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서시의 고향을가다]
2016-11-09  |   38,284 읽음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명


서시(西施)의 고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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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에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명성을 떨친 서시(西施)는 초선(貂蟬), 왕소군(王昭君),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 역시 ‘중국 미인들의 운명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애꿎은 운명을 피해가지 못한 슬픈 역사 속의 인물이다. 필자는 2,000년 전의 서시를 만나기 위해

이우에서 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주지로 향했다.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이우 부근에는 주지라는 곳이있다. 저장성의 조그만 도시인 이곳에는 아주 오래전인 춘추전국시대에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명성을 떨친 서시(西施)의 고향이 있다. 서시는 잘 알려진대로 초선(貂蟬), 왕소군(王昭君),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중국 4대 미인의 슬픈 사연들

중국의 4대 미인들을 한 명씩 살펴보자. 먼저 중국최대의 미인으로 알려진 양귀비(楊貴妃, 719~756년)는 본명이 양옥환이다. 산시성 출신으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사천성 관리로 일하던 친척 집에서 자랐다. 미모가 뛰어나고 춤과 노래 솜씨가 출중해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壽王 李瑁)의 부인이 되었다. 하지만 몇 년 후 새로운 운명에 맞닥뜨리게 된다. 현종이 홀로 되자 외로워하는 그를위해 환관이 백방으로 미녀들을 수소문하던 중 그녀를 찾게 된 것. 그리고 환관의 집요한 설득 끝에 양귀비는 시아버지인 현종의 부인이 된다. 양귀비를 품은 현종은 정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녀를 위해 새로운 궁을 짓고 사랑을 나누기에 바빴다. 양귀비는 날씬한 몸매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중국 미인의 기준은 가냘프기보다는 풍만한 몸매를 선호한다. 양귀비는 현종의 관심을 사기 위해 화장법을 개발했고 항상 목욕을 즐겨 흰 피부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양귀비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2,000km나 떨어진 남방에서만 자라는 리즈를 매일 도성으로 운송했다. 말이 쉼 없이 일주일을 달려야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다 죽어나간 말이 셀수 없이 많았다고. 현종이 정사를 멀리할수록 양귀비 친인척들의 득세가 이어지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이들과 암투를 벌이던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피해 달아나던 현종과 맞닥뜨린 성난 군중들과 호위병사들이 양귀비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현종은 목숨과 양귀비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결국 양귀비를 버렸다. 이에 양귀비는 자결로 생을 마쳤으니, 그녀의 나이 38세였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초선(貂蟬, 175~199년)은 춤과 노래에도 능했지만 달처럼 빛나는 용모가 무엇보다뛰어났다. 어느 날 저녁 초선이 달을 쳐다보고 있을때 달이 구름에 가리자 달이 초선의 뛰어난 미모에 부끄러워 구름에 숨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미녀라는 뜻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은 사실 그녀에게서 나온 말이다. 왕윤의 수양딸로 알려진 초선은 포악한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여포와의 이간질에 이용된 여자라고 전해진다. 결국 동탁은 여포와 그의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당하고 초선은 여포의 첩이 된다. 초선은 여포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후 허도로 보내졌다는 설과 관우에게 넘겨졌다는 설이 있다.

왕소군(王昭君)은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원제의 사랑을 받지 못한 처지였다. 궁 안에 워낙 많은 후궁이 있었으니 황제의 눈에 들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대부분의 후궁들은 그림을 그리는 화공들에게 돈을 주어 초상화를 아름답게 그려 황제의 관심을 끌려고 했지만 왕소군은 그런면에 약했다. 그런 가운데 번번이 국경을 침범하는 흉노족들과 화해하기 위해 중국 여자들을 보내 달래야 하는 일행에 왕소군이 끼게 되었다. 왕소군이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본 원제는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절세미인이 저기에 있구나” 하며 가슴을쳤다. 그림 때문에 그녀가 떠나게 된 것을 알고 크게노한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화를 그린 화공을 참형하였다고 한다. 흉노족의 호얀아에게 시집을 간 왕소군은 아들을 하나 낳았고, 호얀아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복주루와 재혼하여 딸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서시(西施, 춘추전국시대) 역시 슬픈 역사 속의 인물이다. 필자는 2,000년 전의 서시를 만나기 위해 주지로 향했다. 주지는 이우에서 차로 약 2시간 거리에있다. 필자가 10년 넘게 활동하고 있는 이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을 이제야 가게 되니 내 게으름을 탓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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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로 가는 고속도로. 옆으로 고속철이 달린다

