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전 대통령의 카라이프
2013-11-30  |   44,584 읽음
“내가 처음 몰았던 피아트, 내가 사랑했던 폴크스바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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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이 나기 전해 상해로망명,이어 영국 에딘버러대학으로 유학하면서 시작된 윤보선 전 대통령의 카라이프 . “나는 빠른 것도, 느린 것도 싫고 보통으로 달리는 것이 좋아.”
안국동 8 번지 고풍 한옥의 잔디밭 정원에서 윤보선 전 대통령은 87년 동안의 카라이프를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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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유학시절의 모습

 

10살 전 영국제 자동차를 타다
안국동 8번지에 자리한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의 고풍 한옥을 찾은 것은 10월 중순의 오후 4시였다. 중문을 들어서니 잘 손질된 파란 잔디가 시원스레 펼쳐진 넓다란 정원. 노신사 윤대통령은 그 속을 거닐고 있었다. 마당의 디딤돌, 사랑채의 기단(基壇)과 문살, 그리고 ‘국태민안(國泰民安)’ 이라 새겨진 현판, 이런 정물(靜物)들이 늦가을의 따스한 햇살과 어울려 그 분을 감싸고 있었다.

 

“열살 전 백부님이 영국제 자동차를 샀지. 운전사가 없어 상해에서 중국인 운전사를 데려왔어.제복을 입고 집안 어른들을 태웠는데 어른들 몰래 태워달랬지. 집안을 도는 정도였지만…”
윤대통령의 차와의 인연은 이렇게 어린 시절, 그러니까 구한말에 시작된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차가 들어온 때가 문헌상 1903년, 윤대통령이 1897년 생이니까 아마도 처음으로 차를 탄 것은 1905년 전후가 될 것 같다. 단정하게 진곤색 바바리를 입고 갈색스틱을 짚은 채 시종 정원을 거닐면서 60여년 전 중국 상해로 건너간 일, 이어 영국 에딘버러대학으로 유학간 시절의 카라이프를 들려 주었다.

 

체크무늬 상의에 빨간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회색 하의, 갈색 구두로 정장한 대통령은 87세의 고령으로는 보기 어렵게 정정했다. “당숙이 미국에서 자전거 를 처음 사갖고 와서 그결 즐겨 탄 것이 아마도 내가 바퀴를 탄 처음 일이 될거야. 어른 자전거여서 한쪽 발을 보디 사이로 넣고 페달을 돌리며 탔지.”

 

사람들은 신기한 자전거 를 보고 “윤씨네는 축지법을 쓴다”고 수군댔단다. 윤치호씨는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에 모두 능한 분으로 당대의 선각자였다. 윤치호씨는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에 모두 능한 분으로 당대의 선각자였다. 육당 최남선(崔南善)이, “개화(開化)란 낱말도 고전에서 나왔겠지만 그 분이 처음 썼다”고 말했을 정도로 시대를 앞어 간 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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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의 카라이프를 회고하는 안국동 8번지 자택 정원에서의 해위

 

마르세이유 거쳐 영국으로
선각자를 낸 명문에서 태어난 해위는 일본 동경(東京)에 건너가 윤일선(尹日善)씨와 집을 얻어 자취생활을 하며 공부를 하다가 귀국한다. 그리고는 3.1 운동 전 해에 중국 상해로 떠날 것을 결심한다. 19세 때의 일이다.
그 무렵 국제도시 상해에는 손문(孫文)의 혁명으로 이룩된 중국 임시정부가 있었다. 밤낮 그곳 생각이 머리에 차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선친은, “목사가 되는 공부를 하라”고 하면서 중국이나 만주로 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마침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선생이 상해로 갈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몽양을 찾아가 함께 가 달라고 부탁, 쾌히 승락을 받았다. 일행은 일단 일본의 큐슈로 건너가 나가사끼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건너갔다. 해위는 그곳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진단’ 이란 잡지 발행을 돕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들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때 어른들은 아직 젊다 못해 어린 축에 드는 해위에게 “자네는 외국에 나가 공부한 다음 독립운동을 하라”고 권했다. 그는 여기서 영국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중국 여권을 얻어 중국 옷차림으로 일본 경찰의 거듭되는 검색을 피해 가까스로 42일만에 프랑스의 마르세이유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갔다. 해위의 나이 22세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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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공원에서 20살 때의 모습

 

이태리제 ‘피아트컨버터블’ 몰다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 입학한지 2년뒤 그는 이태리제 검은색 ‘피아트 컨버터블’ 을 샀다. “스포츠형 승용차로 앞좌석 둘에 , 짐을 싣도록 좁게 마련된 뒷 자리에도 임시로 좌석 하나가 생기는 차였어.”
값은 꽤나비싸 400파운드였다고 한다. 8,000명이나 되는 에딘버러 대학생 중 유일한 오너 드라이버였다.
값도 값이려니와 유일한 오너라는 점에서 차 주인의 인기가 어떠했는지는 짐작이 간다. 모두들 부러워했다.
이 차를 몰고 에딘버러 근교를 비롯하여 근방을 즐겨 드라이브 했다. 셀 모터가 없어 쇠막대를 손으로 돌려 시동을 걸어줘야 하는 3단 기어의 차였다.

