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최대의 항구도시이자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관문 톈진 天津
2019-07-19  |   8,607 읽음

북방 최대의 항구도시이자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관문 톈진 天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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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풍경구는 마르코 폴로 광장을 중심으로 뻗어 나간다


북방 최대의 항구 도시 톈진은 오래전부터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는 창구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최초의 고속철이 개통된 것 역시 톈진-베이징 구간이었다. 마치 유럽 마을을 보는 것 같은 이태리 풍경구는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톈진 조약이라는 치욕적인 역사를 담고 있다. 이 밖에도 19세기 말 힘없이 휘둘려야 했던 조선의 슬픈 역사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톈진(天津: 천진)은 베이징(北京: 북경)으로 가는 길목이자 북방 최대의 항구 도시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해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이 되는 인천과 같은 도시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항상 베이징의 명성에 가려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해안가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톈진이 현재와 같이 중요한 위치로 올라선 것은 베이징의 동부 해안 방어선 군사기지 역할을 하면서부터이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빠르게 근대화가 된 도시이기도 하다. 톈진은 중국에서 제일 먼저 고속철이 건설되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개최를 일주일 앞두고 8월 1일 톈진-베이징 간 고속철이 개통되었다. 전장 113.54km에 불과한 거리였다. 톈진은 인구가 1,220만 명이고 면적은 11,916㎢로 서울의 약 20배나 되며 베이징, 상하 이, 충칭과 함께 중국의 4대 직할시 중 하나다. 톈진이 근래에 다시 주목받은 것은 2015년 8월 대형 폭발 사고 때문이다. 44명이 숨지고 520여명이 부상을 당한 대형 사고였다. 대부분 화학물질을 취급하던 창고였기 때문에 화재의 여파가 엄청났는데, 당시 폭발 규모가 TNT 환산 24톤 이상이라 사고 반경 10km 이내의 건물들이 모두 날아갔다. 대형 지진 등 자연재해에 버금가는 엄청난 규모의 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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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의 텐진의 모습. 비슷한 시기의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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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자전거 전시회가 텐진에서 열린다


자전거의 도시 톈진

중국의 근대화 시절에 모든 새로운 문물은 톈진을 거쳐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자전거도 그중 하나다. 중국은 자전거의 나라다. 한 때 끝없이 이어지는 긴 자전거의 행렬이 중국을 상징하다시피 했었다. 예전에 비해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중국은 세계 최대의 자전거 생산국이자 보유국이다. 그 대부분이 톈진에서 만들어진다. 톈진은 자전거의 도시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자전거의 50% 이상이 메이드인 톈진이다. 2018년 중국에서 생산된 자전거의 숫자는 4,038만대인데 이 중 2,192만대가 톈진에서 생산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팔리는 대부분의 자전거도 톈진에서 들어온다. 삼천리를 비롯한 한국 자전거 업체들이 톈진의 공장과 협약을 맺고 제조, 수입해서 판매한다. 한때 필자도 톈진의 한 공장에서 자전거를 만들어서 한국에 판매했었다. 3년간 팔았지만 계속되는 불량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결국 손을 들었다. 같은 공장에서 똑같은 제품을 만들지만 매번 품질이 다르다는 게 문제였다. 중국의 공장은 우리와 달리 월급제가 아닌 도급제로 운영된다. 즉, 물건을 만들어 내는 만큼 계산을 해서 돈을 주는 방식이다. 그러니 직공들은 공장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개별 사업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급이 월 6,000위안이라는 것은 이 금액을 지급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에 해당되는 일을 정기적으로 제공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공장 사장은 직공이 이 정도의 금액을 받을 수 있도록 주문을 받아 오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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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자전거 시대에서 전기 자전거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매년 톈진 전시장에서 자전거 및 전기 바이크 전시회가 열린다. 올해 주최 측의 초대를 받아 관람하러 다녀왔다. 외국인 모델까지 동원할 정도로 엄청나게 큰 규모였다. 전시회를 통해서 이젠 자전거 시대가 가고 전기 자전거가 시대가 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중국은 모든 운송 수단을 전기화하고 있다. 버스에서 택시, 오토바이, 자전거까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이미 전기 방식으로 상용화했다. 톈진 시내를 주행하는 이륜차 대부분이 전기 오토바이와 자전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충전소인데, 어느 곳에서나 충전을 할 수 있도록 중앙 정부에서 힘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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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활성화된 공유 자전거 시스템. 적절한 곳에 적당한 수량을 배치하는 것이 관건이다


