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PROPLE 박광현 2016-09-07
​연기자, 골퍼, 자동차 마니아의 3색 조화​​데뷔 20년이 넘은연기자이자 수준급 실력을자랑하는 골퍼이고 연예인레이서로도 활약했던자동차 마니아 박광현.얼마 전 종영한 TV 드라마‘최고의 연인’에서 한때짝사랑했던 이혼녀에게일편단심 순애보를선보이며 시청자들의사랑과 지지를 받았던 그는자동차에 대한 해박한지식으로 XTM ‘더 벙커7’의MC를 맡아 프로그램을이끌어가고 있다.​​​​  ​배우 박광현을 처음 봤을 때 30대 초반인 줄 알았다. 동안 비결을 물었더니 단박에 “없다”는 대답이나온다. 연기 활동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관리만 받는다고. “제가 진짜 싫어하는 게 머리 염색하고 지지고 볶는 거예요. 얼굴 마사지도 싫고요.”​인위적으로 꾸미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솔직 담백함이 그가 꾸준하게 배우 생활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그가 연기를 시작한 때는 1997년이다. 처음 그를 30대 초반으로 봤을 때 얼추 계산해보니 연기 경력이 10년 정도려니 했는데, 실제 나이를 알고 난 후 따져보니 벌써 20년째 연기 생활을 하고 있는 베테랑이다.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연예 병사로 활동했으니 공백기도 없는 셈이다.“변화무쌍한 방송계에서 2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드라마를 찍었어요. 한 직업을 20년 동안 이어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가장 최근에 출연한 작품은 MBC에서 방영한 ‘최고의 연인’.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통상적인 일일 드라마다.“우연히 짝사랑했던 여자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이혼을 하고, 아이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건 따지지도 않고 오로지 그 여자만 사랑하는 역할이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찾기 힘든 사람이죠. 벌써 이런 역할만 세 번째라 어렵지는 않았어요.”​​​순발력의 원동력은 ‘온 에어 증후군’20년이면 강산이 두 번은 변했을, 꽤 오랜 시간이다. 어느새 중견(?)의 위치에 접어들었으니, 연기자로서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해 감회도 크고 고민도 깊을 법하다.“나이대에 맞는 연기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동안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을 만큼 어려 보이는 얼굴이라 실제 나이보다 한참 적은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앞으로는 나이에 맞는 연기를 하고 싶습니다. 악역도 해보고 싶고요.”​이제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 그야말로 자신만의 캐릭터가 살아 있어야 할 때다. 박광현 하면“이런 배우다!”라고 단번에 특정지을 수 있는 특색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연기할 때 순발력이 좀 뛰어난 편이에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느낌을 상황에 맞게 살리려고 미리 준비하지만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나오는 게 더 많아요. 제 스스로는 이를 ‘온 에어 증후군’이라고 부르죠(웃음).”​​​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대사를 애드립이라고 하는데 박광현은 “애드립은 웃기려고 하는 게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표현이 애드립의 본질이라는 게 그의 주장.“대본에 적힌 대사대로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봐요. 재료는 같지만 그것을 어떻게 순발력 있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확 달라지거든요. 어떤 배우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설정으로 가면서 훌륭한 연기를 펼치기도 하지만, 저는 설정보다는 장면에 대한 느낌이나 상대방과의 호흡 등을 파악해서 제가 생각한 것과다르게 돌아가더라도 순발력 있게 대응합니다.”​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20년 후, 그러니까 지금까지 연기를 할 줄은 몰랐다는 박광현. 그 사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많이 겪었을 게 분명하다.“군대를 갔다 온 후 환경이 바뀌어서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전에는 방송국 자체 제작 위주여서 방송국 라인 하나만 잡으면 출연에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군대를 갔다 오니 한류 열풍이 불었죠. 동료 연기자들은 자연스럽게 한류 덕을 봤지만 저는 군대 때문에 그러지 못했어요. 외국에서 한류 스타로 떠올라야 드라마에 캐스팅됐거든요. 그러나 힘들어도 견디니까 이런 저런 작품이 많이 들어오더군요. 지금은무조건 한류 스타만 찾는 분위기가 수그러들어서 기회가 더많아졌습니다.”​연기자라고 해서 평생 연기만 하면서 사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대부분 미래를 위해 다른 일을 준비한다. 박광현은 앞길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20년 후에도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제 20년했으니 앞으로 20년은 더 해야죠. 저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연기자들은 돈벌이에 연연하지 않고 편하게 연기하는 게 로망이에요. 생계 수단으로 스트레스 받으면서 연기하고 싶지는 않거든요.”​경제적인 문제는 다른 일을 통해 해결한 뒤 연기를 편하게 즐기면서 하고 싶다는 박광현. 물론 아직 연기 이외에 확실한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다른 생계 수단’ 얘기가 나오니박광현의 골프 실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골프는 그가 말하는 다른 생계 수단은 아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제2의 길로 삼아도 될 정도로 수준급 실력이다.“제가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에요. 아버지를 따라서골프장에 놀러 갔는데 처음에 스윙한 게 헛스윙이었어요. 오기가 발동해서 그날로 골프채를 사서 골프를시작했습니다.”​​​​연기생활을 하면서 골프까지 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 여러 가지 에피소드도 많았을 듯하다.“드라마 촬영장에 골프채를 가지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연습하러 다녔습니다. 오후 촬영이면 새벽에 골프장에 갔다가 촬영하러 갔고요. 선수들만 간다는 전지훈련도 두 달 동안 참가했습니다. 그때 실력이 많이늘었어요. 작년에는 대학에서 골프 수업을 맡기도 했죠. 치는 것도 좋지만 가르치는 일도 재미있어요.”​대학에서 골프 강의도 하고 매체에 골프 관련 기고도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골퍼 박광현에게 초보자들을 위한 원 포인트 레슨을 요청했다.“골프를 치는 사람들 중 스윙 자세에 신경 쓰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스윙 자세는 선수들에게나 해당되는얘기입니다. 아마추어는 스윙을 가다듬을 시간이 없거든요. 따라서 처음 시작할 때 스윙과 퍼팅을 병행해서 열심히 하면 스코어를 많이 올릴 수 있을 거예요.”​한때 연예인 레이서로도 활동해 박광현은 자동차에도 관심이 많아 한때 연예인 레이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요즘은 자동차 관련 프로그램 ‘더벙커7’ 진행을 맡아 활력을 더하고 있다.“연예인들로 구성된 레이싱팀 알스타즈에서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어요. 그때 같이 하던 친구들이 지금은 프로 대회도 나가고 단장도 맡고 있죠. 1년 반 정도 활동했었는데 왠지 레이싱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었어요. 당시 골프에 완전히 미쳐 있었거든요.100% 동적이기만 한 레이싱과 달리 정적인 부분과 동적인 부분이 어우러진 골프에 더 관심이 끌려 결국 레이싱은 포기하고 말았죠.”​지금은 시들해졌지만 한때는 튜닝에도 관심이 많았다(그리워서 가지고 다니는 사진이 있다며 전화기에 보관된 오래된 사진을 직접 보여준다. 차에대한 관심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튜닝을 엄청나게한 차다).“예전에는 튜닝을 즐겼어요. 2003년쯤 타고 다녔던차인데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납니다. 요즘에는 양산차들이 워낙 잘 나와서 딱히 차에 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지만 튜닝에 대한 관심은 여전합니다.”​레이서 경험도 있고 튜닝에도 조예가 깊은 박광현은 국내 판매 중인 타이어는 거의 다 써봤을 만큼 타이어에 대해서도 관심이 남다르다.“노면에서 소음이 올라오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소음이 적은 타이어 위주로 선택합니다. 대체로 수입타이어는 부드럽고 국산타이어는 딱딱한 느낌이 강한 편이지요. 지난 겨울에는 스노타이어를 끼웠는데 겨울철 노면을 찐득하게 밟고 지나는 느낌이 좋더라고요. 소음이 적고 승차감이 좋아서 4월까지 끼우고 다녔습니다. 아내는 안전을 위해 런플랫 타이어를 달았고요.”​마음에 드는 연기자가 있으면 그에게 푹 빠져들게 된다. 그가 출연한 드라마나 영화도 찾아보면서 그를 열렬히 지지하는 팬이 된다. 만약 어떤 드라마를 봐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 드라마에서 보아왔고 좋은 연기를 선보여온 박광현 이름 세 글자를 찾으면 후회 없는 선택이 될 듯하다.​   *글 자동차생활 
TRAVEL: 속리산국립공원 법주사 & 문장대 2016-08-30
​속리산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에 만난 ‘정이품송’은 예전 그림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노쇠한 모습이었다. 1,600여 년이나 된 사찰 법주사는세계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 청동미륵불상과 팔상전 등 많은 보물과 유물을 간직하고 있었고, 문장대로 향하는 길은 만만하게 생각했던것과 달리 고되고 힘들 정도로 가팔랐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자 사방으로 펼쳐진 기암괴석들의 멋진 모습에 절로 탄성이 일었다.​​올해 여름은 더워도 너무 덥고, 한낮의 태양은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폭염주의보와 경보를 발령했다는 뉴스를 앵무새처럼 틀어댔고, 화면 속의 한반도 지도는 아궁이에 장작을 끊임없이 집어넣으며 불을 지펴 설설 끓는 아랫목 같았다. 맞서는 것보다는 피하는것이 상책이라는 듯 도시가 그렇게 비워지고 있을 즈음 허물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없는 오랜 벗이 “휴가는 갈 거야? 가면 어디로 가는데?”라며은연중 동행을 청했다. 이에 “글쎄, 최근 몇 년 동안은 휴가다운 휴가를가보지 못한 것 같아서 올해도 비슷하지 않을까?”라며 말을 흐렸다. 그나마 기자는 매달 여행을 떠나고 그것을 <자동차생활>에 연재하고 있다는 데 위안을 삼으면서……​​​속리산 자락에서 하룻밤을 보내다그럼에도 휴가라는 단어의 여운은 남아 희미한 기억 속의 ‘속리산’을 떠올리자 ‘화양계곡’과 ‘법주사’가 따라나섰다. 속리산은 산 타기를 좋아할 무렵부터 ‘가고 싶은 곳’ 중 하나였지만 쉽게 연이 닿지 않았다. 정상(문장대와 천왕봉)을 밟은 이들이 입을 모아 ‘괜찮은 곳’이라고 추천했음에도 ‘그곳은 교통이 불편한 오지’라는 선입견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꽤 오래전 속리산 자락에 눌러 앉은 충북 보은군을 찾았을 때 시간이 아주 더디게 흘렀고 몹시도 지루했었던 기억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하지만 그 사이모든 것은 달라져 있었다. 내비게이션을 통해 확인한 서울과 속리산과의거리가 채 200km가 되지 않았고, 시간도 2시간 30분이면 보은군청 앞에다다를 수 있었다. 그곳에서 20여 분이면 속리산국립공원에 닿으니 머뭇거리거나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마음이 일자 서둘러 길 떠날 채비로 바빠졌다. 속리산으로 향하는 길은 쭉쭉 뻗어 있었고, 휴가철의 고속도로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의외로 한산했다. 해가 제법 남아 있을 때 도착한 보은읍내는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했지만 길이 넓어지고 도시는 확대되어 있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에 산으로 가자”는 제안에모처럼 동행을 한 아내와 아들이 “그럼 숙소를 정하고 빨리 저녁을 먹자”며 거든다. ​급하게 떠나온 길이어서 숙소를 예약하지 못했지만 특별한 일 아니면 당일의 상황에 따라 숙소를 잡는 습관이 배어 있기에 읍내를 둘러본다. 웬만한 도시의 편의시설을 다 갖췄음에도 읍내는 하룻밤을 묵어갈 잠자리를 보여주지 않았다. 검색을 통해 “여기 어때?”라고 묻자 “어, 조금 아까지나쳐 온 곳인데”라며 길을 일러준다. 값을 치르고 열쇠를 건네받은 후 들어간 룸은 아담하고 깨끗했다. 세면도구 등은 비닐 팩을 통해 제공되었고, 미니 냉장고는 생수와 음료수로 채워져 있었다.​대충 짐을 풀고 거리로 나서자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이 발길을 이끈다.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보은군에서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여는 야단법석야시장이다. 흥겨운 트로트와 감성적인 발라드가 묘한 조화를 이룬 가운데 입맛을 돋우는 음식들과 한 잔의술을 곁들이다며보니 한여름 뙤약볕에 맥을 못 추던 더위도 기세를 꺾는듯했다.​​​​법주사 경내에는 국보급 보물이 가득다음날 속리산국립공원으로 길을 잡자 20여 분이 채 되지 않아 도로 옆의 ‘정이품송’이 여행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이품송은 수령을 600년으로 추정하는데 높이가 15m에 이르고 동서남북으로 뻗은 가지가 차이는 있지만 각각 10m에 이른다. 조선의 7대 임금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가지에 걸릴까 염려해 “연(輦)걸린다”고 하자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어가(御駕)를 무사히 통과하게 했다. 이에 세조는 이 소나무에 정2품(지금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나무는 예전의 그림을 통해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세월의 흐름을 비껴나지 못했는지 아니면 또 바뀌어 갈 미래를 위한 환골탈태를 진행하는 건지……. 노송의 모습에서 오늘과 내일이 또 다를 것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본다.​​속리산국립공원으로 가는 중에 만나는 정이품송​​​그곳에서 5분여를 더 달리니 법주사와 인연을 맺은 상가들이 이른 아침부터 손님맞이에 바쁜 모습이다. 이곳에는 법주사를 찾는 신도들이나 여행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상가거리가 거창하게 형성되어 있다. 길에는 말린각종 나물과 집에서 손수 기른 채소들을 가져와 손질하고 있는 아낙들의 난전이 손님을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다.​​​이른 시간임에도 아낙들은 여행객들에게 팔 물건을 다듬고 있었다.​​속계와 진계를 뚜렷하게 갈라내준다는 일주문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경계가 불투명했다. 최인호 선생은 ‘길 없는 길’에서 일주문이란 문아래 이르기까지 세속의 파도가 밀려와 출렁거린다 해도, 이제부터 세속을 떠나이 문을 들어설 때부터는 오직 일심(一心)에 귀의한다는 뜻으로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만 세워 짓는다고 했다.​​​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만나는 숲의 길​​일주문을 지나자 나무와 나무가 엮어내는 숲의 터널이 서서히 한여름의 기온으로 달궈지고 있는 머리 위와 발아래의 기운을 붙든다. 그럼에도 꾸준히 상승한 대기온도의 여파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방울방울 맺힌 이슬들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온 몸 곳곳에서 흘러내릴 곳을 찾기에 여념이 없다. 작은 바람에도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의 춤사위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덥긴 하지만 대도시에서와는 차원이 다른 상쾌함이 밀려온다.​일주문에서 20여 분을 더 걸어가야 모습을 드러내는 법주사는 유서가 깊다. 553년(진흥왕 14년)에 의신 스님이 창건한 후 776년(혜공왕 12년)에 진표 율사가 중창했다. 