다. ‘Flat six’(수평대향 6기통)는 포르쉐와 911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을 만큼 절대적인 존재. 356이 비틀의 수형대향 4기통 엔진과 RR 레이아웃을 물려받은 영향으로 911은 RR과 수평대향 레이아웃을 자연스럽게 채용하게 되었다. 당시 포르쉐의 최고성능 엔진은 356 카레라에 얹었던 수평대향 4기통 OHV. 하지만 구조가 복잡해 생산성이나 가격 면에서 효율적이지 못했다. 치프 엔지니어 클라우스 폰 루커에 의해 진행된 신형 엔진 개발작업은 한스 트라마가 새로운 치프로 영입된 후 페르디난트 피에히(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외손자 겸 전 폭스바겐/아우디 그룹 회장)와 한스 메거(TAG-포르쉐 F1 엔진 개발) 등 젊은 엔지니어들의 참여로 활기를 띠었다. 타입 821이라 불리는 새로운 수평대향 6기통 엔진은 체인구동 SOHC와 드라이섬프 구성으로 양산형이 901/10으로 불렸고 1천991cc 배기량으로 130마력/17.8kg·m의 힘을 냈다. 가장 큰 변화는 97년 등장한 996에서였다. 30년 넘게 공랭식 엔진을 고집해 왔지만 전통적 구조로는 날로 높아지는 배기개스 규정 등 시장환경에 맞추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복스터를 통해 한발 먼저 선보인 수랭식 수평대향 6기통 엔진은 3.4X의 배기량과 DOHC 헤드, 압축비 11.3으로 최고출력 330마력을 내고 레드라인이 7천300rpm으로 높아졌다. 지난해 등장한 최신형 997은 배기량이 3.6X로 늘어나 기본형이 325마력, 고성능 카레라S가 355마력을 낸다. PCCB 어느 메이커보다도 레이싱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포르쉐는 여기서 축적한 기술을 양산차에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PCCB(Porsche Carbon Ceramic Brakes)도 그 중 하나. 양산차 최초의 카본-세라믹 브레이크 디스크다. 자동차가 고성능화되면서 더욱 중요시되는 것이 바로 타이어와 브레이크 성능이다. 엔진 성능이 비슷하다면 빠르고 강력한 제동이야말로 코너에서 라이벌을 추월하는데 더 없이 중요한 무기가 된다. 무게까지 줄일 수 있다면 스프링 하중량 경감으로 가속성능은 물론이고 서스펜션 반응성까지 높일 수 있어 일석이조. 포르쉐는 이를 위해 세라믹을 사용한 신소재 브레이크 PCCB를 완성했다. 초저압에서 1천700℃의 고온으로 제조되는 PCCB는 주철제 디스크에 비해 절반 이상 가벼우면서도 내열성이 뛰어나다. 대개 반복된 급제동으로 브레이크가 과열되면 제동력이 떨어지는 페이드 현상이 나타나지만 PCCB는 이런 현상이 거의 없다. 수퍼카 카레라 GT는 물론이고 911 터보에도 옵션으로 준비했고, 지난해 발표한 고성능형 터보S에는 기본으로 달린다. turbo 레이싱카 917/10으로 터보차저에 관한 기술을 쌓은 포르쉐는 911 레이싱 버전 RSR에 터보를 더했다. 여기서 얻은 노하우를 투입한 첫 양산차가 1974년 가을 파리 오토살롱에서 발표된 930 터보. 레이스를 통해 얻어낸 다양한 기술을 911시리즈에 도입함으로써 카레라 RS의 뒤를 잇는 고성능 버전이 탄생했다. 엔진은 기본적으로 911용 자연흡기 2.7ℓ형과 동일하지만 높아진 성능에 대응하기 위해 많은 부분이 보강되었다. 크랭크 케이스는 마그네슘 합금에서 다소 무겁지만 강성이 좋은 알루미늄 합금으로 복귀했고, 신소재 나사가 사용되었다. 실린더는 니카실, 피스턴은 단조 제품으로 바뀌었고 캠샤프트는 3점 지지에서 4점 지지로 설계 변경되었다. 연료분사는 K-제트로닉으로 911 자연흡기에 비해 용량이 늘어났고, 연료펌프 2개를 직렬 연결해 압력도 높였다. 75년형 930/51 엔진은 최고출력 260마력, 최대토크 35kg·m를 냈다. 0.8kg/㎠의 낮은 과급압은 노킹현상을 막고 조작성과 내구성 확보를 위한 조치. 프로토타입은 930 터보였지만 양산형은 911 터보로 이름이 바뀌었고, 78년 배기량을 3.3ℓ로 키워 300마력을 얻었다. 베이스 모델이 993 시리즈로 바뀌면서 트윈 터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최고출력이 408마력으로 높아졌다. 고출력을 효과적으로 노면에서 전달하기 위해 구동방식도 4WD로 바꾸는 한편 레이스 출전을 위해 뒷바퀴굴림으로 개량한 GT2 버전도 함께 선보였다. 2000년에는 3.6ℓ 415마력, 지난해 등장한 터보S는 444마력에 0→시속 200km 가속시간이 13.6초로 줄어들었다. Tiptronic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기계식 클러치가 달린 수동 변속기와 유체 컨버터를 단 자동 변속기는 용도와 성격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 고성능 혹은 좋은 연비를 위해서는 수동, 편한 운전을 원하면 성능과 연비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자동 변속기를 골랐다. 스포츠카 메이커 역시 대부분의 차에 수동 변속기를 달았고, 자동은 극히 한정된 모델에 사용했다. 하지만 포르쉐는 이런 상황에 과감하게 반기를 들었다. 1990년 911(964)에 혁신적인 자동 변속기 팁트로닉을 옵션으로 준비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토크 컨버터가 달린 자동 변속기를 바탕으로 수동처럼 조작할 수 있게 한 팁트로닉은 편의성과 스포츠성이라는 상반된 요소를 조화시킨 기술로 큰 인기를 모았다. H자 형태로 만든 시프트 게이트 왼쪽은 P, R, N, D, 3, 2, 1 순서의 일반적인 자동 모드. 오른쪽으로 옮기면 레버를 밀고 당겨 한 단씩 변속하는 시퀸셜 시프트 모드가 된다. 엔진 회전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한 변속되지 않으므로 수동 변속기와 비슷한 스포츠 주행이 가능해졌다. 포르쉐가 기획하고 ZF가 하드웨어, 보쉬가 제어장치를 담당한 팁트로닉은 95년 변속 스위치를 스티어링 스포크에 단 팁트로닉S로 발전했고, 이제 양산 포르쉐 상당수에 얹는 인기장비다. 911 터보까지 영역을 넓힌 팁트로닉은 변속기 시장의 메인스트림으로 자리잡으며 미쓰비시 INVECS-Ⅱ와 혼다 S매틱, BMW 스텝트로닉, 크라이슬러 오토스틱 등 유사기술의 탄생을 불러왔다.
포르쉐 911 고성능을 위한 끝없는 열정의 역사 2005-02-15
포르쉐와 페라리는 20세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스포츠카의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스포츠카 메이커의 양대 산맥으로 각각 독일의 자존심과 이태리의 열정을 상징한다. 공통점은 ‘최고의 스포츠카를 만든다’는 자부심과 든든하고 막강한 팬들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F1 레이스가 열리는 서킷에서 페라리의 우승이 점쳐질 때면 붉은 티포시(열광적인 페라리 팬들)의 물결이 관람석을 뒤덮는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날아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저먼 실버의 차가움을 사랑하는 포르쉐파일(포르쉐 매니아)의 열성 또한 티포시에 못지 않다. 세상 누구보다 브랜드 충성도가 높은 매니아 집단이 그들이다. 두 메이커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생산대수다. 페라리는 1년에 고작 4천∼5천 대의 완성차를 만들어내는 수작업 메이커다. 반면 포르쉐는 그 10배가 넘는 5만여 대를 생산한다. 이 차이로 인해 포르쉐는 페라리에 비해 ‘노력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현실적인 스포츠카’로 느껴진다.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절대지존’ 911 한편 포르쉐 오너를 꿈꾸는 이들 누구나 가슴에 새겨놓은 숫자가 있다. ‘개발코드명=브랜드’가 되어버린 절대지존 911. 데뷔 40년이 지났지만 변함없는 실루엣을 지키며 그들만의 혼을 담고 있는 간판모델이다. 포르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356-001 모델이 나타난다. 포르쉐라는 이름을 처음 달았고 테스트용으로 만든 한 대뿐인 차다. 100만 포르쉐의 선조로 911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프로토타입인 이 차를 바탕으로 356 양산차가 태어났고 911은 356의 후계모델이기 때문이다. 356-001은 파이프 프레임 위에 깔끔한 로드스터 보디를 덧씌운 스포츠카로 양산형에서는 강판 프레임으로 바뀌었다. 에르빈 코멘다가 디자인한 깔끔한 보디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뛰어난 균형미를 자랑한다. 356의 뒤를 잇는 모델인 911이 세상의 빛을 본 것은 196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였다. 이듬해 생산을 시작한 911은 356에 못지 않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RR(뒤 엔진, 뒷바퀴굴림) 레이아웃은 오랜 세월 포르쉐의 기준으로 자리잡아왔다. 1세대 911의 원래 코드네임은 901이었지만 이름 가운데 숫자 0이 붙는 상표권을 푸조가 가지고 있어 이듬해 911로 바뀌었다. 이후 911은 다양한 가지치기 모델을 갖춰 생산대수가 크게 늘어난다. 67년에 한층 성능을 높인 911 S를 선보이고 68년에는 값을 낮춘 911 T를, 74년에는 고성능의 대명사 911 터보를 내놓는 등 87년이 되자 911의 누적대수는 25만 대를 넘어서게 되었다. 메커니즘도 끊임없이 개량되어 67년에 반자동변속기 스포토매틱(Sportomatic)을 더하고 69년에 카뷰레터 대신 보쉬의 연료분사장치를 새롭게 달았다. 보디 형태와 굴림 방식도 다양해져 루프 패널을 떼어낼 수 있는 타르가 모델이 66년에 태어났고 83년에는 카브리올레가 만들어졌다. 90년에는 네바퀴굴림 카레라 4가 데뷔했다. 한편 911만을 진정한 포르쉐로 인정하는 분위기는 포르쉐의 경영을 악화시켰고, 프론트 엔진으로 수익성을 높이려던 계획은 점차 물거품이 되었다. 76년에 선보인 924와 이를 바탕으로 한층 출력을 높인 928, 924와 944 및 가장 최근의 968까지 911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변화의 바람은 93년부터 불기 시작했다. 포르쉐 선단을 지휘한 벤델링 비더킹 박사는 강도 높은 자구책과 변화의 칼을 들이댔고 정통성 논란에도 불구, 그의 체질개선전략은 적중했다. 싼값과 뛰어난 스포츠성을 무기로 태어난 복스터가 입문용 포르쉐로 자리잡았고 SUV 카이엔은 높은 판매성과를 올리며 승승장구한다. 포르쉐 정신을 이어온 순수모델 911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아성으로 찬란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1세대 901 1964∼1973 356의 성공으로 탄력을 받은 페리 포르쉐는 59년 ‘356보다 크고 강하며 편안한 4인승 스포츠카’ 901의 개발에 나섰다. 보디는 페리의 장남 알렉산더가 디자인한 754 T7 프로토타입을 바탕으로 2+2 시트 구성과 356의 실루엣을 이어받았다. 356에 쓰던 1.6X OHV 90마력 엔진을 버리고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새롭게 설계한 수평대향 6기통 2.0X 엔진을 얹어 최고출력 130마력과 16.7kg·m의 최대토크를 뽑아냈다. 최고시속은 210km, 0→시속 100km 가속은 9초였다. 901, 즉 1세대 911은 64년부터 73년까지 10년 동안 만들어졌고 다양한 가지치기 모델을 선보였다. 생산 이듬해인 65년에는 지붕을 떼어낼 수 있는 타르가 모델이 데뷔했고 911의 보급형 모델인 912가 등장했다. 66년에는 고성능 모델 S가 나왔고 911 T, E, L이 선보였다. 엔진 성능을 높이는 노력도 끊이지 않았다. 압축비를 높이고 피스톤을 개량해 최고출력을 160마력으로 끌어올린 911의 수평대향 6기통 엔진은 68년 카뷰레터 방식을 버리고 보쉬 연료분사장치를 달아 최고출력을 10마력 끌어올렸다. 엔진 배기량은 69년에는 2.2X로, 71년에는 2.4X 로 늘어났다. 한편 포르쉐의 첫 반자동변속기인 스포토매틱은 67년에 처음 나와 80년까지 쓰였다. 스포토매틱은 유체 토크컨버터와 패들 시프트 방식을 쓴 4단 반자동변속기다. 2세대 930 1974∼1988 911 시리즈 가운데 최장수 모델로 꼽히는 2세대 911(코드네임 930)은 72년 데뷔한 911 카레라 RS에 바탕을 두고 있다. 수평대향 2.7X 엔진을 얹은 카레라 RS는 FIA가 개정한 그룹4에 참가하기 위해 포르쉐가 내놓은 인증용 한정생산모델이다. 930은 카레라 RS의 엔진을 얹고 휠베이스를 2천268mm로 늘렸다. 더불어 T, E, S로 이루어진 라인업을 911(150마력)과 911 S(175마력), 911 카레라(210마력)로 바꾸었다. 911 가운데 처음으로 터보 엔진을 올린 것도 2세대 모델인 930. 정확하게 따지면 코드네임 930은 터보 모델에 붙여진 이름이다. 74년에는 911(165마력)과 카레라(200마력), 터보(260마력)로 바뀌었다. 76년 아연도금강판으로 내구성을 높인 911은 78년 911 SC로 이름을 바꾸었다. 930 엔진에는 보쉬의 K-제트로닉 연료분사장치를 달았고 터보 엔진은 3.3X(300마력)로 배기량을 늘려 80년까지 생산했다. 84년에는 수평대향 6기통 엔진의 배기량을 3.2X 로 키우고 보쉬 모트로닉 엔진 매니지먼트를 더해 최고출력을 231마력으로 끌어올린다. 