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下)
2017-09-27  |   28,857 읽음

 

아쉬움은 그리움으로 피어나고
강진(下)

모란이 필 때면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 없다는 영랑생가는 시인의 감성이 숨결로 다가오고 듯하다. 시문학파기념관에서는 한국 서정시의 진수를 만끽하고, 전라병영성과 하멜기념관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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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지자 온 몸에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땀방울이 한순간 그 무게를 주체하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른다. 연신 얼굴을 훔치던 손수건은 이미 흠뻑 젖었다. 맞설 수 없으니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 응달을 찾으니 단아하게 치장을 한 새색시처럼 영랑생가가 눈에 들어온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영랑 김윤식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으로, 햇빛에 부서지는 초가가 더욱 더 짙은 황금색의 정겨움으로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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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처럼 쏟아지는 햇빛을 피해 응달을 찾으니 단아하게 치장을 한 새색시처럼 영랑생가가 눈에 들어온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영랑 김윤식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으로, 햇빛에 부서지는 초가가

더욱 더 짙은 황금색의 정겨움으로 다가선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문을 지나자 강진감성여행안내소의 문이 열리며 나이 지긋하신 해설사가 햇볕이 너무 뜨거우니 잠시 들어와 땀을 식히고 둘러보라고 권한다. 3평 남짓한 공간에 들어서자 “어휴 시원하다”라는 말과 함께 거짓말처럼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듯 땀은 자취를 감췄다. 그제야 영랑의 시집 등이 가지런히 책장에 꽂혀 있고, 생가를 안내하는 홍보물이 놓인 공간이 눈에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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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영과 가구가 소박하게 놓여 있는 방

시인의 감성 느낄 수 있는 영랑생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생가의 관리가 잘 되어 있다”고 첫인상을 얘기하자 모란이 필 때면 이곳을 찾는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라서 “시인의 감성이 숨결로 다가오는 기분을  느끼고 가라”고 한다. 그래서 일까. 금세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접한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생가 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는 책을 읽는 소년과 소녀, 그리고 이를 지긋하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조형물이 정겨움을 주고,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비가 발길을 머물게 한다. 영랑의 존영이 놓인 방은 소박한 가구 몇 점을 통해 당시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시루와 물동이 등 투박한 옹기와 맷돌이 터를 잡은 장독대에도 ‘누이의 마음이 나를 보아라’라는 영랑의 시비가 시선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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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생가 정원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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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 곁에 ‘누이의 마음이 나를 보아라’ 시비가 있다


안채에 돌아서니 대마무가 그늘을 내어주는 계단을 통해 세계모란공원과 맞닿아 있다. 꽃 중의 왕이라는 모란을 주제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세계 모란들을 심어놓은 곳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모란왕도 대구에서 기증을 받았고, 연중 모란을 피게 하는 기술을 개발해 사철 볼 수 있고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사계절 모란원도 조성했다. 공원의 정자에서는 강진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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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모란을 모아놓은 세계모란공원


영랑생가 곁에 위치한 시문학파기념관은 1930년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던 영랑 김윤식과 정지용, 용아 박용철 3인의 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이 발행한 ‘시문학’은 당대를 풍미했던 프로문학과 낭만주의 문예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이 땅에 순수문학을 뿌리내리게 한 모태가 됐다. 이들을 포함해 1930년대 순수시 운동을 전개했던 문학 동인회 시문학파 9명이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시문학파기념관이란 공간에서 다시 만나 순수 서정시의 진수를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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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파 9명을 기리는 시문학파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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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철, 정지용, 김윤식의 상

전라병영성과 하멜기념관
시문학파기념관에서 20여 분 거리의 ‘전라병영성’은 1417년부터 1895년까지 조선왕조 500 년 동안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하던 육군의 총 지휘부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불타고 갑오개혁으로 폐영, 지휘부의 건물과 유적이 소실돼 성곽의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지속적인 복원사업을 통해 성문과 성벽이 거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성곽의 길이는 1km가 조금 더 되는데 그 길을 따라서 걷다보면 공허한 현재와 역동적이던 당시가 겹쳐지는 묘한 여운과 마주한다.