절 이름은 의신 스님이 서역에서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절은 진표 율사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 되면서 한창때는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렸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불타버린 것을 1605년(선조 38년)부터 1626년(인조 4년)에 걸쳐 사명대사가 팔상전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경내로 들어서면 세계 최대의 크기(높이 33m)를 자랑하는 청동미륵불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진표 율사가 7년간의 노력 끝에 조성해 1,000년이 넘도록 법주사를 지켜왔던 미륵불상은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당백전(동전)의 재료로 쓰기 위해 훼손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 시멘트로 불상을 만들었으나 균열이 생기자 국비와 시주를 통해 청동 160톤, 주석 16톤,아연 3톤으로 1990년 시멘트 미륵대불을 그대로 탁본을 떠 지금의 불상을완성했다.​​​법주사 청동미륵불상은 높이가 33m에 달한다​​법주사에는 이 밖에도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과 팔상전(국보 제55호), 석연지(국보 제64호) 등 3점의 국보와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법주괘불탱화(보물 제1259호) 등 10여 점의 보물을 비롯해 수십여 점의 문화재를 품고 있다. 때문에 수행자나 신도가 아니더라도 법주사가 품고 있는 웅장하고 멋있으며 운치 있는 불교 유적 앞에서 누구나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문장대에 올라서 세상을 내려다보다속리산의 정상인 천왕봉과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문장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세심정은 둘 사이를 가르는 갈림길이다.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천왕봉이고, 왼쪽으로는 문장대를 향한다. 7시간이나 걸린다는 천왕봉 대신 문장대로 발걸음을 옮기자 울창한 숲이 펼쳐지고, 길을 따라 청량한 계곡이 이어졌다.​​​문장대로 오르는 길에 만난 계곡​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걸음을 떼다보니 용바위골 휴게소가 비 내리듯 흐르는 땀을 식혀가라고 의자를 내어준다. 침샘을 가득 자극하는 해물파전과 서늘하다 못해 입안을 그대로 얼어붙게 할 것 같은 탁주 한 사발에 축 늘어졌던몸의 세포들이 다시 기지개를 켠다.​​​용바위골 휴게소에서 파전과 탁주 한 잔을 들이키며 잠시 쉬어가는 건 어떨까?​​산은 빈틈이 없었다. 만만하게 생각했던 길이 이토록 고되고 힘들까 싶었지만 가파른 길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고개를들어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막바지에 이른 듯 점점 열리는 하늘은너무도 맑고 또 뜨거웠다. 문장대를 200여m 앞둔 평지의 나무 그늘아래엔아침부터 산에 올랐을 사람들이 가쁜 숨을 죽이고 있었다.산 정상에 자리를 잡은 넓은 바위 봉우리인 문장대(대라는 것은 경지 좋은곳에 자리한 너른 바위라는 뜻)는 오르내리기 편하게 철제 계단이 놓여 있었다. 한여름의 볕을 고스란히 맞으며 문장대에 오르자 사방으로 기암괴석들의 멋진 모습이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탄성이 절로 인다. 사람들이 그토록이곳을 오르려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리라.​최인호 선생의 소설 ‘길 없는 길’로 소개된 경허 스님의 시 구절이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산도 절도 푸르고, 물도 절로 푸른데 맑은 바람 떨치고 흰구름만 돌아가네.”​​​ * 글, 사진 김태종       여행과 함께한 차, 푸조 508 GT508 GT는 2.0L 블루HDi 디젤 엔진을 얹어 최고출력 180마력, 최대토크 40.8kg·m의 성능을 내는 푸조의 플래그십 세단이다. GT라는 배지에 걸맞게 GT 시그니처, 강렬한 레드 스티치, 트윈 머플러 등 스타일링 포인트로 스포티한 감성을 살렸다. 프리미엄 세단의 감성과 GT의 강렬한 퍼포먼스가 조화를 이룬, 그러면서 도 복합 13.2km/L(도심 12.5, 고속 14.2)의 좋은 연비를 내는 실속 모델이다. 길이×너비×높이는 4,830 × 1,830 × 1,455mm 이며 휠베이스는 2,815mm. 508 라인업에는 같은 2.0L 디젤 엔진에 GT 스타일링 포인트가 빠진 펠린이 있으며, 보다 경제적인 1.6L 120마력 디젤 엔진을 얹은 얼루어와 1.6 모델에 출력 보강 없이 GT스타일링을 더한 GT 라인도 있다. 어느 모델이든 값이 4,000만원대로 실속과 품위를 동시에 누릴 수 있다. 보다 개성적인 차를 원한다면 왜건인 508 SW나 차고를 높인 크로스오버 모델인 RXH를 선택하면 된다. SW 는 1.6L 120마력 디젤 엔진을, RXH는 2.0L 180마력 디젤 엔진을 얹는다. 값은 508 1.6 4,340만원, 2.0 4,740 만원, 1.6 GT 라인 4,540만원, 2.0 GT 4,990만원이며, SW는 4,390만/4,590만원, RXH는 5,390만원이다. 
차이나 스토리 [ 홍콩 ] 2016-08-18
​     홍콩은 한때 제조업 분야에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로 일컬어졌다. 특히 금융 분야에서는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중국의 개혁 이후에도 한동안 중국과 서방의 무역을 중계하면서 막대한 부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일국양제를 유지하고는 있으나 부동산을 비롯한 사회·경제의 모든 분야가 중국에 예속되면서 이젠 홍콩인이란자부심을 접고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침사추이 커피숍에서 제임스를 만나는 날 홍콩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지난해 홍콩에서 민주화 시위가 한창일 때 홍콩의 번화가 몽콕에서 우연찮게 만났던 제임스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고 연락이 왔다. 경제는 엉망이고 행정은 중국에의해 조종되는 홍콩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의 말대로 한때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했던 홍콩의 입지가 최근들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홍콩인들은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홍콩인으로 남고 싶지만 중국이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다. 이제 홍콩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 사실이 홍콩인들을 혼돈스럽고 또 더욱 깊은 좌절감에 빠져들게 한다.​광저우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썬전역에 내리면 바로 홍콩과의 국경이다. 이곳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다리를 하나 건너면 홍콩이다. 홍콩은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되어 이젠 중국 땅이지만 50년 동안 자치를 인정하기로 해 현재 일국양제로 운영되고 있다. ​​​​   한땐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원래 중국 땅이었던 홍콩의 역사를 살피려면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전쟁이라는 아편전쟁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부터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발생한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다. 인도의 벵갈 지역에서 아편을 대량으로 재배해 청나라에 수출하는 방식이었다. 한번 맛들이면 끊기 어려운 중독성 때문에 한때 중국은 아편 중독자가 5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아편이 삽시간에 확산되었다. 커다란 수입원을 보장받았던 영국 입장에서 아편은 절대 손을떼기 어려운 사업이었다.​아편 폐해의 심각성을 인식한 중국은 1792년 아편 금지령을 선포한 후 여러 차례 아편 수입 단속에 나섰다. 하지만 부패한 관리들로 인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급기야 광동지역 관리로 임명된린저쉬(임칙서)가 아편을 몰수해 불태우면서 영국 상인들과 마찰을 빚자 영국 정부가 텐진과 닝보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세계 최고였던영국 군의 화력에 밀린 청나라는 1842년 막대한배상금과 함께 홍콩을 영국에 넘긴다는 난징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영국의 통치를 거치면서 홍콩은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에 점령당하기도 했지만 해방 이후 제조업 분야에서 한국,대만과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을 펼치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금융은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홍콩은 한동안 중국의 정보를 서방에 전달하는 소식통역할도 했다. 중국은 철저한 언론 통제를 통해 죽의 장막 안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일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했다. 다만 유일하게 일부 소식이 암암리에 전해지는 통로가 있었으니 바로 홍콩을 통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중국인들은 홍콩에가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거나 로후천을 가로질러 자유의 땅인 홍콩으로 향했다.​​​​​ ​​덩샤오핑이 최고 자리에 앉은 이후에도 홍콩은 성장을 계속했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의 후유증으로 중국 국민들이 배를 곯는 상황에서도 홍콩은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세계의 모든 경제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홍콩의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들으라면 덩샤오핑과 리자청이 첫 손에 꼽힌다. 덩샤오핑은 대약진 운동의 후유증으로 2,000만 명 이상의 인민이 굶어 죽는 것을 목격하고 시장 경제의 필요성을 인식, 197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개방정책을 제시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를 채택하는이율배반적인 정책을 펴는 도박을 감행했으니 가히 그를 작은 거인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데 그의 뒤에는 리자청이 있었다. 덩샤오핑은 홍콩의 최고 갑부 리자청에게 중국 개방의 조타수 역할을 요청했고, 그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썬전과 산토우에 경제 특구를 만들었다. 산토우는 리자청의 고향이다.​중국의 개방정책에 힘입어 최고의 경제적 특혜를 누린 홍콩은 중국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서방의 어느 누구도 중국을 직접 방문하기 어려울 때 홍콩인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최대한 활용해 중국과의 교역을 늘려 나갔다. 개방정책 이후1990년대 중반까지 이런 특혜를 누리면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중국은 홍콩을 통해서’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으니……. 필자가 처음 중국과 거래를 한 것도 홍콩의 무역회사를 통해서였다. ​당시에는 중국 공장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이들이 홍콩 사람들밖에 없었다. 중국인들과 설사 말이 통한다 해도 직접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중국의 문화와 산업구조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있었던 것. 오로지 홍콩 사람들만이 중국인들과 대화를 통해 거래 조건을 성사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중국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돈을 번 홍콩인들은 주말이면 중국으로 넘어와 돈을 흥청망청 쓰고 다니면서 자신들이 중국에서 차지한 우월적 지위를 최대한 즐겼다. 중국인들은 그런 홍콩인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경제적인 차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지금은 중국에 좌우되고 있는 상황그러나 2000년대가 되면서 중국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냈던 홍콩 무역회사들의 수입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비싼 중계 수수료를 물어가며 홍콩 회사들과 거래를 했던 서방의거래처들이 직접 중국과의 교역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홍콩과 거래했던 유럽과미국의 많은 거래처들이 중국 공장들과 직접 거래하기 시작했고, 중국 업체들도 각종 무역 전시회를 통해 자신들의 역량을 알려 나갔다. 중국에대한 장막이 걷히면서 홍콩의 도움 없이도 거래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알다시피 홍콩은 중국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한때 세계 최대 항구로 이름을 날렸었다. 하지만 중국이 썬전항을 만들면서 직접 수출을 시작하자 홍콩을 통해 선적을 하던 엄청난 물동량이 홍콩으로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굳이 비싼 운송료를내고 홍콩까지 운반해 수출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상하이와 썬전의 주식 시장이 개장되자 홍콩으로 들어오던 자본마저 끊겼다. 막대한 중국의 자본이 홍콩보다는 썬전이나 상하이 증시에 투입되면서 홍콩이 누리던 아시아 금융 시장에서의 독점적인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홍콩의 고급 주택가. 중국인들이 홍콩 부동산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이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부동산 시장의 지각변동이다. 20여 년 전만 해도 홍콩인들은 중국의 부동산을 매입하는 데 열을 올렸었다. 썬전을 비롯하여 산토우와 동관, 광동성 일대가 주된 먹잇감이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오늘날은 상황이 반전되었다. 중국인들이 그동안 축적한 두툼한 지갑을 들고 홍콩의 부동산에 손을대기 시작한 것이다. 상권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홍콩인들은 임대료를 부담하기도 어려운상황. 얼마 전에 161평짜리 아파트가 891억원에팔렸다는 뉴스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평당 5억원이 넘는 셈이니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홍콩은 예외다. 홍콩에서는 부동산 증여세와 상속세가부과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중국 부호들이 너도나도 홍콩의 부동산 구입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홍콩에서는 부동산증여세와 상속세가 부과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중국 부호들이 너도나도 홍콩의 부동산구입에 나서고있는 것이다​​​홍콩의 서민주택들. 주택난이 가중되면서 작은 아파트를 여러 개로 쪼개어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홍콩은 도시국가라는 특성상 주거면적이 제한적이다. 많은 인구가 좁은 지역에 살다보니 부동산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홍콩에서는 임대주택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해왔으며, 그 비율이30%가 넘는다. 그런데 중국인들의 부동산 투기열풍이 임대주택 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임대주택보다는 당장 돈이 되는 아파트와 일반주택 분야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주택자금을 마련하기 어려운 홍콩의 서민들이다. 전에는 그나마 임대주택이라는 안전장치가 있었지만 부동산 투기로 공급이 끊기면서 외곽에서 다시 외곽으로 밀려나가는 추세다.