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김별아<소설가>
2004-03-08  |   3,356 읽음
내 나이 스물 여덟, 여전히 어리고 어리석어 세상의 길을 밝혀 찾는 눈이 어두웠던 청맹과니 시절에 나는 최초로 ‘엄마’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새로운 세상을 배웠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펄펄 끓는 불덩이를 안고 새벽에 응급실로 뛰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새벽의 종합병원 응급실을 가득 메운 사고 환자들 사이에서 염치없게 의사의 가운을 움켜잡고 제발 눈길을 건네 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우리 주변에 그토록 많은 턱과 계단이 존재함을 몰랐을 것이다. 유모차를 밀고 장애물을 헤쳐 가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지, 그런 장애물들 앞에서 언제나 무력했을 장애인과 약한 자들의 분노와 슬픔을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빙그레 머금는 웃음에 온 세상이 환해지는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말 한 마디를 처음 내뱉을 때까지 얼마나 긴 기다림과 설렘이 있고, 그 어눌하게 터져 나온 불분명한 발음의 외마디 소리가 얼마나 신비롭게 들리는지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뉴 비틀 카브리올레나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 같은 요상한 이름의 자동차가 이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 4WD와 RV가 무슨 차이인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운전도 못하는 녹색살인면허증의 소유자인 내가 자동차잡지를 사고 모터쇼에 가는 일이라곤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토록 다양한 타인의 취향, 타인의 흥미, 내가 낳은 아이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경이로운 또 다른 세상을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무심코 터지는 아이의 투정과 비난에 부모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나 때문에 가족들이 얼마나 조심하며 발끝으로 걸어야 했는지도 끝내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운동회의 100m 달리기에서 2등이라고 손등에 스탬프가 찍힐 때의 환희를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60점짜리 수학 시험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공부를 하는 일보다 자식을 가르치는 일이 백만 배쯤 힘들다는 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햇살과 바람과 바다와 공기…… 나를 키운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할 줄 몰랐을 것이다. 모든 생명이 무릇 자연에 귀속되어 있음을, 스스로 살고 누군가를 살리고자 끊임없이 역동하는 순환과 질서의 신비를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내 아이에게 맞아 얼굴에 상처를 입은 아이의 엄마 앞에서 손이 발이 되어라 비는 일 따위도 없었을 것이다. 자식 둔 죄인이라는 말, 어미로 살아간다는 것은 낮은 포복으로 기는 일에 다름 아님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더 많은 시간의 여유와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불편한 양육의 번거로움이 내게 가르쳐주는 숭고한 희생의 진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한 생애에서 가장 영예로운 일은 부와 명예와 지위와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한 알의 밀알로 고요히 썩어 묻혀 거름이 되는 것이라는 진리를.
그는 앞으로도 더 많이 나를 가르칠 것이다. 나를 부정하고 내게 반항하여 마침내 나를 뛰어넘는 그 순간까지, 그리하여 한 사람의 성숙한 인간으로 새로이 다시 만날 그때까지 나는 기꺼이 그에게 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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