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스토리 [ 홍콩 ]
2016-08-18  |   41,927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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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은 한때 제조업 분야에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로 일컬어졌다. 특히 금융 분야에서는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중국의 개혁 이후에도 한동안 중국과 서방의 무역을 중계하면서 막대한 부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일국양제를 유지하고는 있으나 부동산을 비롯한 사회·경제의 모든 분야가 중국에 예속되면서 이젠 홍콩인이란자부심을 접고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침사추이 커피숍에서 제임스를 만나는 날 홍콩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지난해 홍콩에서 민주화 시위가 한창일 때 홍콩의 번화가 몽콕에서 우연찮게 만났던 제임스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고 연락이 왔다. 경제는 엉망이고 행정은 중국에의해 조종되는 홍콩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의 말대로 한때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했던 홍콩의 입지가 최근들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홍콩인들은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홍콩인으로 남고 싶지만 중국이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다. 이제 홍콩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 사실이 홍콩인들을 혼돈스럽고 또 더욱 깊은 좌절감에 빠져들게 한다.

광저우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썬전역에 내리면 바로 홍콩과의 국경이다. 이곳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다리를 하나 건너면 홍콩이다. 홍콩은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되어 이젠 중국 땅이지만 50년 동안 자치를 인정하기로 해 현재 일국양제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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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땐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

원래 중국 땅이었던 홍콩의 역사를 살피려면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전쟁이라는 아편전쟁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부터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발생한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다. 인도의 벵갈 지역에서 아편을 대량으로 재배해 청나라에 수출하는 방식이었다. 한번 맛들이면 끊기 어려운 중독성 때문에 한때 중국은 아편 중독자가 5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아편이 삽시간에 확산되었다. 커다란 수입원을 보장받았던 영국 입장에서 아편은 절대 손을떼기 어려운 사업이었다.

아편 폐해의 심각성을 인식한 중국은 1792년 아편 금지령을 선포한 후 여러 차례 아편 수입 단속에 나섰다. 하지만 부패한 관리들로 인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급기야 광동지역 관리로 임명된린저쉬(임칙서)가 아편을 몰수해 불태우면서 영국 상인들과 마찰을 빚자 영국 정부가 텐진과 닝보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세계 최고였던영국 군의 화력에 밀린 청나라는 1842년 막대한배상금과 함께 홍콩을 영국에 넘긴다는 난징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영국의 통치를 거치면서 홍콩은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에 점령당하기도 했지만 해방 이후 제조업 분야에서 한국,대만과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을 펼치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금융은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홍콩은 한동안 중국의 정보를 서방에 전달하는 소식통역할도 했다. 중국은 철저한 언론 통제를 통해 죽의 장막 안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일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했다. 다만 유일하게 일부 소식이 암암리에 전해지는 통로가 있었으니 바로 홍콩을 통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중국인들은 홍콩에가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거나 로후천을 가로질러 자유의 땅인 홍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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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이 최고 자리에 앉은 이후에도 홍콩은 성장을 계속했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의 후유증으로 중국 국민들이 배를 곯는 상황에서도 홍콩은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세계의 모든 경제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홍콩의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들으라면 덩샤오핑과 리자청이 첫 손에 꼽힌다. 덩샤오핑은 대약진 운동의 후유증으로 2,000만 명 이상의 인민이 굶어 죽는 것을 목격하고 시장 경제의 필요성을 인식, 197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개방정책을 제시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를 채택하는이율배반적인 정책을 펴는 도박을 감행했으니 가히 그를 작은 거인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데 그의 뒤에는 리자청이 있었다. 덩샤오핑은 홍콩의 최고 갑부 리자청에게 중국 개방의 조타수 역할을 요청했고, 그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썬전과 산토우에 경제 특구를 만들었다. 산토우는 리자청의 고향이다.

중국의 개방정책에 힘입어 최고의 경제적 특혜를 누린 홍콩은 중국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서방의 어느 누구도 중국을 직접 방문하기 어려울 때 홍콩인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최대한 활용해 중국과의 교역을 늘려 나갔다. 개방정책 이후1990년대 중반까지 이런 특혜를 누리면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중국은 홍콩을 통해서’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으니……. 필자가 처음 중국과 거래를 한 것도 홍콩의 무역회사를 통해서였다.

