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죽변 등대 이상으로의 도피와 현실로 회귀하는 갈림길
2005-06-20  |   5,620 읽음
등대(燈臺)를 굳이 풀이하면 ‘등을 올려 놓는 받침’일 것이다. 영어로도 ‘lighthouse’이니 어설프게 해석해 보자면 ‘불빛을 내는 집’ 정도. 하지만 기자의 기억에 남아 있는 단어는 ‘guiding light’다. 영어 공부한답시고 AFKN를 보던 시절에 시청한 드라마 ‘guiding light’. 드라마 내용과 등대의 상관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것은 언제나 번쩍이는 등대였다. 왠지 ‘인도하는 불빛’을 등대의 제대로 된 정의라고 여기고 싶다. 운치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기대고 싶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인생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방황하는 시절은 있게 마련이다. 방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책이 될 수도 있고, 종교나 친구일 수도 있다. 이러한 등대 같은 존재가 하나라도 있다면 복 받은 일. 마음속의 등대를 그리며 망망대해에 던져진 한 조각 배가 되어 현실 속의 등대를 찾아 나섰다.

푸른 바다, 파란 하늘, 대나무, 하얀 등대

중앙고속도로 풍기IC에서 나가 영주에서 36번으로 갈아타고 울진에 도착. 7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가 죽변 이정표를 따라 나가면 죽변면에 도착한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방파제 도달하기 전 좌회전, 언덕배기로 올라가면 죽변 등대가 나온다.

죽변 등대는 높이 약 16m의 팔각형 콘크리트 구조물로 1910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석유등을 켜다가 나중에 전등으로 바뀌었다. 20초마다 조명이 돌면서 35km 거리까지 빛을 보내고 있다. 지금의 자리는 신라 진흥왕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성을 쌓고 봉수대 역할을 한 곳. 1904년 러·일전쟁 때는 해상 감시용 망루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지리적 특성은 고스란히 등대로 이어져 동해바다의 안내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에나 어울릴 법한 새하얀 구조물은 도화지 같은 새파란 하늘에 선명한 라인을 그리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등대가 있는 언덕은 빽빽한 대나무로 가득하다. 마을이름에 대나무 ‘竹’(죽)자가 들어간 것이 괜한 것이 아닐 정도로 촘촘하게 우거져 있다. 대나무에 요새처럼 둘러싸여 있는 등대는 보는 위치에 따라 당당하게, 때로는 수줍어하듯 고개를 빠끔히 내민 채 뱃사람들의 무사귀환을 돕고 있다.

등대 아래쪽으로 펼쳐진 대가실 해변은 하얗게 부서지는 푸른 파도와 파란 하늘, 양옆을 감싸고 있는 언덕배기와 소나무숲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다. 이곳은 얼마 전 드라마의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교회와 집으로 이루어진 세트장이 자리 잡고 있다. 드라마 촬영지로 떴다 하면 시끌벅적하기 일쑤지만 이곳은 조용하기 그지없고, 여전히 때 묻지 않은 순박함을 간직하고 있다.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등대 저편으로 보이는 또 다른 언덕에는 드라마 촬영을 위해 지어 놓은 가짜 등대가 서 있다. 세상사를 초월한 듯 초점 없는 눈으로 수평선만을 바라보는 가짜 등대. 본연의 임무를 잊은 채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가짜 등대를 보는 진짜 등대의 마음도 복잡하리라. 쉴 새 없이 밤새 불을 밝히는 자신의 운명과 비교해 시샘을 느낄까. 자신보다 못한 존재에 대한 우월감으로 한껏 콧대를 세우고 있을까. 아니면 외로움을 달래 주는 벗과 같은 사랑스런 존재로 여기고 있을까.

등대가 있기에 우리는 바다로 나간다

대게를 주로 잡는다는 죽변항은 왠지 모를 한가함이 감돈다. 아직은 대게 철이 끝나지 않았지만 정화 작업기간이라 대게 잡기를 중단한 상태. 항구의 활기참이 잠시 잦아졌어도 기다란 방파제 끝에는 위치를 알리는 붉은색과 흰색 등대가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는 이미 지고, 흐린 노을마저 어스름에 묻혀 버리는 저녁 한때. 들어오는 배는 거의 없건만 등대는 연신 불빛을 번쩍거리고 있다. 수호신처럼 파도를 잔잔하게 만드는 마력이 등대에 숨어 있는 것일까. 방파제 너머로는 철썩거리며 파도가 넘실대지만 안쪽으로는 고요만이 흐르고 있다. 한 귀로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다른 귀로 느껴지는 고요한 정적은 현실과 이상의 갈림길마냥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 갈림길에서 등대의 불빛마저 없었다면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밤하늘만 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920번 해안도로 옆의 푸른 바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 있을 것만 같은 이상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마음속에 끓어오른다. 이러한 동경 또한 이상의 세계에서 문득 현실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 돌아올 수 있도록 불을 밝혀 주는 등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글 | 임유신 사진 | 박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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