그룹B 랠리카로 쓰인 911 SC, RS(코드네임 964)가 한정 모델로 선보였고 356 스피드스터를 뒤이은 911 스피드스터가 89년 2천100대 한정판매에 들어갔다. 한편 88년 911의 누적 판매대수는 25만 대를 넘어섰다. 3세대 964 1988∼1994 포르쉐 탄생 25주년을 맞아 88년 파리 오토살롱에 선보인 911 카레라4(코드네임 964)가 3세대 911의 힘찬 출발을 알렸다. 2세대 930 계열의 911 카레라와 비슷한 스타일을 지녔지만 엔진과 변속기 등 부품의 85% 이상을 새롭게 설계하는 등 대대적인 수술을 거쳤다. 카레라 4는 포르쉐 역사상 처음으로 네바퀴굴림 방식을 얹은 모델. 전통적인 리어 엔진에 샤프트와 센터 디퍼렌셜을 더한 풀타임 네바퀴굴림 방식을 썼다. 배기량을 3.6X 로 키우고 새롭게 설계한 캠 샤프트를 더하는 등의 손질로 최고출력이 250마력으로 높아졌다. 고정된 리어 스포일러를 가변형으로 바꾸고 서스펜션의 토션바 스프링을 코일 스프링으로 대체했다. 89년에는 전통적인 뒷바퀴굴림 모델인 911 카레라 2가 데뷔했다. ZF 4단 자동변속기를 바탕으로 트윈 클러치 기술을 쓴 팁트로닉을 새로 얹어 좋은 반응을 얻어냈지만 93년 4세대(코드네임 993)에 자리를 물려주었다. 당시 포르쉐는 911 모델의 지나친 편중으로 수익성이 크게 악화된 상태였다. 91년에는 고성능 모델 911 터보가 새롭게 데뷔했다. 3세대 모델의 시기에 태어났지만 964가 아닌 930을 바탕으로 개발된 모델이다. 수평대향 6기통 3.3X 터보 320마력 엔진은 92년 911 터보 S에 얹혀 당시 양산 포르쉐 가운데 가장 빠른 시속 290km를 기록했다. 4세대 993 1994∼1998 9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자태를 드러낸 4세대 911(코드네임 993)은 964와 마찬가지로 플랫폼을 다시 설계하고 부품의 80%를 새로 만들었다. 경영 정상화를 위해 92년 취임한 벤델링 비더킹 체제에서 포르쉐 부활의 선봉을 맡은 모델로, 대대적인 수술을 앞둔 911의 마지막 모델이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트레일링 암 방식의 뒤 서스펜션은 멀티링크 방식으로 바뀌고 알루미늄을 38% 써서 무게를 줄였다. 공랭식 엔진을 얹은 마지막 911 모델로 수평대향 6기통 3.6X SOHC 엔진은 알루미늄 블록과 보쉬 모트로닉 제어 프로그램, 흡배기 효율을 개선한 매니폴드를 써서 272마력을 낸다. 95년에는 배기량을 3.8X로 늘리고 바리오캠(가변밸브시스템)을 더해 최고출력을 13마력 높였다. 보디 일체형 범퍼를 달고 헤드램프를 눕혀 공기저항을 최소화했다. 같은 해 데뷔한 911 터보는 993 플랫폼을 바탕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풀타임 네바퀴굴림 방식을 터보 모델 최초로 도입했고 트윈터보를 얹어 408마력을 자랑한다. GT 레이스를 위해 95년 개발된 911 GT2는 경량 보디와 911 터보 엔진의 부스트압을 높여 최고출력 430마력을 뽑아냈다. 295km의 최고시속과 0→시속 100km 가속 4.4초를 자랑한다. 5세대 996 1998∼2004 97년 데뷔한 5세대 911(코드네임 996)은 911 최초의 수랭식 수평대향 6기통 3.4X DOHC 엔진을 얹었다. 둥근 헤드램프를 버리고 사슴 눈을 닮은 디자인을 썼다. 함께 데뷔한 복스터가 911의 플랫폼을 쓴다는 사실 또한 포르쉐파일들의 원성을 불러모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정통성 논란과는 달리 포르쉐의 가장 큰 시장인 북미에서는 큰 인기를 얻으며 포르쉐 중흥의 불씨를 지폈다. 라인업은 크게 911 카레라와 카레라 4S, 타르가 3가지로 나뉜다. 수랭식 수평대향 3.4X 300마력 엔진을 얹었던 911 카레라는 2001년 성능을 한층 높이고 헤드램프를 911 터보 스타일로 바꾸는 등 페이스리프트 되었다. 배기량은 3.6X 로 키워 최고출력을 20마력 끌어올렸고 바리오캠 플러스를 더했다. 신형 복서 엔진은 4.9초만에 시속 100km에 도달하고 4천250rpm에서 최대토크 37.7kg·m의 고성능을 냈다. 카레라보다 뒤 펜더가 60mm가 늘어난 911 카레라 S는 비스커스 커플링을 단 풀타임 네바퀴굴림으로 911 터보의 하체를 물려받았다. 세라믹 브레이크 시스템을 옵션으로 달아 강력한 제동성능을 끌어냈다. 루프를 떼어낼 수 있는 독특한 911 타르가는 993 모델부터 대형 글라스로 지붕을 마감하는 방식을 택했다. 996은 한층 커진 1.5㎡에 달하는 글라스와 전동모터로 시원한 개방감을 선사했다. 한편 99년 첫선을 보인 GT3은 2003년 996을 베이스로 만든 2세대로 진화했고 카레라 4S 카브리올레와 911 터보 카브리올레도 새롭게 태어났다. 911 데뷔 40주년 기념 스페셜 모델도 200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등장, 화제를 모았다. 6세대 997 2004∼현재 6세대 911(코드네임 997)은 전통적 디자인으로의 회귀가 특징이다. 4세대 994 카레라 4를 모티브로 원형 헤드램프를 되찾았다. 996에 비해 길이는 3mm 줄고 너비는 38mm 늘어났다. 달라진 디자인을 통해 공기저항계수는 0.30에서 0.28(카레라)∼0.29(카레라 S)로 낮아졌다. 카레라 S는 수평대향 3.8X 355마력 엔진을 얹어 0→시속 100km 가속 4.8초, 최고시속 285km의 성능을 낸다. 카레라는 수평대향 6기통 3.6X 325마력 엔진으로 최고시속 280km를 낸다. 수동기어를 얹은 카레라 S의 0→시속 100km 가속은 4.8초. 팁트로닉 자동변속기를 얹고 클러치 플레이트를 다듬어 변속느낌이 부드러워졌다. 911 역사상 처음으로 서스펜션 조절장치(PASM)를 달아 차체 센서로 조향각과 속도, 브레이크 압력과 엔진 토크를 측정, 전자제어 댐퍼를 조절한다. 프로그램은 노멀과 스포츠 두 가지로 버튼을 눌러 설정한다. 브레이크는 한층 개량된 세라믹 합금 디스크(PCCB)를 써 제동성능이 뛰어나다. 올해에는 카레라 4와 카브리올레가 데뷔를 앞두고 있고 내년에는 터보와 카레라 4S가, 2007년에는 GT3과 GT2가 선보일 예정이다. 페리 포르쉐 스토리 천재 엔지니어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로너 전기차, 아우토우니온 그랑프리카 등 여러 대의 차를 만들었다. 히틀러의 요청으로 만든 폭스바겐 비틀로 옥고를 치른 일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화다. 세계 자동차업계의 큰 별이었던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 주목받지 못한 아들 페르디난트 안톤 에른스트 포르쉐. 페리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는 스포츠카를 향한 열정과 뛰어난 사업수완으로 오늘날의 포르쉐를 일군 인물이다. 잘 알려진 포르쉐 911은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아닌 아들 페리 포르쉐의 작품이다. 페리가 11살이 되던 해, 포르쉐 박사는 아들을 위해 공랭 2기통 6마력 엔진의 2인승 오픈카를 손수 만들어 선물해 준다. 어린 시절부터 자동차와 놀며 자라난 페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7세 때 보쉬사에 입사해 기술을 배웠다. 1931년 부친과 함께 포르쉐 자동차 엔진설계 사무소를 열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리기도 했지만 39년 2차대전으로 문을 닫았다. 종전 후 독일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렀고, 부친의 석방을 위해 48년 포르쉐 356을 만들어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51년 포르쉐가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클래스 우승하던 해, 포르쉐 박사가 숨을 거두었다. 페리는 356 생산에 더욱 힘을 쏟아 가지치기 모델인 카브리올레와 스파이더도 내놓았고 356은 65년까지 17년 동안 7만7천 대나 만들어지는 등 회사의 기틀을 세운 모델로 자리잡는다. 911은 356이 뜨거운 인기를 모으고 있던 57년, 후계차를 고심하던 페리의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페리는 ‘356보다 더 크고 뛰어난 성능을 지닌 4인승 GT’를 생각했고, 911은 6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데뷔, 이듬해 굴러 나오게 된다. 페리의 장남인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가 디자인을 맡았고 손위누이의 둘째 아들인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엔진을 개발했다. 이 차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포르쉐 발전의 확고한 기반이 되었다. 911은 카브리올레와 타르가, 카레라와 경주차로 가짓수가 늘어났고 각종 레이스에서 우승을 휩쓸면서 포르쉐의 이름을 드높였다. 페리 포르쉐는 63세를 맞은 72년 포르쉐를 주식회사로 바꾸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고 이때 가족들도 회사를 떠났다. 장남 페르디난트 알렉산더는 72년 포르쉐 디자인센터를 세워 독립했고 조카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70년대 중반 아우디로 옮기게 된다. 그는 콰트로 개발로 큰공을 세우고 폭스바겐 회장을 거치는 등 자동차업계의 굵직한 인물이 되었다. 페리는 포르쉐의 감사역회 의장을 맡아 숨어서 회사를 돕지만 안타깝게도 98년 포르쉐 50주년 대규모 기념잔치를 앞두고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의 명성 위에 화려한 금자탑을 쌓아올린 페리 포르쉐는 영원히 포르쉐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을 것이다. 사진으로 보는 포르쉐 역사 1947 전설의 스포츠카 356 탄생. 1951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 별세. 1953 356의 도로용 경주모델 550 스파이더 데뷔. 제임스 딘의 사고로도 널리 알려진 이 차는 작은 차체에 뛰어난 성능을 갖춰 ‘자이언트킬러’로 불렸다. 1958 1만 번째 356 생산. 1963 356을 잇는 스포츠카 911 데뷔. 2.0X 130마력 엔진을 얹어 뛰어난성능을 뽑아냈다. 1965 17년 동안 7만7천361대를 끝으로 356의 생산 마감. 1969 주펜하우젠 공장의 조립라인 확장. 1972 독일 바이자흐(Weissach)에 포르쉐 R&D 센터 오픈. 1976 914 대체모델 924 데뷔. 아우디엔진을 프론트에 얹고 뒷바퀴를 굴리는 스포츠 쿠페. 1984 포르쉐 AG 투자가에게 공개. 1987 25만 번째 911 생산. 1990 네바퀴굴림 911 카레라 4 데뷔. 새로운 자동변속기 팁트로닉 카레라 2에 얹음. 1993 벤델링 비더킹 포르쉐 AG 회장으로 취임. 엔진 냉각방식이 수랭식으로 바뀌면서 포르쉐의 공랭식 엔진시대 마감. 1995 프론트 엔진 모델인968(944 후계모델)과 928 단종. 1996 100만 번째 포르쉐 탄생. 트윈 터보로 무장해 최고출력 400마력을 끌어내는 911 터보 데뷔. 미드십 엔진 복스터 탄생. 1998 페리 포르쉐 사망. 주행안정장치(PSM)를 단 올 뉴 911 데뷔. 2001 GT1 엔진을 얹은 911 터보와 최고 시속 195마일을 기록한 911 GT2 데뷔. 2003 포르쉐의 첫 SUV 카이엔과 911 탄생 40주년 기념모델 데뷔. 2004 수퍼카 카레라 GT와 고성능 스포츠카 911 GT3 판매 시작
Peugeot Wagon in Europe 유럽 C.. 2005-01-18
