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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동 동화마을이 시작되는 곳 2016-11-23
​송월동 동화마을이 시작되는 곳​​​​지하철 1호선 종점인 인천역에서 이정표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10분 정도 걷다 보면 송월동 동화마을이 나온다.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성한 ‘인천 차이나타운’과 실처럼 연결되어 있는 이곳에 들어서면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 글, 사진 김태종 아련한 추억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에 제격인 계절, 가을이다. 문득 백설공주와 오즈의 마법사, 신데렐라, 잭과 콩나무, 흥부와 놀부, 신밧드의 모험 등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동화를 떠올려본다. 이제 그 시절의 기억들은 수명을 다해가는 전등처럼 잠시 켜지는가 싶다가 이내 꺼져버리기 일쑤고, 새벽강의 안개처럼 희미해져 간다. 어른에게 있어 동심(童心)은 새벽녘 이지러지는 달과 같이 그렇게 사라져야만 하는 걸까? 기억의 창고 한 귀퉁이에서 먼지 뽀얗게 앉고 색이 바래 막상 꺼내어도 도통 원본을 되살릴 수 없는 그런 것일까? 그래서 떠났다. 아련한 동심을 다시 꺼내어볼 수 있는 곳으로. 인천광역시 중구 송월동 동화마을은 이제 다 자란 어른들을 행복했던 그 시절로 친절하게 안내하고, 현재의 아이들에게는 웃음으로 가득한 시간과 공간을 내어준다.  양철나무꾼  다양한 동화 캐릭터와의 만남인천 송월동에 동화마을이 조성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소나무가 많아 솔골 또는 송산으로 불리다가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달이 운치가 있어 송월동이라 불리게된 이곳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후 독일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부촌을 형성했다. 하지만 수십 년 전부터 젊은 사람들이 떠나면서 마을에는 연로한 노인들만 남아 활기를 잃어버렸고, 사람들이 떠난 빈집들이 군데군데 썰렁함을 더했다. 이런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인천시가 꽃길을 만들고 세계 명작 동화를 주제로 담벼락에 색칠을 해 아름다운 동화마을로 만들었다.  신데렐라와 함께 춤을!  지하철 1호선 종점인 인천역에서 내려 이정표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10분 이내에 동화마을 입구에 들어선다. 이곳은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 먹거리가 풍성한 인천 차이나타운과 실처럼 연결되어 있어 한나절 나들이 장소로 제격이다. 동화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동심의 세계로 빨려든다. ‘오즈의 마법사’를 테마로 한 건물에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여행을 떠나는 도로시와 그의 친구들인 사자와 허수아비, 그리고 양철나무꾼의 캐릭터가 친근감을 준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도끼를 든 양철나무꾼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심장이 없어 아주 작은 생물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 늘 조심하며, 따뜻한 마음을 얻기 위해 모험을 떠난 동화속 이야기처럼 조형물은 정겨운 낙서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허수아비가 정겨움을 더한다.  허수아비 라푼젤과 백설공주  동화의 장면은 수시로 바뀐다. 멀리 ‘라푼젤’의 긴 머리를 타고 올라가는 왕자가 보이는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니 그 밑에 갖가지 색으로 칠한 성을 배경으로 두 여인이 서 있다. 한 여인이 뽕이 잔뜩 들어간 드레스에 사과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백설공주가 분명하다. 그런데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여인은 누구지? 사악한 계모가 아닐까 싶다가도 백설공주보다 예쁘고 어려 보여 헛갈린다. 400년 사랑의 증표 별비녀가 소원을 이뤄준다며 유혹하는 곳에서는 저절로 발걸음이 멈춘다. 아리따운 여인과 왕자가 더없는 사랑의 눈길을 보내며 춤을 추는 그림을 보니 신데렐라가 분명하다. 맞은편에서 심술 맞은 표정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언니 둘을 보니 꿀밤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다. 닭과 고양이, 늙은 개와 당나귀를 주인공으로 한 ‘브레멘 음악대’는 이들의 노래에 깜짝 놀라 도망치는 도둑들을 익살스럽게 그려냈다. 영심이와 경태가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는 ‘영심이’ 벽화에는 부러움과 시샘, 그리고 자신들도 그러하기를 기원하는 낙서가 빼곡하다. 그 옆에서 ‘드래곤볼’의 용이 불을 뿜으면서도 착하디착한 눈망울로 골목길을 오르내리는 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골목을 돌아 언덕으로 향하자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램프의 요정 지니가 거대한 몸을 곧추세웠다. 마치 소원을 빌면 금방이라도 들어줄 것 같은 표정으로.  400년 사랑의 증표, 별비녀브레멘 음악대불을 뿜는 귀여운 용  너무 서두르지 말고 쉬어가라며 ‘개구리 왕눈이’의 아로미가 어깨를 내어준다. 살짝 기대어 맞은편의 카메라를 향해 살짝 포즈를 취하노라니 연잎을 우산 삼아 빗속에서 왕눈이와 뛰놀던 아로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가로등은 이제 ‘콩나무’가 되어 끝도 없는 하늘로 뻗었고, ‘잭’은 하늘의 성으로 나무를 타고 오른다. 그리고 육지여행이 서서히지루해질 즈음, 거북과 수중 생물들이 나들이객들을 바다속 세계로 안내한다.한국의 전래동화도 발길을 붙잡는다. 흥부가 박을 터트리자 금은보화가 쏟아지고 놀부는 심술이 날 대로 나 있다. 용왕과 용궁의 풍경을 그려놓은 ‘별주부전’에서는 거북의등에 올라탄 토끼가 용궁으로 향한다. 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선녀들이 목욕을 하는 모습을 몰래(?) 구경한 뒤, 도깨비 방망이 앞에서 동심과는 거리가 먼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며시 외쳐본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잠시 쉬어가라고 어깨를 내주는 아로미와 왕눈이잭과 콩나무흥부와 놀부별주부전  자유공원과 차이나타운이 지척에화마을을 거닐던 발걸음이 어느새 자유공원으로 이어진다. 화단에는 가을의 향기를 머금은 꽃들이 자태를 뽐내고, 그 너머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의연하게 인천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동상의 오른쪽 계단으로 내려서자 ‘제물포구락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제물포구락부는 1891년 청국과 일본을 비롯해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1901년 러시아인 사바친이 설계해 건물 안에 사교실, 당구장, 독서실과 외부에 테니스장을 설치했다. 이후 일본 재향군인회, 미군의 장교클럽, 시립박물관, 문화원 등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제물포구락부의 옛 모습을 재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제물포구락부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  기자가 이곳을 찾은 10월에는 ‘독일을 보다’라는 주제로 도서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제물포구락부 맞은편에 있는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시장 공관은 현재 인천 역사자료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1882년 신헌과 로버트 윌슨 슈펠트가 제물포 화도진 언덕에서 체결한 한미수호통상조약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웅장한 탑을 만나게 된다.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동물 모형과 나무그늘이 운치를 더하는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덧 차이나타운 뒤편에 다다른다. ‘초한지’와 ‘삼국지’ 벽화는 사실적인 그림에 간결한 문장을 더한 것이 특징인데, 천천히 감상하며 나도 모르게 한 고조 유방이 되기도,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세상을 뒤엎을 정도로 강한 힘과 기운을 일컫는 말)의 항우가 되기도 한다. 사나이들의 진한 의리가 느껴지는 ‘삼국지’의 도원결의 장면과 ‘적벽대전’의 화려한 전투장면 앞에 이르자 타임머신이라도 탄 양 2000년을 거슬러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차이나타운 입구 ‘삼국지’의 도원결의  차이나타운의 식당거리에 들어서면 대형 중식당들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손님들을 유혹한다. 길거리에 늘어선 상점들도 중국식 만두와 공갈빵 등 온갖 먹거리로 여행객의 시각과 후각을 사로잡는다. 중국 민예품과 생활용품을 구경하고 사는 재미도 쏠쏠하다.동화마을과 자유공원, 그리고 차이나타운으로 이어지는 루트는 넉넉하게 반나절 정도면 둘러볼 수 있고, 잠시 쉬고 싶으면 어느 곳에서든 차와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수도권에서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거리에 있고 대중교통이 잘 갖추어져 접근성도 좋다. 어느 날 문득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고 싶다면, 인천 동화마을로 떠나보자. 
중국이야기 [서시의 고향을가다] 2016-11-09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명​서시(西施)의 고향을 가다​​ ​춘추전국시대에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명성을 떨친 서시(西施)는 초선(貂蟬), 왕소군(王昭君),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 역시 ‘중국 미인들의 운명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애꿎은 운명을 피해가지 못한 슬픈 역사 속의 인물이다. 필자는 2,000년 전의 서시를 만나기 위해 이우에서 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주지로 향했다.​​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이우 부근에는 주지라는 곳이있다. 저장성의 조그만 도시인 이곳에는 아주 오래전인 춘추전국시대에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명성을 떨친 서시(西施)의 고향이 있다. 서시는 잘 알려진대로 초선(貂蟬), 왕소군(王昭君),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중국 4대 미인의 슬픈 사연들중국의 4대 미인들을 한 명씩 살펴보자. 먼저 중국최대의 미인으로 알려진 양귀비(楊貴妃, 719~756년)는 본명이 양옥환이다. 산시성 출신으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사천성 관리로 일하던 친척 집에서 자랐다. 미모가 뛰어나고 춤과 노래 솜씨가 출중해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壽王 李瑁)의 부인이 되었다. 하지만 몇 년 후 새로운 운명에 맞닥뜨리게 된다. 현종이 홀로 되자 외로워하는 그를위해 환관이 백방으로 미녀들을 수소문하던 중 그녀를 찾게 된 것. 그리고 환관의 집요한 설득 끝에 양귀비는 시아버지인 현종의 부인이 된다. 양귀비를 품은 현종은 정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녀를 위해 새로운 궁을 짓고 사랑을 나누기에 바빴다. 양귀비는 날씬한 몸매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중국 미인의 기준은 가냘프기보다는 풍만한 몸매를 선호한다. 양귀비는 현종의 관심을 사기 위해 화장법을 개발했고 항상 목욕을 즐겨 흰 피부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양귀비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2,000km나 떨어진 남방에서만 자라는 리즈를 매일 도성으로 운송했다. 말이 쉼 없이 일주일을 달려야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다 죽어나간 말이 셀수 없이 많았다고. 현종이 정사를 멀리할수록 양귀비 친인척들의 득세가 이어지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이들과 암투를 벌이던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피해 달아나던 현종과 맞닥뜨린 성난 군중들과 호위병사들이 양귀비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현종은 목숨과 양귀비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결국 양귀비를 버렸다. 이에 양귀비는 자결로 생을 마쳤으니, 그녀의 나이 38세였다.​‘삼국지’에 등장하는 초선(貂蟬, 175~199년)은 춤과 노래에도 능했지만 달처럼 빛나는 용모가 무엇보다뛰어났다. 어느 날 저녁 초선이 달을 쳐다보고 있을때 달이 구름에 가리자 달이 초선의 뛰어난 미모에 부끄러워 구름에 숨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미녀라는 뜻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은 사실 그녀에게서 나온 말이다. 왕윤의 수양딸로 알려진 초선은 포악한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여포와의 이간질에 이용된 여자라고 전해진다. 결국 동탁은 여포와 그의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당하고 초선은 여포의 첩이 된다. 초선은 여포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후 허도로 보내졌다는 설과 관우에게 넘겨졌다는 설이 있다.​왕소군(王昭君)은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원제의 사랑을 받지 못한 처지였다. 궁 안에 워낙 많은 후궁이 있었으니 황제의 눈에 들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대부분의 후궁들은 그림을 그리는 화공들에게 돈을 주어 초상화를 아름답게 그려 황제의 관심을 끌려고 했지만 왕소군은 그런면에 약했다. 그런 가운데 번번이 국경을 침범하는 흉노족들과 화해하기 위해 중국 여자들을 보내 달래야 하는 일행에 왕소군이 끼게 되었다. 왕소군이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본 원제는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절세미인이 저기에 있구나” 하며 가슴을쳤다. 그림 때문에 그녀가 떠나게 된 것을 알고 크게노한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화를 그린 화공을 참형하였다고 한다. 흉노족의 호얀아에게 시집을 간 왕소군은 아들을 하나 낳았고, 호얀아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복주루와 재혼하여 딸을 낳았다고 전해진다.​서시(西施, 춘추전국시대) 역시 슬픈 역사 속의 인물이다. 필자는 2,000년 전의 서시를 만나기 위해 주지로 향했다. 주지는 이우에서 차로 약 2시간 거리에있다. 필자가 10년 넘게 활동하고 있는 이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을 이제야 가게 되니 내 게으름을 탓할 수밖에…….​​​주지로 가는 고속도로. 옆으로 고속철이 달린다​​오·월 대립 속에 수많은 고사성어 탄생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서시를 만나러 가는 날 고속도로에는 비가 내렸다. 입장권을 사서 안으로 들어서니 안내판에는 중국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일본어로도 표기가 되어 있다. 일본인들도 서시의 명성을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일제의 침략으로 건물 대부분이 훼손되어 1986년에 복원한것이라고 한다. 일본이 상하이를 거쳐 난징은 물론 이곳 주지까지 점령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중국이 일본과 대등한 관계이거나 오히려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지만 100여 년 전의 중국은 종이호랑이에지나지 않았다. 만주 전역은 물론 광동성과 상하이 인근의 강소성, 저장성이 일본의 손아귀에 있었다.​​​주지는 산업화가 이루어진 현대적인도시다​​서시 고향의 입구​ 서시전에 오르니 분을 바른 것처럼 하얀 얼굴을 한 서시의 모습이 나타난다. 중국에서 미인으로 치는 전형적인 얼굴이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중국의 전통적인 미인의 기준은 달덩이처럼 동그란얼굴에 밀가루처럼 하얀 피부를 한 인물상이다. 서시가 그런 기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월나라의 주루오산에서 평범한 나무꾼의 딸로 태어난 서시는 타고난 미모 때문에 어릴 때부터 모든 이들의 선망이 되었다. 뭇 여자들이 서시 따라잡기에 열심이어서 심장병을 앓고 있던 서시가 얼굴을 찡그리면 그 모습까지 따라 할 정도였다고. 심지어 연못의 물고기까지 서시의 미모에 반하여 넋을 잃었다고 한다. 아마도 요즘 태어났다면 유명한 아이돌이 되었으리라. 서시전을 돌아 옆 사당으로 오르니 범려와 구천, 문종의 상이 나타난다.​ ​연못에 있던 물고기들마저도 서시의 미모에 반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서시를 말하려면 월나라와 오나라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서시는 오나라와 월나라의 경쟁구도에서 희생된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여자이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와 월나라는 철저하게 원수처럼 지냈다. 오나라는 지금의 강소성, 월나라는 절강성에 자리하고 있었다. 기원전 496년 오나라의 왕 합려는 월나라를 정복하러 나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합려는 죽기 전 아들 부차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꼭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차는 가시가 많은 나뭇가지로 만든 섶 위에서 자며 문을 드나들 때마다 부하들에게 “부차야, 아버지의 원수를 잊었느냐” 하고 외치게 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출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월나라의 구천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했으나 오히려 오나라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오나라의 포로가 된 구천과 범려는 부차의 노예가 되어 온갖 모욕을 이겨내며 3년간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또한 구천의 아내는 부차의 첩 신세가 되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구천은 쓸개를 매달아 놓고 이를 핥으며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말을 되풀이했다. 훗날 부차가 중원에만 신경을 쓰고 월나라와의 경계를 소홀히 하는 틈을 타 다시금 오나라를 정복하게되니,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유래다.​와신상담처럼 오나라와 월나라가 경쟁을 벌이는 동안 많은 고사성어가 탄생했다.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침몰할 위기에 처했으나서로 힘을 합쳐 위기를 빠져 나왔다고 해서 오월동주(吳越同舟)란 말이 나왔다. 월나라가 오나라에게 승리를 한 배경에는 범려의 지혜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한 후 그는 제나라로 갔다.그리고 공신인 문종에게 구천은 고난은 같이 할 수있지만 영화는 함께 누릴 수 없는 인물이라며 길을떠날 것을 조언한다. 문종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가 결국 범려의 우려대로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자결한다. 토끼사냥이 끝나고 나면 개도 결국 잡아먹는다는 토사구팽(兔死狗烹)은 여기에서 유래된다. ​토사구팽이 더욱 유명한 고사성어가 된 것은후에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한신도 똑같은 처지를 당하고 나서다. 초패왕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고조 유방은 가장 큰 공신인 한신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지만 나중에 자신에게도 도전을 해오지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항우의 수하에 있던 종리매가 한신에게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종리매를 체포하여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한신은 차마 친구와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었다. 이를 알게 된 종리매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한신은 그의 목을 유방에게 바치지만 끝끝내 체포되어 장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일찌감치 벼슬을 버리고속세를 떠나 있던 장량이 한신에게 장안을 떠나라고 권유하지만 주저하다가 결국 처형당하는 신세가 된다. 100만 대군을 지휘했던 천하의 한신도 토사구팽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평범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여자들에 의해 좌우되었던 나라의 운명 범려는 오나라의 왕 부차에게 당한 아픔을 복수하기 위해 미인계를 쓴다. 