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밀양에서의 1박 2일 2017-05-04
하룻밤 뒤에 찾아온 치명적인 매력밀양에서의 1박 2일서울에서 4시간 30분이면 닿는 이 조그만 도시는 처음에는 너무나 평범해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에는 곳곳의 치명적인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재약산 기슭에 자리를 잡은 표충사에서는 불교와 유교가 한자리에 공존하고 있었고, 오래된 다리를 보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밀양강의 물안개를 살짝 머금은 영남루에서는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영남루에서 내려다 본 밀양​  바람이 출렁거리자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이제야 얼굴을 내민 꽃잎이 파르르 떤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은 헐벗은 모습에서 가벼운 초록의 차림으로 바뀌어간다. 거기에 물감을 풀어놓은 듯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진달래가 봄을 알리기 위해 고개를 드는 모습이 반갑기 그지없다.볕이 가득한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밀양(密陽)도 어느새 봄옷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들에는 유채가 노랗게 화사함을 뽐내고, 이에 화들짝 놀라듯 벚꽃이 앞을 다퉈 피었다. 바람은 간지러웠다. 서울에서 4시간 30분이면 닿는 이 조그만 도시는 너무나 평범해서 처음에는 매력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에는 곳곳에서 찾은 밀양의 치명적인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영남 알프스가 시작되는 곳밀양에서의 첫 추억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논산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마친 후 자대배치를 받기 위해 탄 열차는 긴장한 신병들을 싣고 위쪽으로 더디게만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에구, 이러다가 전방(그때나 지금이나 조금이라도 편할 것 같은 후방에서 군 생활을 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인 듯)에 배치받는 것은 아닐까? 아니 뭐 걱정이 사실로 바뀌고 있네”라며 거의 반포기를 하자 한숨이 절로 일었다. 먼저 군에 가서 전방에 있던 친구들의 모습도 오버랩됐다.몇 시간이 지났을까. 수십여 차례(그렇게 느낀 것이겠지만) 객차와 객차가 끊어지고 이어지는 ‘철커덩!’ 하는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앞으로 2년 넘게 보낼 곳이 이곳부터 시작인가?’ 하는 생각과 동시에 기적처럼 열차는 다시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위쪽으로 올라갈 때는 그렇게 더디었건만 이번에는 미끄러지듯 신이 났다. 기차에 오른 지 11시간쯤 되었을 무렵 열차에는 10여 명이 채 남아 있지 않았고, 호송병은 크게 인심을 쓰듯 “내려서 부모님께 전화를 하고, 사제음식으로 아침을 해결한 후 다시 탑승하라”고 했다.어찌 그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제는 희미해져서 빛이 바랜 추억의 그 장소가 바로 밀양의 삼랑진(역)이었다. 그리고 부모님과 통화를 마치고 그곳에서 먹은 한 끼의 식사가 바로 ‘돼지국밥’이었다. 사실 맛에 대한 기억은 없다. 허겁지겁 끼니를 때웠을 것이라는 생각 뿐. 그 이후 밀양을, 삼랑진을 찾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인연의 끈을 그렇게 떠올리다보니 어느새 밀양의 소문난 맛집 ‘우시장 돼지국밥’ 앞에 차가 멈춘다. 아마도 우시장이 근처에 있어서 지은 이름인 듯한데 소시장에서 돼지국밥을 판다는 게 재미있다. 반찬은 정결하고 국밥은 깔끔하면서도 맛이 깊었다. 이곳이 밀양의 맛집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비결은 바로 가마솥에 있다. 두꺼운 가마솥에 재료를 넣고 장작불로 은은하게 고아서 우려낸 맛이 일품이라고. 얇게 저며 낸 수육도 ‘찰지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쫀득했다.  밀양의 명물 우시장 돼지국밥과 수육우시장 돼지국밥은 가마솥에 재료를 넣고 장작불로 푹 고아낸다 든든하게 배를 채웠으니 이제 본격적인 여정을 위해 한걸음 더 내딛는다. 차에 오르자 밀양을 소개하는 문성남 해설사가 입담을 과시한다. 이웃 합천에서 밀양으로 시집을 와 20여 년을 넘게 살았다는 그녀는 ‘밀양’의 매력을 하나 둘 끄집어 내놓기 시작한다. 곧이어 그녀의 구성진 ‘밀양 아리랑’ 가락이 귓가를 떠돌고, 도도하게 흐르는 ‘밀양강’의 멋진 풍광에 탄성이 절로 인다.밀양 여행의 첫 목적지인 영남알프스 얼음골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헐벗은 나무들이 산등성이를 빼곡하게 수놓은 곳을 지날 때쯤 각종 농원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5월 초에야 꽃을 피우는 사과나무 과수원들이다. 문 해설사는 “얼음골 사과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 등지로 수출을 하고 백화점에 납품할 정도로 맛과 당도가 뛰어나다”며 “씨가 있는 부분에 꿀이 가득한 것이 특징”이라고 소개했다. 이곳에서 사과나무 과수원을 하는 농가가 1,000여 세대가 넘는다고. 케이블카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낳은 산물이다. ‘얼마나 더 편하게 자연으로 들어갈까, 그리고 자연과 호흡할까’라는 명제를 그대로 수용하듯 얼음골 케이블카는 순식간에 관광객들을 영남알프스가 한눈에 보이는 하늘정원에 내려놓는다. 국내 최장거리의 왕복식 케이블카로 선로 길이가 1.8km에 달하며 상부의 높이는 해발 1,020m다.  영남알프스 얼음골 케이블카케이블카로 정상에 오르면 영남알프스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변 산들과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녹산대에서는 왼쪽의 천왕산과 재약산 앞의 백호바위를 중심으로 한 백운산 등을 볼 수 있다. 백호바위의 웅장한 모습에 “아~” 하는 탄성이 곳곳에서 인다. 또한 하늘사랑길은 상부승강장에서 전망대까지 280m에 걸쳐 이어지는 데크로드로, 넓고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산들을 감상할 수 있어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다. 하지만 이날 하늘은 잿빛을 머금은 데다 간간히 빗방울을 뿌려대고 있어 원하던 풍경을 보진 못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누각 중 하나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것을 알아차린 듯 밀양시의 투어 담당 김영근 계장이 케이블카의 하부 승강장에서 5분여 거리에 있는 ‘시례호박소’로 안내한다. 원래의 투어 일정에는 없는 곳이었지만 불순한 날씨로 하늘정원에서의 시간이 단축되었기에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란다. 시례호박소로 가는 길은 제법 운치가 있다. 오른쪽으로는 백운산에서 발원한 계곡을 거느렸고, 왼쪽에는 백련사라는 조그만 절집에서 독경소리가 은은하게 퍼져 멋진 앙상블을 이룬다. 김 계장은 “여름이면 이 계곡 전체가 시꺼멓게 보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는다”며 “그만큼 물이 찬 것은 물론 경치도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자랑에 여념이 없다. 호박소는 주차장에서 5분여 거리에 있다. 백옥 같은 화강암이 수십만 년 동안 물에 씻겨 커다란 소(연못)를 이룬 곳인데, 모양이 마치 절구의 호박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문성남 해설사는 “호박소에 실을 넣으면 동해바다에서 나타날 정도로 깊이와 물길을 알 수 없다”고 그럴듯하게 전설 한 자락을 깔았다.  시례호박소로 가는 길에 있는 백련사 밀양 8경 중 하나인 시례호박소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는 가운데 도래재를 넘어 표충사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흔하디흔하던 사과나무 과수원은 자취를 감추었고 대추나무와 표고버섯 등을 재배하는 농장이 즐비하다. 밀양의 대추는 전국 생산량의 20%에 이르며 매년 10월 중순에 ‘밀양대추축제’가 열린다.  1,108m 재약산 기슭에 자리잡은 표충사는 유생들을 교육시키고 성현들을 제사지내는 표충서원이 있어 불교와 유교가 한자리에 공존하는,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사찰로 꼽힌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에 원효대사가 창건했고, 조선 헌종 5년(1839년)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서산과 사명, 기허대사를 모신 표충사당을 이곳에 모시면서 절 이름을 표충사로 했다고.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만일루 앞마당에 있는 보물 제467호 ‘삼층석탑’ 등 볼거리가 풍성하다. 여기서는 밀양 8경 중 하나인 ‘표충사 사계(3경)’와 사자평으로 이름을 얻고 있는 ‘재약산 억새(8경)’가 자랑이지만 사계 중 ‘이른 봄’을 만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재약산 기슭에 자리한 표충사표충사의 사천왕문표충사의 경내 모습  보물 467호로 지정된 표충사 3층석탑  ​표충사 범종루의 모습​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밀양과 이웃한 곳을 이어주는 5개의 다리가 있는 강변에서 일몰이 다가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는 기분이 묘하다. 불과 몇 해 전에 개통된 낙동대교와 삼랑진교, 그리고 이제는 역할을 다해 레저용으로 사용하는 구 낙동철교, 1905년 개통해 철교로 사용하다 지금은 승용차나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한 낙동인도교(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등장하는 다리와 비슷하다) 등을 한곳에서 만날 수 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일까? 해가 저문 듯 발밑에서부터 점점 먹빛이 짙어진다.   이젠 새로운 다리에 역할을 넘겨준 구 낙동철교​은근하게 비치는 스카프를 두른 것처럼 밀양강의 물안개를 살짝 머금은 영남루. 이곳의 야경은 과연 밀양이 ‘엄지 척’ 하고 으뜸으로 내세울 만하다. 그러나 빛을 그대로 담은 대낮이나 어둠이 깔린 야간이나 영남루는 언제나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경관이 빼어나다. 이곳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공을 넘나들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우리나라 최고의 누각 중 하나인 영남루 영남루의 야경을 머금은 밀양 아리랑비석 진주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꼽히는 영남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아 있노라니 옛사람들의 정취가 온몸으로 전해져온다. 선비들은 자신들이 쓴 시를 낭송하면서 그 기운에 취하고, 빼어난 문장에 넋을 놓고, 때론 농이 섞인 문장에서 한바탕 웃음꽃을 피우곤 했으리라. 때론 거문고를 튕기고 가야금을 타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이리저리 술잔을 돌렸을 터. 상상만으로도 시공간을 넘나드는 영남루의 매력에 빠져든다.  무봉사로 올라가는 길 무봉사에서 내려다 본 밀양의 전경​경내 북쪽에는 단군을 비롯한 나라를 세운 8왕조의 위패를 모셔놓은 천진궁이 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나오는 구조가 특이한데, 그 이유는 입구와 출구를 따로 두었기 때문이다. 영남루 아래 죽림에 자리해 아랑의 슬픈 얘기를 간직한 아랑사, 영남루와 밀양강이 어우러져 멋진 운치를 자랑하는 무봉사를 오가며 하루를 보내다보니 밀양에서의 1박 2일이 짧기만 하다. 글, 사진 김태종 (여행작가) 꽃이 만개한 삼문동 벚꽃터널  밀양한천밀양한천은 밀양의 대표적인 특산물인 한천(우뭇가사리 등을 고아 만든 식품)을 제조하는 회사로 이곳에서 운영하는 한천테마파크는 박물관과 각종 체험 프로그램, 레스토랑과 판매장, 한천송덕비공원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마련해놓았다.     박물관에서는 한천의 역사와 변천과정 등의 정보와 영상, 생산에 필요한 도구 등을 볼 수 있고 레스토랑에서는 한천을 활용한 비빔밥과 돈가스, 우동 등을 내놓는다. 판매장에 들러 다양한 물건도 구입할 수 있다. 한천을 이용한 젤리나 푸딩 만들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은 평일에는 사전 예약, 주말에는 현장접수를 통해 참여할 수 있다. 밀양한천 1577-6526    
시티투어버스로 즐긴 알찬 하루 - 부산 2017-04-06
시티투어버스로 즐긴 알찬 하루부 산부산역에서 출발하는 시티투어의 첫 차는 오전 9시 45분에 출발한다. 정차하는 곳만 14곳인 부산역-해운대를 운행하는 ‘레드라인’이다. 이 노선을 타면 오륙도가 종착지인 ‘그린라인’과 해운대-용궁사의 ‘블루라인’으로 환승할 수 있다.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1만5,000원이지만 당일 KTX 영수증이 있으면 2,000원을 할인해준다.   금련산청소년수련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광안대교 야경  살랑살랑하던 바람이, 나긋나긋하던 바람이 심통을 부리듯 어지러웠다. 사람들은 코트 깃을 다시 올려 세우고 어깨를 잔뜩 오그라뜨렸다. 계절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듯 세상은 차가운 침묵이었다. 봄의 문턱을 넘기가 그만큼 어려운 걸까. 바깥은 여전히 겨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고 꽃샘추위는 한겨울보다 더 매서웠다.귓불을 살살 어루만지는 봄바람이 그리워질 즈음 부산의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업계에서 알게 돼 20여 년의 시간 동안 정을 쌓아 이제는 호형호제 하는 사이. 약간의 취기가 묻어나며 “니, 요즘 어찌 지내는데?”라는 구수한 사투리에 “뭘, 그렇지. 근데 오랜만이네. 어쩐 일이야?”라고 답한다. “OO형이랑 있다 아이가. 둘이 술 한 잔 하다가 니 얘기하다 보니 목소리도 듣고 보고 싶기도 하고. 그건 그렇고 언제 올끼고?”라는 말이 묘한 끌림으로 다가왔다. 문득 부산과의 아련한 추억이 스쳐간다. 부산 인근에서의 군대생활이 부산병무청과도 연결되어 있어 군인일 때 처음으로 부산을 찾았던 것 같다. 제대를 한 이후에도 기분에 따라 밤 열차에 몸을 실어 태종대로, 자갈치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던 때가 몇 번이었던지. 따듯하게 속삭이는 바람을 부산에서는 서울보다 앞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았어, 형! 수일 내로 시간을 낼게. 술은 적당히 마시고 그만 들어가.”얼굴 보고 술 마시고, 그렇게 수다를 안주로 곁들인 후 이름도 기억할 수 없을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 귀경하는 일정이라면 너무 구태의연하다. 그를 만나고 부산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한 끝에 ‘부산시티투어코스’를 떠올렸다. 아침 일찍 서두르면 부산의 명소 대부분을 둘러볼 수 있는데다 야경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야경 투어버스 타고 부산의 밤 감상부산역에서 출발하는 시티투어의 첫 차는 오전 9시 45분에 출발한다. 이 시간에 맞추려면 새벽 6시 이전에 나서서 KTX를 타야 한다. 시간을 더 늦출 경우 투어는 ‘버스 타고 부산 한 바퀴’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오후에 도착해 야경을 보고 하룻밤을 잔 다음 ‘시티투어코스’로 마무리하는 건 어떨까? 이튿날 오후 6시 38분. KTX 부산행 열차는 종착지인 부산역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마치 처음 방문한 것처럼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 어둠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도시는 기분 좋은 설렘으로 다가온다. 야경 투어버스는 정류장에서 손님을 맞고 있었는데 이미 10여 명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무는 부산역 앞의 모습지붕을 연 2층버스를 타고 시티투어 코스 출발~  하루 한 번만 운행하는 이 버스는 저녁 7시에 부산역을 떠나 부산대교를 건너 영도로 들어선다. 