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 현대 건축가들의 영원한 텍스트
2004-08-27  |   4,244 읽음
73세생일을 맞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며 찾았던 ‘리틀 코리아’, 경상남도 안동시는 우리의 전통문화답사 0순위다. 조선시대 영남사림의 근거지로 퇴계 이황, 농암 이현보, 서애 류성룡 등의 석학들을 대거 배출하며 유교문화를 찬란히 꽃피웠던 안동에는 마을 전체가 중요 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된 하회마을을 비롯해 조선 최고의 권세가였던 안동 김 씨, 안동 권 씨의 종가집 등 300여 채의 고택이 말짱히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건축과 관련한 문화재의 30% 이상이 안동에 몰려 있다고 할 정도.

낙동강변 아름다운 흙길을 밟아가다
그런 안동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축물을 꼽자면, 많은 이들이 주저 않고 병산서원을 댈 것이다. 소수서원, 도산서원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서원 건축물로 손꼽히는 병산서원은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풍산 유 씨 문중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을 서애 류성룡 선생이 1572년에 옮겨지은 것이다. 류성룡은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의 가장 빼어난 제자 중 하나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 이 곳에서 후학에 힘쓰고 <징비록> 등의 문헌을 엮어냈다. 병산서원은 초기에 서당이라 불렸다가 임진왜란 때 불탄 건물을 다시 중건하고(1607) 서애 선생이 죽은 뒤 그의 학문을 기리는 사당(존덕사)을 지으면서 서원으로 이름을 고친다. 사액서당으로 승격된 것은 1850년이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된 뒤로 안동으로 가기가 한결 편해졌다. 수도권에서는 경부·중부-영동고속도로를 거쳐 중앙고속도로 하행선으로 갈아타고 서안동 IC에서 빠지면 바로. 풍산읍 방향 34번 국도로 접어들면 줄곧 하회마을·병산서원 표지가 이어진다. 시간은 서울에서 2시간 반~3시간 정도 잡으면 될 듯. 하회마을과의 갈림길에서 병산서원 쪽으로 좌회전하면 금방 비포장 흙길을 만난다.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은 산 하나를 등지고 마주 앉은 형색. 숲이 우거진 흙길은 활처럼 휜 낙동강변을 따라 4km 정도 오르락내리락하며 이어지는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이 길이 하도 아름다워 발품을 팔더라도 꼭 걸어간다고 했다.
왼편으로 고운 백사장이 군데군데 드러난 바다 같은 낙동강을 끼고 마침내 야트막한 산허리를 돌아 내리면 오른쪽에 검은 지붕을 드높게 인 병산서원이 보인다. 내부를 짐작할 수 없게 높이 솟은 정문(복례문)은 굳게 닫혀 있고, 관람객들은 서원 지킴이가 사는 맨 오른쪽 주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병산서원 입구는 7~9월 100일간 진분홍색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목백일홍) 길로 또한 유명해 그 풍광에 반해 일부러 한여름에 찾아오는 답사객이 많다. 주사로 들어서다 가장 먼저 시선을 뺏기는 곳은 달팽이집처럼 동그랗게 말린 토담 위에 짚만 얹고 하늘이 뚫린 채인 ‘머슴 뒷간’. 예전에는 대나무를 묶어 울타리만 쳐놓았던 것을 이렇게 바꿨다.

한없이 닫혀 있고, 한없이 열려 있는……
서원은 입교당-동재-서재-만대루가 사면을 감싼, 지극히 폐쇄적인 중앙 마당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 짜임새와 규모를 느낄 수 있다. 입교당은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던 강학당, 한 마디로 ‘교실’이고, 만대루는 유생들이 행사 때 한자리에 모였던 대강당, 동재와 서재는 당시 유생들의 기숙사로 이 네 채가 이루는 ‘ㅁ’자형 구조가 병산서원의 핵심이다. 입교당 뒤편에는 인쇄용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이 있고, 모서리가 약간 벌어진 입교당과 동재 사이로 빠지면 존덕사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우리나라 유교 건축을 대표하는 서원의 구조가 불교 건축과 대비되는 큰 특징은, 대부분의 사찰이 그러하듯 입구에서부터 건물을 점층적으로 높게 지어 밖에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과 달리, 그 반대로 안에서 밖을 향할 때 비로소 자연풍광과 어우러진 건축의 미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병산서원 역시 복례문을 통과해 만대루, 양옆의 동재-서재를 지나 입교당을 거치고 그 뒤편의 장판각, 존덕사를 차례로 둘러보기까지는 그저 독립된 건물만이 스틸사진처럼 하나둘 각인될 뿐이지만, 거꾸로 존덕사에서 등돌려 내려설 때는 전체 건물의 오밀조밀한 조화가 눈에 꽉 찬다.
소수의 선택된 유학자들이 바깥세상과 담을 쌓고 그들만의 소우주를 꾸렸던 서원. 그 시기의 서원 양식이 모두 그러했을진대 병산서원이 유독 마음을 끄는 것은 자연환경과의 적극적인 어울림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병산서원의 이름은 코앞에 병풍을 둘러친 듯 서 있는 산, ‘병산’ 때문에 붙여졌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산은 풍취가 대단하지만 너무 높고 급해 강물이 빨리 흐르므로 재물을 쌓아야 할 살림집의 입지로는 부적합했다. 반면에 속세와 단절해 간혹 자연의 소리나 들으며 학문에 전념해야 할 유생들에게는 최고의 교육 입지였던 셈.
병산서원은 지형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외부와 확실한 경계를 두면서도 코앞의 병산과 낙동강을 7폭 가슴으로 한아름 끌어안은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건축가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입교당 마루에서 만대루를 관통하며 바라뵈는 병산과 낙동강의 절경이 바로 그것인데, 200명이 너끈히 앉을 너른 마루에 사방이 모두 트인 만대루의 개방성에 그 키워드가 숨어 있다. 밖에서 볼 때 정문을 지나 맨 앞줄에, 가장 높이 솟아 있는 정면 7칸 길이의 만대루는 외부로부터 서원을 막아주고 내부로부터는 밖을 한껏 열어 보이는 이중의 역할을 한다. 건축과 조형미에서도 가장 가치를 인정받는 건물. 그 호방한 생김과 절묘한 기능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관람객의 발길을 절로 끌어당겨 서늘한 마룻바닥에 큰 대자로 쉬어가게 하는 것이 바로 만대루의 매력이고, 오늘날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병산서원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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