여기에 동원된 인물이 바로 서시다. 범려는 서시에게 각종 예법과 노래, 춤을 가르쳐서 오왕에게 바친다. 서시의 미모에 반한 오왕 부차는 서시를 위해 궁궐을 다시 짓고 연못을 만들어서 그녀의 환심을 사려 했다. 이에 충신 오자서는 오왕에게 서시로 인해 정사를 그르칠 우려가 있으니 그녀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왕의 귀에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결국 서시의 치마폭에 푹 빠진 오왕의 절대 권력은 점차 힘을 잃어 월나라에게 패하는 치욕적인 역사를 남긴다. 오나라가 망한 후 서시는 범려와 함께 은둔처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설과 물에 빠져 자결을 했다는 설, 월나라에돌아올 경우 구천이 서시에 반해 같은 처지에 빠질것을 우려해 살해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난무한다. 아무튼 미인이기 때문에 죽어서도 유명세에 시달리는 서시다.​ ​구천과 범려, 문종의 상이 모셔져 있는 고월대서시와 떼어놓을 수 없는 인물들. 왼쪽부터 문종, 구천, 범려​​​마타하리의 예에서도 보듯이 세계 역사는 여자들에 의해서 바뀐 경우가 많다. 특히 절대 권력을 가졌던 중국의 황제들은 수많은 미녀들과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국력을 쇠진시켜 나라를 망친 경우가 허다하다. 중국의 고대 역사는 하나라에서 주나라와은나라로 이어진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은 걸왕이었다. 하나라에게 항복한 유시국은 절세미인인 매희(末喜)라는 여인을 걸왕에게 바친다. 매희에 흠뻑 빠진 걸왕은 그녀를 위해 궁궐을 짓고 연못을 만들어서 그곳에 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북을 치면3,000명이 넘는 신하들이 소처럼 그 연못의 술을 마시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매희가 좋아했다고 하니 나라가 온전할 리 없었다. 결국 하나라는 은나라에의해 패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잘나가던 은나라도 마지막 왕인 주왕이 주색잡기에 혈안이 돼 정사에는 무관심하다 결국 세상과 작별을 고한다. 여기에도 미인이 등장을 한다. 은나라에 패한 유소씨(有苏氏)는 달기(妲己)라는 여인을 주왕에게 바친다. 은나라의 주왕은 달기에 흠뻑 빠져 국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충신들의 충심어린 간언에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주왕도 결국 주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그런데 은나라를 쳐서 천하를 얻은 주나라 역시 같은 역사를 되풀이한다. 주나라 유왕을 위해 포나라에서 보낸 여인 포사(褒姒)에게 흠뻑 빠져 있던 유왕의 관심은 오로지 그녀를 즐겁게해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녀는 절대 웃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실수로 병사 한 명이 봉화를 올려 이때문에 혼비백산한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것을 본 포사가 박장대소하며 무척 즐거워했다. 포사가 웃는 모습을 본 유왕은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봉화를 올리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북에서 견융족(犬戎族)이 침입했다.병사들이 봉화를 올렸지만 이것이 매일 되풀이하던 유희라고 생각할 뿐 아무도 외적이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주나라는 그렇게 허무하게망하고 말았다.​21세기 중국의 미인은 한국형?서시의 고향집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서시전에는 서시의 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고 그녀가 태어났다는 주루오(苎萝) 마을은 2,000년 전에 서시가 살았던 주택을 재현해 놓았다.​​​​​​서시의 상이 모셔져 있는 서시전​서시가 생활했던 마을의 모습​​​​서시전 앞의 연못에도 서시의 상이 세워져 있다​​주루오산 위에 세워진 정자에 올라서니 주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상당히 크고 대부분의 건물들이 산 위에 지어져 있다. 전시품이 그다지 많지 않아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그저 서시란 중국의 미인을 기억하기 위한 장소일 뿐.​​​​주루오산 위에 정자가 서 있다. 이곳에 서면 주위가 한눈에 들어온다​​​서시를 추모하는 향과 초를 태우고 있다​​예로부터 중국에서도 항저우에는 미인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다. 항저우에 미인이 많았음에도 서시가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다는 것은 남의 마음을 빼앗아버릴 만큼 매력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서시를 중국 제일의 미인이라고 믿었던 중국인들의 미인에 관한 시각도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중국인들은 서시보다 더 예쁜 미인이 한국에 많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서시전을 나와 인근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필자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안 주인장이 한국의 화장품을 보여준다. 인터넷을 통해 샀는데 이게 정말 한국제인지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필자가 알지 못하는 브랜드의 한국 화장품이었다. 어쨌거나 21세기 중국의 미인은 한국형이 아닐까 싶다.  * 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 
중국이야기 [천하제일이라는 계림의 산수] 2016-10-25
 桂林山水甲天下천하제일이라는 계림의 산수 ​  배를 타고 리지앙(Lijiang, 漓江: 이강)을 내려오면서바라보는 구이린(Guilin, 桂林: 계림)의 풍경은 필자가 이제껏 보아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예전에 중국의 내로라하는 시인들과 화가들이이곳으로 몰려와서 천하제일이라는 말을 서슴없이내뱉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환상적인 풍경을 안고있었기 때문이다. 안개가 낀 날이라면 시라도 한 수읊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다. 중국의 지폐 뒷면에는 중국의 아름다운 풍광들이그려져 있다. 50위안에는 티베트 포탈라 궁전이, 1위안에는 항저우 서호(西湖)의 모습이, 그리고 20위안에는 구이린의 황부탄다오잉(Huang bu tandaoying, 黄布滩倒影)이 자리하고 있다. 그만큼 구이린은 중국에서도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곳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2개의 강과 4개의 호수, 그리고 비고속철을 타고 광동성을 지나 광시성에 들어서면주위의 기묘한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그림을 그리는 대상으로 생각해왔던 산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다. 마치 전북 진안의 마이산 같은 산들이 주위에 널려 있다. 마이산은 2개의 봉우리가 생뚱맞게 올라와 있지만 이곳에서는그런 모습의 크고 작은 산들이 수백 km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구이린의 절경은 수억 년 전 바다였던 곳이 지각변동으로 인해 지상으로 돌출되어 수만 년동안 침식작용과 비바람에 씻기면서 만들어졌다.지질학자들에 따르면 가르스트(Karst)라고 하는 석회암으로 조성된 산들로서, 중국 계림과 베트남의 하롱베이가 이와 비슷한 구조다.​​광저우에서 계림까지 고속철로 연결된다​카르스트라는 형태의 석회암으로 구성된 산들이 계림(구이린)의 주위를 감싸고 있다(고속철 안에서 찍은 사진) 구이린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큰 도시에서 보았던 8차선 같은 대로는 없고 높은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연간 1,50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들이 찾는 도시이지만 그리 고급스럽거나 화려한 건물이 없다는게 신기할 정도이다. 도로에는 이층버스가 돌아다니고 무엇보다 모터사이클이 많다. 베트남의 호치민이나 동남아시아의 큰 도시만큼 많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이 모터사이클을 운전하며 이동하는 모습을 보니 이곳의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이 아마 오토바이인 모양이다. ​​관광객을 위한 2층 버스와 구이린 시민들의 발인 모터사이클​ 구이린에는 메리어트와 쉐라톤 등 세계 유수의 체인호텔들이 대부분 들어와 있지만 한결같이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작은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맥도날드와 스타벅스 매장은 있다. 그동안 필자는 베이징이나 난징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큰 도시에서 고대건물들을 별반 볼 수 없는 점을 특이하게 생각해왔다. 중국 남부의 최대 도시인 광저우에도 옛 성터의일부가 웨이슈 공원에 남아 있을 뿐 오래전에 지어진 건축물이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구이린에서도이러한 건축물을 볼 수 없었다. 중국은 최근까지도 경제개발이 모든 정책에서 우선시되어왔기 때문에 문화재 보호에는 관심이 없었다. 공산당과 연결되지 않는 역사적인 건축물들은 모두 헐어버리고 새시대의 건물들을 짓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라 생각해왔다. 구이린은 2,0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진시황 시절부터 천하의 구이린이란 소리를 들어왔고, 한때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区)의 성도였지만(지금은 난닝(南宁)이 성도) 변변한 역사적인 건축물이 없다는 것은 유감이다. 구이린은 물이 많은 도시다. 구이린의 중심부는 두개의 강과 네 개의 호수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에서봄은 베이징, 야경은 상하이, 안개는 중경, 비는 구이린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린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물과 무척 친숙하다. 구이린 관광은 배를 타고 강과 호수가 이어진 시 중심부를 도는것으로 시작된다. 여름에는 더운 날씨 때문에 사람들의 모습을 길에서 잘 볼 수 없지만 저녁이 되면 그들은 호수로 나와 더위를 식힌다. 밤늦게까지 시내의 강과 호수를 도는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즐기기도 한다.  ​ 시내에는 4개의 호수가 있다​​​구이린은 물이 많은 도시다. 도시에 2개의 강과 4개의 호수가 있고 비까지 많이 내린다​ 연중 온화한 날씨를 보이지만 여름에는 섭씨 36도를 오르내려서 무척 덥고 습도 또한 높다. 겨울에는평균기온이 섭씨 4~5도 정도이고 역시 습도가 높은 편이다. 봄에는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에 이곳을여행하려면 9월이나 10월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 20위안 지폐 속의 환부탄다오잉구이린의 진면목을 보려면 리지앙(漓江: 이강)을 따라 양수어(Ynagshuo, 阳朔: 양소)까지 이어진 강을 배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 구이린에서 양소까지63km에 이르는 강 옆으로는 그림 같은 산들이 병풍처럼 이어져 있다. 구이린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 코스를 선택한다. 여기를 보지 않고는 구이린을 구경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구이린의 선착장에는 항상 수많은 관광선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구이린은 도시 전체가 관광을 위한 도시이고 이곳 주민들은 모두 관광 가이드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텔마다 그리고 길거리의 관광안내 부스마다 여행 패키지 상품과 유람선 티켓을 팔고 있다. 식당 앞이나 택시 정류장에도 안내를해주겠다는 호객꾼들이 상주를 한다. 그렇지만 필자가 구이린에서 지내면서 받은 이곳 사람들의 인상은 대체로 순박하기 그지없었다. 구이린에서 배를 타고 양소까지는 3시간 정도가 걸린다. 강 양쪽으로 펼쳐진 비경들을 감상하다보면마치 딴 세상에 온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그러나 2시간쯤 지나면 좀 지루해지기도 한다. 워낙 멋진 풍광이지만 너무 많으니 나중에는 조금 무감각해지는느낌이랄까.​ ​유람선을 타고 이강(리지앙)을 따라 내려가는 코스가 구이린 관광의 기본이다​​아무튼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기이한 산세 때문에 이곳을 보기 위해 국내외에서 연간 1,500만 명이 훨씬 넘는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광 수익은 정부의 재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구이린 시민들의 삶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상하이나 선전처럼 돈 많은 갑부나 큰 기업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구이린의 관광 시스템은 체계적으로 잘 짜여 있다. 전날 호텔에서 예약을 하니 아침에 관광버스가 각호텔을 돌며 여행객들을 태우고 선착장까지 안내한다. 선착장에는 수많은 유람선이 출발을 위해 정박해 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나룻배 정도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생각보다 크고 깨끗한 유람선이다. 필자는 구이린에서는 사공이 젓는 나룻배를 타고 한가로이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 제 맛이라고 상상해왔다. 아마도 예전부터 구이린에 관한 자료를 보면 묘한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나룻배가 한가로이 떠다니는 장면이 꼭 나왔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최신 유람선이 우리를 반기니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우리와 같이 배를 탄 여행객 중에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 여행객도 꽤 많았다. 미국과 캐나다, 유럽 등지에서 온 외국인들을 위해 안내원이 중국어와 영어로 안내를해주었다. 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강변을 따라 늘어선 작은마을들이 보인다. 이곳에는 유람선보다 훨씬 작은5~6인승 배로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이런 마을에서 며칠 푹 쉬었다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을 따라 유유히달리던 유람선이 갑자기 속력을 늦추기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었는데 지붕이 낮은 작은 배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허름한 배가 유람선과 머리를 맞대더니 나이 지긋한 부부가 생선과 조개 등 각종 음식재료를 유람선에 전달하고 순식간에 떠나간다. 유람선에서 승객들이 주문한 음식 재료들을 이런 배를 통해 조달하는 모양이다. 모든 거래가 강 위에서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작은 마을들​​허름한 배가 유람선에 식재료를 팔고 있다​ ​조금 더 내려가다 보니 뗏목을 탄 젊은이가 위태로운 모습으로 빠른 물살을 따라 내려오더니 금방 유람선에 달라붙는다. 뗏목에는 망고, 수박 등 과일이 담겨져 있다. 지나가는 유람선에 뗏목을 대고 과일을 파는 과일장수다. 물에 익숙하다고 하지만 거의 목숨을 걸고 장사를 하는 위험천만한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뗏목을 타고 과일을 팔러 다니는 과일장사​​무협지를 보면 중국인들은 과장이 좀 심한 편이다.하늘 위를 날아다니고 손에서 장풍을 뿜어내서 상대방을 날려 보낸다. 이강에서 멋진 풍경이 몇 군데있는데 그 중 하나가 9마리 말이 달리는 모습이 보인다는 주마화산(구마화산: 九马画山)이라는 기암괴석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억지로 꿰어 맞춰도 아홉 마리의 말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데, 하여튼 중국인들은 9마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9마리의 말이 새겨져 있다는 주마화산(구마화산)​ 점심을 먹을 즈음 구이린이 자랑하는 황부탄다오잉(黄布滩倒影)에 도착했다. 잔뜩 기대감을 가지고 20위안 지폐에그려진 모습과 대조하니, 지폐의 그림이 약간 과장되게 그려졌음이 한눈에 느껴진다. 천하제일이라는풍경에 대한 기대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워낙 비슷한 풍경이 많다보니 ‘천하제일’이라는기대 효과가 반감된 걸까? 우리나라의 마이산처럼 봉우리 2개만 우뚝 올라와 있다면 마냥 신기하겠지만 이곳의 풍경은 전체가 그런 마이산 봉우리의 연속이다. 어쨌든 눈앞에 펼쳐진 황부탄다오잉의 모습은 인간이 그려낼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조각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수억 년 동안 지구의 역사를그대로 간직한 위대한 자연의 보고다.​​​계림의 제일이라는 황부탄다오잉​ 우리 입맛에 잘 맞는 구이린 음식약 3시간 동안의 유람선 여행의 종착지는 양소다. 양소는 인구 5만 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마을 전체가 천혜의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아니다. 기묘한 형상을 한 산들이 마을을 에워싸고있는 신비스런 모습이다.​ 양소의 환상적인 풍경​ 계림이 속해 있는 광시성은 광시좡족자치구(广西壮族自治区)로 불린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조선족을 포함해서 55개 민족이 있는데 그중 좡족(壮族)은약 1,600만 명 정도로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좡족은 광시성과 구이저우(Guizhou, 贵州:귀주)와 윈난성(Yunnan, 云南省: 운남성) 등 중국 남부에 널리 퍼져 있다. 또한 계림에는 좡족 외에도 묘족, 위족, 동족 등 다양한 민족이 함께살고 있다.​​​전통의상을 입은 소수민족들이 관광객들을 맞이한다​​양소에 들르면 꼭 가봐야 할 곳이 스와이타오위안(世外桃源: 세외도원)이다. 큰 호수를 끼고 소수민족들의 전통가옥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들의 생활풍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 또한 배를 타고 돌아봐야 제대로 구경할 수 있으니 계림은 역시 물이풍부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난 소수민족들의 삶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관광객들을상대로 춤을 추고 노래하며 기념품을 만들지만 이들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거의 없다고 한다. 소수민족의 대부분은 중국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외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관광지에서 얻는 이익이 이들에게 들어오지 않고 정부에귀속된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격이다.​​세외도원(世外桃源)에서 바라본 구이린의 모습​ 구이린을 거쳐 양소에 도착하면 하루 일정의 관광코스가 끝난다. 양소에서 구이린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대부분 육로를 이용한다.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도로 사정은 별로 좋지 않다. 새롭게 도로 공사를 하고있어 구이린으로 돌아오는 내내 먼지가 폴폴 날리는도로를 달려야 했다.​​중국음식은 주로 기름에 볶는 것이 많아서 우리 입맛에는 너무 느끼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구이린의 음식은 기름지고 느끼한 대부분의 중국음식과 달리 담백하고 매콤하다. 덕분에 입맛이 까다로운 한국인들에게도 이곳 음식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다. 이는 구이린 사람들이 즐겨 먹는 고추와마늘, 그리고 마를 이용한 독특한 양념 때문인데, 이 양념을 어느 음식에나 이용하기 때문에 매콤하고 쌉쌀한 맛이 오래도록 지속된다. 매운 맛이 느끼하면서 무척 매운 사천요리와는 또 다르다. 덕분에 구이린에 머무는 동안 음식 때문에 고생할 일이 없었다. 대부분의 음식이 매콤하고 쌉쌀한 맛이 나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을 듯하다.  ​구이린의 음식은 맵고 쌉쌀한 맛을 낸다 ​한편 쌀이 많이 나는 지역이라 오래 전부터 쌀로 국수를 만들어 먹은 구이린에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지닌 쌀국수 식당이 있을 정도로 오랜 쌀국수 역사를 자랑한다. 구이린 사람들도 대부분의 중국인들처럼 아침을 밖에서 사먹는다. 일반적으로 아침에 많이 먹는 죽이나 유토(油条)도 인기가 있지만 구이린 사람들이 제일 즐기는 것은 역시 쌀국수.​​​구이린의 명물인 쌀국수 ​일전에 베트남에서도 쌀국수를 정말 맛있게 먹었던 적이 있다. 허름한 식당이었지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는데 간단한 쌀국수가 어찌나 맛있었던지 지금도 입맛이 돋는다. 쇠고기 두 점과 숙주나물이 조금 올라간 것이 전부였지만 육수의 맛이 정말 환상적이었다. 반면 계림의 쌀국수는 베트남쌀국수와는 조금 다르다. 물 국수에서는 중국 특유의 약간 느끼한 맛이 나지만 비빔국수는 텁텁하면서도 끝맛은 쌉쌀한, 묘한 맛이 매력적이었다.​* 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
