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brizio Giugiaro 카로 체리아의 21세기를 짊어진 남자
2004-07-22  |   5,274 읽음
올해 서른 아홉 살인 이탈디자인의 후계자와 마주앉기까지는 갖은 우여곡절을 거쳐야 했다. 지난 5월 말 사업차 한국을 찾은 파브리치오 쥬지아로 부사장은 인천공항을 나서자마자 그 날 오후에만 서로 다른 두 업체를 찾아 각각의 비즈니스를 처리했다. 진작부터 인터뷰 요청을 해둔 터였으나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재촉할 틈을 못 찾을 정도. 워낙 바쁜 일상에 익숙하게 살아온 듯 보이는 이 글로벌 비즈니스맨은 잠시 숨돌릴 새도 없는 스케줄을 놀라운 에너지로 소화해내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첫날 일정은 밤늦도록 이어졌다.
귀국 이틀째. 아침 9시 반부터 시작될 업무를 마치자마자 일본으로 떠난다는 그의 ‘전쟁 같은’ 스케줄에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카비전> 창간 13주년 기념호를 위해 벼르고 벼른 인터뷰이(interviewee)를 자칫 눈 벌겋게 뜨고 날려보낼 지도 모를 일. 다행히 약속시간이 잡혔다. 평소 같으면 아직 집에서 나서지도 않았을 이른 아침에 숙소인 서울 신라호텔에서 젊은 쥬지아로를 만났다.

이탈디자인의 역할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
“늘 이렇게 정신 없이 바쁩니까?” “저는 디자이너예요. 디자이너에게는 스튜디오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지요. 그 시간을 벌기 위해 해외 업무는 몇 가지 스케줄을 모아 한꺼번에 해결하는 편입니다. 외국에서는 늘 바쁠 수밖에 없어요.”
일본에서도 도쿄와 나고야 등 세 도시를 사흘 동안 누벼야 한단다. 그 바쁜 스케줄 틈새를 비집고 그와 마주앉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 올 봄 제네바 오토살롱에서 화제를 모은 컨셉트카 도요타 알레산드로 볼타와 알파로메오 비스콘티로 얘기를 시작했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엔진 파워를 끌어낼 수 있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엔진과 기어박스 등 고전적인 메커니즘에서 볼 수 있는 출력 손실이 거의 없고 에너지와 무게 배분도 탁월하지요.”
쥬지아로 씨는 하이브리드가 가장 중요한 미래 메커니즘 중 하나이므로, 단순 양산 모델뿐 아니라 이를 이용한 스포츠카 개발 등 좀더 다양한 연습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태리 토리노 모터쇼에 대해서는 냉정한 진단을 내렸다. 제네바 오토살롱 등 탁월한 모터쇼가 득실대는 유럽에서 빠른 국제화에 대응하지 못했으니 낙오는 당연하다는 말. 시대의 흐름을 차분히 짚어내는 냉철함과 변화에 대한 유연성이 전해온다.
“대부분의 주요 자동차 메이커들이 독자적인 디자인 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량생산 및 이를 통한 원가절감, 또 이 모두를 가능케 하기 위한 규격화는 피할 수 없는 대세지요. 이탈디자인의 자동차 관련 비즈니스의 95%도 완성차 메이커와의 공동작업으로 진행됩니다. 예전부터 양산 메이커들과의 관계는 좋은 편이어서 달라진 환경이 크게 낯설지는 않아요.”
이태리 토리노 공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토리노 비즈니스 스쿨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디자인 능력과 경영 실무를 고루 갖춘 인물. 컨셉트카 마치모토(86년)와 아즈텍(88년) 프로젝트 참여를 시작으로 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이탈디자인에서의 활동은 알파로메오 시게라와 폭스바겐 W12(이상 97년), 부가티 EB 시리즈, 애스턴마틴 트웬티 트웬티(2000년), 시보레 코베트 모레이(2003년)와 같은 컨셉트카들을 빚어냈다. 그가 디자인한 양산차는 대우 마티즈와 다이하쓰 무브(이상 98년), 마세라티 스파이더(2001년), 피아트 이데아와 알파로메오 156(이상 2003년), 람보르기니 가야르도 등.

“기성복 시대일지라도 맞춤복을 찾는 고객들이 꾸준하듯 개성적인 맞춤 자동차에 대한 시장의 수요도 계속 존재할 겁니다. 디자인 팀은 공동작업을 통해 안정적인 제품을 만들어낼 확률이 높지만, 단 한 명의 디자이너에게서 ‘상상초월 아이디어’가 나올 가능성도 큽니다. 묻혀질 수도 있는 작은 아이디어를 현실로 이어가는 끈이 바로 카로체리아의 몫이지요.”
이탈디자인의 힘은 세 가지. 세계 곳곳에서 쌓은 다양한 경험과 빠른 업무 속도, 시간낭비 제로의 효율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아무리 잘 짜여진 대규모 메이커라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 자신한다.

