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 속으로 - 양평
2009-05-17  |   12,602 읽음
남한강과 북한강이 기나긴 물길을 따라 만나는 지점 두물머리. 하늘도, 산도, 나무도, 바람도 모두 호수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무겁게 내려앉은 안개 사이로 언뜻 빛이 틈을 보일 때면 객들의 탄성은 막힘이 없다. 스산한 호반과, 당장에라도 바람을 타고 섬으로 떠날 것 같은 황포돛배, 모진 세월을 다 겪은 듯한 고목, 강 위의 작은 섬, 구름 가득 담은 잿빛 하늘…….
한 폭의 수묵화 같은 풍경이 보는 이의 마음에 먹처럼 번진다.

저물녘의 세미원, 몽롱한 석등 불빛을 지나 기와 담을 끼고 연밭을 따라 걷노라면 한 시인의 글이 발길을 따라 맴돈다. ‘연꽃들이 지천을 이루는 용늪을 지나, 정겨운 물오리떼 사랑놀이에 여념이 없는, 아침 안개 자욱한 한 폭의 대형 수묵화……. 이따금 삼등 열차가 지나가는 무심한 마을 양수리로 오시게. 그까짓 사는 일, 한 점 이슬 명예나 지위 다 버리고
그냥 맨몸으로 오시게…….’ -박문재의 ‘양수리로 오시게’ 중-

수종사 삼정헌에 앉아 차 한 잔 마시고 있노라면 어느덧 그곳은 외지인들의 사랑방이 되고 여기저기서 다각거리는 다기 소리와 즐거운 담소가 피어난다. 차 한 잔 그윽하게 마시고 나면 호수와 강의 빛은 조금 전과는 다르게 변해 있다. 그래서일까. 객들의 흔적 한 자 한 자가 모두 그럴 듯한 시가 되어 있는 까닭은. 수종사를 찾으면 누구라도 시인이 된다.

남한강과 나란히 뻗은 6번 국도에 몸을 싣고 내달리다 보면 시간은 어느덧 봄과 여름 사이에 와 있다. 흐드러진 개나리는 몇 남지 않은 노란 잎을 단단히 붙잡고 봄을 보내지 않고, 초록이 무성한 나무는 여름맞이를 벌써 끝냈다. 하늘은 금세 여름을 쏟아낼 듯 높고 푸르고, 고운 바람은 아직도 봄이다. 한 계절을 보내고 다른 계절을 맞이하는 그 사잇길, 아파트 사이로 난 가로수에서는 보지 못하는 풍경들이다.

세상은 빠르게 흐르지만 북한강은 언제나 여유롭다. 강은 산을 품고 산은
강을 품고, 선녀의 치마폭 같은 아침녘 안개는 다시 강과 산을 품는
그 너그러움. 카메라에 온전하게 담아내기엔, 자연의 거대함 앞에 인간의 한계가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쉼 없이 가다가도 몇 번이고 차를 세우는 이유……. 자연이 주는 이러한 깨달음 때문이다.

경기도 오지의 끝이자 산악철도 구간의 1차 정점이기도 한 구둔역. 지금은 인적이 드물지만 약 10년 전만 해도 이곳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덜컹거리는 비둘기호를 타고 새벽부터 나물 팔러 가는 할머니, 통학하는 학생들, 서울 사람 다된 깍쟁이 아가씨, 어김없이 역을 지키던 백구,
이제는 모두가 가물가물한 옛사랑의 추억 같은 곳……. 바람도 빛도 소리도 함께 낡아 버린 구둔역은 이제 ‘등록문화재 제296호ㆍ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만 그 가치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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