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木浦) 목포는 유달산이다
2005-03-31  |   6,890 읽음
목포는항구다라는 영화가 있다. 조재현, 차인표라는 배우가 나오는, 그러나 영화의 주무대가 목포라는 것을 빼놓고는 어떤 멋진 풍경이나 감흥을 보여주지 못했다. 괜찮은 배우를 데려다놓고 왜 영화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반면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는 지금 들어도 가슴이 울린다. 그녀의 대표곡인 ‘목포의 눈물’과 함께 1940년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그 노래는 이렇다.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유달산 잔디 위에 놀던 옛날도/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어두운 그늘 벗은 항구도시. 더 이상 눈물은 없다
아무튼 ‘목포의 눈물’이 상징하는 것처럼 목포는 오랫동안 어두운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80년대의 시인 문병란이 ‘목포’라는 시에서 ‘더 갈 데 없는 사람들이 와서/동백꽃처럼 타오르다/슬프게 시들어 버리는 곳/항상 술을 마시고 싶은 곳이다/……(중략)/끝끝내 바다로 뛰어들지 못한/목포는 자살보다/술맛이 더 어울리는 곳/술이 취해서 봐도/술이 깨어서 봐도/유달산만 으렁으렁 이빨을 가는구나’라고 했듯이 애잔함을 넘어 어둡고 절망적인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목포는 이미 오래 전에 삼학도가 육지가 되어버렸듯이 많은 것이 변했다. 변증법적인 변화야 필요한 것이지만 항구의 정취마저 사라진 것은 아쉽지 않을 수 없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종점이자 KTX 호남선 종점으로 목포의 분위기는 이전보다 많이 밝아졌다. 그러나 인구가 좀체 늘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빠지고 있다는 데 목포사람들의 고민이 있다.
목포역에 내리면 바로 번화한 시가지다. 건널목을 건너 상가가 밀집한 골목길을 헤집어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면 큰 봉우리 같은 게 나타나는데 바로 노적봉이다. 유달산 산행의 시작 지점이다.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이 적은 군세로 적을 이기기 위해 봉우리 위에 짚을 쌓아 군량미처럼 보이게 했다는 유래를 안고 있다. 말하자면 군사전략상의 허장성세(虛張聲勢)다. ‘목포의 눈물’ 노랫말에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일제 때 이게 빌미가 되어 금지곡이 되고, 발음이 비슷한‘삼백연(三柏淵) 원안풍(願安風)’으로 바꿔 나오게 되었다는 웃지 못할 얘기. 일본의 이순신 콤플렉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민동종’이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쓴 편액이 걸린 종각에 서면 앞으로 바다가 뒤로는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종각 뒤 바위 언덕에 오르면 가려져 있던 풍경이 드러난다. 초원관광호텔이 보이는 뒤로 이제 뭍이 되어버린 삼학도가 보이고, 그 앞의 물길이 운하처럼 시내로 들어오는 끝에 배들이 정박해 있다. 인근 섬으로 다니는 여객선 터미널이 이곳에 있다.
영산강이 흘러드는 이곳 앞바다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108일 동안이나 진을 쳤다는 길다란 섬 고하도와 영암 삼호, 대아산, 달리도, 외달도, 장화도 같은 섬들이 들어차 있어 파도나 바람을 억누르는 역할을 해준다. 그래서 바다가 잔잔하다. 목포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 고하도의 용두귀범(석양에 만선을 이룬 60~70척의 배가 서로 끊기지 않고 꼬리를 물고 들어오는 풍경)이라는 것인데, 요즘은 예전처럼 고기잡이가 되지 않는다. 얼마 있으면 이곳으로 다리가 연결될 예정이란다.
유달산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입장료를 내라 한다. 이순신 동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파수병인 양 작은 대포가 하나 있는데 오포대라 쓰여 있다. 구한말과 일제 때 이 포를 쏘아 정오를 알렸다. 오포대 앞에서 만난 문화유산해설가 한 분이 유달산의 내력을 들려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유교가 도달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유달산이라는 것. 중국 항주와 가장 가까운 거리가 바로 이곳이란다. 마한 이전에 이곳으로 진나라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중국 어선들이 태풍을 피해 주변 섬으로 피신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자연 교류가 많았다는 설명이다.