​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요즘 홍콩에는 벌집 형태의 아파트가 유행이다. 예전에 한 가구가 살던 13평 아파트를 쪼개고 쪼개서 네 가구가 사는 공간으로 개조한 형태다. 물론 홍콩 정부에서도 할 말은 있다. 홍콩인들이 주택을 살 경우 취득세가 3%인 데 비해 중국인에게는 21%를 부과함으로써 홍콩의 재정부담을 줄이는 데 이만 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홍콩인들은 부동산뿐만 아니라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과 홍콩의 국경에는 아침마다 홍콩으로 등교하는 학생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아침에 홍콩에 있는 학교와 유치원에 갔다가 오후에는 중국으로 돌아오는 학생들이 수없이 많다. 홍콩의 많은학교와 유치원을 중국 학생들이 차지하는 바람에 정작 홍콩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실정이다. ​​홍콩과 중국의 국경은 아침마다 홍콩 유치원으로 가는 중국 유치원들로 붐빈다​​​홍콩에 가정부로 취업해 있는 필리핀 여성들 휴일이면 공원에 나와 친구들을 만난다​​ 또한 국경에는 홍콩 식품들을 주로 운반하는 보따리상들이 진을 치고 있다. 중국에서 멜라민 분유나 불량식품 문제가발생하면 홍콩의 식료품은 거덜이 난다. 상황이 이러하니 홍콩인들의 중국인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될 수밖에. 시위 밑바탕에는 경제 문제도 있어 홍콩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무시해왔던 중국인들이 홍콩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며 주인 행세를 하는 모습에 분노를 표시해왔다. 하지만 이제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지난해 정치적인 문제로 야기된 홍콩의 민주화 시위는 사실 경제적인 측면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홍콩의 지도자인 홍콩 행정장관은 800명의 선거인단에 의해 간접선거로 선출된다. 그런데 홍콩 시민들은 선거인단이 친 중국 성향의 인물로 구성되었다며 중국 지도부에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하지만 홍콩인들의 시위행태는 목숨을걸 만큼 절실하지 못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사례로 들면서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했지만 죽기 살기로 민주화를 쟁취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목소리가오래도록 힘을 쓰지 못한 이유는 이를 반대하는홍콩인들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시위가 지속되면서 관광객들이 감소하고 상점마다 매출이 급감하자 시위를 반대하는 또 다른 시위가 일어났던 것. 같이 힘을 모아 정부에 대항해도 부족한 판에 시위를 반대하는 무리의 등장은 한껏 달아오른 반정부 시위의 열기에 찬물을 뿌리는격이었다.​​​​지난해 홍콩 민주화 시위 때읜 모습. 정치 민주화를 내세웠지만 사실 경제적인 측면이 바탕에 깔려있다​​​​민주화 시위를 반대하는 시위대의 모습  앞서도 말했지만 홍콩인들이 홍콩의 민주화를외치며 반정부 시위에 나선 배경에는 그동안 홍콩이 누려왔던 각종 특혜가 없어진 것에 대한 강한 불만이 배어 있다. 경제는 점점 어려워지는데다 그동안 홍콩인들이 누리던 각종 혜택을 중국인들이 빼앗아가는 현상이 홍콩인들의 감정을자극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앞으로도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전망에 있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어려운 국면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해 홍콩의 경제성장률은 2.6%였으나 올해는 1.6%로 예상되고 있다. ​홍콩은 이제 중국의 경제에 완전히 예속되었다. 중국 관광객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다. 싫지만 이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홍콩인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홍콩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은 중국인이 아니라 홍콩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으나 이제는 좋든 싫든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곳에는 이미 인민해방군이 진주해 있다. 홍콩인들은 침체돼 있는 지금의 홍콩을예전의 활기차고 역동적인 곳으로 되돌려 놓고싶지만 자신들만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의 미래는 홍콩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국 정부의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왼쪽이 중국. 오른쪽이 홍콩이다​글,사진 양인환(중국 통신원)​​양인환 중국통신원- 1957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나 91년까지 금융권에서 일하다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 자동차와 함께 하는 삶에 새롭게 도전했다. 91년 국산 자동차로 미국 48개 주를 일주해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92년 아시아 록스타로 호주를 일주했다. 93년 호주 웨스턴 랠리스쿨을 이수한 뒤 호주 웨스턴 랠리 침피언십, 홍콩-북경 랠리(94년), 태국랠리(94년) 등에서 전문 드라이버로 활동했다. 93년부터 96년까지 본지의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참가한 랠리를 비롯해 세계의 다양한 자동차 경주와 시승기를 소개했다. 저서로 ‘대머리 돈키호테’, ‘차를 알고 문화를 세우는 여유로운 운전’이 있다. 2002년부터 중국 저장성 이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양인환 통신원은 앞으로 중국을 비롯한 북미, 남미, 아시아, 유럽 등의 재미있는 여행기를 소개할 계획이다. 머지않아 미국과 호주에 이어 중국과 남미대륙을 일주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늘 지나쳤던 그곳의 재발견-목포 2016-08-04
  기자에게 있어 목포는 일을 할 때는 지나치는 경유지였고,쉴 때는 남도의 섬들을 찾아가는 길목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작정하고 목포 여행에 나섰다. 그 곳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고,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볼거리를 보여주었다. 낮보다 밤이 아름답다는 목포.그러나 밤 기행은 훗날을 기약한 채 이른 아침 이곳을 거닐었다.    ‘보라, 좋은 것은 가까이 있다. 네가 보려고만 한다면…….’ 제대로 기억의 한 페이지를 끄집어낼 순 없지만, 기자가 목포를 처음 찾은 것은 아마도 2008년 즈음의일이다. 당시 전라남도는 세계 모터스포츠의 최고봉인 F1 그랑프리를 유치한 후 2010년 첫 개최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각계의 의견을 구하고 있었다. 모터스포츠를 담당하고 있던 기자 또한 전라남도 관계자의 초청으로 난생 처음 목포를 찾았다.​전라남도 도청은 당시 광주광역시에서 목포와 맞댄전남 무안군 남악면으로 막 이전해 주변 조성이 한창이었다. 자가용이 아닌 대중교통(고속버스나 기차)을 이용하면 목포역이나 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나 시내버스를 타야 하는데, 기자 역시 터미널에 도착한후 택시로 도청을 찾았다. 관계자들과의 만남이 끝나자 몇 차례 서울에서 얼굴을 익혀 허물없이 지내던 한 직원이 “괜찮다면 저녁을 함께 하면서 더 많은 조언을 듣고자 한다”며 식사를 청했다. 이미 시간은 그들의 퇴근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애초 당일 미팅을 끝낸 후 곧바로 서울로돌아갈 예정이었지만 “지금 올라가면 자정이 다 되어 피곤할 것 같으니 목포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나쁘지 않을 것 같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그렇게 둘은 도청에서 택시를 타고 목포시 하당동 근처로 갔다. 직원이 안내한 곳은 홀에 테이블이 4개 정도밖에 없는 조그마한 실비집이었다. 제철에 맞는 회를 아주 적당량만 줘 남기는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에 이어 민어와 병어 등이 상을 채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를 그다지 즐기지 않았지만 그곳의 분위기와 맛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언제 한번 다시 찾으리라 다짐하며 F1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유지 또는 길목이었던 목포그 뒤로 F1 그랑프리가 개최되기 이전까지 서너 차례목포를 방문하면서 가끔 그때의 맛과 분위기를 그리워했지만 발걸음은 쉽게 닿지 않았다. 언제나 숙소는목포 시내에서 상대적으로 깔끔한 평화광장 주변에 잡았고, 대부분의 식사나 만남도 그곳에서 해결했다. 2010년 F1 그랑프리가 전남 영암의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에서 개최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금요일부터 개최되는 일정보다 하루 먼저 내려갔지만 그때는 강진과 장흥, 진도와 해남, 보성, 그리고 더 멀리 있는 순천의 볼거리에 더 관심이 갔다. 그렇게 여러 해에 걸쳐 수십 차례나 목포를 찾았지만 기자에게 목포는 단지 인근 목적지로 향하는 경유지이거나 전라남도의 섬들을 찾아가는 길목일 뿐이었다.​그러다 지난 7월의 어느 날, 취재를 위해 목포를 찾았을 때 문득 쳇바퀴 돌듯 이곳을 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광장 주변의 숙소에서 선잠 깨듯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치고 신발 끈을 조인 후 문을 열었다. 밖은 옅은 안개가 살랑거리고 있었고, 영산강하구원의 바다를 접한 산책로에는 이른 시간임에도사람들이 하나 둘 스치듯 지나갔다. 자그마한 어선들을 품은 바다는 고요했고, 동쪽 하늘에서는 콩알보다도 작은 해가 기지개를 켜며 안개를 뚫고 은은하게모습을 드러냈다. 바다와 해, 돛대를 세운 배, 그리고갈매기가 캔버스를 수놓고 있는 모습은 화폭의 한 장면에 다름 아니었다. 이곳이 내가 늘 오갔던 바로 그목포였던가?​​​​숨을 고르듯 그렇게 멍하니 세상이 그려낸 작품 하나를 가슴에 들여놓고 발길을 떼다보니 유람선 선착장이 눈에 들어온다. 유람선에서는 목포 해안의 야간 절경을 1시간 가량 감상할 수 있다는데 지금은 이른 오전이라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아쉬움을 가득 안고바닷물의 높낮이에 따라 높이가 조절되는 해상보행교에 올라서자 목포가 자랑하는 갓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이 나란히 삿갓을 쓰고 서 있는 형태인데 예전에는 배를 타고 나가야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정처 없는 발걸음은 이제 목포자연사박물관과 목포생활도자박물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이어진다. 어른 3,000원의 입장료를 받는 자연사박물관은7개의 전시실에 45억 년의 자연사 자료를 전시하고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세계에서 단 2점뿐이라는 공룡화석 프레노케랍토스와 전남 신안군 압해도에서발굴해 복원한 세계적인 규모의 육식공룡알 둥지 화석이 전시되어 있다. 공룡에 관심이 많은 아이와 함께 가면 좋을 듯. 자연사박물관 입장권으로 문예역사관과 생활도자박물관도 함께 관람할 수 있어 부담도적다.​​ ​​​​​목포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는데…무언가에 홀리듯 한참을 걷다 문득 돌아갈 길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진다. 걷는 것은 이쯤에서 멈추고이제는 차에 몸을 실을 차례. 숙소로 돌아가 주섬주섬 짐들을 가방에 챙긴 후 시동을 걸었다. 목포 관광안내지도는 한 청년을 사모한 세 여인이 죽어서 학이되었고, 그 학이 떨어져 죽은 자리가 섬이 되었다는삼학도로 이끈다. 여름밤에는 옛 선창의 향수가 가득한 해상파시를 재현하고, 다양한 체험행사를 통해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하는 곳이지만 이른 오전이라 조용하고 한산했다.​이곳에서 붕장어(일명 아나고) 낚시를 하는 박규선할아버지(82세, 목포시 만호동)를 만났다. 새벽 4시에 나왔는데 오전 7시가 넘은 지금까지 씨알이 굵지않은 4마리밖에 잡지 못했다면서도 환한 웃음을 짓는다. 진도에서 태어난 박 할아버지는 72년 목포로나와 45년 동안 목선을 만들었다며, 지금은 플라스틱 배에 밀려 옛날 모습을 재현하는 수준에 그치는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의 먼 뒤편으로 목포 여객선터미널이 잡힐 듯 눈에 들어왔다.​​ ​​다시 목포의 명물 유달산으로 향했다. 가는 길 왼쪽으로 하얀 부챗살을 펼친 것도 같고 학의 날개를 닮은 듯도 한, 목포의 북항과 고하도를 연결하는 목포대교가보이고 그 아래로 고속정이 물보라를 튀기며 지나간다. 해발 228m에 불과한 유달산을 차로 오르는 것은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다. 더딘 걸음으로 산으로 들어가고 나오면서 둘러보는 게 제 맛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레길에 있는 조각공원과 목포근대역사관에 관심이 있다면 차를 이용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흔히 목포는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이번에는 새벽에 불현듯 출발했지만 다음에는 해질녘부터시작해 목포의 밤에 제대로 취해볼 생각이다. 늘 머무르면서도 그냥 지나치곤 했던 목포. 그 곳을 재발견한기쁨이 뿌듯하게 다가온다.​  여행과 함께한 차, 쌍용 코란도 C 삼바에디션  서울에서 목포까지 함께한 차는 쌍용 코란도 C 삼바에디션(Samba Edition)이다. 쌍용차가 정열적인 삼바스타일로 익스테리어를 다듬으면서 상품성을 개선한 모델로, 지난 7월 5일부터 판매를 시작했다. 코란도 C 삼바에디션은 우선 겉모습에서 일반 모델과 차이가 난다. 삼바 컬러를 활용한 전용 데칼을 붙이고 수출용 윙로고 엠블럼과 스피닝 휠캡, 휠라이너 등으로 시원하고 발랄한 느낌을 더했다. 아울러 LED 도어 스카프, 테일게이트LED 램프, 센터페시아 휴대폰 무선충전기를 새로 마련하는 한편 7인치 3D 내비게이션을 포함한 인피니티 프리이머 사운드 시스템을 기본 장착해 편의성도 높였다. 갤럭시그린(Galaxy Green)을 비롯한 새로운 익스테리어 컬러도 추가했으며, 그동안 선호도가 높았던 스마트키와 운전석 통풍시트를 기본으로 갖췄다. 옵션으로 적재 활용성을 크게 높여주는 루프박스 & 스포츠 유틸리티바 패키지를 선택할 수 있으며, 현재 이 패키지를 선택하면 고급 백팩을 주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값은 2,748만원이며 9월 말까지 3개월 동안 한정 판매된다.코란도 C 외에 코란도 스포츠와 티볼리 등 3개 모델에 삼바에디션을 내놓고 있는 쌍용차는 삼바에디션 출시를기념해 8월 31일까지 다양한 온·오프라인 이벤트를 펼친다. 온라인에서는 쌍용차 홈페이지를 방문해 이벤트에 응모한 고객들 중 추첨을 통해 영화관람권(300명), 커피교환권(500명)을 준다. 또한 오프라인 쌍용차 매장을 방문해 삼바에디션 구매 견적을 낸 고객들에게는 티볼리 송풍구 방향제 등 소정의 사은품을 증정하고, 추첨을 통해 브라질 자유여행권(5명), LG 트롬스타일러(10명), 콜맨 캠핑패키지(15명), 다이슨 진공청소기(20명) 등푸짐한 경품을 제공할 예정이다(당첨자 발표는 9월 8일).       *글,사진 김태종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증도 2016-07-24
