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바다에 부딪친 햇살, 해저터널에 스미다
2005-06-15  |   5,568 읽음
통영에서는하늘이 바다를 물들이지 않고 바다가 하늘을 물들인다. 바다가 푸른 날은 하늘도 푸르고, 바다가 흐린 날은 하늘도 흐리다. 통영에서는 바다가 하루의 일기를 결정한다. 그런데 바다는 나서는 법이 없다. 너무 고요하고 잔잔해 호수이거나 강이 아닌지 착각할 정도이다. 시인 정지용은 바다를 표현하는 우리말은 경탄음 ‘아아’가 겹쳐 세계 어느 나라 말보다 크고 넓은 것을 가리키는 맛이 난다고 말했다. 우미(うみ )니 씨(sea) 따위의 말은 바다 전체보다 바다에 뜬 섬이나 배 하나를 가리키는 말쯤밖에 안 들린다는 것이다.
오래 전 한때 이 바다가 피로 물들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혈염산하(血染山河). 적의 피로 이 바다를 물들이겠다는 이순신 장군의 칼에 새겨진 그 글귀의 뜻을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그 차디차고 단호한 결의, 그리고 심연처럼 깊은 고독을 생각한다. 이 잔잔하고 평온한 바다에서 다시금 그를 떠올리게 됨은 아직 그 ‘역사’에서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청마거리 지나 세병관 가는 길, 그리고 충렬사 앞 명정

몇 해 전인가 서울에서 통영을 갔을 때는 정말 아득히 멀다는 느낌이었다. 아마 일곱 시간은 넘게 걸렸던 기억이다. 그러던 것이 지난 2002년 대전-진주간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5시간도 채 걸리지 않게 되었다. 통영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린 것은 서울강남터미널을 떠난 지 4시간 30분 만이었다.

통영은 지난 1955년 9월 1일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되면서 통영군과 분리되었고, 다시 95년 1월 1일 충무시와 통영군을 합쳐 통영시가 되었다. 충무라는 이름은 시호 충무공에서 따왔고, 통영은 통제영의 줄임말이니 어떻든 시의 이름에서부터 이순신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 셈이다. 통영 앞바다가 바로 한산대첩의 현장이며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에 잠긴’ 그 한산섬이 바로 이웃해 있음이다.

또한 통영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을 비롯해,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극작가 유치진, 그리고 토지의 작가 박경리, 화가 전혁림 등 수많은 예술인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골목을 걷다가 문득 만나게 되는 윤이상거리며 청마거리 등이 반갑다. 한 지역에서 이토록 많은 예술가들이 난 것은 역시 바다 때문인가.

통영에서의 첫 발걸음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강구안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면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저편으로 언덕 위 하얀집들이 다닥다닥 이어져 그야말로 이국적인 정취에 빠져들게 된다.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주홍, 파랑 지붕에 하얀색 담장이 있는 집들 사이 골목으로 올라가 본다. 마당에 야자수가 있는 집들이 눈에 많이 띈다. 그런데 가운데쯤 집들이 텅 비어 있다. 이유인즉 소방도로를 내기 위해 모두 철거할 집들이란다. 속은 비어 이미 폐가가 되었는데 예산부족 탓인지 공사가 빨리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동네사람이 말한다. 글쎄, 소방도로는 필요하고 또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르지만 왠지 특유의 풍경이 사라질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다.
강구안에는 또 유명한 충무김밥집들이 늘어서 있고, 남망산조각공원에 올라 주변 경치를 조망하기도 좋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곳에 자리한 공원 휴게소 테이블에 앉아 바라보는 전망이 일품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중앙시장 뒤편에서 세병관 가는 길에 만나는 청마거리에서 시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니 바로‘통영중앙우체국’이다. ‘행복’이란 시에 나오는 그 우체국이다. 여느 우체국과 다를 바 없는 외형이지만 그런 사연을 알고 보면 왠지 남달라 보인다. 시에 나오는 연정의 대상은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이영도. 그녀는 청마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청마는 20여 년간 5천 통의 연서를 써 보냈으니, 그 사랑, 참 애틋하다.

세병관은 1604년 한산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제1대 통제사가 이순신)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통제영성과 관아를 지었으나 모두 스러지고 유일하게 남은 객사 건물이다. 주변 일대는 통제영 복원공사가 진행중이고, 이를 위해 세병관 뒤편에 있는 통영초등학교도 이전키로 했다. 교정에 서 있는 이순신 동상이 세병관 기둥 사이로 보인다.

