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피탈과 아버지 김왕노<시인>
2004-06-08  |   3,548 읽음
내가 자란 곳은 영일만이 보이는 일월동이라는 곳이다. 동네 위에 지금은 포항비행장이 있다. 포항비행장이 만들어지기 전 일본 강점기 때는 포도농장이 있었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고, 포도농장을 영일만에서 풍부하게 잡히는 청어의 기름을 짜 일본으로 가져가는 비행장으로 만들었다. 그 후 군용비행장 겸 지금의 포항비행장으로 변했다.
어릴 때 비행장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영일만이 품에 와 안겼다. 영일만에 떠가는 하얀 돛단배는 끝없이 밀항의 꿈을 키워주었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 마을을 거쳐 구룡포에서 포항으로 오가는 버스를 바라 볼 때 서울에 가보리라는 꿈도 키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며 처음 타보는 열차 밖으로 플라스틱 나팔을 내밀어 얼마나 불어대었던지, 거대한 미루나무 사이로 난 철길은 꿈의 철길이었다.
그러다 포항종합제철이 생기고, 길이 넓게 뚫리고, 그 길이 고향 마을까지 삼켜버리고, 사방으로 뻗어 가는 고속도로가 생기고, 이육사가 언제 포도농장에 와 청포도를 지었을까 라는 의심마저 들게 영일만의 옛 정취는 사라졌다. 그러나 구룡포에서 대보를 거쳐 대동배 약전을 거쳐오는 옛 정취가 살아있는 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길은 십 년 전에 생겼으나 영일만을 끼고 있는 최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그 길을 따라 아버지를 모시고 드라이브 한번 하는 게(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꿈이다.
수원에서 생활하니 고향에 가도 하루 이틀 밤 자고 곧바로 올라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처음 차를 사 고향에 가져가 텃밭 옆에다 세워 두었다. 새벽에 일어나 바닷가로 산책 나가다보니 수도꼭지에서 텃밭으로 연결한 호스로 근검절약이 몸에 밴 아버지께서 피만큼 아껴야 한다는 물로 세차하시고 계셨다.
차를 산 내가 대견도 했을 테고 어쩌면 그 차를 타고 정년퇴임 후의 무료함을 한번 달래려 경주로 서울로 구경을 마음껏 해 보고 싶은 내심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차로 모시고, 우리 집이 있는 수원으로 아니면 그게 힘드시면 가까운 경주로 여행 한번 가시자고 해도 기름 아까운데 하시며 극구 사양하셨다. 바다를 늘 곁에 두고 사시는 아버지와 함께 영일만을 마음껏 바라보게 되는 그 길이라도 달리고 싶어 권했으나 그마저 사양했다. 가끔 어머님만 모시고 영일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해수목욕탕에 갔다 왔다.
그러다 몇 년 지난 어느 봄날 아버지가 임종 직전이라는 갑작스런 소식을 들었다. 차를 몰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에 낡은 차는 다행히 고장을 일으키지 않았으나, 너무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고, 그 일 후 그 슬픔을 함께 기억하는 캐피탈에 애정이 더 갔다. 차는 낡을 대로 낡아 자주 고장을 일으켰으나 아무 불평 없이 고쳐서 탔다. 시동을 걸어 차의 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불편한지 알았다.
고속도로 위에서 엔진 헤드가 깨지고 분사된 휘발유로 차가 뽀얀 가스에 둘러싸이기 전까지, 차는 내 분신이라 생각했다. 그날 갑작스런 사고로 차에 가진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그날은 대학원 시험이 있어 시간에 쫓겨 과속을 했지만 그런 일을 일으킬 줄 예측도 못했다. 가방을 챙겨 차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엎드렸으나 다행히 차에 불은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차를 향해 가슴에 치솟는 분노는 인간에게 가지는 감정 상태 그대로였다.
낡았지만 늘 새롭게 차를 대하도록 카오디오도 고급으로 차바퀴도 광폭으로 갈아 끼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대로 두고 올라와 폐차시켜버렸다. 그만큼 내가 그 차에 가진 애정이 컸기에 받은 배반감도 컸기 때문이리라.
그 후 또 캐피탈 신형을 샀다. 폐차되어 고철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차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 캐피탈도 단종되고, 내가 타던 캐피탈마저 직장이 너무 멀어져 기름값을 줄이기 위해 쏘나타로 바꾸었다.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그 차가 나타난다. 꿈속에서 아버지를 태우고 영일만을 끼고 달리기도 한다. 캐피탈과 아버지는 내 추억 속에 그처럼 언제나 싱싱하게 살아있다. 그리고 아버지 말씀이 내 삶을 세차하듯 닦아주셔서, 지금도 내 생은 생생 달린다. 그러나 과속은 하지 말아야지 중얼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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