​​느려서 더 행복하다고? 그 말 믿어도 될까?​​증도는 2012년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 에서 2위를 차지한 데 이어지난해에도 다시 선정되는 등 국내를 대표하는 생태 관광지다.  다리에 걸린 석양이 갯벌을 무대삼아 춤추듯그려내는 한 폭의 동양화를 상상하며 이곳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하늘은 비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  보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국내를 대표하는 생태 관광지,  증도다.  1,004개나 된다는전남 신안군의 섬 중 하나지만 지금은 인근 사옥도와다리가 연결되어 있어 배를 타지 않아도 되는 섬 아닌섬이다.  ‘슬로시티’(Slowcity)라는 이름으로 방송과 언론을 통해,  그리고 다녀온 이들의  “한 번은 꼭 가보아야 할 곳” 이라는 말들이 그리움을 키웠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  문득  “그래,  증도?” 라는 생각이 일었다.  서울에서 증도까지는 빠르게 내달아도5시간은 걸리지만 일체의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북무안 톨게이트’ 를 빠져나와 24번 국도로 접어드니 황토밭에는 양파를 수확하는 농부들의 손길이바쁘다(무안은 양파산지로 유명하다).  길옆에는 빨간자루에 담긴 양파가 곧이어 올 트럭을 기다리고 있고, 곳곳에 걸려 있는  “마늘과 양파 작업을 하는 차량들에게 양보해 주세요” 라는 큼지막한 현수막이 눈길을끌었다.     관광안내소 직원에게 여행지 추천받아그렇게 50여 분을 바다와 들이 만나고 가끔은 크게촌락을 이룬 곳을 지나 몇 개의 다리를 건너니 ‘증도대교’ 가 떡하니 버티고 섰다.  증도는 2012년 한국관광공사 선정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  2위에 이름을 올린 후 지난해에도 다시 선정되는등 국내를 대표하는 생태 관광지로 꼽힌다.​     이 다리를 건너기만 하면 그토록 고대하던 속살과 마주한다.  첫 사랑의 여인을 다시 만나는 기분이랄까? 곧장 들어가기는 뭔가 두고 온 것 같아 어지러움이 인다.  차를 한쪽에 세우고 바다를 건너온 바람을 맞으며증도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보니  ‘느려서 더 행복한 섬슬로시티 증도’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하늘 계단을 오르는 설렘으로 다리를 건너자 증도 관광안내소가 기자를 맞이한다.  ‘안내서’ 를 집어 들고는직원에게  “처음 오는데다가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않다” 며 둘러볼 곳에 대한 추천을 부탁했다.  그러자그는  “증도에서 숙박을 하고 가실 건가요?  아니면 돌아가실 계획인가요?”  하고 되묻는다. “아,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겁니다” 라고 멋쩍게 답을 하자  “그러면 ‘장뚱어 다리’ 를 건너면서 갯벌의 매력을 느껴본 뒤 보물섬 위쪽 전망대에서 석양을 보고 가세요. 석양이 정말끝내줍니다”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장뚱어? 그러고 보니 도중에 만나는 식당들은 하나같이 ‘장뚱어탕’ 이라는 메뉴를 내걸고 있다.  서남해안 갯벌에서 주로 서식하는 짱뚱어는 소고기보다 단백질 함량이 많고 미네랄이 풍부하며 고소하고 담백해 지역민들에게 보양식으로 사랑받는 음식이다.  지난해 7월 말에는 증도 우전해변에서 ‘제1회 짱뚱어 축제’ 를 열기도 했다.​​   갯벌을 가로질러 난 장뚱어 다리는 장뚱어와 우전해변으로 닿아 있다.  해변은 아직은 때가 이른 듯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지만 볏짚을 엮어 올린 파라솔이 이국적인 정취를 풍긴다.  주말을 맞아 해송 숲에 조성된‘오토캠핑장’을 찾은 가족들이 저녁식사 준비로 분주한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그들의 여유가 부러움으로다가오자 돌려야 하는 발길이 더욱 무겁다.  현재라는아주 귀한 선물을 포장도 뜯어보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내일에 맡기려고 하니 그럴 수밖에.​    다리에 걸린 석양이 갯벌을 무대삼아 춤추듯 그려내는 한 폭의 동양화를 오늘은 내어주지 않을 심산인 듯하늘은 비구름을 머금었다.  “차를 한 잔 마시면서 기다릴까? 아니면 해가 지기 전에 섬을 더 둘러볼까?” 운전석에 앉으니 가벼운 차림의 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길을 나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이향하는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증도의 낙조 감상은 뒷날을 기약하며…액셀 페달에 발을 얹고 무심히 달리니 자그마한 섬을다리로 연결한 산 위에 정박해 있는 배가 눈에 들어온다.  1975년 한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가 걸려 올라온것을 발굴한 보물선인데,  1층은 쉼터와 카페로,  2층은유물전시관으로 꾸며 일반인들에게 1,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보물선 다리를 건너는 바로 위는 낙조전망대가 서해바다를 지긋하게 내려 보고 있다.  안내소 직원이 극찬할 만큼 명품 낙조를 자랑하는 곳이지만 날씨가 허락하지 않아 그저 덤덤하기만 하다.  첫 만남이기에 자신이 갖고 있는 속마음을 다 보여주지 않으려는 걸까? 볼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국내 최대 규모(462만㎡)의 태평염전에서는 소금박물관을 비롯해 소금밭 갯벌 길 걷기,  소금밭 체험(천일염 수포 포함),  염천창고 견학,  소금밭 습지 견학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있다.  그리고 지친 하루를 쉬어가려면 증도 곳곳에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는 펜션과 민박집의 문을 두드리면 된다.   홀로 여행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얽매임에서 한껏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그러면서도 또 이렇게 홀로인 날에는 함께 했으면 좋았을 사람이 그립다. 그것이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여행과 함께한 차, 쉐보레 캡티바올해 3월에 출시된 2016년형 캡티바는 디자인을 다듬고 유로6 대응 2.0L디젤 엔진과 6단 자동변속기를 장착하고 있다.  오펠이 공급하는 2.0L 디젤 엔진은 최고출력 170마력과 40.8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하며,  아이신 6단 자동변속기를 조합해 복합연비 11.8km/L를 낸다. 사각지대경고 시스템과 후측방경고 시스템 등 다양한 안전장비와 애플 카플레이를지원하는 마이링크를 담았다.  모든 모델에 기본 장착된 마이링크 시스템은 후방카메라 기능을 겸하며, 휴대폰 내비게이션 어플리케이션 브링고(BringGo)와 애플 카플레이 내비게이션을 동시에 지원한다. 또한 7인승 좌석을 전 트림에 옵션으로 적용해 실내거주성과 공간활용성을 높였으며, 시트를 손쉽게 접고 펼 수 있는 이지 테크(EZ-Tech)가 적용된 분할 시트 폴딩을 통해 최대 1,577L의 적재공간을 확보했다. 값은 2,809만~3,294만원.  TIP  증도를 여행하려면 관광안내소에 비치된 안내서를 한 장 꼭 챙기자.  안내하는곳으로 발길을 옮기다보면 어느새 섬 한바퀴를 돌고,  ‘느려서 행복한 섬’ 이라는말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안내서에는 낙지 초무침과 해풍건정, 장뚱어와 백합 요리 등 증도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도 소개되어 있다. 증도는 걷거나 자전거 여행을 하기에도 좋다.  ‘모실길’이라고 이름을 붙인42.7km의 길은 5개의 구간으로 나뉜다.이 길은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를 끼고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도로로 경사가완만하고 주변 경치가 빼어나다.  글, 사진 김태종 
탱고와 축구의 나라, 아르헨티나 2016-06-09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밤하늘에는 어릴 때 보았던 은하수가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중국에서 13년 넘게 지내면서 파란 하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게 아르헨티나의 맑은 하늘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공해가 거의 없는 이곳이 천국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르헨티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 곳 중 하나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나오는 대척점 근처에 있는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다. 그래서 가는 길도 멀다. 정확히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서 도착하는 곳이니만큼 직항편도 없다. 이번에는 터키 이스탄불과 브라질 상파울루를 경유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가는 터키항공을 이용했다. 비행시간만 30시간이 걸리고 경유지에서 대기하는 시간까지 따지면 편도에 34시간이 넘게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비행기를 타는 동안 다섯 번의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국회 의사당 백인이 95% 이상인 남미 국가아르헨티나는 1580년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다. 알다시피 스페인은 나폴레옹에게 패하기 이전까지 무적이었다. 이런 힘을 무기로 브라질을 제외한 남미의 모든 지역을 장악했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하면서 스페인의 철권통치가 남미 지역에서도 힘을 잃었다. 그동안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느끼던 점령지의 수장들이 이 틈을 이용하여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을 선언하면서 여러 나라로 분리되었다. 아르헨티나 역시 이 시기에 산 마르틴 장군(1778~1850년)에 의해 1816년 독립을 선언했다.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까지 세계 10대 강국에 들 정도로 대단한 부를 지닌 나라였다. 한반도의 12.5배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지만 현재 인구는 4,000여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백인이 주를 이루며(95% 이상)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에서 온 이민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언어는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92%가 가톨릭 신자이다. 인구의 약 90%가 도시에 거주하는데 전체 인구의 30% 이상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고 있다. 20세기 영화를 아직도 기억하는 아르헨티나인들은 자신들은 남미가 아니라 유럽에 속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아르헨티나는 다른 남미 국가와 달리 인구의 95% 이상이 백인이다 넓고 비옥한 땅 때문에 아직도 1차산업의 비중이 높은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국토의 40% 이상이 목장과 방목지일 정도로 목축업이 발달했으며 10%의 농지에서는 밀, 보리, 옥수수, 귀리 등을 생산한다. 아르헨티나의 농업 경쟁력은 세계에서 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강하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농산물을 수출하려면 수출세를 내야 한다. 그것도 35%로 세율이 무척 높다. 이번에 새로 선출된 대통령이 수출세를 없애 수출 경쟁력을 더욱 높이겠다고 공약했으니 아르헨티나의 농•축산물은 세계 시장에서 더욱 지배력을 높여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어쨌든 지금까지 이런 고율의 수출세를 부담하고도 다른 나라보다 싼 가격에 수출을 할 수 있으니 엄청난 경쟁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수출을 할 경우 원자재 구입에 부담했던 관세나 부가가치세를 돌려주는 게 보통이다. 그렇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수출할 때 세금을 환급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출세를 내야 하니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마도 정부의 주요한 재정수입이 농•축산물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출세에 대한 비중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마차가 다녔던 길을 지금은 차가 달린다. 이미 140년 전에 길이 50cm의 돌을 부에노스아이레스 전체 도로에 깔았다 정치 불안과 경제정책의 실패아르헨티나는 서쪽은 안데스산맥을, 동으로는 대서양을 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거대한 나라다. 그래서 동시에 사계절이 존재하는 희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북부에는 사막과 정글이 형성되어 있고 남쪽은 빙하지대가 펼쳐진 장관을 볼 수 있다. 얼마 전에 아르헨티나의 거대한 빙하가 무너져 내렸다는 뉴스를 보았다. 아르헨티나 최남단 오수하야에서는 몇 년마다 빙하가 내려앉는 장관을 연출하는 곳으로 명성이 높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넓은 농토를 가진 나라이지만 계속적인 정치 불안과 경제정책 실패로 남미의 선진국 꿈은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화를 이루었지만 계속되는 쿠데타로 칠레와 함께 오랜 기간 군사 독재정권에 의해 통치를 받는 쓰라린 경험을 겪었다. 안데스 산맥을 마주하고 있는 칠레의 칠레노트 정권의 폭압정치도 다른 나라의 질타를 받았지만 아르헨티나 역시 군사정권 시절 많은 민주인사들이 감옥에 투옥되고 고문과 사형을 당한 것으로 악명 높다. 1976년 비델라 장군이 집권할 당시 약 3만 명에 이르는 학생과 반정부 인사들이 죽음을 당했다. 지금도 이를 기념하는 ‘5월의 탑’ 앞에는 당시 희생자와 실종자들을 위한 기도회가 계속되고 있다. 워낙 쿠데타가 자주 발생해서 제대로 임기를 끝낸 대통령을 손으로 꼽을 정도로 불안한 정치상황은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버스전용차로는 전임 대통령이 한국에서 따온 제도다 넓은 국토와 비옥한 농지를 가지고 있지만 1차산업의 비중이 높고 경제정책의 실패가 이어지면서 국민들의 삶은 그다지 풍요롭지 못하다. 한때 세계 최초로 냉동선과 볼펜을 만들 정도로 산업화를 이루는가 싶었지만 공업화가 뒤처져 대부분의 중화학 제품은 수입을 하는 상황이다. 1989년 달러와 페소를 1:1로 하는 태환경제를 도입하고 물가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전기, 철도, 항공 등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등 경제의 대수술을 단행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한때 인플레이션이 5,000%에 달해 지폐로 도배를 한다고 할 정도로 불안정한 경제를 유지해왔고, 불과 지난해에도 디폴트를 선언할지 모른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달러당 페소의 교환율이 15:1에 달하니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어느 정도로 어설프게 운영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하철. 이미 100여 년 전에 지하철이 건설됐다 필자는 아르헨티나를 가기 전까지 이곳이 대단한 부자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1인당 GDP가 1만4,000달러밖에 안 되고 전기와 철도 등 공공부분이 대단히 취약하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실제로 아르헨티나의 심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길을 막고 시위를 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잘 사는 나라라고 생각했던 아르헨티나의 수도에서 섭씨 40도에 가까운 더운 날씨에 그것도 한 달 가까이 전기가 안 들어오는 상황을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페론 스토리아르헨티나의 정치를 이야기하려면 1940년대 중반 대통령을 역임한 후안 페론의 부인인 에바 페론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와 뮤지컬, 오페라로 유명한 ‘에비타’는 ‘꼬마 에바’라는 뜻이다. 시골 농부의 딸로 태어나 일국의 정치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올랐던 에바 페론의 삶은 한 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하다. 에바 페론은 팜파스의 작은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입성한 후 삼류 연극배우를 거쳐 각고의 노력 끝에 영화배우, 유명한 성우로 성공한 그녀는 후안 페론 대령을 만나게 된다. 당시 정치에 대망의 꿈을 꾸고 있던 후안 페론의 두 번째 부인이 된 에바는 노동자의 처우개선과 임금인상, 여성의 지위개선 등의 내세우며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아르헨티나의 독립영웅 산 마르틴 장군의 묘가 있는 성당 그렇지만 그녀는 현실을 무시하고 펼친 무모한 복지정책으로 부강한 아르헨티나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비난도 동시에 받는다. 가난한 빈민촌을 방문한 에바 페론은 그 동네 사람들을 모두 새롭게 주택단지를 조성해 이주시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나라였을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나라의 재정은 거덜이 났다. 