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송지호와 화진포호 겨울 호수의 그윽한 정취에 취하다
2005-02-25  |   5,917 읽음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푹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시인 정지용은 ‘호수’라는 시에서 그리운 사람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호수에 비유해 읊었다. 보고 싶은 마음이 다들 바다같이 크기만 한 것일까?
“겨울 바다를 찾는 사람은 많아도 왜 겨울 호수는 찾는 사람이 없을까?”라는 물음에 동행한 사진기자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황량하잖아” 하고 내뱉었다. 해질녘 도착한 화진포호에서 제일 먼저 반겨준 것은 차가운 겨울바람. 수천 마리가 모여든다는 철새와 고니도 남쪽으로 떠나 버리고 거니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얼음 위로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석양과, 목도리처럼 호수를 두르고 있는 갈대숲, 호수를 다시금 쳐다보게 만드는 전설이 기다리고 있었다.
때묻지 않은 정취 그대로인 송지호
강원도 고성에는 강 하구와 바다가 닿는 곳에 생긴 석호가 두 곳 있다. 송지호와 동해안에서 제일 큰 화진포호가 그곳.
속초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가다 보면 송지호 해수욕장 이정표가 나온다. 구성리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군부대 지나 오른쪽으로 조그만 샛길이 있다. 시멘트로 단정하게 포장해 놓은 길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눈앞에 넓은 호수가 펼쳐진다.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송지호는 천연기념물인 겨울철새 고니의 도래지로 알려져 있다. 물빛이 청명하고 수심이 일정해 바닷고기와 민물고기가 함께 살고 있어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낚시를 금지해 겨울 정취를 살려 주는 강태공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포장길을 조금 지나면 흙길이 나온다. 구불구불한 호반길을 갈대를 벗삼아 걷다 보면 야트막한 동산에 서 있는 정자와 마주친다. 정자에 올라서면 너른 호수와 함께 저 멀리 동해바다가 보인다. 고니와 가을 철새들은 이미 떠나 버려 얼어붙기 시작한 호수 위엔 철새의 발자국과 깃털만이 남아 있다. 송지호는 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이제는 상상 속에 그려봐야 한다. 1996년과 2000년 두 번의 산불이 이곳 소나무들을 휩쓸고 가버렸기 때문. 처음 봤을 때 목장에 온 듯한 이국적인 풍경은 바로 산불이 만들어낸 것이다.

송지호에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조선 초기에 송지호는 비옥한 땅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욕심 많은 부자가 살고 있었다. 성격이 포악하고 인색한 부자는 집에 찾아온 거지 부녀를 흠씬 두들겨 패서 내쫓았다. 부녀의 딱한 모습을 본 금강산의 유명한 고승 또한 정부자의 집에 찾아갔다가 쇠똥만 잔뜩 얻은 채 쫓겨났다. 고승은 쇠절구를 부자의 금방아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 그러자 쇠절구가 떨어진 곳에서 물기둥이 치솟아 정부자의 집과 금방아간 그리고 논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정부자는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송지호에서 나와 다시 북쪽으로 가다 지하차도 지나 좌회전, 1.5km 정도 가다 보면 왕곡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북방식 전통가옥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곳은 마을을 둘러싼 다섯 개의 큰 산 덕분에 6·25 때 폭격을 피할 수 있었고,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초가집을 헐어내는 새마을운동의 영향을 받지 않아 옛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96년 고성산불 때도 이곳에는 불길이 미치지 않았다고.

솔숲과 바다가 빚어내는 절경, 화진포호
왕곡마을에서 나와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화진포호에 닿는다. 호숫가에 해당화가 만발해 이름 붙여진 화진포는 둘레 16km의 동해안 최대의 자연호수다. 해마다 11월이면 넓은 갈대밭에 수천 마리의 철새와 고니가 날아들고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주변경관이 빼어나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호수 주변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이기붕 전 부통령, 김일성 별장 등이 자리잡고 있다.

거의 자연상태에 가까운 송지호와 달리 화진포호는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해 고즈넉한 분위기는 잘 살아 있다. 화진포호는 그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운치 있지만 언덕배기에서 솔숲 사이로 보는 경치도 빼어나다. 특히 7번 국도상에서 보는 호수와 바다와 하늘이 한데 모인 풍광은 얼어서 하얘진 호수와 푸른빛이 감도는 바다의 선명한 대비가 잊지 못할 여운을 남긴다.
송지호와 마찬가지로 화진포호에도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지금의 호수 자리에 열산현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어느 해 큰비가 내려서 마을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날씨가 좋고 바람이 잔잔해 물결이 일지 않을 때는 옛날 마을터와 담장을 쌓았던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봉이 김선달에 관한 전설도 있다. 겨울이 되어 호수가 얼고 갈대가 쓰러진 모습이 마치 가을 들녘 같아서 김선달이 서울 부자에게 큰 평야라고 속여 호수를 팔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설, 화진포에는 옛날 이화진이라는 성질이 고약한 시아버지와 착한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노인은 시주하러 온 스님을 푸대접했고 이를 지켜본 며느리는 미안한 마음에 쌀을 퍼들고 스님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스님은 찾을 수 없었고 며느리가 살던 집과 텃밭은 시퍼런 호수로 변해 버렸다. 며느리는 허망하고 애통해 허리띠를 풀어 목을 매 죽었다. 그후 온 나라에 홍수와 흉년, 전염병이 돌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며느리의 시신을 찾아 분묘를 만들고, 일년에 한 번 서낭굿을 해준 뒤로는 농사도 잘되고 전염병도 사라졌다고 한다.
겨울은 만물을 움츠러들게 한다. 겨울 호수 또한 봄가을의 정취를 떠올리며 찾아갔다가는 실망감에 발자취만 남기고 오기 일쑤. 하지만 바람 한 점, 햇살 하나에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한다면 겨울 호수의 쓸쓸함조차도 멋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글 | 임유신 사진 | 박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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