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束草) 바다는 푸른 산을 베고 누워
2004-07-14  |   4,585 읽음
같은 장소라도기억의 깊이에 따라 그 형상이 달라지는 법이다. 꽃이나 나무의 이름처럼 어떤 대상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차이도 크다. 자주 다녀서 잘 아는 것처럼 여겨지는 곳도 막상 다시 가서 새로운 발견을 할 때가 많다. 그런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속초일 게다. 어쩌면 속초는 설악이라는 너무나 빼어난 경승지의 그늘에 가려진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푸른 동해까지 품에 안고 있으니 그리 억울해할 일은 아닐 듯하다.

설악,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기억의 프리즘
속초라는 이름의 한자를 풀어보면 묶을 속, 풀 초인데 풀로 무엇을 묶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울산바위와 얽힌 전설로 금강산으로 가던 울산바위가 설악산에 주저앉은 것은 다 아는 얘기다. 울산현감이 이 바위를 핑계로 신흥사 주지에게 세금을 받았는데, 동자승 하나가 더 이상 세금을 못 내겠다 했다. 그러자 현감이 바위를 도로 가져갈 테니 새끼줄로 묶어달라 했다. 이에 동자승은 풀로 바위를 동여맨 뒤 불에 태우고 그 재로 새끼를 꼰 것처럼 만들었다. 그러자 울산현감은 바위를 가져갈 수도 없거니와 세금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속초와 설악의 인연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설악에 다녀온 기억을 안고 있을 것이다. 검정 교복 입은 학창시절, 수학여행의 기억은 친구들과 함께 흔들어보던 흔들바위 즉 울산바위와 더불어 몰래 숨어 마시던 쓰디쓴 그러나 달콤했던 소주의 추억으로도 남아있다. 그리고 좀더 대범한 친구들은 밤에 몰래 숙소를 빠져나가 지금 생각해보면 대포항 따위로 나가 아예 술을 마시고 들어오기도 했었다. 물론 그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했지만…….
그 뒤로 설악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기억의 종류나 부피도 달라져 가고 추억은 흐린 하늘의 구름처럼 사라져갔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강원도의 힘’에 비쳐진 설악은 권태롭고 끔찍한 일상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또 새롭게 찾아갈 수 있는 그 어떤 힘이 바로 설악에 있는 것이 아닐까.
설악에 몇 번 오면서 늘 언저리만 맴돌다 돌아간 느낌이다. 결국 이런 이유로 다시 찾아오는 걸까. 제대로 등반을 하지 않은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라도 오르고자 마음먹었다. 여름 시즌에 오면 케이블카 한번 타는 일조차 녹록치 않은 일이다.
마침 전날까지 설비 점검을 했고 운행을 시작한 첫날이었다. 케이블카는 최근에 도입한 새 기종인 듯 시설이 좋다. 70년대 초에 케이블카 운행을 시작했으니 그 연혁도 제법 되었다. 1시간 이상 걸어 올라야 할 산을 단 몇 분만에 손쉽게 오른다는 점에서 매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도로를 내는 일에 비하면 나은 것이라고 위안 삼아보며 먼 봉우리가 성큼 눈앞에 다가오는 장관을 바라본다. 발아래 개울에는 물이 바짝 말라 있다. 설악은 바위산이라 물이 많을 때와 적을 때의 차이가 완연하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다음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오르면 권금성이 나온다. 높은 산에서만 볼 수 있는 주목을 보는 일이 신기하다. 지상에서 너무 쉽게 올라온 탓이다. 나무의 가지들은 마치 화석처럼 굳어진 듯 바람이 분 한쪽 방향으로만 몰려 자라나 있다. 탁 트인 하늘 아래로 공룡처럼 생겼다는 공룡능선과 마등령 등이 펼쳐지고 설악동 너머 속초 앞바다가 희뿌옇게 보인다.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는 권금성은 난을 당하여 피난길에 오른 권씨, 김씨 두 장사가 하룻밤에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권금성 최고봉에 오르는 일은 생각보다 아찔하다. 바위 틈새에 발을 딛기 좋도록 시멘트로 양생을 해 놓았는데 아직 완전히 굳지 않아 조심스럽다.
다시 아래로 내려와 설악동 세심교를 건너 숲 속에 자리한 신흥사를 찾는다. 가는 길에 세계 최대규모라는 청동불좌상을 만난다. 크기 외에는 오래된 깊이가 없기에 별다른 감흥은 없다. 신흥사도 다소 실망을 안겨준 것은 대웅전 지붕을 덮은 기와에 번쩍번쩍 칠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동명항에 뜬 달, 바다에 하얀 그림자를 수놓고
속초 고속버스터미널 부근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설악동에 들어왔다. 말하자면 종점이다. 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려 다시 시내로 나간다. 차창 밖 숲과 평온한 마을 풍경이 시원한 바람을 뒤로하고 시야에서 멀어져간다. 그러고 보니 시내버스를 타고 설악에 온 것은 처음이다.