목포사람들의 반은 신안과 관련되어 있고, 이중 반은 무안, 또 반은 영암 하는 식으로 진도, 해남까지 주변 지역과 목포의 관계가 깊다. 영암 땅에 있는 아산을 두고 이르는 아산춘우(봄 아산에 아지랑이가 올라오고 봄비가 내리는 풍경)가 목포팔경의 하나에 드는 이유다. 여수, 순천을 별도로 하고 서남부지역의 중심지로서 목포의 역할이 큰 것은 비단 도시규모만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밀접하기 때문. 그래서 인근 지역과 도시통합을 희망하는 분위기가 있다.
유달산이 지금의 모습으로 갖춰진 것은 20여 년에 불과하다. 그 이전에는 오막살이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러던 것을 바위와 바위 사이 틈에 굴착을 하고 나무를 심었다. 목포 인구가 24만 명인데 당시 2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한다. 그러자 새가 날아오기 시작했고, 이제 물도 생길 조짐이다. 유달산이 목포의 자랑인 이유는 가난한 도시의 시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이루어 냈다는 자긍심 때문이다.
유달산 정상인 일등바위까지는 제법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한다. 그래봐야 30분이면 오르지만. 가는 길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시가지를 바라보며 서 있다. 노래비 주변에는 그녀의 노래가 끊이지 않고 나온다. 지나는 등산객 아주머니가 “이난영이가 콘서트를 하네”라며 노래를 따라 흥얼거린다. 아직도 이난영을 친숙하게 여기고 있다는 표시다. 사실 목포사람들의 자랑은 유달산만이 아니다. 이난영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애정은 오래고 깊다. 1969년 전국 처음으로 노래비가 세워졌다는 것과 그녀를 추모하는 이난영 가요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는 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유달산 정상에 서서 다도해를 바라보다
노령산맥에서 뻗어 나온 마지막 봉우리인 높이 228m의 유달산 정상에 오르면 다도해가 펼쳐진다. 서해 끄트머리에 가깝긴 하지만 마치 남해 같은 풍경이다. 섬들이 아른거리며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른 때문이다. 아직 차가운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의 기운은 이렇게 꿈틀거리며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내려오는 길은 등산로를 따라 샛길로 빠졌다. 언덕 위의 오래된 집들은 목포항 개항 초기부터 조성되어온 목포1번지로 불리는 동네. 목포항은 인천항, 부산항, 원산항에 이어 1897년에 개항되었고, 일제가 강점한 이후 식민지 거점 도시의 하나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때 광주시보다 경제사정이 앞서기도 했으나 해방 이후 항구로서의 기능이 바뀜에 따라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지리적인 이점을 살려 중국과의 교역에 새로운 기대를 안고 있다.
이훈동정원을 지나 아랫길로 내려오면 동양척식회사 건물이 있는 골목 주변으로 일본식 가옥들이 몇 집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목포문화원이 있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일제 때 준르네상스양식으로 지었다는 장방형의 2층 건물은 시립도서관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박화성 문학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삐걱거리는 나무층계를 올라 문을 열면 이태리 대리석으로 만든 벽난로와 그때 쓰던 거울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고 보니 목포가 낳은 예술가들이 적지 않은데 한국현대문학사 최초의 여성작가인 박화성 씨를 비롯해 극작가 차범석, 김지하 시인 그리고 동양화가 남농 허건 씨 등이 이곳 출신이다.
목포문화원 축대를 따라 돌계단을 오르면 다시 노적봉이 나오고 유달산이다. 목포는 물론 항구다. 그러나 이제 목포는 유달산이라 해야 옳을 듯하다. 서울 어느 곳에서 보아도 남산이 보이듯 목포는 어느 방향에서나 유달산이 보인다. 그리고 남산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고 쉽게 다가설 수 있으며 또 넉넉하게 받아준다. 언제든 올라 발아래 탁 펼쳐지는 다도해를 볼 수 있으니 시름은 쉬이 바람에 날려버릴 수 있겠다. 그래서 목포는 유달산이다. 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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