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다
2009-03-13  |   14,695 읽음
녹사평역
‘푸른 풀이 무성한 들판’이란 뜻의 녹사평역. 눈부신 자연 채광이 유리 돔을 통해 쏟아져 내릴 때면 이 깊은 지하 공간은 순식간에 유리 궁전이 된다. 인간이 만든 이 아름다운 건축물은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가 되고, 누군가의 결혼식장이 되기도 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한 층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볼 것이 많아 기다림이 외롭거나 지루하지 않고, 약속한 이의 서두름이 멀리서도 훤히 보이기에 조금 늦었다고 나무랄 마음도 들지 않는다. 녹사평역은 아름답고 너그러운 들판이다.

충무로역
죽어서나 들어갔던 땅 속을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한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을 문명의 혜택이다. 그 문명의 혜택은 또 다른 일상을 낳았다. 지친 하루를 접고 잠시 의자에 앉아 단꿈을 꾸고, 낯선 눈빛과 침묵의 대화를 주고받기도 하며, 정보의 조각들을 탐독하기도 한다.
역은 출발과 멈춤 사이에 존재하는 일상의 흔적이자 정보의 교환이요 사람과의 소통이다.

강남역
역 번호 222번, 1일 이용객 평균 20만 명. 대한민국의 철도역 가운데 이용객이 가장 많은 곳 강남역……. 그래서 이곳은 인적이 끊긴 고요한 역 풍경을 쉽사리 볼 수 없다.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는 스침과 기억 못할 인연들이 도시의 삭막함을 되새기게 하지만 달리 보면 이 또한 아름다운 풍경이다. 땅으로 난 문을 따라 사람들은 파도치듯 일렁이고, 젊고 힘찬 발걸음들은 음악이 되어 거리를 채운다. 출렁이는 빛을 타고 시간을 달리는 사람들……. 역(驛)의 일상이다.

종로3가역
그리스 신화 속 테세우스 왕자는 지하 미궁에 사는 괴물과 싸운 뒤 입구에 묶어놓은 실을 따라 땅 속을 빠져나왔다. 현대인에게 테세우스의 실은 ‘디지털’이다. 수많은 철로와 길이 얽힌 미로 같은 터널을 사람들은 정보를 주고받으며 유유히 빠져나온다. 이 긴 지하 터널에는 엇갈림은 있으나 유실은 없다.

구서울역
돈 벌어 오겠다며 고향을 떠나온 시골촌뜨기의 서울 상경 관문이 되었던 곳. 명절이면 밤을 새워 차표를 구하고, 사람이 많아 늘 지저분하고 부랑자의 쉼터가 되기도 했던 옛 서울역. 하지만 이별의 아쉬움과 만남의 설렘이 교차했던 낭만의 공간이자 개통 후 100년 넘게 우리 민족의 역사적 무대가 되어 왔다. 폐쇄된 이후 간간이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주로 ‘우범 지대’와 ‘노숙자 사건’ 등으로 신문에 오르내릴 뿐이다. 어느덧 우리의 기억에서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는 그곳. 벗겨지고 갈리진 벽과 깨어진 창문들, 곰팡이 슨 낡은 목재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때 서울 입성의 관문이자 동양 제2의 건물이었다는 칭호가 무색하게 느껴진다.

신서울역
세상이 변하니 역도 변한다. 사람들은 좀 더 빠르고 넓은 곳을 원했고 한곳에서 많은 것을 해결하기 바랬다. 그렇게 탄생한 지상 3층, 철골과 유리로 둘러싸인 서울역 신역사에는 지하철과 KTX, 새마을호와 무궁화호가 시종착하고 백화점과 서점, 음식점이 들어섰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서울역 광장에는 앞으로 어떤 떠남과 도착, 만남이 쌓여갈까…….

임진강역
민통선 300m 전방, 민간인 신분으로 아무런 제재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서북쪽 한계선인 임진강역.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그리움의 상징이다. 대합실 알림판에는 수천 개의 메모가 붙어 있다. 평양에 살아계실 부모형제에게 안부를 전하는 편지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의 기도들이다.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뻗어 있는 이 기찻길은 언제쯤 살아날까. 다음 역 ‘평양 209km’라는 문구에 왠지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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