포드 포커스로 달린 시드니 2016-10-20
​​​포드의 초청을 받아 호주 시드니로 날아갔다. 이번 출장의 주인공은 포커스. 그런데 일반적인 시승출장과 달랐다. 이틀을 꽉 채운 일정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먹고 놀고 운전하기. 포드는 포커스오너에 어울릴 라이프스타일을 체험시켜주고자 했다. 20년 만에 찾은 시드니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민첩한 포커스와 함께한  덕에 추억은  한층 더 명징해졌다. ​머나먼 지평선의 한 지점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서서히 고도를 낮춰가는 비행기 창밖으로 아침 햇살에 노릇노릇 물든 시드니가 펼쳐졌다. 멀리서도 오페라하우스와 하버 브리지가 또렷이 보였다. 개인적으로 20년 만에 찾는 호주, 그 중에서도 시드니. 과거 가난한 배낭여행자의 눈에 비친 시드니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문득 그때의 감흥이 밀려들었다. 이번 여정은 포드 아시아태평양 지사에서 기획했다. 출장의 주인공은 포커스. 그런데 포드 측은 “일반적인 시승 출장과 많이 다르다”고 미리 귀띔했다. 심지어 짐을 꾸려 시드니로 떠나기 전까지도 자세한 일정을 알려주지 않았다. 설렘을 한가득 안고 시드니 국제공항을 나섰다. 맑고 푸른 하늘, 늘씬한 홀덴 승용 픽업. 시드니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다만, 엄청 추웠다.​​ ​​달라진 미디어 환경 느낄 수 있어기자의 이름이 적힌 포드 푯말을 든 스태프를 만나 몬데오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이날은 저녁까지 공식 일정이 없었다. 목적지는 본다이 비치. 서퍼들의 천국으로 유명한 해변이다. 시드니 공항에서 본다이 비치까지 가는 길은 단조롭고한산했다. 20년 전엔 시드니 도심에만 머물렀다. 다른 데 갈 차편도, 돈도 궁해서였다. 도시 외곽의 허름한 풍경이 퍽 낯설었다.​한 시간여를 달려 본다이 비치에 도착했다. 해변을 이웃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여름 시즌에 장기 투숙하는 서퍼들이 많은지, 콘도미니엄처럼 취사 시설은 물론 세탁기까지 완벽하게 갖춰놓았다. 짐을 대충 풀고 서둘러 바닷가로 나섰다. 과연 서퍼들이 사랑할 만했다. 하늘은 맑았지만 바람은 거셌다. 짙푸른 바다는거대한 파도를 연신 둥그렇게 말고 있었다.​​​​정오쯤 되어 담당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근처 레스토랑을 예약해 놓았으니 점심을 먹자고 했다. 식당에서 대만과 중국 기자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홍보 담당은 “다른 기자들 체크인을 챙겨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대만에서 온 기자 빈센트에게 물었다. “이번 출장 뭐하는 거래?” 빈센트 왈, “글쎄~.” 나머지 기자들 역시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 가진 분명했다. 시대가 확실히 바뀌었다. 과거 기자들은 으레 돼지저금통만 한 DSLR과 수첩을 들고 다녔다. 그런데 이제 고프로나 액션캠, 스태빌라이저가 필수다. 컨텐츠도 달라졌다. 이날 함께 한 기자 넷 가운데 셋은 영상컨텐츠를 만들러 왔다. 대만에서 온 꽃미남 친구는 공중파 프로그램의 진행자라고 했다. 어쩐지 얼굴이 조막만하더라니.​나중에 만난 중국의 또 다른 친구는 유명 음식 칼럼니스트다. 말레이시아에선신문사가 운영하는 방송국의 여기자를 보냈다. 장비도 장난이 아니다. 삼각대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늘 보던 친구들이 모이는 자동차 전문지 대상의 시승회와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아이폰 하나로 찍어보겠다고 캠코더도 마다하고온 나 자신이 무척 부끄러워졌다. 이날 저녁, 모든 기자들이 호텔 로비에 모였다. 중동과 호주, 아시아 각국을 아우른 다국적 기자단. 우린 포드가 마련한 버스를 타고 시드니 도심으로 향했다.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시드니의 마천루가 눈앞에 한가득 펼쳐졌다. 꼬깃꼬깃 아껴둔 호주의 플라스틱 돈을 모아 킹스크로스 인근의 한국 식당을 찾던 20년 전 내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찡했다.​저녁을 먹고 돌아와 웰컴패키지를 열어 보니 일정을 소개한 책자가 있었다. 어색한 오탈자나 삐뚤빼뚤한 서체 없이 완벽한 한국어판이었다. 책자의 한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여러분은 단순한 차를 넘어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서 포커스의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나만의 콘텐츠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사진과 영상 스태프가 대기 중”이라고 했다.​​​​라이프스타일 체험 위주의 행사다음날인 8월 24일 아침이 밝았다. 낭패였다. 창밖엔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고있었다. 처음 겪는 겨울의 호주. 날씨는 걱정 이상으로 춥고 스산했다. 우린 셔틀을 타고 본다이 비치를 바로 옆에서 굽어보는 ‘본다이 아이스버그’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브리핑을 들었다. 비바람을 헤치고 파도를 타는 서퍼가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기자는 대만 꽃미남과 한 조였다. 그는 오른쪽 운전석이 부담스러웠는지 한사코 운전대를 양보했다. 결국 기자가 먼저 몰고 나섰다. 포커스의 행렬은 샤워기로 쏟아 붓는 듯한 빗줄기를 헤치며 본다이 비치를 빠져 나갔다. 이 친구는 스스로를 방송인이 아닌, 유튜버라고 했다. “개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 지 1년 반 정도 됐다”고 했는데, 한국 미디어에 궁금한 게 많았다.​포드가 준비한 첫째 날 여정의 테마는 ‘남부 해변 어드벤처’다. 본다이 비치를 출발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는 코스였다. 일반적인 시승회처럼 출발 이후 도착지까지 알아서 가는 방식이 아니었다. 중간 중간 콘텐츠를 만들 포인트와 운전자 교대장소, 커피 스톱을 마련해 지루할 짬이 없었다. 한참을 달려 로열 내셔널파크에 도착했다. 비는 아직도 그칠 조짐이 없었다.​​​​​​​로열 내셔널 파크는 호주의 흔한 공원처럼 야생동물이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이곳을 점령한 동물은 앵무새와 오리였다. 포드 스태프는 코알라 주식인 유칼립투스 잎으로 만든 이 지역의 전통차와 쿠키 등 주전부리를 한 상 차려놨다. 문제는 우리보다 새들이 이 간식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점. 특히 앵무새는 끊임없이 과자를 노렸고 짬짬이 훔쳐 먹었다.​​​​ 간식을 지키는 우리와 호시탐탐 노리는 앵무새의 실랑이를, 포드의 사진과 영상 스태프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기록했다. 조명까지 동원한 스태프에게 에워싸여 있다 보니 예능 프로그램 촬영 현장에 서 있는 기분이 들어 왠지 으쓱했다. 그런데 바쁜 건 스태프뿐이 아니었다. 각 나라의 기자들은 저마다의 장비로순간순간을 기록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일반적인 시승회와 분명 달랐다. 우린 시드니 인근의 명소를 따라 밟는 투어를왔는데, 다만 이동수단이 포커스일 뿐이었다. 이번엔 꽃미남이 운전대를 쥐었다. 그는 오른쪽 운전석이 익숙지 않은지 자꾸 왼쪽 갓길로 차를 붙였다. 그때마다 “차선 가운데로 달리라”는 무전이 날아왔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꽃미남은 웅웅거리는 영어 무전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교대 포인트에서 운전자를 바꾸고, 포커스의 행렬은 시클리프 브릿지로향했다. 높직한 교각 형태의 도로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해안 절벽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절경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비바람이 워낙 드셌기 때문. 궂은 날씨 속에서도, 포커스는 네 바퀴를 지면과 밀착시킨 채 늠름하게 달렸고, 실내는 쾌적하고 아늑했다. 안팎 다듬고 1.5L 에코부스트 엔진 얹어땅거미가 질 무렵, 첫째 날 일정의 종착지인 패퍼스 매너 하우스에 도착했다. 드넓은 농장을 낀 저택을 개조한 호텔이었다. 포드는 앞마당에 유리창을 검게 칠한 포커스 한 대를 준비했다. 직각 주차보조 기능을 체험할 기회였다. 한 번에성공한 기자에겐 샴페인을 건넸다. 기자들은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다른 이들의 실수에 탄식하고 성공에 환호했다. 둘째 날은 눈부시게 화창했다. 이날 일정은 좀 더 운전 위주였다. 벤들리 에스테이트, 버랑고랑 전망대, 글렌브룩, 시드니로 이어지는 코스였다. 포커스는 포드의 간판 해치백이다. C세그먼트에 속해 폭스바겐 골프, 푸조 308 등과 경쟁한다. 현재 140개국에서 판매 중인 포드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로 지난해 전세계시장에서 40분마다 한 대꼴로 팔았다.​​​ 포드를 대개 미국 빅3 중 한 브랜드로 알고 있지만 사실 유럽에 뿌리 내린 지100년이 넘었다. 1909년 영국 포드(Ford of Britain), 1916년 프랑스 포드, 1925년독일 포드(Ford Germany)를 통해 유럽 현지형 포드를 만들어오다 1967년에는유럽 전체를 총괄하는 유럽 법인(Ford of Europe)을 독일 쾰른에 설립했다. 보다 적극적으로 유럽 시장과 궁합이 좋은 차종을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해서다.유럽 기반의 포드는 앵글리아, 타우너스, M시리즈, 에스코트, 카프리, 컨설, 코티나, 그라나다 등 북미와는 다른 유럽 스타일의 포드를 만들었다. 현대자동차가 60~70년대 라이선스 생산한 코티나와 20M, 그라나다도 바로 유럽 포드에서 만든 것이다. 포커스는 1998년 에스코트의 후속으로 데뷔했으며, 현행 모델은 2010년 나온 3세대다.​이번에 시드니에서 만난 포커스는 최근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최신형이다. 포드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도 ‘싱크3’으로 진화했다. 애플 카플레이가 기본이고 기존의 장점이던 음성인식기능도 한 차원 업그레이드했다. 그래서 이제 단어뿐아니라 문장도 인식한다. 가령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말하면 주위의 커피숍을 가까운 곳부터 일목요연하게 띄우는 식이다.​​​​국내에서 판매 중인 포커스는 4도어 세단과 5도어 해치백으로 나온다. 엔진은 직렬 4기통 1.5L 디젤 터보(TDCi) 한 가지로, 최고출력 120마력, 최대토크27.5kg·m를 낸다. 변속기는 6단 듀얼 클러치. 반면 시드니에서 시승한 포커스는 직렬 4기통 1.5L 가솔린 터보(GTDi) 엔진을 얹고 180마력, 24.4kg·m를 낸다. 변속기는 자동 6단 ‘파워시프트’다. 실내 구성은 국내에서와 정확히 반대다. 운전석 위치가 바뀌었을 뿐인데, 포드코리아의 배려로 출국 직전까지 몰던 포커스와 느낌이 사뭇 다르다. 계기판을비롯한 디스플레이는 정교하고 컬러풀하다. 그래서 여기저기 시선을 옮겨 정보를 살피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만, 워낙 다양한 요소를 짜임새 있게 배치하다 보니 실제보다 공간이 빠듯해 보이는 단점도 있다.​이번에 포커스에 새로 얹은 1.5L 에코부스트 엔진은 기존의 1.6L 에코부스트를대신하게 된다. 포드는 “배기량을 살짝 다독이면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낮췄다”고 밝혔다. 그러나 힘은 아담한 차체를 끌기에 차고도 넘친다. 특히 토크는터보가 본격적으로 개입하면 화끈하게 치솟는데, 이 순간이 퍽 극적이어서 본의 아니게 ‘터보랙’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포커스의 장점 부각시킨 프로그램이날 환상적인 날씨에 힘입어 포커스의 행렬은 움직임의 템포를 바짝 당겼다.대만 꽃미남도 어제보단 오른쪽 운전석에 적응한 듯 운전이 한결 자연스러웠다. 포드 측은 정숙성도 강조했다. 포드의 자랑엔 과장이 없었다. 꽤 속도를 높여 달리면서도 우린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플로어 카펫과 옆 유리창 두께, 엔진룸 방음에 남다른 공을 들인 결과다.​포커스의 또 다른 장점은 민첩하고 굳건한 몸놀림이다. 국내 시장엔 실용적인엔진만 얹는데, 사실 포커스의 꼭짓점은 스펙이 막강하다. 최근 나온 포커스 RS는 직렬 4기통 2.3L 에코부스트 엔진을 품고 무려 350마력, 48.3kg·m를 뿜는다. 0→시속 100km 가속 시간은 4.6초로, 폭스바겐 골프 R보다 0.5초 더 빠르다. 최고속도는 시속 266km.​​​​1.5L 에코부스트를 타면서 RS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섀시의 잠재력을 설명하기위해서다. 신나게 달린 이날의 결론은 명확했다. 섀시가 엔진을 압도했다. 이따금씩 평정심을 잃고 과욕을 부려도, 섀시는 눈 하나 꿈쩍 않고 다 받아줬다. 격렬하게 달리다 종종 노면을 놓치기도 했는데, 그건 섀시의 밸런스보단 경제적인 사이즈와 소재의 타이어 문제였다. 둘째 날은 다들 어제의 우중충한 기분에서 벗어나 시원하게 달렸다. 포드는 구간별, 운전자별로 연비 테스트를 진행했다. 가속 페달을 깻잎 두께로 밟는 ‘신공’을 동원한 끝에 기자는 평균 30km/L를 넘겼다. 그러나 아쉽게도 2등에 머물렀다. 기름 값도 싼 말레이시아에서 ‘연비의 달인’을 보냈을 줄이야. 포드는 주차장을 막아 짐카나와 J턴 체험도 진행했다.​​​​이른바 ‘다이내믹 체험’을 하는 사이,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어느덧 각자출국 일정에 맞춰 헤어질 시간. 그새 친해진 우린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본다이 비치에서 하룻밤을 더 보낸 뒤 기자는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서서히 기수를 높이는 비행기 창밖으로 시드니가 아련히 멀어졌다. 이번 역시20년 전처럼, 코알라는 코빼기도 못 본 채.​* 글 김기범  사진 포드자동차​​​
인천 송도 미래길 2016-10-18
 2010년 4월 인천 송도에 조성된 ‘미래길’은 인천지하철 센트럴파크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해 ​컴팩스마트시티와 트라이볼, 송도센트럴공원 웨스트보트하우스, 인천대교 전망대, 커넬워크등을 거쳐 다시 센트럴파크역으로  돌아오는총 4.5km의 구간이다. 길이 잘 조성되어 있고평탄해 2시간 정도 걸으면 송도의 오늘과 미래를 ​만날 수 있다. ​ 컴팩스마트시티는 오전 10시부터 문을 열어 오후 6시면 닫고 월요일, 추석과 설 당일은 쉰다.  바다를 타고 넘어온 선선한 바람이 한순간 가을을 데려 놓았다. 전혀 누그러들지 않을 것 같은 태양의 기세는 꺾일 대로 꺾였고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하다 못해 쌀쌀한 기운마저 살갗을 자극한다. 그야말로 계절의 변화는 몸으로부터 온다는 말을 절감하는 요즘이다.​여행이라……. 마음은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지만 막상 몸과 현실은 따라주지 않아 현대인 열 명 중 겨우 한 명이 문밖을 나서는 여행을 떠난다는 얘기가 있듯이, 오늘날 우리들은 여행이나 떠남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결단을필요로 한다. 하지만 거창하게 ‘여행’이란 이름표를 붙이지않아도 주위를 둘러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을 채우거나 비울 수 있는 곳이 의외로 많다.​총 4.5km 구간의 도심 속 미래길글로벌 미래도시를 지향하는 인천 송도의 ‘미래길’은 사색을 즐기려는 이들이나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려는 연인들,그리고 나들이를 떠나려는 가족들에게 추천해도 고개가 끄떡여지는 곳이다. 2010년 4월에 조성된 이 미래길은 인천지하철 센트럴파크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해 컴팩스마트시티와 트라이볼, 송도센트럴공원 웨스트보트하우스, 인천대교 전망대, 커넬워크 등을 거쳐 다시 센트럴파크역으로 돌아오는 총 4.5km의 구간이다. 길이 잘 조성되어 있고 평탄해 2시간 정도만 걸으면 별 어려움 없이 송도의 오늘과 미래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걷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길에서 만나는 송도 신도시의 숨겨진 매력을 찾다보면 하루가 부족할 정도다.​자, 준비가 되었다면 최대한 편한 차림으로 길을 나서자. 초입에서 만나는 ‘컴팩스마트시티’는 인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인천광역시립전시관으로,고대에서 근대 개항기의 인천으로 시간여행을 돕는다. 또한 현재 인천자유경제구역 개발을 통해 글로벌 인천으로변화되고 있는 인천의 미래를 최첨단 전시시설로 보여준다. 오전 10시부터 문을 열어 오후 6시면 닫고, 월요일과 추석 및 설 당일은 쉰다. 관람료는 무료다.​3차원 곡명 형태로 만들어진 ‘트라이볼’은 그 웅장함이 눈길을 사로잡아 자연스럽게 발길을 멈추게 한다. 3개의 사발모양은 공항과 항만, 그리고 광역교통망을 상징하는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조형물도 특이하지만 그 아래의 담수와 그림자가 아름답게 하모니를이루고 있으며, 밤에는 불빛을 받아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트라이볼에서는 전시회도 자주 열리는 만큼 겉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치기보다는 안을 한번 둘러보는 것이 좋다.​​3차원 곡명 형태로만들어진 트라이볼.공항과 항만, 그리고 광역교통망을 상징하는 ‘하늘과 바다,그리고 땅’의 의미를 형상화했다​​​한국 속의 작은 유럽, 커넬워크센트럴파크를 가로지르는 1.8km의 인공호수는 국내에서는처음으로 바닷물을 활용해 조성한 것으로, 폭이 최소 12m에서 최대 110m에 이른다. 호수를 따라 난 길을 이정표가 안내하는 곳으로 향하면 수상택시를 탈 수 있는 서쪽의 보트하우스에 이른다. 물살을 가르며 송도의 고층건물 속으로달리는 낭만을 선사하는 ‘미추홀호’는 성인 기준으로 요금이 4,000원, 소요시간은 20분 정도로 짧지만 굵직한 추억을 갖고 돌아오기에 충분하다.​​​​​길이 740m에이르는 쇼핑상가‘커넬워크’.중앙수로 곁으로쉴 공간이 많다​​​인공호수를 오가는 미추홀호.성인 기준으로 4,000원이면 20분동안 낭만 여행을 즐길 수 있다​​인천대교 전망대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다. 잘조성된 지금까지의 길과 달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건물,그리고 하늘과 키 재기를 하고 있는 이름 모를 각종 풀들이다소 거친 풍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뒤로하고 탁 트인 전망대에 올라서면 끝없이 펼쳐지는 갯벌과눈에 잡힐 듯 보이는 웅장한 인천대교가 불쾌했던 감정을누그러뜨리고도 남는다. 컨테이너로 만든 독특한 모양의 전망대는 건물 디자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한데, 알고 보니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으로 꼽히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2010년 건축조형물 분야 대상으로 선정되었단다.​​인천대교 전망대. 컨테이너를 활용해 만든 이 조형물은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2010년 건축조형물분야 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걷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울 즈음 만나는 ‘커넬워크’는 대한민국 속의 유럽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곳은 총 길이 740m에 이르는 유럽형 쇼핑 상가로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테마로 조성되어 중앙의 수로를 따라 340여 개의 유럽풍 매장이 늘어서 있다. ​​​​커넬워크 여름 테마가시작되는 곳. 중앙수로의말과 돌고래 조형물이운치를 더해준다.​​​수로 옆에 마련된 벤치와 파라솔에서 차를한 잔 시켜놓고 앉아 느림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도 좋을 듯. 아이스크림, 팥빙수, 다양한 차를 파는 곳들과세련된 레스토랑들의 차림표가 윈도에 나열되어 있어 유혹을 떨쳐내기 힘들다면 그대로 자리를 잡고 주문하면 될 일이다. 샘솟는 입맛의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면 그대로 자리를 잡으면 된다​​여정은 아직도 남아 송도센트럴공원과 송도 신도시의 랜드마크인 ‘송도컨벤시아’ 등으로 이어지지만 이쯤에서 발길을 멈춰도 좋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넘어가면 미래길이 송도를 환하게 밝히면서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호숫가 난간에 기대어 깊은호흡을 하다보면 송도의 오늘과 미래가 아닌, 오늘까지 쉼 없이 열심히 살아온 나의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한 보석 같은 쉼터, 바로 송도 ‘미래길’이다.​​​​송도 미래길에서만날 수 있는조각상. 세계의탈들을 형상화한조형물이다​​* 글, 사진 김태종​​     
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 2016-09-08