중국 고속철 역사의 시작점

중국 고속철의 역사도 톈진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중국의 고속철은 세계 최고다. 2018년까지 중국 내에 깔린 고속철의 길이는 2만 7,684km에 이른다. 중국에 처음으로 고속철이 건설된 것은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2008년 개통된 톈진-베이징 구간이었다. 승용차로 2 시간 이상이 걸리던 거리를 30분 만에 주파했다. 출퇴근 시간에는 배차 간격이 10분에 지나지 않아 대단히 편리한 교통수단이다. 머지않아 중국 전역이 고속철로 연결된다. 계획된 구간을 더하면 3만8천km에 이를 계획이다. 고속철이 잘 발달한 일본이 3,031km인 것에 비하면 얼마나 큰 규모인지 가늠할 수 있다. 고속철이 중요한 교통수단인 스페인이 2,852km, 프랑스가 2,814km이고 독일이 1,620km에 불과 하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중국 고속철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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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진 교통의 중심인 텐진역


우리나라의 미세먼지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오염 물질도 많지만 북서풍을 타고 들어오는 중국 미세먼지의 영향이 더욱 크다. 베이징과 톈진의 환경 문제는 중국에서도 가장 심각하다. 때론 낮에도 100여m 앞의 물건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의 스모그에 시달린다. 톈진 시민 일부는 망사를 쓰고 다닌다. 어떤 이들은 봄에 날리는 꽃가루 때문이라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미세먼지를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폴리에스터 망사로 미세먼지를 막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경제적일 수 없겠지만 설득력이 없다. 미세먼지는 발생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무튼 얼굴에 망사를 쓰고 다니는 모습은 민망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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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진의 스모그는 베이징과 더불어 최악이다


치욕의 역사 담긴 이태리 마을

톈진을 다니다 보니 생뚱맞게 이태리 마을(意大利风景区)이 있다. 규모가 꽤 큰 것으로 보아 많은 이탈리아 사람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역사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청나라와 아편전쟁에서 승리를 한 후 홍콩을 영구 지배하고 600만 달러에 달하는 배상금을 받는다. 1842년 청나라가 영국과 맺은 굴욕적인 난징조약의 결과다. 이 조약에는 광저우, 상하이, 샤먼, 푸저우, 닝보 등 5개 항을 개항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5개 항이 개항된 이후에도 영국의 수출 물량은 늘어나지 않았다. 영국 정부에서는 개항된 항구에 자신들이 원했던 쑤저우(苏州)와 항저우(杭州)가 포함되지 않은 데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1856년 제2의 아편 전쟁의 도화선이 된 애로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작은 배는 중국인 소유였지만 선적은 홍콩이었고 선장은 영국인이었다. 청나라 정부에서 해적 혐의로 이 배의 선원들을 모두 체포하자 영국 정부는 국제법 위반이라고 항의하며 석방을 요구했다. 당시는 청나라의 체제가 거의 무너진 무렵이라 전국에서 자생적으로 마적들이 생겨나고 바다에서는 해적이 출몰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청나라가 이를 거절하자 영국은 군대를 동원해 다시 중국 전역을 공격 했다. 톈진도 그중 하나였다. 국제무대에서 서로 연합전선을 펴던 영국과 프랑스가 동맹을 맺고 중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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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프랑스군의 공격에 청나라 군대는 속수무책이었다. 이후 텐진에는 9개국의 조차지역이 설치되었다 


필자의 사무실이 있던 광저우의 산웬리(三元里)에도 당시 영국군이 진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톈진의 포대가 연합군에 저항했지만 강력한 신무기로 무장한 그들의 공세에는 맥을 추지 못했다. 이에 청나라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 러시아와 톈진 조약을 맺게 된다.