일이 없으면 정부에서 수당을 주니 열심히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전형적인 포퓰리즘으로 인해 남미의 유럽을 꿈꾸던 아르헨티나는 결국 실패한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화처럼 극적인 삶을 살았던 그녀는 백혈병과 암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에비타(에바 페론)의 묘비 에바 페론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극과 극이다. 또한 그녀의 삶은 죽어서도 평탄하지 못했으니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여자라고 할 수 있다. 쿠데타로 페론을 몰아낸 군사정부는 페론주의의 부활이 염려되어 에바 페론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빼돌린다. 또한 쿠데타로 쫓겨난 페론은 해외로 망명길을 떠난다. 그렇지만 불사신과도 같은 페론은 아르헨티나 정계에 복귀해 1973년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정말 영화 같은 사건이 아르헨티나의 근현대사를 장식하고 있다. 대통령이 된 에바 페론은 그녀의 시신을 아르헨티나로 옮겨와 레콜레타 가족 묘지에 안장시켰다. 덕분에 에바 페론의 묘소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한 번은 찾게 되는 명소가 되었다.에바 페론의 망령은 아직도 아르헨티나를 혼돈스럽게 만들고 있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나치의 잔당들이 최근까지 숨어 지내던 곳으로 유명하다. 평소 히틀러와 친하게 지냈던 페론이 독일의 패망 이후 나치의 추종자들이 아르헨티나에 머물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영향으로 히틀러가 죽지 않고 아르헨티나로 몰래 들어와서 여생을 평화롭게 살았다는 루머까지 나돌았다. 해외토픽에서 나치 잔당에 관한 소식이 들려오면 아르헨티나에서 나온 이야기가 많다. 아르헨티나에는 독일마을이 있다. 코르도바의 비샤 헤네랄 벨그라노(Villa General Belgrano)에는 독일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많이 거주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맥주는 아르헨티나에서 최고로 꼽히며 매년 10월에는 맥주축제가 벌어진다. 코르도바 에서 열리는 세계 3대 랠리(WRC)중 하나인 아르헨티나 랠리는 거칠고 험한 코스로 유명하다. 멘도사는 아르헨티나 포도주의 주산지이다. 아르헨티나의 포도주는 그동안 자국민의 소비가 워낙 높아서 해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럽의 포도주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지만 세계 명품의 포도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주원료로 쓰이는 말벡 포도는 유럽에서는 전염병으로 인해 멸종되었지만 아르헨티나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며 맛 좋고 품질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강렬한 원색으로 치장한 보카 지역 양철 집들의 모습 탱고의 발산지이자 축구강국탱고(Tango)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집시풍의 음악과 춤이다. 얼마 전에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아르헨티나를 방문해서 미녀 댄서와 탱고를 춘 것 때문에 한동안 시끄러웠었다. 탱게레(Tangere : 만질 수 있다)라는 말에서 기원하는 탱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Boca) 지역에서 탄생했다. 19세기 후반의 보카는 유럽에서 들어오는 배들이 짐을 하역하는 항구였다. 그곳에서 일하는 하층민들이 고달픈 삶을 음악과 춤으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탱고다. 보카 항구는 오래전에 북쪽으로 이전해서 지금은 물자를 나르던 노동자들이 없지만 이곳에는 아직도 가난한 이들이 많이 살고 있다. 보기에도 낡고 허름한 건물들에는 미국의 빈민촌처럼 온통 지저분한 낙서들로 가득 차 있다. 길거리에 세워진 차들은 너무 낡아서 제대로 굴러갈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탱고의 발상지에 지어진 집들은 벽과 지붕을 양철로 더덕더덕 붙여놓았다. 그렇지만 양철로 된 집들은 화려한 원색으로 칠해져 있어 마치 예술작품을 보는 듯하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조선소에서 쓰고 남은 페인트로 집을 칠하다보니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나 원색의 강렬한 조화로 인해 이곳의 양철 집들은 관광객들에게 아름다운 건출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양철로 지어진 탓에 보카의 뜨거운 여름을 견뎌 내려면 무척이나 힘들 것 같다.보카는 세계적인 축구팀 보카 주니어의 본거지다 보카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팀 보카 주니어가 있다. 영국 선원들이 건네준 축구공으로 마구잡이식 축구를 하던 보카 지역 사람들은 1905년 아르헨티나 최초의 축구팀을 만들었다. 이 팀이 아르헨티나 축구의 역사를 썼다는 보카 주니어다. 축구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고단한 삶의 애환을 풀 수 있는 돌파구였다. 이들의 결속력은 어느 지역보다 강해서 아르헨티나 최고의 팀이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축구 스타 마라도나가 이 팀에서 활약했고 현재는 한때 맨체스터에서 박지성과 함께 뛰었던 테베스가 소속되어 있다. 아르헨티나는 1978년과 1986년 월드컵에서 우승을 한 축구강국이다. 아르헨티나 보카 지역은 탱고의 발산지다 한인들, 의류 및 액세서리 시장 장악아르헨티나에는 3만여 명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다. 지금은 95% 이상이 의류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이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기 위해 간 이민자들이었다. 아르헨티나의 한국인 이민사는 50년이 넘는다. 1965년 대한민국 정부는 아르헨티나에 농업이민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현지에 840헥타르(8.4㎢)의 땅을 구입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은 아주 절박했다. 먹을 것도 없었고 일을 하려고 해도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이 없었다. 인구는 많고 식량사정도 좋지 않으니 외국으로 이민을 보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옷 시장인 아베자네이다. 한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상가다 그렇지만 아르헨티나 이민 초창기 농사를 짓던 부지런한 한국인들은 농사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의류 시장에 진출한다. 당시에는 의류업계를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무기로 의류 시장에 뛰어든 한국인들은 뛰어난 디자인 감각으로 아르헨티나의 옷 시장을 완전히 석권했다. 천하의 유태인을 몰아낸 한국인들의 저력이 대단하기만 하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계’라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자본조달 방식이 있다. ‘계’를 통해 자본을 만들고 이를 통해 사업을 키워감으로써 아르헨티나 의류 시장에서 입지를 키울 수 있었다.다보탑 모양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이 시기 크게 발전한 한국의 산업화 역시 한국인들이 의류업에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해외에 거주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원부자재를 한국에서 구입하면서 현지에서 의류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지금도 남미의 모든 나라에서 의류와 액세서리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한국인들이다. 물론 한국인 특유의 억척스러움과 열정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국인은 물건을 고르는 안목과 디자인 감각이 뛰어나 사농공상이라 하여 장사하는 것을 가장 천하게 여기던 우리 민족이 남미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을 보니 새삼스럽기까지 하다.아르헨티나에는 300여 개가 넘는 골프장이 있고 골퍼들의 평균 실력도 대단히 높다 한편,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골프 실력은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골퍼로는 US 오픈과 마스터스를 제패한 앙헬 카브레라(Angel Cabrera)와 올해 소니 오픈에서 우승한 파비앙 고메즈(Fabian Gomez)가 있다. 이들은 모두 캐디 출신으로 세계적인 골퍼가 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아르헨티나에는 300여 개가 넘는 골프장이 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차로 30여 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골프장도 수없이 많다. 게다가 골프장 사용료가 우리 돈으로 2만원 미만이니 누구나 부담 없이 골프를 즐길 수 있다. 말 그대로 골프의 천국이다. 이런 여건 때문에 아르헨티나에 사는 한국인들 중에는 골프광들이 많다.글 양인환 중국통신원1957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나 91년까지 금융권에서 일하다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 자동차와 함께 하는 삶에 새롭게 도전했다. 91년 국산 자동차로 미국 48개 주를 일주해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92년 아시아 록스타로 호주를 일주했다. 93년 호주 웨스턴 랠리스쿨을 이수한 뒤 호주 웨스턴 랠리 침피언십, 홍콩-북경 랠리(94년), 태국 랠리(94년) 등에서 전문 드라이버로 활동했다. 93년부터 96년까지 본지의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참가한 랠리를 비롯해 세계의 다양한 자동차 경주와 시승기를 소개했다. 저서로 ‘대머리 돈키호테’, ‘차를 알고 문화를 세우는 여유로운 운전’이 있다. 2002년부터 중국 저장성 이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양인환 통신원은 앞으로 중국을 비롯한 북미, 남미, 아시아, 유럽 등의 재미있는 여행기를 소개할 계획이다. 머지않아 미국과 호주에 이어 중국과 남미대륙을 일주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대자연이 빚어낸 경이로움, 이과수 폭포(IGUAZU F.. 2016-06-24
 마치 물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전율과 공포가 밀려온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내린다. 천지개벽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 틀림없다. 누가 이곳을 악마의 목구멍이라고 했는가. 이과수 폭포를 처음으로 본 필자의 눈에는 악마의 목구멍이 아니라 자연이 베푼 최고의 축복이다. 30여 시간의 비행 끝에 머나먼 나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내렸다. 아르헨티나는 한반도의 13배에 이르는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이지만 인구는 4,00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지구상에서 몇 안 되는 공해가 없는 청정지역에다 천혜의 지하자원을 보유한 나라다. 마침 이번 출장길은 업무에 그다지 긴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골프를 치며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풍광을 맘껏 즐겼다. 바이어가 꼭 구경하라며 왕복 비행기 표와 호텔을 예약해준 덕분에 이과수 폭포도 감상했다. 아르헨티나로 떠나기 전에는 예정에도 없던 일정이었는데, 이것이 내 생애 최고의 경험이 될 줄이야! 이과수는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3개국에 걸쳐 있다 들어서면서부터 감탄사 절로 나와이과수 공항은 생각보다 작았다. 이과수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국경을 가르는 아마존 강 하류에 자리한다. 이과수 폭포가 있는 아마존 강을 끼고 파라과이까지 3개 국가가 마주하지만 파라과이 쪽으로는 폭포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전에 보았던 미국과 캐나다 국경의 나이아가라 폭포에 비해 복잡하고 광범위하게 펼쳐져 처음에는 어떤 식으로 폭포가 형성되어 있는지 쉽게 알기가 어려웠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낙차가 크지만 강의 구조가 간단해서 보는 방법도 단순한 편이다. 미국과 캐나다로 구분되어 있지만 한 군데에서 보면 대략 폭포의 구조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과수는 상당히 먼 길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답사를 해야 하는 꽤나 복잡한 형태였다. 폭포의 구성은 브라질 쪽에 20%, 아르헨티나 쪽 80%의 비율로 조성되어 있다. 따라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양쪽을 모두 구경해야 이과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먼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버스를 타고 브라질 국경으로 이동한 뒤 파라과이와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구분된 삼각 지역에 다다랐다. 이과수는 원주민 말로 큰물이라는 뜻으로, 브라질 동부에서 시작되어 아르헨티나 국경과 마주하는 지점에서 거대한 폭포를 만들어낸다. 브라질의 밀림지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지류들이 합류해 엄청난 양으로 불어난 물줄기가 이과수의 장관을 연출하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다리를 하나 건너니 브라질이다. 강을 가르는 다리의 반은 아르헨티나 국기를 상징하는 색이, 나머지 반은 브라질 국기의 색이 칠해져 있다. 간단한 심사를 거쳐 브라질 국경을 통과했다. 베트남에서 캄보디아 국경을 넘을 때보다도 더 간단했다.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에 가려면 비행기나 배를 이용해야 하는데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에는 나무로 된 형식적인 바리케이드가 하나 달랑 있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과수에 들어서는 순간 감탄사가 계속 흘러나왔다. 제주도의 정방폭포만 보아도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데 엄청난 규모의 폭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이과수 강이 세 나라로 갈라져 있다. 왼쪽이 파라과이, 오른쪽은 브라질, 아래쪽은 아르헨티나다 세계적인 관광지인 만큼 독일에서 온 부부를 비롯해 영국, 이탈리아, 미국, 콜롬비아, 멕시코 등 버스에 동승한 사람들의 국적과 인종도 다양했다. 한국인은 필자 혼자였다. 스페인어와 영어로 안내되는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60만 헥타르(6,000㎢)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펼쳐진 이과수는 198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또한 이과수는 희귀 동식물의 보고로서 아르헨티나는 1934년, 브라질은 1939년에 이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 국립공원의 면적은 브라질이 아르헨티나에 비해 3배 정도 규모가 크다. 폭포의 하이라이트, ‘악마의 목구멍’브라질 쪽에서 이과수 공원 입구로 들어서자 거대한 폭포들이 장관을 이루며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하며 셔터를 눌러댄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곧 드라마의 한 장면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지막 데빌 스로우트(Devil throat, 악마의 목구멍)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에 지나지 않는다. 굉음을 내며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지는 광경은 대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 그 자체다. 낙차를 이기지 못하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물보라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순식간에 온몸을 적시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인간의 존재가 하염없이 작아지는 느낌에 전율하는 그 기분이란!