유럽에서는 실용성이 큰 차가 인기다. 어디를 가든 소형차와 해치백, 왜건 등 합리적이고 실용적이 차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그 중 왜건의 인기는 오랜 세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왜건이 SUV와 미니밴의 물결에 휩쓸려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지만 유럽에서는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볼보는 2001년 기준 유럽 판매의 88%를 왜건으로 채웠을 정도. 유럽인들의 왜건 사랑은 상상을 초월한다. 볼보를 예로 들 것도 없이 대부분의 메이커가 웬만한 차종에는 다 왜건을 갖추고 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다양한 왜건이 카탈로그에 넘쳐난다. BMW 5시리즈 투어링이나 벤츠 E클래스 에스테이트, 재규어 X타입 에스테이트 등 ‘럭셔리+왜건’은 우리 시각으로 볼 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조합이다. 하지만 아우디의 RS6 아반트나 볼보 V70R처럼 고성능으로 무장한 모델까지 있는 것을 보면 ‘유럽의 문화’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곳 사람들에게 왜건은 넓은 공간이라는 ‘가치’가 더해진 승용차인 것이다. 푸조206, 307, 407 5대 중 1대는 왜건 유럽의 여타 메이커가 컴팩트 미니밴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푸조는 성실하게 왜건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푸조의 첫차가 나온 해는 1890년. 2년 뒤인 1892년 푸조는 왜건형을 내놓는다. ‘타입10’이라고 이름 붙인 이 차는 5명이 편안하게 탈 수 있으면서도 유지비가 적게 들어 인기가 좋았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푸조의 왜건은 ‘파밀리알레’ 또는 ‘브레이크’라는 이름으로 2, 3, 4, 5로 이어지는 푸조의 중소형차 라인업에서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나온 첫차이자 스피드의 신기원을 이룩한 203, 1955년 데뷔해 사파리 랠리에서 명성을 얻은 403, 랠리의 강자로 군림하며 고성능 세단의 기치를 드높인 404, 69년 데뷔해 ‘올해의 유럽차’로 뽑히고 톱클래스 중형차로 인정받은 504, 실용성과 안정성으로 컴팩트카의 새 장을 연 306 등 푸조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차에도 왜건이 빠지지 않았다. 푸조의 왜건은 뛰어난 실용성과 성능으로 세단 못지않은 명성을 누려 왔다. 푸조의 새로운 변신과 함께 2002년 선보인 307 브레이크는 푸조 왜건의 가치를 더욱 높인 주인공. 여기에 SW(Sky Wagon)라는 새 이름을 더해 산뜻한 출발을 했다. 뒤이어 나온 206SW, 407SW를 합쳐 푸조의 왜건은 모두 네 가지다. 지난 9월까지 팔린 60여만 대의 206 중에서 SW는 6만 대. 같은 기간 팔린 407 9만5천 여대 중 1만2천 대가 왜건이다. 307은 푸조 왜건 중에서 가장 높은 실적을 자랑하는 모델이다. 45만 대 중 14만여 대로 왜건의 비중이 32%까지 올라간다. 세 차를 합치면 5대 중 1대는 왜건인 셈이다. 프랑스의 길거리가 어떨지 상상이 가는 부분이다. 유럽 왜건 시장의 트렌드리더 미국 경제 전문지 은 최근 2005년 주목받을 새로운 트렌드를 특집기사로 다뤘다. DVD 시장의 급성장세, 할리우드의 속편과 리메이크 열풍, 햄버거를 위협하는 샌드위치, 저칼로리 및 저탄수화물 음료 등이 해당분야에서 트렌드로 꼽혔다. 그럼 자동차는? 하이브리드카가 널리 보급되고 컴팩트 미니밴의 인기가 지속될 전망이다. 무엇보다도 SUV의 시대에 이어 승용차와 미니밴의 장점을 합친 CUV가 새로운 주류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SUV 천국인 미국에서 처음 쓰인 CUV라는 말은 크로스오버 유틸리티 비클(crossover utility vehicle)의 약자. CUV는 미니밴으로 대표되는 RV와 그 뒤를 이은 SUV의 다음 주자로 시장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안전성과 연비향상에 주안점을 두는 CUV는 세단 플랫폼을 기초로 하되 SUV의 특징도 잃지 않고 있다. 패밀리카로 쓰기 위해서 넓은 공간을 갖추고, SUV처럼 좌석을 높게 배치해 시원한 시야를 확보했다. 그러면서 승용차처럼 다루기 쉽고 승차감도 부드럽다. 다시 말해 세단과 미니밴, 왜건의 장점으로 골고루 합친 차인 것이다. 크라이슬러 퍼시피카, 포드 프리스타일이 대표적인 차종이다. 딱 부러지게 정의를 내리기 힘든 CUV의 의미는 요즘 들어 계속 넓어지고 있다. 세단 베이스의 SUV를 통칭하던 말에서 실용성과 달리기 성능, 디자인의 3박자를 갖춘 차를 가리키는 말로 확대 해석되고 있는 추세. CUV의 열풍은 미국 시장뿐만 아니라 유럽 시장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분위기다. 스타일리시하면서 실용적이고, 뛰어난 핸들링까지 갖춘 푸조 왜건들이 유럽의 CUV 바람을 이끌고 있는 주인공이다.
아이덴티티를 지키는 것이 살아남는 비결 ④ 신·구형.. 2004-12-22
1st 영국에서 발표회를 연 것이 1989년. 1948년 랜드로버 시리즈1이 등장한 이후 41년 만이다. 그 사이에 1970년 레인지로버가 선보였다. 이전까지 랜드로버의 라인업은 궁극적인 네바퀴굴림차라 할 수 있는 랜드로버 시리즈(오늘날의 디펜더)와 세계가 인정하는 럭셔리 SUV 레인지로버 2차종 체제였다. 이 둘의 틈새를 메우는 디스커버리는 대중적인 패밀리 SUV로, 랜드로버의 판매를 늘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초대 디스커버리는 놀랄 만큼 값비싼 4WD는 아니었다. 약 4천만 원대. 넉넉하고 실용적인 실내가 돋보였고, 오프로드 성능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체 부품은 레인지로버와 함께 쓰는 경우가 많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정성을 쏟은 차였다. ① 4510×1800×1950 ② 2540 ③ 모두 1485 ④ 240 ⑤ V8 4.0X ⑥ 180/4750 ⑦ 31.8/3100 ⑧ 자동 4단 ⑨ 리서큘레이팅 볼 ⑩ 모두 리지드 ⑪ 모두 디스크 ⑫ 235/70 R16 2nd 1998년 첫 풀모델 체인지. 디스커버리가 처음 등장한 이후로 9년 만에 시리즈2가 나왔다. 디자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몸집이 불어났고 95%의 부품이 바뀌었다. 사진에서 보듯이 직사각형 테일램프는 세로로 약간 길어졌다. 레인지로버의 에어 서스펜션 등을 받아들여 온로드 성능이 뚜렷이 좋아졌고, 엔진을 손보아 최대토크도 높였다. 오프로드에서는 트랙션 컨트롤과 내리막조절장치(HDC) 같은 전자장비들이 성능을 끌어올렸다. 사진에서 보듯이 시리즈2는 2003년 마이너 체인지를 거쳐 현재의 레인지로버 헤드램프 모양을 받아들였다. 이 헤드램프는 3세대 디스커버리에도 전해졌고 프리랜더에도 쓰여 랜드로버의 패밀리룩을 이루고 있다. ① 4705×1890×1960 ② 2540 ③ 1540/1560 ④ 210 ⑤ V8 4.0X ⑥ 185/4750 ⑦ 34.6/2600 ⑧ 자동 4단 ⑨ 리서큘레이팅 볼 ⑩ 모두 리지드 ⑪ V디스크/디스크 ⑫ 255/55 R18 3rd 2004년 3세대 디스커버리 등장. 몸집은 더욱 불어났고 승용 감각이 더해졌다. 사진을 보면 1세대에서 2세대로 바뀌었을 때보다 디자인 변화가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도 사각형의 보디와 뒤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계단식 지붕, 개방감 넘치는 실내 등 디스커버리 고유의 디자인은 그대로 살아 있다. 지붕 쪽의 알파인창이 없어진 것이 아쉽다. 뒷도어는 해치 타입으로 바뀌었고, 스페어 타이어를 뒤 범퍼 아래쪽으로 옮긴 것이 가장 눈에 띈다. 엔진 출력은 300마력, 기어는 6단으로 껑충 뛰었다. 처음으로 네 바퀴 독립식 서스펜션과 랙 앤드 피니언 스티어링을 썼고 모노코크 보디의 장점을 살린 ‘통합 보디-프레임’을 써 온로드 성능을 대폭 개선했다. 우리나라에는 내년 4월쯤 V8과 디젤 TDV6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디스커버리3은 레인지로버에 가까워지고 프리랜더와의 거리는 멀어졌다. 이로 미루어 프리랜더 다음 세대도 한층 고급화될 것이 분명하다. 내년에는 디스커버리급 스포츠 SUV 레인지스토머(컨셉트카명)가 더해져 랜드로버 식솔은 디펜더, 프리랜더, 디스커버리, 레인지스토머, 레인지로버 다섯으로 늘어난다. ① 4835×1915×1887 ② 2885 ③ 1605/1613 ④ 240 ⑤ V8 4.4X DOHC ⑥ 300/5500 ⑦ 43.3/4000 ⑧ 자동 6단 ⑨ 랙 앤드 피니언 ⑩ 모두 더블 위시본 ⑪ 모두 V디스크 ⑫ 255/55 R19 제원표 보기 : ① 길이×너비×높이(mm) ② 휠베이스(mm) ③ 트레드 앞/뒤(mm) ④ 최저지상고(mm) ⑤ 엔진 ⑥ 최고출력(마력/rpm) ⑦ 최대토크(kg·m/rpm) ⑧ 기어 ⑨ 스티어링 ⑩ 서스펜션 앞/뒤 ⑪ 브레이크 앞/뒤 ⑫ 타이어
박물관에서 찾아낸 최신 아우디의 흔적 ③ Old &.. 2004-12-17
Horch 920/930 ¤ A8 아우디가 V8 엔진의 대형 세단 ‘V8’로 프레스티지카 시장에 진출한 것이 1988년의 일. 하지만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프리미엄 브랜드’ 호르히의 존재가 있다. 호르히는 전설적인 엔지니어 아우구스트 호르히에 의해 1899년 창업되어 1910년 아우디에 흡수된 후 아우토우니온 시절 최고급차 브랜드로 이름을 날렸다. 1939년 등장한 920은 반더러 W23 섀시에 직렬 6기통 3.3X 75마력 엔진을 얹은 고급 세단. 직렬 8기통 엔진의 930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에어로다이내믹 보디 버전이 있었다. 사진의 차는 920 리무진. 아우토우니온 시절에는 DKW(모터사이클과 소형차), 반더러(중형), 아우디(중대형), 호르히(고급)로 구분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아우디 브랜드만으로도 이 모든 클래스를 커버한다. 현대의 호르히 역할은 당연히 A8의 차지. 선진 알루미늄 스페이스 프레임 안에 비행기 조종석 같은 첨단 인테리어를 꾸미고 V6부터 W12까지 강력한 엔진과 콰트로 시스템을 조합한 21세기형 프리미엄 세단이다. Wanderer W25K Roadster ¤ TT Roadster 수많은 클래식 아우디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이는 반더러의 스포츠 로드스터 W25K. 미국차에서 영향을 받은 디자인은 W51에서 가져왔고 W40의 직렬 6기통 2.0X 엔진에 수퍼차저를 더해 두 배에 이르는 85마력의 최고출력을 얻어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완성한 이 엔진으로 145km의 최고시속과 5km/X의 연비를 냈다. 멋진 자태뿐 아니라 1936년부터 38년까지 생산대수가 259대에 불과하다는 희소성으로 지금도 1억 원이 넘는 값에 거래된다. 요즘 아우디에서 멋진 스타일과 고성능을 갖춘 컴팩트 로드스터라면 당연히 TT 컨버터블이 떠오른다. 1995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등장한 컨셉트카의 모습을 양산차에 그대로 옮긴 개성 넘치는 스타일링은 TT 최고의 자랑거리. 컨버터블형인 로드스터는 소프트톱으로 쿠페형의 동그란 루프라인을 그대로 재현했고 뒷좌석 대형 롤바로 안전성을 확보했다. 직렬 4기통 1.8X DOHC 터보 180/225마력에 V8 3.2X DOHC 250마력 엔진이 추가되었다. NSU Ro80 ¤ Audi A6 Ro80은 NSU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마지막 승용차로 기록된다. 1967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데뷔할 당시 호평을 받았고 68년 ‘유럽 카 오브 더 이어’에도 선정되었다. 1873년 창업된 NSU는 원래 모터사이클로 유명하지만 1951년 펠릭스 반켈 박사와 손잡고 전혀 새로운 내연기관인 로터리 엔진을 개발해 냈다. Ro80은 497cc×2의 트윈 로터 115마력 엔진으로 앞바퀴를 굴렸고 4륜 독립 서스펜션과 네바퀴 디스크 브레이크, 클라우스 루테가 디자인한 공기저항계수 0.35의 날렵한 에어로다이내믹 보디 등 당시 첨단 기술의 집합체였다. Ro80의 선진성은 최신 A6 세단으로 이어져 ‘기술을 통한 진보’라는 아우디의 기본 이념을 충실하게 실천해 나가고 있다. 오랜 기간 숙성된 콰트로 시스템에 ESP, ASR, EBD 섀시 제어기술을 더해 최적의 접지력을 끌어내고 휘발유와 디젤 직분사 엔진은 파워와 연비를 모두 만족시킨다. 매끄러운 6단 AT와 CVT 멀티트로닉, 멀티미디어 인터페이스인 MMI도 눈여겨볼 장비. Group S Rally Prototype ¤ Le Mans Quattro concept WRC의 그룹B 규정에 맞추어 콰트로 S1을 제작했던 아우디는 새롭게 준비중이던 그룹S 규정을 겨냥해 수퍼 랠리카를 기획했다. 하지만 알려진 대로 그룹B의 사망사고 속출로 그룹S 계획까지 취소되면서 한 대만 제작된 이 프로토타입 역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엔진은 콰트로 스포츠에 얹었던 직렬 5기통 2.1X 터보를 개량해 최고출력을 500마력으로 끌어올렸고 최고시속은 280km. 강력한 라이벌, 푸조와 란치아에 대항하기 위해 복합소재 보디와 미드십 레이아웃을 선택했고 구동방식은 당연히 콰트로. 아우디는 86년을 마지막으로 WRC 활동을 완전히 중단했기 때문에 이 프로토타입과 지금의 아우디는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미드십+4WD 레이아웃과 첨단소재의 경량보디라면 2003년 등장한 르망 콰트로 컨셉트와 어렵지 않게 인연이 닫는다. 알루미늄 프레임 미드십에 V10 5.0X 트윈터보 610마력 엔진을 얹어 ‘아우디판 람보르기니 가야르도’로 불리는 르망 콰트로는 양산 가능성이 높이 점쳐진다. Audi V8 Avant ¤ Avantissimo 1989년 잉공슈타트에 위치한 아우디 기술개발부서에서는 대형 왜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당시 아우디가 프레스티지 시장을 향해 야심차게 선보였던 대형 세단 V8을 바탕으로 한 왜건형 V8 아반트가 주인공. 