안내방송을 통해 영도의 유래(절영도라고 불렸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영도로 바뀌었다)를 들려줘 귀가 쫑긋해진다. 영도에 들어선 지 채 5분이 지났을까. 버스는 어느새 부산시 남구와 연결되는 부산항대교로 올라선다. 총 연장 약 3.3km에 달하는 이 다리는 최대 상판의 높이가 60m나 되는데 부산항에 입출항하는 초대형 컨테이너선이나 크루즈선이 통과하기 위해 이렇게 높게 설계했다고 한다. 램프 길이가 짧은 영도구에서는 진입하기에 어려워 진입 램프를 나선형 구조로 설계,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라고.   부산항대교를 건너가는 모습​​ 부산의 부두와 밤거리를 거침없이 내달은 버스는 광안리해수욕장에서 멈춘다. 10여 분의 짧은 시간이지만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바다가 들려주는 소리, 그리고 한눈에 들어오는 광안대교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시티투어 버스는 다시 마린시티와 해운대해수욕장을 거쳐 광안대교를 지나 금련산청소년수련원의 전망대로 향한다. 오르는 길은 제법 거칠다. 도로의 폭이 좁고 오르막이어서 마주하는 차에 바짝 신경을 써야 한다. 이렇게 전망대에 닿으면 광안대교가 한눈에 들어오고 왼쪽으로는 마린시티의 웅장한 불빛이 부산의 밤을 황홀하게 밝히고 있다. ​​​광안리해수욕장의 풍경광안대교 너머로 마린시티가 보인다저 멀리 유람선 티파니호가 정박하고 있다​​티켓 하나로 3개 노선 모두 즐길 수 있어이튿날, 2층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부산역 시티투어 코스 정류장은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로 북적거렸다. 정차하는 곳만 14곳이나 되는 부산역-해운대를 운행하는 ‘레드라인’이다. 이 노선을 타면 오륙도가 종착지인 ‘그린라인’과 해운대-용궁사의 ‘블루라인’으로 환승할 수 있다.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1만5,000원이지만 당일 KTX 영수증이 있으면 2,000원을 할인해준다. ​​​​​시티투어 버스를 이용하는 외국인 지붕이 열린 2층에 자리를 잡자 전날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하늘은 열려 있고 온기를 조금 머금은 바람이 싫지 않을 정도로 얼굴에서 부서진다. 영도대교를 넘어 부산항대교를 타고 버스가 첫 번째 멈춘 곳은 UN기념공원. 목적지로 정하지 않았기에 그냥 지나쳤지만 이곳은 세계 유일의 UN군 묘지라고 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년 1월 전사자 매장을 위해 유엔군 사령부가 조성해 4월 완공했다고. 이후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의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기증했고, 1959년 11월 UN과의 협정에 따라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린라인’으로 환승하니 오륙도까지는 채 20분이 걸리지 않는다. 이곳의 명물은 스카이워크. 35m 해안절벽 위에 철제빔을 설치하고 그 위에 유리판 24개를 말발굽 모양으로 15m를 이어 놓았다. 바닥은 12mm 유리판 4장에 방탄필름을 붙여 특수 제작한 두께 55.49mm의 고하중 유리라지만 발아래 투명유리를 통해 파도가 절벽을 때리는 모습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다. 앞바다는 시시때때로 아름답고 다채로운 색상이 펼쳐진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대마도를 가까이 볼 수 있지만 오늘은 그쪽 하늘이 맑지 않은 모양이다.​​아찔한 스카이워크의 모습스카이워크에서 바라본 오륙도​​절벽 위에 아찔하게 서 있는 스카이워크​오륙도와 더 가까워지려 계단을 내려가자 바다와 바위가 만나는 곳에서 꾼들의 낚시가 한창이다. 해녀들이 인근 바다에서 건져 올린 전복과 해삼, 멍게들을 좌판에 깔기 시작하자 슬슬 사람이 모여든다. 신선한 해산물에 술 생각이 절로 일었지만 갈 길이 멀어 아쉬움을 남기며 다시 용호만으로 돌아왔다. ​​쌀쌀한 날씨에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금관해녀들이 좌판을 벌이는 것을 지켜보는 관광객들​​​20여 분 정도를 기다리자 ‘레드라인’의 2층버스가 들어온다. 환승할 수 있는 해운대해수욕장에서 해동용궁사 노선인 ‘블루라인’에 몸을 실어 달맞이 고개와 송정해수욕장을 그냥 통과했다. 다음에 올 차가 2대밖에 남지 않아 하차할 경우 해동용궁사를 둘러볼 시간이 너무 촉박할 것 같아서다. 1376년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대사가 창건한 이 절은 한국 3대 관음성지로 불린다. 바다와 용과 관음대불이 조화를 이루어 그 어느 곳보다 신앙의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곳이라 하여, 진심으로 기도를 하면 누구나 꼭 현몽을 받고 한 가지 소원을 이루는 영험한 곳으로 유명하다.​​해운대해수욕장의 모습. 날씨가 쌀쌀해 사람들이 별로 없다​​바다와 접한 해동용궁사해동용궁사 인근에 수산과학관이 있다수산과학관의 독도관 ​사하촌이 끝나는 곳에서는 동양철학의 육십갑자 십이지상이 봉안되어 있고 안전운행을 기원하는 교통안정기원탑이 눈길을 끈다. 춘원 이광수의 시비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라고 한 나웅화상의 시귀도 정겹다. 용문석굴을 지나 108돌계단을 내려가면 정렬된 석등군이 나오고, 이내 펼쳐지는 검푸른 넓은 바다가 용궁으로 들어가는 해탈에 이르는 길처럼 다가온다.부산시티투어 www.citytourbusan.com​​글, 사진 김태종 (여행작가)​ 
자동차 여행가 조용필 2017-04-04
자동차 여행가 조용필일단 떠나야 알 수 있는 것들 여기 무모하고도 용감한 여행을 떠난 남자가 있다. 조용필 씨는 아내와 아들을 태우고 자동차로 15개월간 세계 여행을 다녀왔다. 또 다시 새로운 대륙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운 그는 출발 전에 보다 많은 방법으로 이 여행의 보람을 여러 사람과 나눌 참이다.     “이름 때문에 어릴 때 놀림 많이 받았죠.” 유난히 추웠던 3월 초, 성산대교 아래에서 조용필 씨를 만났다. 취재진보다 먼저 도착한 그를 찾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많은 스티커가 붙은 차를 보고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랜드로버 디스커버리3 앞에 선 중년 신사는 여행에 대해 말하는 내내 생글거린다. 돌아온 일상에서도 여행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나오면 사람들이 차를 보고 주인이 궁금해서 기다리고 있는 경우도 있고, 길에서 만난 택시 기사들이 사진 한 장 찍자고 세우는 경우도 있어요. 신기하지요.” ​​​재작년 4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15개월 동안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온 지 꽤 되었지만 여행 직후 기록삼아 시작한 블로그(http://blog.naver.com/feelyoume)는 이미 30만 팔로어를 넘겼고 일상에서도 수시로 주목을 받는다. 그간의 기록을 모은 여행기 ‘내 차로 가는 세계 여행’(미다스북스)을 두 권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 직업은 공식적으로는 ‘무직’이다. 이만 하면 작가로 부를 만도 하건만 아직은 부족하단다. 종종 전국 각지에서 가슴 속 로망을 가진 어른들의 초청으로 강연자가 되는 것으로 인생의 다음 스텝을 가고 있을 뿐이다. 그가 떠난 것과 같은 여행을 꿈꾸는 이들, 그의 여행기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몇 가지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 철들지 않는 남자가 겪은 자세한 루트와 노하우는 블로그와 책을 통해 참고하시길.​​ ​사람들이 다들 재산부터 궁금해하지 않나요?맞습니다. 다들 제가 아주 부자라서 수입차 끌고 가족들 태우고 떠난 줄 압니다(웃음). 당시에 4억원 정도 하는 서울 아파트 전세금을 통으로 빼서 통장에 넣고, 연고도 없는 조치원까지 가서 아파트를 찾으니 훨씬 큰 평수가 서울 아파트 전세값의 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세간살이를 다 옮겨서 넣어 놓고, 나머지는 차 구매와 여행 경비로 대부분 썼습니다. 차는 처음에 국산 승합차로 갈 생각을 하고 실제로 해당 메이커의 지원책이 혹시나 있을지 물어보기도 했는데, 이름 없는 아저씨에겐 여의치 않았어요. 어차피 정비성이나 내구성을 생각할 때는 SUV가 좋겠다 싶어서 7만~8만km 탄 랜드로버 디스커버리3를 중고로 구매했습니다. 차로 달리면서 중간 중간 길에서 캠핑도 했지만 숙소 생활도네요 했고요. 비용도 예상하시는 것보다는 그리 많이 들지 않았습니다. 차값 빼고 1억원 정도 쓴 것 같아요. 당연히 통장은 텅텅 비었지만 내가 40년 동안 꾸어온 꿈이고 세 식구가 다녀왔으니까.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맞아요. 유럽 패키지 여행도 한 15일짜리 갔다 오면 1,000만원 이상 쓰니까요.블로그를 운영하면서 한 번도 어디가면 뭐가 맛있고 어디 가서 자면 좋고 이런 걸 써본 적이 없어요. 근데 참 많이들 블로그 댓글로 물어요. 어디가 좋냐면서요. 그런데 전 대응 안했습니다. 그걸 찾아다니는 것도 여행이잖아요. 너무 구체적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는 그 과정이 여행 아닐까요? 제가 생각하는 여행은 사람 사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내일이 어떨지 다 알진 못하잖아요. 여행도 다음 가는 목적지는 알지만 안 가본 길이 어떤지는 모르듯이. 그걸 즐겨야죠. ​총각도 아니고, 남자 나이 50줄에 갑자기 떠난다는 건 둘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철이 없거나 인생 막다른 길이란 생각일 때요. 그렇지 않고서야 통장이 빌 때까지 여행을 할 수가 있나요? 음…(한참을 망설이다), 맞습니다. 죽을 것 같은 스트레스가 있었지요. 처음부터 얘기하자면, 친구 사업에 투자를 했는데 잘못됐습니다. 15년 은행원 경력도 소용이 없었던 일이지요. 그리고는 가족들 보기가 미안해서 서울로 혼자 올라와 렌터카 운전 일을 했습니다. 서울 길도 모르는데 제가 가진 재주가 운전이라서 한 일인데요, 우연한 기회에 일본 사업가를 손님으로 모셨는데 좋은 인상을 남겼나 봅니다. 제가 일본어를 웬만큼 하거든요. 그 분 제안으로 새 일을 하게 되었죠. 액세서리 부속 등을 남대문에서 주문하면 일본으로 대신 부쳐주는 작은 사무실을 해보면 어떠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때 자리도 잡혀서 가족들과 다시 뭉칠 수 있었죠. 그 즈음 세무조사가 왔는데, 추징금이 상당했습니다. 제 딴에는 은행에 꼬박꼬박 넣고 받은 내역이 있어서 억울한 일입니다만, 작은 사업체에서는 몇 달 검사를 받는 것만으로 정말 피폐해지고 일에도 모든 의욕이 사라지더군요. 지난 빚도 다 갚고 우리 아들 삼형제도 알아서 제 공부 열심히 해서 다 커 가는데 너무한 것 같았습니다. ​​​​있는 살림을 다 날릴 정도로요?두통과 이명이 시작됐습니다. 갖은 검사를 해도 원인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집에서 쓰러져서 대형병원 응급실까지 실려 갔을 정도였어요. 집에만 들어오면 베란다에 나가 뛰어내릴 생각을 할 만큼 심각한 상태였죠. 그런데 그때 타던 바이크로 3번 국도를 고속으로 한 번씩 ‘땡기고’ 나면 머리가 안 아픈 겁니다. ‘아, 내가 좋아하는 걸 하니까 안 아프네’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냥 어느날 불쑥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어릴 때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읽고 언젠가 꼭 가보겠다고 마음먹은 걸 기억해냈지요. 의외로 아내가 같이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그해 3월에 대학에 입학한 막내 놈도 휴학시키고 데려갔지요. 원래는 입학 첫 학기는 휴학이 안 되는데(웃음) 제가 학교 교수님을 찾아가서 담판지었습니다. 여행을 통해서 웬만한 학교 교육보다 더한 걸 가르칠 수 있다고 자신했어요. 교수님도 이 말엔 동의하셨고요, 학교 스티커를 한 장 붙이고 달리는 조건으로 같이 짐을 쌌습니다.  ​가족들이 더 대단합니다. 차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셨던 거겠죠? 어릴 때 저희 집이 운수업을 했습니다. 차 좋아하는 대개 그렇듯이 면허 따기 전에 운전을 할 줄 알았지요. 몰래몰래 많이 했습니다(웃음). 고등학교 졸업 전에 운전면허를 땄는데, 심사하는 경찰관이 좀 달리다 말고 “차 세워, 임마” 하더라고요. “면허증 줄 테니까 면허증 가지고 다니면서 운전해”라면서요. 이후로 직장생활 하면서도 갖은 차를 많이 탔습니다. 모터사이클도 엄청 좋아해서 동호회 생활도 오래했습니다. ‘R차’라고 부르는 바이크나 BMW GS 같은 멀티퍼퍼스도 탔고요. ​​​​오지에서는 정비할 일도 많았을 텐데 정비는 어디서 배우신 건가요? 글쎄요. 저도 어느 책에선가 보고 통감한 이야기가 있는데, 여행에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있답니다. 여행에 필요한 하드웨어 세 가지가 뭐냐면 돈, 체력, 시간이래요. 나이 먹으면 세월은 빨리 흘러가고 남아 있는 시간은 적다보니 조급함이 생기기 마련이죠. 저 같은 경우는 웬만한 차 정비도 혼자 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고 믿었으니까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가면 목적지에 맞는 어학원도 등록해 현지에서 바로 소통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겁니다. 정비는 돈만 안 아끼면(웃음) 현지에 가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데, 말을 잘 못 하니까 진짜 힘들더라고요. 유라시아나 라틴 대륙 쪽으로 가면 영어가 거의 안 통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영어를 무척 잘하는 것도 아니고요. 여행 중에 젊은 부부를 만났는데  스페인어나 독일어 같은 걸 미리 공부해서 왔더군요. 정말 부러웠습니다. ​​ ​​타이어는 몇 개나 교체하셨어요? 한 9만km 달렸는데요, 11개 갈았습니다. 닳아서 찢기는 게 아니라 그냥 터질 때도 있었죠. 사막에서는 고온으로 돌을 크게 밟은 것도 아닌데 그냥 폭탄 맞은 것 같이 찢어지기도 합니다. 지금 이 차도 자세히 보면 조수석 앞에 에어백이 들어 있는 대시보드가 살짝 금이 가 있습니다. 외부 열이 40도가 넘으면 차량 내 체감 지수가 거의 70도쯤 되는 기분인데 코 속이 아파서 문을 열 수도 없거든요. 그러니 내장이 굳어서 갈라지는 거죠. 윈드 실드를 뒤덮는 모래먼지를 닦아내느라 와이퍼도 갈렸고요. 보닛이랑 범퍼 쪽에 움푹움푹 돌로 파인 건 별 일도 아니죠. 그래도 차가 튼튼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지인이 랜드로버 매장에 가서 영업사원에게 디스커버리를 물어보니까 내구성은 최고라며 제 블로그를 보여주더래요. ​​​​ ​아찔한 경험이 없진 않았겠죠?당시에는 미치게 힘들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다 추억입니다. 강도나 도난 없이 여행을 잘 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없었던 고생을 몽땅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하루 만에 다 겪었습니다. 안전하라고 경찰서 바로 앞에 차를 세우고 어딜 다녀왔는데 차 유리가 깨지고 카메라부터 반찬으로 싣고 온 젓갈까지 다 털렸더군요. 이 차가 연식이 좀 됐어도 이모빌라이저가 있어서 창이 깨지면 저절로 문이 잠깁니다. 그나마 다행이었죠. 그런데 이런 경우가 많은지 깨진 유리만 고쳐주는 전문가를 경찰서에서 연결도 해줍니다. 카자흐스탄 일대를 달릴 때 수시로 경찰이 검문하는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 중 하나에요. 이유는 딱히 없어요. 신분증이랑 입국 관련 서류를 일단 내놓으라고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돈을 요구하는 식이지요. 나중에는 어차피 서로 말이 안 통하니까 능청스럽게 대충 협의하고 넘어가게 되더군요. 브라질에 가서는 어떤 부자가 2억원을 줄 테니 이 차를 자기한테 팔고 가라는 말도 들었답니다. ​​갖은 일을 겪고 나면 성격도 바뀌나요?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다 버리게 되죠. 제 수준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차가 멈춘 적도 있어요. 남미 쪽에서였는데 빈부격차가 크면 이런 차를 소수가 타니까 정비사도 무척 적고 여기저기 정비소끼리 계측기 찾아서 옮기고 하다가 그 값을 어마어마하게 부르기도 합니다. 정비 비용으로 한 1,000만원을 달라고 할 때도 있었어요. 차를 실어 보내야 할 배나 세관원들도 그래요. 늘 “내일 해줄게, 기다려”라고 말이죠. 그러다 일주일, 열흘이 그냥 지나가 버리다보면, 그만큼 체류비가 늘어나기 마련.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나고, 여러 루트로 연락해 SOS를 쳐도 답이 없으니 좌절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보니 신기하게도 나중에는 그 나라 사람들처럼 즐기게 되더군요. 