이과수 관광의 하이라이트인 악마의 목구멍. 마치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악마의 목구멍은 길이 약 700m, 폭 150m의 U자형으로 형성되어 있다. 어떻게 엄청난 급류가 흐르는 이곳에 다리를 놓아 폭포를 정면에서 볼 수 있게 만들었을까? 이과수 폭포는 길이 4.5km, 높이 약 80여m에 이르며 초당 떨어지는 물의 양은 1,000톤에 달한다. 1986년 개봉된 영화 ‘미션’(Mission)에서 본 이과수의 장엄한 광경도 경이롭기 짝이 없었는데, 직접 눈으로 마주하는 이과수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충격 그 자체였다. 엄청난 양의 물줄기가 눈앞에서 천둥을 치며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보노라니 마치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 온 듯한 느낌이랄까.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은 몸으로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면서도 이과수 폭포에서 느꼈던 감동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호텔 방은 숲속 깊은 곳에 지어져 있었다 호텔은 이과수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숲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 지어진 호텔들은 모두 규모가 작고 숲 속에 있다는 것이 특징. 일 년에 아르헨티나 쪽의 이과수를 찾는 관광객이 100만 명 내외라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작은 것이 의아했다. 알고 보니 호텔 등의 숙박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설을 크게 늘리지 않는단다. 하루 최대 수용인원은 6,000명이지만 3,000명 정도가 적정 수준이라고. 하지만 시설은 아주 안락했고, 편안한 마음으로 휴가를 즐기기에 그만이었다. 맑은 공기와 새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숲 속의 휴식처로 이만 한 곳이 또 있을까. 로비에서 방까지 가는 거리가 꽤 멀었는데, 전기차로 고객을 방까지 데려다주는 호텔 측의 꼼꼼한 배려도 인상적이었다. 다만 호텔 안에 식당 외에는 편의시설이 아무것도 없어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택시를 타야 한다는 점이 아쉬웠을 뿐…….50일간 중남미를 여행 중인 한국인 모녀 아르헨티나 쪽이 볼거리 더 많아뷔페에서 토스트와 커피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과연 호텔이 유지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산했다. 다른 호텔들의 사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행사에서 제공한 버스는 각 호텔을 돌며 관광객을 태우고 집합장소로 이동했다. 마침 일요일이라 어제와 달리 큰 버스를 이용한 까닭에 많은 관광객이 한 팀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더욱 다양한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과 함께 했는데, 한국에서 온 이들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50일간 중남미를 여행하는 모녀와 사돈끼리 중남미를 일주하는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오랜만에 한국말로 수다를 떨었다. 예전에는 남미에서 한국인들은 보기가 어려웠는데 요즘은 어딜 가나 만날 수 있으니 우리의 여행 패턴도 많이 발전한 것 같다. 특히 유럽에서는 배낭을 맨 젊은이들과 많이 조우한다. 한국을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가 얼마나 좁은 울타리 안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세계 곳곳을 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을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사돈끼리 중남미 여행에 나선 한국 관광객들 아르헨티나 구간은 상당히 길면서도 다양한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워낙 넓은 지역에 걸쳐 있어 일부 구간은 기차를 이용해서 다니도록 해놓았다. 아르헨티나 국립공원에서 배포한 지도를 다시 보니 어제 우리가 감탄을 하며 넋을 놓고 보았던 폭포들이 모두 아르헨티나 쪽에 자리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폭포는 악마의 목구멍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 나머지는 모두 아르헨티나 쪽에 있는데 워낙 규모가 큰 탓에 브라질 쪽에서 보아도 장관이었던 것이다.오늘 아르헨티나 쪽에서 이과수를 보니 그 풍경이 더욱 웅장하고 멋지다. 한 면으로 쭉 이어진 폭포의 파노라마를 감상하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경험이었다. 폭포에서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소용돌이와 물보라는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폭포 주위에는 항상 영롱한 무지개가 피어났다.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물줄기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마치 그 안으로 빨려들 것 같은 공포감마저 일었다.폭포 주변은 항상 무지개가 피어오른다 아르헨티나 국기가 걸려 있는 폭포 앞에 선 안내원들은 너나없이 우산을 들고 있었다. 워낙 물줄기가 강해 바닥을 튕기며 올라오는 물방울이 만들어낸 비 폭풍이 강하게 몰아쳤다. 물줄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려 멋진 사진을 찍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게다가 강렬한 햇살로 인해 카메라의 화면이 보이지 않아 사진을 제대로 찍고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웠다.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에 옷이 젖는 것도 잊은 채 관광객들은 이과수에 흠뻑 빠져 들었다.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물줄기를 맞으며 자연에 순응하는 모습. 그렇게 그들은 탄성을 지르며 황홀한 모습으로 이과수와 하나가 됐다. 대자연의 위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을 느끼며……. 바이어가 아르헨티나에 왔으면 이과수 폭포는 꼭 봐야 한다며 이과수행 비행기 표를 손에 쥐어 주었을 때 이를 한사코 사양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이곳을 안 보고 돌아갔다면 얼마나 후회했을까?이과수의 대미는 보트를 타고 폭포 밑까지 가는 것이다 쏟아지는 폭포 아래로 돌진이과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미는 보트를 타고 폭포 밑까지 경험하는 것이었다. 이곳까지 어렵게 왔으니 파라과이를 건너갔다 올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보트여행이 더 기억에 남을 거라는 가이드의 말에 따라 280페소(약 2만2,000원)를 주고 표를 샀다. 보트를 타기 전에 구명조끼를 입고 방수가방에 사진기와 기타 소지품을 집어넣었다. 폭포 밑을 통과하면 모든 게 젖기 때문이다. 보트를 타고 강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이과수 폭포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강줄기를 따라 이어진 계곡을 지나면서 보는 이과수의 광경은 제한적이지만, 강 위에서는 이과수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서 더욱 장엄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눈앞으로 거대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연출되는 그 모습이란! 가이드가 방수 가방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모든 소지품을 방수가방에 넣으라는 가이드의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보트는 폭포 앞으로 돌진했다. 순간 이대로 배가 뒤집히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하지만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엄청난 물 폭탄이 온몸을 덮쳤다. 이대로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함께 물 폭풍 때문에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처음에는 물 폭풍에 머리와 상의가 젖기 시작했지만 모험이 거듭될수록 속옷과 신발까지 완전히 젖어 버렸다. 이 때문인지 아예 수영복 차림으로 보트를 타는 관광객도 있었다. 경탄과 공포가 함께 한 보트 투어는 20여 분간 지속되었다. 나중에 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꼭 방수 카메라를 가지고 오리라.일부구간은 미니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보트를 내려서 보니 뒷주머니에 넣었던 지갑이 완전히 물에 젖어 안에 들어 있던 돈까지 물에 퉁퉁 불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쯤은 괜찮다는 듯 관광객들의 얼굴에는 즐거운 표정이 가득했다. 보트에서 내린 뒤에는 지붕이 없는 버스로 비포장도로를 따라 정글 속을 누볐다. 이곳은 아열대 지역으로 세계적으로 희귀한 동식물들이 분포되어 있다. 풍부한 강수량과 울창한 숲이 이렇듯 거대한 강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과수를 헬리콥터로 돌아보는 패키지 코스도 있다. 별도로 신청할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것도 경험해볼 작정이다. 하늘에서 보는 이과수의 장관은 분명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할 테니까.이과수는 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이 다르다 비록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이과수 여행은 알찬 내용으로 짜여진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숙소도 이색적이고 편안했으며, 무엇보다 쇼핑만을 강요하는 우리네 여행사의 패키지 여행과 다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과수에서 느낀 감동과 추억을 필자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글 양인환 중국통신원1957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나 91년까지 금융권에서 일하다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 자동차와 함께 하는 삶에 새롭게 도전했다. 91년 국산 자동차로 미국 48개 주를 일주해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92년 아시아 록스타로 호주를 일주했다. 93년 호주 웨스턴 랠리스쿨을 이수한 뒤 호주 웨스턴 랠리 침피언십, 홍콩-북경 랠리(94년), 태국 랠리(94년) 등에서 전문 드라이버로 활동했다. 93년부터 96년까지 본지의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참가한 랠리를 비롯해 세계의 다양한 자동차 경주와 시승기를 소개했다. 저서로 ‘대머리 돈키호테’, ‘차를 알고 문화를 세우는 여유로운 운전’이 있다. 2002년부터 중국 저장성 이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양인환 통신원은 앞으로 중국을 비롯한 북미, 남미, 아시아, 유럽 등의 재미있는 여행기를 소개할 계획이다. 머지않아 미국과 호주에 이어 중국과 남미대륙을 일주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다임러 트럭 코리아 조규상 대표이사 2016-06-09
"고객이 가장 신뢰하는 브랜드가 되겠습니다" 다임러 트럭 코리아가 인천 경원재 앰배서더 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Trucks you can trust’, 즉 고객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트럭을 공급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하는 동시에 서비스 센터 확충과 각종 서비스 프로그램 강화 등 고객 가치 확대 전략을 발표하기 위한 자리였다. 아울러 신제품과 주요제품을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다임러 트럭 코리아는 이날 선보인 뉴 아록스 6×4 카고트럭과 지난 3월 출시한 뉴 아록스 25.5톤 덤프트럭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핵심 모델인 뉴 악트로스 트랙터는 볼 수 없었다. 그간 미흡했던 덤프와 카고에 집중하겠다는 의도일까? 마치 주력 상품군을 늘려 시장 확대에 나서겠다는 의지처럼 보였다. 다임러 트럭 코리아의 이런 자세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는 국내 상용차 시장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지난해 국내 대형 트럭 시장에서 수입 트럭의 점유율은 최초로 30%를 넘었다. 총 1만4,275대의 판매량 중 무려 4,396대(30.8%)가 수입 트럭이었다. 지난 2005년 수입 대형 트럭의 국내 점유율은 10% 미만이었다. 점유율이 수직 상승한 건 최근 3년간의 일이다. 2013년 19.6%, 2014년 25.6%로 매년 6%대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업계는 올해도 수입 대형 트럭의 판매량이 20~25%(점유율 6~7.5%)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힘입어 트럭 수입사들은 판매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볼보트럭 코리아는 향후 4년간 판매량을 현재의 두 배로 키우겠다고 밝혔고, 만트럭버스코리아도 버스를 수입해 판매 확대에 나서겠다는 전략을 발표했다.  성장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날 다임러 트럭 코리아는 판매량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저 새 제품의 장점과 고객 만족도 제고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경쟁 회사들과는 사뭇 다른 자세. 지난해 7월 취임한 다임러 트럭 코리아 조규상 대표이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판매량보다 고객이 더 중요합니다. 고객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트럭을 선보이고, 또 그런 브랜드가 되는 것이 목표이지요. 오늘 우리가 발표한 ‘Trucks you can trust’라는 비전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객이 필요로 하는, 고객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고 고객이 만족하는 서비스를 구축해 고객의 신뢰를 얻다 보면 성장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이니까요.”  조규상 대표이사의 이력은 독특하다. 자동차와의 인연은 1996년 삼성자동차 중앙연구소 입사와 함께 시작됐다. 그는 당시 설계팀에서 차체를 만들었다. 삼성자동차가 경영난을 겪기 시작하던 2000년에는 스카니아 코리아로 이직해 기술지원 및 기술교육 업무를 맡았다. 2005년에는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로 옮겨 서비스 운영과 신차인증을 담당하다 서비스 & 파트 부문 부사장에까지 올랐다. “보통 대표이사는 세일즈 출신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계공학을 전공한, 전형적인 엔지니어입니다. 삼성자동차에서 차체 설계를 할 때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전공과도, 꼼꼼한 저의 성격과도 잘 맞았습니다. 스카니아 코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승용차만 알고 있다가 트럭을 처음 배웠기 때문이죠.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에서는 주로 AS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즉, 엔지니어와 AS를 맡아오다가 갑자기 세일즈까지도 총괄하는 대표이사 직책을 맡게 된 거죠. 이처럼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이력이 아마도 저의 강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회사가 조금 더 건전한 방향으로 가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다임러 본사에 회의를 하러 가면 저와 비슷한 이력을 가진 대표이사들을 종종 만나곤 한답니다.” 그런데 조규상 대표에게 이러한 이력보다 더 화려한 타이틀이 있다. 