‘북경에 대사관을 연다.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을 한다. 아편무역을 합법화 한다’ 등 굴욕을 강요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오랑캐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청나라는 그동안 영국을 오랑캐로 지칭해 왔다. 그러나 후에 마음이 바뀐 청나라는 톈진 조약을 무효화하는 무모한 행동 벌이다 다시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 치욕을 당한다. 베이징 코앞까지 연합군이 들이닥 치자 결국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톈진 항을 개항하고 톈진 조약의 2배에 달하는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톈진 조약 이후 톈진 면적의 8배에 달하는, 9개국을 위한 조차 지역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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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떠올리게 하는 텐진 이태리 풍경구 


이태리 풍경구는 중국이 겪은 아픈 역사의 흔적이다. 1902년 펠레타인이라는 해병대 중위를 책임자로 임명하여 이 지역을 설계했다. 민족로와 자유도가 교차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장방형으로 퍼져 나가며 당시 최고의 건설기술로 완전한 도로망과 공용시설을 만들 었다. 청나라의 척박한 도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고급스러웠다. 중앙에는 마르코 폴로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는 이탈리아 출신의 상인으로 원나라 시대에 중국 전역을 여행하고 또 관직에도 올랐던 인물이다. 이태리 풍경구를 돌다 보면 유럽 도시에 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유럽식 주택과 건물이 줄지어 서 있고 역사가 오래된 호텔도 보인다. 당시 주택은 이탈리아식 가든 빌라 형태로 지어졌다. 200여 채가 넘는 주택은 100년이 넘었으면서도 여전히 고급스러운 분위 기를 풍긴다. 많은 주택이 식당과 카페로 영업 중이고 일부는 여전히 주민이 살고 있다. 길 양쪽으로 멋진 식당과 카페, 기념품 판매점이 영업 중이다. 간판을 보니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 많다. 중국에서도 이탈리아 음식은 고급으로 인정받는다. 이태리 풍경구에는 2개의 스타벅스가 있는데, 미국과 무역전쟁 중인 상황에서도 성업 중이다. 미국 정부가 화웨이에 대한 제재를 가하면서 아이폰과 미국 자동차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얼마 전 우리가 겪었던 사드 사태와 비슷한 양상이다. 무역 전쟁의 여파가 길어지면 KFC나 맥도날드, 스타벅스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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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풍경구의 스타벅스. 미국과의 무역분쟁 중이지만 성업 중이다


큰 북으로 위험을 알리던 구로우

톈진은 구로우(鼓楼: 고루)를 중심으로 뻗어져 나가는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고루는 고대 모든 큰 도시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고루는 고대로부터 큰 북을 놓아둔 건물로 외적이 침입했을 때 신속하게 알리는 역할을 해왔다. 또한 중요한 예식에도 사용되었다. 고루 위에 올라서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신분증만 있으면 무료입장이 가능하고, 외국인의 경우 여권을 보여주면 된다. 여권을 호텔에 두고 나와서 어쩔 수 없이 중국 운전 면허증을 내보였더니 위아래로 쳐다본다. 중국에는 한족과 더불어 55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신분증은 물론 운전 면허증에는 민족이 표시되는데 외국인의 경우에는 해당 국가가 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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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시대의 텐진 고루의 모습. 고루는 위험이 발생하면 큰 북으로 이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고루 안에 들어서니 1404년에 건설되었다는 표시가 있다. 톈진의 역사와 함께 한 건물이다. 1층에는 톈진의 고대와 근대사에 관한 자료 실이 있다. 역사에서 배웠던 인물들이 눈에 띈다. 격변기에 등장한 이홍장(李鸿章), 원세개(袁世凯: 위안스카이) 등등의 인물들이 소개 되어 있다. 2층에는 주디(朱棣: 영락제)의 초상화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주디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의 넷째 아들이다. 주원장은 몽골이 지배하던 원나라를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인 명을 건설했다. 주원장이 죽고 장자인 의문 태자가 병사하자 그의 아들인 주윤원(朱允玟)이 대를 이었다. 그의 삼촌인 주디는 베이징을 일대로 하는 연(燕)나라의 왕으로서 북방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주윤원은 주디의 군사력이 워낙 막강해서 언제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다. 그래서 자객을 보내기도 하고 독을 이용해서 죽이려 했다. 여러 번의 위기를 넘긴 주디는 군사를 이끌고 난징으로 진격해 황제의 자리에 앉는다. 경우는 조금 틀리지만 조선 시대 조카를 물리치고 왕위에 오를 세조가 떠오른다. 이때 전 황제를 따르던 신하들은 물론 그들의 친척까지 철저하게 살육한다. 본래 삼족을 멸하는 것이 중국 역사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주디는 반대파의 외족의 십족까지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워낙 많은 사람을 죽였기에 난징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불편했다. 또한 북방에서 몽골족의 침입이 그치지 않았기에 명의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원나라가 쓰던 황궁 자리에 새로운 궁을 건설한다. 이것이 바로 자금성이다. 이후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로서의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고루의 한쪽에는 영국군이 톈진을 공격하는 사진과 그림이 있다. 그림 속 청나라 군인은 용감하게 싸우는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신식 무기로 무장한 영국과 프랑스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마치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 외국군이 강화도를 공격하던 우리의 개화기 시절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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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진은 고루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펼쳐져 나가는 구조다