당시에는 중국 공장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이들이 홍콩 사람들밖에 없었다. 중국인들과 설사 말이 통한다 해도 직접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중국의 문화와 산업구조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있었던 것. 오로지 홍콩 사람들만이 중국인들과 대화를 통해 거래 조건을 성사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중국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돈을 번 홍콩인들은 주말이면 중국으로 넘어와 돈을 흥청망청 쓰고 다니면서 자신들이 중국에서 차지한 우월적 지위를 최대한 즐겼다. 중국인들은 그런 홍콩인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경제적인 차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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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중국에 좌우되고 있는 상황

그러나 2000년대가 되면서 중국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냈던 홍콩 무역회사들의 수입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비싼 중계 수수료를 물어가며 홍콩 회사들과 거래를 했던 서방의거래처들이 직접 중국과의 교역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홍콩과 거래했던 유럽과미국의 많은 거래처들이 중국 공장들과 직접 거래하기 시작했고, 중국 업체들도 각종 무역 전시회를 통해 자신들의 역량을 알려 나갔다. 중국에대한 장막이 걷히면서 홍콩의 도움 없이도 거래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알다시피 홍콩은 중국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한때 세계 최대 항구로 이름을 날렸었다. 하지만 중국이 썬전항을 만들면서 직접 수출을 시작하자 홍콩을 통해 선적을 하던 엄청난 물동량이 홍콩으로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굳이 비싼 운송료를내고 홍콩까지 운반해 수출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상하이와 썬전의 주식 시장이 개장되자 홍콩으로 들어오던 자본마저 끊겼다. 막대한 중국의 자본이 홍콩보다는 썬전이나 상하이 증시에 투입되면서 홍콩이 누리던 아시아 금융 시장에서의 독점적인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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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고급 주택가. 중국인들이 홍콩 부동산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부동산 시장의 지각변동이다. 20여 년 전만 해도 홍콩인들은 중국의 부동산을 매입하는 데 열을 올렸었다. 썬전을 비롯하여 산토우와 동관, 광동성 일대가 주된 먹잇감이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오늘날은 상황이 반전되었다. 중국인들이 그동안 축적한 두툼한 지갑을 들고 홍콩의 부동산에 손을대기 시작한 것이다. 상권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홍콩인들은 임대료를 부담하기도 어려운상황. 얼마 전에 161평짜리 아파트가 891억원에팔렸다는 뉴스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평당 5억원이 넘는 셈이니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홍콩은 예외다. 홍콩에서는 부동산 증여세와 상속세가부과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중국 부호들이 너도나도 홍콩의 부동산 구입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홍콩에서는 부동산증여세와 상속세가 부과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중국 부호들이 너도나도 홍콩의 부동산구입에 나서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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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서민주택들. 주택난이 가중되면서 작은 아파트를 여러 개로 쪼개어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홍콩은 도시국가라는 특성상 주거면적이 제한적이다. 많은 인구가 좁은 지역에 살다보니 부동산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홍콩에서는 임대주택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해왔으며, 그 비율이30%가 넘는다. 그런데 중국인들의 부동산 투기열풍이 임대주택 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임대주택보다는 당장 돈이 되는 아파트와 일반주택 분야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주택자금을 마련하기 어려운 홍콩의 서민들이다. 전에는 그나마 임대주택이라는 안전장치가 있었지만 부동산 투기로 공급이 끊기면서 외곽에서 다시 외곽으로 밀려나가는 추세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요즘 홍콩에는 벌집 형태의 아파트가 유행이다. 예전에 한 가구가 살던 13평 아파트를 쪼개고 쪼개서 네 가구가 사는 공간으로 개조한 형태다. 물론 홍콩 정부에서도 할 말은 있다. 홍콩인들이 주택을 살 경우 취득세가 3%인 데 비해 중국인에게는 21%를 부과함으로써 홍콩의 재정부담을 줄이는 데 이만 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홍콩인들은 부동산뿐만 아니라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과 홍콩의 국경에는 아침마다 홍콩으로 등교하는 학생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아침에 홍콩에 있는 학교와 유치원에 갔다가 오후에는 중국으로 돌아오는 학생들이 수없이 많다. 홍콩의 많은학교와 유치원을 중국 학생들이 차지하는 바람에 정작 홍콩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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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과 중국의 국경은 아침마다 홍콩 유치원으로 가는 중국 유치원들로 붐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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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가정부로 취업해 있는 필리핀 여성들 휴일이면 공원에 나와 친구들을 만난다

