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완도 남도 들녘에서 들려오는 봄 오는 소리
2005-04-21  |   7,210 읽음
몸과 맘이 따로 놀 듯 입춘이란 날은 봄이 오기 한참 전에 잡혀 있는 것일까. 입춘이 한 달여나 지나도 매서운 추위가 가실 줄 모르니 봄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올 겨울은 따뜻할 것이라는 전망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던 겨울의 초입, 서둘러 찾아올 봄에 대한 기대를 키운 따뜻한 겨울의 배신이 그리움을 더욱 키웠는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의 잔상이 가시지 않았지만 햇살에 조금씩 따사로워지던 3월초,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남쪽으로 향했다. 추위가 봄을 시샘하는 것인지 봄이 사람들의 기대에 콧대를 세우는 것인지 남도에도 봄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곳곳에 움트는 따사로운 기운은 존재를 확인한 안도감이 되어 가슴속에 남았다.

이국적인 풍경, 신성리 들녘 푸른 보리밭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목포까지 내려간 후 2번 국도를 따라 강진 방면으로 가다 보면 해남으로 이어지는 13번 국도를 만난다. 국도 주변으로는 막바지에 다다른 배추 수확이 한창이고, 씨 뿌리기를 기다리는 붉은 황토밭이 곳곳에 펼쳐진다. 아지랑이와 함께 피어나는 흙냄새를 기대했건만 언 땅이 녹으려면 아직 멀었는지 어렴풋한 냄새만 기억 속에서 피어오른다.
13번 국도를 타고 해남 쪽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좌우로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지금까지 타고 왔던 길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특히 계곡면 신성리 일대를 가득 메운 푸른 보리밭은 신선하다 못해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커다란 산을 뒤로 한 채 넓디 넓은 푸르른 보리밭이 펼쳐져 있고 그 옆에는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시골풍경은 ‘전형적인’이란 말보다는 ‘소박한’이란 단어를 붙여주고 싶다. 새벽녘에 찾아간 신성리의 보리밭에는 ‘평온함’이란 단어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을 찾기 힘들 정도로 고즈넉한 기운이 감돈다.
새벽녘 볼을 얼얼하게 할 정도로 바람은 찬데도 보리 잎새는 푸르름을 간직한 채 수그릴 줄을 모른다. 성질이 급한 것일까 아니면 고통을 겪어야 성숙한다는 것을 미리 깨달은 것일까. 화사함을 자랑하는 꽃보다 더 어여쁘게 보이는 이유는 황량함에 지쳐 버린 마음속에 푸른 감성을 먼저 심어 주기 때문일 것이다.
13번 국도를 타고 위로 올라가다 보면 월출산국립공원에 다다르게 된다. 병풍 같은 월출산의 수려한 풍광 밑으로 차밭이 펼쳐진다. 바로 월출산 강진다원으로, 녹차 만드는 회사에서 경작하는 곳. 가지런하게 정렬된 차나무는 올이 굵은 실로 짠 스웨터처럼 산자락을 덮고 있다. 손이라도 댔다가는 금방 흐트러질 것만 같은 모습. 인공적이긴 하지만 대자연과 어우러진 풍광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아직 새순이 돋지 않은 차나무는 겨우내 풍파 속에 푸르름은 사라졌지만 잎의 모양새만큼은 봄날의 영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차밭에서 내려오는 길, 무위사 앞 논밭둑에서 쥐불 놓기가 한창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둑에 불을 놓고 논밭으로 번지기 전에 재빨리 끈다. 시뻘건 불길이 사방에 넘쳐나고 들녘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하다. 누렇던 논둑은 어느새 새까만 얼룩을 남기며 흉한 몰골을 드러낸다. 봄을 맞이하기 위한 통과의례치고는 너무 혹독한 의식이다. 이러한 혹독함은 흉한 상처를 아물게 할 봄의 따뜻한 마음을 좀더 빨리 불러내고자 하는 바람이기에 너그러이 용서될 수 있을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한 아저씨가 작업하는 분들에게 캔 커피를 돌리다 사진 찍고 있는 사진기자에게도 하나 건넨다. “전 아닌데요”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슨 상관있냐는 듯 씩 웃으며 “그냥 받아요”라며 건네는 손길이 정겹기만 하다.
갔던 길을 되돌아 13번 국도를 타고 완도로 내려갔다. 완도교를 지나 우회전한 다음 쭉 내려가다 수목원 표지를 보고 좌회전해서 들어가면 완도수목원에 다다른다. 완도수목원은 난대림을 대표하는 수종인 동백나무, 붉가시나무, 후박나무, 황칠나무 등 상록활엽 자생수림이 2천여ha에 분포하고 있다. 국내 유일의 천연난대식물의 자생지인 지역특색을 살린 난대수목원이다. 동백 군락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건만 동백꽃 구경이 쉽지가 않다.
수목원의 근사한 정취는 동백에 대한 미련을 금세 잊게 해주었다. 수목원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는 동안 계속되는 푸르름은 남도에 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육지와 섬, 바다 그리고 수목원을 가득 메운 나무들. 녹음이 짙은 봄날의 그것에는 미칠 수는 없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멋이 서려 있다.
봄을 찾아 내려간 남도기행은 기대감만 잔뜩 키운 채 끝났다. 햇살은 따사로웠지만 대지는 아직 봄을 맞이할 채비를 끝내지 않았다. 좀 있으면 화사하게 꽃 피우고 푸른 새순이 돋아나는 본격적인 봄이 시작될 것이다. 한두 달 뒤에 다시 들르고 싶다는 바람이 강하게 솟구쳐 올랐다. 이런 바람도 태동하는 봄의 기운을 미리 느꼈기에 가질 수 있는 것이리라.
글 | 임유신 사진 | 임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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