먹거리 가득한 남시식품가

톈진에는 특별한 먹을거리가 많다. 톈진 고유의 음식에는 고부리(狗不理), 마화(麻花) 등이 유명하다. 상하이에 샤오룽바오(小笼包)가 있다면 톈진에는 고부리가 있다. 중국의 유명한 음식에는 항상 스토리가 있다. 중국음식점에 가면 자주 먹는 마파두부도 그렇고 비곗살만 있는 동파육에도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부리는 만두의 한 종류인데 상하이의 샤오룽바오와 함께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마화는 꽈배기와 같은 모양의 과자인데 톈진의 꽈배기가 전국적으로 제일 유명하다. 톈진의 먹거리를 모아 놓은 곳이 남시식품가(南市食 品街)다. 이곳에는 톈진 고유의 다양한 먹거리와 함께 새롭게 개발된 퓨전식 음식도 선보이고 있다. 톈진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이라면 꼭들려야할 명소다. 중국의 식생활 문화도 많이 바뀌어 남시식품가에는 맥도날드도 성업 중이다. 신세대는 전통 음식보다 서구식 패스트 푸드에 더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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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텐진 고문화거리 


고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고문화거리가 있다. 이곳은 100여 년 전 톈진의 소금장수들이 살던 곳이다. 당시 소금상은 중국에서도 알부 자에 속했다. 고문화 거리는 우리의 인사동 같은 분위기로 길 양쪽에 세워진 2층 건물이 중국다움을 한껏 뽐낸다. 이들 가게에서는 골동 품과 전통 의류, 붓 등 중국의 역사를 담은 물건들이 팔리고 있다. 한편으로 이곳에 널린 골동품이 과연 진짜일까 하는 의심부터 든다. 귀한 골동품을 아무렇게나 길바닥에 늘어놓은 데다 중국엔 워낙 가짜가 많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사진도 고문화 거리를 장식하고 있다. 마오저뚱의 사진은 중국의 문화상품을 파는 곳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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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진 고문화 거리에는 많은 골동품과 고서를 볼수 있다 


19세기 말 조선의 아픈 역사의 흔적

톈진 시내를 그리 넓지 않은 하천인 하이허(海河)가 관통한다. 하이허에는 아름다운 다리가 여럿 있고 그 밑으로는 유람선이 유유히 지나 간다. 강 양쪽으로는 수려하고 높은 건물들이 톈진의 위용을 과시한다. 톈진의 야경은 하이허의 유람선에서 보는 것이 제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유럽풍으로 지어진 진완광창(津湾广场)은 웅장하면서도 수려해서 중국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진완광창 인근에 15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리순더(利顺德) 호텔이 있다. 이 호텔은 당시의 최고 권력자들이 묵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와 중화제국을 세워 황제에 등극했던 원세계,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등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 호텔 앞에 유람선이 드나드는 선착장이 있다. 흥선 대원권이 청나라 원세계 일행에게 끌려 왔던 곳이다. 이곳에 와서 직접 아픈 우리 역사의 현장을 보니 마음이 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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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진을 들리면 꼭 먹어야 한다는 구부리 