사이즈는 같은 해 등장한 아우디 200 콰트로 20V 아반트과 비슷한 크기에 V8 3.6X DOHC 250마력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230km를 냈다. 이 차는 양산되지 않았지만 몇 년간 아우디 전 회장 페르디난트 피에히 일가의 자가용으로 이용되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건이 잘 팔리는 유럽이라고 해도 그 크기는 어퍼 미들 클래스까지로 한정되기 마련. 하지만 아우디는 A8 아반트로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했고 지난 2001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는 아반티시모 컨셉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신형 A8의 디자인을 한발 앞서 공개함으로서 시장 반응을 살핀다는 목적이 우선이었지만 대형 왜건에 대한 관심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도 보여준다. V8 4.2X 트윈터보 430마력 엔진과 6단 AT, 콰트로 시스템을 얹었다. Auto Union Type C/D ¤ R8 ‘실버 애로우’는 2차 대전 직전, 뛰어난 성능으로 유럽 서키트를 초토화시켰던 벤츠와 아우토우니온의 은색 경주차를 가리키는 별칭이다. 치프 엔지니어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에 의해 완성된 16기통 미드십 구성의 타입C와 12기통형 타입D는 많은 레이스에서 활약했다. 아우디 박물관에 전시된 1938년형 타입 C/D는 타입D 섀시에 규정변경으로 그랑프리에 투입할 수 없게 된 타입C의 16기통 엔진을 얹은 힐클라임 버전. 종전 후 대부분의 아우토우니온 그랑프리카가 그랬듯 러시아로 넘어갔고 지난 95년 아우디 품으로 되돌아 왔다. 원형 그대로 간직된 몇 안 되는 오리지널 실버 애로우. 21세기에 되살아난 실버 애로우의 전설은 바로 아우디 르망 경주차 R8이다. 1999년 르망 도전을 시작한 아우디는 2000~2002년과 2004년을 휩쓸었을 뿐 아니라 아메리칸 르망 시리즈에서도 상위권을 독점하고 있다. 1930년대 실버 애로우의 무기가 수퍼차저였다면 지금은 연비와 내구성이 뛰어난 직분사 휘발유 엔진이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한다. Auto Union Streamliner Type C ¤ Avus Quattro 16기통 엔진의 미드십 그랑프리 경주차 타입C를 바탕으로 제작된 스트림라이너는 이름 그대로 공기저항을 줄인 유선형의 풀 카울 보디를 가지고 있다. 이 차는 1937년, 살인적인 43。의 뱅크 커브가 있는 아부스 서키트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같은 해 베른트 로제마이어가 몰고 프랑크푸르트-달름슈타트간 아우토반에서 일반도로 최고속도 도전에 나섰다. 벤츠와의 뜨거운 속도경쟁 끝에 449km라는 놀라온 기록을 세웠지만 사고와 함께 로제마이어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시차는 설계도에 따라 정교하게 다시 제작된 레플리카. 수퍼카 매니아라면 아부스라는 이름에서 91년 등장했던 수퍼 칸셉트카 아부스 콰트로를 쉽게 떠올릴 것이다. 4개의 펜더가 솟아오른 낮은 보디라인과 납작하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노즈 등 디자인이 그대로 닮았다. 알루미늄 차체 미드십에는 독특한 3열 W12 6.0X DOHC 5밸브 509마력 엔진과 콰트로 시스템을 얹어 최고시속 340km, 0쭻시속 100km 가속 3.0초의 고성능으로 많은 이들을 흥분시켰지만 양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국내 수입차시장 큰 폭으로 성장 되돌아본 카 라이프.. 2004-12-14
2003년은 연초부터 로또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2002년 12월 2일 발매를 시작한 로또는 당초 국민은행이 예상했던 연매출(3천600억 원)의 10배에 이르는 3조6천억 원어치가 한해 동안 팔려나갔다. 2003년 4월 12일에는 1등 최고 당첨금이 407억 원에 이르는 등 많은 국민들이 로또 열풍에 편승해 ‘인생역전’을 꿈꾸었다. 2003년에는 ‘얼굴이 짱(최고)’이라는 뜻의 ‘얼짱’이나 ‘몸짱’, ‘웰빙’ 등의 새로운 말이 유행했다. 온라인에서는 블로그나 지식검색이 큰 인기를 끌었고, 디지털카메라를 뜻하는 ‘디카’도 2003년 한해의 키워드였다. TV 드라마 ‘다모’가 시청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다모 폐인’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인터넷 폐인(?)의 원조인 디시 폐인이나 다모 폐인들은 하릴없이 모든 것을 귀찮아하는 성향이나 사람들을 ‘귀차니즘’, ‘귀차니스트’라고 불렀다. 한편 2003년에도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실업과 신용불량자가 크게 늘어났고,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이나 카드 빛을 갚기 위한 범죄가 늘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내수 부진했지만 수출은 최대 실적 올려 수입차시장 크게 성장하고 렉서스 선전 2003년 4월 국내 승용차 등록대수가 1천만 대를 넘어섰다. 이미 화물차를 포함한 전체 자동차 등록대수는 97년 1천만 대를 넘어섰고, 자동차 용도별 등록대수로만 따지면 99년 자가용 1천만 대 시대가 열렸다. 승용차 등록대수는 IMF 외환위기 직후인 98년에 97년보다 5천548대가 줄어든 758만926대를 기록하는 등 한때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기도 했지만 99년 이후 다시 치솟았다. 승용차 1천만 대 시대가 열렸지만 2003년 한해 내수 판매는 2002년보다 18.7% 감소해 부진을 면치 못했다. 반면 수출은 20.3% 늘어난 195만 대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수출이 늘어난 것은 주요 수출국가의 수요와 수출 차종이 늘고 GM대우의 수출이 본격화된 데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현대는 2003년 12월 18일, 한해 기준으로 100만 대째 수출차를 선적하는 경사를 맞이했다. 1976년 첫 고유모델인 포니 여섯 대를 에콰도르로 보내면서 수출을 시작한 현대가 76년 한해 1천42대를 수출한 것과 비교하면 27년만에 1천 배 이상의 성장을 이룬 셈이다. 한편 2003년 12월 22일, 쌍용차 채권단과 중국 란싱그룹이 쌍용차 매각에 관한 MOU를 체결함으로써 1997년 이후 지속되어온 국내 자동차업계의 구조조정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드는 듯했다. 란싱그룹은 1984년에 설립되어 연간매출액 100억 위안(약 1조 5천억 원), 총자산 200억 위안(3조 원)에 달하는 중국 최대 화공그룹으로, 자체 기술 개발력과 고유 모델이 없어 쌍용 인수에 뛰어들었다(2004년 3월 란싱그룹의 쌍용 인수는 무산되었다). 수입차시장은 불황에도 2002년에 비해 판매가 20.7% 늘어난 1만9천461대를 기록했다. 특히 10월에는 수입차 등록대수가 10만5천533대에 달해, 87년 수입차 개방 이후 16년만에 등록대수 10만 대의 벽을 넘어섰다. 특히 예전에는 배기량 2천∼3천cc의 차들이 많이 팔렸지만 2003년에는 2천cc급 수입차의 비중이 크게 늘어나 눈길을 끌었다. 전문가들은 수입차의 저변확대가 시작된 것으로 풀이했다. 렉서스가 BMW를 제치고 판매 1위 자리에 오르는 등 수입차업계에 일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렉서스는 10월 505대 등록으로 BMW(479대)에 26대 앞섰다. BMW가 그동안 30% 가까운 시장점유율로 2위 업체와 10% 포인트 이상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렉서스의 1위 등극은 업계에 큰 충격이었다. 이후 렉서스는 12월까지 3개월 연속 판매순위 1위를 유지했다. 이와 함께 2002년 국내에 혼다모터사이클코리아(HMCK)를 세웠던 혼다가 2003년 일본차업체로는 두 번째로 국내에 공식 법인(혼다코리아)을 설립해 관심을 모았다. 한편 제2회 수입차 모터쇼가 5월 1∼10일 서울무역전시장(SETEC)에서 열렸다. 2000년 1회 때와 달리 컨셉트카 5대 등 다양한 새차 17종이 국내에 첫선을 보였지만 수입차업체들이 양산차나 곧 출시될 차종의 판촉전에만 몰두해 아쉬움을 남겼다. 10월 2∼12일에는 부산 벡스코(BEXCO)에서 2003 부산국제모터쇼가 열렸다. 부산국제모터쇼는 자동차 생산시설이 몰려있는 부산·울산·경남 등 3개 지방자치단체가 공동으로 행사를 주최하고 국산차와 수입차업체가 모두 참가해 의미가 남달랐다. 청계천 복원공사로 청계고가도로 철거 디젤 승용차 2005년부터 판매키로 결정 ‘첨가제냐. 유사 휘발유냐’를 놓고 논란을 빚은 ‘세녹스 문제’가 2003년에도 계속되었다. 세녹스 판매 혐의로 고발된 판매업자에게 1심 법원이 ‘세녹스를 유사 석유로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하자 세녹스 문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산업자원부는 세녹스를 유사휘발유로 보고 2003년 3월 제조사인 프리플라이트사가 원료를 공급받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또한 환경부는 8월 세녹스 같은 첨가제가 전체 연료의 1%를 넘지 않도록 대기환경보전법 시행 규칙을 개정하고 검찰과 경찰은 시·도와 합동으로 강력한 단속을 펴는 등 관련 부처들의 세녹스 판매불가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서울시는 국내 첫 고가도로인 청계고가도로를 청계천으로 복원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2003년 1월 9일 ‘청계천 복원 기본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2월 시민위원회와 공청회 등을 거쳐 계획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7월 1일 청계고가도로 5.8km 구간과 청계천 복개물을 철거하는 공사에 들어가 10월 31일 마무리지었고, 광교에서 남산 1호터널로 이어지는 3·1 고가도로도 연말 철거를 마쳤다. 환경부가 대기오염 물질 배출 허용량을 강화하는 대신, 대기환경보전법 시행규칙을 개정함으로써 2005년부터 디젤 승용차의 국내 시판이 가능해졌다. 새 규칙에 따라 디젤 승용차 배기가스 배출기준은 2005년에는 유로Ⅲ, 2006년에는 유로Ⅳ 수준까지 허용되었다. 또한 2005년에는 유로Ⅲ와 유로Ⅳ 기준의 디젤 승용차를 함께 판매하되 배출가스가 적은 유로Ⅳ 디젤차에 대한 특소세를 1년간 한시적으로 50% 감면해 유로Ⅳ 디젤 승용차 판매를 유도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환경부는 디젤 승용차 판매에 따른 대기오염 절감 대책으로 2005년부터 배출가스 자기진단장치(OBD)를 의무적으로 달도록 했다. 또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카 같은 친환경차에 대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업체에서 배출할 수 있는 대기오염물질의 양을 정부가 정하는 ‘수도권 대기질 개선 특별법’을 하루 빨리 제정하기로 했다. 이밖에도 2003년에는 프로토자동차가 국내에서 6번째 완성차업체로 등록했고, 현대가 LPG 엔진을 얹은 승합차와 RV의 생산을 중단하는 등 국내 자동차업계에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수입차업계에서는 BMW코리아 김효준 사장이 아시아인으로는 처음 BMW그룹의 임원이 되었고 한성자동차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던 벤츠가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를 통해 수입되기 시작했다. 또한 IMF때 철수한 푸조가 한불모터스를 통해 한국에 다시 진출했다. 서울 시내에서는 굴절버스가 등장하고 승용차 자율요일제가 실시되었다. 해외에서는 중국의 자동차생산이 400만 대를 넘어서 세계 4위에 올랐다. 중국은 2000년과 2001년에 각각 207만 대와 234만 대 생산으로 세계 8위였다. 이후 2002년 325만 대로 한국을 추월해 5위, 2003년에는 444만 대로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4위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추세로 나아가면 중국이 2005년 3위 독일을 따라잡고 2010년에는 세계 2위 일본도 추월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중국 자동차시장이 활기를 띠는 것과 달리 미국 빅3은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실적에 그쳤다. 2003년 8월 크라이슬러가 사상 처음으로 도요타에게 미국 시장 3위 자리를 내주었고, 크라이슬러와 포드 모두 각각 2분기와 3분기에 적자를 내는 부진을 보였다.