차와 디자인,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는 남자
“이탈디자인 최고의 차는 무엇인가요?” “피아트 판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피아트 판다는 GM대우 마티즈Ⅱ보다도 작은 꼬마 해치백 아닌가. 너무나 뜻밖이고, 놀랍고, 그래서 신선하기까지 한 대답이었다.
“판다는 완전히 제로인 상태에서 출발해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낸 ‘제로 베이스’ 차입니다. 그 과정이 너무 소중해요. 또 상업적으로도 가장 성공한 제품 중 하나이며 회사 재정에 큰 도움을 준 차입니다. 디자인 측면에서 탁월하지는 않지만 상업적인 면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골프? 물론 빼놓으면 안 되지요.”
그의 차가 궁금했다. 별 생각 없이 던진 이 질문은, 뜻밖에도 한 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통틀어 쥬지아로 부사장이 가장 어렵게 대답한 ‘고난이도 문제’가 되어버렸다.“너무 많아서……. 새로 개발하거나 디자인한 차는 모조리 타다보니 나도 헷갈릴 때가 있을 정도인데요, 평소 출퇴근할 때는 마세라티 쿠페를 주로 탑니다. 아! 쌍용 렉스턴도 종종 타고 다니지요.”

이탈디자인은 렉스턴 디자인 마무리 작업을 맡았다. 쥬지아로 부사장은 젊은 시절부터 이름을 날려온 스피드 광이다. 오죽하면 그의 부친이 “파브리치오가 운전하는 차 옆자리에는 타지 않는다”고 선언을 했을까.
“요즘도 운전습관은 여전한가요?”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박장대소가 터져 나온다. 운전이라는 말만 들어도 즐거운가보다. 웃음 속에 차와 운전에 대한 사랑이 철철 끓어 넘친다.
“아, 여전히 미친 듯 달리고 있습니다.(웃음) 그래도 프랑스 남부지역에 있는 F1 스쿨의 정식 교육과정을 모두 이수하는 등 스피드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준비는 충실히 갖췄어요. 막무가내 속도광은 절대 아닙니다. 몬자와 이몰라 서키트에서 F1 머신도 몰아봤지요. 지금껏 20년 운전하면서 큰 사고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변명이 필요했을까, 유난히 자신의 운전 성향에 대한 많은 말들을 쏟아낸다. “빠르지만 안전하게 운전합니다(Fast but safe).” 내내 이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빼어난 디자인 실력 못지않게 탁월한, 자타 공인의 드라이버. 그의 초고속 드라이빙이 안전하리라는 점, 믿어 의심치 않는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을 숱하게 찾았어요. 서울 도로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클래식’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온통 세단뿐이에요. 쿠페나 해치백은 정말 찾아보기 힘듭니다. 다행히 제가 좋아하는 마티즈를 많이 볼 수 있어 즐거웠어요.”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차를 고르거나, 아니면 정말로 차를 너무 좋아해서 타기보다는 사회 통념상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타입의 차, 즉 시각적 무난함으로 차를 고르는 듯하다는 게 한국적 차 고르기 성향에 대한 그의 조심스런 진단이다.
쥬지아로 집안은 조부가 교회 화가였고 부친이 20세기 최고의 카 디자이너인, 예술가적 기질을 이어온 가문. 하지만 그는 가풍이나 혈통보다는 일찍 찾아낸 재질과 이를 키우기 위한 교육이 더 중요했다고 말한다.
“이제 한 살 된 딸은 벌써부터 차만 타면 계기판 스위치에서 손을 뗄 줄 모릅니다. 아마 머지않아 F1 최초의 여성 레이서가 쥬지아로 집안에서 나올지도 모르니 기대하세요.” 말과는 달리, 그는 딸의 장래를 오로지 딸의 선택에 맡길 작정이다. 혹시 좋은 아빠임을 강조하기 위한 ‘홍보성 멘트’는 아닐까. 그의 인생 철학을 물어보았다.
“가족과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자!” 아무리 바빠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줄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그의 말. 그는 뛰어난 디자이너이기에 앞서 호방한 사나이였고 유머 넘치는 재담꾼이었으며, 감동적인 아빠이자 남편이기까지 했다.
글 | 김우성 사진 | 박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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