19세기 말 조선은 대단히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으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와 수구파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고종이 친정을 선언한 후 뒷전으로 밀려나 절치부심하던 대원군에게 이를 회복할 기회가 왔으니 바로 임오군란 이다. 구식군대에 대한 부당한 대우 때문에 일어난 사태의 불똥은 민비와 일본에 대한 배척 운동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호시탐탐 복귀를 꾀하던 대원군은 겉으로는 달래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충동질했다. 이에 힘을 얻은 군민들은 일본 교관과 군인들을 살해하고 민비를 제거하려 창덕궁에 진입하기도 했다. 민비는 궁녀 복장으로 궁을 탈출해서 위기를 벗어난다. 사태의 위중함을 알아차린 고종이 수습을 위해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다시 전권을 잡은 대원군은 재빠르게 반란을 진정시키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이에 위협을 느낀 민씨 일파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사태는 이상한 국면으로 전개된다.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해 대원군을 납치한후 중국으로 압송했다. 일본은 조선 정부를 강력하게 압박해 주모자를 처벌하고 손해배상을 하라는 제물포 조약을 맺게 했다. 중국 톈진 으로 끌려온 대원군은 이홍장의 심문을 받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홍장과 대면한 대원군은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에게 내려진 판결은 영구 귀국 불가였다.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청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하고 또 한 나라 왕의 아버지를 납치해서 재판을 하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대원군이 중국으로 끌려와서 내린 곳이 바로 이곳이라니 가슴이 저려온다. 힘없는 나라가 겪는 처절한 설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이후 대원군의 아들 고종은 청을 배척하고 러시아와 밀월관계를 유지한다.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고종과 민비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원군을 풀어 주었다. 중국에 구금당한지 3년 만의 일이었다. 또한 이 선착장은 광복 후 우리나라 임시정부 요원들이 인천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요원들은 배를 타기 전 알몸으로 검사를 받고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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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가계들이 늘어서 있는 남시식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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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진 시내를 관통하는 하이허에는 항상 유람선이 떠 다닌다


저운언라이 기념관을 보려는 끝없는 행렬

톈진 시민들의 휴식처인 수상 공원은 엄청나게 크다. 수상공원에서 나오면 바로 저우언라이 (周恩来) 기념관이 있다.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선 관람객이 얼마나 많은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저우언라이는 장쑤성 회이안 출신이다. 이곳에 그의 기념관이 있다는 게 의아 하지만 저우언라이가 톈진 난카이(南开) 대학 출신임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중국인들에게 영원한 총리로 인식되는 저우언라 이는 마오쩌둥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초대 총리로 1949년부터 1976년까지 2인자 역을 도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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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허를 중심으로 높은 빌딩들이 줄지어 서있다 


저우언라이는 톈진 난카이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청강을 하기도 했다. 1919년 반제국주의 운동인 5.4 운동에 참여했다가 옥살이를 했다. 1921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파리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다 공산주의에 심취하면서 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리고 마오쩌둥과 함께 중국 공산혁명에 나서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이어간다. 초기 공산당 조직은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장제스의 국민당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 지하조직을 통해 지역적인 봉기를 일으키며 국민당의 근간을 흔드는 전략을 구사했다. 북벌을 완료한 장제스는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1933년 50만 대군과 최신 무기를 동원해 공산당 근거지인 장시성 루이진을 공격했다. 위기를 직감한 공산당은 11개 성과 24개의 강, 천개가 넘는 산을 넘으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탈출을 감행하는데, 이른바 ‘대장정’이다. 처음 출발을 할 때 8만이던 인원이 산시성 옌안에 도착했을 때는 8천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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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는 중국인들에게 영원한 총리로 인식되고 있다 


이 시기에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2가지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첫째는 마오쩌둥을 공산당 지도자로 추대하여 대장 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두 번째는 시안사건이 발생했을 때 장쉐량과 협상을 통해 국공합작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공산당은 궤멸할 뻔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시안사건이란 동북군 지휘관인 장쉐량이 국민당 지도자인 장제스를 납치한 사건을 말한다. 장제스는 연안에 남아있는 공산당에 대공세를 펼칠 국민당을 격려하기 위해 시안에 도착했다. 8천에 불과한 공산당은 풍전 등화와 같은 신세였다. 그러나 역사는 마오쩌둥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일본군에게 아버지를 잃었던 장쉐량은 일본에 대해 불타는 적개심 으로 장제스를 납치하고 우선적으로 공산당과 힘을 합쳐 일본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제스는 장쉐량의 압력에 굴복하여 어쩔수 없이 협력하기로 한다. 그때 공산당 대표로 나선 것이 저우언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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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입구에 있는 저우언라이와 부인 등잉차오의 동상 


