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尙州) 바람 앞의 자전거 도시
2005-05-16  |   5,867 읽음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 보인다…….(중략)

길가에 서 있는 자전거를 보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는 황동규의 시가 떠오른다. 이 시구에는 어떤 중독성이 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4개의 바퀴를 발진시키는 자동차보다 두 발로 저어 2개의 바퀴를 굴리는 자전거가 좀더 땀 냄새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때로 자동차를 두고 자전거를 타고 싶어지는 이유다. 두 발로 바퀴를 굴리는 일은 짐짓 노동의 행위가 연상되기도 한다. 본질은 그럴지 몰라도 자전거의 가장 큰 덕목은 바로 낭만일 것이다. 학창시절,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하이킹’이란 용어가 그렇듯 또는 최인호의 소설 ‘겨울나그네’에서 자전거에 부딪치는 것으로 시작되는 치명적인 사랑처럼……. 그러고 보면 얼마나 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인가.
시원스레 뚫린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길. 고속버스에 앉아 떠오르는 자전거에 대한 단상이 자연스럽다. 바로 자전거의 도시, 상주에 가는 길이므로.

박물관에서 자전거를 타고 남장사에 오르다
전주와 나주의 앞 글자를 따서 전라도가 되었듯이 경상도 또한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그만큼 상주라는 지역이 유서 깊고 비중 있는 곳이었다는 얘기다. 예로부터 상주는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세 가지 흰 것이란 바로 쌀, 목화, 누에고치를 일컬었는데 해방 후부터는 목화 자리를 곶감이 대신 차지하기 시작했다.
상주는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데다 서쪽과 북쪽이 높고 동쪽과 남쪽이 낮은 지형 덕분에 농사철에 볕이 잘 들어 곡식이 풍성했다. 기름진 땅에서 나는 쌀은 진상품이었고 아직도 그 명성을 잇고 있다. 이런 지형적인 조건에다 옛날에는 금과 무쇠도 난 모양이어서 삼국이 자주 싸움을 벌였다. 속리산 가까이 있는 견훤산성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누에치기의 전통 또한 무척 오래 되었다고 전해온다. 고령가야 터였다는 함창읍 증촌리는 신라 시대부터 명주 산지로 이름난 곳이라 한다. 그러나 값싼 화학섬유가 쏟아져 나옴에 따라 힘들게 무명실을 뽑는 모습은 더 이상 보기 어려워졌다. 누에를 치기는 하지만 대부분 번데기 단계에서 팔려나간다. 요즘은 동충하초나 누에가루로 생산되어 많이 팔린다.
최근에는 이 삼백에 하나를 더해 사백의 고장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하나 더 흰 것이란 자전거의 하얀 바큇살을 이름이다. 조금 억지스런 느낌도 있으나 그만큼 자전거는 최근의 상주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확실히 자리 잡은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전거박물관을 세운 것도 그렇거니와 온 동네에 곶감이 내 걸리는 10월쯤 열리는 자전거축제가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전국에 자전거도시라는 이름을 알린 것이다. 자전거축제가 열릴 시기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자전거를 타고 나와 진풍경을 이룬다하니 그야말로 모두가 함께 즐기는 축제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상주 땅에 들어서 먼저 자전거박물관을 찾았다. 두 개의 바퀴를 형상화한 박물관 건물은 왜소해 보였으나 안으로 들어서면 자전거 역사 초창기를 수놓았던 진귀한 자전거를 만날 수 있다. 최초의 페달식 자전거라는 K. 맥밀런 자전거나 드라이지네 등은 마치 나무 조각 같은 느낌으로 자전거시대의 향수를 맛보게 해준다. 그밖에 진기한 자전거를 많이 갖춘 수고로움은 알겠으나 좀더 규모 있는 시설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가까이 있는 남장사에 가기로 한다. 박물관에서는 보통 1시간을 기준으로 무상으로 빌려주는데 사람이 많지 않은 평일에는 조금 더 오래 타도 괜찮다. 보이는 길은 평지에 가깝지만 은근한 오르막이 계속 이어진다. 가는 도중 음료수를 사먹으러 들어간 구멍가게의 주인이 “남장사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려면 걸어서 가는 것보다 두 배는 힘들 것”이라고 귀띔한다. 대수롭게 본 것이 화근인 셈이었는데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은 밀면서 또 타면서 간다. 힘은 들지만 모처럼 하이킹하는 기분을 즐긴다. 무엇보다 차들의 통행이 거의 없어 좋다. 가는 길에 남장동이란 마을을 지나는데 맛 좋은 ‘상주 곶감’의 주요 산지가 바로 이곳이다.
이윽고 나타난 남장사는 아담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절이었다. 작지만 무게감이 있고 별로 꾸밈이 없는 경내가 마음에 든다. 신라시대에 세워진 고찰로 남장동을 사하촌으로 두었을 만큼 예전에는 절 경역이 넓었다고 한다. 입구에 새로 지은 건물도 단청을 칠하지 않고 나뭇결 그대로 두어 오래된 건물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극락보전 뒤에 한 그루 서 있는 목련이 활짝 피었다. 그런데 왜 목련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드는 걸까. 목련은 여러 그루가 함께 있는 것을 별로 본 적이 없다. 여기 저기 외따로 혼자 서 있는 까닭에 외로워 보이는 것일까. 화사한 꽃잎이 동백꽃보다 더 처연하게 빨리 지고 만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내려가는 길은 자전거 페달을 거의 밟지 않아도 될 만큼 쉽고 상쾌했다. 오를 때 멀게만 느껴졌던 길은 너무 아쉬울 정도로 짧았다.

