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뱅글의 디자인 철학을 엿보다 자동차의 새로운 패러다임
2005-06-20  |   8,510 읽음
2001년 공개된 4세대 BMW 7시리즈(E65)는 이전의 BMW와 디자인이 크게 달랐다. 사실 1999년 선보인 Z9 그랑투리스모 컨셉트에서 변화가 감지되었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자동차 평론가 및 BMW 고객들은 파격적인 변신에 호된 질타를 보내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혁신적인 디자인이라고 추켜세웠다.

찬반논란과는 상관없이 BMW는 7시리즈를 시작으로 Z4, 5, 6시리즈, 그리고 신형 3시리즈 등 연이어 독특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 새로운 변화의 중심에는 ‘크리스 뱅글’이 있었다. 미국 출신인 그는 위스콘신 대학을 졸업하고 패사디나의 디자인 전문학교 ‘아트센터’를 나온 후 피아트 그룹 디자인 책임자까지 지냈다. 1992년 BMW로 옮긴 후 BMW 치프 디자이너를 거쳐 지난해 2월부터는 BMW뿐만 아니라 미니, 롤스로이스, 모터사이클 등 BMW 그룹의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다.

패러다임은 한 시대의 ‘공통된 특징’

크리스 뱅글이 2005 서울모터쇼를 참관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기자는 서울모터쇼 프레스데이인 4월 28일 BMW 부스에서 북적거리는 사람들 어깨너머로 크리스 뱅글을 처음 보았다. 지면을 통해 자주 보아서 그런지 매우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4월 27~30일 나흘간 머물면서 서울모터쇼 관람을 비롯해 강연, 독일대사관 방문 등으로 바쁜 일정을 보냈다.

4월 28일 오후 크리스 뱅글은 서울 동숭동에 자리한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제로원 디자인센터에서 ‘21세기 자동차 디자인 경향’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는 디자인학과 학생 및 관계자 100여 명이 모여 그의 디자인 철학을 경청했다.

1시간 동안 진행된 강연에서 그가 가장 많이 쓴 단어는 ‘패러다임’ (paradigm). 패러다임은 한 시대 및 분야의 ‘공통된 특징’이라는 뜻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동차 디자인 역시 시대에 따라 공통적인 특징이 주기별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양산되기 시작한 1900년대초에는 차들의 모양이 비슷했다. 자전거 바큇살 같은 얇은 바퀴 위에 엔진을 얻고 마차식 승차공간을 가진 구조다. 1950년대 미국 캐딜락 등에서 볼 수 있었던 화려한 테일핀은 그 시대 자동차 디자인의 한 패러다임이었다.

이런 자동차 디자인의 패러다임은 놀람(amaze), 평이(routine), 지루함(boring), 패러다임(paradigm) 형태로 이동하는데, 이것을 바꾸는 것이 소비자의 몫이다. 즉 새로운 디자인이 나오면 처음에는 놀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 익숙해진다. 그런 다음 지루하게 느끼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원하는 단계로 옮겨 간다.

모든 것에서 디자인 영감 얻는다

카디자이너는 엔진, 자동차 크기, 컨셉트 등이 정해진 후 그 테두리에서 디자인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혁신적인 디자인을 만들어 내기란 쉽지 않다. 자동차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요인으로는 신기술, 쓰임새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리스 뱅글은 ‘소비자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관여한 디자인으로 애플사의 아이팟(iPOD)을 들었다.

이전에는 산업(industrial) 생산적인 측면에 비중을 두고 차를 디자인했다면 이제는 산업과 사람(humanism)의 조화를 생각해야 한다. 카디자이너는 고객과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열정적인 강의가 끝난 후 가진 질의응답 시간에 “BMW가 새로운 자동차 디자인의 패러다임을 주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크리스 뱅글은 "BMW 디자인은 현재의 패러다임이 끝나는 경계를 지나 새 패러다임으로 가고 있는 단계"라고 답했다. “디자인을 할 때 어디서 영감을 얻고, 보수적인 BMW 관계자들을 어떻게 설득시켰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모든 것에서 영감을 얻으며, 엔지니어링 측면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 그리고 다른 분야의 요소들의 타협점을 찾아 설득한다”고 대답했다.

크리스 뱅글은 열정적인 강의와 유창한 말솜씨 그리고 중간중간 재치 있는 농담으로 강연을 이끌었다. 디자인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다 보니 차에 대한 내용보다는 전문적이거나 추상적인 개념을 많이 다루었다. 직접 펜을 잡고 스케치를 그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질문자의 답변에 근접해 가는 노련함도 엿보였다. 그러나 답변이 너무 길어 여러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지 못해 아쉬움도 남겼다.

며칠 뒤, 크리스 뱅글이 피아트의 디자인 책임자로 있을 때 참여한 피아트 쿠페를 우연히 길에서 보았다. 펜더에 깊게 파놓은 두 개의 옆 라인과 독특한 앞뒤 모습이 지금 봐도 굉장히 독창적이다. 그의 열정적인 강연 덕에 기자는 크리스 뱅글의 디자인 언어는 물론이고 BMW 디자인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글 | 조현우 사진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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