기술 개발과 혁신의 단어가 된 ‘혼다이즘’ ①역사 .. 2004-11-23
혼다의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는 일본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짧은 시간에 혼다를 일류 자동차·모터사이클 메이커로 키워냈고,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1906년 시즈오카현 시골마을 대장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기계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이런 능력을 꾸준히 갈고 닦아 자동차와 모터사이클, 범용 엔진으로 세계 정상에 섰고, 1991년 8월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혼다는 2003년 현재 30개 나라에 120개 이상의 생산거점을 두고 자동차와 모터사이클, 범용엔진을 생산하고 있다. 1946년, ‘혼다기술연구소’로 출발 혼다의 공식명칭은 ‘혼다기연공업’(本田技硏工業)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혼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술과 창조, 글로벌화다. 이것을 ‘혼다이즘’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소이치로는 1946년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에 혼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혼다기술연구소’를 설립해 모터사이클용 엔진 개발에 들어갔다. 첫 제품은 이듬해 나온 자전거용 A형 보조엔진. 자전거 프레임에 다는 이 제품은 체인으로 모터와 뒷바퀴를 연결해 페달을 구르지 않아도 앞으로 나가 힘들이지 않고 자전거를 탈 수 있게 해주었다. A형 보조엔진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소이치로는 1948년 혼다의 모태인 ‘혼다기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49년 첫 모터사이클 ‘드림 D형’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메이커가 외국사와 합작을 통해 자동차와 모터사이클을 제작했으나 혼다는 독자기술을 고집하면서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했다. 그 결과 1958년 상용 모터사이클 수퍼 컵(Super Cub) 시리즈가 세상에 나왔다. 혼다는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킨 수퍼 컵의 인기에 힘입어 2차대전 후 생겨난 수백 개의 모터사이클 메이커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수퍼 컵이 날개 돋친 듯 팔려 혼다는 몸집을 불릴 수 있었다. 1963년 국내 기아산업에 모터사이클 부품을 수출하고 벨기에에 첫 해외 공장을 세운 것이나 1967년 대만에서 모터사이클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수퍼 컵 시리즈의 성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1년에는 국내 대림공업과 제휴해 ‘대림혼다’라는 브랜드를 내놓았고, 국내에서 스쿠터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택트’(Tact)도 1980년 출시된 혼다의 작품이다. 모터사이클로 성공을 거둔 혼다는 자동차 쪽으로 눈을 돌렸다. 혼다가 자동차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962년. 같은 해 일본의 첫 레이스 트랙인 ‘스즈카 서키트’도 만들었다. 1963년에는 첫 자동차 로드스터 S500과 경트럭 T360을 선보였고, 1966년에는 S500의 배기량을 늘인 S600과 S800을 만들어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섰다. 어코드로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아 혼다의 첫 베스트셀러는 1967년 등장한 N360이었다. 앞바퀴굴림 경차 N360은 20여 개월 동안 20만 대가 팔리는 인기를 끌었고, 모터사이클 수퍼 컵과 함께 혼다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차는 1970년까지 3년 연속 일본 경차시장 1위를 차지했다. 뒤를 이어 1972년 소형차의 베스트셀러가 된 시빅(Civic)을 내놓았다. 이 차는 현재 6세대 모델이 시판되고 있다. 1973년, 소이치로가 은퇴한 뒤에도 혼다의 발전은 멈추지 않았다. 혼다의 성공신화를 절정으로 끌어올린 차는 1976년 데뷔한 어코드(Accord). 어코드는 데뷔 이후 7차례 풀 모델 체인지를 거치며 140개 나라에서 1천220만 대나 팔린 장수모델이다. 1989∼91년에는 미국 승용차 시장의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1978년에는 고성능 스페셜티카 프렐류드(Prelude), 1985년 레전드(Legend)를 내놓았고, 1987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네바퀴조향장치’(4WS)를 양산차에 달았다. 레전드는 1994년 대우가 만든 아카디아의 베이스가 된 모델이다. 혼다는 미국 고급차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1986년 일본 메이커로는 처음으로 독립 브랜드 어큐라(Acura)를 설립하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 혼다는 RV로 눈을 돌렸다. 가장 먼저 등장한 차는 1994년 선보인 미니밴 오디세이(Odyssey). 실용성이 높아 미국 시장에서 크라이슬러 캐러밴, 기아 카니발(현지명 세도나)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오디세이가 데뷔한 이듬해 나온 CR-V는 뛰어난 스타일과 성능으로 전세계에서 180만 대나 팔려 도시형 컴팩트 SUV의 표준 모델로 자리 잡았다. 10월 국내에 들어온 모델은 2005년형. 2002년 6월 SUV 파일럿(Pilot)과 같은 해 12월, 픽업트럭 및 SUV의 장점을 결합시킨 엘리먼트(Element)를 미국 시장에 내보냈다. 1990년대는 혼다의 여러 가지 신기록과 새로운 기술이 봇물처럼 쏟아진 시기다. 1992년, 모터사이클 수퍼 컵은 데뷔 이래 2천만 대가 만들어져 단일 모델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생산대수를 기록했다. 1995년에는 시빅이 1천만 대 생산을 돌파했고, 모터사이클은 1997년 1억 대를 돌파했다. 지난해 혼다가 만든 자동차 누계는 5천만 대를 넘어섰고, 2002년 범용 엔진 생산실적 역시 5천만 대를 기록했다. 특히 2001년에는 모터사이클 로드레이스 세계 그랑프리 500승을 돌파해 모터사이클 본가의 자존심을 지켰다. 15년 동안 미국 J. D. 파워 소비자만족도 1위 혼다가 발표한 신기술도 항상 화젯거리가 되었다. 핵심기술은 1988년 개발된 가변 밸브타이밍 및 리프트 전환장치(VTEC:Variable valve Timing and lift Electronic Control). VTEC은 흡배기 밸브를 작동시키는 캠을 저속용과 고속용 2개로 나누어 엔진의 효율성과 성능을 높인다. 이 기술은 혼다 엔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1996년과 97년 각각 발표된 전기차(EV)와 무공해차(ZLEV) 기술은 시작일 뿐이었다. 1998년에는 충격에서 생기는 힘을 줄이기 위한 충돌안전기술인 ‘중력가속도 제어기술’(G-CON:G-force Control Technology)을 개발했고, 1999년에는 첫 하이브리드카 인사이트(Insight)를 선보였다. 2000년에는 사람처럼 계단을 오를 수 있는 인간형 로봇 아시모(ASIMO)를 개발해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지난해에는 여객기용 터보팬 엔진을 개발해 시험비행에 성공했다. 이에 앞선 2002년에는 FCX가 미국에서 팔 수 있는 첫 번째 연료전지차로 공식승인 받았다. 혼다의 야심은 모터스포츠에도 미쳐 1964년 F1 출전계획 발표와 함께 독일에서 열린 그랑프리에 처음 뛰어들었다. 당시 혼다는 첫 F1 머신인 ‘RA271’을 세 차례 투입했지만 경험과 기술부족으로 리타이어하고 말았다. 혼다의 저력은 1965년 멕시코에서 열린 F1 그랑프리에서 나타났다. 당시 8전으로 치러진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때부터 모터스포츠는 혼다 기술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고, 1980년대 말 정상팀인 윌리엄즈와 맥라렌에 엔진을 공급하게 되었다. 혼다는 1989∼91년, F1 드라이버즈 챔피언 및 컨스트럭터스 챔피언을 3년 연속 석권했다. F1에서 오랫동안 독주하던 혼다는 1993년 철수한 뒤 미국 인디카 레이스에서 뛰고 있다. 1995년 혼다가 인디카 시리즈에 우승했을 때 세계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시빅과 어코드를 통해 20여 년간 혼다의 기술력이 입증되었으며 1993년에는 태양전지차 ‘드림’이 월드 솔라 챌린지에서 우승해 혼다의 저력을 확인시켰다. 혼다를 무한한 잠재력과 능력을 지닌 메이커로 인정해야 하는 이유는 혼다 소이치로의 후예들이 ‘고객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점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까지 15년간 미국 J. D. 파워가 조사한 소비자 만족도 1위에 비석처럼 얹혀 있던 메이커가 바로 혼다다.
한국 자동차시장 재도약의 해 되돌아본 카 라이프 2.. 2004-11-12
2002년은 월드컵의 뜨거운 감동이 온 나라를 휘감았던 한해였다. 축구경기가 열린 경기장은 물론 서울시청 앞 광장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붉은 옷을 입은 국민들이 “대∼한민국”을 목 터져라 외쳤고, 이에 화답하듯 한국 대표팀은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4강에 오르는 신화를 창조했다. 당시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물론 대표팀을 이끈 히딩크 감독도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월드컵의 감동은 자동차 관련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2002년 7월, 월드컵 때 보여준 국민화합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2002년 6월 20일까지의 도로교통법 위반자에 대해 벌점을 없애주는 대사면을 단행했다. 또한 집행중인 면허정지처분을 없던 일로 하고 면허가 이미 취소된 사람은 다시 딸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중앙선 침범, 음주운전, 각종 교통법규 위반 등으로 부과된 벌금이나 범칙금, 과태료 등은 사면 대상에서 제외했다. 새 법인 GM대우, 의욕적으로 판매 시작 배기가스 규제 강화로 디젤차 허용 논란 지난 2001년 GM과 양해각서(MOU)를 맺었던 대우차 채권단은 2002년 4월 GM과 신설 법인 설립을 위한 본계약을 체결했고, 뒤이어 10월 GM대우가 공식 출범했다. 닉 라일리 GM대우 사장은 10월 28일 GM대우 출범식에서 “대우차는 뛰어난 품질을 가지고도 대우 이미지와 회사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시장점유율이 낮았다”고 분석하고 몇 가지 비전을 내놓았다. 그는 GM대우차 성공을 위한 세 가지 전략으로 ①한국 시장에서의 입지 확보 ②세계 수준의 기술을 바탕으로 한 자동차 디자인 개발 및 제조 ③GM그룹의 유통망, 브랜드 및 기술 이용 등을 내세웠다. GM대우는 출범 직후 L6 매그너스 2.5와 누비라 후속모델로 개발하던 J-200을 라세티라는 이름으로 선보이며 본격적인 시장공략에 나섰다. 배기가스 규제기준 강화로 인한 디젤차 생산 허용 논란은 일년 내내 계속되었다. 환경부는 2000년 7월 대기환경보전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 예고해 2002년 7월부터 배기가스 규제기준을 강화할 예정이었다. 새로운 시행규칙에 따르면 현대 싼타페·트라제 XG, 기아 카렌스 등 이전의 ‘7인승 다목적 승합차’는 ‘승용’으로 분류되어 휘발유 엔진을 얹은 승용 세단 수준으로 배기가스를 낮추지 않으면 판매할 수 없었다. 그러나 쌍용 무쏘·렉스턴, 현대 테라칸·갤로퍼, 기아 쏘렌토·스포티지는 프레임을 가진 4WD로 승용차와 다르다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현대와 기아는 환경부가 대기환경보전법 시행규칙을 입법 예고한 2000년 7월 이전에 이미 개발한 차들에 대해서 강화된 배출가스 기준 적용을 미뤄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아가 2002년 3월말 카렌스Ⅱ 디젤을 선보이자 메이커와 환경부의 갈등은 더욱 커졌다. 기아가 선보인 카렌스Ⅱ 디젤은 7월부터 적용할 배기가스 규제치를 넘어선 디젤 엔진을 얹고 있었다. 또한 랜드로버코리아와 주한 영국대사관도 2002년 5월 “랜드로버의 SUV 디스커버리와 프리랜더가 7월부터 승용차로 분류되어 팔 수 없게 되었다”며 외교통상부에 이의를 제기했다. 반발이 거세자 환경부는 5월 14일 디젤 엔진을 얹을 수 있는 다목적차의 기준을 ‘프레임이 있고, 4WD 또는 차동제한장치(LSD)가 있는 차’에서 ‘프레임, 4WD, LSD 가운데 하나가 있는 차’로 바꾸기로 했다. 새로운 기준에 따라 현대 싼타페·트라제 XG와 랜드로버 디스커버리·프리랜더는 계속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환경운동연합이 중심이 된 39개 시민·환경단체가 ‘디젤차의 배기가스를 엄격하게 규제하라’며 반발했다. 이후 정부와 메이커, 시민단체 대표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경유차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위원회’가 만들어져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6월 14일 1차 합의서가 만들어졌다. 합의서는 ‘업체마다 배출할 수 있는 배기가스 총량을 허용하고, 이를 벗어날 때만 문제삼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현대는 싼타페를 계속 생산하는 대신 트라제 XG 7인승을 7월 1일부터 생산 중단하고, 기아는 카렌스Ⅱ를 연말까지 생산하되 배출가스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중단하기로 했다. 또 25만여 대에 달하는 구형 디젤차의 대기오염물질 배출을 줄이기 위해 기아 스포티지와 레토나, 현대 갤로퍼 등 세 모델을 일찍 단종하기로 합의했다. 무쏘 스포츠, 데뷔 초기 부처간 이견으로 혼란 제조물책임법으로 소비자의 권익 크게 높아져 9월 6일 국내 첫 스포츠 유틸리트 트럭(SUT)으로 선보인 쌍용 무쏘 스포츠를 둘러싼 형식승인 논란도 2002년 하반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무쏘 스포츠는 새차발표 직후 계약대수가 1만9천여 대에 이를 만큼 큰 관심을 모았지만, 9월 27일 출고가 시작되자 국세청과 재정경제부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무쏘 스포츠는 이미 건설교통부로부터 화물차로 형식승인을 받았지만 재정경제부가 “승용석이 화물칸보다 크기 때문에 사람 수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차”라는 이유를 들어 무쏘 스포츠를 승용차로 판정했다. 결국 무쏘 스포츠는 자동차관리법상 화물차(건설교통부)로 분류되어 자동차세와 등록세는 화물차 기준으로 내고, 차를 살 때는 승용차 특소세를 내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무쏘 스포츠로 시작된 SUT의 형식승인 문제는 미국과의 통상마찰로 번질 조짐까지 보였다. 무쏘 스포츠보다 조금 늦은 2002년 11월 5인승 픽업트럭 다코타를 선보인 크라이슬러 역시 SUT의 특소세 면제가 절실하던 참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외교통상부에 특소세 면제를 요청한데 이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한·미 통상회의’에서는 특소세 문제를 정식 의제로 삼기로 했다. 다급해진 재정경제부는 결국 11월 22일 무쏘 스포츠를 다시금 화물차로 분류했고, 정부의 결정이 혼선을 빗는 동안 무쏘 스포츠를 산 1천782명은 1인당 평균 350만 원씩 특소세를 더 내야 했다. 한편 2000년 9월 공식 출범한 르노삼성은 출범 2년만인 2002년 월 판매대수 1만 대를 넘어섰다. 또한 SM5는 월 평균 7천 대 이상 팔리면서 모델별 내수시장 점유율에서 1위인 현대 뉴 EF 쏘나타(8.3%)에 이어 7.3%를 차지하는 인기를 얻었다. 특히 2002년 6월 SM520의 판매대수는 8천644대를 기록해 6천419대에 그친 현대 뉴 EF 쏘나타를 추월, 중형차시장 1위에 오르기도 했다. 2002년 ‘제조물책임법’의 시행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제조물책임법은 당시 전세계 30여 개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소비자 보호법 가운데 하나로, 소비자가 물건을 산 뒤 그 제품의 결함 때문에 생명이나 신체 또는 재산상의 손해를 입었을 때 그 제품을 제조 또는 가공했거나 수입한 업체가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따라서 자동차의 결함으로 일어난 교통사고 운전자는 피해 상황만 입증해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02년에는 수입차시장이 크게 성장했다. 수입차 판매대수가 10월말 이미 1만 대를 넘어섰고, 판매액도 1조 원을 돌파했다. BMW와 렉서스가 나란히 판매 1, 2위를 차지했고, 특히 1대 값이 1억5천950만 원인 BMW 745Li는 10월말 656대나 팔려 전체 판매액 1천46억 원을 기록했다. 단일 모델 판매로는 처음으로 1천억 원을 넘어선 것이다. 국제통일재단에 속한 평화자동차는 2002년 4월 북한 남포공단에 자동차공장을 세워 남북 화해 분위기를 북돋웠다. 평화자동차는 남포공장에서 피아트 시에나를 조립생산해 북한의 관용차 등으로 판매한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2002년에는 8월말까지 한시적으로 내린 특소세 여파로 내수판매가 늘어났고, 경찰청은 2003년부터 신고보상금제 폐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국내 첫 국제규격 모터스포츠 경기장인 ‘태백준용서키트’가 문을 열어 국내 모터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했고, 스카니아·볼보 트럭에 이어 독일 만(MAN) 트럭이 국내에 상륙해 본격적인 수입트럭 경쟁을 예고했다.
