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羅州) 아주 오래된 길, 풍경이 말을 건네다
2004-10-20  |   8,575 읽음
저물 무렵가까운 강변으로 나가 해지는 풍경, 노을을 보거나 흐린 날 들녘에 나가 바람에 스러지는 풀잎 사이를 거닐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도 도시에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가슴 먹먹할 때 그것을 위안해 줄 무언가가 이 도시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주의 넉넉한 들녘과 영산강 일대를 둘러보며 왠지 그런 생각이 사무치게 들었다. 이제 가을인 것이다.

금성관에서 금성교 가는 길, 옛 시절의 흔적들
전라도(全羅道)라는 지명이 전주(全州)와 나주(羅州)를 합친 이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번 나주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주는 꽤 크고 유서 깊은 도시라는 얘기인데 그런 내력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실제 나주는 고려 성종 2년(983)에 전국 12목 가운데 하나인 나주목이 되었다가 조선 고종 33년(1896년)에 전라남도 관찰부가 광주로 옮겨가기까지 900여년 동안 전라남도 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 나주평야로 널리 알려져 있듯 땅이 넓고 논농사, 밭농사, 과일농사가 두루 잘 되었기에 물산이 풍성했던 곳이다.
신라 때 금성이라 불린 나주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근거지. 견훤이 세력을 키워 북쪽 전주로 진출할 무렵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영산강을 거슬러올라 이 지방을 점령하고 이름을 나주로 고쳤다. 왕건은 나주 지방의 토호였던 오다련의 딸(장화왕후)과 정략결혼을 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왕건의 뒤를 이은 고려 2대 임금 혜종이다. 결국 이러한 인연으로 나주목의 지위에 오르고, ‘천년 목사 고을’ 나주의 배경이 된다.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는데 나주목 객사와 부속건물인 금성관, 내아, 정수루, 망화루며 나주읍성의 남문이었던 남고문 등이다. 나주목 객사인 금성관은 옛 군청건물이자 지금은 시의회당으로 쓰이는 하얀색 건물 뒤에 완전하게 가려져 있다. 일부러 찾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곳에 옛 객사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기 어렵겠다. 말하자면 일제의 수법이다.
객사건물로는 전국에서도 가장 큰 규모였던 금성관은 지금은 본채만 남아있고 주변 땅은 발굴을 하는 양 어지러이 파헤쳐져 있다. 오랜 풍파에 퇴색한 모습이지만 당당한 풍모는 잃지 않고 있다. 커다란 팽나무 두 그루 서 있는 쪽으로는 나주목사를 지낸 이들의 공적비 등이 세워져 있다.
금성관에서 나주곰탕 하얀집, 고조현외과를 지나 골목을 걸어나오면 나주신협 옆의 조그만 다리 ‘금성교’에 이르는데, 이 길을 일등도로라 부른 모양이다. 다리 아래 흐르는 개울은 나주시내를 흐르는 나주천. 시내의 하천치고는 물이 맑고 시골같은 정경을 보여준다. 하천가에 핀 꽃은 어디서 많이 본듯한데 잎이 무척 넓게 퍼져있다. 지나는 할머니 한 분이 일본무궁화라고 일러준다. 동네는 아담하고 깔끔한 분위기가 정갈하다. 곳곳에 일본식 건물 잔재가 남아있는데 어두운 분위기가 아니라 밝다. 비단잉어가 노니는 하천은 마치 정원의 연못 같다.
붉은 담벼락, 무너진 지붕이 아주 오래된 공장인 듯 시선을 사로잡는다. 함석지붕이며 무너진 철골을 그대로 놔두고 있는데 흉물스럽지는 않고 근대시기의 한 기억을 드러내고 있다. 정문쪽으로 다가가 보니 ‘나주잠사주식회사’라는 상호가 낡은 시멘트기둥에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관사로 쓰였을 법한 적산가옥이 비교적 깨끗하게 남아있다. 빛 바랜 담벼락에 낡은 페인트칠, 죽은 나무에 매달려있는 초록 잎사귀 등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천을 따라 발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박경중 고가’가 나타난다. 문 앞에서 인기척을 내자 집주인인 박경중(58) 씨가 반가이 맞아준다. 나주문화원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대를 이어 이곳에 직접 거처하며 옛것을 보존하고,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옛날부터 박자흥댁이라 불러요. 저희 4대조가 1910년을 전후해 3년 정도 걸려 이 집을 지었지요. 아마 이처럼 옛날 그대로 사는 집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 옆의 초가집은 1884년 6대조가 여기에 터를 잡았을 때 지은 것으로 원형이 잘 남아있어요.”