저우언라이는 국민당과 합작을 통해 1945년 일본군의 항복을 얻어낸다. 그 후 마오쩌둥과 함께 장제스를 몰아내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 국을 수립한다. 마오쩌둥은 지금도 중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지만 저우언라이는 그에 비해 낮게 평가되는 듯하다. 마오쩌둥이 엄하고 강한 이미지인 반면 저우언라이는 인자하고 포용심이 많은 귀공자 스타일의 지도자라는 이미지다. 저우언라이 기념관은 1998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개관했다. 1층 홀 전면에는 저우언라이와 그의 부인 덩잉차오(邓颖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을 찾는 많은 중국인이 꽃을 들고 와 헌화를 한다. 사진으로 본 젊은 저우언라이는 참으로 미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톈진역에서 자원봉사 하는 공산당원

톈진도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지하철이 있다. 교통의 중심인 톈진역에 내리니 역사가 너무 커서 어디가 어디인지 출구를 찾기가 어렵다. 중국 지하철 역사 대부분은 방공호로 사용하기 위해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역 안에서 출구를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매야 한다. 그런 이들을 위해서 자원봉사자가 안내를 한다. 대부분 공산당원이다. 중국의 공산당원은 9천만 명에 이른다. 공산당원이 되기 위해서는 학업 성적이 상위 10% 내에 들어야 하고 위법 사실이 없어야 한다. 또한 자원봉사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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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진 전역 기념관에는 매번 많은 군인들이 참배를 하러 온다 


톈진 역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이들은 ‘우리는 레이펑(雷锋)입니다’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있다. 레이펑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말단 병으로 남을 위해 헌신적인 희생을 아끼지 않는 전설적인 영웅으로 그를 기리는 레이펑의 날(3월 5일)이 있을 정도다. 중국 정부는 사회 적으로 큰 사건이 발생을 하면 인민들의 불만을 희석하기 위해 영웅을 만들어 낸다. 2011년 저장성 원저우에서 고속열차 추돌로 200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대형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는 고속철의 시스템에 문제로, 고위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 때문에 발생했다는 설이 있었다. 중국 정부에서는 이를 감추고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기관사를 영웅으로 추켜세웠다. 열차가 추돌하는 순간 까지도 브레이크를 쥐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중국은 항상 이런 식이다. 공산당은 절대 실수를 인정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설사 자신 들의 결정이 잘못되어 문제가 발생해도 자신들의 탓이 아니고 다른 원인 때문이라고 우기기 일쑤다.


북방에서는 주량 자랑하지 말라

톈진에 머물면서 지인과 친하게 지내는 공산당원들과 저녁을 같이 먹을 기회가 있었다. 중국의 공산당원은 9천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당원을 보유하고 있다. 공산당원은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주량도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저녁을 먹으면서 자연스레 반주도 하게 되었는데 주량이 보통이 아니다. 52도가 넘는 고량주를 맥주 컵 절반 정도 따르고 이걸로 건배를 한다. 한두 잔이 아니고 음식을 먹는 내내 건배를 외치며 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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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진의 지하철은 1,220만명의 텐진시민들의 발이 되는 교통 수단이다 


중국에는 ‘베이징에 가서 벼슬 자랑하지 말고, 광동에 가서 돈 자랑 하지 말고, 북방에 가서 주량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베이징 에는 고관대작이 많고 광동은 부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북방에는 워낙 술고래가 많아 술깨나 마신다는 한국인도 버거워한다. 이들과 대작하다가 정신을 잃고 잠에서 깨어나니 호텔 방이었다는 체험담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공산당원의 주량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공산당원이 되려면 학업 성적도 중요하지만 주량도 탄탄해야 하나 보다. 나는 조그만 잔에다 서너 잔을 마시고 금세 두 손을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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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주차단속, 족쇄를 채우고 가면 꼼짝 못한다.


톈진에 있는 박물관 중에는 전역 기념관이 있다.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기록한 일종의 전쟁 기념관으로 장제스의 국민당과 싸워 승리를 쟁취한 기쁨을 인민들에게 과시하는 장소다. 각종 전투에서 승리한 기록과 관련 인물의 정보를 모아놓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예상치 못한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에서 건너와 중국 공산당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분의 이름이었다. 조선 강원도 출신 심능일(沈能一)이라는 명패 앞에서 한참 동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나라가 없다 보니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돌아야 했던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글, 사진 양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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