푸조 407의 어제와 오늘 ①HISTORY - 랠리.. 2004-11-12
사막의 라이언’ 푸조는 힘차고 강렬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는 WRC와 파리-다카르 랠리에서 푸조가 거둔 수많은 승리의 결과물이다. 푸조는 메이커 설립 초창기부터 레이스에 적극 출전했다. 1894년 파리-루앙 경주와 1895년 프랑스자동차클럽이 주최한 사상 첫 자동차경주 파리-보르도 왕복 레이스에서 모두 우승한 주역이 바로 푸조다. 그리고 80년대 소형차 205 T16과 중형차 405 T16이 파리-다카르 랠리에서 연승한 후 ‘사막의 라이온’이라는 닉네임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터프한 이미지의 주역이 평범한 소형차와 중형차라는 사실은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다. 푸조는 메르세데스 벤츠 다음으로 긴 역사를 지닌 자동차 메이커다. 1810년 기계제품을 만드는 회사로 출발했고, 창업자의 손자인 아르망 푸조(Armand Peugeot)는 1888년 스몰레가 설계한 증기기관을 얹은 3륜차의 제작에 들어가 1889년 완성했다. 이때부터가 자동차 메이커 푸조의 시작이다. 아르망 푸조는 2년 뒤 다임러 엔진을 얹은 1호차(1891년)를 만들고 1896년에 푸조 브랜드를 정식으로 등록한다. 2기통 565cc 3.3마력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16km를 낸 푸조 1호차는 프랑스차의 원조로 꼽힌다. 당시 푸조는 자동차 모델을 타입으로 구분했는데, 가장 유명했던 차는 타입39였다. 이 차는 앞선 메커니즘인 4기통 1천42cc 엔진과 4단 기어를 얹었지만 생산대수가 100대에 미치지 못했다. 타입39는 현재 프랑스의 가장 희귀한 차로 대접받으면서 엄청나게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 다음에 등장한 인기차는 타입69였다. 1905년부터 1913년까지 생산된 이 차는 베베(아기)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푸조는 승용차를 만들지 않고 군용차 생산에 전력을 다했다. 당시 푸조가 생산한 기관총을 얹은 장갑차는 전쟁에서 맹위를 떨쳤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0년대에 접어들어 승용차 생산에 주력한 푸조는 1929년 파리 오토살롱에 201을 선보이면서 본격적인 현대식 자동차의 생산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 후 데뷔한 301은 201과 함께 자동차 메이커 푸조의 이름을 한껏 드높였고, 프랑스와 푸조를 대표하는 중형세단 4시리즈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34년이다. 401과 402(1934∼1940년) 1934년 푸조는 6기통 엔진을 얹은 601과 함께 401을 선보였다. 세단, 해치백, 카브리올레, 쿠페+카브리올레(이클립스), 로드스터 등 다양한 가지치기 모델이 등장했지만 401은 먼저 나온 201의 큰 인기에 눌려 1934년부터 1935년까지 1만3천545대가 생산되는데 그쳤다. 푸조 201이 1937년 9월 생산을 접을 때까지 14만2천 대나 생산된 것에 비하면 초라한 실적이었다. 1935년 푸조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공기역학적인 유선형 디자인을 쓴 402를 내놓았다. 2.0X 엔진을 얹은 402는 부드러운 곡선의 라디에이터 그릴을 달고 헤드램프를 그릴 안쪽에 넣은 독특한 스타일이 돋보였다. 402부터 푸조는 차 이름 가운데 0을 넣는 전통의 세 자리 수 이름을 전 모델에 쓰기 시작했다. 402는 401보다 모델 가짓수가 줄었지만 판매실적은 좋았다. 특히 이클립스는 세단보다 훨씬 우아한 뒷모습으로 인기가 높았다. 402는 2차대전으로 1940년 생산을 중단할 때까지 15만2천240대가 생산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푸조 공장은 독일군이 점령했고 연합군의 폭격을 받는 비운도 겪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푸조는 1948년 파리 오토살롱에 203을 선보였다. 203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푸조의 제2 전성기를 이끈다. 203은 단종된 60년까지 68만 대나 팔려나갔다. 403(1955∼1965년) 푸조는 이태리의 천재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피닌파리나와 손을 잡으면서 큰 변혁을 맞이한다. 1955년 등장한 푸조 403은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한 푸조의 첫차로, 이때부터 푸조가 오늘날까지 쓰고 있는 사자 엠블럼이 등장했다. 403은 4기통 1천468cc 58마력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136km의 성능을 냈다. 사파리 랠리 등에 출전해 내구성을 인정받았고 판매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세단을 비롯해 3도어 카브리올레, 3도어 상용차, 왜건인 5도어 패밀리카 등 다양한 모델이 나왔고 1965년까지 68만5천828대가 팔리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404(1960∼1978년) 1960년 5월 선보인 404는 이전의 유선형 디자인에서 벗어나 직선을 강조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404의 디자인 역시 피닌파리나의 작품. 404는 역대 푸조 중형차 가운데 가장 다양한 가지치기 모델이 나왔다. 4도어 세단을 비롯해 5도어 왜건, 5도어 패밀리카, 3도어 쿠페, 카브리올레는 물론 3도어 상용차와 2도어 픽업까지 갖추었다. 404는 전작인 403보다도 큰 인기를 누리면서 푸조 중형차 중 처음으로 판매대수 100만 대를 넘겼고, 1978년 단종될 때까지 모두 121만4천121대가 생산되었다. 60년대 푸조는 404를 앞세워 랠리의 강자로도 군림했다. 404는 69년 나온 504에게 랠리카 자리를 물려주었고, 504는 78년까지 세계 랠리 무대를 휩쓸다시피 했다. 한편 푸조는 74년 경영난에 빠진 시트로앵을 인수했다. 여세를 몰아 78년 유럽 크라이슬러와 심카를 합병하고, 이후 영국 선빔소속의 탈보트와 프랑스 탈보, 마트라까지 인수하기에 이른다. 몸집이 커진 푸조는 80년 그룹 이름을 PSA(푸조-시트로앵)로 바꾸며 전열을 재정비했다. PSA그룹은 르노를 제치고 명실공히 프랑스를 대표하는 자동차 메이커로 떠올랐다. 405(1987∼1995년) 1979년 로봇을 이용한 현대적 생산 시스템을 도입한 푸조는 205와 309에 이어 1987년 405를 내놓았다. 404가 단종된 지 9년만의 일이다. 1987년 제52회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첫선을 보인 405는 ‘실용적인 중형차’라는 평가를 받으며 유럽인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1988년 유럽 최우수 자동차에 선정된 것을 비롯해 89년 미국 최우수 수입차, 90년 일본 최우수 수입차 등에 연달아 올라 주가를 높였고, 판매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푸조 405의 디자인 역시 피닌파리나가 맡아 공기저항계수 0.29∼0.31의 매끈한 보디를 자랑했다. 심장은 1.4X 에서 1.9X까지 5종류의 휘발유 엔진을 얹었다. 이들 가운데 최고급 모델인 405 MI16은 1.9X DOHC 160마력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220km를 기록했다. 405는 또한 ‘지옥의 사투’로 불리는 파리-다카르 랠리에서 아랫급 205와 함께 3연승 신화를 일구어 ‘사막의 라이온’이라는 새 닉네임의 주인공이 되었다. 4도어 세단과 5도어 왜건 두 가지 모델로 나왔고 95년 단종될 때까지 282만1천28대가 팔리는 빅히트를 쳤다. 92년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405는 섀시의 강화로 안전성이 더욱 높아졌다. 리어램프를 새롭게 디자인하고 로고를 크롬으로 바꾸었다. 이때 리어램프 사이의 모델 이름을 없앴고 트렁크 모서리 디자인을 달리해 짐을 싣고 내리기가 편해졌다. 405 MI16에는 2.0X DOHC 터보 196마력 엔진을 얹어 고성능 이미지를 뽐냈다. 푸조 405는 90년 국내에도 소개되어 100대 이상 팔리는 성공을 거두었다. 수입차 가운데 처음으로 교통부 성능검사(연간 100대 이상 판매된 차가 받는 검사)를 받은 차가 바로 405다. 406(1995∼2004년) 1995년 405가 데뷔한 지 8년만에 발표된 406은 605와 405를 섞어 놓은 듯한 직선 위주의 스타일이지만 한결 세련된 인상이었다. 차체가 커져 공기저항계수는 0.29에서 0.30으로 높아졌다. 차체에 고강도 아연도금 강판을 써 무게가 405보다 200kg쯤 무거워진 대신 강성이 좋아졌다. 엔진은 직렬 4기통 1.8X DOHC 112마력을 기본으로 2.0X DOHC 135마력, V6 2.4X 170마력을 얹었다. 유럽 시장을 위해 1.9X 92마력 디젤 터보를 기본으로 2.1X 디젤 터보 110마력 엔진도 준비했다. 트랜스미션은 5단 수동을 기본으로 ZF 4단 AT를 더했다. 앞 서스펜션은 405의 것을 개선한 스트럿을 쓰고 뒤에는 멀티 링크를 달았다. 보쉬제 ABS와 듀얼 에어백, 안전벨트 프리텐셔너 등의 풍부한 안전장비를 갖추고 사이드 임팩트빔과 충격 흡수패드로 안전성을 높였다. 406은 1999년 한 차례 페이스리프트를 거쳤다. 4도어 세단을 기본으로 2도어 쿠페, 5도어 왜건, 5도어 패밀리 왜건 등 다양한 가지치기 모델이 나왔고 2003년 말까지 163만8천145대(쿠페 제외)가 판매되었다. 407(2004∼현재) 올해 3월 제네바 오토살롱에서 데뷔한 푸조 407은 이전보다 더 미끈하고 날렵해진 스타일과 9개의 에어백 등 한결 높아진 안전성을 자랑한다. 엔진은 모두 6가지. 1.8X DOHC 117마력을 시작으로 2.0X 136마력과 2.2X 160마력, V6 3.0X 211마력 등 휘발유 엔진 4가지와 푸조가 자랑하는 직분사 디젤(HDi) 1.6X DOHC 터보 110마력, 2.0X 136마력 등을 얹는다. 한편 올해 제네바 오토살롱에서는 4도어 세단과 함께 왜건인 407SW도 등장했다. 407SW는 미니밴처럼 두툼하게 만들어 뒤로 기울인 D필러와 유리 지붕이 독특하다. 레일이 깔린 넉넉한 트렁크, 평평하게 접히는 시트, 스키를 실을 수 있는 긴 터널 등 활용도 높은 개성만점 실내가 돋보인다. 407에 이어 407SW가 11월 국내 시판을 기다리고 있고, 디젤 모델은 내년에 수입된다.
