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포커스 - 엄정행
2013-11-30  |   14,870 읽음
“나 (車)도 당신의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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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노래를 위해선 무대를 가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의 노래는 두메산골 낡은 마을회관 에서도 들을 수 있다.
힘겹게 사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83년형 그의 스텔라 는 그가 가는 곳이면 언제나 ‘가고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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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 내 사랑 목련화야’
아무리 ‘ 빌리진’ 만 나왔다 하면 먹는것도 귀찮아 하는 요즘 애들일지라도,또 젓가락 장단 맞추는 아저씨일지라도 ‘오 내 사랑 목련화야’ 이 한 귀절에는 걸음을 멈춘다. 더우기 ‘ 목련화’ 를 수려하고 열정적으로 부르는 목소리기는 숨까지 멈춰지는 것을 느끼며 이내 그가 바로 ‘엄정행’ 이라는것 을 알아맞춘다.

성악가 엄정행(41세)씨의 하루는 등교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모교이자 일터인 경희대학교로 출발하기 위해 차문을여는 순간, 그는 아내의 심부름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 윤아(국민학교 6년생)가 오늘아침 도시락을 두고 갔다고 그랬지?’ 엄정행교수는 하마터면 자신도 깜빡할 뻔 했던 끔찍한 막내 딸의 도시락이 생각나자 다시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벨을 누른다. 오늘 아침엔 유난스레 더딘 엘리베이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아내가 윤아의 도시락을 들고 허겁지겁 뛰어나온다.

뜻밖에 아내와 아침 드라이브를 나서게 됐다. 오늘 따라 시동이 더 잘 걸리는 것만 같고 아침안개마저 반갑다.
결국 도시락을 팽개치고 오래간만에 아내와 데이트하는 기분이 든다. 윤아네 학교까지 먼 거리는 아니지만 차 속에서 아내의 격려를 받고 보니 오늘은 모든 일이 다잘 풀릴 것 같은 예감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런데 오른쪽 백미러에 비친 아내의 얼굴에 벌써 잔주름이 생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퇴근 때마다 곱게 화장을 하고 반겨준 아내의 얼굴에만 익숙해졌지 온갖 풍상을 함께 겪은 아내의 화장기 없는 얼굴이 낯설다.

 

서울대 음대에 다니던 아내와 만난 것 은 전국대학연합 합창단의 같은 단원으로 활동 하던 때이다.
세 상이 온통 사랑으로만 가득 차 있던 3년의 열애기간을 거쳐 대학원을 졸업하던 1968년에 결혼,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내는 엄정행교수 몫의 인생에만 충실해 주었다.
계속 노래를 했다면 어쩜 그보다도 더욱 촉망받는 소프라노가 됐을 텐데 아내는 결혼과 함께 음악공부를 포기하고 엄정행 교수의 노래에만 산다.

 

젊고 가난했던 신혼시절, 팔자에 없는 장사(다행하게 악기 장사였지만)틀 시작했을 때도 아내는 엄정행 교수의 노래를 위해 온갖 고생을 억척스레 이겨냈다. 결국 오늘의 엄청행 교수는 결혼을 통해 진정한 음악과 만날 수 있었고,아내의 희생과 함께 성악가로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지금도 그래서 그는 아내의 고운 음성만 들으면 가슴이 아파온다. 하지만 아내 이미혜 자(40세)씨는 남편 엄정행교수의 노래에 실려 더욱 아름답고 성스러운 허밍으로 조화의 기쁨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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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의 탁 트인 목소리처럼 마음씨 넓은 스텔라'’

어느덧 윤아네 학교 앞에 다다랐다. 아내를 내려주고 방향을 돌려 경희대로 향한다.
‘ 아빠가 학교 앞까지 왔다가 그냥 간 것을 알면 윤아가 섭섭해 하겠지?’
말 수가 적고 새침한 편인 윤아는 피아노를 잘치고 노래도 잘 부르지만 남 앞에서 노래부르는 것을 싫어하는 까다로운 성격이다. 하지만 틈만나면,“ 아빠! 노래 불러줘” 하며 애교를 부리는 것으로 봐 아빠가 자랑스러운 눈치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엄정행교수는 왈칵 딸이 보고 싶어,딸이 공부하는 모습만 이라도 교실 유리창을 통해 보고 싶지만 갈 길이 너무 바쁘다. 그 대신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올 것을 결심한다.