·월 대립 속에 수많은 고사성어 탄생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서시를 만나러 가는 날 고속도로에는 비가 내렸다. 입장권을 사서 안으로 들어서니 안내판에는 중국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일본어로도 표기가 되어 있다. 일본인들도 서시의 명성을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일제의 침략으로 건물 대부분이 훼손되어 1986년에 복원한것이라고 한다. 일본이 상하이를 거쳐 난징은 물론 이곳 주지까지 점령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중국이 일본과 대등한 관계이거나 오히려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지만 100여 년 전의 중국은 종이호랑이에지나지 않았다. 만주 전역은 물론 광동성과 상하이 인근의 강소성, 저장성이 일본의 손아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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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는 산업화가 이루어진 현대적인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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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고향의 입구

 

서시전에 오르니 분을 바른 것처럼 하얀 얼굴을 한 서시의 모습이 나타난다. 중국에서 미인으로 치는 전형적인 얼굴이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중국의 전통적인 미인의 기준은 달덩이처럼 동그란얼굴에 밀가루처럼 하얀 피부를 한 인물상이다. 서시가 그런 기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월나라의 주루오산에서 평범한 나무꾼의 딸로 태어난 서시는 타고난 미모 때문에 어릴 때부터 모든 이들의 선망이 되었다. 뭇 여자들이 서시 따라잡기에 열심이어서 심장병을 앓고 있던 서시가 얼굴을 찡그리면 그 모습까지 따라 할 정도였다고. 심지어 연못의 물고기까지 서시의 미모에 반하여 넋을 잃었다고 한다. 아마도 요즘 태어났다면 유명한 아이돌이 되었으리라. 서시전을 돌아 옆 사당으로 오르니 범려와 구천, 문종의 상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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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에 있던 물고기들마저도 서시의 미모에 반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서시를 말하려면 월나라와 오나라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서시는 오나라와 월나라의 경쟁구도에서 희생된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여자이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와 월나라는 철저하게 원수처럼 지냈다. 오나라는 지금의 강소성, 월나라는 절강성에 자리하고 있었다. 기원전 496년 오나라의 왕 합려는 월나라를 정복하러 나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합려는 죽기 전 아들 부차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꼭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차는 가시가 많은 나뭇가지로 만든 섶 위에서 자며 문을 드나들 때마다 부하들에게 “부차야, 아버지의 원수를 잊었느냐” 하고 외치게 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출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월나라의 구천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했으나 오히려 오나라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오나라의 포로가 된 구천과 범려는 부차의 노예가 되어 온갖 모욕을 이겨내며 3년간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또한 구천의 아내는 부차의 첩 신세가 되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구천은 쓸개를 매달아 놓고 이를 핥으며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말을 되풀이했다. 훗날 부차가 중원에만 신경을 쓰고 월나라와의 경계를 소홀히 하는 틈을 타 다시금 오나라를 정복하게되니,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유래다.

와신상담처럼 오나라와 월나라가 경쟁을 벌이는 동안 많은 고사성어가 탄생했다.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침몰할 위기에 처했으나서로 힘을 합쳐 위기를 빠져 나왔다고 해서 오월동주(吳越同舟)란 말이 나왔다. 월나라가 오나라에게 승리를 한 배경에는 범려의 지혜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한 후 그는 제나라로 갔다.그리고 공신인 문종에게 구천은 고난은 같이 할 수있지만 영화는 함께 누릴 수 없는 인물이라며 길을떠날 것을 조언한다. 문종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가 결국 범려의 우려대로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자결한다. 토끼사냥이 끝나고 나면 개도 결국 잡아먹는다는 토사구팽(兔死狗烹)은 여기에서 유래된다.

토사구팽이 더욱 유명한 고사성어가 된 것은후에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한신도 똑같은 처지를 당하고 나서다. 초패왕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고조 유방은 가장 큰 공신인 한신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지만 나중에 자신에게도 도전을 해오지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항우의 수하에 있던 종리매가 한신에게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종리매를 체포하여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한신은 차마 친구와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었다. 이를 알게 된 종리매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한신은 그의 목을 유방에게 바치지만 끝끝내 체포되어 장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일찌감치 벼슬을 버리고속세를 떠나 있던 장량이 한신에게 장안을 떠나라고 권유하지만 주저하다가 결국 처형당하는 신세가 된다. 100만 대군을 지휘했던 천하의 한신도 토사구팽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평범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여자들에 의해 좌우되었던 나라의 운명