매표소에서 만난 이에 따르면 세병관이 일제 때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초등학교 건물로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나마 온전한 모습을 보관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세병관 입구 은목서 앞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산호수(아왜나무)는 그때 일본인들이 자기들 표식으로 심었다고 한다.

세병관을 나와 오르막 차도를 따라 조금 걸으면 이순신의 사당이 있는 충렬사가 나온다. 충렬사가 자리한 사거리 길 건너편에는 충렬사 제향에 쓸 목적으로 판 우물 명정샘이 있다. 명정샘 앞에 동판으로 만든 원고지 한 장이 눈에 띄는데,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1962년)에서 이곳 명정샘을 묘사한 대목이다. 그 어떤 문학비보다 문학적인 비석이다. 그 풍경이 밟힐 듯 눈에 선해 여기 옮긴다.

‘충렬사에 이르는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아지랑이가 감도는 봄날 핏빛같은 꽃을 피운다. 그 길 연변에 명정골 우물이 부부처럼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음력 이월 풍신제를 올릴 무렵이면 고을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국내 하나뿐인 해저터널, 소매물도 등대섬을 보다

통영에서만 볼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바로 해저터널일 것이다. 물론 지금은 더 이상 큰 관심거리가 아니지만 1927년 개통 당시에는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로서 매우 경이로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차들의 통행이 금지되고, 사람들만 왕래하는 모습인데 그래도 바다 속을 걸어간다 생각하면 신기한 느낌이다. 소문만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실망을 하든 이곳에서는 그냥 일상의 풍경에 다름 아니다.

통영반도와 미륵도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은 1967년 충무교가 완공되기 전까지 주요한 교통로 구실을 했다. 해저터널을 지나 밖으로 나와서 다시 돌아올 때 충무교 위를 걸어서오면 해저터널의 위치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 충무교에서 내려다보는 바다가 바로 ‘판데목’이라 불린 곳으로 한산대첩 때 쫓기던 왜선들이 물길인줄 알고 잘못 들어왔다가 무수히 주검으로 사라진 곳이다. 일제가 이곳에 해저터널을 뚫은 이유도 왜군들이 많이 죽은 지점 위로 걸어다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다.

충무교 건너편으로 보이는 신식다리가 바로 통영대교이고, 이쪽 물길 일대가 통영운하이다. 길이 1천420m, 너비 55m, 수심 3m에 이르는 통영운하는 부산에서 여수간 남해 내항로(內航路)의 요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통영대교는 특히 밤에 보는 야경이 운하의 정취와 어울려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통영이나 남해 부근에 와서 한려수도를 가까이 볼 수 있다면 커다란 덤일 것이다. 사실 섬에 간다는 것은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엄두를 내기 어렵다. 그래서 편도 15분 거리의 한산섬에 가 볼 요량으로 도남동 유람선터미널로 향했다. 사람이 모여야만 가는 부정기선이라 한산섬 가는 배는 영 떠날 줄을 모른다. 그런데 매물도 가는 배편은 사람이 제법 많다. 매물도를 돌아 한산섬에 1시간 머무르는 코스로 도합 3시간 10분 코스다. 일정이 조금 지체되지만 그 배를 타기로 한다.


일기예보에서 흔히 말하는 앞바다를 넘어 먼바다로 나간다. 비진도를 비롯해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지나는 동안에도 먼바다는 평온했다. 배의 선장은 이런 날씨도 드물다고 말하고 운이 좋은 승객들이라고 했다. 간간이 돌고래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50분 남짓 걸려 매물도에 도착했다. 배는 익숙한 솜씨로 기암절벽이 잘 보이도록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등대섬 소매물도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송림 우거진 아늑한 섬 한산도는 ‘수루’가 있는 제승당을 돌아보는 것이 전부다. 누군가 ‘세 번쯤은 올 만한 곳’이라 했는데 맞는 말 같다. 겨울보다는 신록 우거진 이맘때가 좋겠다. 그래도 에메랄드빛보다 더 짙은 바다는 실컷 눈에 담았다. 통영의 바다는 평온하면서도 깊고 넓다. 바다를 덮은 하늘까지 그 잔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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