드레스덴에서 찾아낸 밀리터리 마니아의 성지​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    옛 동독지역 드레스덴에 자리잡고 있는 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은 소장품의 다양성과규모에서 첫손에 꼽을 만한 군사 관련 박물관이다. 프로이센부터 독일 제국, 두 번의 세계 대전과냉전에 이르기까지 독일군이 걸어온 드라마틱한 역사 속의 유산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이곳은밀리터리 마니아라면 꼭 한번 가볼 만한 명소다. ​생각 없이 시작했던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경우가 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남아 오전 중에 뭔가 할일이 없을까 빈둥거리던 차에 근처에 군사 박물관이있다는 말을 듣고 무심결에 따라 나선 길. 생각지도못한 수장품 규모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다 보니 금세 출발 시간이 되어버렸다. 드레스덴에 위치한 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 얼치기 밀덕인 기자는 몰랐지만 사실 이곳은 군사 역사 박물관으로는 유럽최대, 독일 역사 박물관으로도 빅3에 꼽히는 명소다. ​독특한 건물 속 충실한 수장품들숙소를 떠난 지 불과 5분. 올브리히트 공원을 가로지르자 모습을 드러내는 연한 베이지색 건물은 마치 거대한 금속 피라미드가 박혀 있는 듯한 기괴한 형상이다. 원래 병기고로 지어졌던 옛 건물을 바탕으로 미국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7년에 걸쳐 개축했다. 위에서 보면 ㄷ자형 건물 중간에 거대한 금속 화살이박힌 모습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부모 밑에서 성장한 폴란드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 건축가 리베스킨트는 베를린 유다야 박물관, 영국 맨체스터의 국립전쟁박물관, 캐나다 왕립 온타리오 박물관 등을 담당했던 건축계의 거물이다.​기본 건물은 19세기 말 빌헬름 1세 때 병기창으로 지어졌다가 1914년 작센 왕국군 박물관이 되었다. 한편포츠담에서 1961년 개관했던 독일군 박물관이 1972년이곳 드레스덴으로 이관되어 동독 군사박물관으로이름을 바꾸었다. 당시에는 동독군과 바르샤바 조약기구(WTO)의 역사를 주로 다룬, 조금은 딱딱한 구성이었다. 그런데 독일이 통일되면서 1990년 독일연방군에게 넘겨져 지금의 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으로 거듭났다.​건물 밖에는 제2차 세계대전부터 냉전 시대를 아우르는 각종 전차와 장갑차, 자주포는 물론 비교적 최근일선에서 물러선 레오파르트2와 zh2000 자주포,패트리어트 미사일 등이 관람객을 맞는다. 다른 박물관이라면 애지중지할 물건들이지만 소장품이 넘치는이곳에서는 실내에 발을 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조명을 다소 어둡게 세팅한 실내는 1~3층에 시대별로 나누어 프로이센과 독일 연방, 독일 제국으로 이어지는 독일군 장비들을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옛 동독 지역에 자리잡은 지리적 요건 덕분에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유산까지 풍성하게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은 이 박물관의 장점. 비교적 크기가 작은 군용차나 자동차들은 실내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실물을 꼭 한번 보고 싶었던 영국산 장갑차 유니버설 캐리어가 무척이나 반가웠다.​비행기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건물을 나서는데 아까보았던 건물 밖 기갑차량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레오파르트1과 T-72 전차는 냉전 시절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주력 전차들이다. 현역 시절, 자신들이 은퇴한 후 통일된 독일에서 이렇듯 사이좋게 마주보며 여생을 보내리라고는 상상도못 했을 터. 분단국가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묘한 감흥에 젖게 하는 광경이었다.​​​T-72M 전차 (소련, 1983)​냉전시대 소련의 기갑전력을 대표하는 존재 중 하나였던 T-72는 사실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T-62의 후계기종을 계획하던 소련군은 모로초프 설계국(오비옘트 432)에게 차기 전차 개발을 맡겼는데, 검증되지 않은 신기술에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일종의 보험으로 우랄열차공장이 제출했던 오비 트 167도 계속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T-64로 제식화된 오비 트 432가 실패작으로 판명되면서 오비 트 167이 T-72로 제식화될 수 있었다.동독이 1978~86년 사이 196대 도입했던 T-72M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산되었던 수출형. 장갑이 얇고 장비 등이 일부 빠진 다운 그레이드 버전이다. 이곳에 전시된 T-72M은 러시아 니즈니타길에 위치한 우랄열차공장에서 생산된 것이다.​​​BMP-2 장갑차 (소련, 1983)​1967년 공개된 BMP-1은 병력수송과 함께 어느 정도 전투까지 가능한 보병전투차였다. 1980년에는 단점으로 지적되던 화력을 보강한BMP-2로 진화했는데 명중률이 낮았던 73mm 저압포를 30mm 기관포로 교체했지만 대량생산과 도하능력 등을 위해 장갑은 그다지 보강되지 않았다. 6기통 300마력의 UTD-20 디젤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65km, 행동반경 600km를 갖추었으며 물 위에서 시속 6km로 이동할 수 있었다. 전시차는 동독 시절인 1983년 소련으로부터 도입했던 23대의 BMP-2 중 한 대다.​​ ​​​​M109 A3 GE A2 자주포 (독일/미국)​한국전쟁을 거치며 기동력과 방어력을 갖춘 대포, 즉 자주포의 필요성을 절감한 미국은 전차 차대에 대포를 얹은 형태였던 M107을 대체할 새로운 자주포 개발을 시작했다. 1956년 개발에 들어간 M108은 105mm 포의 위력이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에 1961년 등장한 M109로 금세 대체했다. 70년대 중반까지 2,500대,89년까지 5,000대가 넘는 M109가 만들어졌으며 M109 A2부터는 반동을 줄인 신형 포 받침대를 장비하는 등 지속적으로 개량되었다. 한국 포병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K55 자주곡사포는 바로 이 M109 A2를 라이선스 생산한 것이다. 독일연방군은 1964~73년 사이 586대를 도입해 개량을 거친후 M109 G라는 제식명을 붙였으며, 1986~91년 사이 다시 한번 업그레이드해M109 A3 GE A1으로 만들었다. 미국의 M109 A6 팔라딘, 독일의 PzH2000이 나오기 전까지 서방세계를 대표하는 자주포였다.​​​루크스 A2 정찰장갑차 (서독, 1975)​​스라소니’라는 뜻의 루크스(lynx의 독일어)로 이름 붙인 이 차륜 장갑차는 1968년 시작해 1983년까지 408대가 독일에서 생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사용했던 Sd Kfz 231과Sd Kfz 234의 후계자로 다임러 벤츠가 개발을 담당했다. 캐터필러 방식과 달리 고무 타이어를 사용하는 차륜 장갑차는 포장도로에서 속도가 빠르고 제작비가 싸며 승차감과 정숙성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방어력과 험로주파성에서는 뒤처진다. 벤츠의 OM403 디젤(V10 389마력) 엔진을 얹어 전후진최고시속 90km를 낼 수 있으며 행동반경은 730km에 이른다.​​​레오파르트1 A4 전차 (서독, 1974)​​동서로 갈린 독일은 이어진 냉전 시기에 서방과 공산세력이 대립하는 최전선이 되었다. 1955년 창설된 독일연방군(Bundeswehr)은 적의 막강한 기갑전력을 감안해 미국 패튼과 영국산 센츄리온 전차를 도입했지만 마음에 차지 않았다. 1957년 시작했다가 지지부진해진 프랑스와의 차세대 전차 공동개발 프로젝트를 중단한 독일은 독자개발로 전환, 포르쉐와 아틀라스 등이 공동개발한 차대에 라인메탈과 베르그만이개발한 포대를 얹어 레오파르트1을 완성했다.1974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이 전차는 기동력에주력하느라 방어력에 약점을 보였지만 네덜란드,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에도 도입되어 NATO지상 전력의 일익을 담당했다. A4형은 전자식탄도계산기와 야간관측장비가 추가된 모델로1974년 하반기에 생산되었다. 레오파르트1은레오파르트2의 등장에 따라 2003년부터 점차일선에서 퇴역했다.​ ​M113 A1 GE 장갑차 (미국/서독, 1974)소련 BMP 시리즈에 대항하는 서방의 병력수송차를 미국에서는 APC(Armoured PersonnelCarrier)라고 부르는데, ‘전장의 택시’라는 별명으로 널리 일컬어진다. 그 대표기종인 M113은1960년 등장해 오늘날까지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M59 시절부터 전통이 된 상자형의 차체는내부공간 확보를 위함이며 알루미늄 합금으로무게를 줄여 물길도 건널 수 있다. 다만 경량화에 주력하느라 방어력은 상당히 취약해 현지에서 강철판을 덧대는 개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독일은 1982년 괴팅겐에 주둔한 45 보병 대대를 통해 M113G A2를 처음 도입했고 3년 후 티센-헨셸이 이를 개량했다. 디트로이트 디젤의V6 디젤 210마력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64km를 내며 평지에서 300km를 이동할 수 있다.   알비스 스탈워트 Mk2 FV622 (영국)유럽 전선에서 자동차의 유용성을 실감한 각국은 다양한 노면과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군용차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6륜 구동에 수륙양용이 가능한 영국 알비스의 스탈워트는 1966년부터 1971년까지1,110대가 만들어졌다. 롤스로이스제 8기통 220마력 가솔린 엔진(B81MK8B)을 짐칸 아래에 두고 그 앞쪽에 기어박스와 트랜스퍼를 배치한 구조로, 완전군장한 군인 30명 혹은 5톤의 화물을 싣고 지상에서는 시속 64km, 워터제트로 수상에서 시속 10km의 속도로 이동이 가능했다. FV622로 불린 개량형 Mk2는 적재인원이 38명으로 늘었고워터젯 성능도 개량되었다.​​​M16 MGMC 반궤도 장갑차 (미국)병력을 안전하게 전장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병력수송 장갑차는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 필요성이 빠르게 대두되었다. 하지만 타이어가 달린 일반적인 트럭으로는 이동성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구동륜을 캐터필러로 대체한 물건들이 개발되었는데, 바로 미군의 M3와 M5,그리고 독일군의 Sd.Kfz 251 등이다. M16 MGMC(Multiple Gun MotorCarriage)는 M3를 기반으로 대공포를 올린 개량형으로 M2 기관총 4문을 뒤에 실어 대공사격이나 지상전투에서 널리 쓰였다. 전시차에서는기관총이 제거되어 있었지만 그 강력한 화력 덕분에 ‘미트초퍼’(meatchopper, 고기 다지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HS30 장갑차 (서독)종전 후 재편된 서독 연방군은 초창기에 미국산 전차를 주로 도입했다.하지만 장갑차의 경우는 달랐다. 오직 병력 수송에만 중점을 둔 미국산M113과 달리 서독연방군은 전차와 함께 이동하며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보병전투차를 원했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이스파노스이자가 독일을위해 개발한 HS30은 피탄율을 고려한 낮은 차고에 20mm 기관포를 장비했다. 그런데 당초 1만 대를 발주할 예정이었던 HS30은 공간부족 등각종 문제점이 드러난 데다 뇌물 스캔들까지 겹치면서 2,000여 대가만들어지는데 그쳤다. 1956년 이를 대체하기 위한 마더 IFV의 개발이진행되면서 HS30은 1971년을 마지막으로 일선에서 사라지게 된다.    다크스2 A1 전투공병차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영국이 선보였던 퍼니 전차는 독일군 지뢰밭과 대전차 방어물, 토치카 등을 무력화시키며전투공병차라는 새로운 무기체계를 제시했다. 전투공병차는 말 그대로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땅을파고 다리를 만들기 위한 군용차. 현역 공병차 중 최고로 평가받는 다크스2는 레오파르트1 차대를 기반으로 크레인과 쇼벨 등으로 갖추어 기갑부대를 따라다니면서 각종 토목작업을 수행한다. 도하장비를 갖출 경우 수심 4m정도는 물속으로 건널 수도 있다. 방어용의 7.62mm 기관총과 연막탄을 갖추고 있으며 MTU의 10기통 37L 830마력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62km를 낸다. 1988~90년 사이 140대가 생산되었다.​  ZSU 23/4W1 쉴카 자주대공포 (소련, 1970)소련은 독일군의 자주대공포를 참고해 대구경 57mm2연장 기관포를 갖춘 ZSU-57/2를 개발했다. 탄 자체의 위력은 셌지만 발사속도와 포탑 선회가 느린데다 레이더도 없어 점차 빨라지는 제트기에 대응할 수없었다. 이런 요구에 따라 23mm 기관포 4문을 갖춘ZSU-23/4 쉴카가 1962년 등장했다. 대공포로는 최초로 레이더를 갖추고 연사속도를 높인 쉴카는 중동전쟁 당시 대공미사일과 함께 사용되어 이스라엘 공군을 괴멸시키다시피했다. 여기에 위기를 느낀 미국은 스텔스 기술 개발에 박차가했다. 이론상으로는분당 4,000발도 가능했지만 실제로는 고질적인 냉각 문제로 1문당 15초 이상 연사되지 않도록 제한했다. 1974년에는 이런 단점들을 해결한 개량형 ZSU-23/4M이 나왔다.    하노마그 AL28 (서독)하노버에서 1835년 창업한 하노마그는 증기기관을 시작으로 자동차와 농기계 등을 만들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걸작 반궤장갑차인Sd.Kfz 251을 개발했다. 그밖에도 다양한 트럭과 군용차를 만들었던 하노마그가 종전 후 처음개발한 L28은 군용 앰뷸런스나 수송용 트럭 외에 일반 상용 트럭으로도 애용되었다. AL28은뒷바퀴굴림이었던 L28을 기반으로 제작된 네바퀴굴림 버전. 1953년부터 71년 사이에 다양한버전의 AL28이 6,000대 이상 제작되었다. 4기통 2.8L 디젤 65마력 엔진을 얹었고 최고시속은70km. 하노마그는 1952년 라인슈탈, 69년에 헨셸 상용차 부문에 인수되었다가 현재는 메르세데스 벤츠에 흡수되었다.    레오파르트2 A4​1960년대 초 독일과 미국은 차세대 전차를 공동개발하기로 하고 유기압 서스펜션, 1,500마력 디젤 엔진, 레이저 거리측정기와 관측장비를 갖춘 신형 사격통제장치 등을 탑재한 프로토타입을 KPz.70(미국은 MBT-70)이라는 이름으로 개발했다. 하지만 혁신적인 신기술 탓에 가격이 폭등하자 결국 파트너십을 끊고 독자개발로 돌아서 MBT-70은 훗날 미국의 M1 에이브람스, KPz.70은 레오파르트2가 되었다. 70년대 초 시제품이 만들어졌지만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벌어지면서 신형 전차에 더욱 강력한 방어성능이 요구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레오파르트2는 1977년 서독 국방부의 정식 승인을 얻어 2년 후부터 배치되기 시작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1982년부터 92년까지 695대가 생산된 레오파르트2 A4 중 한 대로 개선된 사격통제장치와 신형 장갑을 갖추었다. V1247.6L 디젤 1,500마력 엔진을 얹어 55.4톤의 거구임에도 시속 68km로 달릴 수 있다. 장갑과 무기 등 꾸준한 개량이 이루어진 레오파르트2 시리즈는 현역 전차 중 최강으로 평가받는다.​​패트리어트 대공 미사일 발사대​​한반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종말고고도 요격 미사일 ‘사드’(THAAD)의 배치가 결정되면서 수도권 방어에 대한 논란이있었다. 하지만 비교적 저공으로 날아드는 스커드 미사일은패트리어트 미사일로 막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한다. 한국은이미 독일에서 운용하던 패트리어트 팩2를 도입했을 뿐 아니라 최신 팩3를 추가로 들여와 방어진영을 더 촘촘하게 짜기로 했다. MIM-104 패트리어트는 1970년대 미국 레이시온에서 미사일 방어를 목적으로 개발을 시작한 대공 미사일 시스템으로 팩2(MIM-104C)는 탄도탄 대응력을 개선, 걸프전에서스커드 미사일을 격추시켜 화제를 모았다. 패트리어트라는애칭은 애국이라는 뜻과 함께 Phased Array Tracking RadarIntercept On Target(목표물을 요격하는 추적 위상배열 레이더)의 약자이기도 하다. 만 트럭에 실린 하나의 발사대에는 9기의 미사일이 수납되며 1개 중대는 5~8개의 발사기와 레이더 시스템, 전용 발전기 등으로 구성된다.  푸크스 A6 A1 장갑수송차 NBC 방어 버전푸크스는 여우를 뜻하는 독일어. 독일연방군 두 번째 차륜장갑차인 푸크스는 다임러 벤츠와 포르쉐의 조인트벤처에 의해개발되었으며 생산은 타이센-헨셸이 담당했다. 8기통 디젤428마력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98km가 가능하며 뒤에는 스크류 2개를 달아 물 위에서도 이동이 가능하다. 1979년 배치를시작해 주로 특수임무에 투입되어왔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NBC 방호 버전으로 방사능, 생물학전, 화학전 상황에서도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2002~2003년에는 항구적 자유 작전(Enduring Freedom)의 일환으로 쿠웨이트에 주둔했다.​  비젤1(Mk20) 공수장갑차 (독일, 1991)기갑사단계의 카이맨? 서독 공수부대가 사용하던 크라카를 대체하기 위해 1970년대 개발된 비젤은 포르쉐가 개발에 참여했다. 1975년시제품이 만들어졌지만 당시 독일연방군은 레오파르트2 개발에 돈을 쏟아붓느라 1984년에야 프로젝트를 재개할 수 있었다. 7.62mm 이하철갑탄이나 고폭탄 파편까지는 방어가 가능하고 20mm 캐논 외에 TOW 미사일, HOT2 대전차 미사일 탑재도 가능했다. 폭스바겐의 5기통2.0L 디젤 직분사 87마력 엔진을 얹어 400km순항에 최고시속은 80km. 2.69톤으로 0.75톤의 크라카에 비해 한결 무거워져 공중투하는 불가능하지만 대형 수송헬기인 CH-53로 최대 3대 공중수송이 가능하다. 전시된 비젤은 독불여단(Deutsch-Franzosische Brigade) 292 보병연대 소속으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니바,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활약했다.     PzH2000 자주포 (독일, 2001)한국이 자랑하는 명품 자주포 K9은 결코 세계 1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 바로 PzH2000과 동시대에태어난 탓이다. 1970년대에 미국산 M109를 대체할155mm 자주포를 공동개발하기 시작한 서독과 영국,이탈리아는 1986년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개발로 돌아섰다. 독일은 이듬해 새 프로젝트에 착수해 크라우스-마파이와 라인메탈이 개발을 담당했는데, 당시요구조건은 로켓 보조장치 없이 최대 사거리 30km확보, 자동 장전장치에 의한 빠른 연사속도, 60발 분량의 탄약과 장약 탑재, 높은 기동력과 신뢰성, 독자적으로 전투가 가능한 시스템, 상부공격에 대한 방호력 등 무척이나 까다로운 것이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막강 기갑전력과 전면전을 상정하느라 화력과성능에서 세계 최고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2000년대 실전배치를 목표로 PzH2000라는 이름을붙인 이 신형 자주포는 155mm 포신에 자동장전장치를 결합해 분당 8발을 쏠 수 있었으며 테스트에서 1분에 12발, 1분47초에 20발을 쏘기도 했다. 최신 둔감 화약을 사용한 덕분에 과열로 인한 오폭 위험 없이 지속적인 연사가 가능하다. 미국의 크루세이더 프로젝트가 어그러지고 러시아제 코아실리차SV가 쌍열포를 포기함에 따라 PzH2000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 최강 자주포의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그대가로 엄청난 가격표가 붙었지만 말이다.    프러시안 모델 1865 드라이제 췬트나델 게베어프로이센 기술자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는 1836년에 볼트액션식 소총을 개발해 소총 역사에 혁명을 불러왔다. 기존에는 총구 앞에서 화약과 총알을 쑤셔 박아야 하는 전장식이었지만 볼트액션식 소총 덕분에 노리쇠를 당겨 뒤에서 장전이 가능해진 것이다. 야금술이나 제조정밀도의 한계로 가스가 새거나 볼트가 부러지는 문제를 노출했지만1분당 1발 정도였던 발사속도가 5발로 빨라짐으로써 전투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연사속도가 획기적으로 높아짐에 따라 대열을 지어걷다가 한 발씩 쏘던 이전까지의 전투방식은 사라지게 됐다. 무기의발전이 전장의 양상을 바꾼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1866년 쾨니히그레츠 전투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오스트리아군은 드라이제의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프로이센군에게 괴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공군용 보온병전쟁용으로 개발된 기술이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활용된 경우도 수없이많다. 2차대전 당시 고고도를 장시간 비행하며 추위와 싸우던 승무원들에게는 몸을 덥혀줄 보온병이 지급되었다. 이를 발전시켜 외병과 내병사이를 진공으로 만들어 열전달을 차단하는 기술이 19세기 말에 발명되어 1904년 독일 서모스를 통해 상품화되었고, 1940년대 군용으로 처음 보급되었다.​    V2 로켓 A4패전의 위기에 몰린 히틀러는 눈엣가시 같은 영국에 큰 타격을 주고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 있는 혁신적인 무기를 원했다. 그중에서도후세에 미친 영향력으로 첫 손에 꼽히는 것이 바로 V2 로켓이다. 액체 로켓으로 추진력을 얻고, 기계식 자이로를 사용해 스스로 자세를잡으며 아날로그 계산기가 엔진을 멈추는 이 물건은 오늘날 대륙간탄도 미사일의 시발점이 되었다. 비행기처럼 날아가는 V1과 달리 포물선을 그리다가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는 V2는 요격이 거의 불가능했다. V2 개발을 주도했던 베르너 폰 브라운은 미국의 페이퍼클립작전에 따라 미국으로 망명해 아폴로 프로젝트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V2 로켓과 시제품들 역시 미국과 소련, 영국 등에 의해 철저하게 수거되어 뒤이어 벌어진 우주경쟁의 토대가 되었다.    프러시안 청동포불화살과 돌을 날리던 유럽의 공성전은 화약을 이용한 대포의 등장으로 완전히 다른 양상이 되었다. 17세기에 전장의 사신으로 떠오른 대포는 19세기 말 강철제련법의 발달에 힘입어 값싸고 단단한 강철제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으며, 뒤쪽에서 포탄을 장전하는 후장식 시스템의 개발로 발사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이곳에 전시된 프러시아의 야포는 청동포의 마지막 시대에해당되는 188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청동포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날렵한 포신에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인 강선을 넣었다. 1870년 보불전쟁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아직 포병의 주력은 이런 전장식 청동포였다.