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이니와 혁명 30년 - IRAN
2009-03-14  |   12,451 읽음

마오쩌둥을 빼고 중국을 얘기할 수 없듯이 호메이니를 빼고 이란을 말할 수 없다. 마오쩌둥은 문화혁명이라는 광란의 소용돌이에 나라를 빠뜨려 10년을 잃어버리게 한 치명적 오류를 범했지만 중국 인민들은 지금도 천안문에 마오쩌둥의 대형초상화를 걸어두고 그를 우러러보고 있다. 호메이니도 이란-이라크 전으로 수많은 젊은이를 전장으로 내몰아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국고를 바닥내 아직도 그때 진 빚을 갚지 못해 그 많은 산유량에도 나라 살림이 말이 아니다. 하지만 죽은 호메이니의 권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이란 방방곡곡 발길 닿는 곳마다 호메이니 초상화가 도배돼 있다.

1900년 이란 테헤란 남서쪽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호메이니는 소년기에 이라크의 신학교로 유학가 이슬람 율법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1930년대 후반 친미 정책을 펼치는 팔레비 왕의 종교세력 탄압에 저항, 1941년에 ‘비밀의 폭로’란 책을 저술해 왕정을 부정하고 외국의 침략을 비난했다. 50년대 후반에는 이슬람 시아파 최고 성직인 아야톨라 칭호를 받고 반정부 선봉장에 선다. 팔레비 왕의 서구화와 근대화에 반대하는 데모를 하다가 63년에 체포돼 터키로 추방된 그는 65년 어린 시절 공부했던 제2의 고향이자 이란과 인접한 이라크로 들어갔다. 1971년, 팔레비 왕이 이란의 고도 페르세폴리스에서 이란 건국 2,500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르려 하자 호메이니는 이라크에서 이란의 반정부세력을 원격 조종, 그 행사를 반대하는 사주를 했다.

이에 팔레비 왕과 미국은 이라크에 압력을 가해 호메이니는 다시 프랑스로 떠난다. 훗날 이란-이라크전의 앙심이 잉태된 배경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이란혁명을 일으켜 마침내 팔레비 정권을 굴복시켰다. 1979년 2월 호메이니는 이란으로 날아와 100만 인파가 열광하는 공항에 도착, 테헤란에 입성했다. 혁명정부를 수립하고 수상을 임명한 그는 새 헌법을 제정, 이란이 이슬람 공화국으로 새로 태어났음을 만방에 선포했다. 그는 이슬람 시아파의 교주로 추대되어 종교적 정치적으로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란의 두 번째 성지 ‘콤’
호메이니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면 콤(Qom)으로 가야 한다.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버스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이건 정상적인 교통 흐름일 때이고, 금요일이나 이슬람 경조 일에는 다섯 시간도 좋고 여섯 시간도 좋다. 콤은 이란에서 마샤드에 이어 두 번째 성스러운 곳이다. 이슬람은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다. 사우디를 위시한 아랍권은 다수 주류인 수니파이고 이란(아랍이 아니다)은 시아파다. 수니파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의 가르침과 행적을 따라간다면 시아파는 무하마드의 혈통을 이어간다. 이란 동북쪽에 있는 마샤드는 시아파 8대 교주이자 무하마드의 직계 후손인 이맘레자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이란 최고의 성지이고, 콤은 이맘레자의 누이이자 역시 무하마드의 피를 이어받은 파테메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1990년대로 접어들며 마샤드와 콤의 위상은 크게 엇갈린다. 마샤드는 성지로서 참배객들이 몰려든 데다 이란-이라크 전 때는 이라크에서 가장 먼 곳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전쟁을 피하려는 이란인들이 몰려와 갑자기 도시가 커졌다. 반면 인구 26만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 콤은 정치적인 힘이 실려 수도 테헤란을 리모컨으로 조종하는 혁명의 진원지가 되었다. 호메이니가 터키로 추방되기 전까지 그가 똬리를 틀고 있던 곳이 바로 이곳이며, 호메이니 사후 현재까지 이란의 최고 실력자인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집도 호메이니의 집 인근에 있다.

1963년, 호메이니가 팔레비 정권에 체포되어 터키로 추방당하기 전 그의 권위와 위상은 하늘을 찌를 듯했는데 당시 그가 살던 집은 상상 외로 초라하다. 개발이 미치지 않은 우리나라 소도시 골목길의 30~40여 평 되는 단층집, 마당 우물가엔 접시꽃이 피고 나무마루는 삐걱거리며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그런 집이다. 근년에 이곳은 성지가 되어 정부에서 대대적인 손질을 했지만 호메이니의 이름에 비해서는 여전히 초라한 모습이다.

호메이니는 추방당하기 전 이곳에서 보통사람처럼 결혼해서 부인을 두고 자식들과 함께 살았다. 그의 부인은 호메이니가 죽을 때까지 머리를 오렌지색으로 염색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이란의 여자 결혼연령을 9세로 낮추었다. 아랍에서조차 여자 결혼연령을 15세로 올리는데 그는 초등학교 3학년이면 시집을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또한 이란-이라크 전에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터에 몰아넣어 ‘천당의 지름길=순교자’라는 미명으로 죽음을 택하게 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서구인들은 그를 무서운 눈길로 보지만 이란인들은 아직도 그를 성자로 우러러 본다.

이후 천하의 팔레비 왕이 권력의 칼을 버리고 망명길에 오른 반면 팔레비에 의해 추방되었던 호메이니는 터번을 쓰고 망토를 펄럭이며 테헤란 공항에 도착, 100만 인파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고 팔레비가 놓고 간 권력의 칼을 움켜쥐었다. 호메이니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호메이니의 일생은 아마도 외부인에게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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