일주일씩 호텔에서 정비소나 통관사무소 연락을 기다리다가 안 되면 근처 유명한 해변에서 일광욕도 하고 주변을 놀러다니기도 하면서요. 그렇게 두어 곳을 돌다 이젠 가족들끼리 웃으면서 얘기하는 여유도 얻었답니다. “대기업 회장도 못 할 휴양을 우리가 몇 주째 하고 있네”라면서요.​​​​많은 분들이 여행의 재미를 그렇게 말씀하시죠. 혹, 여행 중에 자신의 다른 면도 발견하셨나요?돈보다 큰 스트레스는 내가 지금 이 여행의 리더이고 아버지이고 남편이라는 점입니다. 다들 걱정할 걸 아니까 제 마음 속에 있는 불안함을 드러내질 못해요. 그러다가 길에서 마구잡이로 달리는 차를 만나면 욕을 해댔죠.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그러더군요. “당신이 욕을 하면 그걸 듣는 건 저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니까, 욕 그만하세요.” 머리를 딱 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무척 미안했고요. 그 뒤로 험한 말을 안 하게 됐습니다. 가족들이 더욱 소중해졌죠. 한국에 남아 있는 어머니와 장모님, 복학해야 할 막내아들을 생각해서 일단 돌아왔습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또 다시 저 차 끌고 이번에 못 간 나머지 땅들을 보러 가려고 합니다. 당시 IS 테러 위협 때문에 아프리카 대륙과 오세아니아 쪽은 못 돌아봤거든요.​​​​ 아내는 또 따라 가신다고 하던가요?누가 한번 물어보니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네”라고 대답하더군요.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저보다 그걸 허락하고 따라간 아내와 가족들이 더 대단하다고 말합니다. 아들만 삼형제를 뒀는데, 다들 제 아버지 성질을 아니까 일찌감치 스스로 알아서 자리를 잡아서 각자 잘 살고 있어요. 이제 예전처럼 좋은 아파트로는 못 돌아갈 상황이지만 사람들 만날 일이 많아 일단 반전세로 서울에는 들어왔습니다, 하하하. 이렇게 여행 갔다 오니까 뭐가 걱정이 안 돼요. 어떻게든 살아지겠죠. ​사실 이런 얘기를 또래 남자 분들은 무척 부러워할 겁니다. 그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여행을 가려면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던지고 가야 해요. 다들 ‘돈 모으면 가야지’ 하는데, 그러면 계속 못 갑니다. 특히 자동차 여행을 꿈꾸는 분들에게는 적극적으로 권해드리고 싶어요.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포장된 도로만 갈 거라면 평범한 세단을 끌고 가도 됩니다. 즐기며 가보십시오. 더 늙기 전에요. 다만 하체부터 보강해야 할 건 많습니다(웃음).​글 김미한(프리랜스 에디터) 사진 최재혁, 조용필 ​​  
중국인의 혼이 서린 곳, 황허 후커우폭포 2017-03-16
중국인의 혼이 서린 곳황허 후커우폭포길이가 5,414km의 황허(黃河: 황하)강은 중국에서 장강 다음으로 긴 강으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이며 중국의 5천년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중국인들의 혼이 담겨 있는 강이다. 황허강에 형성된 폭포 중 가장 큰 후커우폭포는 중국에서 제일 크다는 구이저우성의 황과수폭포보다 더 웅장한 느낌이다.   ​   이우에 있는 필자가 시안(西安: 서안)을 방문하게 된 것은 이곳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는 중국인 천(陳: 진) 사장의 초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 사장은 저장성 동양 출신으로 이우 시장에서 가방을 팔던 장사꾼이었다. 필자가 그를 만난 것은 2003년이다. 당시에는 매달 미국으로 가방을 실은 2~3개의 컨테이너를 선적했었다. 그가 이우 시장에 매장을 열자마자 우리와 거래를 시작했고 몇 년 동안 수십 개의 컨테이너를 수출했으니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돈을 벌게 해준 필자에게 항상 고마워했고, 지금까지 좋은 유대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가방 장사를 통해 돈을 번 그는 3년 전부터 시안으로 자리를 옮겨 부동산 사업에 손을 대고 있으니 사업 수완이 보통이 아니다.필자가 알고 있는 많은 이우 사람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팔다가 돈이 될 만한 제품을 찾으면 공장을 지어서 직접 만들어 큰돈을 벌었다. 그 돈을 바탕으로 부동산 시장에 뛰어든 그들은 얼마 전부터는 금융업에까지 진출한 상태다. 아무튼 그는 시안의 땅을 싼 값에 사서 아파트나 오피스 건물을 지어 분양을 하는 방식으로 꽤 많은 돈을 모았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몇 해 전부터 계속 시안을 다녀가라고 연락이 왔었는데 아마도 돈을 많이 번 자신의 존재를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천 사장 덕분에 병마용과 화칭궁을 비롯해 시안의 구석구석을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후커우폭포를 안내한 천 사장.오래전에 이우에서 가방을 팔았었다​​시안에서 350km 떨어진 곳당나라 궁이 있는 대명궁을 둘러본 후 대뜸 천 사장이 ‘내일은 폭포를 보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필자가 알기로는 시안에는 그다지 유명한 폭포가 없는데 무슨 폭포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는 ‘좀 멀기는 하지만 황허(黃河: 황하)강에 있는 폭포라 한번 가볼 만하다’며 나를 꾀었다. 사실 필자는 시안에서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의 제안이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동산 일 때문에 바쁜 그가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가자고 하는데 뿌리칠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황허(黄河) 후커우폭포(壶口瀑布)에 가게 됐다. 한국 관광객들은 시안에 들르면 대부분 병마용과 회민제 등 유명한 관광지만 보고 간다. 시안에서 후커우폭포는 꽤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폭포를 아는 한국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시안에서 약 350km 거리에 있으니 아무리 빨리 다녀와도 하루는 다 잡아 먹는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시안을 출발했다. 차는 천 사장이 갖고 있는 BMW 526i다. 천 사장이 오너드라이버이긴 하지만 그다지 운전을 잘 하는 편이 아니어서 운전은 필자가 하기로 했다. 시안 시내를 빠져나오니 곧바로 훤하게 뚫린 왕복 8차선 고속도로가 나온다. 고속도로는 건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인지 꽤 깨끗했다. 중국이 덩샤오핑의 개방 정책 이후 눈부신 경제 개발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동안 이곳 서부는 개발에서 소외된 지역이었다. 중국의 경제개발은 대부분 남부와 동부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 그러나 근래에 들어 서부 대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대대적인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도 시안에 엄청난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했다. 그런 연유로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는 고속도로가 많은데 모두 건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깨끗했다. 훌륭한 고속도로가 뚫려 있기는 하지만 이곳 고속도로를 통행하는 차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서부대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사방으로 고속도로를 뚫어놓았다​​서부 쪽 고속도로의 주변은 황량하기 그지없다​​시안에서 후커우폭포까지 가는 길의 주변은 사막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겨울이라 주변의 경관이 황량해서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이 지역은 비가 많이 내리지 않고 모래가 많이 섞여 있는 토질이라 논농사를 지을 수 없다. 한마디로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그다지 적합한 땅이 아니다. 그래서 산시성(山西省: 산서성)의 인구는 그다지 많지 않다. 비라도 한번 내리면 토사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풍경이 몇 시간이고 계속된다. 고속도로는 산과 산을 다리로 연결하고 큰 산으로 막힌 곳에서는 터널을 뚫어 길을 냈다. 고속도로 밑을 내려다보니 발아래 황량하게 펼쳐진 광야가 장관이다. 필자가 이제껏 보아왔던 곳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세계의 중국이었다. 토지가 척박하다 보니 이곳에서는 주로 밀농사를 짓는다. 산시성을 비롯해 칭하이성(靑海省: 청해성)이나 간쑤성(甘肃省: 감숙성) 등에서 국수가 발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간쑤성의 란저우 라면은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드문드문 고속도로 휴게소가 나온다. 그러나 이곳을 거쳐 가는 차들이 거의 없어서 휴게소는 무척 한산하다. 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과를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천 사장이 차를 세우고 거래처에 나누어줄 사과를 5상자 샀다. 먹어보니 사과가 생각보다 달고 물도 많다. 산시성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중국에서 제일로 친다. 그리고 중국에서 가장 많은 사과를 생산하고 있다. 중국의 사과 생산량이 전세계의 36%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모습. 차들의 통행이 거의 없어 매우 한산하다휴게소에서 사과를 파는 상인들의 모습​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색다른 인물을 만났다. 필자가 카메라로 휴게소 이곳저곳을 찍는 모습을 보더니 자신도 한 장 찍어 달라고 요청하는 트럭 운전기사였다. 필자가 가진 큰 카메라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순박하게 생긴 야오(姚) 성씨를 가진 트럭 운전기사는 윈난성(云南省: 운남성) 쿤밍(昆明: 곤명)에서 헤이룽장성(黑龙江省: 흑룡강성) 하얼빈(哈爾濱)까지 짐을 운반하는 중이라고 했다. 쿤밍에서 하얼빈까지는 4,000여km에 이른다. 사진을 몇 장 찍어주었더니 얼마나 좋아하던지……. 사진을 집으로 꼭 배송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중국에서는 트럭 운전사들이 먼 길을 운전하고 다니기 때문에 대부분 부부가 같이 다닌다. 그런데 이 운전기사는 형과 함께 교대로 운전을 한다고 했다. 장거리 운전의 외로움과 피로를 달래기 위해 원숭이도 한 마리 데리고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속도로에서 만난 트럭 운전사 트럭 운전사는 장거리 운전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형과 교대운전을 하며 원숭이도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닌다고​​​공산당도 주둔했던 동굴들장시간 운전을 하는 동안 고속도로 주변에는 사람이 사는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주 드문드문 집들이 조금 보일 뿐이었다. 중간에 제법 도시다운 규모의 시가지를 딱 하나 만났다. 그리고 집들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동굴들이 보였다. 예전에는 동굴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동굴 속에서 사는 것이 이들에게는 자연스런 선택이었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으나 요즘은 곡식이나 야채를 보관하는 창고로 이용하고 있다.​​​멀리서 바라본 동굴들. 비가 오면 패일 것만 같은 토사형 지형이다​이 동굴은 국공 내전 당시 국민당의 공격을 피해 대장정(1934~1935)을 펼쳤던 공산당이 시안에 머물 때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를 시대 배경으로 하는 중국 영화를 보면 공산당의 본대가 동굴에서 생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국 공산당 대장정의 마지막 종착점은 시안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옌안(延安: 연안)이다.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민당에 쫓겨 대장정을 시작해 그 먼 거리를 거쳐 옌안까지 이동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창당했다. 초창기에는 국민당과 합작하여 북부 군벌을 토벌하는 역할을 담당했지만 1925년 쑨원(1866~1925)이 사망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의 최고 지도자가 된 장제스(1887~1975)는 서방세계의 지원을 받아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1933년부터 공산당 본부가 있던 장시성(江西省: 강서성)을 집중 공격하자 공산당은 서부 지역으로 탈출하기에 이른다. 장시성 루이진(瑞金: 서금)에서 시작된 대장정은 11개 성을 거쳐 산시성 옌안까지 1만5,000km에 이르는 목숨을 건 고난의 행군이었다. 처음 출발을 할 때 8만 명이 넘었던 공산당이 옌안에 도착했을 때에는 1/10에도 못 미치는 8,000여 명만이 살아남았을 정도로 처절하고 비참한 여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종착지인 옌안에서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겨우 목숨을 부지하던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쳐 옌안에서 재정비를 한 후 절대적으로 우세하던 국민당을 몰아내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했으니 중국 공산당의 역사는 한 편의 드라마에 다름 아니다. 야구에서 흔히 말하는 9회 말 투아웃 이후 대역전극을 펼친 격이라고나 할까. 그러한 극적인 중국의 현대사를 쓴 것이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1893~1976)이 이끈 공산당이다. ​황허강에서 가장 큰 폭포점심을 후커우폭포 입구에서 먹었다. 식당가는 한산했다. 폭포를 보기 위해 여름에는 구름처럼 관광객들이 몰려오지만 겨울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겨울에는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아 폭포의 웅장한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천 사장은 가는 내내 2개월 동안 서안 쪽에 비가 내리지 않아 폭포가 초라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네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를 달려와서 볼품없는 폭포를 보여주게 되면 실망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식당 앞으로 마르고 건조한 거대한 협곡이 형성되어 있었다. 협곡 밑으로는 흙탕물이 흘러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황허黃河: 황하)강이다. 황허강은 길이가 5,414km로 중국에서 장강 다음으로 긴 강이다. 황허강은 칭하이성에서 시작하여 내몽고와 산시성, 허난성을 거친 후 산둥성의 발해만으로 빠져 나간다. 황허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이며 중국의 5,000년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중국인들의 혼이 담겨 있는 강이다. ​​대협곡 사이로 황허강이 흐른다협곡을 따라 입구 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사방공사를 하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인다. 비가 내리면 패여 나가는 토질을 바꾸는 한편 모래 산에 나무를 심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곳에 심어지는 나무는 건조한 땅에서도 잘 견디는 수종이라고 한다. 비로 인해 패여 나간 비탈길에는 전봇대가 전깃줄에 대롱대롱 위험천만하게 매달려 있다.   쓸려 내려가 전봇대가 공중에 떠 있다. 