대포항을 알리는 안내방송에 이끌려 대포항 정류장에 내린다. 항구 옆에 새로 주차장을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다. 앞으로 몇 년 동안 대포항 앞바다를 다 매립해 항구를 키울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면 지금의 정취는 사라질 터인데, 정취가 없는 항구에 무슨 까닭으로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며 항구를 확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몇 정거장 더 가 동명항에서 내린다. 영금정을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같은 곳에 있었다. 어느새 밤이 깊어간다. 동명항 긴 방파제 끝 등대까지 걸어본다. 꽉 찬 달 그림자가 검은 바다 위를 비추고 있다. 불현듯 까마득히 잊었던 옛 노래가 입에서 새나왔다. ‘달 그림자에 어리면서 정든배는 떠나간다……’ 바로 키보이스가 부른 ‘정든배’라는 노래다. 과연 이 노래를 기억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키보이스는 몇 해 전 DJ DOC가 리메이크 한 ‘해변으로 가요’의 원곡을 불렀던 불멸의 그룹사운드. 지금도 여름이면 이들의 사운드만큼 설레임을 주는 노래는 없다.

검은 바다를 하얗게 물들이는 것은 비단 달 그림자만이 아니다. 먼바다 오징어잡이배 불빛들이 드문드문 긴 여운을 드리운다. 바다 건너편으로 펼쳐지는 속초시의 야경 속으로 화려한 다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색색으로 빛을 바꿔가며 밤하늘을 비추는데 낚시하는 한 사람이 심드렁하게 무용지물의 다리라고 말한다. 해안도로로 연결되는 다리가 더 이어져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는데 2010년이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에 헤드랜턴을 쓴(탄광의 노동자들이 쓰는 것과 비슷한)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문어를 잡는다고 하는데 불빛을 비춰 갯바위로 올라오는 문어를 낚아챈다고 하며 자전거 뒤에 갈고리 같은 것을 싣고 있다. 그냥 보았을 때는 조금 이상한 행색인데 다 이유가 있는 차림이다.
아침에 영금정을 본다. 영금정은 동명항 옆 해안가에 이어진 너른 바위 터를 말한다. 원래는 돌산이었으나 일제 때 속초항 공사를 위해 이곳 돌을 캐가느라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왜 영금정(靈琴亭)인가? 옛날이야기는, 파도가 바위벽에 부딪힐 때 신비한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막상 돌산 위에 올라가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이 돌산이 거문고를 타는 것이라 하여 이름 붙였다 전한다. 근래에는 바다로 길게 다리를 내고 아담한 해맞이 정자를 만들어 놓았다. 스킨스쿠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영금정 등대전망대에 오른다. 가파른 계단이 상당히 높게 이어져 헉헉 숨이 찰 정도다. 견학 나온 유치원생 아이들은 잘도 올라간다. 속초팔경의 하나라는 이곳에 서면 설악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걸음을 옮겨 중앙시장 삼거리에서 바다쪽으로 향하면 ‘아바이마을’로 불리는 청호동이다. 수복기념탑과 함께 속초가 실향민이 많이 사는 고장임을 상징하는 곳인데 드라마 가을동화를 통해 많이 알려졌다. 이윽고 드라마에서 은서가 타고 다니던 갯배가 친숙하게 와 닿는다. 편도요금이 200원인 갯배는 운행구간이 짧아 싱겁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걸쇠로 쇠줄을 걸어 직접 당기며 배를 움직여보면 기대 이상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갯배가 지나는 물이 바로 청초호 자락인데 그 옛날처럼 맑지는 않다.
다닥다닥 붙은 지붕, 낮은 담벼락, 은서네집 슈퍼라고 써 붙인 간판 위로 다락방 파란 지붕이며 오래된 좁은 골목길이 다정하게 느껴진다. 새로 놓인 다리는 간밤에 보던 바로 그것이다. 다리는 시외버스터미널 쪽에서 이어지고 여기서 끊어져 있는데 차들의 통행은 거의 없다.
바닷가 방파제에는 낚시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속초는 어디가나 앞마당이 곧 낚시터인 셈이다. 바닥이며 담벼락 등지에 중국식당 전화번호가 붉은 페인트칠로 새겨져 있어 자장면 배달을 종용하고 있다.
다시 갯배를 타고 돌아나가면 수협현장사무실이 있는 어물 위판장이 있다. 배가 들어오고 즉석에서 경매가 벌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이 많지 않은 탓에 문갑 같은 것에 매입가를 적고 그것을 경매인만 살짝 엿보아 사갈 임자를 정하는 방식이다. 흥얼거리는 소리와 손짓으로 빠르게 이루어지는 대형경매와 달리 간단하게 거래가 끝난다. 경매어종에는 가재미가 많은데 함경도음식인 가재미식혜와 가재미회냉면(이곳에서는 아바이냉면이라고 부른다)의 재료로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 늦은 점심으로 먹은 가재미회냉면의 감칠맛은 이것 때문에라도 다시 한번 속초에 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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