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으로 달리는 자동차 백현순<대구무용단 예술감독, 경기대 무용과 겸임교수>
2004-02-09  |   6,583 읽음
상큼한 공기가 느껴지고, 햇살은 한지를 통해 아침을 알린다. 매일 접하는 사람도 거리도 어제의 것이 아니다. 오늘은 또 오늘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여느 때처럼 나는 변화의 의미를 되새긴다. 날이 바뀌고 시간이 바뀌면 태양광의 차이만큼 우리의 생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춤꾼에게는 계절이 바뀌면 그 변화하는 의미들을 찾아내고자 하는 감정들이 자연히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마음들이 비발디의 ‘사계’와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만들게 했나 보다. 아직 겨울의 긴 꼬리는 내게 실루엣처럼 사색의 울타리를 만든다.
봄이 되면 탄생의 의미와 우주의 오묘한 섭리를 다시금 깨우치게 되고, 여름이면 성장의 고통과 진통을 생각하게 되고, 가을이면 결실과 축제의 의식들을 떠올리며, 겨울이 되면 휴식의 소중함과 재충전의 의미를 되새긴다. 이런 생각들은 나를 지탱해주는 작은 힘이 된다.
그리고 또 있다. 이러한 계절과 함께 달리고 느끼며 어느덧 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자동차, 언제부턴가 나는 자동차가 없으면 꼼짝할 수가 없다.
뭔가 깊이 생각해야 할 때는 깊은 마음으로 달리고 가볍고 경쾌하며 기분이 좋을 때는 산뜻한 기분으로 또다시 달리고 간혹 불면의 밤이 있을 때는 불면을 이기려고 기어이 밤을 달린다.
그리하여 밤새 달린 차 안의 내 자신은 춤이 되고 사랑이 되어 다시금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 나의 예술작품 중 가장 차와 밀접한, 아니 차가 없었으면 도저히 완성되지 못했을 작품이 있다. ‘비디오&댄스’로 산이나 계곡 혹은 들판 같은 자연 속에서 추는 춤을 영상으로 담아낸 것인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옮겨다녀야 하는 작업이었다. 우린 옮겨다니는 차 속에서 밥을 먹고 옷도 갈아입고 분장하고 휴식도 했다. 그때만큼 차가 모든 용도로 쓰일 수 있는 요술방망이처럼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올해 다시금 차와 함께 다니는 근사한 예술작품을 꿈꾸고 있다. 무용수와 스태프 그리고 촬영장비나 소품 등을 가득 실은 차가 시동을 걸면 우린 붕붕거리며 삶과 예술, 그리고 사랑과 회한을 찾아 어딘가로 떠날 것이다.
영화촬영처럼 대식구가 이동하는 이 진풍경은 몇 년을 이어온 작업이다. 오늘밤도 나는 나의 새로운 작품 ‘회룡포 연가’의 진홍의 화첩을 펼치고 있다. 날씬하고 부드러운 무용수들이 거친 이야기를 소화해내며 우리의 역사와 인물들을 자세하게 보여줄 때에 비로소 난 잠을 청할 수 있을 것이다. 만춘(晩春)의 묘미를 느낄 그날을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뛴다.
아름다운 장면 속에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광경은 추억으로 내리고, 향수가 되고, 창밖의 눈이 된다. 내 기억 속의 춤은 시가 되었고, 내 기억 속의 동심은 춤이 되었다. 한여름 나동(裸童)들로 순수했던 나도 이제 세월을 감지하게된 것이다.
차를 타고 수없이 스쳐가던 풍광들의 변화가 남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굳이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아도 이 순간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다. 이 시점이 지나면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 순간들을 기억하며 또한 나의 사랑하는 차 백색의 카렌스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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