자흥은 장흥을 일컫는데 전라도 사람들은 대부분 자흥이라 발음한단다. 집을 지은 4대조가 당시 장흥군수를 했고, 머물던 관아를 생각해 그 동헌과 비슷하게 건물을 지어 이렇게 정면 일곱 칸에 이르는 규모가 큰집을 지었다는 설명이다. 당시 집을 지을 때 일반 잡기 즉 못이라거나 끌, 먹줄 등 도구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윤이 나게 반들반들한 대청마루 위로 쌀이 열가마 반이 들어가는 큰 뒤주며 시렁 위 가지런히 놓여있는 소반 등에서 전통적인 삶의 반듯한 자세, 생활박물관으로서의 친근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등대가 있는 내륙 포구, 영산포 지나 반남고분군으로
지금은 폐쇄된 옛 나주역사를 지나 영산포로 간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이 된 기억만 남기고 이제 기능은 잃어버린 역사 앞 광장에는 할머니 한 분이 밭에서 난 나락을 펼쳐놓고 쭉정이를 고르고 있을 뿐이었다.
가까운 시기 나주의 역사를 말할 때면 대개 시로 합쳐지기 이전의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군청 소재지이기도 했던 나주읍이 행정의 중심지였다면 영산강을 중심으로 커온 영산포읍은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영산강은 담양군 추월산에서 발원해 목포 앞바다로 빠져나가기까지 300리에 걸쳐 흐른다.
1914년 대전과 목포를 잇는 호남선이 놓이고 영산포에 역이 생기면서 교통뿐 아니라 온갖 물산의 집산지로서 기능이 커지게 된다. 영산포 선창은 추자도의 멸치젓, 흑산도의 홍어, 영광의 굴비 등 갖가지 생선과 젓갈들이 모여드는 곳으로도 이름이 났다.
이윽고 영산포 삼거리. 정약용, 정약전 형제가 제각기 강진으로 흑산도로 귀양살이를 떠날 때 이별했던 장소이다. 영산구교라는 다리를 건너 영산강을 건넌다. 바로 영산포다. 다리 끝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등대가 보인다. 1915년 설치된 영산포구 등대는 우리나라 내륙 하천가에 남아있는 것으로는 유일한데, 지금은 배가 다니지 않으므로 수위를 재는 역할만 한다. 등대의 역할은 끝났지만 무수한 배들이 왕래하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하는 양 밤이면 등불을 켠다. 세월 흐름과 함께 하구언이 생기면서 옛날 번창했던 장터의 모습은 사라졌다. 물론 옛 정취도 사라졌지만 골목길은 아직 분위기가 남아있어 영화촬영지로 애용되는 모양이다.

다리 난간 끝에는 ‘영산포선창 홍어의 거리’라는 입간판이 걸려있는데 주변에 도매점은 물론 식당 등 홍어전문집들이 즐비하다. 예전 번성했을 무렵의 품목 중 오늘날까지 명성을 이어 특화된 것이 바로 홍어인 셈이다. 달라진 것이라면 흑산도에서 홍어가 많이 잡히지 않아 요즘은 대부분 칠레산을 들여온다는 점이다.
다음날 반남고분군으로 향한다. 경주지역에서만 연상되는 대형 고분군이 이곳 나주에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신라보다 더 오래된 5~6세기 삼한시대의 것이다. 영산강 유역의 고대사회 세력권이 대단했음을 짐작케 한다.
반남 간다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 버스에 올랐는데 영암군으로 들어간다. 버스는 영암과 나주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찾는 곳 근처라며 어느 정류장에 내려준다. 커다란 안내판을 보니 반남고분군이라 적혀 있는데 반남면 자미산성 주변의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일대에 매우 넓게 펼쳐져 있다.
나주방면 이정표를 방향으로 잡고 신촌리 반남초등학교를 지나 조금 걸으니 마침내 황금들녘위로 거대한 봉분이 눈에 들어온다. 길을 가운데 놓고 왼쪽으로 큰 봉분 2기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신촌리 고분군 표지판이 있다. 백제에 멸망한 마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데 왕이나 지배계급을 상징하는 금동관, 봉황무늬 칼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하늘은 온통 먹구름. 전국이 태풍 영향권에 들고, 전남지역은 강풍주의보가 발동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데 먹구름 속 푸른 하늘이 고개를 내민다. 바람에 스러지는 풀잎들, 서걱대는 대숲이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고대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휩싸인다.
< 저작권자 - (주)자동차생활, 무단전재 -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