MERCEDES BENZ G-CLASS ①역사 -.. 2004-10-27
메르세데스 벤츠의 숨겨진 보물 G클래스가 데뷔 25주년을 맞았다. G클래스는 고전 감각에 첨단 메커니즘이 적절하게 어울린 SUV로, 시류에 쉽게 영합하지 않는 독특한 매력 덕분에 광적인 매니아들을 몰고 다닌다. G바겐(독일어로 차)으로 잘 알려져 있는 G클래스는 험로를 헤치는 것이 주특기인 정통 4WD 오프로더. G클래스에서 G는 독일어 Gelande(겔란데)의 약자로 지형, 지대라는 뜻이다. 1972년의 잉태부터 79년 양산차 데뷔, 그 후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펼쳐 보인, G클래스의 활약상을 살펴보자. 그만이 발산하는 카리스마 1972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운터튀르크하임(Stuttgart-Unterturkheim)에 자리한 다임러 벤츠와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본부를 둔 슈타이어 다임러 푸흐(Steyr-Daimler-Puch)는 네 바퀴를 굴리는 오프로더를 개발하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출발은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네바퀴굴림 오프로더라는 세그먼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개발팀은 어떠한 지형에서도 굴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오프로더를 만들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다양한 안전장비와 편안한 승차감, 레저용으로도 손색이 없는, 다목적 크로스컨트리 모델을 목표로 했다. 두 회사의 4WD 전문가들이 개발팀에 합류해 전천후 오프로더의 밑그림을 그렸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하플링거(Hafilnger)와 핀츠가우어(Pinzgauer)로 알려진 오프로더가 있었기 때문에 4WD 기술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디자인은 슈투트가르트에서 주로 담당했고, 그라츠에서 근무하는 엔지니어들은 보디 구조와 트랜스퍼 케이스, 오프로드 테스트를 책임졌다. 위험지대에서 쉽게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날렵한 몸매를 갖추어야 한다는 전제조건 아래 오프로더로서의 강건함과 독창적인 캐릭터를 담고자 했다. 일직선으로 뻗은 라인, 완벽한 좌우 밸런스, 짧은 앞뒤 오버행 등은 이런 컨셉트를 추구한 결과다. 실용성을 높이고 쇳덩어리처럼 단단한 느낌이 들도록 스타일링은 사각형으로 정했다. 1973년 많은 스케치를 거쳐 초안이 나왔고 곧이어 실물 크기의 나무 모델이 완성되었다. 첫 번째 프로토타입은 1974년 발표되었다(당시 최고기밀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는 뜻에서 ‘U-BOOT’라고 이름 지었다). 벤츠의 디자인 책임자 안드레아스 랑겐벡은 “당시에 계획한 모델은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획기적인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 모토였다”며 “험로를 헤치기 적합하도록 디자인했고 유보트라는 이름에 걸맞는 카리스마를 담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한다. 인테리어는 심플하게 하되, 모든 장치는 운전자가 조작하기 쉬운 위치에 배열했다. 보디는 극한의 오프로드에서 결코 주눅들지 않는 늠름한 자태를 보인다. 온로드에서는 정확한 핸들링을 제공할 수 있도록 프레임 구조를 채택하고, 리지드 액슬과 코일 스프링 서스펜션을 썼다. 엔지니어들은 프로토타입을 발표하기 전 최대 적재량을 어느 정도로 할지 많은 고민하면서 테스트 주행에 들어갔다. 시험차는 주행거리 수만km를 돌파했고 북아프리카의 사막, 아틀라스 마운틴의 자갈밭, 극점의 추위도 견뎌냈다. 차체 부식 테스트 지역으로 잘 알려진 사라하 ‘초틀 제리드’도 문제되지 않았다. 1974년까지 새로운 모델에 대한 생산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개발작업은 꾸준히 진행되었지만 새차 공장을 세우는 일에 차질이 생겼던 것. 하지만 시장조사 결과 새차는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고, 군용차로 쓸 수 있는 가능성도 점쳐졌다. 1975년 다임러 벤츠의 대주주였던 이란의 국왕은 군용차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면서 2만 대를 주문했지만 양산차가 나오기 전에 혁명이 일어나 취소되었다. 그 후 독일의 경찰과 관공서, 아르헨티나와 노르웨이 경찰, 그리고 스위스 군에서 주문이 잇따랐다. 1979년 G클래스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다임러 벤츠와 슈타이어가 공동개발에 서명을 한 지 7년 만이다. 차체는 카브리올레와 왜건 두 가지. 여기에 숏보디와 롱보디를 마련하고 군용차를 위해 3도어와 5도어의 롱보디도 만들었다. 엔진은 4기통 2.3X 90마력과 6기통 2.8X 150마력의 휘발유 두 가지와 2.4X 150마력, 5기통 3.0X 88마력 디젤 엔진 두 가지를 얹었다. 예나 지금이나 G클래스의 강인함은 초강성 프레임과 엄청난 횡력 및 비틀림 강성을 뒷받침해 주는 크로스멤버에서 나온다. 시대에 따라 장비는 바뀌지만 크로스컨트리 성능을 떨어뜨리는 손질은 하지 않았다. 오프로드의 야성미와 접지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코일 리지드 서스펜션이 변하지 않는 이유다. 최저지상고 210mm, 접근각 36도, 이탈각 27도에 등판각 38.6도, 경사각 28.4도는 오프로드에서 강한 돌파력을 이끌어주는 비결이다. 2000년까지 G클래스에 달린 엠블럼은 두 가지.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그리고 공산권 연합인 코메콘(COMECON)에서는 푸흐 엠블럼, 그 외 지역에서는 메르세데스의 별 모양 엠블럼을 썼다. G클래스는 4단 수동기어를 얹고 나왔지만 얼마 안되어 280GE와 300D에 옵션으로 4단 AT가 마련되었다. 주행 중 굴림방식을 바꿀 수 있으며 앞뒤에 디퍼렌셜 록과 센터 디퍼렌셜을 갖추는 등 장비가 점차 세련되어진다. AT 모델과 에어컨은 1981년 나왔다. 1982년에는 2.3X 엔진을 기계식 연료분사 방식으로 교체해 최고출력을 125마력으로 끌어올렸다. 시트를 고급스럽게 만들고 보조 히팅, 경합금 휠 등으로 스타일링에도 변화를 주었다. 198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벤츠는 G클래스 10주년을 맞이해 300대 한정생산 모델 230GE를 발표했다. 인테리어를 우드 그레인으로 장식했고 센터콘솔에 변화를 주었으며 2열 벤치형 시트는 더욱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다듬었다. 1990년에 앞뒤, 그리고 센터 디퍼렌셜을 갖춘 풀타임 4WD를 얹고 옵션으로 ABS를 마련했다. 당시 G클래스 버전 중 가장 힘센 170마력의 300GE 모델이 나왔다. 1996년에는 뮌헨 오프로드 쇼에서 카브리올레 소프트톱 5단 AT 모델을 선보인다. 이로써 다양한 기능을 겸비한 차로 인정받게 된다. 군용·의전용 등 다양한 모델 출시 G클래스는 다양한 용도로 쓰였고, 모두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업무용으로 쓸 수 있게 단순화시킨 모델이 나오기도 했다. 군용차로서의 활약도 무시할 수 없다. G클래스가 명성을 얻은 데는 사실 군용차 덕을 봤다. 푸조는 프랑스 군용차(P4)를 위한 베이스로 G클래스를 사용했다. 현재 이 차는 보스니아에서 평화유지군용차로 쓰이고 있다. ‘울프’라고 불리는 독일 군용차 역시 G클래스다. 특별 버전은 경찰차, 소방차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교황의 의전용 차로 G클래스가 쓰이기도 했다. 1930년 교황 11세가 처음으로 벤츠(8기통 뉘르부르크 460 풀만 설룬, 바티칸의 교황 박물관에 전시 중)를 타기 시작했다. 1960년에는 메르세데스 300D 카브리올레, 1965년에는 600 풀만 랜드올렛, 그리고 1980년 90마력을 내는 2.3X 카뷰레터 엔진을 개조한, 폽 모빌(Pope Mobile)이라는 닉네임의 G클래스를 교황이 이용했다. 이 차는 교황을 태우는 만큼 안전성 강화에 신경을 썼다. 돔 형태로 밖이 훤히 내다보이고 8mm 두께의 방탄유리를 둘렀다. G클래스 최고급 특별 버전은 V8 5.0X 휘발유 엔진에 최고출력 296마력, 최대토크 46.5kg·m을 내는 G가드다. 말 그대로 방탄차라는 의미. 유럽 방탄차의 보호등급인 B6와 B7을 만족시킨다. B7은 총탄과 폭탄은 물론이고 독가스 등 화생방 공격에도 견딜 수 있다. G클래스는 모터스포츠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83년 재키 이크와 클로드 브래서는 280GE로 파리-다카르 랠리에 참가해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밴형으로 개조한 다음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외관을 고치고 알루미늄을 써서 무게를 최소화했다. 우에 자이쯔는 1984∼1992년 독일 챔피언십 챔피언을, 롤프 자이쯔와 하인리히 방글러는 1988∼1989년 유러피언 트라이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밖에도 많은 수상 기록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판매된 G클래스는 약 17만5천 대. 25년이라는 세월 동안 G클래스가 한결같이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브랜드에 걸맞는 제대로 된 차였기 때문이다. G클래스야말로 진짜 명품이 아닐까. G클래스 25년 연대기 1979년 이래 반세기 동안 처음의 모습을 유지해 온 G클래스가 내년 풀모델 체인지된다. 25년 역사의 흐름을 읽어 보자. 1973년 4월, 미래의 G클래스가 될, 나무 모델 완성. 1974년 프로토타입 완성, 주행 테스트 시작. 1979년 10월 왜건과 카브리올레 차체로 데뷔. 1980년 숏보디 및 롱보디 밴 추가. 1981년 첫 번째 페이스리프트 : AT와 에어컨, 적재함에 마주보는 벤치형 시트, 보조 연료탱크, 헤드램프 보호대, 하드톱 카브리올레 모델 추가. 색상 22가지로 늘어남. 1982년 230G의 모델명을 230GE로 변경. 레카로 시트, 보조히터, 경합금 휠 옵션. 1983년 두 번째 페이스리프트. 4가지의 메탈릭 컬러 더해짐. 230GE에 4단 AT 옵션. 280GE 파리-다카르 랠리 우승. 1985년 세 번째 페이스리프트. 디퍼렌셜 록 기본장비. 1986년 5만 번째 모델 생산. 1987년 네 번째 페이스리프트. 파워 윈도, 자동 안테나, 짐 커버 및 그물망. 84마력 250GD 모델 추가. 1988년 앞좌석 암레스트 등장. 1989년 G클래스 10주년 기념으로 230GE 300대 한정생산 결정. 풀타임 4WD에 ABS를 갖춘 463 시리즈 등장. 1990년 230GE, 300GE, 250GD, 300GD 모델의 463 시리즈 런칭. 1992년 10만 대 생산 돌파. 녹다운 방식으로 그리스에서 생산. 461시리즈 런칭. 2.5X 디젤을 2.9X로 대체. 463 모델 페이스리프트. 1993년 500대 한정생산 V8 241마력의 500GE 등장. G230, G350에 터보 디젤 명칭 사용. 1994년 463 시리즈 두 번째 페이스리프트. 앞바퀴 디스크 브레이크, 운전석 에어백. 1995년 모든 차에 중앙집중식 잠금장치 마련. 1996년 헤드램프 클리닝 시스템과 크루즈 컨트롤, 동승석 에어백. 1997년 G320의 V6를 직렬 6기통으로 바꿈. 1998년 네 번째 페이스리프트. 1999년 400대 한정모델 G500 클래식 발표. V8 354마력의 G55 AMG 등장. G500 가드 3가지 버전. 2000년 V8 250마력의 G400 CDI. V8의 크롬 라디에이터 그릴과 범퍼 일체형 보디 컬러 . 2001년 ESP, 전자식 트랙션 시스템 4ETS 달림. G클래스 미국 런칭. 2002년 4기통 156마력의 G270 CDI 데뷔. 2004년 V8 476마력 수퍼차저 엔진의 뉴 G55 AMG 등장. 메르세데스 벤츠, 미국 시장 뒤흔들 RV라인업 갖춘다 메르세데스 벤츠가 정통 오프로더 G클래스를 중심으로 RV 라인업을 강화하고 있다. 첫 번째 G클래스가 내년 1월 새롭게 바뀐다. 그동안 4번의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면서 성능을 보강하고 편의성을 높였지만 풀모델 체인지는 처음이다. M클래스도 풀모델 체인지된다. M클래스는 1997년 벤츠의 첫 미국 생산모델로 화려하게 등장했고, 2001년 북미 오토쇼에서 마이너 체인지 모델이 발표되었다. 신형은 숏보디와 롱보디 2가지 스타일로 선보인다. 여기에 더해 벤츠는 내년 R클래스를 가세시킬 예정. BMW X5와 포르쉐 카이엔, 폭스바겐 투아렉 등 라이벌들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어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2002년 국제 북미 오토쇼를 통해 선보인 비전 GST(Grand Sports Tourer) 컨셉트카를 바탕으로 해 왜건과 세단, SUV와 미니밴의 성격을 모은 크로스오버카다. 양산형은 2년 전 선보인 컨셉트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타원을 반쯤 세워 놓은 듯한 헤드램프가 독특하고 차체는 각을 없애고 부드럽게 다듬었다. 여기에 V6 직분사 방식의 커먼레일 디젤 엔진, V8 360마력과 V12 500마력의 휘발유 엔진이 올라간다. 벤츠는 내년 초 북미 오토쇼에서 M클래스와 R클래스를 공개한 뒤 미국 앨라배마주 투스칼루자 공장에서 생산한다.