 

손을 뻗어 FM을 튼다. 그는 이제부터 KBS 제 1FM을 모니터하기 시작한다. 현재 MBC FM에서 ‘안녕하십니까? 엄정행입니다.’ 를 6년째 진행해 오고 있는 그는 그래서 틈만 나면 FM 에 귀를 기울인다. 틈이나야 운전할때 차속에서 뿐이지만. 그는 6년 동안 방송프로를 진행해 오면서 한번도 펑크를 내지 않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새벽6시 부터 나가는 ‘안녕하십니까? 엄정행 입니다.’는 녹음프로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도 그는 모두가 퇴근한 방송국에 홀로 남아 반드시 그 이튿날 치를 녹음하고 가는 지나치게 책임감 강한 사람이다.

 

어느 새 차는 청량리로터리에 접어들었다. 윤아네 학교를 들러오는 바람에 다른 때 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차가 이리 저리 밀려 있다. 마음 같아서는 벌써 교수실 까지 ‘획’ 달리고 싶지만 6년 전 부산에서 당했던 교통사고 생각이 나자 오히려 속력을 줄였다. 그 때는 처음 운전면허를 따고 엉금엉금 거리던 초보운전시절이었다. 아버님 생신을 맞아 고향에(그의 고향은 통도사로 유명한 경남 양산) 내려갔다가 부산에 살고있는 누나네 집으로 가던 도중,밤길에 낯선 곳에서 속력을 내다가 충돌한 사고였다.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그 때의 기분은 잊을래야 잊 을수 없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그와 그의 아내는 입솔 끝에 똑같이 상처가 남아 있다. 하마터면 우리는 가지런하고 고른 치아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맑고 운치있는 목소리를 영영 듣지 못할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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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美聲)에서 특음〈得音)의 경지로
그의 스텔라는 끼어들려는 다른 차를 훌훌 먼저 보내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다.
정말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큼 이름다운 경희대 캠퍼스에 도착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크라운 관으로 장식한 음대 주변에도 가을은 저물고 있다. 차바퀴에 밟힌 낙엽의 잎사귀를 집어든다. 그러고 보니 그도 올 해가 지나면 마흔두살이 된다. 그는 이제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엄정행’ 의 미성에서 언제나 스스로 찾고 있는 득음(得音)의 경지를 소유하고 싶어진다.

 

부산 동래고등학교 시절,그는 노래 잘하는 엄정행이가 아니라 운동 잘하는 다부진 소년이었다. 배구선수로 전국대회에 출전할 정도의 실력파였다. 하지만 졸업을 한달 앞두고 그는 한걸음만 내딛으면 닿을 수 있는 운동선수의 길을 버리고 아득하고 험난한 성악과로 진학한다. 이미 그에게는 양산중학교시절,영남예술제에 참가해 성악부 특상을 받았던 충분한 자질이 있었기에 한달만에 경희대 음대로 진학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23년. 그는 33회의 독창회와 300여회 의 발표회를 가졌다. 그는 32세에 독집 음반을 내놓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는가 하면,75년부터 알기 시작한 가곡 붐을 타고 클래식을 대중에게 가장 가깝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모두가 유학을 가야 성공한다는 성악분야에서 유일하게 이 땅에 남아 외롭게 공부한 그가 오늘날,가장 찬연한 성 악가 가 되었다.

