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민둥산 하늘 아래 은빛 융단, 억새풀밭을 거닐다
2004-11-19  |   5,106 읽음
가을에도 억새는 비울 것 다 비운 그런 노년의 표정으로 능선에서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보내며 서 있을까? 어린 치기도, 덧없는 혈기도 다 버리고 통곡도 다 버리고 성성한 백발로 이제 나도 그 옆에 한 줄기 억새로 섰으면 싶다.’
꽃을 사랑하는 작가 손광성 씨는 <나도 꽃처럼 피어나고 싶다>는 수필집에서 하얗게 팬 억세풀꽃을 보고 이렇게 읊조렸다. 흔히 가을을 풍성한 수확의 이미지나 화려한 단풍의 색감으로 예찬하는 이가 많지만, 사실 이 계절은 인생으로 보면 스스로 저물 때를 준비해 가는 쓸쓸한 기로다. 젊은 날 끝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과 욕망의 불씨는 그만 덮을 것. 스스로 빈 몸이 되지 않고는 황혼도 아름다이 맞을 수 없다.

가을꽃 구경하며 오르는 깔딱고개길
강원도 정선의 민둥산은 창녕 화왕산, 밀양 사자평 등과 함께 국내에서 첫손 꼽히는 억새 군락지다. 해발 1천119m, 하늘 아래 펼쳐진 산꼭대기 능선에서 마치 눈이 쌓인 듯 은빛으로 출렁이는 평원을 마주하는 일은 이 가을 어떤 풍광보다도 가슴 벅찬 감동을 안긴다. 정상까지 숨이 넘어갈 듯 가파르게 이어진 깔딱고개길은 결코 녹록치 않은 우리네 인생과 닮아 있다. 조금 이른 때라면 주변에서 쉽게 눈에 띌 가을꽃들―자줏빛 길쭉한 꽃이 매달린 산여귀나 샛노란 감국, 흔히 ‘들국화’라 불리는 쑥부쟁이, 보랏빛 꽃술이 솜방망이처럼 엉켜 피는 엉겅퀴, 이름도 향기로운 꽃향유 등을 반기고 쓰다듬으며 쉬엄쉬엄 오르면 그만이다.
이름 그대로 계곡이나 암벽 하나 없이, 흔한 소나무도 한 그루 없이 밋밋하게 솟아 있는 민둥산은 원래 산나물이 많이 자라라고 해마다 불을 놓는 통에 ‘까까머리’ 산이 되었다. 봄여름에는 그늘 한 점 없이 황량한 초지만 펼쳐질 뿐이지만, 해마다 10월이면 하얀 억새풀꽃을 백발처럼 머리 가득히 이고 눈부신 가을 이벤트를 준비한다. 민둥산 억새의 절정기는 보통 ‘억새풀 큰잔치’가 펼쳐지는 10월 중순이지만 올해는 조금 늦어 11월 초까지 늦춰질 전망이라니, 당장에라도 찾아가 볼 만하다.
민둥산 등산로는 흔히 증산초등학교~발구덕~정상 코스를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선까지는 영동고속도로 진부 IC에서 빠져 59번 국도를 따르고, 정선을 지나 태백·사북 방향으로 30km쯤 더 달리면 오른쪽에 증산역이 나타난다. 이 부근에서 좌회전하는 증산초등학교 팻말을 따라 작은 터널 하나를 통과하면 곧장 민둥산 오름길. 여행객이 붐비는 주말이나 휴가철에는 증산초교 앞에 차를 세우고 1시간 반 남짓의 등산로를 걸어 오르는 것이 편하며, 평일에는 해발 840여m 지점의 발구덕마을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 어묵과 메밀전 등을 파는 포장마차가 서 있는 발구덕마을 끄트머리에 차를 세우고 민둥산 정상까지 걸어 오르는 데는 40분이면 충분하다.

능선 따라 20만 평의 은빛 물결
민둥산 억새는 정상을 지나는 가르마 같은 능선길을 따라 20만 평 규모로 펼쳐져 있다. 그러나 정상 부근에서 볼 수 있는 억새는 이 중 10~2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인근 지억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계속 군락을 이룬다. 억새를 가장 멋지게 감상하는 방법은 해질 무렵 해를 마주하고 서서 그 빛을 반사하며 출렁이는 억새의 물결을 따라 걷는 것. 그러나 이곳의 억새는 키가 거의 한 길이 넘고 매우 짙어서 길이 아닌 곳은 헤쳐나가기 어려울 정도이므로 뚜렷이 난 능선 길만을 따라 감상하며 걷도록 한다.
민둥산에 오르다가 억새를 갈대로 착각하는 등산객들을 제법 만났다. “우와~ 갈대밭 엄청 넓다” 하며 감탄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인데 정상을 밟아보니 이게 웬일인가, 정선군청에서 턱하니 박아놓은 안내문에 ‘같대밭으로 유명한 민둥산은 어쩌고’ 하며 당당히도 써 있는 것이다. 꼬챙이처럼 긴 대 끄트머리에 나풀나풀한 이삭 꽃을 피우는 억새와 갈대는 일반인의 눈으로 혼동하기 쉽기는 하다. 그러나 억새는 산이나 비탈길에 주로 자라고, 갈대는 물가에 무리를 이뤄 자라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고, 꽃 모양도 억새는 결 좋은 머리칼처럼 한 가닥씩 나풀대는 반면 갈대는 군데군데 뭉쳐놓은 꼴이라 조금만 신경 쓰면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사람들의 실수야 그렇다 치고 안내문의 글귀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다.
민둥산이 유명한 것은 억새 장관뿐 아니라 돌리네가 발달한 독특한 카르스트 지형 때문이기도 하다. 돌리네는 석회암 지대 땅속의 탄산칼슘이 빗물에 녹아내려 나타나는 침해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실제로 민둥산 주변에는 움푹 팬 분지 모양의 땅이 모두 12곳 이상 펼쳐져 있다. 산 정상의 전망대에 올라 마주 뵈는 산자락이 그렇고, 산 중턱의 발구덕마을도 사실은 8개의 구덩이(돌리네)가 있다는 ‘팔구덕마을’에서 시작된 이름이다.
발구덕마을은 원래 평지였으나 70년대 이후 지반이 서서히 내려앉아 군데군데 마치 화산의 분화구 같은 땅이 생겨났고, 지금도 계속 꺼져 내리는 통에 많은 사람들이 산 밑 마을로 옮겨갔다. 터를 닦고 살기는 어려우나 지형의 특성상 학술적 보존가치가 아주 높아 지금은 할머니 두 분이 터지기를 하며 살고 계시다. 지질학자들은 발구덕마을 아래로 동양 최대 규모의 석회동굴이 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것이 개발만 되면 세계적으로 내로라 할 관광자원이 될 것이라는 아랫마을 아주머니의 너스레는, 일어나도 한참 먼 얘기겠다 싶지만 어쩐지 정감이 가 마주 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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