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 소장 방대한 자료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자동차 연구가
2004-09-14  |   7,914 읽음
국내에서 자동차와 관련해 가장 많고 다양한 자료를 갖고 있는 사람은? 차에 관심이 있거나 본지 필자를 유심히 살펴본 독자는 금방 눈치채겠지만, 바로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 소장이다. 전 소장에게는 자동차의 역사가 태동하던 600년 전의 자료부터 자동차산업의 최신 현황까지 자동차와 관련된 자료라면 없는 것이 없다.
자료를 모아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정리되지 않은 자료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전 소장은 힘들게 모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지난 20여 년 동안 각종 방송과 인쇄매체를 통해 자동차관련 이야기를 들려주고 척박한 국내 출판현실 속에서도 꾸준히 자동차관련 서적을 내고 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사무실 가득 쌓여있는 그의 자료들은 단지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지닌 ‘생명’으로 재탄생한다.

하동환자동차에서 출발, ‘자동차 연구가’로 변신
“6·25 직후 미군이 철수하면서 버리고 간 자동차 잡지를 수집하게 된 것이 자동차관련 자료를 모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쌍용자동차 홍보실에 있을 때는 자료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회사에 건의해 자료실 겸 도서관을 만들기도 했지요. 아무리 귀중한 자료라 하더라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어요. 예전 쌍용이 평택에서 서울 도곡동으로 이사갈 때 자료를 한 트럭 버리는 것을 제가 다 주웠습니다. 큰 메이커들조차 자료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이 무척 부족합니다.”
전영선 소장의 전공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는 64년 계명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50∼60년대에 영문학도로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특이하게도 그의 관심은 온통 자동차에 쏠려 있었다. 특히 전 소장은 당시 자동차 디자인에 관심이 무척 많았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외국잡지를 보고 혼자 자동차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행복했다”는 그는 멋진 차를 디자인하는 카 디자이너가 꿈이었다.
그의 꿈은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 졸업 후 64년에 입사한 하동환자동차에서 그가 맡은 일은 당시 주력 생산차종인 버스의 페이스리프트 모델 디자인 또는 부품 설계였다. 멋진 스포츠카와 고급세단을 꿈꾸었던 그는 버스를 설계하면서도 틈틈이 멋진 스포츠카를 그렸지만, 이를 지켜본 하동환 사장의 반응은 늘 싸늘했다. “이런 차를 국내 기술로 어떻게 만들 수 있겠어요. 만들 수 있는 차를 디자인하세요.” 사실 그의 디자인은 철골을 용접해 섀시를 만들고 드럼통을 펴서 보디를 만들던 당시 국내 자동차공업의 수준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다.
이후 전영선 소장은 신진과 GM코리아, 동아, 쌍용자동차 등에서 29년간 자동차 디자인과 설계, 제조, 정비, 부품개발, 홍보, 기획 등의 부서를 두루 거친 후 92년 독립해 본격적으로 자동차산업과 문화를 연구하는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전 소장은 한창 때 KBS와 MBC TV는 물론 하루 10여 회 전화로 방송에 출연하고 한 달에 20여 건의 원고를 쓰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지금은 방송과 원고를 많이 줄이고 책을 집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이미
<자동차 이야기>, <자동차의 거인들>, <임금님의 첫 자동차> 등 몇 권의 책을 펴낸 전 소장은 지금도 6권의 책을 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이미 탈고한 책도 있지만, 147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발명품으로부터 시작해 지난 600년간의 자동차 역사를 총망라한 <세계 자동차 600년사>처럼 10년째 집필중인 책도 있다.
현재 전 소장이 가장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책은 본지에도 연재중인 <한국 교통 3천년사>다. 500∼600p 분량 3권으로 나올 이 책은 2001년에 구상해 2002년부터 쓰기 시작했고, 현재 80%쯤 완성된 상태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역사책을 뒤져 탈것에 대한 거의 모든 자료를 찾다보니 쌓아놓은 자료서적만 해도 수십 권에 이른다.
“오래된 자료를 활용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사진입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나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인 수레는 제대로 된 그림 한 점조차 남아있지 않아요. 최근 중국이 왜곡하고 있는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살펴보면,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길을 잘 닦고 수레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수레와 길의 모양을 그린 그림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요. 간혹 침몰된 상태로 발견된 배는 복원이라도 할 수 있지만, 수레는 남아있는 게 거의 없지요. 이럴 때는 모든 문헌을 찾고 당시 정황을 감안해 직접 수레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실물이 남아있지 않으니 누군가는 해야 할 작업이지요.”
전 소장의 연구소에서는 역사적 고증을 통해 수십 세기 전의 ‘탈것’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그는 ‘자료수집가’가 아니라, 오래되고 귀중한 자료에 생명을 불어넣는 진정한 ‘자동차 연구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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