전깃줄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위태한 모습사방공사에 동원된 인부들  폭포 입구에 가까워지자 엄청난 굉음이 우리의 귓전을 때린다. 폭포에 다가갈수록 그 소리는 더욱 커지면서 주위를 집어 삼킬 듯 포효한다. 마치 계속해서 울리는 거대한 천둥소리 같다. 이윽고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내래는 곳에 다다랐다. 바로 황허강에 형성된 폭포 중 가장 큰 후커우폭포(壶口瀑布)다. 양쪽을 둘러싸고 있는 협곡이 워낙 커서 폭포가 작아 보이지만 그 물이 쏟아져 내리는 위력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다.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리는 폭포의 위용은 중국에서 제일 크다는 구이저우성의 황과수폭포(黄果树瀑布)보다도 더 웅장한 느낌이다. ​​​후커우폭포의 웅장한 모습​​후커우폭포는 높이 약 50m, 폭 30여m이지만 수량에 따라 폭과 높이가 달라진다. 물이 떨어지며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낙차 때문에 다시 하늘로 솟아오르는 물줄기의 양도 엄청나다. 이런 영향으로 폭포 주변에는 항상 무지개가 형성된다. 초당 1,000입방미터의 물이 쏟아져 내리는데 비가 많이 내릴 때에는 2,500입방미터까지 늘어난다고. 물의 양이 현저하게 적은 겨울에도 이렇게 웅장한데 물이 많으면 그 위용이 실로 어마어마할 것 같다.후커우(壶口)란 주전자의 주둥이라는 뜻인데 커다란 주전자에서 작은 주둥이를 통해 토해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실제로 협곡 사이에 난 강폭이 수백m에 이르는데 후커우폭포에 이르러 갑자기 좁아지면서 거대한 폭포를 만들어내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실제로 물이 흐르면서 암벽 사이에 물길을 낸 것을 보면 그 위력을 충분을 가늠할 수 있다. ​중국인들에게는 남다른 의미후커우폭포는 중국 북서부에 소재한 산시성(陕西省: 섬서성)과 싼시성(山西省: 산서성) 사이의 협곡에 조성되어 있다. 2억년이 넘는 기간 동안 비바람과 물에 깎이고 패여서 만들어진 폭포다. 이 강을 따라 올라가면 황허강의 발원지인 칭하이성(青海省: 청해성)을 만날 수 있다. 황하(黄河)란 강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누런 황토물이어서 붙여진 표현이다. 물속에 워낙 많은 진흙이 포함되어 있어 물 반 진흙 반이라고 말할 정도다. 쓸려 내려오는 진흙 때문에 하류의 지반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 물이 흘러 우리의 서해로 나온다. 황해(黃海)라는 표현도 황하의 탁한 물이 만들어낸 바닷물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중국에서 황허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산시성과 싼시성을 잇는 다리. 건너편이 싼시성이다​​​건너편으로 보이는 싼시성도 푸르름과는 거리가 멀다​흙탕물이 흐르는 황허강의 모습. 그야말로 물 반 진흙 반이다 ​흙탕물이 흐르는 황허강의 모습. 그야말로 물 반 진흙 반이다 ​비가 와서 수량이 늘어나면 물이 위쪽까지 넘쳐난다. 물이 흐르면서 만들어낸 흔적들 ​​​필자는 세계 4대 폭포에 속하는 미국의 나이아가라와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중국의 황과수폭포를 가보았다. 아직 가보지 못한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에 있는 빅토리아 폭포도 곧 가볼 생각이다. 후커우폭포를 나이아가라나 이과수와는 규모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그런 큰 폭포와는 또 다른 감동을 후커우폭포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작지만 강렬한 황토색의 물줄기는 일반적인 폭포와는 전혀 다른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에게는 규모와 관계없이 중국인들의 혼과 역사가 담겨 있는 성스러운 곳으로 여기고 있다. 황허는 중국인들의 사상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갠지스가 인도인들에게 마음속의 고향과 같은 곳인 것처럼 황허란 중국인들에게 평생에 한번은 꼭 가봐야 하는 성지와 같은 곳이다. 우리가 백두산에 올랐을 때 맛보는 가슴 벅찬 감동을 중국인들은 이곳에서 느끼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천 사장이 자신들이 자랑으로 삼는 황허강의 후커우폭포를 나에게 꼭 보여 주고 싶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후커우폭포를 찾은 관광객들의 모습​​후커우폭포 인근에 사는 중국인들 역시 한족이다​기념품 매장의 점원. 소수민족 같은 복장이지만 한족이란다​​천 사장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가진 인물이다. 중국인들은 장차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비롯하여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중화사상의 바탕이 이곳 황허에서 비롯되었음을 필자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후커우폭포에서 서안으로 돌아오는 길도 그다지 어려운 여정이 아니었다. 고속도로가 잘 뚫려 있고 도로상태도 양호했다. 천 사장은 필자와 같이 후커우폭포를 둘러본 것에 대해 대단히 만족해했다. 15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던 천 사장이 이젠 BMW를 몰고 시안에 높은 건물을 지어서 파는 존재가 되었으니, 그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차를 타고 다니는 필자는 변한 게 전혀 없는데 말이다.​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 
당일치기로 가는 세계꽃식물원 2017-03-06
봄·봄·봄, 봄이 있어요~​충남 아산 세계꽃식물원 겨울에 만나는 봄은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곳은 이미 봄이었고 여름이었으며 가을이 함께하니 마치 사계절을 한곳에 들여다 놓은 듯했다.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에 자리한 ‘세계꽃식물원’이 바로 그곳. 서해안고속도로 서서울 톨케이트에서 100km 남짓, 경부고속도로 한남IC에서는 120km 정도여서 이 두 곳을 기점으로 각각 1시간에서 1시간 30분이면 닿을 수 있다.   봄은 봄이지만 봄 같지 않은 쌀쌀한 날, 유독 봄이 더 그립다. 여기다 한 달을 앞서 가야 하는 매거진의 경우라면 계절이 바뀌는 이 시기에 더욱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지금은 겨울이지만 각종 소식들이 엮어져 <자동차생활>이 독자들의 손에 닿을 때쯤이면 봄은 이미 문턱에 와 있다. 그리고 봄 길은 저무는 태양을 마주하는 그림자처럼 점점 더 길어져 절정으로 내닫을 것이다. 그리하여 늘 이맘때쯤이면 철 지난 겨울 얘기에 눈길을 주고 귀를 기울여줄 마음씨 너그러운 이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게 된다.  겨울에, 아니 그보다도 더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한겨울에도 풀내음 솔솔 풍기고 각종 꽃향기가 은은하게 휘감아 봄의 한가운데 선 듯 착각이 드는 그런 곳 어디 없나? 뜻밖에도 그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곳은 이미 봄이었고 여름이었으며 가을이 함께하니 마치 사계절을 한곳에 들여다 놓은 듯했다.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에 자리를 잡은 ‘세계꽃식물원’이 바로 그곳이다. ​​​​수도권에서 멀지 않은 당일 코스세계꽃식물원은 서서울 톨케이트에서 100km 남짓하고, 경부고속도로 한남IC에서는 120km 정도여서 이 두 곳을 기점으로 각각 1시간에서 1시간 30분이면 닿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수도권에서 당일로 다녀오기에 손색이 없고, 지척에 도고온천과 옹기 및 발효음식 전시체험관, 코미디홀 등이 있어 아쉬움을 남길 여지를 주지 않는다.서해안고속도로에 차를 올려놓으니 발길이 가볍다. 목적지에 대한 설렘이 주는 야릇한 기운에 따사로운 햇살이 거들어 이미 차 안은 봄의 전령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들의 환대에 느긋하게 몸을 맡기고 서해대교를 넘어 당진IC로 빠져 32번국도로 접어드니 예당의 너른 들판이 일어선 듯 다가온다. 예산·당진·아산·서산에 걸쳐 있지만 평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예산과 당진의 이름을 따서 ‘예당평야’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니 길 이름도 ‘예당평야로’다. 충남 당진군 궁평리의 간양사거리에서 천안·아산 방향의 21번국도로 좌회전한 후 오른쪽 길을 이용해 터널을 건너면 세계꽃식물원이 너른 들 한가운데 서 있다. 아직은 빈 들판이지만 볍씨가 뿌려지고 싹을 틔워 신록이 한창이거나 누렇게 익어갈 때의 장관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 가슴이 탁 트인다. 여기에 들어선 식물원은 생각보다 소박해서 ‘어, 투자한 시간에 비해 볼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물음표 하나가 눈앞에서 희미하게 떠오른다. 아직은 겨울이어서 식물원의 입구를 앞 다퉈 치장했을 꽃들은 생명의 빛을 잃었다. 그러나 어차피 내친걸음. 매표소에는 관광버스에서 내린 나이 지긋하신 분들의 목소리로 왁자지껄하고, 관람을 마친 이들이 무언가를 받아가며 짓는 만족한 미소에 언제 그랬냐는 듯 불안감이 말끔하게 씻긴다. 식물원의 입장료는 성인 기준 8,000원으로 관람을 마친 후 귀가할 때 제공하는 다육식물이 포함되어 있다. 발길은 자연스럽게 이정표가 안내하는 곳을 따라간다. 출입문을 제치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적당한 온기가 도는 실내는 카페와 레스트랑, 쉼터 등으로 꾸민 ‘삶이 꽃이다’라는 뜻의 리아프(LIAF, Life is a Flower) 가든이다. 쉼터의 테이블과 의자가 특이해서 눈여겨보았는데 물건을 담을 수 있는 플라스틱 상자(아마도 식물들의 모종 등을 운반하는 데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에 나무를 알맞게 잘라 고정시켜 놓았다. 완성도가 뛰어나고 나름대로 멋도 있어 일상에서 활용해도 좋을 듯하다. 다양한 종류의 호박은 한데 어우러져 관람객들의 시선을 받고, 다른 한쪽에서는 장작불이 타오르는 모습이 정겹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군고구마를 내놓기도 한다지만 아쉽게도 오늘이 그날은 아닌 모양이다.​​LIAF가든의 카페​​​​눈은 즐겁지만 이게 무슨 꽃인고반대편의 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식물원 탐방이 시작된다. 2004년 개장한 세계꽃식물원은 온실 2.8헥타르와 실내식물원 1.8헥타르로 국내 최대 규모의 실내 온실 식물원이라는 것이 이곳의 설명이다. 연중 3,000여 종의 원예종 관상식물을 관람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이 감동으로 다가 올 사람은 그리 많이 않을 것 같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꽃과 식물의 수를 손꼽아도 얼마 되지 않을 것 같고, 그것이 또 그것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실내식물원의 문을 여니 산발을 한 것 같은 식물이 천장에서부터 늘어졌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빨간 꽃 사이로 길을 냈다. 식물원 안에는 관람을 하는 이들이 곳곳에서 탄성을 자아내는데 초록의 무성함에, 꽃들의 밝은 빛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의 신비로움에 저마다의 느낌을 추억으로 담으려는 듯하다.   온실 천장을 뚫을 듯한 벤자민선인장 정원​  걸음은 느긋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알려고 하면 할수록 부족한 것을 더 채우려 하기에 이리조리 뜯어보고 요모조모 살펴서 무언가를 하나라도 더 찾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관람객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으니 사람들의 정체 아닌 정체가 발생하는 것. 이쯤 되니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등으로는 땀이 미끄러지듯이 흘러 겨울 외투가 거추장스러울 정도다. 풀과 나무, 그리고 꽃들의 향연이 끝이 없을 듯 이어지지만 그럴수록 아쉬움은 커져간다. 꽃 이름표를 붙여 놓은 곳은 발길을 멈추고 눈길을 보내며 “아, 이게 그 나무야, 그 풀이야, 그 꽃이야”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대부분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을 때의 답답함이라니! 식물원 측이 관람객들이 이해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좀 더 강구하면 좋을 듯하다.      무슨 꽃일까? 이름표를 붙여 줬으면 좋으련만​노란 꽃잎이 빛을 발한다극락조화  발길이 무거워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나무와 천장에 매달아 놓은 꽃그늘 아래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저마다 식물원과 추억의 한 페이지를 간직할 수 있도록 마련된 촬영장소에서는 사람들의 맑은 웃음꽃이 피어난다. 식물원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앵무새 체험관은 꼭 들러보아야 할 곳이다. 각양각색의 빛깔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앵무새들은 사람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의 일상을 즐긴다. 미로정원을 걷는 것과 각종 선인장들의 모양과 형태를 감상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식물원 곳곳에 쉼터들이 있다  앵무새정원의 주인공들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막바지에 이르면 허브로 만든 다양한 제품을 내놓은 상점이 나오는데 둘러보면서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을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리고 LIFA 가든과  맞댄 온실에서는 다육식물과 화기를 판매한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여기에서 일정을 끝낸다. 하지만 더 즐겨보고 싶다면 아름다운 꽃에 옷을 입혀주는 ‘분갈이 체험’과 물감이 아닌 꽃잎으로 손수건을 곱게 물들이는 꽃수건 염색체험을 신청할 수 있다. 세계꽃식물원은 계절을 앞서거나 거스를 수 있고, 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는 색다른 즐거움이 넘치는 곳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홈페이지의 콘텐츠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한다는 것. 지금의 홈페이지에서 볼 것도, 알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다. 글, 사진 김태종 (여행작가) 세계꽃식물원 www.lifa.kr 041-544-0746 충남 아산시 도고면 아산만로 37-37 (봉농리 577)
중국 남부의 최대 도시, 광저우 2017-02-20