​ ​800mm 포탄히틀러의 독특한 무기 취향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포인 구스타프 열차포를 탄생시켰다. 50m 길이의 철도차량에 35m 포신을 얹은구스타프는 무게가 1,350톤에 달해 복선 철로가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원래 프랑스의마지노선을 공격하기 위해 개발되었지만 프랑스가 너무 쉽게 항복하는 바람에 쓸 기회가 없었다. 1호는 구스타프, 2호는 도라로 불렸는데,도라는 실제 전투에 투입되지 못한 채 파괴되었다. 800mm 구경의 구스타프용 고폭탄은 포탄무게만도 4.8톤에 달했으며 러시아 세바스토플을 공격할 때 그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1942년 크림반도에 배치된 구스타프가 발사한고폭탄은 세바스토플 시내에 떨어져 무려 높이350m에 이르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만들어냈다. 한편 철갑탄은 천연암반 27m를 관통해 요새의 지하 탄약고를 박살냄으로써 요새 함락에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유즈29 (소련, 1978)소련의 유인 우주선 최초 발사에 충격을 받은미국이 달착륙 성공으로 응수하자 소련 역시 달착륙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하지만 N-1 로켓 개발 실패로 타이밍을 놓친 소련은 대신 우주정거장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1971년 살류트 1호를시작으로 우주인들이 장시간 우주에 머물며 다양한 연구에 사용했다. 1978년 8월 26일 동독군대령 지그문트 옌은 소유즈 31호를 타고 살류트6호에 도착, 8일간 우주에 머물렀다가 소유즈29호를 타고 지구로 귀환했다. 독일인으로서는 최초의 우주여행이었다.​​ 레프레센탄트 퍼레이드카 (동독)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에 의해 관리되던 호르히 공장에서 개발된 P240은 6기통 엔진을 얹은 고급차로 1958년까지 생산되었다. 당시에는 작센링이라는 브랜드명을 사용했는데, 인근의 서킷이었던 작센링에서 따온 것이다.이 공장에서는 1957년부터 동구권을 대표하는 대중차 트라반트가 만들어져 1991년까지 370만 대나 생산되었고현재는 폭스바겐에 인수되어 아우디 공장이 되었다. 이 차는 P240의 지붕을 잘라낸 퍼레이드 전용차로 동독 국가인민군을 위해 제작되었다. 보디는 VEB 카로세리베르케 드레스덴에서 담당했다. 동독 시절 국경일이나 군사퍼레이드 등에 사용되었다.​ AWO 425 T 모터사이클 (동독, 1952)​​전쟁 당시 무기나 차를 생산했던 기업 몇 군데가 소련 점령 하에서 아브토벨로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동독 튀링겐 주 쥘에서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1948년에는 단기통 12마력 4스트로크 엔진을 얹은 모터사이클AWO 425를 선보였는데, 모델명의 4는 4스트로크, 뒤의 25는 250cc의 배기량을 의미했다. 최고시속 100km에 L당 33.3km를 달릴 수 있었던 이 모델은 외모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BMW R23의 데드카피였지만 출력을살짝 높인 고출력형 425S나 배기량을 350cc로 키운 레이싱 버전도 만들어졌다. 생산대수는 약 21만 대.​​​​Mod 56 105mm 산악포 (이탈리아, 1956)​머신건이나 함포 등 비교적 대구경 화포에 능통한 이탈리아의 오토멜라라는 그 역사가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범기업으로 종전 후 트랙터나 직조기계를 제조하던 오토멜라라는 금새 본업인 병기 제조에 복귀해 현재는 핀메카니카의 방위 부문에 흡수된 상태. 1956년 선보인 이 곡사포는 이탈리아의 산악지대를 위해개발한 산악포로 1.29톤의 비교적 가벼운 무게를 자랑한다. 게다가 간단하게 분해조립이 가능해 자동차나 노새, 헬리콥터로 공수가 가능했다. 성능과 기동력이 뛰어나 이탈리아는 물론 영국과 캐나다, 독일, 포르투갈, 뉴질랜드 등 많은 나라에서 사용되었다.​​​바르카스 앰뷸런스 (동독)​​냉전 시절을 소재로 한 스파이 영화에서 한번쯤 보았음직한 이 원박스 밴은 동독 바르카스에서 생산한 B1000. 동독 지역 캠니츠(당시 명칭은 칼-막스-슈타트)에 있던 바르카스는 원래 덴마크인 외르겐 라스무센이 작센 주에 설립했던 프라모를 국영화한 것으로그 이름은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성에서 따왔다. 1969년부터 91년까지 이곳에서 생산된 B1000은 DKW의 3기통 2스트로크 엔진을 얹고 밴과 트럭, 미니버스 등 다양한 베리에이션이 있었다. 17만 대 이상 생산된 공산권의 대표 밴으로 우편배달과 소방차, 구급차, 경찰차, 앰뷸런스 등에 사용되었으며통일 후에도 연방군 소속으로 제한적인 용도에 활용되었다.​​ 유니버설 캐리어 (영국, 1950년대)전쟁이 꼭 크고 화려하고 강력한 무기들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유니버설 캐리어는제2차 세계대전 내내 무려 11만3,000대가 생산된 베스트셀러이자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기갑차량으로 연합군의 사랑을 받았다. 작은 상자형 차체에 캐터필러를 붙인 단순한 형태는 오스틴 미니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절약의 극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보병 기동력에 필요성을 절감한 영국이 개발에 들어갔지만 채용되지 못하다가 2차대전 직후 대량으로 생산을 시작했다. 다양한 버전에 비커스 중기관총, 브렌 경기관총,보이즈 대전차 라이플 등을 달았는데, 브렌 경기관총을 기본으로 한 까닭에 ‘브렌건 캐리어’라 불리기도 했다. 종전 후 1956년, 서독이 300대의 T-16 유니버설 캐리어(포드 캐나다가 생산한 미국형)를 구입했고, 동독은 전쟁 당시 연합국이었던 소련에 랜드리스 형식으로 제공되었던 것을 공여받음으로써 동독과 서독이 동시에 사용했다.   호르히 830BL 컨버터블 (독일 제국, 1938)제2차 세계대전의 개전 초기인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순식간에 항복하자 샤를 드골은 영국으로 망명해 자유 프랑스를 조직했다. 그런데당시 프랑스군의 주력은 사실상의 괴뢰정부인비시 프랑스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드골과 자유 프랑스의 영향력은 아직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파리 해방을 주도하면서 급격하게 입지를 키운 드골은 전쟁이 끝난 후 1958년 프랑스의 제5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 호르히 830BL 컨버터블은 파리를점령했던 디에트리치 폰 콜티츠 중장(히틀러의파리 파괴 명령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의 차고에서 압수한 것으로, 드골이 2차대전 말부터 대통령 초기인 1959년까지 사용했다. 호르히는 벤츠에서 독립한 아우구스트 호르히에 의해 1898년 설립되어 1920년대 8기통의 대형 고급차를생산하다가 1932년 아우토우니온에 통합, 오늘날 아우디의 뿌리가 된 메이커다.  트루펜파라드 25 대전차 자전거 (독일, 1925)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1945년, 물자와 연료까지 바닥이 난 독일군부에서는 연합군의 탱크에 대항하기 위해 이런 무기까지 만들기에 이른다. 바로 자전거 앞에 판처파우스트 60M 2기를 매단 대전차 결전병기다. 육상전의 황제라는 전차에 병사가 60m안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판처파우스트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고 강력한 대전차무기였다.긴 막대 부분에 넣은 추진제에 따라 30m, 60m, 100m 버전이있었으며 성형작약탄두는 무려 85%의 격파율을 자랑했다.   HK-101 반궤도 모터사이클 (독일, 1942)군용차 중에는 타이어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구동륜만무한궤도 방식으로 바꾼 이른바 반궤도 차량이 있다. 구조가 비교적 단순하고 값싸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개중에는 모터사이클 뒷부분에 캐터필러를 단 괴이한 물건도 있었다. Sd Kfz2 케텐크라프트라드 HK101이 그 주인공. 로터리 엔진으로 유명한 NSU가 독일 군부의 지시를 받아 1939년 개발을 시작해 공수부대나 항공기 견인용으로 활용되었다. 캐터필러의 안정적인 트랙션 덕분에 진창이 많았던 동부전선에서도 연락용이나 통신선 설치, 병력수송 등에 애용되었다.   골리앗 V 원격조종 지뢰 (독일, 1944)1차대전 때 등장한 최초의 전차 마크Ⅰ의 축소모형처럼 보이는 이것은 독일에서 1944년 등장했던 원격조종 지뢰다. 폭약을 싣고 고정목표물이나 군용차를 공격하는 데 사용된 이 유선 원격조종 무기는사실 프랑스의 아돌프 케그레스에 의해 고안된 것이었다. 프랑스 침공 때 강 속에 숨겼던 설계도를 독일이 입수해 개발을 진행시켰고,모터와 엔진 두 가지 동력원으로 만들어졌다. 전동식은 60kg, 엔진식은 75kg과 100kg 등 세 가지 버전이 있었다. 주로 공병부대에서사용했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유타 해변(영화 ‘마이웨이’의 무대가 되었던 곳)에서 여러 대의 골리앗이 투입된 기록이 있다.​ ​AGM-88 함 대레이더 미사일 (2006)​​​월남전 당시 월맹군의 대공미사일(S-75)에 크게 놀란 미국은 적의 레이더를 전문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었다. 이미 개발이 완료된 슈라이크 외에 스탠더드라는 신형 미사일을 개발한 미국은 베트남 방공망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들의 후계 기종인 AGM-88 함(HARM)은 레이시온에서 개발해 1985년 배치를 시작했다. 다양한 레이더 주파수를 추적할 수있을 뿐 아니라 마하2의 빠른 속도로 레이더 기지가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전작들의 문제점을 개량한 덕분에 걸프전 당시 이라크의 방공망을 ‘탈탈 털어버린’ 일등공신이 되었다. 코소보 전쟁 때 NATO 일원으로 참전했던 독일은 구형의 타입B를사용해 세르비아의 방공망을 무력화시켰다.​ *글 사진 이수진 편집위원​​
PROPLE 박광현 2016-09-07
​연기자, 골퍼, 자동차 마니아의 3색 조화​​데뷔 20년이 넘은연기자이자 수준급 실력을자랑하는 골퍼이고 연예인레이서로도 활약했던자동차 마니아 박광현.얼마 전 종영한 TV 드라마‘최고의 연인’에서 한때짝사랑했던 이혼녀에게일편단심 순애보를선보이며 시청자들의사랑과 지지를 받았던 그는자동차에 대한 해박한지식으로 XTM ‘더 벙커7’의MC를 맡아 프로그램을이끌어가고 있다.​​​​  ​배우 박광현을 처음 봤을 때 30대 초반인 줄 알았다. 동안 비결을 물었더니 단박에 “없다”는 대답이나온다. 연기 활동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관리만 받는다고. “제가 진짜 싫어하는 게 머리 염색하고 지지고 볶는 거예요. 얼굴 마사지도 싫고요.”​인위적으로 꾸미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솔직 담백함이 그가 꾸준하게 배우 생활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그가 연기를 시작한 때는 1997년이다. 처음 그를 30대 초반으로 봤을 때 얼추 계산해보니 연기 경력이 10년 정도려니 했는데, 실제 나이를 알고 난 후 따져보니 벌써 20년째 연기 생활을 하고 있는 베테랑이다.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연예 병사로 활동했으니 공백기도 없는 셈이다.“변화무쌍한 방송계에서 2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드라마를 찍었어요. 한 직업을 20년 동안 이어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가장 최근에 출연한 작품은 MBC에서 방영한 ‘최고의 연인’.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통상적인 일일 드라마다.“우연히 짝사랑했던 여자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이혼을 하고, 아이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건 따지지도 않고 오로지 그 여자만 사랑하는 역할이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찾기 힘든 사람이죠. 벌써 이런 역할만 세 번째라 어렵지는 않았어요.”​​​순발력의 원동력은 ‘온 에어 증후군’20년이면 강산이 두 번은 변했을, 꽤 오랜 시간이다. 어느새 중견(?)의 위치에 접어들었으니, 연기자로서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해 감회도 크고 고민도 깊을 법하다.“나이대에 맞는 연기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동안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을 만큼 어려 보이는 얼굴이라 실제 나이보다 한참 적은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앞으로는 나이에 맞는 연기를 하고 싶습니다. 악역도 해보고 싶고요.”​이제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 그야말로 자신만의 캐릭터가 살아 있어야 할 때다. 박광현 하면“이런 배우다!”라고 단번에 특정지을 수 있는 특색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연기할 때 순발력이 좀 뛰어난 편이에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느낌을 상황에 맞게 살리려고 미리 준비하지만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나오는 게 더 많아요. 제 스스로는 이를 ‘온 에어 증후군’이라고 부르죠(웃음).”​​​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대사를 애드립이라고 하는데 박광현은 “애드립은 웃기려고 하는 게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표현이 애드립의 본질이라는 게 그의 주장.“대본에 적힌 대사대로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봐요. 재료는 같지만 그것을 어떻게 순발력 있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확 달라지거든요. 어떤 배우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설정으로 가면서 훌륭한 연기를 펼치기도 하지만, 저는 설정보다는 장면에 대한 느낌이나 상대방과의 호흡 등을 파악해서 제가 생각한 것과다르게 돌아가더라도 순발력 있게 대응합니다.”​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20년 후, 그러니까 지금까지 연기를 할 줄은 몰랐다는 박광현. 그 사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많이 겪었을 게 분명하다.“군대를 갔다 온 후 환경이 바뀌어서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전에는 방송국 자체 제작 위주여서 방송국 라인 하나만 잡으면 출연에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군대를 갔다 오니 한류 열풍이 불었죠. 동료 연기자들은 자연스럽게 한류 덕을 봤지만 저는 군대 때문에 그러지 못했어요. 외국에서 한류 스타로 떠올라야 드라마에 캐스팅됐거든요. 그러나 힘들어도 견디니까 이런 저런 작품이 많이 들어오더군요. 지금은무조건 한류 스타만 찾는 분위기가 수그러들어서 기회가 더많아졌습니다.”​연기자라고 해서 평생 연기만 하면서 사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대부분 미래를 위해 다른 일을 준비한다. 박광현은 앞길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20년 후에도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제 20년했으니 앞으로 20년은 더 해야죠. 저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연기자들은 돈벌이에 연연하지 않고 편하게 연기하는 게 로망이에요. 생계 수단으로 스트레스 받으면서 연기하고 싶지는 않거든요.”​경제적인 문제는 다른 일을 통해 해결한 뒤 연기를 편하게 즐기면서 하고 싶다는 박광현. 물론 아직 연기 이외에 확실한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다른 생계 수단’ 얘기가 나오니박광현의 골프 실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골프는 그가 말하는 다른 생계 수단은 아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제2의 길로 삼아도 될 정도로 수준급 실력이다.“제가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에요. 아버지를 따라서골프장에 놀러 갔는데 처음에 스윙한 게 헛스윙이었어요. 오기가 발동해서 그날로 골프채를 사서 골프를시작했습니다.”​​​​연기생활을 하면서 골프까지 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 여러 가지 에피소드도 많았을 듯하다.“드라마 촬영장에 골프채를 가지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연습하러 다녔습니다. 오후 촬영이면 새벽에 골프장에 갔다가 촬영하러 갔고요. 선수들만 간다는 전지훈련도 두 달 동안 참가했습니다. 그때 실력이 많이늘었어요. 작년에는 대학에서 골프 수업을 맡기도 했죠. 치는 것도 좋지만 가르치는 일도 재미있어요.”​대학에서 골프 강의도 하고 매체에 골프 관련 기고도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골퍼 박광현에게 초보자들을 위한 원 포인트 레슨을 요청했다.“골프를 치는 사람들 중 스윙 자세에 신경 쓰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스윙 자세는 선수들에게나 해당되는얘기입니다. 아마추어는 스윙을 가다듬을 시간이 없거든요. 따라서 처음 시작할 때 스윙과 퍼팅을 병행해서 열심히 하면 스코어를 많이 올릴 수 있을 거예요.”​한때 연예인 레이서로도 활동해 박광현은 자동차에도 관심이 많아 한때 연예인 레이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요즘은 자동차 관련 프로그램 ‘더벙커7’ 진행을 맡아 활력을 더하고 있다.“연예인들로 구성된 레이싱팀 알스타즈에서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어요. 그때 같이 하던 친구들이 지금은 프로 대회도 나가고 단장도 맡고 있죠. 1년 반 정도 활동했었는데 왠지 레이싱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었어요. 당시 골프에 완전히 미쳐 있었거든요.100% 동적이기만 한 레이싱과 달리 정적인 부분과 동적인 부분이 어우러진 골프에 더 관심이 끌려 결국 레이싱은 포기하고 말았죠.”​지금은 시들해졌지만 한때는 튜닝에도 관심이 많았다(그리워서 가지고 다니는 사진이 있다며 전화기에 보관된 오래된 사진을 직접 보여준다. 차에대한 관심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튜닝을 엄청나게한 차다).“예전에는 튜닝을 즐겼어요. 2003년쯤 타고 다녔던차인데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납니다. 요즘에는 양산차들이 워낙 잘 나와서 딱히 차에 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지만 튜닝에 대한 관심은 여전합니다.”​레이서 경험도 있고 튜닝에도 조예가 깊은 박광현은 국내 판매 중인 타이어는 거의 다 써봤을 만큼 타이어에 대해서도 관심이 남다르다.“노면에서 소음이 올라오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소음이 적은 타이어 위주로 선택합니다. 대체로 수입타이어는 부드럽고 국산타이어는 딱딱한 느낌이 강한 편이지요. 지난 겨울에는 스노타이어를 끼웠는데 겨울철 노면을 찐득하게 밟고 지나는 느낌이 좋더라고요. 소음이 적고 승차감이 좋아서 4월까지 끼우고 다녔습니다. 아내는 안전을 위해 런플랫 타이어를 달았고요.”​마음에 드는 연기자가 있으면 그에게 푹 빠져들게 된다. 그가 출연한 드라마나 영화도 찾아보면서 그를 열렬히 지지하는 팬이 된다. 만약 어떤 드라마를 봐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 드라마에서 보아왔고 좋은 연기를 선보여온 박광현 이름 세 글자를 찾으면 후회 없는 선택이 될 듯하다.​   *글 자동차생활 
TRAVEL: 속리산국립공원 법주사 & 문장대 2016-08-30