네덜란드의 상징 풍차가 반겨주는 하멜기념관은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알린 ‘하멜표류기’의 저자인 핸드릭 하멜을 기념한 곳이다. 하멜은 동인도회사의 선원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한 후 감금되었다가 탈출을 시도했지만 다시 붙잡혔다. 효종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온 하멜의 지식을 높이 사 훈련도감에서 일을 하도록 했고, 그 후 전라병영성으로 유배를 보내 7년을 머물렀다. 하멜기념관은 당시 그가 타고 왔던 배인 스페르 베르호를 상징하며 전시실은 5개 주제로 유물 150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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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기념관에는 핸드릭 하멜 관련 유물 15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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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기념관의 풍차


트레킹 코스로 사랑을 받는 가우도는 강진만의 8개 섬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살고 있다. 강진읍 보은산이 소의 머리에 해당하고, 섬의 생김새가 소에 다는 멍에와 비슷해 ‘가우도(駕牛島)’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두 개의 출렁다리로 연결됐는데 길이가 긴 쪽은 1km에 이른다. 섬의 2.5km의 ‘함께 海길’을 걷다보면 바람의 속삭임이 귓가에 들려오고 햇빛에 부서지는 강진만의 바다가 은비늘처럼 번쩍인다.

그러다가 앞서 헤어졌던 영랑이 먼저 와서 환한 얼굴로 어깨를 내어주고, 넉넉한 그의 품에 기대면 다시 또 그의 시가 스치듯 지나간다. 해상복합낚시공원은 손맛을 즐기려는 이들로부터 사랑받는 곳이다.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하루 1만원이고, 낚싯대도 5,000원에 빌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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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도 출렁다리와 해상낚시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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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도의 영랑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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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도 해변가의 조각상


빠르게 조여 오는 시간의 사슬을 끊어낼까. 아니면 걸음을 재촉할까.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에 고민할 새도 없이 몸은 본능적으로 서두름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나폴리라는 애칭으로 사랑받는 마량항에 이르자 ‘낭만과 여유’에 이끌려 본능은 잠시 뒷전으로 물러선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다가서는 바다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늦추게 하고 그러다가는 결국 멈추게 만든다. 바다는 표정을 바꿔가면서 아낌없이 치장을 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거북선 한 척이 상시 대기하는 전략적 요충지 마량포구는 앞에 까막섬이 수묵화처럼 떠 있고 고금도와 약산도가 든든하게 풍랑을 막아준다. 이곳에서는 지난 4월부터 매주 토요일 아름다운 항구를 배경으로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언젠가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봤을 노래가 초대가수의 마이크를 통해 객석으로 전해지면 박수가 터지고, 더 이상 흥을 참지 못하는 이들은 무대로 나가 몸을 흔들어댄다. 가수도 관객도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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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포구 앞에는 까막섬이 그림처럼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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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량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마량포구 공원

볼거리, 먹거리 풍성한 강진에서의 하루
무대 뒤편의 횟집과 간이음식점 등을 지나면 마량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작은 공원과 만나게 된다. 등대는 장난감처럼 앙증맞고, 돌고래 조형물을 파인더에 들여 놓으면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시간과 공간이 주는 사치랄까. 시간을 붙들어 매고 싶지만 해가 기울면서 그림은 질감의 깊이를 더해간다. 마량놀토시장은 ‘3최’를 다짐하는데 최고의 품질과 최고의 신선도, 그리고 최고로 저렴한 가격이 그것이다. 여기에 수입산과 비브리오균, 바가지요금이 없다는 ‘3무’가 더해진다. 관광지의 흔한 풍경인 호객행위도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해를 마주하며 길을 재촉하지만 이제 멈춰야 한다. 천년고찰 무위사와 호남의 3대정원이라고 하는 백운동 별서정원, 그리고 월출산 자락의 다원 등 아직도 갈 곳이 수두룩하고, 오감을 자극할 먹거리가 풍성한 강진. 하지만 이제 발길을 멈춰야 한다. 머물고 싶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풍경들이 바람처럼 스치듯 떠올랐다 자취를 감추는 아쉬움에 자꾸만 뒤돌아보게 된다.

글과 사진 김태종(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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