​중국 남부의 최대 도시, 광저우 광저우는 중국 남부의 최대 도시로 광동성 성도이자 정치, 경제, 교육의 중심이다. 또한 중국 근대화에서 중심적인역할을 한 역사적인 도시이며, 13세기부터 유럽과의 교역을 이룬 무역도시다. 하지만 개방정책 이후 인구와 차량급증으로 인한 교통체증, 공해, 빈부격차의 심화 등으로 골치를 앓고 있기도 하다.​​​시타(서탑)로 불리는 103층의 IFC 빌딩(좌)과 동타(동탑)로 불리는 120층의 주다푸 빌딩(우)​ 광저우는 중국 남부의 최대 도시로 광동성 성도이자 정치, 경제, 교육의 중심이다. 또한 중국 근대화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역사적인 도시이며, 13세기부터 유럽과의 교역을 이룬 무역도시다. 한나라때부터 무역을 시작하여 당나라를 거쳐 명·청에이르기까지 서남아시아는 물론 유럽의 여러 나라와 교류를 하면서 중국 최대의 항구로 거듭났지만1842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해 홍콩을 할양한 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광저우가 역사적으로 가장 부각된 것은 신해혁명으로 오천 년이 넘는 군주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공화국을 건설했다는 데 있다. 중국의 마지막 제국이었던 청나라는 외세의 침탈로 나라가 이리 저리찢기는 수모를 겪고 있었다. 이때 뜻이 있는 선각자들이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취지로 모여 중화사상에 바탕을 둔 중화민국을 선포한다. 그 중심에 쑨원(손중산)이 있었다. 광동성 중산 출신으로 미국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홍콩의 학교를 졸업한 쑨원은 중화민국의 이념인 민족, 민권, 민생주의를 주창하며 새로운 공화국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쑨원의 뒤를 이어 집권한 장제스의 국민당은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과의 패권다툼)에서 패하여 타이완으로 정부를 옮긴다. 쑨원은 광동성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광저우에는 그의업적을 기리는 장소가 많이 남아 있다. 손중산 기념관과 중따(중산대), 중산대 부속병원, 중산대로,중산대교 등이 그것이다.​​​쑨원이 설립한 국립대학교인 중산대학손중산 기념관​​개방정책으로 남부 최대의 도시로 발전광저우가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정책에 힘입어 남부 최대의 도시로 발전하면서부터이다. 중국의 개방 정책은 광동성 썬전과 산토우에 특별구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썬전은 홍콩과 인접해 있고 산토우는 홍콩 최대 재벌 이자청의 고향이다. 중국의 개방정책을 실현하는 데에는 홍콩의 역할이 컸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를 도입한다는 것은 공산주의를 포기하겠다는 뜻인 만큼 서방국가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것은 당연한 일. 이에 따라 덩샤오핑은 홍콩에 손을 벌렸고, 이자청을 비롯한 홍콩의 재력가들이 중국에 투자를 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은 개방 정책의 의지를 펼치는 한편 서방세계의 투자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개방정책의 가장 큰 공신은 홍콩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지만 개방 정책이 시작되고 30년이 지난 홍콩의 현재는 암울하다. 미래는 더욱 불확실하다. 그동안 홍콩은 중국 개방정책의 최대 조력자이자 수혜자였다. 외국인들이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중국을 등에 업은 홍콩은 중계무역이라는 무기로 그동안 짭짤한 재미를 보아 왔다. 과거에는 중국과 거래를 하려면 홍콩을 통해야만 했는데, 이런 상황은 2,00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외국인들도 홍콩을 제쳐두고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하면서 홍콩의 역할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홍콩은 점점 중국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형상이다. 따라서 우리 경제가 중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양상은 홍콩과 비슷한 상황으로 몰릴 수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지금 당장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경제가 중국에 예속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1% 감소하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도 0.6%가줄어든다는 통계도 있는 만큼 지속적인 시장의 다양성을 통해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중국의 개방 초기 대부분의 공장들은 광동성에 산재해 있었으며 그 중심에 광저우가 있었다. 광저우는 인구 1,400만 명의 큰 도시로서 인근의 포산, 중산, 혜조우 등 위성도시를 포함하면 3,000만 명에가까운 인구가 주위에 살고 있어 공해, 교통체증등 복잡한 현안을 안고 있다. 중국이 세계 최대의 자동차 생산국이자 시장이 되면서 자동차의 급격한 증가도 큰 골칫거리다. 광저우 도심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교통체증으로 인한 대혼잡이 계속된다. 급기야 광저우 시에서는 차량등록제를 실시해 차량이 늘어나는 것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광저우를 다녀 봤지만 지금까지 맑은 하늘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광저우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광저우타워에 오르면 시꺼먼 스모그에 덮인 광저우 시내만 보일 뿐이다. 광저우 시내를 전체적으로볼 수 있는 백운산에 올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광저우는 대기오염이 심해서 맑은 하늘을 보기가 매우 힘들다백운산 정상에 올라도 시꺼먼 스모그에 덮인 시내만 보일 뿐이다 ​​밤이 되면 색깔을 바꾸며 빛나는 광저우타워​​교통체증, 공해, 빈부격차 등의 폐해개방정책 이후 30여 년 동안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로 인한 빈부격차의 폐해도 중국 정부의고민거리다. 서울의 강남에 비견되는 텐허에는 호화스러운 아파트와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화청광장 주변에는 시타(서탑)로 불리는 103층의 IFC(국제금융센터)를 비롯해서 종신, 중국 이동통신 등초호화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 광저우에서 가장 높은 120층짜리 주다푸 빌딩(일명 동타)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텐허광창, 정지에 광창 등 초호화 쇼핑몰들이 밀집되어 있다.​​화청광장 주변에는 시타로 불리는 IFC 빌딩, 동타로 불리는 주다푸 빌딩을 비롯해서 초호화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쇼핑몰의 인테리어나 팔고 있는 제품들을 보면 과연 이곳이 중국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렇지만 인구 밀집지역에 들어서면 또 다른 중국을 만나게 된다. 호화스런 아파트 옆으로는 예전의 우리네 달동네보다 더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일년 내내 해가 들어오지않는 벌집처럼 생긴 건물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급속한 인구 증가에 따른 병폐다. 만약 불이라도 나면 과연 이곳에서 사람이 빠져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무덥고 습한 여름철,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광저우 시민들의 생활상은 현대화된 광저우의모습과는 또 다른 일면이다.​​​호화스러운 아파트 저편엔 예전 우리네 달동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일 년 내내 해가 들지 않는 빈민가의 집, 창문이 숨구멍처럼 마주 트여있다​​​한편, 광저우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고도이지만 제대로 된 옛 건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 웨이슈 공원에청나라의 성곽이 남아 있을 뿐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한 흔적이 없다. 근래에 들어 송대의 길을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을 정도다. 그렇지만 공원은 잘조성되어 있고, 그 숫자도 상당히 많다. 그 중에서도 광저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백운산은 광저우시민들이 항상 찾는 시민공원이다. 그 밖에 웨이슈공원, 류화후 공원 등 도심에 많은 공원이 산재해있어 시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백운산 공원은 광저우 시민들이 즐겨 찾는 시민공원이다인민공원에 있는 광저우 제로 포인트​​웨이슈공원에선 청나라 시절 성곽을 볼 수 있다​​정부의 토지 대여로 땅부자가 된 토박이들중국인들이 흔히 하는 말로 “동북에 가서 술 잘 마신다고 거들먹거리지 말고(동북에는 워낙 주당들이 많으니), 베이징에 가서 벼슬 자랑 말라(베이징에는 고위 관리들이 즐비하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광동에 가서 돈 자랑 하지 말라, 돈으로 묻어 죽인다”는 말이 있다. 광동에는 그만큼 부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무역을 통해 외국으로부터 돈을 벌어들였고 개혁 개방 이후에도 중국에서 가장 발전된 곳이 바로 광동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몇 해 전 광동성의 GDP가 대만을 넘어 섰으며, 그 중심에 광저우가 있다. 예로부터 광동 상인을 중국 최고의 상인으로 꼽아왔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신용을 쌓아왔는데 이는 광저우가 개방 이후 중국의 어느 지역보다 앞서 나가는 기반이 되었다. 한편 광저우에서는 이 지역 토박이를 만나기가 정말어렵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광저우에는 순수한 광저우 사람들보다는 각 지역에서 모여든 이들이 더많이 살고 있다.​광저우 토박이들은 외부로 잘 나타나지 않고 대부분 부동산 사업을 영위한다. 중국 정부가 민간인에게 대여 형태로 나누어 준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자연스레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필자가 사무실로 쓰고 있는 건물 주인도 광저우 토박이인데 주변에 큰 빌딩을 일곱 채나 소유하고 있다. 이처럼 상행위를 통해 부자가 되었다기보다는 땅을 소유하고 있다가 저절로 부가 축적된 경우가 많다. 그것도 땅을 산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분배를 한 덕분이니 복이 절로 굴러든 셈이다.  중국인들은 미신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광동 사람들이 심한 편이다. 건물 주인도 건물 문 앞에 주차를 못하는데 그 이유는 돈이들어오는 흐름을 막기 때문이란다. 집집마다 또 상점마다 재물신을 모셔놓고 아침마다 향을 피우고제를 올리는 모습은 이들의 일상이다. 중국인들이 8을 좋아하는 이유도 돈을 많이 번다는 ‘파차이’의 ‘파’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8은 ‘Ba’, 파차이의 파는 ‘Fa’로 발음된다. 하여튼 중국인들은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연관성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한편 중국에는 아직도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수많은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물론 부통화(보통화:표준말)가 통용되고 있지만 지역에서 쓰는 말이 별도로 있다. 각 지역의 언어는 우리나라의 경상도와 전라도 방언 개념이 아니라 전혀 알아들을 수없을 정도로 완전히 다르다.​특히 광동성에서는 세 개의 언어가 쓰인다. 광동성에서 주로 사용하는 캔토니스(광동), 즉 광동어를 비롯하여 싼토우, 양지앙, 주하이 등 다양한 언어가 통용되고 있다. 같은 싼토우라고 해도 지역마다 또 다르니 외국인들이 이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광동 지역에서는 태어나서 자라면서 그지역 말(구쌍화: 고향 말)을 배우고, 방송이나 지역 간 교류를 통해 자연스레 광동어를 접하며, 학교에 들어가면 표준어를 배운다. 따라서 광동 사람들은 자연스레 세 가지 말을 구사하게 된다. 광동 사람들은 광동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한데, 중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지역이라는 이러한 우월감을 언어로 표출한다. 다른 지역 사람들과 차별화되고싶은 감정을 자신들의 언어인 광동어로 나타내는것이다.​광저우는 광동성 교통의 중심지이다. 전국으로 통하는 고속버스와 기차가 매일 출발하고, 기차도 다른 지역보다 다양한 노선을 구축하고 있다. 광저우에는 광저우, 광저우 동, 광저우 남, 광저우 북의 네개 역이 있다. 전국으로 통하는 일반열차는 광저우 역에서 출발한다. 홍콩으로 통하는 관통열차는 광저우 동역에서 떠난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지만 50년간 자치를 인정하기로 한 까닭에 아직도 홍콩과 중국을 오가기 위해서는 출입국 수속을 밟는다. 요즘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고속열차는 광저우 남역이 종착점이다.​​​광저우에서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은 버스다​​전국으로 통하는 일반열차는 광저우역에서 출발한다 많은 시민이 모여 사니 대중교통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은 역시 버스다. 아침 5시 반부터 밤 11시 반까지 운행되는 버스는 도심 전지역을 누비고 다니며 시민들의 발 역할을 톡톡히 한다. 버스 요금은 2위안(약 370원)으로 저렴한 편이다. 버스 다음으로 많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지하철이다. 광저우 지하철은 8개노선이 개통되어 있으며, 현재 9호선이 건설 중이다. 일반 버스가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는 우리의 마을버스와 같은 버스들이 운행되고 있고, 교통시설이 열악한 지역에서는 오토바이가 많이 사용된다. 예전에는 휘발유를 사용하는 오토바이가 운행되었지만 지금은 전기 오토바이만이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다.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10여 년 전 오토바이를 이용한 날치기가 성행하면서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고 사망사고 또한 많아지자 오토바이 이용을 제한하기 위해 내린 조치다. 때문에 광저우 시내의 주유소에서는 오토바이에 급유를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호스를 이용해서 자동차의 휘발유를 오토바이에 급유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러나 경찰에게 적발되면 바로 압수당한다.​외국계 프랜차이즈 음식점과 커피점 성황광동음식은 중국음식 중에서 담백한 것으로 유명하고 어느 지방보다 다양한 음식으로 우리들의 미각을 자극한다. 음식점에 가면 상어 지느러미, 뱀, 전갈, 비둘기 등 희귀한 재료를 이용한 음식들이 즐비하다. 전에는 살아 있는 원숭이 골 요리도 광동음식에 속했으나 요즘은 광저우 시내에서는 팔지 않는다. 광동 전통음식으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딤섬과 탕펀을 들 수 있다.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보통 5시 반에 저녁을 먹고 일찍 쉬는 것과는 달리 광저우 사람들은 저녁은 일찍 먹더라도 늦게까지 술자리를 만들거나 야식을 즐겨 먹는 편이다. ​한편 경제 발전과 더불어 이곳의 식생활도 서구식으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깨끗하고 청결한 음식을 선호하면서 피자헛, 맥도날드, KFC 등 외국의 프렌차이즈 음식점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또한 전통적으로 차를 마시던 중국인들도 얼마 전부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웬만한 수퍼마켓에는 인스턴트 커피를 팔고, 광저우도심의 유명한 건물에는 반드시 스타벅스가 있을정도로 커피문화가 대중화되고 있다. 커피 전문점은 미국의 스타벅스와 영국 브랜드 코스타가 선도하고 있으며 한국의 카페베네와 대만의 85도가 그뒤를 따르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중국 브랜드의커피 전문점도 하나씩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 외국계에 비해 약세다.​​​광저우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베이징루​​광저우는 오래전부터 중국산업의 견인차 역할을하고 있다. 1957년에 시작되어 2015년 가을에 118회를 맞이한 광저우 무역 박람회(Canton Fair)는 중국 최대의 전시회다. 봄과 가을에 개최되는 이전시회는 전세계 바이어들을 불러 모은다. 불과20여 년 전만 해도 이들은 광저우에 오지 않고 홍콩을 통해 수입했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이나 품질이 국제 규격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공장들의 해외 교류가 많아지면서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역이 크게 늘었다. 이로인해 중국 전시회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광동 전시회는 중국 무역의 판도를 바꾸는 대형 이벤트로자리잡기에 이르렀다.​​​광저우 총영사관에서 개최하는 광동한국주간행사에서는 한중 문화교류의 장이 열린다​​현재 광저우에는 2만여 명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다. 대부분 의류업에 종사하며 일부는 한국식당을운영하고 있다. 특히 웬징루라 불리는 한국인 타운은 한국식당과 카페가 많아 광저우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 중 하나다.​ 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웬징루라 불리는 한국인 타운은 한국식당과 카페가 많아 광저우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 중 하나다 ※본 내용은 자동차생활 2016년 2월 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이우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포탕(佛堂) 2017-02-16