​속리산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에 만난 ‘정이품송’은 예전 그림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노쇠한 모습이었다. 1,600여 년이나 된 사찰 법주사는세계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 청동미륵불상과 팔상전 등 많은 보물과 유물을 간직하고 있었고, 문장대로 향하는 길은 만만하게 생각했던것과 달리 고되고 힘들 정도로 가팔랐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자 사방으로 펼쳐진 기암괴석들의 멋진 모습에 절로 탄성이 일었다.​​올해 여름은 더워도 너무 덥고, 한낮의 태양은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폭염주의보와 경보를 발령했다는 뉴스를 앵무새처럼 틀어댔고, 화면 속의 한반도 지도는 아궁이에 장작을 끊임없이 집어넣으며 불을 지펴 설설 끓는 아랫목 같았다. 맞서는 것보다는 피하는것이 상책이라는 듯 도시가 그렇게 비워지고 있을 즈음 허물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없는 오랜 벗이 “휴가는 갈 거야? 가면 어디로 가는데?”라며은연중 동행을 청했다. 이에 “글쎄, 최근 몇 년 동안은 휴가다운 휴가를가보지 못한 것 같아서 올해도 비슷하지 않을까?”라며 말을 흐렸다. 그나마 기자는 매달 여행을 떠나고 그것을 <자동차생활>에 연재하고 있다는 데 위안을 삼으면서……​​​속리산 자락에서 하룻밤을 보내다그럼에도 휴가라는 단어의 여운은 남아 희미한 기억 속의 ‘속리산’을 떠올리자 ‘화양계곡’과 ‘법주사’가 따라나섰다. 속리산은 산 타기를 좋아할 무렵부터 ‘가고 싶은 곳’ 중 하나였지만 쉽게 연이 닿지 않았다. 정상(문장대와 천왕봉)을 밟은 이들이 입을 모아 ‘괜찮은 곳’이라고 추천했음에도 ‘그곳은 교통이 불편한 오지’라는 선입견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꽤 오래전 속리산 자락에 눌러 앉은 충북 보은군을 찾았을 때 시간이 아주 더디게 흘렀고 몹시도 지루했었던 기억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하지만 그 사이모든 것은 달라져 있었다. 내비게이션을 통해 확인한 서울과 속리산과의거리가 채 200km가 되지 않았고, 시간도 2시간 30분이면 보은군청 앞에다다를 수 있었다. 그곳에서 20여 분이면 속리산국립공원에 닿으니 머뭇거리거나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마음이 일자 서둘러 길 떠날 채비로 바빠졌다. 속리산으로 향하는 길은 쭉쭉 뻗어 있었고, 휴가철의 고속도로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의외로 한산했다. 해가 제법 남아 있을 때 도착한 보은읍내는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했지만 길이 넓어지고 도시는 확대되어 있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에 산으로 가자”는 제안에모처럼 동행을 한 아내와 아들이 “그럼 숙소를 정하고 빨리 저녁을 먹자”며 거든다. ​급하게 떠나온 길이어서 숙소를 예약하지 못했지만 특별한 일 아니면 당일의 상황에 따라 숙소를 잡는 습관이 배어 있기에 읍내를 둘러본다. 웬만한 도시의 편의시설을 다 갖췄음에도 읍내는 하룻밤을 묵어갈 잠자리를 보여주지 않았다. 검색을 통해 “여기 어때?”라고 묻자 “어, 조금 아까지나쳐 온 곳인데”라며 길을 일러준다. 값을 치르고 열쇠를 건네받은 후 들어간 룸은 아담하고 깨끗했다. 세면도구 등은 비닐 팩을 통해 제공되었고, 미니 냉장고는 생수와 음료수로 채워져 있었다.​대충 짐을 풀고 거리로 나서자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이 발길을 이끈다.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보은군에서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여는 야단법석야시장이다. 흥겨운 트로트와 감성적인 발라드가 묘한 조화를 이룬 가운데 입맛을 돋우는 음식들과 한 잔의술을 곁들이다며보니 한여름 뙤약볕에 맥을 못 추던 더위도 기세를 꺾는듯했다.​​​​법주사 경내에는 국보급 보물이 가득다음날 속리산국립공원으로 길을 잡자 20여 분이 채 되지 않아 도로 옆의 ‘정이품송’이 여행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이품송은 수령을 600년으로 추정하는데 높이가 15m에 이르고 동서남북으로 뻗은 가지가 차이는 있지만 각각 10m에 이른다. 조선의 7대 임금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가지에 걸릴까 염려해 “연(輦)걸린다”고 하자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어가(御駕)를 무사히 통과하게 했다. 이에 세조는 이 소나무에 정2품(지금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나무는 예전의 그림을 통해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세월의 흐름을 비껴나지 못했는지 아니면 또 바뀌어 갈 미래를 위한 환골탈태를 진행하는 건지……. 노송의 모습에서 오늘과 내일이 또 다를 것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본다.​​속리산국립공원으로 가는 중에 만나는 정이품송​​​그곳에서 5분여를 더 달리니 법주사와 인연을 맺은 상가들이 이른 아침부터 손님맞이에 바쁜 모습이다. 이곳에는 법주사를 찾는 신도들이나 여행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상가거리가 거창하게 형성되어 있다. 길에는 말린각종 나물과 집에서 손수 기른 채소들을 가져와 손질하고 있는 아낙들의 난전이 손님을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다.​​​이른 시간임에도 아낙들은 여행객들에게 팔 물건을 다듬고 있었다.​​속계와 진계를 뚜렷하게 갈라내준다는 일주문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경계가 불투명했다. 최인호 선생은 ‘길 없는 길’에서 일주문이란 문아래 이르기까지 세속의 파도가 밀려와 출렁거린다 해도, 이제부터 세속을 떠나이 문을 들어설 때부터는 오직 일심(一心)에 귀의한다는 뜻으로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만 세워 짓는다고 했다.​​​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만나는 숲의 길​​일주문을 지나자 나무와 나무가 엮어내는 숲의 터널이 서서히 한여름의 기온으로 달궈지고 있는 머리 위와 발아래의 기운을 붙든다. 그럼에도 꾸준히 상승한 대기온도의 여파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방울방울 맺힌 이슬들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온 몸 곳곳에서 흘러내릴 곳을 찾기에 여념이 없다. 작은 바람에도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의 춤사위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덥긴 하지만 대도시에서와는 차원이 다른 상쾌함이 밀려온다.​일주문에서 20여 분을 더 걸어가야 모습을 드러내는 법주사는 유서가 깊다. 553년(진흥왕 14년)에 의신 스님이 창건한 후 776년(혜공왕 12년)에 진표 율사가 중창했다. 절 이름은 의신 스님이 서역에서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절은 진표 율사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 되면서 한창때는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렸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불타버린 것을 1605년(선조 38년)부터 1626년(인조 4년)에 걸쳐 사명대사가 팔상전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경내로 들어서면 세계 최대의 크기(높이 33m)를 자랑하는 청동미륵불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진표 율사가 7년간의 노력 끝에 조성해 1,000년이 넘도록 법주사를 지켜왔던 미륵불상은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당백전(동전)의 재료로 쓰기 위해 훼손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 시멘트로 불상을 만들었으나 균열이 생기자 국비와 시주를 통해 청동 160톤, 주석 16톤,아연 3톤으로 1990년 시멘트 미륵대불을 그대로 탁본을 떠 지금의 불상을완성했다.​​​법주사 청동미륵불상은 높이가 33m에 달한다​​법주사에는 이 밖에도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과 팔상전(국보 제55호), 석연지(국보 제64호) 등 3점의 국보와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법주괘불탱화(보물 제1259호) 등 10여 점의 보물을 비롯해 수십여 점의 문화재를 품고 있다. 때문에 수행자나 신도가 아니더라도 법주사가 품고 있는 웅장하고 멋있으며 운치 있는 불교 유적 앞에서 누구나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문장대에 올라서 세상을 내려다보다속리산의 정상인 천왕봉과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문장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세심정은 둘 사이를 가르는 갈림길이다.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천왕봉이고, 왼쪽으로는 문장대를 향한다. 7시간이나 걸린다는 천왕봉 대신 문장대로 발걸음을 옮기자 울창한 숲이 펼쳐지고, 길을 따라 청량한 계곡이 이어졌다.​​​문장대로 오르는 길에 만난 계곡​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걸음을 떼다보니 용바위골 휴게소가 비 내리듯 흐르는 땀을 식혀가라고 의자를 내어준다. 침샘을 가득 자극하는 해물파전과 서늘하다 못해 입안을 그대로 얼어붙게 할 것 같은 탁주 한 사발에 축 늘어졌던몸의 세포들이 다시 기지개를 켠다.​​​용바위골 휴게소에서 파전과 탁주 한 잔을 들이키며 잠시 쉬어가는 건 어떨까?​​산은 빈틈이 없었다. 만만하게 생각했던 길이 이토록 고되고 힘들까 싶었지만 가파른 길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고개를들어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막바지에 이른 듯 점점 열리는 하늘은너무도 맑고 또 뜨거웠다. 문장대를 200여m 앞둔 평지의 나무 그늘아래엔아침부터 산에 올랐을 사람들이 가쁜 숨을 죽이고 있었다.산 정상에 자리를 잡은 넓은 바위 봉우리인 문장대(대라는 것은 경지 좋은곳에 자리한 너른 바위라는 뜻)는 오르내리기 편하게 철제 계단이 놓여 있었다. 한여름의 볕을 고스란히 맞으며 문장대에 오르자 사방으로 기암괴석들의 멋진 모습이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탄성이 절로 인다. 사람들이 그토록이곳을 오르려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리라.​최인호 선생의 소설 ‘길 없는 길’로 소개된 경허 스님의 시 구절이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산도 절도 푸르고, 물도 절로 푸른데 맑은 바람 떨치고 흰구름만 돌아가네.”​​​ * 글, 사진 김태종       여행과 함께한 차, 푸조 508 GT508 GT는 2.0L 블루HDi 디젤 엔진을 얹어 최고출력 180마력, 최대토크 40.8kg·m의 성능을 내는 푸조의 플래그십 세단이다. GT라는 배지에 걸맞게 GT 시그니처, 강렬한 레드 스티치, 트윈 머플러 등 스타일링 포인트로 스포티한 감성을 살렸다. 프리미엄 세단의 감성과 GT의 강렬한 퍼포먼스가 조화를 이룬, 그러면서 도 복합 13.2km/L(도심 12.5, 고속 14.2)의 좋은 연비를 내는 실속 모델이다. 길이×너비×높이는 4,830 × 1,830 × 1,455mm 이며 휠베이스는 2,815mm. 508 라인업에는 같은 2.0L 디젤 엔진에 GT 스타일링 포인트가 빠진 펠린이 있으며, 보다 경제적인 1.6L 120마력 디젤 엔진을 얹은 얼루어와 1.6 모델에 출력 보강 없이 GT스타일링을 더한 GT 라인도 있다. 어느 모델이든 값이 4,000만원대로 실속과 품위를 동시에 누릴 수 있다. 보다 개성적인 차를 원한다면 왜건인 508 SW나 차고를 높인 크로스오버 모델인 RXH를 선택하면 된다. SW 는 1.6L 120마력 디젤 엔진을, RXH는 2.0L 180마력 디젤 엔진을 얹는다. 값은 508 1.6 4,340만원, 2.0 4,740 만원, 1.6 GT 라인 4,540만원, 2.0 GT 4,990만원이며, SW는 4,390만/4,590만원, RXH는 5,390만원이다. 
차이나 스토리 [ 홍콩 ] 2016-08-18
​     홍콩은 한때 제조업 분야에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로 일컬어졌다. 특히 금융 분야에서는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중국의 개혁 이후에도 한동안 중국과 서방의 무역을 중계하면서 막대한 부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일국양제를 유지하고는 있으나 부동산을 비롯한 사회·경제의 모든 분야가 중국에 예속되면서 이젠 홍콩인이란자부심을 접고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침사추이 커피숍에서 제임스를 만나는 날 홍콩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지난해 홍콩에서 민주화 시위가 한창일 때 홍콩의 번화가 몽콕에서 우연찮게 만났던 제임스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고 연락이 왔다. 경제는 엉망이고 행정은 중국에의해 조종되는 홍콩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의 말대로 한때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했던 홍콩의 입지가 최근들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홍콩인들은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홍콩인으로 남고 싶지만 중국이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다. 이제 홍콩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 사실이 홍콩인들을 혼돈스럽고 또 더욱 깊은 좌절감에 빠져들게 한다.​광저우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썬전역에 내리면 바로 홍콩과의 국경이다. 이곳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다리를 하나 건너면 홍콩이다. 홍콩은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되어 이젠 중국 땅이지만 50년 동안 자치를 인정하기로 해 현재 일국양제로 운영되고 있다. ​​​​   한땐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원래 중국 땅이었던 홍콩의 역사를 살피려면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전쟁이라는 아편전쟁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부터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발생한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다. 인도의 벵갈 지역에서 아편을 대량으로 재배해 청나라에 수출하는 방식이었다. 한번 맛들이면 끊기 어려운 중독성 때문에 한때 중국은 아편 중독자가 5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아편이 삽시간에 확산되었다. 커다란 수입원을 보장받았던 영국 입장에서 아편은 절대 손을떼기 어려운 사업이었다.​아편 폐해의 심각성을 인식한 중국은 1792년 아편 금지령을 선포한 후 여러 차례 아편 수입 단속에 나섰다. 하지만 부패한 관리들로 인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급기야 광동지역 관리로 임명된린저쉬(임칙서)가 아편을 몰수해 불태우면서 영국 상인들과 마찰을 빚자 영국 정부가 텐진과 닝보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세계 최고였던영국 군의 화력에 밀린 청나라는 1842년 막대한배상금과 함께 홍콩을 영국에 넘긴다는 난징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영국의 통치를 거치면서 홍콩은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에 점령당하기도 했지만 해방 이후 제조업 분야에서 한국,대만과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을 펼치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금융은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홍콩은 한동안 중국의 정보를 서방에 전달하는 소식통역할도 했다. 중국은 철저한 언론 통제를 통해 죽의 장막 안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일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했다. 다만 유일하게 일부 소식이 암암리에 전해지는 통로가 있었으니 바로 홍콩을 통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중국인들은 홍콩에가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거나 로후천을 가로질러 자유의 땅인 홍콩으로 향했다.​​​​​ ​​덩샤오핑이 최고 자리에 앉은 이후에도 홍콩은 성장을 계속했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의 후유증으로 중국 국민들이 배를 곯는 상황에서도 홍콩은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세계의 모든 경제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홍콩의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들으라면 덩샤오핑과 리자청이 첫 손에 꼽힌다. 덩샤오핑은 대약진 운동의 후유증으로 2,000만 명 이상의 인민이 굶어 죽는 것을 목격하고 시장 경제의 필요성을 인식, 197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개방정책을 제시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를 채택하는이율배반적인 정책을 펴는 도박을 감행했으니 가히 그를 작은 거인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데 그의 뒤에는 리자청이 있었다. 덩샤오핑은 홍콩의 최고 갑부 리자청에게 중국 개방의 조타수 역할을 요청했고, 그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썬전과 산토우에 경제 특구를 만들었다. 산토우는 리자청의 고향이다.​중국의 개방정책에 힘입어 최고의 경제적 특혜를 누린 홍콩은 중국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서방의 어느 누구도 중국을 직접 방문하기 어려울 때 홍콩인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최대한 활용해 중국과의 교역을 늘려 나갔다. 개방정책 이후1990년대 중반까지 이런 특혜를 누리면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중국은 홍콩을 통해서’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으니……. 필자가 처음 중국과 거래를 한 것도 홍콩의 무역회사를 통해서였다. ​당시에는 중국 공장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이들이 홍콩 사람들밖에 없었다. 중국인들과 설사 말이 통한다 해도 직접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중국의 문화와 산업구조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있었던 것. 오로지 홍콩 사람들만이 중국인들과 대화를 통해 거래 조건을 성사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중국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돈을 번 홍콩인들은 주말이면 중국으로 넘어와 돈을 흥청망청 쓰고 다니면서 자신들이 중국에서 차지한 우월적 지위를 최대한 즐겼다. 중국인들은 그런 홍콩인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경제적인 차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지금은 중국에 좌우되고 있는 상황그러나 2000년대가 되면서 중국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냈던 홍콩 무역회사들의 수입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비싼 중계 수수료를 물어가며 홍콩 회사들과 거래를 했던 서방의거래처들이 직접 중국과의 교역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홍콩과 거래했던 유럽과미국의 많은 거래처들이 중국 공장들과 직접 거래하기 시작했고, 중국 업체들도 각종 무역 전시회를 통해 자신들의 역량을 알려 나갔다. 중국에대한 장막이 걷히면서 홍콩의 도움 없이도 거래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알다시피 홍콩은 중국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한때 세계 최대 항구로 이름을 날렸었다. 하지만 중국이 썬전항을 만들면서 직접 수출을 시작하자 홍콩을 통해 선적을 하던 엄청난 물동량이 홍콩으로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굳이 비싼 운송료를내고 홍콩까지 운반해 수출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상하이와 썬전의 주식 시장이 개장되자 홍콩으로 들어오던 자본마저 끊겼다. 막대한 중국의 자본이 홍콩보다는 썬전이나 상하이 증시에 투입되면서 홍콩이 누리던 아시아 금융 시장에서의 독점적인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홍콩의 고급 주택가. 중국인들이 홍콩 부동산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이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부동산 시장의 지각변동이다. 20여 년 전만 해도 홍콩인들은 중국의 부동산을 매입하는 데 열을 올렸었다. 썬전을 비롯하여 산토우와 동관, 광동성 일대가 주된 먹잇감이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오늘날은 상황이 반전되었다. 중국인들이 그동안 축적한 두툼한 지갑을 들고 홍콩의 부동산에 손을대기 시작한 것이다. 상권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홍콩인들은 임대료를 부담하기도 어려운상황. 얼마 전에 161평짜리 아파트가 891억원에팔렸다는 뉴스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평당 5억원이 넘는 셈이니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홍콩은 예외다. 홍콩에서는 부동산 증여세와 상속세가부과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중국 부호들이 너도나도 홍콩의 부동산 구입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홍콩에서는 부동산증여세와 상속세가 부과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중국 부호들이 너도나도 홍콩의 부동산구입에 나서고있는 것이다​​​홍콩의 서민주택들. 주택난이 가중되면서 작은 아파트를 여러 개로 쪼개어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홍콩은 도시국가라는 특성상 주거면적이 제한적이다. 많은 인구가 좁은 지역에 살다보니 부동산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홍콩에서는 임대주택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해왔으며, 그 비율이30%가 넘는다. 그런데 중국인들의 부동산 투기열풍이 임대주택 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임대주택보다는 당장 돈이 되는 아파트와 일반주택 분야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주택자금을 마련하기 어려운 홍콩의 서민들이다. 전에는 그나마 임대주택이라는 안전장치가 있었지만 부동산 투기로 공급이 끊기면서 외곽에서 다시 외곽으로 밀려나가는 추세다.​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요즘 홍콩에는 벌집 형태의 아파트가 유행이다. 예전에 한 가구가 살던 13평 아파트를 쪼개고 쪼개서 네 가구가 사는 공간으로 개조한 형태다. 물론 홍콩 정부에서도 할 말은 있다. 홍콩인들이 주택을 살 경우 취득세가 3%인 데 비해 중국인에게는 21%를 부과함으로써 홍콩의 재정부담을 줄이는 데 이만 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홍콩인들은 부동산뿐만 아니라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과 홍콩의 국경에는 아침마다 홍콩으로 등교하는 학생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아침에 홍콩에 있는 학교와 유치원에 갔다가 오후에는 중국으로 돌아오는 학생들이 수없이 많다. 