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품은 겨울 포구 3 7번 국도 속초~고성을 훑다
2004-12-21  |   6,887 읽음
‘길은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다. 길 위에 서 있기 위해 그 길에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다. 허나, 때로는 마음 속에 새겨진 어떤 길 하나가 밤바다의 등대처럼 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때가 있다. 시린 날에 더욱 그리워지는 동해 바다, 그 넓디넓은 폭을 바짝 끌어안고 달리는 7번 국도는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항·포구, 작고 예쁜 어촌마을들이 파노라마처럼 연이어지는 국내 최고의 로맨틱 로드다. 몽유병 환자처럼 이끌려 도착한 영동고속도로 끝에서 북으로 방향을 잡아 2박 3일을 붙들리고 만 속초~고성 해안도로. 속초와 설악산을 수없이 지나면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바닷가 마을 3곳을 카이엔과 함께 찾아냈다. 매번 동해에 가도 아는 데만 다니는 사람, 그래서 동해가 뻔하다고 말하는 사람, 내년엔 꼭 이 곳에 가보자. 우리가 밟아보지 못한 처녀지가, 그곳엔 아직도 많더라.

운치가 남다른 내 작은 바다, 외옹치항
겨울 바다, 그것도 동해를 여행지로 선택하는 사람은 조금 스산한 기분에 빠져 있거나, 그도 아니면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일 공산이 크다. 이들에게 밤 포구에서의 한 잔 술은 빼놓을 수 없는 일. 금방이라도 쨍하고 깨질 것 같은 찬 공기에 살갗을 대고 비릿한 바닷내음과 파도 소리를 벗삼아 술 한 잔 걸치기에, 동해의 유명 항구들은 너무 번잡스럽다. 대낮의 시골 장터에라도 온 양 어지러운 난전판에 호객행위도 요란한 속초 대포항이 대표적. 포구이되 좀 작고 한갓지며, 운치는 있으나 화려하지 않은, 그런 곳은 없는 걸까? 상상 속에만 그리던 술맛 절로 나는 밤바다가 대포항에서 걸어 10분 거리에 있다. 이름도 멋진 외옹치항.
대포항 북쪽 1.5km 거리에 있는 외옹치항은 1980년대에 개발된 작은 항구로, 근처의 군부대가 철수하면서 막 관광지로 떠오르는 중이다. 마을 이름은 항아리를 엎어놓은 형상의 뒷산, 옹치산에서 따온 것. 5~6년 전 우연히 들렀을 때는 미로 같은 골목길을 헤매다 어찌어찌 해 튀어나오던(그래서 다시 찾지는 못할 듯한) 작은 어촌이었을 뿐인데, 지금은 7번 국도에 뚜렷한 이정표와 함께 진입로가 뚫려 있다. 80여 세대가 성황당을 모시고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통적인 어촌마을인 외옹치는, 그 성황제가 춘천시 동면 조양리 전치곡 마을과 함께 장승을 세우는 풍속이 살아 있는 몇 안 되는 부락제로 민속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여행객들에게는 뭐니뭐니 해도 이 마을이 품고 있는 바다 풍경이 매력적이다. 바닷물이 큰 우물처럼 마을 안쪽을 파고든 외옹치항에는 저녁 7~8시면 문을 닫는 활어난전 대여섯 채가 일렬로 늘어서 있고, 그 앞 한 발짝도 못 미친 바다에 정박된 배 몇 척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있을 뿐이다. 좀 춥더라도 천막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바닷가에 숯불을 피워 달라하면 그 날 막 잡아 올린 가리비며 밖에 널어 말리던 오징어를 턱하니 얹어 구워준다. 쫀득쫀득 씹히는 해물과 소주 한 잔, 손에 따뜻한 숯불을 쬐어가며 발 앞 3평쯤의 바다를 내 것인 양 차지하고 앉은 기분이란, 동해의 여느 포구에서도 느낄 수 없던 낭만을 안겨준다. 낮에는 옛 군부대 터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속초 전경을 감상할 수 있고, 방파제에서 릴이나 대낚시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시들해진 삶을 절로 일으켜주는 아침 항구들
밤의 포구가 인생의 고락을 풀어놓고 쉬게 한다면, 아침 포구는 시들해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생명연장제’ 같다. 일출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해안절벽 위의 정자, 청간정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바닷가 마을은 아야진. 어여쁜 이름에 마음이 끌려 찾아든 아야진은 ‘게 다리’처럼 긴 방파제 두 개로 바다를 가두어 큰말항, 작은말항 두 개를 거느린 꽤 큰 항구다. 좁은 진입로로 들어서 느닷없이 마주친 아침 항구는 유난히 분주해 보였다. 막 배가 도착했었는지, 커다란 그물에 아주머니 열댓 분이 매달려 주렁주렁 올라오는 생선들을 재빠른 손놀림으로 훑어 내리는 모습을 보며 차를 세우는 사이, 갈매기 한 마리가 독수리 같은 속도로 눈앞의 생선더미에서 실한 놈 하나를 채어 달아나고 이를 본 아주머니가 하늘에 대고 욕짓거리를 퍼부으면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까악까악 소리치며 공중돌기를 하던 갈매기떼가 사라지자 아주머니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바삐 손을 놀린다. “지금 만지시는 생선이 뭐예요?” “양미리여. 지금이 제철이야. 아주 바빠 죽갔어.” 연이어지는 질문에 냉큼 대꾸를 해주면서도 아주머니의 손놀림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는다. 이 곳은 11~12월이 양미리 철. 갓 잡은 것을 바로 손질해 3일에서 1주일쯤 밖에다 걸어 자연건조한 뒤 조리거나 구워 먹으면 아주 고소한 맛이 난다.
항구의 멋이라 하면 고성군에서 가장 큰 거진항도 빼놓을 수 없다. 규모가 제법 큰 항구인 만큼 다양한 종류의 배들이 네다섯 겹씩 줄지어 정박해 있고 짠 냄새를 맡으며 활기차게 살아가는 바닷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항구 북쪽 산의 등대공원은 귀찮더라도 꼭 올라볼 것. 거진 등대는 원래 유인 등대였다가 가까운 대진 등대에서 동시 관할하게 되면서 주변을 체육공원으로 단장했다. 소나무숲길 끝, 거진항이 내려다보이는 나무 벤치에 앉아 있노라면 ‘이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 멀리 고동을 울리며 항구로 들어오는 배와 먼저 들어와 정박되어 있는 배들, 부둣가에 앉아 그물을 다듬는 사람들이며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일꾼, 담배를 물고 쉬고 있는 아저씨들까지…… 어쩌면 모두가 한 그림으로 그렇게나 생기 있어 보일까 싶다. 거진항은 입구의 건어물 가게들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물건을 떼어다 팔기 일쑤인 동해안의 많은 건어물 센터들과 달리 집집마다 직접 빨래처럼 널어 말리고 있는 오징어며 명태, 양미리 등이 눈길을 잡아끌기 때문. 거진항은 매년 2월 열리는 고성군 명태축제의 메인 이벤트가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아주머니가 방금 뜯어 담고 있던 황태채 한 봉지와 빨랫줄(?)에서 바로 걷어 구워주는 오징어 한 마리를 들고 차에 오르니, 서울 오는 내내 입도 심심하지 않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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