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慶州) 새롭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다시 보는
2004-08-18  |   3,216 읽음
경주행 새마을호열차에 앉아 이게 얼마만의 경주행인가 생각해본다. 꽤 까마득한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불과 몇 해 전에 일 관계로 갔었다. 그때는 보문단지 주변에서만 머물렀는데, 사실 경주에서도 가장 경주답지 않은 지역인 곳이다. 아무튼 경주를 생각하면 왜 무작정 오래된 느낌이 나는 것일까. 열차를 이용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에서 경주까지 직행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대신 편수는 하루에 몇 차례 없고, 시간대가 안 맞으면 동대구역에서 갈아타야 한다. 최근 개통된 고속전철도 역시 동대구까지 가서 갈아타야 하는데, 요금이나 시간, 들리는 소문에 의한 편의성 등을 따져볼 때 특별한 메리트가 없다. 구미, 영천을 지난 열차는 어느새 경주로 들어서고 있다. 차창 밖 낡은 기와집들이 연이어 나타나는 풍경을 보며 정말 오래된 고도에 접어들었음을 실감한다.

흑백사진 속 풍경, 푸른 기억으로 바뀌다
곰곰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때 처음 수학여행으로 경주를 다녀온 이후 경주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긴 것 같다. 다분히 교과서적인 그것은 오랫동안 뇌리에 각인되어 그때 찍은 흑백 기념사진처럼 빛 바랜 기억으로 저장되었다. 그래서일까 경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 불국사며 첨성대 등은 그 이후 경주에 갈 때 거의 찾지 않았다. 한 번 본 것을 다시 보러 갈 때는 좋은 인상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법인데, 그러기에는 너무 어렸고 또 한편으로 실망감도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수학여행 가듯 경주를 둘러보기로 한다. 경주역 광장으로 나오자 관광안내소가 눈에 띈다. 상세한 시내지도를 얻고, 노서리 고분군 가는 길을 물으니 기본요금만 나오므로 두 사람이면 택시를 타는 게 낫다고 일러준다. 역 건너편에는 현대화되고 있는 재래시장, 성동시장이 있다.
팔우정로터리 해장국골목을 지나 ‘황남빵’ 간판이 보이더니 금세 행선지에 닿았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문이 있을 뿐 입장료 따위를 받는 관리소는 없다. 매미 울음소리 가득한 나무 그늘 아래 쉬는 사람들, 무덤가에 핀 하얀 들꽃들이 바람에 하늘거린다. 그렇군. 여기는 분명 무덤가인데 이렇듯 공원 같은 분위기라니……. 온통 초록빛인 거대한 고분 위로 엷은 파스텔 톤 하늘이 펼쳐지고, 뭉게구름이며 잠자리 떼 나는 풍경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느티나무 하나 앞에 멈춰 서니 비석이 있다.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 94년 11월 17일 서봉총 방문 기념 식수’라고 쓰여 있다. 밑둥 잘린 나무처럼 봉분은 없고 터만 남은 자리가 바로 서봉총인데, 1926년 봉황형 금관 등을 이곳에서 발굴했고, 당시 구스타프 황태자가 발굴에 참여한 것을 인연으로 이름에 서(서전국(瑞典國)-스웨덴의 한문식 표기)자가 들어가게 되었다.
왕복 2차로 찻길을 가운데 두고(전봇대에 ‘금관총길’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건너편에 있는 것이 노동리 고분군이다. 경주에서 단일 원형 고분으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하는 봉황대가 바로 앞에 보이는데 동산처럼 비탈진 그 위에 느티나무 여러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 독특한 모습이다. 시내 한복판에 이렇듯 거대한 고분군이 있다는 게 경이로울 따름이다.