 

‘네시’ 라는 이상한 수중동물이 산다는 네시호 에도 갔엇다. 그 무렵에도 네시는 수수께끼의 동물이었다.
워즈워드의 수선화 시로도 유명한 호수지방, 하이랜드의 자연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워즈워드 보다는 로버트 번즈의 시가 더 인기 있었고, 그 보다도 아이반호의 작가 월터스코트의 작품이 가장 인기있었다.

 

“지각없이 그랬지 않았나 생각해요. 오히려 면학에 열중해야 했었는데..” 해위는 젊은 시절을 이렇게 겸손하게 회고했다. 1920년대의 대 영제국은 유니온 책에 해질 날이 없었던 전성기였다. 그래서 영국인은 프랑스나 이태리 등 대륙 나라를 얼마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방학때 대륙으로 여행을 가면 어른들까지 영국 대학생이란 신분을 부러워하면서 아이들을 그곳에 유학 보냈으면 한다는 이야기들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비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고생모르고 지낸 것이 지각없던 시절의 낭비지.” 어쩌면 나라 없는 유학생이 남들로부터 업수히 여김 받기 싫은 나머지 부린 호기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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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에딘버러대학 친구들과의 한 때. (맨앞이 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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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21살 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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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딘버러대학 때는 테니스도 즐겼다. (맨 왼쪽이 해위)

 

관대한 영국의 교통경찰
“그때 영국에서는 자동차 판매회사에서 운전사겸 기술자가 나와 직접 1개월쯤 가르쳐 주었지요. 그리고 시험을 보는데 면허 내 주는 것 이 아주 관대해요. ‘제 목숨 제가 알아서 할텐데’ 하고 내주는 식이지" 그것이 영국식 이었다. “한번은 시골로 여행을 가는데 기분도 좋고 해서 스피드를 조금 냈더니 갑자기 앞에서 8~9 세 된 아이가 뛰어 드는 거예요. 급 브레이크를 밟았지 "아슬 아슬하게 비켜나 위기일발을 넘겼다.

 

“또 한번은 서둘러 시내를 빠져 나가다가 신호를 위반했어요. 교통경찰에게 잡혔지" 그 교통경찰 은 무서운 표정 을 지으며,“신호등을 못 보셨습니까” 하고,말하자면 지금의 스티커 같은걸 뗄 참이었다.
“서툴러서 그러니 양해해 주세요” 하고 사정을 했더니 다음에는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봐주었다.


“영국의 교통경찰은 봐 달라면 봐주지요. 관대하다고 할까" 그것이 크게 위법이거나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 대부분 훈방하는 것이 통례였다. “내 일생에 두번의 자동차 교통법규와 얽힌 에피소드인 셈이지" 해위는 그 때의 일들이 고운 추억으로 자꾸 되살아나는 듯했다.

“ 좋은 길,전망이 좋은 곳에서는 빨리 몰고 싶었지. 그러나 실제로 나는 과속은 별로 안했어. 빨라도,늦어도 안되고 보통 속도가 안전하고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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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시절인 60년 8월부터 62년 3월까지 대통령 전용차를 탔다.

 

“차 가지면 24시간 보다 더 많이 사는 것 같아.”
“지금 차를 몰고 싶으시진 않으세요.”
“지금은 차를 못 몰 것 같아.” 노령 탓도 있겠지만 교통질서나 교통체증 무관치는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가 교통사고율 제 1위란 통곈,참말 부끄러워요. 택시 운전기사들도 과속해선 안돼요. 승용차 운전자들도 빨리 달리려고만 하지말고 양보해 가며 달려야 하는데…, 질서를 무시하면 결국 귀중한 사람의 목숨이 다치게 되는 일이 따르게 되지요.”

 

영국에서는 2층 버스가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다니는 데도 사고 나는 일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에도 2층 버스가 있으면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고, 전철을 더 많이 놓아서 교통인구를 그리로 흡수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차를 가지면 24시간보다 더 많이 사는 것 같아요.” 차는 이제 생활필수품이 되어 가는데, 우리나라의 길은 너무 좁고 운전자나 보행자들이 교통질서를 제대로 안지키고 있어, 이런 일들이 하루빨리 바로잡혀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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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크스바겐 딱정벌레 차를 제일 좋아했지…”

에딘버러 대학생 시절, 몇해 동안 ‘피아트’를 탄 것으로 윤대통령의 오너 드라이버 생활은 끝을 맺는다. 전공이 선사(先史) 시대 고고학이어서 스페인과 프랑스의 유적을 찾는 일이 많았다.
그 시절은 철도의 전성시대여서 기차여행을 많이 했다.
귀국후, 해방될 때까지는 집안에 인력거 2대가 있어 그걸 이용했다.