홍콩의 많은학교와 유치원을 중국 학생들이 차지하는 바람에 정작 홍콩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실정이다. ​​홍콩과 중국의 국경은 아침마다 홍콩 유치원으로 가는 중국 유치원들로 붐빈다​​​홍콩에 가정부로 취업해 있는 필리핀 여성들 휴일이면 공원에 나와 친구들을 만난다​​ 또한 국경에는 홍콩 식품들을 주로 운반하는 보따리상들이 진을 치고 있다. 중국에서 멜라민 분유나 불량식품 문제가발생하면 홍콩의 식료품은 거덜이 난다. 상황이 이러하니 홍콩인들의 중국인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될 수밖에. 시위 밑바탕에는 경제 문제도 있어 홍콩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무시해왔던 중국인들이 홍콩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며 주인 행세를 하는 모습에 분노를 표시해왔다. 하지만 이제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지난해 정치적인 문제로 야기된 홍콩의 민주화 시위는 사실 경제적인 측면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홍콩의 지도자인 홍콩 행정장관은 800명의 선거인단에 의해 간접선거로 선출된다. 그런데 홍콩 시민들은 선거인단이 친 중국 성향의 인물로 구성되었다며 중국 지도부에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하지만 홍콩인들의 시위행태는 목숨을걸 만큼 절실하지 못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사례로 들면서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했지만 죽기 살기로 민주화를 쟁취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목소리가오래도록 힘을 쓰지 못한 이유는 이를 반대하는홍콩인들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시위가 지속되면서 관광객들이 감소하고 상점마다 매출이 급감하자 시위를 반대하는 또 다른 시위가 일어났던 것. 같이 힘을 모아 정부에 대항해도 부족한 판에 시위를 반대하는 무리의 등장은 한껏 달아오른 반정부 시위의 열기에 찬물을 뿌리는격이었다.​​​​지난해 홍콩 민주화 시위 때읜 모습. 정치 민주화를 내세웠지만 사실 경제적인 측면이 바탕에 깔려있다​​​​민주화 시위를 반대하는 시위대의 모습  앞서도 말했지만 홍콩인들이 홍콩의 민주화를외치며 반정부 시위에 나선 배경에는 그동안 홍콩이 누려왔던 각종 특혜가 없어진 것에 대한 강한 불만이 배어 있다. 경제는 점점 어려워지는데다 그동안 홍콩인들이 누리던 각종 혜택을 중국인들이 빼앗아가는 현상이 홍콩인들의 감정을자극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앞으로도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전망에 있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어려운 국면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해 홍콩의 경제성장률은 2.6%였으나 올해는 1.6%로 예상되고 있다. ​홍콩은 이제 중국의 경제에 완전히 예속되었다. 중국 관광객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다. 싫지만 이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홍콩인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홍콩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은 중국인이 아니라 홍콩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으나 이제는 좋든 싫든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곳에는 이미 인민해방군이 진주해 있다. 홍콩인들은 침체돼 있는 지금의 홍콩을예전의 활기차고 역동적인 곳으로 되돌려 놓고싶지만 자신들만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의 미래는 홍콩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국 정부의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왼쪽이 중국. 오른쪽이 홍콩이다​글,사진 양인환(중국 통신원)​​양인환 중국통신원- 1957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나 91년까지 금융권에서 일하다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 자동차와 함께 하는 삶에 새롭게 도전했다. 91년 국산 자동차로 미국 48개 주를 일주해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92년 아시아 록스타로 호주를 일주했다. 93년 호주 웨스턴 랠리스쿨을 이수한 뒤 호주 웨스턴 랠리 침피언십, 홍콩-북경 랠리(94년), 태국랠리(94년) 등에서 전문 드라이버로 활동했다. 93년부터 96년까지 본지의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참가한 랠리를 비롯해 세계의 다양한 자동차 경주와 시승기를 소개했다. 저서로 ‘대머리 돈키호테’, ‘차를 알고 문화를 세우는 여유로운 운전’이 있다. 2002년부터 중국 저장성 이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양인환 통신원은 앞으로 중국을 비롯한 북미, 남미, 아시아, 유럽 등의 재미있는 여행기를 소개할 계획이다. 머지않아 미국과 호주에 이어 중국과 남미대륙을 일주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늘 지나쳤던 그곳의 재발견-목포 2016-08-04
  기자에게 있어 목포는 일을 할 때는 지나치는 경유지였고,쉴 때는 남도의 섬들을 찾아가는 길목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작정하고 목포 여행에 나섰다. 그 곳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고,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볼거리를 보여주었다. 낮보다 밤이 아름답다는 목포.그러나 밤 기행은 훗날을 기약한 채 이른 아침 이곳을 거닐었다.    ‘보라, 좋은 것은 가까이 있다. 네가 보려고만 한다면…….’ 제대로 기억의 한 페이지를 끄집어낼 순 없지만, 기자가 목포를 처음 찾은 것은 아마도 2008년 즈음의일이다. 당시 전라남도는 세계 모터스포츠의 최고봉인 F1 그랑프리를 유치한 후 2010년 첫 개최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각계의 의견을 구하고 있었다. 모터스포츠를 담당하고 있던 기자 또한 전라남도 관계자의 초청으로 난생 처음 목포를 찾았다.​전라남도 도청은 당시 광주광역시에서 목포와 맞댄전남 무안군 남악면으로 막 이전해 주변 조성이 한창이었다. 자가용이 아닌 대중교통(고속버스나 기차)을 이용하면 목포역이나 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나 시내버스를 타야 하는데, 기자 역시 터미널에 도착한후 택시로 도청을 찾았다. 관계자들과의 만남이 끝나자 몇 차례 서울에서 얼굴을 익혀 허물없이 지내던 한 직원이 “괜찮다면 저녁을 함께 하면서 더 많은 조언을 듣고자 한다”며 식사를 청했다. 이미 시간은 그들의 퇴근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애초 당일 미팅을 끝낸 후 곧바로 서울로돌아갈 예정이었지만 “지금 올라가면 자정이 다 되어 피곤할 것 같으니 목포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나쁘지 않을 것 같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그렇게 둘은 도청에서 택시를 타고 목포시 하당동 근처로 갔다. 직원이 안내한 곳은 홀에 테이블이 4개 정도밖에 없는 조그마한 실비집이었다. 제철에 맞는 회를 아주 적당량만 줘 남기는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에 이어 민어와 병어 등이 상을 채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를 그다지 즐기지 않았지만 그곳의 분위기와 맛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언제 한번 다시 찾으리라 다짐하며 F1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유지 또는 길목이었던 목포그 뒤로 F1 그랑프리가 개최되기 이전까지 서너 차례목포를 방문하면서 가끔 그때의 맛과 분위기를 그리워했지만 발걸음은 쉽게 닿지 않았다. 언제나 숙소는목포 시내에서 상대적으로 깔끔한 평화광장 주변에 잡았고, 대부분의 식사나 만남도 그곳에서 해결했다. 2010년 F1 그랑프리가 전남 영암의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에서 개최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금요일부터 개최되는 일정보다 하루 먼저 내려갔지만 그때는 강진과 장흥, 진도와 해남, 보성, 그리고 더 멀리 있는 순천의 볼거리에 더 관심이 갔다. 그렇게 여러 해에 걸쳐 수십 차례나 목포를 찾았지만 기자에게 목포는 단지 인근 목적지로 향하는 경유지이거나 전라남도의 섬들을 찾아가는 길목일 뿐이었다.​그러다 지난 7월의 어느 날, 취재를 위해 목포를 찾았을 때 문득 쳇바퀴 돌듯 이곳을 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광장 주변의 숙소에서 선잠 깨듯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치고 신발 끈을 조인 후 문을 열었다. 밖은 옅은 안개가 살랑거리고 있었고, 영산강하구원의 바다를 접한 산책로에는 이른 시간임에도사람들이 하나 둘 스치듯 지나갔다. 자그마한 어선들을 품은 바다는 고요했고, 동쪽 하늘에서는 콩알보다도 작은 해가 기지개를 켜며 안개를 뚫고 은은하게모습을 드러냈다. 바다와 해, 돛대를 세운 배, 그리고갈매기가 캔버스를 수놓고 있는 모습은 화폭의 한 장면에 다름 아니었다. 이곳이 내가 늘 오갔던 바로 그목포였던가?​​​​숨을 고르듯 그렇게 멍하니 세상이 그려낸 작품 하나를 가슴에 들여놓고 발길을 떼다보니 유람선 선착장이 눈에 들어온다. 유람선에서는 목포 해안의 야간 절경을 1시간 가량 감상할 수 있다는데 지금은 이른 오전이라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아쉬움을 가득 안고바닷물의 높낮이에 따라 높이가 조절되는 해상보행교에 올라서자 목포가 자랑하는 갓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이 나란히 삿갓을 쓰고 서 있는 형태인데 예전에는 배를 타고 나가야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정처 없는 발걸음은 이제 목포자연사박물관과 목포생활도자박물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이어진다. 어른 3,000원의 입장료를 받는 자연사박물관은7개의 전시실에 45억 년의 자연사 자료를 전시하고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세계에서 단 2점뿐이라는 공룡화석 프레노케랍토스와 전남 신안군 압해도에서발굴해 복원한 세계적인 규모의 육식공룡알 둥지 화석이 전시되어 있다. 공룡에 관심이 많은 아이와 함께 가면 좋을 듯. 자연사박물관 입장권으로 문예역사관과 생활도자박물관도 함께 관람할 수 있어 부담도적다.​​ ​​​​​목포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는데…무언가에 홀리듯 한참을 걷다 문득 돌아갈 길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진다. 걷는 것은 이쯤에서 멈추고이제는 차에 몸을 실을 차례. 숙소로 돌아가 주섬주섬 짐들을 가방에 챙긴 후 시동을 걸었다. 목포 관광안내지도는 한 청년을 사모한 세 여인이 죽어서 학이되었고, 그 학이 떨어져 죽은 자리가 섬이 되었다는삼학도로 이끈다. 여름밤에는 옛 선창의 향수가 가득한 해상파시를 재현하고, 다양한 체험행사를 통해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하는 곳이지만 이른 오전이라 조용하고 한산했다.​이곳에서 붕장어(일명 아나고) 낚시를 하는 박규선할아버지(82세, 목포시 만호동)를 만났다. 새벽 4시에 나왔는데 오전 7시가 넘은 지금까지 씨알이 굵지않은 4마리밖에 잡지 못했다면서도 환한 웃음을 짓는다. 진도에서 태어난 박 할아버지는 72년 목포로나와 45년 동안 목선을 만들었다며, 지금은 플라스틱 배에 밀려 옛날 모습을 재현하는 수준에 그치는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의 먼 뒤편으로 목포 여객선터미널이 잡힐 듯 눈에 들어왔다.​​ ​​다시 목포의 명물 유달산으로 향했다. 가는 길 왼쪽으로 하얀 부챗살을 펼친 것도 같고 학의 날개를 닮은 듯도 한, 목포의 북항과 고하도를 연결하는 목포대교가보이고 그 아래로 고속정이 물보라를 튀기며 지나간다. 해발 228m에 불과한 유달산을 차로 오르는 것은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다. 더딘 걸음으로 산으로 들어가고 나오면서 둘러보는 게 제 맛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레길에 있는 조각공원과 목포근대역사관에 관심이 있다면 차를 이용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흔히 목포는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이번에는 새벽에 불현듯 출발했지만 다음에는 해질녘부터시작해 목포의 밤에 제대로 취해볼 생각이다. 늘 머무르면서도 그냥 지나치곤 했던 목포. 그 곳을 재발견한기쁨이 뿌듯하게 다가온다.​  여행과 함께한 차, 쌍용 코란도 C 삼바에디션  서울에서 목포까지 함께한 차는 쌍용 코란도 C 삼바에디션(Samba Edition)이다. 쌍용차가 정열적인 삼바스타일로 익스테리어를 다듬으면서 상품성을 개선한 모델로, 지난 7월 5일부터 판매를 시작했다. 코란도 C 삼바에디션은 우선 겉모습에서 일반 모델과 차이가 난다. 삼바 컬러를 활용한 전용 데칼을 붙이고 수출용 윙로고 엠블럼과 스피닝 휠캡, 휠라이너 등으로 시원하고 발랄한 느낌을 더했다. 아울러 LED 도어 스카프, 테일게이트LED 램프, 센터페시아 휴대폰 무선충전기를 새로 마련하는 한편 7인치 3D 내비게이션을 포함한 인피니티 프리이머 사운드 시스템을 기본 장착해 편의성도 높였다. 갤럭시그린(Galaxy Green)을 비롯한 새로운 익스테리어 컬러도 추가했으며, 그동안 선호도가 높았던 스마트키와 운전석 통풍시트를 기본으로 갖췄다. 옵션으로 적재 활용성을 크게 높여주는 루프박스 & 스포츠 유틸리티바 패키지를 선택할 수 있으며, 현재 이 패키지를 선택하면 고급 백팩을 주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값은 2,748만원이며 9월 말까지 3개월 동안 한정 판매된다.코란도 C 외에 코란도 스포츠와 티볼리 등 3개 모델에 삼바에디션을 내놓고 있는 쌍용차는 삼바에디션 출시를기념해 8월 31일까지 다양한 온·오프라인 이벤트를 펼친다. 온라인에서는 쌍용차 홈페이지를 방문해 이벤트에 응모한 고객들 중 추첨을 통해 영화관람권(300명), 커피교환권(500명)을 준다. 또한 오프라인 쌍용차 매장을 방문해 삼바에디션 구매 견적을 낸 고객들에게는 티볼리 송풍구 방향제 등 소정의 사은품을 증정하고, 추첨을 통해 브라질 자유여행권(5명), LG 트롬스타일러(10명), 콜맨 캠핑패키지(15명), 다이슨 진공청소기(20명) 등푸짐한 경품을 제공할 예정이다(당첨자 발표는 9월 8일).       *글,사진 김태종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증도 2016-07-24
​​느려서 더 행복하다고? 그 말 믿어도 될까?​​증도는 2012년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 에서 2위를 차지한 데 이어지난해에도 다시 선정되는 등 국내를 대표하는 생태 관광지다.  다리에 걸린 석양이 갯벌을 무대삼아 춤추듯그려내는 한 폭의 동양화를 상상하며 이곳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하늘은 비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  보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국내를 대표하는 생태 관광지,  증도다.  1,004개나 된다는전남 신안군의 섬 중 하나지만 지금은 인근 사옥도와다리가 연결되어 있어 배를 타지 않아도 되는 섬 아닌섬이다.  ‘슬로시티’(Slowcity)라는 이름으로 방송과 언론을 통해,  그리고 다녀온 이들의  “한 번은 꼭 가보아야 할 곳” 이라는 말들이 그리움을 키웠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  문득  “그래,  증도?” 라는 생각이 일었다.  서울에서 증도까지는 빠르게 내달아도5시간은 걸리지만 일체의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북무안 톨게이트’ 를 빠져나와 24번 국도로 접어드니 황토밭에는 양파를 수확하는 농부들의 손길이바쁘다(무안은 양파산지로 유명하다).  길옆에는 빨간자루에 담긴 양파가 곧이어 올 트럭을 기다리고 있고, 곳곳에 걸려 있는  “마늘과 양파 작업을 하는 차량들에게 양보해 주세요” 라는 큼지막한 현수막이 눈길을끌었다.     관광안내소 직원에게 여행지 추천받아그렇게 50여 분을 바다와 들이 만나고 가끔은 크게촌락을 이룬 곳을 지나 몇 개의 다리를 건너니 ‘증도대교’ 가 떡하니 버티고 섰다.  증도는 2012년 한국관광공사 선정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  2위에 이름을 올린 후 지난해에도 다시 선정되는등 국내를 대표하는 생태 관광지로 꼽힌다.​     이 다리를 건너기만 하면 그토록 고대하던 속살과 마주한다.  첫 사랑의 여인을 다시 만나는 기분이랄까? 곧장 들어가기는 뭔가 두고 온 것 같아 어지러움이 인다.  차를 한쪽에 세우고 바다를 건너온 바람을 맞으며증도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보니  ‘느려서 더 행복한 섬슬로시티 증도’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하늘 계단을 오르는 설렘으로 다리를 건너자 증도 관광안내소가 기자를 맞이한다.  ‘안내서’ 를 집어 들고는직원에게  “처음 오는데다가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않다” 며 둘러볼 곳에 대한 추천을 부탁했다.  그러자그는  “증도에서 숙박을 하고 가실 건가요?  아니면 돌아가실 계획인가요?”  하고 되묻는다. “아,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겁니다” 라고 멋쩍게 답을 하자  “그러면 ‘장뚱어 다리’ 를 건너면서 갯벌의 매력을 느껴본 뒤 보물섬 위쪽 전망대에서 석양을 보고 가세요. 석양이 정말끝내줍니다”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장뚱어? 그러고 보니 도중에 만나는 식당들은 하나같이 ‘장뚱어탕’ 이라는 메뉴를 내걸고 있다.  서남해안 갯벌에서 주로 서식하는 짱뚱어는 소고기보다 단백질 함량이 많고 미네랄이 풍부하며 고소하고 담백해 지역민들에게 보양식으로 사랑받는 음식이다.  지난해 7월 말에는 증도 우전해변에서 ‘제1회 짱뚱어 축제’ 를 열기도 했다.​​   갯벌을 가로질러 난 장뚱어 다리는 장뚱어와 우전해변으로 닿아 있다.  해변은 아직은 때가 이른 듯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지만 볏짚을 엮어 올린 파라솔이 이국적인 정취를 풍긴다.  주말을 맞아 해송 숲에 조성된‘오토캠핑장’을 찾은 가족들이 저녁식사 준비로 분주한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그들의 여유가 부러움으로다가오자 돌려야 하는 발길이 더욱 무겁다.  현재라는아주 귀한 선물을 포장도 뜯어보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내일에 맡기려고 하니 그럴 수밖에.​    다리에 걸린 석양이 갯벌을 무대삼아 춤추듯 그려내는 한 폭의 동양화를 오늘은 내어주지 않을 심산인 듯하늘은 비구름을 머금었다.  “차를 한 잔 마시면서 기다릴까? 아니면 해가 지기 전에 섬을 더 둘러볼까?” 운전석에 앉으니 가벼운 차림의 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길을 나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이향하는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증도의 낙조 감상은 뒷날을 기약하며…액셀 페달에 발을 얹고 무심히 달리니 자그마한 섬을다리로 연결한 산 위에 정박해 있는 배가 눈에 들어온다.  1975년 한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가 걸려 올라온것을 발굴한 보물선인데,  1층은 쉼터와 카페로,  2층은유물전시관으로 꾸며 일반인들에게 1,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보물선 다리를 건너는 바로 위는 낙조전망대가 서해바다를 지긋하게 내려 보고 있다.  안내소 직원이 극찬할 만큼 명품 낙조를 자랑하는 곳이지만 날씨가 허락하지 않아 그저 덤덤하기만 하다.  첫 만남이기에 자신이 갖고 있는 속마음을 다 보여주지 않으려는 걸까? 볼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국내 최대 규모(462만㎡)의 태평염전에서는 소금박물관을 비롯해 소금밭 갯벌 길 걷기,  소금밭 체험(천일염 수포 포함),  염천창고 견학,  소금밭 습지 견학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있다.  그리고 지친 하루를 쉬어가려면 증도 곳곳에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는 펜션과 민박집의 문을 두드리면 된다.   홀로 여행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얽매임에서 한껏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그러면서도 또 이렇게 홀로인 날에는 함께 했으면 좋았을 사람이 그립다. 그것이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여행과 함께한 차, 쉐보레 캡티바올해 3월에 출시된 2016년형 캡티바는 디자인을 다듬고 유로6 대응 2.0L디젤 엔진과 6단 자동변속기를 장착하고 있다.  오펠이 공급하는 2.0L 디젤 엔진은 최고출력 170마력과 40.8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하며,  아이신 6단 자동변속기를 조합해 복합연비 11.8km/L를 낸다. 사각지대경고 시스템과 후측방경고 시스템 등 다양한 안전장비와 애플 카플레이를지원하는 마이링크를 담았다.  모든 모델에 기본 장착된 마이링크 시스템은 후방카메라 기능을 겸하며, 휴대폰 내비게이션 어플리케이션 브링고(BringGo)와 애플 카플레이 내비게이션을 동시에 지원한다. 또한 7인승 좌석을 전 트림에 옵션으로 적용해 실내거주성과 공간활용성을 높였으며, 시트를 손쉽게 접고 펼 수 있는 이지 테크(EZ-Tech)가 적용된 분할 시트 폴딩을 통해 최대 1,577L의 적재공간을 확보했다. 값은 2,809만~3,294만원.  TIP  증도를 여행하려면 관광안내소에 비치된 안내서를 한 장 꼭 챙기자.  안내하는곳으로 발길을 옮기다보면 어느새 섬 한바퀴를 돌고,  ‘느려서 행복한 섬’ 이라는말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안내서에는 낙지 초무침과 해풍건정, 장뚱어와 백합 요리 등 증도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도 소개되어 있다. 증도는 걷거나 자전거 여행을 하기에도 좋다.  ‘모실길’이라고 이름을 붙인42.7km의 길은 5개의 구간으로 나뉜다.이 길은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를 끼고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도로로 경사가완만하고 주변 경치가 빼어나다.  글, 사진 김태종 