골목을 돌아 나와 4거리에 서면 커다란 담벼락부터가 사뭇 다른 분위기의 대오릉이 나타난다. 여기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하고 천마총으로 잘 알려진 고분군이다. 외국 관광객을 포함해 대부분이 이곳을 찾아오는데 너무 깔끔하게 정돈되어 오히려 감동이 없다. 차라리 노서·노동리 고분군을 둘러보는 게 더 자연스런 고분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대오릉 출구쪽으로 나오니 길 건너편에 커다란 봉분이 보이고, 마치 골프장처럼 탁 트인 드넓은 곳을 여러 사람들이 오가며 잔디를 깎고 있다. 동부 사적지대로 분류되는 곳으로 첨성대와 계림, 안압지 등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 경주 중에서도 과거 신라의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곳으로 꼽힌다.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걷는데, 수학여행 나온 일군의 중학생 무리가 왁자지껄 지나간다. 마침내 첨성대에 닿았다. 입장료 280원. 표를 사는 행위가 귀찮긴 하지만 애교로 봐줄 만한 액수다. 이윽고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첨성대를 보며 처음에 든 생각은 ‘지금 이렇게 크게 보이는 것을 어릴 때는 왜 그리 조그맣다고 느꼈을까’하는 것이었다. 잎이 무성한 모과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그윽하게 바라보는 시간이 좋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 탄생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계림은 첨성대와 지척의 거리에 있다. 계림에 들어서자 이번에도 나타난 중학생 무리들이 소란스럽다. 저렇게 몰려다니며 과연 무엇을 보고 어떤 기억을 남길까. 그런데 선생이 아닌 직업 가이드가 마이크를 들고 유적 설명을 하고 있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새 풍속도인 셈이다. 고색창연하고 울울창창한 숲 가운데 서자 오래된 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가 마음속까지 상쾌하게 해준다. 한쪽 모퉁이에 일연현장 향가비(기파랑의 죽음을 애도하며)가 서 있다. ‘흐느끼며 바라보매 나타난 달이……’ 모처럼 다시 읽는 향가가 새롭다.
흔적도 희미한 반월성 길을 따라 올라 석빙고를 보고, 안압지를 거쳐 분황사까지 가는 길은 걷기에는 제법 멀었다. 가는 길에 만나는 빈 들판은 황룡사터. 총 2만여 평의 동양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하는 황룡사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감은사터와 불국사, 탑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원효와 자장이 거쳐갔다는 선덕여왕 초기의 고찰 분황사터 마당에 들어서니 오랜 풍파를 고스란히 드러낸 탑 하나가 반긴다. 바로 모전석탑이다. 벽돌 ‘전’자를 써 모전인데, 중국 탑을 모방했다는 뜻이다. 원래 중국 탑은 전탑, 일본은 목탑, 우리나라는 석탑이 특징이다. 안산암(安山岩)이라는 자르기 쉬운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렸다. 여러 차례 허물어진 것을 보수해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신비한 매력이 있다. 탑을 이루었던 벽돌 잔해가 한쪽 담장 아래에 쌓여 있다.
분황사 앞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면 감포 가는 버스가 온다. 버스는 감포항이 종점. 정겨운 동해바다 감포는 울산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울산에 속하는 줄로 알기도 했었다. 이번의 감포행은 감은사터에 가기 위함이다. 감포항은 생각보다 규모가 커 아담할 것이라는 예상을 깼다.
다음날 동트기 전에 가리라 했던 계획은 차편이 없어 무산되었다. 버스의 첫 운행시간이 아침 6시인데, 해는 5시 30분도 안 되어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6시 버스를 타고 감은사터로 향한다. 울산 가는 갈림길에서 내려 경주 방향으로 조금 걸으면 오른쪽에 감은사터가 나온다. 멀리서부터 두 개의 탑이 보인다.

길가 이정표에 문무대왕릉 가는 길이 나오는데, 이곳 감은사는 문무대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부친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다. 지금은 삼층석탑 두 개만 남아 빈 절터를 지키고 있다. 아침 안개가 자욱한 속으로 탑 주변에 클로버 잎들이 무성하다. 어린 시절, 꽃반지 만들던 하얀 클로버 꽃들은 대부분 시들었다. 두 개의 탑 사이 금당터에 있는 받침돌들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전의 흔적 같은 분위기를 준다. 예전에는 물론 그렇지 않았겠지만 주변이 조금 어수선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누가 말했던가 빈 절터에 절이 있다고.
이제 여정은 막바지에 이르러 종착점인 불국사로 향한다. 유행가나 영화 등을 통해 불국사는 조금 희화화된 느낌이 없지 않다. 가보지 않고서 또는 어설피 한 번 본 것으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대상의 하나이기도 하다. 호젓한 대나무 숲길을 오르자 그림엽서처럼 익숙한 풍경, 자하문과 연결된 돌계단(청운교와 백운교)이 나온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거의 자동으로 이곳 앞에 오자마자 등을 돌린다.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자하문 왼쪽으로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인 연화교와 칠보교 층계마다 새겨진 연꽃은 희미하다. 안양은 극락의 또 다른 이름. 안양문쪽 담벼락을 따라 오르면 극락전이 마당 한가운데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다. 다시 오른쪽 계단을 올라 문을 지나면 대웅전 앞마당으로 그 유명한 다보탑과 석가탑이 펼쳐진다. 순간 할 말을 잊는다. 첨성대 앞에 섰던 그 몇 배 이상의 감흥과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이 뒤늦은 재발견을 고마워한다. 그렇게 한동안 탑 앞을 서성이며 쉽게 떠나지 못했다. 여름 장마 기간 중이었지만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다.
< 저작권자 - (주)자동차생활, 무단전재 -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