 

해방 후에는 ‘오스틴’을 타다가 서울시장, 상공부 장관, 국회의원을 지낼 때는 3,500cc지프차를 탔다. 오스틴 무렵이 해위의 마지막 손수 운전시절이 될 것 같다. 관직생활은 그런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모두 지프를 타고 다녔는데 모양보다는 실용성이 아주 좋았지.”
6.25때 부산에 내려가 그는 적십자사 총재로 일했는데 그때는 지프차를 닮은 ‘랜드로버’를 탔다.


5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 만든 ‘시발’이 있기는 했지만 주로 택시로 사용되고 있었다.

신한당 총재 시절에는 ‘크라이슬러’ 8기통짜리를 탔는데 기름을 너무 먹어 얼마 안가 폴크스 바겐을 애용했다.
“딱정벌레 폴크스 바겐은 참 좋지. 내가 제일 좋아한 차였지.” 대통령후보 때는 국산차인 67년형 ‘포드 20M’을 타고 다녔다.


“그 후는 아들이 국산차인 ‘레코드 로얄’을 사줘서 타고 다녔지.” 대통령으로 있던 60년 8월부터 62년 3월 사이에는 물론, 대통령의 전용차를 탔다. 81년 부터는 정부에서 내준 ‘푸조’를 탔다. 금년 10월 초까지 줄곧 그걸 이용하다가 푸조가 낡아 정부에 반납하고 84년형 도요타 ‘크라운 로얄 살롱’ 2800cc 6기통 짜리로 바꾸었다.
현재 안국동 저택에는 해위 내외가 타는 ‘크라운’과 큰아들 내외가 타는 회색 ‘스텔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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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위가 신한당 총재시절에 탔던 ‘크라이슬러 차’

 

큰 아들 내외와 즐기는 카라이프
“내가 차를 타고 먼 나들이를 하는 것은 한달에 한 두번, 아산군 음봉면이 있는 선영에 성묘갈 때가 고작이지. 봄철에는 선영을 1주일에 한번씩은 꼭 가지만 지금은 날씨도 쌀쌀하고 해서…”
8순이 훨씬 넘은 노신사 해위는 선영에 갈 때는 반드시 부인 공덕귀 여사와 동승한다고 측근들이 말해 준다. 공여사는 현재 개신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여성분과를 책임맡고 전국을 누비며 전도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이 집도 내가 힘들여서 산 집이 아니고, 부조(父祖) 의 덕으로 이 집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셈이지. 나는 부모님의 사랑만 받고 남들처럼 효도를 못 한 것이 늘 한이 되고있어. 성묘 갈 때마다 후회막급이야. 돌아가신 뒤 산소의 잡초를 뜯는 것은 자기를 위로하는 것이지. 어디 부모임을 위로하는 것인가. 부디 살아계실 떄 효도를 다 해야지…” 피로할 것 같아 의자에 앉을 것을 권했다. 잔디 너머 가장자리로는 빨간 장미가 몇 송이 오후의 약한 햇살 아래 담쟁이 덩굴과 어울려 이름난 이 저택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아들 내외로 옮겨졌다.

 

“저희들 (큰아들씨 내외를 말함)은 어디를 가나 우리 내외와 함께 가려고 그러지. 올 봄에는 문경 새재를 둘러보고 수안보 온천에서 하루를 지냈어요. 저희들은 ‘스델라’를 타고,난 ‘푸조’였어. 아스팔트가 잘 되어 있어 아무 불편이 없더군. 가족이 단체로 1박을 한 셈이지."

 

색 다른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아 글쎄,3년 전 큰 아들이 장가를 가게 됐는데 자기들 신혼여행에,우리 내외와 같이 가야 된다는 구먼. 젊은 사람 신혼여행에 왜 우리 내외가 가느냐고 한사코 거절했는데… 막상 신혼여행을 떠 날 시간이 다가와도 같이 가야 한다는 거였어. 난처해서 ‘마음대로 하라. 나는 안 갈 테니까’ 했더니만 막무가내야. 날은저물고,충무까지는 보내야 되는데… ”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할 수 없이 우리 내외가 따라 갔다 왔어요. 남이 들어도 멋 척은 일이라서 ... "
해위는 누구나 익히 아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아들 내외가 그렇게 모신다고 했다.

