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제국 꿈에 갇힌 소수민족 위구르
2008-09-14  |   8,321 읽음
올림픽을 전후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곳이 티벳이다. 성화 봉송 길에 티벳 독립을 외치며 성화를 끄려는 사람들은 티벳뿐만이 아니라 티벳에 동조하는 외국인도 부지기수였다. 지구촌 방방곡곡에 티벳은 그들의 독립의지를 인상 깊게 심어놓았다.

중국의 골칫거리는 티벳만이 아니다. 중국 서북부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도 티벳 못지않은 독립 열기로 중국에 저항하고 있다. 티벳 위에 붙어 있는 위구르 자치구의 지하 독립단체는 티벳과의 연계 움직임마저 보여 중국 공안당국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위구르 자치구의 지하 독립운동은 중국 당국에 의해 언론에 철저히 통제되어 외부에 노출되지 않다가 인터넷에 의해 하나 둘 들통이 나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서만도 수도인 우루무치에서 지난 1월 독립운동원 두 명이 사살당하고, 3월 초엔 중국 남방 항공 폭파 시도가 적발되었다. 또 3월 하순엔 허톈 시에서 대규모 군중시위가 열렸고 서북부 지역에서는 독립운동원 51명이 체포되었다. 올림픽이 임박한 7월엔 우루무치와 북경에서 4차례의 테러가 있었으며, 8월 4일엔 카스에서 폭탄 테러로 중국 무장경찰 16명이 죽고 16명이 부상당해 세계의 이목이 티벳에서 위구르 자치구로 옮겨졌다.

지하 단체들의 지속적 독립 투쟁
티벳과 위구르 자치구의 독립 투쟁 양상은 판이한 면이 두 가지다. 첫째, 티벳엔 비록 인도에 망명 중이긴 하지만 ‘달라이 라마’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는 반면 위구르 자치구엔 전력을 응집시킬 지도자가 없다. 분산된 많은 지하 독립단체들은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아 저항의지를 바깥세상에 알릴 수 있는 목소리가 약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위구르가 티벳보다 훨씬 유리한 면으로, 티벳 밖의 티벳인들은 대부분 중국 영토 안에 있어 중국의 통제를 받아 티벳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되지 못하지만 1,700만 위구르 자치구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위구르족은 중국이 통제할 수 없는 접경한 외국 즉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 거주하고 있어 안팎 연계 투쟁이 가능하다. 신장 위구르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지하 단체들은 이슬람 국가인 주변국에 거주하는 동족들과 연계해 국경 주변 산악지역에 은신하며 세력을 키워 끊임없이 중국정부를 위협해 왔다.

250만 명에 불과한 티벳족이 인근 쓰촨, 간쑤, 칭하이 성 등에 분산 거주하는 데 비해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대부분 밀집 거주하는 위구르족은 이슬람을 믿으며 단결력도 강하다. 중앙아시아의 회교권 국가들의 이름은 모두가 ‘스탄’으로 끝난다. ‘스탄’은 ‘땅’이란 뜻이다. ‘키르기스스탄’은 ‘키르기스인들의 땅’이란 뜻이고,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간 사람들의 땅’이란 뜻이다. 위구르인만이 ‘위구르스탄’이라는 나라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신장 위구르 자치주’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예속되어 있다.

중국은 왜 인종도 판이하고 종교, 전통, 문화도 전혀 다른 신장 위구르 자치주를 움켜쥐고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위구르 지역은 지하광물자원이 무진장인 데다 북부 텐샨 산맥에서 남쪽 쿤룬 산맥까지 펼쳐진 타림 분지엔 100억 톤이 넘는 원유와 8조㎥의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어 ‘제2의 중동’으로 불린다. 이 지역의 석유와 천연가스는 서쪽의 에너지를 동쪽에 보낸다는 중국의 국가전략 ‘서기동수’(西氣東輸)에 따라 4,000km의 파이프를 타고 멀리 상하이까지 공급된다.