이우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포탕(佛堂)​세계 최대의 도매시장이 있는 이우는 오늘날 현대식 건물과 고급아파트, 최고급 승용차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개혁개방 이전에는 그리 풍요로운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우 중심지에서 10km 떨어진 포탕이 명나라 때부터 이우의 중심지였다. 최근 재정이 풍족해지고 시민들의 삶에 여유가 생긴 이우시는 이우 시장과 포탕의 역사시설을 함께 엮어 쇼핑과 관광을 겸하는 도시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오래전에 소개했던 이우(义乌: 의오, 의로운 까마귀라는 뜻)에는 세계 최대의 도매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점포 수만 7만 개가 넘어 이를 다 구경하려면 9개월이나 소요된다고 한다. 이우는 세계와 중국 시장을 아우르는 상거래를 통해 중국에서 요즘 가장 잘 나가는 도시 중 하나다. 조그만 도시답지 않게 고층빌딩과 고급 승용차가 도로를 메우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곳이 중국일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이처럼 이우에는 현대식 건물과 고급아파트, 최고급 승용차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지만 개방 이전에는 그리 풍요로운 곳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우는 광동성과 더불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라 할 수 있다. 만약 덩샤오핑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우도 없었을 것이다. 현재는 도매상가인 국제상무성을 중심으로 복잡하고 현대화된 도시를 형성하고 있지만, 2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우의 중심지는 포탕(佛堂: 불당)이었다.​​​ 포탕은 이우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진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공업단지가 형성되어 겨울철 여성들이 즐겨 입는 레깅스와 장갑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다. 포탕이 이우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배를 이용할 수 있는 수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기차가 생활화되기 이전에 중국에서 가장 유용한 교통수단은 배였다. 중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이기 때문에 인력이나 물자를 다른 지역으로 수송하는  난관에 부딪치곤 했다. 육로를 이용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것. 이를 타개하기 위해 중국인들은 운하를 만들었고 그 결과 교통혁명을 이룰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운하를 만들어서 수천km에 이르는 뱃길을 운송수단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물을 잘 이용할 줄 아는 민족이었다. ​​배를 이용할 수 있는 수로 덕분에 포탕은 옛 이우의 중심지였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넓어 인력과 물자의 수송을 위해 일찍부터 운하를 만들었다수로 주변의 강태공들​​명·청 흔적 간직한 이우의 옛 중심지포탕이 21세기에 와서 다시 뜨는 이유는 이우가 먹고 살만해졌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에는 역사에 별 관심이 없기 마련이다. 필자가 미국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면서 가장 인상 깊게 느낀 점은 어딜 가나 박물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민과 개척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를 만들었다. 200여 년의 짧은 역사 탓도 있겠지만 사실 먹고 살만하니 자신들의 역사를 자랑하고 싶었으리라. 이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우 시장이 세계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시의 재정이 풍족해지고 시민들의 삶에 여유가 생겼다. 인간이 부를 축적하면 명예욕이 생기듯이, 이우 사람들 또한 자신들의 역량을 치장하고 과시하고 싶어졌을 터. 하지만 이우는 도매시장 외에 특별히 내세울 만한 유적지가 없었다. 그래서 주목한 곳이 바로 이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포탕이다. 세계 각국에서 많은 바이어들이 드나드는 이우에는 사실 내세울 만한 관광명소가 없다. 1,000만 명에 이르는 관람객들이 이우 시장에서 쇼핑을 한 뒤 인근 똥양(东阳: 동양)의 헝디엔(横店) 영화촬영소로 향하는 것을 본 이우시는 관광객 유치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내 집으로 들어온 이들을 다른 도시로 빼앗기는 것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놓치는 꼴 아닌가. 그래서 이우시는 쇼핑과 관광을 함께 할 수 있는 종합 관광레저 타운 개발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포탕은 이우에서 명나라와 청나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오래전부터 운하를 통해 뱃길을 이용했던 중국인들은 그 수로를 이우까지 연결해 물자를 운반하면서 이우가 내륙으로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했다. 포탕에 조성되어 있는 옛 거리에는 명대의 건축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00여 년 전에 지어진 2층 집과 돌로 다져진 길을 걷노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200년 전의 중국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오후부터 기나긴 담뱃대를 물고 마작을 즐기는 한량들이 주점을 점거하다시피 하고, 돌로 다져진 길 위를 바쁘게 지나가는 인력거의 모습이 눈앞에 들어온다. 부두에는 힘겹게 물자를 나르는 고단한 노동자와 미소를 머금으며 돈을 세는 배 주인의 얼굴이 함께 투영된다. ​ 포탕에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흔적이 공존한다​명나라 시대에 지어진 500여 채의 집들은 아직도 건재하고, 200여 미터에 이르는 구시가지에는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이들 건물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건물 소유주인 이우인들은 이들 건물을 임대하고 환경이 좋은 이우 시내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집이라 환경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시내에 비해 임대료가 싸기 때문에 객지에서 온 사람들은 이런 시설도 마다하지 않는다. 인근의 짱시(江西省: 강서성), 안후이(安徽省: 안휘성), 허난성(河南省: 하남성)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건물이 3층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은 이 지역의 높은 습도 때문이다. 포탕은 우기인 겨울과 봄에는 빨래가 거의 마르지 않을 정도로 습도가 높은데, 중국 중부 지역은 이처럼 대부분 3층 구조로 되어 있다. 2층과 3층은 방으로, 1층은 주방으로 사용한다.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이 큰 도시는 우리나라처럼 빠르게 핵가족화되어 가고 있지만 작은 도시나 농촌은 아직도 2~3대가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있다. 2층은 자녀들이, 3층에는 부모세대가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명나라 시대 건물과 최신 카페가 공존포탕의 여름은 기온이 섭씨 40도가 넘기 때문에 에어컨 없이는 살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실외기가 달려 있는 집이 별로 없는 것을 보면 대부분 선풍기로 무더운 여름을 넘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상점이 있는 길 안쪽으로 들어서니 양쪽으로 늘어선 가게들이 그야말로 영화에서 본 청나라의 풍경을 방불케 한다. 상점에서 파는 물건들은 일상용품에서 기념품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하다. 대부분 빨간색으로 치장하고 있는 물건들을 보노라면 이곳 역시 중국의 한 지역임이 실감하게 된다. 중국인들이 빨간색을 좋아하는 것은 빨간색이 행운을 불러오고 액운을 막아준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포탕의 어디를 가나 마오쩌뚱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와 모자, 가방 등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에서 재물 신처럼 받들어지고 있는데, 중국의 공산혁명을 이룬 마오쩌둥이 자본주의화된 지금에도 신격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절이 우리나라와 달리 마을 안에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우리의 경우도 고려시대까지는 국교처럼 여겨지던 불교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의 영향으로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절이 민중들과 함께 하기 위해 마을에 있었다. 마을에는 명나라시대부터 영업을 해온 중의원이 있고 약국도 있다. 지금도 중의원은 진료를 하고 있으니 200여 년이 넘은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병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한쪽으로 엿을 파는 가게가 보인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곳이다. 원래 이우에는 오래전부터 탕(엿이나 사탕 같은 것)을 만드는 공장이 많이 있었다. 이우에서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사탕수수를 재료로 사탕을 만들어 외부에 팔아왔다고. ​​​​오늘날 이우의 번영을 가지고 온 것은 일명 ‘지모환탕’(鸡毛换糖) 정신의 계승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모환탕이란 ‘탕과 닭털을 바꾼다’는 뜻으로, 오래전부터 이우 사람들이 탕을 만들어 짱시성(江西省: 강서성)에서 판 돈으로 닭털을 사와 부채를 엮어 다른 지역에 내다 팔았다. 당시에는 변변한 교통편이 없었던 만큼 걸어 다니면서 밤이 되면 길에서 잠을 자며 장사를 하러 다녔다. 여름에는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이 작렬하고 겨울에는 비가 자주 내리는 지역을 한 달 가까이 걸어 다니며 장사를 했으니 그들의 억척같은 삶이 오늘에 이르러 이우인의 정신으로 빛나고 있는 듯하다. 혼자 다니기가 무섭고 위험해 보통 10명 정도 무리를 지어서 다니곤 했다고. 엿 가게에서는 지금도 옛날 방식으로 엿을 만드는 방법을 볼 수 있다. 관광객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당시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형상화한 조각들​엿 가게 바로 옆으로는 현대식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옛날 건물들이 즐비한 곳에 현대식 카페가 있다는 것이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 풍경이 이색적이어서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홍콩에서 왔다는 젊은이들은 이우에 상품조사차 나왔다가 이곳에 들렸다고 한다. 카페를 방문하는 손님들은 관광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커피 한 잔 값이 30위안(약 5,500원)이나 하니 마을 주민들이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이곳에 들를 일은 없어 보인다. 아직은 포탕이 외부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우 시장이라는 특수성이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도 빈번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보니 이곳에도 있을 건 다 있다. 비록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치과도 있고 이발소도 있다. 치과는 이곳에서 치료를 받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해 보인다. 옆에 있는 이발소는 어린 시절 우리네 동네 이발소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목표는 쇼핑과 관광을 아우르는 도시시내 밖으로 나오니 강과 엉성하게 이어진 다리가 보인다. 예전에는 강을 건너는 중요한 교통로였겠지만 지금은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낡은 모습이다. 강을 끼고 강변에 제법 큰 규모의 나루터가 자리하고 있는데, 중국에서는 이런 나루터를 마토(码头)라고 부른다. 필자가 어렸을 때에는 한강에도 나루터가 여럿 있었다. 노를 저어 한강을 건너던 나룻배는 당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지금이야 낭만적인 풍류로 보이지만 당시에는 사공이 무척 힘든 직업 중 하나였다. 마토의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이 정도라면 당시 강을 통해 운반되었던 물자의 양이 엄청났을 것으로 추정된다.​​​강변에 자리한 옛 나루터 표지석과 기념물들​​​실제로 포탕에 와서 보니 예전부터 이곳이 이우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는 말이 어느 정도 실감이 간다. 강변에는 당시 일을 했던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표현한 형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조각을 보니 그때 사용했던 운반도구가 뗏목이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의 지류는 물살이 세지 않아 뗏목으로도 운반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뗏목이 수시로 드나들던 나루터는 이제 낚시터로 바뀌어 강태공들의 차지가 되었다. 표지석에 관청마토(官???)가 있는 것으로 보아 관청에서 관리하던 마토도 있었던 모양이다. 마토는 당시 물자를 운반하는 대단히 중요한 장소여서 관청에서 관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관청으로 들어오는 물품도 이를 통해 오갔을 것이다. 이 강의 지류는 가깝게는 인근의 진화(金?), 롱요(?游), 멀리는 항저우(杭州)까지 연결된다.낡은 다리를 걸어서 강을 건너니 새로 짓는 건물들이 마지막 단장을 하는 중이다. 이우시가 이곳에 종합 위락시설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우 시장과 포탕의 역사시설을 함께 엮어 쇼핑과 관광을 겸하는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이우시의 구상이다. 이에 따라 명나라와 청나라 풍의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으나 그다지 훌륭한 외관은 아니다. 당시의 이우는 베이징이나 상하이, 항저우에 비해 그다지 중요한 곳이 아니었기에 시선을 끌 만한 웅장하거나 화려한 건물이 없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이우시가 새로 짓고 있는 명나라와 청나라 풍의 건물들  어쨌든 이우시의 이 같은 노력으로 포탕이 점점 변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 여파로 포탕의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이 기회를 틈타 재빠른 건설업자들은 인근을 재개발하여 대규모 아파트를 지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불경기로 인해 중국도 부동산 경기가 침체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 최근 몇 개월 사이 중국의 외환보유고 6,000억달러가 해외로 빠져 나갔고 이우의 인구도 50만 명이나 감소했다. 우리나라의 전체 외환보유고가 3,000억달러가 조금 넘는 것을 감안하면 중국의 경제가 크게 요동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포탕이 새롭게 단장하여 이우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렇지만 이우에서 과거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장소가 포탕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글, 사진 양인환(중국통신원)​※본 내용은 자동차생활 2016년 3월 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중국이야기 [시안] 2017-02-13
