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敦煌) 사막 속의 오아시스
2004-06-10  |   5,887 읽음
혜초는704년(성덕왕 3년) 신라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출가한 스님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광조우(廣洲)에서 약관 16세에 배를 타고 천축국(지금의 인도)으로 구도여행을 떠났다. 그는 4년 동안 천축국의 동서남북을 고행하다가 남천축국의 여행길에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오언시로 읊어냈다.

날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고 돌아보지도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으로 나를 위하여 소식을 전할까?


혜초는 천축국에서 돌아올 때 육로를 택했다. 지금의 캐시미르 지방에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북부를 지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돈황까지 왔다. 그는 돈황에 머무르며 천축국 여행기를 쓴다. 그것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천 개의 부처를 모신 명사산 천불동
중국의 북경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4천km 지점, 감숙성 서북쪽 황량한 사막 속에 돈황(敦煌)이라는 오아시스가 자리잡고 있다. 기원전 한무제 때부터 당, 송, 원을 거치며 이곳은 해상교통이 열리기 전까지 서역으로 가는 대상로의 길목이었다. 중국 본토의 비단, 도자기, 비취 등의 귀중품이 서쪽으로, 서쪽의 명마(名馬) 보옥, 전포 등은 동쪽으로 낙타 등에 실려 인도, 이란, 터키, 유럽까지 건너갔다. 훗날 우리는 이 길을 실크로드라 이름 붙인다. 낙타 등에 비단을 싣고 서역으로 가던 대상들은 이곳 돈황에서 며칠을 쉬며 짐을 정비하고 낙타에게도 휴식을 갖게 하고 식량을 비축하며 정보를 얻었다.
실크로드는 동서양의 상품만 오간 것이 아니다. 그 길을 따라 문명과 문화, 종교도 널리 전파되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문화가 들어온 것도 이 길을 통해서다. 8세기 ‘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고승 혜초도 인도에서 돌아올 때 천산산맥을 넘어 돈황을 거쳐갔다. 기나긴 세월을 거치며 수많은 고승들은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돈황에서 동남쪽으로 25km쯤 되는 곳에 명사산이 자리잡고 있다. 이 산은 모래산이지만 동쪽 면은 절벽으로 이어지고 그 아래쪽으로는 실개천이 흐른다. 이 절벽을 일컬어 천불동(千佛洞)이라 부른다. 천 개의 부처를 모시는 석굴이 있다는 뜻이다. 멀리서 보면 1.6km나 이어진 절벽이 벌집처럼 석굴로 수놓아져 있다. 이것이 바로 세계적인 문화유산, 돈황의 막고굴인 것이다. 신비함, 경이로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많은 수수께끼, 끝없이 이어
지는 황당무계한 이야기, 화려한 채색벽화와 무수한 조상들로 돈황은 사막의 전설이 되고 있다.

웃지 못할 과거를 간직한 막고굴
19세기말 청나라가 기울자 서구의 열강들은 동양의 거대한 땅 중국을 먹으려고 하이에나 떼처럼 달려들었다. 왕원록은 호북성 마성현 출신으로 숙주순방군 병졸로 있다가 제대하고 나니 해먹을 일이 없어 괴상한 옷을 걸치고는 자칭 도사가 되었다. 엉터리 왕도사는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 돈황으로 흘러들어 왔다. 돌아다니는 것도 지쳤는지 안주할 거처를 찾다가 그는 명사산 동쪽 절벽에 오가는 사람 없어 폐허로 남아 있는 수많은 동굴 중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동굴 하나를 골라 자리를 잡았다. 그 속에서 밥을 끓여 먹으며 겨울을 나기 위해 동굴 속 여기저기를 손질하다가 그는 입구 오른쪽이 터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 밑에 있던 모래를 치우니 이상한 소리를 내며 벽이 점점 갈라졌다.
왕도사는 이상한 생각에 귀를 벽에 대고 두드렸는데 그곳에서 빈소리가 났다. 벽을 헐자 벽 속에서 조그만 문이 나타나 그 문을 열어보니 안에는 수많은 경서와 문서, 회화 두루마리가 한방 가득 차 있었다. 왕도사는 깜짝 놀라 몇 권의 경서를 들고 돈황의 지사에게 보였지만 그가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자 석실을 다시 봉해 버렸다. 이때는 중국을 먹기 위해 서구 열강들이 중국의 변방으로 탐험대를 보내던 때다.
1905년 10월 러시아의 오브루 체프가 소문을 듣고 왕도사를 찾아와 하찮은 선물을 주고는 두 보따리의 경서를 가져갔다. 영국 탐험가 스타인은 1907년 봄 왕도사를 꼬셔 몇 푼의 돈을 주고 경서며 회화 25상자를 싸서 런던으로 보냈다. 같은 해 겨울,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가 베트남 하노이에 있던 고고학 교수 펠리오를 돈황으로 보냈다. 그는 한문과 산스크리트어 등을 해독할 수 있었는데 왕도사의 굴에서 일일이 체크해 알짜배기들만 29상자를 골라 프랑스로 실어보냈다. 그 속엔 세계적 보물인 우리의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도 있었다.
왕도사는 펠리오가 던져준 얼마의 돈을 챙겼다. 펠리오의 돈황고서 발견은 세계적인 화제가 되고 돈황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생겨났다. 그제서야 돈황의 경서며 회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청나라 조정은 아무리 나라가 기울어도 이것만은 챙겨야 되겠다고 생각해 나머지를 북경으로 운반했다. 그러나 그중 쓸만한 것은 왕도사가 모두 빼돌린 후였다. 북경으로 운반하던 관리도 얼마를 빼돌렸다. 1912년엔 일본의 오오다니 탐험대가 왕도사가 숨겨둔 것을 사갔고 1914년엔 영국의 스타인이 다시 와서 싼값에 왕도사로부터 다섯 상자를 챙겨 갔다. 중국은 현재도 스타인, 펠리오, 오오다니를 중국 문화재 3대 도둑이라 부른다.
1917년 돈황의 막고굴에서는 또 한번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난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자 전쟁에 진 러시아 병사 55명이 도망치다 이곳에 피신해 막고굴에서 불을 피워 끼니를 때우고 벽화 속의 금박을 벗겨내 정제를 했다. 지금, 사막의 오아시스 돈황은 웃지 못할 역사를 뒤로 한 채 그 신비스러운 이름으로 세계 각국의 여행객을 끌어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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