자전거 붐은 자동차에 밀려 사라지는 것일까
상주 함창 공갈못에 /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줄게 / 이내 품에 잠자주소
잠자기는 어렵잖소 / 연밥 따기 늦어가오…….

옛날부터 입으로 전해져 오는 구전가요 가운데 가장 유명한 노래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상주 함창 공갈못 노래’일 것이다. 어떤 노래는 입에 한번 흥얼거리면 하루 온종일 따라붙는 마법에 걸리는데 이 노래 또한 상주 땅을 다니는 내내 달라붙었다. 그 노래를 기억하는 까닭에 시외버스를 타고 공갈못에 가보기로 한다. 양정리에 내려보니 절경이었다는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공갈못 옛터’ 비와 조그맣게 남은 저수지엔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연대만 무성하다. 한쪽에는 공갈못 복원계획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곳 마을사람의 말에 따르면 예산부족을 핑계로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시골과 함께 있는 도시의 동선은 대개 시외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행선지를 바꿀 때는 다시 터미널로 나와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동 용포 선산 방면이라 쓰인 버스를 타고 오래된 가옥 양진당이며 오작당이 있는 낙동면 방면으로 나가본다. 너른 들판을 지나는 길 철길 앞에서 버스가 신호대기에 걸려 멈춰 서고 부산행 무궁화열차가 지나간다.
양진당은 복원공사 중인 모습인데 거의 끝났다고 대문 앞에 선 작업자가 말했다. 임진왜란 때 상주 땅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던 조정(1555~1636년) 선생의 살림집 안채이다. 좁은 툇마루가 복도처럼 이어진 안채에 들어서자 마치 요새 같은 방들의 구조가 독특하다. 길 건너편에 있는 오작당은 원래 양진당에 속했던 건물이나 이쪽으로 옮겨왔다. 지금은 11대손이 살고 있는 여염집이다.
인적 드문 조용한 마을에 트럭이 하나 나타나더니 두 사람이 내려 거대한 전봇대를 하나 쓱 뽑아 싣고는 이내 사라진다. 평화로움을 깨는 조용한 사건은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 하늘은 건조하다. 먼지는 쉽게 가라앉지 못하고 지상을 떠돈다.
다시 시내로 나와 시민공원이 있는 제방으로 나간다. 북천을 따라 자전거전용도로가 이어진 길이다.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벚꽃나무 사이로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모습이 보인다.
상주는 확실히 다른 어느 지역보다 자전거가 많으며 생활 깊숙이 자리해 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분명 과도기로 보인다. 자칫하면 자전거 도시라는 명성이 퇴색하지 않을까 싶다. 등하교길에 장관을 이룬다는 학생들의 자전거 행렬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드문드문 지나갈 뿐이었다.
택시기사는 이처럼 자전거가 눈에 띄게 줄어든 이유가 외곽순환도로가 뚫리고 자동차가 많아지면서부터라고 말했다. 실제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학생들이 시내로 진입할 때는 위태로워 보였다. 시내 한복판의 어떤 자전거도로는 대부분 노점상이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자동차에 밀려 자전거가 줄어드는가 생각하면 씁쓸한 기분이다. 자전거 도시로 상징되는 건강한 생명력의 도시 이미지는 저절로 지켜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도시에 다가서지 못하고 언저리를 돌며 도시미학을 찾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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