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토함산 해를 향해 가다
2005-01-19  |   5,464 읽음
‘마알간 해야, 네가 웃음지면 홀로라도 나는 좋아라.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고운 해야 아침을 기다리는 애띤 얼굴(중략). 고운 해야, 모든 어둠 먹고 애띤 얼굴 솟아라.’
해를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 먹으니 박두진의 시 ‘해’에 곡을 붙인 가요의 한 구절이 머릿속에 맴돈다. 문득 앳되고 고운 해를 떠올린 것은 ‘태양’이 더 어울릴 법한 장엄한 해보다 따스하게 보다듬어 줄 수 있는 그런 해를 바라서인지 모르겠다.
연말이 오고 신년 초하루가 되면 누구나 한번쯤 평소와는 다른 ‘제대로 된’ 해를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기 마련. 신년 첫날 곳곳의 해돋이 명소에 수만 명의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드는 것은 이제 너무나 낯익은 풍경이다. 온 국민의 통과의례처럼 되어 버린 신년 해맞이의 그럴싸한 목적은 새로운 각오와 희망을 다지자는 것. 하지만 그동안 쌓이고 쌓인 회한을 뜨거운 첫날의 빛으로 녹여 버리고자 하는 맘은 분명히 그보다 앞설 것이다.

일출 놓친 아쉬움 석양으로 달래
경주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토함산(吐含山)은 해발고도 745m로 경주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경부고속도로 경주IC에서 빠져나가 계속 직진하면 7번 국도와 만나고, 우회전 후 902번 도로로 갈아타면 토함산에 이르게 된다. 토함산은 신라인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계룡산(서악), 태백산(북악), 지리산(남악), 팔공산(중악)과 함께 동악으로 불린다. 너무나도 유명한 불국사, 석굴암 말고도 신라 천년의 역사를 말해 주는 수많은 유물과 유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토함산이라는 이름은 들이마시고 토해낸다는 뜻. 산이 동해바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안개가 자주 끼는데, 바다 쪽에서 밀려오는 안개를 들이마시고 토해내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또 하나는 신라 4대왕인 탈해왕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토함산의 날씨는 변화무쌍 그 자체. 눈앞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다가 어느 틈엔가 걷혀 동해의 넘실대는 푸른 물결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일출로 유명한 토함산은 이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석양을 선사한다. 불국사에서 약 8km에 이르는 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해돋이와 석양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석굴암 주차장에 닿는다. 가을 단풍길로 잘 알려진 이 도로는 아흔아홉 굽이로 되어 있다고. 이 말이 곧이곧대로 들릴 만큼 그 구불구불함에 잠시도 숨돌릴 틈이 없다.
넓은 평야에 우뚝 솟은 산을 바라보면 첩첩산중과는 또 다른 신비감이 든다. 산의 뿌리를 볼 수 있기 때문. 토함산에서 바라보는 서쪽은 경주시내를 품고 있는 평야 뒤로 간간이 자그마한 봉우리 한 두개가 보이고 그 뒤로 본격적으로 산맥이 시작된다. 산의 뿌리이기보다 산맥의 뿌리이기에 신비하다 못해 장엄한 기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저 멀리 수많은 높은 봉우리들이 능선처럼 이어져 있는 곳은 마치 세상의 끝을 보는 듯하다. 그 끝은 하루종일 광명을 내비친 해의 보금자리리라.
정상에 걸린 해는 이것이 뜨는 것인지 지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사그러들 줄 모르는 그 기운은 형체를 잃어 버리며 서서히 주변으로 붉게 물들어 간다. 활화산의 용암이 분출하듯 시뻘겋고 샛노란 기운은 다음날의 일출을 기다리는 이에게 진한 그리움과 여운을 흩뿌린 채 가라앉는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 동안 눈을 한번 감았다 뜰 때마다 색조를 달리하며 찬란한 변화를 거듭하는 석양. 그 색조의 한 켠 한 켠마다 지나온 한 해의 온갖 고민과 갈등을 담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어스름이 짙어갈수록 조급함만 커져 간다. 토함산에서 바라보는 해돋이는 우리나라 8경 중의 하나로 꼽힌다. 양옆으로 펼쳐진 수많은 봉우리와 그 끝에 이르러 푸르게 펼쳐지는 감포 앞바다. 바다와 산을 아우르기 때문에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감동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생명력 가득한 겨울 목장 풍경
무작정 해돋이를 보기 위해 달려왔지만 바다의 푸른 기운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짙은 구름 때문에 뒤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잠시 구름의 빈 자리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는 것. 보다 정갈한 맘의 준비를 하고 와야 속내를 드러내려는 심산인가 보다. 멀리까지 찾아온 것에 대한 보답으로 잠시 얼굴을 내비친 아량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 나중에야 안 것이었지만 토함산 이름의 유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바다에서 직접 올라오는 해는 일 년에 두세 번밖에 볼 수 없다고 한다.
토함산에서 놓치기 쉬운 것이 바로 토함산 목장. 석굴암에서 내려오다가 불국사 쪽으로 꺾지 말고 직진하면 평탄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내리막으로 바뀔 무렵 오른쪽에 너른 풀밭이 나타난다. 산자락에 펼쳐진 목장의 초입은 왠지 초라한 모습이다. 알고 찾아갔더라도 “에게~ 겨우 이거밖에 안되잖아” 하면서 그냥 지나쳐 갈지도 모를 일. 하지만 첫눈에 보이는 것은 목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시멘트로 대강 만들어 놓은 목장길은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지만 둘이 걷기엔 아주 넉넉하다. 목장을 휘감고 도는 목장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초입에서 느꼈던 실망감은 어느새 탄성으로 바뀐다. 입체감의 오묘함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드넓게 펼쳐진 목장은 올려보다 내려보고 어느새 평탄해지기를 반복한다. 봄의 푸르름이 그리워지고 하다못해 가을에라도 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갖게 마련. 하지만 겨울에 보는 목장도 썰렁하지는 않다. 흔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황량함과는 거리가 먼, 군데군데 푸른 빛이 도는 풀밭은 다가올 봄날의 생명력을 미리 가늠케 한다. 목장의 풍광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다 보면 언제 이곳이 목장이었냐는 듯 운치 있는 억새 밭이 펼쳐진다.
억새밭을 지나면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내리막길과 솔숲으로 뻗은 갈림길이 나온다. 좀더 거닐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빠듯한 일정을 떠올리며 되돌아 나왔다. 무언가 아쉬움을 남기고 가야 나중에라도 다시 한 번 찾지 않을까 하는 핑계거리를 마음에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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