중국 5천년의 역사가 숨 쉬는 곳시안(西安)중국 산시성의 성도인 시안(서안)은 실크로드의 시작점이자 주나라부터 당나라까지 13개의 왕조를 거친 역사적인 도시다. 1974년 발견된 진시황의 병마용은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예전의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양귀비가 목욕한 화칭궁이나 당태종이 지은 대명궁의 터도 남아 있다. 개방 이후 상대적으로 경제개발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으나 지금은 서부 대개발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병마용 1갱도를내려다본 모습. 세계 8대 불가사의 중하나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인 1974년, 시안(西安: 서안)의 외곽에서 농사를 짓던 양즈파(杨志发:양지발)는 우물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다가 이상한 물체를 발견했다. 도자기 재질로 만들어진 사람 모양의 파편과 무기로 쓰였을 듯한 쇳조각들이었다. 2천년 동안 묻혀 있던 진시황의 지하 세계가 처음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바로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병마용(兵馬涌: 빙마용)이다. 오늘날 시안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병마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업적을 사후 세계에까지 전하려는 중국인들의 혼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위대한 예술작품이다. 시안은 주나라부터 한나라를 거쳐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13개의 왕조를 거친 역사적인 도시다. 진시황(B.C. 259~210년)이 춘추전국시대의 험난한 여정을 거쳐 중국에 최초로 통일된 국가를 세운 것은 기원전 221년의 일이다. 진나라는 불과 15년이라는 짧은 역사에 불과하지만(기원전 221~206년) 거대한 중국을 통치하는 체계를 확립한 최초의 국가라는 점에서 중국인들에게 의미가 깊다. ​진시황은 처음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문자와 화폐, 도량형을 통일했다. 또한 봉건제를 폐지하고 황제가 각 지역에 지방관리를 파견하는 군현제를 실시했다. 그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해 황제로서의 권위를 확고히 구축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을 동원하여 기존에 있던 성들을 연결하고 개축해 만리장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원성을 산 데다 호사스런 아방궁을 만들면서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이에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학자들을 묻어 죽이고 책들을 모두 불살랐던, 저 유명한 갱유분서(坑儒焚書)가 일어나게 된다. 영원불멸을 꿈꾸며 불로초를 찾기 위해 많은 인원을 동원했던 진시황. 하지만 그는 50살이 되던 해 원정길에 나섰다가 짧은 생을 마감한다. 진시황이 죽은 후 진나라는 후계자 문제와 환관의 계략으로 3대를 잇지 못하고 15년 만에 멸망하니,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제일 큰 병마용1갱도의 입구 모습​​진시황과 양귀비의 발자취시안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 병마용은 전체 규모가 2만5,000평방미터에 달한다. 1974년부터 현재까지 4개의 갱을 발굴하였으며 아직도 새로운 병마용을 찾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4개의 갱 중에서 처음 발견된 1호갱은 길이 210m, 폭 60m, 높이가 4.5~6.6m로 규모가 가장 크다. 1호갱에는 약 6천 병사들의 도용(陶俑,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병사들의 신장은 175~196cm로 실제 키보다 조금 크게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맨 앞에는 겉옷만 입은 보병들이 도열해 있고 그 뒤로 갑옷을 입은 장수와 말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마치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을 기다리는 용맹스런 군인들의 대열 같다. 2호갱과 3호갱은 1호갱에 비해 규모가 작고, 아직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4호갱은 지금도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원래 병사들은 채색이 되어 있었으나 발굴 과정에서 햇빛을 받자마자 색이 변했다고 한다. 화려한 색으로 단장한 제각기 다른 얼굴의 8,000여 병마용을 보노라면 이를 제작하느라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이 들어갔을지 감탄이 절로 난다. 한쪽에서는 부서진 병사들과 말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기술자들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마치 진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8천여 병사들의 얼굴이 모두 다르게 생겼다​ 발굴작업과 함께 부서진 병마용을 복원하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시안에는 병마용 외에 중국 제일의 미인인 양귀비(楊貴妃, 719~756)가 목욕을 한 것으로 유명한 화칭궁(華靑宮: 화청궁)이 있다. 흔히 일컬어지는 중국의 4대 미인(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중에서도 제일로 꼽히는 양귀비는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백옥처럼 하얀 피부에 통통한 얼굴을 지닌 가장 중국적인 여인이다. ​원래의 이름은 양옥환이다. 걸출한 미모에다 춤과 노래 솜씨가 뛰어나 17살에 당 현종의 아들인 수왕이모의 부인이 되었지만 당 현종이 왕귀비의 미모와 춤 솜씨에 반하여 그녀를 품게 된다. 그러니까 며느리를 부인으로 맞이한 것이다. 당 현종은 원래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던 훌륭한 지도자였으나 양귀비와 사랑에 빠진 이후 정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고 백성들의 생활은 파탄에 빠져들었다. 특히 양귀비의 형제들이 조정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양귀비는 매일 온천욕을 하고 새로운 화장법으로 단장을 해서 당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런 꿈같은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양귀비의 오빠인 양국충과 안록산 간의 갈등으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쓰촨성(四川省: 사천성)으로 피신한 당 현종은 사랑과 목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피난길에 마차를 끌던 병사들이 이런 원인을 제공한 양귀비를 처벌하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고 반항했기 때문이다. 반란군이 뒤쫓아 오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몰리자 당 현종은 결국 양귀비를 버리게 된다. 이에 양귀비는 비단 끈으로 목을 매달아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자결이 아니라 환관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화칭궁에는 양귀비가 당 현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매일 온천욕을 했다는 목욕탕이 여러 군데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지금도 온천수가 나온다고 한다. 궁의 규모를 살펴보면 당시 당나라가 얼마나 번창한 국가였는지 짐작이 간다.​​양귀비가 목욕한 곳으로 유명한 화칭궁. 수려한 경관과 온천 덕에 예로부터 고관들의 휴식처로 인기가 높았다중국 제일의 미인이라 일컫는 양귀비. 기구한 운명을 살다간 여인이다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연못​지금도 온천수가 땅에서 솟아 나오고 있다​​중국 근대사의 중요한 무대화칭궁에는 중국의 근대 역사를 바꾸어 놓은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른바 시안사변(西安事變: 서안사변)이라 불리는 장제스 납치사건이다. 1936년 12월, 중화민국의 최고 지도자 장제스가 화칭궁에 머물고 있었다. 시안 인근의 옌안(延安: 연안)에 주둔하고 있는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의 공산당과 대치하고 있는 장쉐량(張學良: 장학량)을 독려하기 위해 이곳에 온 터였다. ​장쉐량은 동북의 마적 두목 출신인 장쭤린(張作霖: 장작림)의 아들이다. 만주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불태우던 일본이 장쭤린이 탄 열차를 폭파시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자 장쉐량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누구보다 강했다.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1927년부터 1949년까지 내전을 치렀다. 당시 공산당은 국민당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군사력이 열세였다. 국민당에 쫓긴 공산당은 대장정이라는 미명 아래 많은 병사들을 잃고 시안 인근의 연안에 자리잡은 뒤 겨우 명목만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신세였다. 사실 말이 좋아 대장정이지 국민당을 피해 도망만 다닌 것이 전부였다. ​처음 장시성(江西省: 강서성)을 출발할 때 8만 명에 이르던 인민해방군이 대장정 말기에 8,000명으로 줄었으니 공산당은 거의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국민당은 연안의 공산당만 휘어잡으면 중국을 차지하게 되는 절호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장쉐량은 공산당을 없애는 것보다 중국 땅에서 일본을 몰아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겼다. 그는 장제스에게 공산당과 힘을 합해 일본군과 싸우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장제스는 단호하게 “그렇게 못한다”고 대답했다. 바로 코앞에 있는 공산당은 이제 궤멸 직전의 상황. 바로 진격하면 중국은 자신들의 차지가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공산당보다는 일본을 물리치는 것이 우선이라는 제안을 거절당하자 장쉐량은 양후청(楊虎城)과 함께 장제스를 납치, 구금한다. 이것이 시안사변이다. 장쉐량에 의해 구금된 장제스는 어쩔 수 없이 마오저뚱과 함께 일본에 대항한다는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수용한다. 만약 그때 장쉐량이 장제스를 구금하는 사건이 없었다면 중국의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을까?장쉐량은 장제스로부터 국공합작의 승낙을 얻은 후 비행기를 태워 그를 난징으로 보냈다. 그리고 스스로 난징의 군사법정에 출두해 재판을 받았다. 국가원수를 납치한 하극상에 대한 처벌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사형은 면했으나 55년간 구금과 연금 등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당시 장쉐량은 장제스를 죽일 수도 있었다. 또 장제스에 버금가는 막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스스로 군사재판을 받지 않더라도 누구도 시비를 걸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 험난한 고행의 길을 걸었으니 모략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국의 역사에서 최고의 신사로 대접받아야 하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화칭궁 안에 있는 국민당 장제스의 집무실​​서부 대개발로 급속하게 발전 중시안 시내는 온통 공사 중이다. 서부 대개발이라는 정책 아래 시안 일대에 개발의 광풍이 거세게 불고 있는 것. 중국 지도를 펴놓고 보면 시안은 중국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중국 서쪽에는 위쪽으로 신장이, 남쪽으로는 시장(티벳)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의 면적은 중국 전체의 약 1/4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크지만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다. 또한 오랜 기간 영토문제로 분쟁을 겪었다. 중국이 지금과 같은 영토를 확정한 것은 1950년 이후다. 신장과 티벳을 빼면 시안은 중국의 서부에 속한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시안을 포함한 이 지역을 통상적으로 서부라고 부른다. 그동안 시안이 속한 서부지역은 개방 이후 급속히 발전한 중국 경제개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산시성(陝西省, 섬서성)의 성도인 시안 인근에는 웨이난(渭南: 위남)이란 도시가 있는데, 현재 중국의 국가 주석인 시진핑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이 때문인지 시진핑 정부가 들어선 이후 서부개발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동안 시안에는 군수공장 외에는 다른 산업이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가 시안에 2014년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 것도 시진핑 주석의 영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시안의 인구는 약 800만 명으로, 서부 대개발 이후 급격히 늘어났고 지금도 늘고 있는 상황이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고, 현재 공사 중인 아파트와 상업용 건물도 곳곳에 눈에 띈다. ​​시안 구시가지의 중심지 서부 대개발로 도시의 랜드마크가 달라지고 있다​시안의 택시는 BYD가 장악하고 있다  시안시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 안쪽에서도 공사가 한창이다. 정방형의 성곽은 14km에 이르는데, 당나라 시절 쌓았던 성을 명나라 때 보수 및 증축했다고 전해진다. 성곽에 올라보니 시안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난 성벽 밖으로는 물이 흐르는 수로가 형성되어 있다. 외부의 적이 쳐들어오려면 물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방어에 대단히 유리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성들도 이런 식으로 성 밖에 수로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성곽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문이 나 있는데 문을 연결하는 통로는 대단히 넓다. 