탱고와 축구의 나라, 아르헨티나 2016-06-09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밤하늘에는 어릴 때 보았던 은하수가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중국에서 13년 넘게 지내면서 파란 하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게 아르헨티나의 맑은 하늘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공해가 거의 없는 이곳이 천국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르헨티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 곳 중 하나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나오는 대척점 근처에 있는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다. 그래서 가는 길도 멀다. 정확히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서 도착하는 곳이니만큼 직항편도 없다. 이번에는 터키 이스탄불과 브라질 상파울루를 경유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가는 터키항공을 이용했다. 비행시간만 30시간이 걸리고 경유지에서 대기하는 시간까지 따지면 편도에 34시간이 넘게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비행기를 타는 동안 다섯 번의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국회 의사당 백인이 95% 이상인 남미 국가아르헨티나는 1580년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다. 알다시피 스페인은 나폴레옹에게 패하기 이전까지 무적이었다. 이런 힘을 무기로 브라질을 제외한 남미의 모든 지역을 장악했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하면서 스페인의 철권통치가 남미 지역에서도 힘을 잃었다. 그동안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느끼던 점령지의 수장들이 이 틈을 이용하여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을 선언하면서 여러 나라로 분리되었다. 아르헨티나 역시 이 시기에 산 마르틴 장군(1778~1850년)에 의해 1816년 독립을 선언했다.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까지 세계 10대 강국에 들 정도로 대단한 부를 지닌 나라였다. 한반도의 12.5배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지만 현재 인구는 4,000여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백인이 주를 이루며(95% 이상)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에서 온 이민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언어는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92%가 가톨릭 신자이다. 인구의 약 90%가 도시에 거주하는데 전체 인구의 30% 이상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고 있다. 20세기 영화를 아직도 기억하는 아르헨티나인들은 자신들은 남미가 아니라 유럽에 속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아르헨티나는 다른 남미 국가와 달리 인구의 95% 이상이 백인이다 넓고 비옥한 땅 때문에 아직도 1차산업의 비중이 높은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국토의 40% 이상이 목장과 방목지일 정도로 목축업이 발달했으며 10%의 농지에서는 밀, 보리, 옥수수, 귀리 등을 생산한다. 아르헨티나의 농업 경쟁력은 세계에서 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강하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농산물을 수출하려면 수출세를 내야 한다. 그것도 35%로 세율이 무척 높다. 이번에 새로 선출된 대통령이 수출세를 없애 수출 경쟁력을 더욱 높이겠다고 공약했으니 아르헨티나의 농•축산물은 세계 시장에서 더욱 지배력을 높여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어쨌든 지금까지 이런 고율의 수출세를 부담하고도 다른 나라보다 싼 가격에 수출을 할 수 있으니 엄청난 경쟁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수출을 할 경우 원자재 구입에 부담했던 관세나 부가가치세를 돌려주는 게 보통이다. 그렇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수출할 때 세금을 환급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출세를 내야 하니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마도 정부의 주요한 재정수입이 농•축산물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출세에 대한 비중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마차가 다녔던 길을 지금은 차가 달린다. 이미 140년 전에 길이 50cm의 돌을 부에노스아이레스 전체 도로에 깔았다 정치 불안과 경제정책의 실패아르헨티나는 서쪽은 안데스산맥을, 동으로는 대서양을 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거대한 나라다. 그래서 동시에 사계절이 존재하는 희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북부에는 사막과 정글이 형성되어 있고 남쪽은 빙하지대가 펼쳐진 장관을 볼 수 있다. 얼마 전에 아르헨티나의 거대한 빙하가 무너져 내렸다는 뉴스를 보았다. 아르헨티나 최남단 오수하야에서는 몇 년마다 빙하가 내려앉는 장관을 연출하는 곳으로 명성이 높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넓은 농토를 가진 나라이지만 계속적인 정치 불안과 경제정책 실패로 남미의 선진국 꿈은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화를 이루었지만 계속되는 쿠데타로 칠레와 함께 오랜 기간 군사 독재정권에 의해 통치를 받는 쓰라린 경험을 겪었다. 안데스 산맥을 마주하고 있는 칠레의 칠레노트 정권의 폭압정치도 다른 나라의 질타를 받았지만 아르헨티나 역시 군사정권 시절 많은 민주인사들이 감옥에 투옥되고 고문과 사형을 당한 것으로 악명 높다. 1976년 비델라 장군이 집권할 당시 약 3만 명에 이르는 학생과 반정부 인사들이 죽음을 당했다. 지금도 이를 기념하는 ‘5월의 탑’ 앞에는 당시 희생자와 실종자들을 위한 기도회가 계속되고 있다. 워낙 쿠데타가 자주 발생해서 제대로 임기를 끝낸 대통령을 손으로 꼽을 정도로 불안한 정치상황은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버스전용차로는 전임 대통령이 한국에서 따온 제도다 넓은 국토와 비옥한 농지를 가지고 있지만 1차산업의 비중이 높고 경제정책의 실패가 이어지면서 국민들의 삶은 그다지 풍요롭지 못하다. 한때 세계 최초로 냉동선과 볼펜을 만들 정도로 산업화를 이루는가 싶었지만 공업화가 뒤처져 대부분의 중화학 제품은 수입을 하는 상황이다. 1989년 달러와 페소를 1:1로 하는 태환경제를 도입하고 물가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전기, 철도, 항공 등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등 경제의 대수술을 단행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한때 인플레이션이 5,000%에 달해 지폐로 도배를 한다고 할 정도로 불안정한 경제를 유지해왔고, 불과 지난해에도 디폴트를 선언할지 모른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달러당 페소의 교환율이 15:1에 달하니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어느 정도로 어설프게 운영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하철. 이미 100여 년 전에 지하철이 건설됐다 필자는 아르헨티나를 가기 전까지 이곳이 대단한 부자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1인당 GDP가 1만4,000달러밖에 안 되고 전기와 철도 등 공공부분이 대단히 취약하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실제로 아르헨티나의 심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길을 막고 시위를 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잘 사는 나라라고 생각했던 아르헨티나의 수도에서 섭씨 40도에 가까운 더운 날씨에 그것도 한 달 가까이 전기가 안 들어오는 상황을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페론 스토리아르헨티나의 정치를 이야기하려면 1940년대 중반 대통령을 역임한 후안 페론의 부인인 에바 페론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와 뮤지컬, 오페라로 유명한 ‘에비타’는 ‘꼬마 에바’라는 뜻이다. 시골 농부의 딸로 태어나 일국의 정치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올랐던 에바 페론의 삶은 한 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하다. 에바 페론은 팜파스의 작은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입성한 후 삼류 연극배우를 거쳐 각고의 노력 끝에 영화배우, 유명한 성우로 성공한 그녀는 후안 페론 대령을 만나게 된다. 당시 정치에 대망의 꿈을 꾸고 있던 후안 페론의 두 번째 부인이 된 에바는 노동자의 처우개선과 임금인상, 여성의 지위개선 등의 내세우며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아르헨티나의 독립영웅 산 마르틴 장군의 묘가 있는 성당 그렇지만 그녀는 현실을 무시하고 펼친 무모한 복지정책으로 부강한 아르헨티나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비난도 동시에 받는다. 가난한 빈민촌을 방문한 에바 페론은 그 동네 사람들을 모두 새롭게 주택단지를 조성해 이주시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나라였을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나라의 재정은 거덜이 났다. 일이 없으면 정부에서 수당을 주니 열심히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전형적인 포퓰리즘으로 인해 남미의 유럽을 꿈꾸던 아르헨티나는 결국 실패한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화처럼 극적인 삶을 살았던 그녀는 백혈병과 암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에비타(에바 페론)의 묘비 에바 페론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극과 극이다. 또한 그녀의 삶은 죽어서도 평탄하지 못했으니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여자라고 할 수 있다. 쿠데타로 페론을 몰아낸 군사정부는 페론주의의 부활이 염려되어 에바 페론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빼돌린다. 또한 쿠데타로 쫓겨난 페론은 해외로 망명길을 떠난다. 그렇지만 불사신과도 같은 페론은 아르헨티나 정계에 복귀해 1973년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정말 영화 같은 사건이 아르헨티나의 근현대사를 장식하고 있다. 대통령이 된 에바 페론은 그녀의 시신을 아르헨티나로 옮겨와 레콜레타 가족 묘지에 안장시켰다. 덕분에 에바 페론의 묘소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한 번은 찾게 되는 명소가 되었다.에바 페론의 망령은 아직도 아르헨티나를 혼돈스럽게 만들고 있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나치의 잔당들이 최근까지 숨어 지내던 곳으로 유명하다. 평소 히틀러와 친하게 지냈던 페론이 독일의 패망 이후 나치의 추종자들이 아르헨티나에 머물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영향으로 히틀러가 죽지 않고 아르헨티나로 몰래 들어와서 여생을 평화롭게 살았다는 루머까지 나돌았다. 해외토픽에서 나치 잔당에 관한 소식이 들려오면 아르헨티나에서 나온 이야기가 많다. 아르헨티나에는 독일마을이 있다. 코르도바의 비샤 헤네랄 벨그라노(Villa General Belgrano)에는 독일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많이 거주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맥주는 아르헨티나에서 최고로 꼽히며 매년 10월에는 맥주축제가 벌어진다. 코르도바 에서 열리는 세계 3대 랠리(WRC)중 하나인 아르헨티나 랠리는 거칠고 험한 코스로 유명하다. 멘도사는 아르헨티나 포도주의 주산지이다. 아르헨티나의 포도주는 그동안 자국민의 소비가 워낙 높아서 해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럽의 포도주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지만 세계 명품의 포도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주원료로 쓰이는 말벡 포도는 유럽에서는 전염병으로 인해 멸종되었지만 아르헨티나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며 맛 좋고 품질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강렬한 원색으로 치장한 보카 지역 양철 집들의 모습 탱고의 발산지이자 축구강국탱고(Tango)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집시풍의 음악과 춤이다. 얼마 전에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아르헨티나를 방문해서 미녀 댄서와 탱고를 춘 것 때문에 한동안 시끄러웠었다. 탱게레(Tangere : 만질 수 있다)라는 말에서 기원하는 탱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Boca) 지역에서 탄생했다. 19세기 후반의 보카는 유럽에서 들어오는 배들이 짐을 하역하는 항구였다. 그곳에서 일하는 하층민들이 고달픈 삶을 음악과 춤으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탱고다. 보카 항구는 오래전에 북쪽으로 이전해서 지금은 물자를 나르던 노동자들이 없지만 이곳에는 아직도 가난한 이들이 많이 살고 있다. 보기에도 낡고 허름한 건물들에는 미국의 빈민촌처럼 온통 지저분한 낙서들로 가득 차 있다. 길거리에 세워진 차들은 너무 낡아서 제대로 굴러갈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탱고의 발상지에 지어진 집들은 벽과 지붕을 양철로 더덕더덕 붙여놓았다. 그렇지만 양철로 된 집들은 화려한 원색으로 칠해져 있어 마치 예술작품을 보는 듯하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조선소에서 쓰고 남은 페인트로 집을 칠하다보니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나 원색의 강렬한 조화로 인해 이곳의 양철 집들은 관광객들에게 아름다운 건출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양철로 지어진 탓에 보카의 뜨거운 여름을 견뎌 내려면 무척이나 힘들 것 같다.보카는 세계적인 축구팀 보카 주니어의 본거지다 보카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팀 보카 주니어가 있다. 영국 선원들이 건네준 축구공으로 마구잡이식 축구를 하던 보카 지역 사람들은 1905년 아르헨티나 최초의 축구팀을 만들었다. 이 팀이 아르헨티나 축구의 역사를 썼다는 보카 주니어다. 축구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고단한 삶의 애환을 풀 수 있는 돌파구였다. 이들의 결속력은 어느 지역보다 강해서 아르헨티나 최고의 팀이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축구 스타 마라도나가 이 팀에서 활약했고 현재는 한때 맨체스터에서 박지성과 함께 뛰었던 테베스가 소속되어 있다. 아르헨티나는 1978년과 1986년 월드컵에서 우승을 한 축구강국이다. 아르헨티나 보카 지역은 탱고의 발산지다 한인들, 의류 및 액세서리 시장 장악아르헨티나에는 3만여 명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다. 지금은 95% 이상이 의류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이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기 위해 간 이민자들이었다. 아르헨티나의 한국인 이민사는 50년이 넘는다. 1965년 대한민국 정부는 아르헨티나에 농업이민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현지에 840헥타르(8.4㎢)의 땅을 구입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은 아주 절박했다. 먹을 것도 없었고 일을 하려고 해도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이 없었다. 인구는 많고 식량사정도 좋지 않으니 외국으로 이민을 보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옷 시장인 아베자네이다. 한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상가다 그렇지만 아르헨티나 이민 초창기 농사를 짓던 부지런한 한국인들은 농사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의류 시장에 진출한다. 당시에는 의류업계를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무기로 의류 시장에 뛰어든 한국인들은 뛰어난 디자인 감각으로 아르헨티나의 옷 시장을 완전히 석권했다. 천하의 유태인을 몰아낸 한국인들의 저력이 대단하기만 하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계’라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자본조달 방식이 있다. ‘계’를 통해 자본을 만들고 이를 통해 사업을 키워감으로써 아르헨티나 의류 시장에서 입지를 키울 수 있었다.다보탑 모양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이 시기 크게 발전한 한국의 산업화 역시 한국인들이 의류업에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해외에 거주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원부자재를 한국에서 구입하면서 현지에서 의류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지금도 남미의 모든 나라에서 의류와 액세서리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한국인들이다. 물론 한국인 특유의 억척스러움과 열정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국인은 물건을 고르는 안목과 디자인 감각이 뛰어나 사농공상이라 하여 장사하는 것을 가장 천하게 여기던 우리 민족이 남미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을 보니 새삼스럽기까지 하다.아르헨티나에는 300여 개가 넘는 골프장이 있고 골퍼들의 평균 실력도 대단히 높다 한편,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골프 실력은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골퍼로는 US 오픈과 마스터스를 제패한 앙헬 카브레라(Angel Cabrera)와 올해 소니 오픈에서 우승한 파비앙 고메즈(Fabian Gomez)가 있다. 이들은 모두 캐디 출신으로 세계적인 골퍼가 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아르헨티나에는 300여 개가 넘는 골프장이 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차로 30여 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골프장도 수없이 많다. 게다가 골프장 사용료가 우리 돈으로 2만원 미만이니 누구나 부담 없이 골프를 즐길 수 있다. 말 그대로 골프의 천국이다. 이런 여건 때문에 아르헨티나에 사는 한국인들 중에는 골프광들이 많다.글 양인환 중국통신원1957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나 91년까지 금융권에서 일하다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 자동차와 함께 하는 삶에 새롭게 도전했다. 91년 국산 자동차로 미국 48개 주를 일주해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92년 아시아 록스타로 호주를 일주했다. 93년 호주 웨스턴 랠리스쿨을 이수한 뒤 호주 웨스턴 랠리 침피언십, 홍콩-북경 랠리(94년), 태국 랠리(94년) 등에서 전문 드라이버로 활동했다. 93년부터 96년까지 본지의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참가한 랠리를 비롯해 세계의 다양한 자동차 경주와 시승기를 소개했다. 저서로 ‘대머리 돈키호테’, ‘차를 알고 문화를 세우는 여유로운 운전’이 있다. 2002년부터 중국 저장성 이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양인환 통신원은 앞으로 중국을 비롯한 북미, 남미, 아시아, 유럽 등의 재미있는 여행기를 소개할 계획이다. 머지않아 미국과 호주에 이어 중국과 남미대륙을 일주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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