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버 ‘비틀 사랑’ - 비틀 르레상스를 꿈꾸는 이들
2008-12-19  |   11,228 읽음

“비틀요?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고, 오늘은 심지어 배고프기까지 하네요. 그런데 왜 타느냐고요? 그냥 비틀이 좋아서요.”
여우비가 내리던 10월의 끝자락, 다음 카페 ‘비틀 사랑’ 동호회의 거제도 1박 2일 여행길에 동행했다. 방송국 기자, 병원 원장, 택시 기사, 대학 교수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로 구성된 비틀 사랑은 ‘비틀을 직접 배우고 느끼며 사랑하기 위해’ 2001년 만들어진 자동차 동호회다.

국경을 초월한 비틀 사랑
주말의 극심한 교통체증으로부터 서울을 벗어나기란 녹록치 않았다. 그렇지만 차안은 초특급 비틀 매니아의 훈훈하고 흥미진진한 모험담으로 가득 찼다. 비틀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들을 수 있는 기회. 기자는 ‘럭셔리 비틀’이라고 부르는 김광수 씨의 빨간색 비틀 컨버터블에 올랐다. KBS 보도국 기자인 김 씨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여러 차례 비틀만을 바꿔 탄 비틀 골수 매니아다.
“타면 탈수록 비틀만의 매력이 느껴집니다. 20년 넘게 비틀을 타고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비틀을 탈 생각이에요.”

삼삼오오 모인 비틀은 어느새 대열을 갖춰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위를 달린다. 처음 3대가 출발했지만 거제도로 향하는 도중 특이한 모습 때문인지 따로 약속장소를 정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나둘씩 모여 들었다. 이들이 내는 배기음은 시공(時空)을 초월한 외침이었다. 마주보는 두 쌍의 피스톤이 만들어 낸 ‘엇박자’ 소리는 훌륭한 협주곡이 되어 밤하늘의 대기로 울려 퍼졌다. 10시가 넘어 도착한 거제도 숙소 앞에는 이미 10여 대의 비틀이 모여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다음날. 비틀 사랑 멤버들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동호회원들과 인근에 있는 허름한 정비소를 찾았다. 그곳에는 3개월 전 대우조선에 파견 온 세르비아 출신 라토미르 다비치(Ratomir Dabic) 씨가 기름때 잔득 묻은 빨간색 정비복을 입고 우리를 반겼다. 동토의 땅에서 온 젊은 이방인이 과연 무엇을 할지 궁금했다. 다비치 씨는 17살 때 비틀을 사서 손수 정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평소 차 한 대 갖고 싶었는데 학교를 오가는 길에 서 있던 1960년형 비틀이 눈에 들어왔단다. 다비치 씨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망신창이가 된 비틀을 손에 넣었다. 1960년형으로 무려 34살이나 먹은 녀석이었다. 17살에 만난 첫차를 3년 동안 손수 정비해 지금까지도 잘 타고 있다고.

“비틀은 연도별로 조금씩 모습이 달라요. 수많은 모델 중1957년 이전에 나온 스플릿(갈라진) 비틀과 오벌(달걀 모양) 비틀을 좋아해요. 비틀은 오래될수록 좋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문득 오래되어 좋은 것들이 스쳐 지나간다. 지금까지는 친구와 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비틀도 그 중 하나에 포함시켜야겠다.

다비치 씨는 어제 하루 종일 달려온 비틀들을 리프트에 올려 일일이 점검했다. 단골 정비소에 갔을 때 차의 이상유무를 꼼꼼히 살펴주는 친근한 정비소 아저씨의 모습 그대로다. 간단한 고무호스 같은 건 즉석에서 잘라 바꿔주기도 했다.

이곳에서 거제도의 ‘비틀 부자’ 권영휘 씨도 만났다. 그는 비틀을 7대나 갖고 있는 ‘비틀 사랑’의 핵심 멤버다. 거제도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인 그는 낮에는 환자를 돌보고 밤에는 비틀을 돌본다.
“지금은 그야말로 비틀 르네상스라 할 만합니다. 우리나라에 지금처럼 비틀이 활성화된 적이 없거든요. 비틀은 오너의 상상력을 그대로 실현해 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비틀은 그냥 차가 아니다. 어릴 때 꿈을 이루게 해 주었고, 엔진을 닦고 조이면서 모르는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즐거움을 주는 차. ‘비틀 사랑’ 카페 회원에게 비틀은 꿈과 사랑을 실현시켜 준 그런 존재다.
취재를 마치고 비틀 사랑 회원들과 헤어져 KTX를 타고 올라오는 길은 편하고 빨랐다. 하지만 고속열차 안에는, 비록 털털거리고 한기가 느껴지는 속에서도 포근함과 결속력으로 가득 찼던 비틀이 지닌 그런 훈훈함은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움을 발견하는 고전소설과도 같은 차. 비틀은 하나의 문화 또는 다른 여러 문화를 이끌고 있는 매개체다. 많은 비평과 담론을 끊임없이 이끌어 낼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차가 바로 비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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