바로 다임러 트럭 코리아 최초의 한국인 CEO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이 또한 역시 자신의 강점이라고 말한다. 한국인이라서 고객과 소통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다. “본사 임원들과의 인터뷰에서 제가 한 말이 있습니다. CEO가 된다면 한국인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겠다는 것이었죠. 고객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트럭. 그 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가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고객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주요 고객들을 일일이 찾아 허심탄회한 쓴 소리와 여러 가지 제안들을 직접 들으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 CEO라면 이런 부분에서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특히 국내 상용차 시장처럼 개인 고객 비중이 매우 높은 시장에서는 더욱 그렇죠.”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와 다임러 트럭 코리아는 모두 독일 다임러 그룹의 자회사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엄연히 별개의 조직이다. 벤츠를 구매할 때 금융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메르세데스 벤츠 파이낸셜 코리아 역시 마찬가지다. 조규상 대표처럼 관계사간 이동을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법인이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다. 하지만 조규상 대표는 핵심만큼은 같다고 말한다. 바로 고객을 상대한다는 점이다.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에서 제가 항상 하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 차는 세일즈가 팔지만, 두 번째 차는 AS가 판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상용차에서 더욱 부각됩니다. 우리 고객에게 트럭은 사업 수단이기 때문이죠.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해 차를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을 최대화하는 것과 서비스 비용을 낮춰 ‘총 소유 비용’(TCO, Total cost of Ownership)을 최소화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저희가 발표한 서비스 센터 확충 계획이나 서비스 컨트랙트, S2S(Sales-to-Service) 프로그램 등이 바로 이런 고민의 결과하고 할 수 있습니다.” 총 소유 비용의 최소화다임러 트럭, 즉 메르세데스 벤츠 트럭이 트랙터 분야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뛰어난 연비에 있다. 상용차에서 연비는 수익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물론 차 가격과 서비스 비용도 중요하다. 이날 다임러 트럭 코리아와 조규상 대표이사가 총 소유 비용을 유독 강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된 유로6 모델들은 어떨까. 높은 배기가스 기준을 만족하기 위해 여러 장치들이 추가되며 차 가격과 유지보수 비용이 다소 높아졌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다. “유로6 모델로 거듭나며 가격이 조금 상승한 것은 사실입니다. 한층 더 엄격해진 배기가스 기준 때문이죠. 하지만 총 소유 비용은 낮아졌습니다. 유럽의 한 외부기관에서 장시간/장거리 테스트를 한 결과 1km당 평균 유지보수 비용이 약 70원에 불과했습니다. 유로5 모델에 비해 약 29% 낮은 수치죠. 개선된 연비도 연비이지만 이런 결과에는 각종 부품의 수명이 늘어났다는 것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선보인 뉴 아록스 카고와 덤프 역시 이런 장점을 무기로 삼는다. 이들은 다임러 트럭의 대표 트랙터인 악트로스와 플랫폼이 같다. 때문에 성능과 효율이 거의 동일하다. 물론 목적이 다른 모델인 만큼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특장 작업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도 뉴 아록스만의 장점이다. “제가 만난 건 고객만이 아닙니다. 여러 특장 업체들도 찾아갔습니다. 트럭은 판매 이후에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적재공간이 탱크로리로 바뀔 수도 있죠. 게다가 개조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용도에 따라 두 번, 세 번 진행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특장 용이성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부분이 미흡하면 고객은 큰 손해를 봅니다. 작업이 지연되거나 원하는 방향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요. 때문에 우리는 차를 파는 게 끝이 아니라 고객과 특장 업체 사이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국내에는 중소 규모의 특장업체가 굉장히 많습니다. 대형 업체가 주도하고 있는 유럽과는 상황이 다르죠. 특장 업체들은 차의 기술적인 부분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싶어 합니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개조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직접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매뉴얼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차를 가지고 현장에 가서 개조에 필요한 교육을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차를 직접 측정하고 레이아웃도 검토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현재 이런 활동을 하고 있는 곳은 다임러 트럭 코리아 뿐입니다.” 뉴 아록스는 시장 확대를 위한 전략 제품이다. 하지만 다임러 트럭 코리아는 이미 경쟁력이 뛰어나고 아주 독특한 제품을 보유하고 있다. 바로 유니목과 스프린터다. “유니목은 저희에게 아주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고유 성격 때문에 도로공사나 관공서 위주로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죠. 개인 고객을 포함한 판매 다각화의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고 이에 맞는 전략을 검토 중입니다. 스프린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내에서는 특장 작업을 거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과 사업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미드사이즈 밴이요? 필요하다면 벤츠 V클래스의 상용차 버전인 비토를 들여올 생각입니다. 우리는 시장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다시 강조한다. 판매량 제고를 위한 라인업 확충보다는 고객과의 신뢰가 더 중요하다고. 그것을 위해서는 고객의 가치를 확대하는 것이 우선이라고.“여러 차례 말씀 드렸듯이 트럭에서는 총 소유 비용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뛰어난 연비는 이미 널리 알려진 벤츠 트럭의 장점입니다. 이제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서비스를 위한 노력이죠. 저희는 비용을 낮추기 위해 여러 독보적인 서비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비스 컨트랙트가 대표적이죠. 소비자는 오일, 필터 등의 소모성 부품을 교환해야 합니다. 옵션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 가입하면 약정 기간 동안 추가 비용 없이 조금 더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약 26%의 비용 절감 효과가 있죠. 업계 유일의 멤버십 제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서비스 센터에서 사용한 결제금액의 일부가 포인트로 적립되고, 이것을 다시 현금처럼 쓸 수 있는 제도입니다. 현재 고객들의 전체 수리 비용 중 약 8%가 포인트로 결제되고 있습니다. 또한 2016년 1월부터 교체 빈도가 가장 높은 7종 1만5,000개 부품의 값을 약 10% 인하했습니다.” 고객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조규상 대표이사가 다임러 트럭 코리아로 옮긴 지 약 9개월이 지났다. 대표이사 업무가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더 재미있다고 답한다. 조직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책임감이 따르지만, 회사 방향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게 아주 큰 매력이라고. 그는 자신의 엔지니어적인 성향을 회사 운영에 십분 활용하고 있다. “엔지니어에게는 인풋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죠. 입력되는 정보를 일련의 처리 과정에 넣고 결과물을 뽑아내는 절차에 굉장히 익숙합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입력 정보는 고객의 목소리입니다. 현장에서 들은 이 이야기들을 토대로 회사의 방향을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회사 구조는 물론, 저의 업무 구조에도 변화를 주기 위해 매일 아침 출근을 할 때면 ‘내가 오늘은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임직원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조금 더 능동적인 태도를 가졌으면 하는 거예요. 다임러 트럭 코리아는 국내 대기업과는 달리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작은 조직입니다. 그렇다고 일의 방식을 바꾸거나 더 많은 일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각자가 하던 일을 하되 조금 더 고객에게 다가가면서 하자는 것이죠. 능동적인 고객 케어 프로세스는 대단한 게 아닙니다. 이런 작은 변화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저는 이런 변화를 만드는 게 아주 즐겁습니다. 혹시 주말에도 일하는 거 아니냐고요? 하하, 주말에는 취미생활에 푹 빠져서 지냅니다.” 그는 자동차와 비행기 마니아다. 자동차는 만지고 운전하는 것 모두 좋아한다. 자동차 정비기능사 자격증까지 보유해 간단한 건 직접 수리까지 한다고. 가장 좋아하는 차를 묻자 메르세데스 벤츠 SLK(SLC)를 꼽는다. 현재는 트럭 면허를 준비 중이다. 다음 달쯤 취득하게 될 예정인데, 곧 트럭 드라이브에 도전해볼 계획이다. 비행기에 대한 관심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의 아버지는 비행기 조종사였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비행기 시뮬레이션에 빠져 살았다. 특히 보잉 737을 쉬지 않고 몰았다. 출장 등으로 비행기를 탈 때면 ‘비상상황으로 조종사를 찾는다면 가장 먼저 뛰어나가야지’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단다. 이런 엉뚱한 면도 있지만 그는 역시 철저한 기업가였다. 지난 9개월간 다임러 트럭 코리아에서의 생활이 어땠냐는 마지막 질문에도 회사 이야기를 늘어놨다.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상용차와 승용차 시장의 차이가 명확하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트럭 시장은 경기에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습니다. 경제 활동에 사용되는 사업 도구이기 때문에 물류 경기, 건설 경기에 크게 좌우됩니다. 국내 대형 트럭 시장에는 전세계 주요 브랜드의 대부분이 진입해 있습니다. 고객에겐 선택권이 많죠. 우리는 우리 제품 특유의 좋은 연비와 안전성에 만족하지 않고 고객 가치 확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앞으로의 변화, 기대해주세요.”글 류민 기자사진 최진호
기흥 인터내셔널 이계웅 대표, "아시나요? 탈.. 2015-11-10
최근 국내 수입차 업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회사가 있다. 바로 애스턴마틴과 맥라렌의 공식 수입원인 기흥 인터내셔널이다. 기흥 인터내셔널은 현재 여느 대형 수입차 회사 못지않게 활발히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올해 봄, 두 브랜드 론칭과 동시에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3,300㎡ 규모의 전시장 및 서비스센터를 오픈해 밴티지, DB9, 뱅퀴시, 라피드 등 애스턴마틴 전 라인업과 맥라렌 650S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두 브랜드를 트랙에서 즐길 수 있는 화끈한 이벤트까지 기획하고 있다. 대체 이런 원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기흥 인터내셔널의 이계웅 대표이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자동차 업계에 뛰어든 이유는 간단해요. 우리의 목표는 바로 탈것으로 고객을 행복하게 하는 것. 우리는 우리가 손대기 시작한 브랜드만큼은 제대로 소개할 자신이 있답니다. 브리티시 럭셔리카와 브리티시 스포츠카는 국내에선 아직 생소한 장르죠. 그래서 우리가 시작하기로 했어요. 왜 하필 탈것이냐고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더 열심히, 잘 할 수 있는 분야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지요." 기흥 인터내셔널은 사실 탈것에 능숙한 회사다. 이미 할리 데이비슨을 국내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수입 첫해(1999년) 84대에 불과했던 판매량을 지금은 2,000대 이상까지 끌어올렸다. BMW 모터라드가 뒤를 쫓고 있긴 있지만, 할리 데이비슨은 여전히 650cc 이상 대배기량 바이크 시장 부동의 1위다. 이런 성공의 배경에는 기흥 인터내셔널만의 독특한 전략이 있었다. 그들은 판매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수많은 이벤트를 통해 할리 데이비슨 마니아를 양성했다. 문화를 전파하니 판매량은 자연스레 늘었다. 또한 기흥 인터내셔널은 자전거 분야에서도 폭 넓게 활약하고 있다. 대표적인 브랜드는 스톡(STORCK) 바이시클이다. 아울러 기흥 인터내셔널은 피렐리 타이어의 가장 큰 국내 딜러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핵심은 행복한 경험의 전달이계웅 대표는 자동차 시장에서도 할리 데이비슨과 비슷한 전략을 이어갈 생각이다. "저는 모터바이크 시장과 자동차 시장이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퀴가 4개고 가격이 조금 더 비쌀 뿐이죠. 중요한 건 고객에게 행복한 경험을 전달하는 거예요. 바퀴 달린 것이 주는 기쁨을 알려드리고 싶어요. 우리는 제품을 팔기 위해 마케팅에 투자하기보단 우리의 제품을 구입한 고객에게 즐길거리를 선사하는 데 더 많은 돈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객과의 관계가 구매 시점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지요. 자동차 비즈니스도 이런 식으로 진행해 나갈 겁니다. 트랙 이벤트, 팸 투어 등 재미있는 게 많잖아요? 브랜드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드리고 싶어요."이계웅 대표 역시 이 두 브랜드에 푹 빠져 있다. 왜 맥라렌과 애스턴마틴을 선택했냐는 질문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이야기를 쏟아냈다."유러피언 럭셔리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대변되죠. 예술도 마찬가지이고요. 반면 영국은 '피시 앤 칩스'를 대표 음식으로 내세울 정도로 서민적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애스턴마틴, 롤스로이스, 벤틀리, 재규어 등 가장 럭셔리한 자동차 브랜드들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이는 영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영국은 산업혁명과 식민지 지배를 통해 생겨난 부자들을 오래전부터 인정해왔죠. 왕권이 작위도 줬어요. 하지만 프랑스 등의 부자들은 왕족과는 어울릴 수 없었지요. 자연스레 영국의 부자 문화가 더 발달될 수밖에 없었죠. 이게 바로 애스턴마틴 같은 럭셔리 브랜드의 탄생 배경이에요. 맥라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산업혁명 같은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추진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브랜드랄까. 