또 위구르 지역은 러시아, 인도, 파키스탄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안보상 요충지이기도 하다. 외신들이 전하는 중국 정부의 위구르 민족의 종교, 문화 통제 정책은 일본 강점기 때 한민족에게 가해진 ‘민족 말살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위구르인은 대부분 무슬림이지만, 위구르 남성은 18세가 되기 전엔 모스크에 갈 수 없다. 공무원도 모스크 출입이 금지되고 교사는 수염도 기를 수 없으며,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히잡’(이슬람 여성의 머리 두건)을 쓰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미국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CSM) 보도에 따르면 위구르인은 주로 단순 육체노동을 하고 있고 기업을 운영하거나 관청에서 일하는 것은 모두 한족의 몫이다. 위구르인의 90%가 극빈층이라는 통계도 있다.

고선지 장군의 실크로드 정벌전의 중심 ‘쿠차’
위구르 자치구의 도시 ‘쿠차’에는 위구르족 왕조 12대손인 ‘다우드 메수트’(Daoud Mehsut 82) 왕이 산다. 그는 한때 위구르인에게 존경받는 왕이었으나 지금은 중국 돈 200위안(약 2만8,000원)을 내고 티켓을 사면 만날 수 있는 ‘관광상품’이다. 다우드 메수트 왕은 자치구 중부 지역에 있는 인구 7만 정도의 소도시 ‘쿠차’(龜玆) 지역을 지배해온 위구르족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가운데, 천산 산맥 아래 자리잡은 쿠차는 우리와도 인연이 있는 곳이다.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는 망국 고구려인의 저항 운동을 막기 위해 20여만 명을 중국의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고사계(高舍鷄)이고 그의 아들이 그 유명한 고선지(高仙芝) 장군이다.

중국의 황금기는 당나라고 당나라의 꽃은 현종 때다. 고선지 장군은 안서부도호로 쿠차를 베이스캠프 삼아 흉노, 돌궐, 토번 족들을 물리치는 데 맹활약했다. 현종의 명을 받고 고선지 장군이 서역 정벌에 나섰을 때 서역의 정세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아라비아반도에서 알라에 대한 믿음 아래에 불같이 일어난 사라센 제국이 파미르 고원을 향해 크게 세력을 내뻗으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서돌궐이 중간에 끼어 있어 직접 부딪칠 때가 없었으나, 이제는 파미르 고원을 무대로 당나라와 세력을 판가름하게 된 것이었다.

고선지 장군은 사라센 제국과 맞서기 전에 우선 토번족과 사라센 제국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다. 토번족은 당나라의 서쪽 진출에 늘 위협을 주던 티벳 고원의 억센 종족이었는데, 이들은 한때 천산북로(天山北路)로 진출하려다 실패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을 넘어 아무르 강의 상류 등지로 나아가 사라센 제국과 손을 잡고 당나라의 세력을 꺾으려 하였고, 당의 동맹국이었던 소발률(小勃律)국에는 공주를 시집보내 동맹을 맺었다. 이리하여 소발률국을 비롯한 20여 나라가 당의 세력권에서 이탈한 상황이었다.

현종 6년인 서기 747년 3월, 행영절도사가 된 고선지 장군은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가는 족족 적을 물리쳐 서역을 평정하고 쿠차로 돌아왔다. 현종 10년엔 7만의 군대를 이끌고 천산 산맥을 넘어 탈라스에서 사라센제국과 운명의 한판승부를 펼쳤지만 고선지 장군은 처참한 패배로 퇴각했고, 당은 더 이상 서진하지 못했다. 그 후 현종 14년, 안록산의 난 때 고선지 장군은 어이없는 누명을 쓰고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지금, 위구르족의 시각으로 볼 때 당시의 고선지 장군은 현재의 중국 통치자에 다름 아니다. 고선지도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땅 위에 말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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