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현실을 잊게 하는 칩거의 땅
2004-07-22  |   5,577 읽음
새로운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라고 했던 어느 핸드폰 CF 속의 장소. 예로부터 대나무의 고장으로 유명하고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산실로 수많은 문장가들이 기거하며 풍류를 읊던 담양은,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IC에서 빠져 정읍을 거치든 더 내려가 호남-88올림픽고속도로 보촌 IC나 88 담양 IC로 직행하든 간에, 아름다운 메타세콰이어 가로수의 안내를 받아 마을로 접어드는 순간부터 저절로 속세와의 교신을 끊고 칩거하고 싶어지는 신비의 땅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계곡으로 더위를 피해 달아나는 한여름, 쨍한 햇살 아래서 옛 선비들이 사랑해 마지않던 예향의 거리를 거닐다가 시원한 대숲 속이나 허름한 정자 툇마루에 걸터앉아 제 삶의 향기를 반추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리라.

과거로 열린 문, 대숲과 소쇄원
사계절 곧고 푸르게 뻗어 소나기 같은 바람 소리를 전하는 대나무 숲은 사실 5~6월이 가장 볼 만하다. ‘우후죽순’이라는 말을 실감할 만큼, 아무데서고 땅을 비집고 나와 하루에 한 뼘씩 쑥쑥 자라는 죽순의 성장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예부터 ‘마을이 있는 곳에 대숲이 있고, 대숲이 있는 곳에 마을이 있다’고 할 정도로 고을 전체가 대나무 자생지였던 담양은 생활용품으로서 대나무 공예의 수요가 줄어들면서 죽물시장의 퇴락과 함께 그 면적도 많이 작아졌지만, 관상용 숲은 오히려 더 잘 개발되어 과거에는 너무 귀해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던 대밭을 일반인들도 관광 삼아 다니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금성면 봉서리의 고지 산자락에 자리잡은 ‘담양 대나무골 테마공원’이다.
사진가 신복진 씨가 30년 전부터 조성한 대나무골 테마공원은 소나무 숲을 병풍처럼 두르고 1만여 평에 걸친 대숲이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이 빽빽하게 치솟아 있다. 숲으로 들어서면 드문드문 창처럼 꽂혀드는 햇살 외에는 뜨거운 태양에 노출될 일이 없다는 것이 여름에는 더욱 반길 일. 굵은 왕대밭 아래로 대나무 이슬을 먹고 자라는 죽로차잎이 바람 따라 넘실대는 모습이나 관상용으로 아주 멋진 맹종죽 군락, 불법 채취의 손을 피해 그물을 쳐둔 사이로 비죽 비죽 고개를 내밀고 탈피하듯 자라고 있는 죽순 발견이 가장 좋은 볼거리들이다.

대나무는 죽순으로 태어날 때와 똑같은 굵기로 자란다. 맹종죽, 분죽, 왕대, 조릿대 등 종류마다 5~6월에 차례로 죽순이 솟아나며 빠른 것은 하루에도 1m씩 성큼성큼 커 보통 45일 정도면 성장을 마친다. 다 자란 대나무의 키는 20~25m. 대나무의 나이는 눈으로 짐작하기 어려운데 1년쯤 되었을 때 가장 푸르고 보통은 4, 5년 되어야 단단해져 바구니 등 생활용품으로 가공할 수 있다.
하늘을 향해 삼각뿔 모양으로 힘껏 내뻗은 모양새가 유난히 시원스러운 메타세콰이어 나무는 담양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다. 1974년 이를 전국 시범 가로수로 지정 받아 지역 명물로 잘 가꾸어온 담양에서 가장 멋진 길은 읍내에서 대나무골 테마공원을 찾아가는 순창 방향 24번 국도에 있다. 좁은 국도에 촘촘히 늘어선 우람하고 굵은 줄기도 장관이지만 무성한 잎들이 아예 하늘을 가린 속으로 차를 몰고 빠져들면, 동그란 빛의 터널을 뚫고 달려가는 그린 드라이브의 쾌감에 절로 마음이 들뜬다. 이 달부터 새로운 여행 파트너로 함께 한 포르쉐 카이엔을 길 위에 세워보니, 저절로 아름다운 사진 한 장이 완성되었다.
마음까지 상쾌해지는 ‘죽림욕’으로, 낭만의 그린 드라이브로 자연의 정취를 만끽했다면 담양군 아래께, 광주호를 접하고 있는 고서면 쪽으로 내려가 볼 일이다. 줄곧 달리면 빛고을 광주의 무등산 북쪽 그늘과 이어지게 되는 887번 지방도로 주변에는 송강정, 명옥헌, 죽림재, 식영정, 환벽당 등 옛 문인들이 현실을 등지고 은둔해 글을 짓던 정자들이 산재해 있다. 그 중 조선 중종 때 스승 조광조의 죽음을 보고 속세를 떠난 양산보가 1520~57년에 걸쳐 지은 별서(別墅) 소쇄원은 오늘날까지 ‘조선시대 최고의 정원’이라 칭송 받을 만큼 빼어난 조경 때문에 당대의 내로라 할 문객들이 드나들며 우리나라 시가문학의 맥을 형성한 산실로 알려져 있다.
담양이 품고 있는 많은 문화재 중 대표격이라 할 만한 소쇄원(사적 제304호)이지만, 입장료를 받지 않고 1년 365일 밤낮으로 문을 닫지 않는 점이 신기하다. 이유인 즉, 정원 구석구석을 제 손길과 마음으로 가꿨던 양산보가 ‘절대로 남에게 팔지 말고, 하나라도 상함이 없게 하며, 어리석은 후손에게는 물려주지도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후손들은 찾아오는 손님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챙기지 않는 것으로 그 뜻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그로 인해 몇 푼을 아낀 것보다 새벽 해뜰 무렵과 달밤에 가장 멋진 소쇄원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한국식 원림의 모범’이라는 소쇄원의 멋을 좁은 카메라 뷰파인더에 가둬 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작은 개울을 건너 그늘진 대숲 사이로 다른 세계인 양 접어들게 되는 입구부터, 발 밑으로 계류가 지나도록 물길을 뚫고 담을 친 오곡문까지 걷는 길, 계곡 앞에 축대를 쌓아 지은 옛 사랑방 광풍각과 내당 제월당의 오묘한 배치, 그 둘을 이어주는 계단식 담길과 작은 문……. 소쇄원의 구석구석을 거닐고 음미하다 보면 알 수 없는 전생을 더듬듯, 아득한 과거로 달려가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글 | 박희선 사진 | 박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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