맥라렌은 기존 수퍼카 브랜드들이 만들어 놓은 세그먼트를 흔들고 있어요. 굉장히 혁명적이죠. 생각해보세요. F1 팀 대부분이 왜 기술 개발을 런던에서 할까요? 전 이런 영국이라는 나라를 다른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자동차산업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이런 영국의 럭셔리 문화와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결정체들을 국내에 제대로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국내에서 맥라렌과 애스턴마틴의 전망은 생각보다 밝다. 판매도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 특히 맥라렌은 같은 기간 내에 전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이 팔렸다. 하지만 이계웅 대표는 아직 판매에 집착할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 제가 할 일은 고객이 조금 더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거예요. 3억원짜리 차를 사면, 3억원어치의 가치를 느낄 수 있게 만들고 싶어요. 물론 가장 시급한 건 AS망 구축이죠. 모든 자동차 회사가 그렇듯, 무작정 서비스 센터부터 늘려나갈 수는 없는 만큼 픽업 서비스 운영 등을 통해 고객이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판매 목표요? 지금은 일본의 20% 수준입니다. 마음 같아선 33% 이상으로 잡고 싶지만……. 일본에서 맥라렌의 연간 판매량은 약 90대, 애스턴마틴의 연간 판매량은 180대 정도입니다." 바퀴 달린 모든 것을 사랑하기에이계웅 대표는 인터뷰 동안 '가치 전달'을 여러 번 강조했다. 고객이 브랜드를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만들고, 그로 인해 고객이 행복할 수 있게 만들고 싶다는 게 핵심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그 자신이 탈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전거, 모터바이크, 자동차 등 바퀴 달린 모든 것에 '미친' 사나이다. 자전거의 경우 시합에도 여러 번 참가했다. 24시간 600km 레이스에 출전한 적이 있고, 12시간 레이스에서 380km를 달린 적도 있다. 서울 남산의 자택에서 경기도 용인의 회사까지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일도 다반사다. 날씨가 좋을 때는 애스턴마틴 뱅퀴시 볼란테를 몰고 드라이브를 나가고, 맥라렌 650S를 타고 서킷도 종종 간다. 할리 데이비슨 같은 모터바이크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레이싱 카트까지 즐긴다.  물론 이런 취미생활 때문에 병원 신세도 여러 번 졌다. 장기간 입원 때는 모터바이크 업계에 그의 신변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헛소문까지 돌았을 정도다. 손가락이 부러진 건 부상 축에도 끼지 못한다. 쇄골이 두 번이나 부러졌다. 골절된 골반 뼈가 붙자마자 바로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는 이야기에 기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어려서부터 휘발유 냄새가 좋았어요. 모터바이크를 타던 아버지 덕분에 3~4살 때부터 연료탱크를 안고 모터바이크 위에 올라탔거든요. 제초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분당 회전수를 가늠한 적도 종종 있다니까요." 그는 정말 못 말리는 '환자'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탈것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애스턴마틴, 맥라렌 같이 소중한 브랜드를 책임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기흥 인터내셔널을 바라보는 시선도 사뭇 달라졌다. 그가 앞으로 이끌어나갈 맥라렌과 애스턴마틴이 국내 자동차 시장을 어떤 방식으로 개척해 나갈지가 기대된다.글 류민 기자사진 김종휘
RX 수석 엔지니어 - 카츠다 타카유키 2015-10-27
“본질은 계승하되 디자인은 과감해졌다” Q. 지난 세대의 RX보다 변화의 폭이 크다. 그 배경은?A. 1~3세대까지 RX는 일관성 있는 디자인 테마를 유지하며 진화해왔다. 그러나 이번 4세대는 디자인 팀에게 더 큰 자유를 허락했다. 보다 과감한 변화를 위해서였다. 물론 디자인에 좀 더 힘을 줬을 뿐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RX의 본질은 고스란히 계승했다.  Q. 3열 시트를 더한 7인승 RX를 출시할 계획은?A. 이번 RX는 이미 3세대보다 휠베이스를 늘였다. 추가로 3열을 얹을 계획은 아직 없다.  Q. SUV인데 너무 도심 주행에 치중한 건 아닌가?A. 사실 렉서스 RX 고객 대부분이 도심에서 탄다. 때문에 매끈하게 포장된 도로 주행에 집중해 개발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눈길이나 진흙 등 험로 주행성능 또한 이전보다 높였다.  Q. 450h의 경우 ES처럼 2.5L 엔진을 얹으면 연비가 더 좋지 않았을까?A. 우리가 해당 차종에 맞는 엔진을 결정할 땐 차의 무게와 성능, 균형 등을 모두 고려한다. RX의 경우 V6 3.5L가 가장 잘 맞는다고 판단했다.  Q. NX는 시장에 따라 두 가지 범퍼를 달았다. RX는?A. 북미 시장에서는 SUV로 분류되려면 어느 수준 이상의 접근각을 만족시켜야 한다. 이 때문에 북미용 NX는 아래턱을 좀 더 가파르게 깎았다. 반면 RX는 최저지상고가 상대적으로 넉넉해 북미용을 따로 디자인할 필요가 없었다. 전세계에서 같은 모습으로 판다.​
카라이프 포커스 - 조동필 박사 2013-11-30
“자동차 덕분에 안성에서 살지요”    경제학계에서 큰 봉우리를 이루는 훌륭한 학자이면서 ‘그무엇’을 남기는 명강의로도 너무나 유명한 조동필 박사.그는 8년전 고향인 경기도 안성에 안주함으로써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모든 도회인의 꿈을 실천했다.그리고 바로 자동차가 이 전원생활과 도심권을 이어주는 멋진 고리임을 증명했다,“17년 전인가 조박사는 코티나 자동차를 한대 구입해 그 시절로서는 아주 드물게 대학교수로 자가용을 탈 수 잇구나 라는 세인의 반항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조 교수의 검정 고무신 겨울인데도 남촌(南村) 조동필 박사의 거처인 안성 야시원 뜰에는 안온한 햇빛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그 햇빛은 뜰 한쪽에 세워져 있는 하얀색 레코드 로얄 위에도, 노교수가 신고있는 검정 고무신 위에도 똑같이 투명하게 부어지고 있었다.하얀색 레코드 로얄은 조동필 교수가 안성에서부터 출퇴근을 할 때 그를 실어다 주는 바쁜 달구지 (그의 표현이다)라면, 검정 고무신은 한편으로 유유자적 전원생활을 즐기는 그의 삶의 한 상징처럼 보였다.지난 8월, 3-년 훨씬 넘게 몸담아 온 고려대학교를 정년 퇴직했으니 그는 확실히 노년에 접어든 셈이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젊었고 열정적이었다. 한 달 내내 빽빽한 스케줄만 보더라도 그가 아직도 얼마나 젊고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1주일에 하루는 고려대학교에 강의가 있고 또 이틀은 이리 원광대학에 출강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그 밖에도 특별한 강연 스케줄이 밀려들어 도무지 쉴 틈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도 가끔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휴식을 취하기에 더없이 멋진 9천평의 농원을 가지고 있고, 1만여 권이 넘는 장서가 아래 위층에 꽉 들어찬 근사한 서재도 가지고 있다.  그곳에서 그를 마치 할아버지 처럼 따르는 갑돌이, 귀염이 등의 이름을 가진 개들과 유유자적한 세월을 보내고 서재에 파묻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라라는 희망은, 아직은 희망 사항으로 끝나곤 한다.몇 년은 더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으니 조금 더 세월이 흐른 뒤에나 희망사항을 실천하기로 그는 작정하고 있다.바쁜 스케줄 덕분에 그의 자동차는 역시 휴식을 취할 틈이 별로 없다.  1시간30분의 통근거리17년 전인가 조동필 박사는 코티나 자동차를 한 대 구입해 그 시절로서는 아주 드믈게 교수가 자가용을 타고 다닌다는 약간의 반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남보다 일찍 자동차가 필수품임을 절감한 데서 비롯된 일이지 무슨 사치나 허영을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그의 호방하고도 서민적인 인품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조박사가 고향인 안성에 집을 마련한 것도 일찍 자동차의 필요성을 절감해, 그것을 십분 이용해 온 사람만이 가능한 용기였을 것이다.그가 안성에 야시원을 마련한 것은 8년전, 그떄만 해도 누구도 서울에서 그렇게 먼 곳에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무렵이다, 조박사에게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다. 그의 가장 큰 보람이자 사랑이다. 안성에서 서울 까지는 꼬박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그것도 교통체증이 심하지 않을 떄가 그 정도이다. 지금도 이 정도의 통근 거리는 약간의 모험을 필요로 하는데 조박사는 이미 8년 전에 그 일을 단행한 것이다.자동차 인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조만간 그 정도의 거리는 일반적인 통근 거리가 되리라는 전문가의 견해이고 보면 조박사는 시대를 앞질러 살고 있다고 할까.“자동차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지. 그런 점에서 나는 내 차에 정말 애정을 가져요. 잘난 사람 많고 북적대기만 하는 서울이 무에 좋겠소? 이곳에 있으면 그저 조용하지.” 조박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야시원 뜰은 겨울날 오후의 햇빛 아래서 조는듯 조용하기만 했다.경제학계에서 큰 봉우리를 이루는 훌륭한 학자이면서 불을 뿜는 듯한 명강의로 수많은 제자들 사이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스승이기도 한 조동필 박사. 그러나 야시원 뜰에서의 그는 오히려 평범한 촌로의 편안함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그리고 실제로 그런생활 자체를 그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틈이 나는대로 고향의 촌로들과 어울려 막걸리 잔을 주고받고 환담을 나누며 시간보내기를 좋아한다. 야시원의 집 뒤를 둘러싸고 있는 수림(樹林)과 잘 가꾸어진 정원의 어느 한끝에도 조박사의 손길이 스치지 않은 것이 없다. 이곳에서 조박사 내외는 마치 어린아이들 처럼 투명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게 시골에서 사는 즐거움의 하나지. 그리고 시골에는 성급함이 없거든. 그게 좋아요. 난 차로 하루에 1백km이상 달릴 떄도 있을 만큼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지만 도로에서 마주치는 다른 차들을 보면 가끔 안타까울 때가 많아.” 바로 성급함 때문이라는 것이 조박사의 말이다. “사람들이 왜 모두 그렇게 바쁘고 조급하게 서둘러 대는지 모를 일이에요. 앞차가 가다가 뻔히 신호대기에 걸려 서 있는걸 알면서도 위에서 클랙슨을 울려대거든, 외국에서는 절대로 그러는 법을 내가 못 봤어요. 거기다 지독한 끼어들기, 차선 무시하기, 어디 가슴 서늘한 일이 한둘이라야지. 이게 다 우리나라의 조급한 국민성 떄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면 자괴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야.” 주거지는 도심권 밖이어야조박사는 특히 요즘의 젊은 오너 드라이버들은 성급함을 버려야 한다고 당부한다.“세상에 성급하게 서둘러 될 일은 하나도 없지만 특히 자동차 운전은 1~2분 빨리 가겠다고 서둘러서는 안돼요. 그게 목숨과 직결되는 일인데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겠소?”그래서 그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를 자동차의 운전의 제1과 라고 자주 말한다.운전 뿐 아니라 모든일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겠지만 조박사는 생활에서도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조박사가 맨 처음 야시원에 거처를 정했을 때 그곳은 드넓은 황무지에 불과했다. 그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황무지를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기 시작했다.입구에서부터 저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지금의 야시원은 그렇게 그의 손길이 안 간 곳이 없을 만큼 정성을 들여 탄생시킨 것이다.집 뒤를 둘러싸고 있는 빽빽한 수림(樹林)과 잘 가꾸어진 정원의 나무 한 그루, 돌 하나에도 그의 손끝이 스쳐가지 않은 것이 없다. 슬하의 6남매는 모두 장성해 각기 독립해 살고 있어서 이곳에서는 조박사 내외만이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천진하고 투명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전원생활은 모든 도회인의 꿈이고 실제로 오너 드라이버들이 늘어나면서 도심권 박으로 주거지를 정하는 것이 요즘의 추세이다.그러고 보면 조동필 박사의 야시원 생활과 그의 카라이프는 앞으로 오랫동안 모든 전원생활을 꿈꾸는 도회인들에게 하나의 상징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게재 1984년 12월호]
인기인의 카라이프 - 이주일 2013-11-30
​가족 만큼 소중한 그의 동반자 '도요다 크라운' 이주일 그의 결코 미남이 아닌 외모와 잘생긴 82년형 도요다 크라운 자동차는,그러나 멋지게 어울리며 서로 화합한다.  늘 바쁜 스케줄에 쫓기는 그에게 자동차는 거의 유일한 휴식처이기 때문이다.​  ​82년형의 잘생긴 검은색 도요다 크라운에서 백색의 슬랙스와 점퍼스타일 자켓을 멋지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내린다. 그는 그 흑과 백의 강렬한 조화 덕분에 순간적으로 아주 멋져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곧 알게 된다. 그는 결코 멋지고 잘생길 수 없는 남자임을. 왜냐하면 그는 바로 다름 아닌 이주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못 생겼다는 것이 전매특허처럼 되어 있는 사람이다. 아마도 그가 가령 신성일이나 알랑 드롱쯤으로 생겼더라면 오늘의 수퍼 스타 이주일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중은 자기들의 수퍼스타가 미남도 아니며 번듯하지도 않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를 느끼며 더 열광하는 기묘한 집단이기도 하므로.​  ​​소속 프로덕션에서 보너스로 그 근사한 도요다 크라운 자동차를 선물했을 때,그는 “이건 타고 다닐 사람보다 자동차가 훨씬 잘생겼군” 이라고 중얼거렸다던가. 하지만 마음 놓아도 좋을 것이 그 멋진 자동차와 이주일 자신은 서로 너무 걸맞는다. 그는 확실히 미남은 아니나 누구보다 대중을 사로잡는 마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그는 대단히 지적이며,첨예한 감성의 소유자이다. 그는 늘 대중을 웃기는 코미디언이지만, 그것은 밖에서 보았을 때의 그일 뿐이다. 그는 오히려 잘 정돈돼, 깊이 있는 내면을 간직한 인물이다. 그는 20년 이상 수석에 심취해 오고 있는데 이미 상당한 경지를 넘어섰음을 아는 사람은 안다.​     그가 이처럼 수석이나 분재에 깊은 경지를 나타내는 것은 그의 침잠된 내면세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그의 기발한 우스개와 해학 역시 바로 그러한 내면의 세계에서부터 출발하므로 우리에게 늘 웃음 이상의 뭔가를 던지는지도 모른다.​연예인 중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인물로 뽑힌 그는, 세금을 많이 내서 바쁜 건지 바빠서 세금을 많이 내는 건지 그 자신 알쏭달쏭할 만큼 진짜 바쁘다. MBC 라디오의 ‘세월따라 노래따라’와 MBC TV의 '텔레비안 나이트’ 등의 고정 프로 외에도 그는 빈번한 방송출연 횟수를 기록하고 있고 각종 메스컴의 인터뷰 요청은 언제나 밀려있다. 그 외에 몇 곳의 밤무대와 잦은 지방공연 등 정말 얼핏얼핏 꿈속에서나마 무명의 시절이 그리울 만큼 바쁜 나날의 연속이다. ​덕분에 그에게 자동차 안은 거의 유일한 휴식처인 셈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이는 동안 차 안에서야 그는 비로소 숨을 크게 쉬고 편안히 쉰다고 할까. 생각도 그는 이때 차 안에서 한다. 가장 차분해질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이래저래 그의 자동차는 애지중지 아낌을 받는, 가족 다음으로 소중한 그의 동반자인 셈이다.[게제 198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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