 

수업시간만큼 그는 참으로 사람 좋아뵈는 그 얼굴에 웃음 한조각 띄우지 않고 학생들의 레슨을 봐준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한테 어울리지 않게 제일 엄격한 교수님으로 통한다. 하지만 누가 군대에 간다거나 수학여행을 떠날 때 같이 가고 싶은 선생님도 바로 그다. 아마 음악가 특유의 날카롭고 예민한 속성은 내재한 채 사식에서는 연신 웃는 낯으로 대동}는 그의 인간미가, 악착같이 보강을 하는 지독한 그를 가장 인기높은 교수로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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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감나는 남자,실감나는 車
열여섯명의 제자를 골고루 보}주고 그는 녹음을 위해 정동 MBC 로 차를 향한다. 음대에서 교문 앞까지 5분이 걸린다.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오는 학생들에게 그는 꼭 차를 세우고,진한 경상도사투리로 “한번 놀러 오냐! ’‘
를 연신 외치기 때문. 급기야는 하숙집 A로 간다는 그의 애 제자를 차에 태우고 집 앞에 데려다 주고는 속력을 낸다.

 

방송녹음이 끝나면 방송국 사람들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술좌석에도 그가 끼어야 흥이 돋고 무엇보다 그의 넓은 스텔라가 언제나 술에 취한 사람들에게는 자가용같이 느껴지므로. 그는 오늘 술좌석에서도 간곡하게 제발 한 곡만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흘러간 노래 ‘38 선의 봄’ 을 불러주어 의외의 박수와 환호를 한 몸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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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분위기를 알고 가끔씩은 ‘파격’ 의 멋을 아는 참으로 인간적인 남자다. 술에 취한 사람들을 한명씩 한명씩 바래다 주고는 그는 다시 원효로 산호아파트 집으로 돌아온다. 늘 그렇듯이 일찍 들어오겠다던 결심은 무너졌지만 그래도 마음은 뿌듯하다. 어느 새 아파트 단지내 불빛은 모눈종이 그래프처럼 점점이 불이 켜져 있지만 유난히 그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집은훤하다. 몸은 물 먹은 솜처럼 피로하지만 갑작스레 온 옴에는 기쁨의 에너지가 충천되고 그는 행복에 겨워 오밤중에 ‘ 빵빵’ 클랙슨 누르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눈깜짝 할 사이에 이 실수를 철회하고 아파트를 올라서는 순간,온 식구들이 달려 나온다. 결코 작지않은 그 보다도 훨씬 키가큰 장남 윤상(중3)이가 엄마와 팔짱을 끼고 다정스레 그를 맞는다. 노래를 못한다는 것 빼고는 기계 만지는 것 을 좋아하고 곱슬머리인 것까지 그와 똑 닮은 윤상이. 그는 믿음직스런 윤상이와 어깨동무를 한다. 그의 팔이 아들의 팔보다 올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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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번 주말에 지방에 가셔야죠. 제가 차 봐드릴께요."
카뷰레터 손질 정도는 할 수 있는 엄정행교수와 라디에이터를 살피는 것이 취미인 윤상이 와는 죽이 잘 맞는 친구같다. 그는 6년 동안 3대의 차를 바꿨다. 왜냐하면 그의 차는 1년만 넘어도 고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얼마나 그가 바쁜지를 말해주는 물증이기도 하다. 그의 노래가 듣고 싶다는 연락이 오면 그는 기동경찰대원처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차를 몰아 출동한다. 한번은 강원도 태백의 두메산골,낡은 마을회관 무대에서 그는 쉬임없이 노래부른 적도 있다.

 

그는 자신이 스스럼 없이 말하는 ‘시골촌놈’ 이기 때문에 시골의 흙을 잊지 못하며 성악가라고 고상한 것보다는 조금 시간이 나면 마음맞는 친구들과 실컷 술을 먹고 길거리에서 잠을 자보는 것을 소원으로 갖고 있는 기분 좋은 중년 남자다. 만일 앞으로 그런 날이 오면 그제서야 그동안 혹사당한 그의 차도 거리에서 쉬고 있겠지.
엄정행교수. 그는 자신의 노래 만큼이나 참으로 실감나는 남자다.

언뜻 언뜻 비치는 그의 흰 머리카락처럼 1년만에 연륜을 느끼게 하는 그의 차역시.

[게재 198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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