키워드로 읽는 골프 30년사 ①키워드로 보는 30년 2004-10-25
1974년 5월. 공랭식 비틀의 후속 모델로 등장한 골프는 폭스바겐이 기대했던 이상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유럽 컴팩트카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 갔다. 핫 해치의 전령사 GTI, 동급 최초의 카브리올레가 선 보인 것도 이 때의 일. 10년 동안 680만여 대가 생산된 골프는 83년 가을 폭스바겐 자체 디자인의 2세대에 바통을 넘겼다 조르제토 쥬지아로 이탈디자인의 수장인 조르제토 쥬지아로는 74년 5월 첫선 보인 초대 골프의 디자이너로 지난 99년 말에는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로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FF 방식의 2박스 소형차는 딱히 새롭다거나 혁신적인 제안이 아니었지만 쥬지아로는 시대의 공기를 머금은 탁월한 감성으로 당시 오일쇼크에 신음하던 유럽인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직선 위주의 간결하고 세련된 디자인은 완벽에 가까운 패키징, 빈틈없는 주행성능과 함께여서 더욱 돋보였다. 5세대까지 진화한 골프의 30년 역사 속에 쥬지아로작(作) 골프는 1세대뿐. 하지만 급하게 떨어지는 해치 윈도와 가벼운 L자를 그리는 두터운 C필러, 길게 뻗은 루프 등 당시 쥬지아로가 그려낸 특징적인 요소는 변함없이 후속작에 전해지며 ‘골프 스타일’로 굳어졌다. GTI 75년 가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처음 공개된 고성능 골프의 트림명. ‘GT’와 ‘i’는 각각 그랜드 투어링과 전자제어식 인젝터(injecter)의 머릿글자다. 한 엔지니어의 개인적인 실험제작 차였던 GTI는 R&D센터의 총책임자 에른스트 피알라 박사의 눈에 띄어 75년 5월 정식 프로젝트로 승인되었다. 당초 그룹Ⅰ 호몰로게이션을 위한 5천 대 한정판으로 76년 6월 생산을 시작한 초대 골프 GTI는 고급형인 LS용 1.6X의 압축비를 8.2에서 9.5로 높이고 카뷰레터 대신 보쉬 K제트로닉 전자제어식 인젝터를 얹어 110마력의 출력을 냈다. 시속 182km까지 내달리며 독일 아우토반을 뒤흔든 폭스바겐 해치백은 이내 젊은이들의 ‘컬트카’로 떠올랐고 28년여 동안 150만 대 정도 팔리며 원조를 뛰어넘는 ‘또 하나의 골프’로 자리잡았다. 86년 1.8X 4밸브 헤드의 GTI 16V(139마력)가 선보였고 90년에는 1.8X 수퍼차저 169마력과 싱크로 4WD 등 랠리카 베이스의 한정판 모델 GTI G60이 소개되기도 했다. 4세대에 이르러 1.8X 터보 150마력(최종 180마력)으로 힘을 보탠 GTI는 올 가을 2.0X FSI 직분사 터보 200마력과 DSG 6단 세미 AT 조합의 5세대로 진화한다. 카브리올레 79년 처음 소개된 카브리올레는 골프의 인기에 날개를 달아준 모델. 당시 컴팩트카 중 지붕을 완전히 걷어낼 수 있는 4인승 컨버터블은 골프가 유일했다. 제타(골프 세단)를 베이스로 한 골프 카브리올레는 카르만 기아, 비틀 카브리올레 등 폭스바겐 오픈카를 전담해온 독일 코치빌더 카르만이 제작했다. 초대 골프 카브리올레는 1·2세대를 아울러 91년까지 생산되었고, 두 번째 시리즈는 3세대 골프를 토대로 93년 첫선을 보였다. 3세대 골프 카브리오는 98년 등장했다. 신형(4세대, 1997년)의 모습을 띄고 있었지만 실상은 4세대의 얼굴만을 물려받은 페이스리프트 모델에 더 가까웠다. 진정한 3세대 토플리스 골프는 2006년 초 선보일 예정. 5세대 골프 플랫폼을 베이스로 리트랙터블 하드톱을 더한 쿠페-카브리올레로 올해 제네바 오토살롱에 공개된 컨셉트C에서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제타·캐디 제타는 골프를 토대로 한 노치백 세단으로 7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첫선을 보였다. 해치백의 두 배 가까운 트렁크 용량(630X)을 지녀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84년의 제타Ⅱ는 골프에 트렁크룸을 덧붙인 듯한 어색한 스타일을 매끄럽게 가다듬고 차별화된 인테리어, 충실한 편의장비로 골프과 파사트의 틈새를 메워갔다. 92년, 98년에 두 번의 풀 모델 체인지를 거치며 벤토, 보라로 이름을 바꾸어갔지만 판매대수가 가장 많은 미국에서는 여전히 제타라는 이름으로 팔린다. 캐디(1981년)는 폭스바겐 아메리카가 미국 시장을 겨냥해 개발·생산한 픽업 트럭. 상용 밴으로 발전한 유럽형 캐디는 골프V, 투란과 50% 정도의 부품을 공유한 신형이 나와 지난해부터 생산에 들어갔다. 볼프스부르크? 골프스부르크! 독일 볼프스부르크는 폭스바겐 본사와 주요 생산라인, 아우토슈타트(산하 메이커별 테마관, 박물관 등이 자리한 테마파크) 등이 들어선 ‘폭스바겐 마을’이다. 1937년 문연 볼프스부르크는 공랭식 비틀에 이어 76년 100만 대째 골프를 생산하며 유럽 최대 규모의 공장으로 발돋움했다. 지난 83년에는 2세대 골프를 위한 첨단 자동화 설비와 방청처리 공정을 갖춘 ‘홀 54’를 새롭게 마련, 생산효율과 품질경쟁력을 더욱 높여갔다. 볼프스부르크는 5세대 탄생 및 골프 30주년을 자축하는 의미로 지난해 8월부터 한동안 ‘골프스부르크’(Golfsburg)라 불리기도 했다. 압트 압트 슈포르츠라인(ABT Sportsline)은 폭스바겐 전문 공인 튜너로 아우디, 세아트, 슈코다 등 폭스바겐 그룹의 계열 모델을 함께 다루고 있다. 압트는 특히 레이싱 활동을 중요하게 여겨 지난 98년부터는 폭스바겐 모터 스포츠 팀에서 ‘VW 루포컵’과 ‘VW 비틀컵’을 넘겨받아 운영하고 있고, 아우디를 대신해 독일 DTM에도 출전하고 있다. VS4(2003년)는 5세대를 바탕으로 한 압트의 최신판 골프. 높이조절식 스포츠 댐퍼와 235/35 ZR19 컨티스포트컨택트 타이어, 8.5×19J의 SP1 경합금 휠로 탄탄한 핸들링을 뒷받침하고, 출력(140마력)을 170마력으로 끌어올린 2.0X 직분사 디젤 터보(TDI)를 얹는다. Von Golf zu Golf(1984~present) 초대 모델이 닦은 탄탄한 기반 속에 골프는 유럽을 뛰어넘어 세계의 베스트셀러로 도약해갔다. 폭스바겐의 자체 디자인 팀이 그려낸 2세대부터 실루엣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차체 크기와 품질, 명성은 나날이 커져갔다. 1983~91년 10년을 살아간 2세대는 매년 6만3천여 대가 팔려나갔고 91년 선보인 3세대 골프는 그 해 ‘유럽 카 오브 더 이어’를 수상했다 파이크스 피크 미국 힐 클라임 경주인 ‘파이크스 피크 인터내셔널 힐 클라임’ 출전을 위해 제작된 프로토타입. 폭스바겐은 1986년 랠리카 메커니즘에 더블 엔진을 얹은 골프 파이크스 피크로 이 행사에 참가했지만 정상까지 차지하지는 못했다. 드라이버는 같은 해 골프 랠리카로 WRC 그룹A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차지한 스웨덴의 케네스 에릭손. 폭스바겐은 그룹B 랠리 호몰로게이션을 위해 제타 베이스의 트윈 엔진 4WD 프로토타입 ‘비모타’를 이미 81년에 선보인 바 있다. GTI용 1.6X 110마력을 얹은 첫 비모타는 그룹B 계획 무산과 함께 사라졌지만 트윈 엔진에 의한 4WD 차 개발은 이후 2세대 시로코로 이어졌다. 시로코 프로토타입은 외팅거가 손본 1.8X DOHC 141마력을 보네트와 미드십에 얹고 282마력의 합계출력을 냈다. 트랜스미션은 3단 AT. 앞뒤 구동력은 시프트레버 옆에 마련된 레버로 조절했다. 비모타와 시로코 트윈 엔진은 비록 상용화되지 못했지만 폭스바겐의 승용 4WD 싱크로(1986년)가 탄생하는 토대가 되었다. 싱크로·4모션 폭스바겐 최초의 승용 4WD 모델은 아우디 콰트로를 베이스로 84년 선보인 파사트 바리안트 싱크로(Syncro). 베벨 기어 방식의 파사트 싱크로와 달리 이듬해 소개된 골프 싱크로는 비모타, 시로코 등을 통해 실험한 유체봉입형 비스커스 커플링 센터 디퍼렌셜을 발전시킨 폭스바겐 최초의 독자개발 4WD 구동계였다. 골프를 통해 상용화된 폭스바겐 풀타임 4WD는 98년 한층 진보된 기술을 담고 4모션(4Motion)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스웨덴 할덱스사와 공동개발한 시스템으로 비스커스 커플링에 전자제어 프로그램을 접목, 한결 능동적인 구동력 배분이 가능해졌다. 5세대 골프에 마련된 4모션은 전자제어식 습식 다판 클러치를 중심으로 ABS와 트랙션 컨트롤(ASR), 전자식 디퍼렌셜 록(DES), ESP 등을 조합한 2세대 메커니즘. 메커니컬 구조의 토센 기어로 항상 50:50의 비율을 유지하는 아우디 콰트로와 달리 프론트·리어 액슬의 토크 분배는 90:10이 기본. VR6·VR5·R32 80년대 중반 이후 오펠 아스트라, 푸조 305 등의 라이벌과 숨막히는 경쟁을 벌여온 골프는 91년 3세대로 풀 모델 체인지하며 크기를 키우고 동급 모델로는 처음 6기통 엔진(VR6)을 마련하며 선두 지키기에 나섰다. VR은 독일어 ‘V Reihenmotor’의 줄임말로 ‘V형 직렬 엔진’이라는 의미. VR6은 두 개의 3기통 엔진을 뱅크각 15°로 나란히 배치해 컴팩트카의 다기통화를 실현했다. 골프 VR6은 V6 2.8X 174마력으로 GTI와는 또 다른 여유 있는 크루징을 자랑했고 99년 4밸브 헤드를 얹어 204마력까지 힘을 보탰다. VR5는 VR6에서 실린더 하나를 잘라내 배기량을 2.3X로 줄인 변칙 유닛. 4세대(1997년)에 처음 쓰인 VR5는 가변 밸브 타이밍 기구와 흡기 매니폴드를 더해 170마력의 출력을 낸다. ‘핫해치의 전령사’ GTI를 능가하는 최강의 골프 R32는 4번째 시리즈가 세대교체를 준비하던 2002년 중반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V6 3.2X DOHC 241마력 엔진과 6단 MT, 풀타임 4WD 4모션을 조합해 최고시속 245km, 0→시속 100km 가속 6.4초의 강력한 달리기를 자랑했다. 23,000,000, more and more 데뷔 2년 반 만에 100만 대가 생산된 골프는 그 뒤로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78년 6월 누적생산대수 200만 대를 돌파했다. 골프의 기록행진은 이후로도 계속되어 14년째인 88년에는 1천만 대, 2000년에는 2천만 대에 이르렀다. 2년 뒤인 2002년 6월 25일 2천151만7천415대째가 생산되며 비틀이 지닌 단일차종 세계 최다생산 기록을 뛰어넘은 골프는 지난 8월 27일 볼프스부르크 공장에서 2천300만 대째가 출고되며 자신이 세운 기록을 스스로 갱신해가고 있다. 2천300만 대의 골프는 일렬로 세우면 지구를 두 바퀴 반이나 감을 수 있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규모. 골프의 시들지 않는 인기는 탄탄한 기본 바탕에 폭스바겐의 공격적인 마케팅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동급 모델로는 처음 쓰인 디젤과 V6 엔진, 핫해치 붐을 일으킨 GTI와 산뜻한 카브리올레 등 골프가 도전한 새로운 개념과 기술은 곧 유럽 컴팩트카 시장의 유행이며 기준이 되어갔다. 골프의 미래에 대한 해답은 2세대의 개발 테마인 “Von Golf zu Golf”(From Golf to Golf)에서 찾을 수 있을 듯. ‘골프다운 모습을 지닌 더 나은 골프’로의 진화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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