 또한 국경에는 홍콩 식품들을 주로 운반하는 보따리상들이 진을 치고 있다. 중국에서 멜라민 분유나 불량식품 문제가발생하면 홍콩의 식료품은 거덜이 난다. 상황이 이러하니 홍콩인들의 중국인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될 수밖에. 시위 밑바탕에는 경제 문제도 있어 홍콩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무시해왔던 중국인들이 홍콩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며 주인 행세를 하는 모습에 분노를 표시해왔다. 하지만 이제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지난해 정치적인 문제로 야기된 홍콩의 민주화 시위는 사실 경제적인 측면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홍콩의 지도자인 홍콩 행정장관은 800명의 선거인단에 의해 간접선거로 선출된다. 그런데 홍콩 시민들은 선거인단이 친 중국 성향의 인물로 구성되었다며 중국 지도부에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하지만 홍콩인들의 시위행태는 목숨을걸 만큼 절실하지 못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사례로 들면서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했지만 죽기 살기로 민주화를 쟁취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목소리가오래도록 힘을 쓰지 못한 이유는 이를 반대하는홍콩인들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시위가 지속되면서 관광객들이 감소하고 상점마다 매출이 급감하자 시위를 반대하는 또 다른 시위가 일어났던 것. 같이 힘을 모아 정부에 대항해도 부족한 판에 시위를 반대하는 무리의 등장은 한껏 달아오른 반정부 시위의 열기에 찬물을 뿌리는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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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홍콩 민주화 시위 때읜 모습. 정치 민주화를 내세웠지만 사실 경제적인 측면이 바탕에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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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시위를 반대하는 시위대의 모습

 

 

앞서도 말했지만 홍콩인들이 홍콩의 민주화를외치며 반정부 시위에 나선 배경에는 그동안 홍콩이 누려왔던 각종 특혜가 없어진 것에 대한 강한 불만이 배어 있다. 경제는 점점 어려워지는데다 그동안 홍콩인들이 누리던 각종 혜택을 중국인들이 빼앗아가는 현상이 홍콩인들의 감정을자극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앞으로도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전망에 있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어려운 국면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해 홍콩의 경제성장률은 2.6%였으나 올해는 1.6%로 예상되고 있다.

홍콩은 이제 중국의 경제에 완전히 예속되었다. 중국 관광객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다. 싫지만 이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홍콩인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홍콩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은 중국인이 아니라 홍콩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으나 이제는 좋든 싫든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곳에는 이미 인민해방군이 진주해 있다. 홍콩인들은 침체돼 있는 지금의 홍콩을예전의 활기차고 역동적인 곳으로 되돌려 놓고싶지만 자신들만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의 미래는 홍콩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국 정부의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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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중국. 오른쪽이 홍콩이다

글,사진 양인환(중국 통신원)​

양인환 중국통신원- 1957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나 91년까지 금융권에서 일하다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 자동차와 함께 하는 삶에 새롭게 도전했다. 91년 국산 자동차로 미국 48개 주를 일주해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92년 아시아 록스타로 호주를 일주했다. 93년 호주 웨스턴 랠리스쿨을 이수한 뒤 호주 웨스턴 랠리 침피언십, 홍콩-북경 랠리(94년), 태국랠리(94년) 등에서 전문 드라이버로 활동했다. 93년부터 96년까지 본지의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참가한 랠리를 비롯해 세계의 다양한 자동차 경주와 시승기를 소개했다. 저서로 ‘대머리 돈키호테’, ‘차를 알고 문화를 세우는 여유로운 운전’이 있다. 2002년부터 중국 저장성 이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양인환 통신원은 앞으로 중국을 비롯한 북미, 남미, 아시아, 유럽 등의 재미있는 여행기를 소개할 계획이다. 머지않아 미국과 호주에 이어 중국과 남미대륙을 일주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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