범려는 오나라의 왕 부차에게 당한 아픔을 복수하기 위해 미인계를 쓴다. 여기에 동원된 인물이 바로 서시다. 범려는 서시에게 각종 예법과 노래, 춤을 가르쳐서 오왕에게 바친다. 서시의 미모에 반한 오왕 부차는 서시를 위해 궁궐을 다시 짓고 연못을 만들어서 그녀의 환심을 사려 했다. 이에 충신 오자서는 오왕에게 서시로 인해 정사를 그르칠 우려가 있으니 그녀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왕의 귀에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결국 서시의 치마폭에 푹 빠진 오왕의 절대 권력은 점차 힘을 잃어 월나라에게 패하는 치욕적인 역사를 남긴다. 오나라가 망한 후 서시는 범려와 함께 은둔처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설과 물에 빠져 자결을 했다는 설, 월나라에돌아올 경우 구천이 서시에 반해 같은 처지에 빠질것을 우려해 살해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난무한다. 아무튼 미인이기 때문에 죽어서도 유명세에 시달리는 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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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과 범려, 문종의 상이 모셔져 있는 고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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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와 떼어놓을 수 없는 인물들. 왼쪽부터 문종, 구천, 범려​

마타하리의 예에서도 보듯이 세계 역사는 여자들에 의해서 바뀐 경우가 많다. 특히 절대 권력을 가졌던 중국의 황제들은 수많은 미녀들과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국력을 쇠진시켜 나라를 망친 경우가 허다하다. 중국의 고대 역사는 하나라에서 주나라와은나라로 이어진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은 걸왕이었다. 하나라에게 항복한 유시국은 절세미인인 매희(末喜)라는 여인을 걸왕에게 바친다. 매희에 흠뻑 빠진 걸왕은 그녀를 위해 궁궐을 짓고 연못을 만들어서 그곳에 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북을 치면3,000명이 넘는 신하들이 소처럼 그 연못의 술을 마시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매희가 좋아했다고 하니 나라가 온전할 리 없었다. 결국 하나라는 은나라에의해 패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잘나가던 은나라도 마지막 왕인 주왕이 주색잡기에 혈안이 돼 정사에는 무관심하다 결국 세상과 작별을 고한다.

여기에도 미인이 등장을 한다. 은나라에 패한 유소씨(有苏氏)는 달기(妲己)라는 여인을 주왕에게 바친다. 은나라의 주왕은 달기에 흠뻑 빠져 국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충신들의 충심어린 간언에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주왕도 결국 주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그런데 은나라를 쳐서 천하를 얻은 주나라 역시 같은 역사를 되풀이한다. 주나라 유왕을 위해 포나라에서 보낸 여인 포사(褒姒)에게 흠뻑 빠져 있던 유왕의 관심은 오로지 그녀를 즐겁게해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녀는 절대 웃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실수로 병사 한 명이 봉화를 올려 이때문에 혼비백산한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것을 본 포사가 박장대소하며 무척 즐거워했다. 포사가 웃는 모습을 본 유왕은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봉화를 올리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북에서 견융족(犬戎族)이 침입했다.병사들이 봉화를 올렸지만 이것이 매일 되풀이하던 유희라고 생각할 뿐 아무도 외적이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주나라는 그렇게 허무하게망하고 말았다.

21세기 중국의 미인은 한국형?

서시의 고향집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서시전에는 서시의 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고 그녀가 태어났다는 주루오(苎萝) 마을은 2,000년 전에 서시가 살았던 주택을 재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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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의 상이 모셔져 있는 서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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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가 생활했던 마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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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전 앞의 연못에도 서시의 상이 세워져 있다

주루오산 위에 세워진 정자에 올라서니 주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상당히 크고 대부분의 건물들이 산 위에 지어져 있다. 전시품이 그다지 많지 않아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그저 서시란 중국의 미인을 기억하기 위한 장소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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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루오산 위에 정자가 서 있다. 이곳에 서면 주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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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를 추모하는 향과 초를 태우고 있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도 항저우에는 미인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다. 항저우에 미인이 많았음에도 서시가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다는 것은 남의 마음을 빼앗아버릴 만큼 매력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서시를 중국 제일의 미인이라고 믿었던 중국인들의 미인에 관한 시각도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중국인들은 서시보다 더 예쁜 미인이 한국에 많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서시전을 나와 인근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필자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안 주인장이 한국의 화장품을 보여준다. 인터넷을 통해 샀는데 이게 정말 한국제인지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필자가 알지 못하는 브랜드의 한국 화장품이었다. 어쨌거나 21세기 중국의 미인은 한국형이 아닐까 싶다. 

 

* 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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