 

“지난 여름에도 저희들 내외가 앞장서서 대구,포항을 거쳐 동해안을 둘러보고 백암온천에서 이틀 묵고 대관령 으로 해서 돌아왔는데 동해안은 언제 보아도 경치가 수려해" 큰 이들 상구씨는 아주 운전을 차분하게 잘 한다고 한다. 안국동 8번지의 다음주인이 될 윤상구(尹商求 . 35세 ) 씨는 미 국 시라큐스 대학건축과를 졸업하고 현재 ‘대양식품판매(주)’ 사장으로 있다.

 

둘째 이들 윤동구 (尹同求 . 30)씨는 미국 윌스턴미술대 를 마치고 현재 뉴욕에서 재미화가로 활동 중인데 형과는 달리 운전솜씨가 거친 편인 모양이다. “재작년 LA에서 작은 애 (윤동구씨를말함) 차를 탔더니 ‘ 와일드’ 하게 몰더 군 .모퉁이를 돌 때는 몸이 쓰러지기도 했어. 야단을 쳤지만 운전버릇이 쉽게 고쳐지나. 나는 빠르거나 난폭하게 모는 것은 좋아안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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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딘버러대학 방문 때(두 분 내외와 맏아들 내외)

 

60년 만에 에딘버러 대학을 방문
해위는 2년전, 아들 내외의 ‘효도관광’ 주선으로 60년 만에 모교인 에딘버러대학 방문을 비롯한 6개국 나들이를 40일 동안 하고 돌아왔다.

“70년에 미국을 잠시 다녀온 다음 12년 만의 해외여행인 데다 가는 곳이 모교 에딘버러대학이어서 떠나기 전부터 가슴이 설렜었지.”아들 내외가 마련한 ‘선물’이어서 더 흐뭇했을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고 다양하면서도 질서가 유지되는 그런 산 교육을 배웠지. 젊음을 앞세워 분수없이 큰 뜻을 품고 이세상이 내 것인양 생각했는데 오늘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아흔을 바라 보니 허무한 생각이 들어…”

해위가 모교를 방문하니 야단이었다. 큰 환영행사를 한다고 하면서 “사사로운 여행이니 그럴 것 없다”고 말렸다.
정다운 교사, 우뚝 솟아있는 에딘버러성 등 변치 않은 옛 모습…, 8천명이던 학생일 2만명으로 늘어난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여기서 해위는 그 옛날의 동창들을 만났다.

 

스무살 안팎의 멋장이 아가씨로, 피아트에 태워주었던 여학생은 80안팎의 할머니가 되어있었다.
“그때는 못만난 우드콰트 (80세 역사학자)가 작년 5월 나를 찾아왔을 때는 정말로 반가웠지.” 60여년 동안 못만났던 동창생은 시인인 남편과 함께 한국을 찾아 며칠동안 안국동에 머물다 돌아갔다.

60년 만의 모교 방문을 마치고 윤대통령 가족(공덕귀여사. 큰 아들 내외 동행)은 네덜란드, 프랑스, 이태리, 스위스를 거쳐 미국 LA로 가 둘쨰 아들 동구씨와 합규, 팜스프링 온천지대에서 20일간 머물다 귀국했다.

 

손주 재롱이 ‘즐거움’
윤보선 전 대통령은 8시에 기상, 1시간의 기구운동으로 아침 컨디션을 조절한다. 아침식사는 토스트 한쪽에 야채 한 접시를 우유한잔과 곁들어 가볍게 마치고 점심은 간단한 면류를 즐긴다. 저녁은 잡곡밥 한공기에 가끔 육류나 생선을 곁들여 든다. 짜고 매운 것은 피하는 편이고, 술과 담배는 50세 때 선친의 유언에 따라 끊었다고 한다.해위의 ‘1시간 걷기 운동’ 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4계절을 두고 하루도 쉬지않고 정원에서 한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 “방금도 ‘걷기운동’ 을 겸해서 손자와 노셨다”고 비서가 일러주었다.

“나의 요즈음 즐거움은 3살난 손자의 재롱을 보는 거지요.” 둘째 손주도 금년 12월에는 보게 된다며 기뻐한다.
취미는 독서와 화초 가꾸기. 정원의 나무며 꽃, 잔디는 그의 손길이 안 닿은 것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윤대통령은 아흔을 바라보는 노령에 오랜시간 인터뷰를 하면서 피로해 하지 않았다.


감사한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드리고 중문을 나서면서 소문난 아흔아홉간 집이 과연 얼마나 넓은 것인가를 헤어려 보고 싶었다. 한 때는 227간이었으나 지금은 170간 정도가 남아 있다는 것이 비서들의 말이다. 그러나 집의 크기 보다는 많은 현관과 주련, 그중에서 추사(秋史)와 고종(高宗)의 어필이 오히려 ‘안국동 8번지’의 가풍과 품위를 자연스레 보여주고 있었다.

[게재 198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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