워낙 길고 넓어서 이곳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자전거나 전동차를 타고 다녀야 할 정도다. 성은 웬만한 공격에는 전혀 동요될 것 같지 않게 견고하게 지어졌다. 당시의 중국은 북쪽의 오랑캐들의 침략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만리장성도 쌓았고 수도 안의 성들도 튼튼하게 지었다.   시안 중심부에 많은 유적지가 남아 있다시안성의 남문인 영녕문. 가장 큰 문이다성 주변에는 수로가 있어 공격하기 힘든 구조다 성벽이 높고 견고해 외적이 침입하기 힘들다. 제국이 무너진 것은 외적의 침입이 아니라 민심의 이반 때문이었다​성곽 위쪽의 모습​성곽은 상당히 넓어서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할 정도다 시안은 역사적인 도시답게 예전의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지금은 궁터만 남아 있기는 하지만 당태종이 지었다는 따밍궁(大明宮: 대명궁)도 당나라의 권위를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예전에 궁궐이 있었다는 함원전에 오르니 정문인 단풍문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곳에 있는 조각상에는 낙타와 함께 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종종 보인다. ​​​당나라 시대에 건설된 대명궁. 베이징의 자금성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규모가 크다대명궁에는 함원전의 터가 남아 있다. 함원전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것으로 보인다대명궁의 남문인 단풍문​​대명궁에는 시안이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많은 사적들이 있다​ 비상 시작한 실크로드의 시작점시안은 중국과 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시작점이다. 실크로드는 6,000km가 넘는다. 실크로드가 열린 것은 한무제(漢武帝, 재위기간 B.C. 141~87년) 때다. 중국은 당시 비단과 칠기, 화약과 제지 등을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까지 수출했다. 특히 종이는 유럽의 인쇄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실크로드가 가장 활발한 시기는 당나라 때다. 실크로드를 통해 서방으로부터 기린과 사자 등 희귀한 동물들과 문물이 중국으로 전해졌다. 또한 시안은 중국의 사상과 이슬람의 문화가 융합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 서부지역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 사상이 깊게 뿌리내려 있다. 이들은 이슬람 복장을 하고 코란을 읽으며 돼지고기 대신 양고기를 먹는다. 또한 밥 대신 빵이나 국수를 즐겨 먹는다. 이곳의 토양은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 비가 와도 물이 고이지 않기 때문에 쌀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래서 바람이 심하게 불면 잔모래가 날려 도시 전체가 스모그에 덮인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이슬람 문화가 그대로 살아있는 회민제거리회민제에서는 이슬람 복장을 한 중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이걸 먹지 않으면 시안에 오지 않은 것과 같다는 양러우파오모. 양고기가 든 국수에 빵을 잘라 넣어서 같이 먹는다 시안에서 이슬람 문화가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곳은 회민루다. 이곳 사람들은 이슬람식으로 생활을 하고 이슬람 음식을 먹는다. 때문에 이곳의 번화가인 회민제거리에는 양고기와 이슬람식 국수를 파는 곳이 많다. 특히 양러우파오모(羊肉泡馍)를 먹지 않으면 시안에 오지 않은 것과 같다는 시안 특별식이 있다. 양러우파오모는 양고기가 든 국수에다 빵을 잘게 조각내어 같이 섞어 먹는 음식이다. 특별히 맛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 사람들이 즐겨 먹는 고유의 음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시안 사람들은 우리처럼 생마늘을 먹는다는 점. 시안 사람들은 빵이나 국수를 먹으면서 생마늘을 같이 씹어 먹는다. 또 먹는 양이 남방 사람들과 비교해서 대단히 많다. 남방에서 온 사람들은 이곳의 그릇을 보고 2명이 먹어도 남을 양이라고 혀를 찬다.시안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였던 진나라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5천년 중국 역사의 중심축 역할을 해온 역사적인 곳이다. 아울러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했던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서 중국 서부 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해안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중국의 개방정책으로 현대사에서는 소외된 면이 있으나 서부 대개발 정책 이후 다시금 중국의 중심으로 거듭나고 있다. ​*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 회민제의 밤거리​
지중해마을 · 외암민속마을 2017-02-07
이국적인 풍경과 과거로의 시간여행지중해마을 · 외암민속마을프랑스 남동부의 프로방스와 그리스 산토리니를 들여다 놓은 듯한 충남 아산의 지중해마을은 수도권에서 넉넉하게 잡아도 2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다. 인근의 외암민속마을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삶터를 정해 살아왔는지 읽을 수 있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주변 환경과 자연 속에서 어우러졌을 때 생동감과 가치가 살아나는가 보다.  냇가 건너편에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 근사했다. 눈이 부실 정로로 새하얗게 다가서는 이국적인 건물과 순식간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에메랄드빛 지붕. 햇살에 비친 지중해풍의 이국적인 풍경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프랑스 남동부의 프로방스와 그리스 산토리니의 풍경이 국내에 있었다. 충남 아산시 외곽에 자리한 블루크리스털 빌리지, 흔히 지중해마을로 알려진 이곳은 수도권에서 2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으니 바쁜 일상에서 가볍게 떠나기에도 부담이 없다. 외암민속마을과 현충사 등 주변에 둘러볼 곳이 많다는 것도 흔쾌히 발길을 옮기게 하는 매력이다.충남 아산시 탕정면에 위치한 지중해마을은 초입부터 남다르다. 키 높이를 자랑하듯 우뚝 솟은 아파트의 숲 아래 자리를 잡은 2~3층의 건물에는 대부분 다양한 소품을 파는 상점과 음식점, 그리고 옷가게가 들어서 있다. 추운 겨울철 평일 낮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발길은 뜸하고, 간간이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건물을 배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지중해마을의 거리 모습. 겨울철 평일 낮이라 사람들이 뜸했다​색색으로 치장한 지중해마을의 모습​기대가 컸던 것일까? 마을을 둘러보는 데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미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은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고 했던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둠이 내리고 조명으로 환하게 밝아지면 이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거리가 활기를 찾을지도 모를 일. 건물들도 새롭게 치장을 할 것 같지만 밤의 즐거움을 만끽하기에는 기다려야 할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느린 걸음으로 떠나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이곳에서 외암민속마을은 차로 20여 분이면 닿는 곳에 있으니 지척이라면 지척이다. 아산시 내에서도 거리가 8km에 불과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36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 선조 때 예안 이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이 되었고, 그 이후 후손들이 번창해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양반촌의 면모를 갖췄다. 성리학의 대학자인 외암 이간 선생이 살면서 더욱 널리 알려져 ‘외암’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었다고.마을은 우리의 옛 것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설화산에서 내려온 맑은 물이 이룬 작은 하천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는데, 뉘엿하게 비치는 햇살을 받아 한 폭의 산수화를 펼쳐 놓은 듯하다. 입구의 나무로 엮은 제법 운치가 있는 다리는 조선시대로 들어가는 타임머신이 되어주고, 다리 아래에는 겨울의 포근한 햇살을 즐기는 앙증맞은 원앙들의 모습이 한참이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외암민속마을로 들어가는 타임머신 같은 다리 외암민속마을 시냇가에서 노니는 원앙과 오리 익살스런 표정의 장승들 매표소(성인 기준으로 2,000원이고 주차비는 무료)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현재와 단절된 듯한 과거가 그럴듯하게 펼쳐진다. 충청지방 고유의 격식을 갖춘 양반가의 고택과 초가, 돌담, 정원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다양한 농기구와 민속품이 이따금씩 발길을 멈춰 세운다. 집들은 주인의 관직명이나 출신지명을 따서 참판댁, 감찰댁, 풍덕댁, 교수댁 등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마을 뒤 설화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끌어들여 정원수로 이용하는 특색 있는 정원도 만날 수 있다.걸음은 시작부터 느려진다. 조청을 팔고 있는 초가집 안마당으로 들어서자 볏짚으로 엮어서 올린 지붕과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 농기구들에 눈길이 머문다. 쟁기로 논과 밭을 갈고, 풍구로 곡물에 섞인 쭉정이나 겨, 먼지를 날리며, 탈곡기로 벼를 터는 농부의 일상이 한눈에 펼쳐진다. 그 옆 가마솥이 걸린 부엌에서는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아궁이에서는 나무가 타는 연기에 연신 눈물을 닦아내는 아낙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게 한 집을 둘러보고 나니 이번에는 상류층 가옥을 대표하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떡 하니 서 있다. “이리 오너라”라는 큰 목소리에 “게 누구쇼”라며 얼굴을 빼꼼 내밀며 길손의 정체를 확인하는 청지기가 그려진다. 앞서의 초가와는 달리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점이 반갑다. 행랑채의 한쪽 벽에는 옷이 걸려 있고, 반다지가 놓인 수수한 공간은 그 시절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벗이 찾아온 듯 수담(바둑)을 나누는 장면이 정겹고, 대나무 병풍을 두른 연못으로 시선을 옮기면 그 푸름에 겨울을 잊게 된다. ​​​외암민속마을 상류층의 가옥상류층 가옥의 부엌. 아궁이가 정겹다 상류층 가옥의 반다지가 있는 방 바둑을 두는 옛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길은 다시 초가로 이어지는데 규모에 따라 한 칸에서 세 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의 전형적인 서민층 가옥이라는 설명이 있지만 현재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았다.“이게 전부일까?”라는 생각에 마을에서 높이가 한 뼘 정도 되어 보이는 뒷동산에 오르자 설화산 자락의 탁 트인 대지가 드러나면서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바라본 그림 같은 마을의 모습​​사람이 살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마을외암민속마을은 드라마 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경기도 용인의 한국민속촌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단순하게 옛 시공간을 보여줄 뿐 아니라 진짜로 사람이 살고 있기에 생동감이 넘쳐난다. 이곳에서는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떡메치기, 전통혼례, 다듬이와 전례구전, 문화예술공연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는데 홈페이지(www.oeammaul.co.kr)를 통해 예약을 하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다. 돌담으로 담장을 두른 초가와 기와집들 사이로 걷다보면 처마 아래의 벽에 ‘메주’와 ‘씨 옥수수’ 등을 엮어놓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화사한 날씨와 초가지붕, 그리고 황토색 벽과 어우러져 멋드러진 풍경을 선사한다. 출사를 나온 이들도 연신 셔터를 눌러대면서 감탄사를 연발한다. ​​​햇볕을 받은 처마 밑 풍경 메주와 씨 옥수수를 매단 풍경​문이 열린 가옥(마을 내 일부 가옥은 사생활 침해 및 도난, 훼손 등의 예방하기 위해 개방을 하지 않는 곳도 있음)으로 들어서니 뜰 한쪽에는 장독대가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고, 집을 지키는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객을 맞는다. 이미 많은 이들과 소통(?)을 했는지 짖지도 않고 재롱을 떠는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인다. 그렇게 마을을 돌아보는 시간은 넉넉하게 잡아 3시간여. 이정표가 이끌어 마을 어귀로 나오니 추수가 끝난 논에는 제각각의 익살스런 개성을 간직한 허수아비들이 허허벌판을 외로이 지키고 있다. 외로움에 지쳐 있을 이들과 사진을 찍다보니 어느새 짧은 겨울해가 서산으로 기운다. 일정으로 잡았던 현충사와 온양온천랜드는 다음 기회로 남겨야 했다. 외암민속마을을 소개하는 안내책자의 설명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장독대 요즘 사람의 모습을 한 허수아비​ “옛 사람들은 아무 곳에나 삶의 터를 정하지 않고, 바람과 물, 주변의 환경과 지리, 나아가 인심까지 두루 살폈다. 외암민속마을은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삶터를 정해 수백 년을 살아왔는지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주변 환경이나 경관 속에 사람이 어울려 살고 있을 때 생동감을 지니고 가치가 살아난다.” ​외암민속마을 문화체험행사외암민속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월 14일에 장승제와 10월 중 짚풀문화제가 열린다. 달집태우기라고도 하는 장승제는 정월 대보름 저녁에 달이 떠서 비칠 무렵 마을 뒷동산이나 들판 등에서 달집을 태우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다. 10월 중 열리는 짚풀문화제에서는 이간 선생을 기리는 ‘과거시험’이 재현되고, 추수를 통해 넉넉하고 풍요로운 마을의 정취를 함께 느낄 수 있다. 짚풀공예는 새끼꼬기와 짚신 만들기 등을 통해 정을 나눈다.  ​*글, 사진 김태종 ​
진스하임 오토 & 테크닉 박물관 2017-01-23
AUTO & TECHNIK MUSEUM, SINSHEIM인간의 욕망이 스며든 130년을  한눈에현대 과학 기술은 인간의 욕망과 투쟁을 통해 발전해왔다. 그 중 어떤 기술은 많은 사람들을 살상한 흑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에 자리한 진스하임 오토 & 테크닉 박물관은 이런 130년에 걸친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역사를 잘 보존하는 것은 중요하다. 후진국과 선진국의 차이는 역사를 다루는 태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옛것이 없었다면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도 없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크고 작은 박물관 또는 옛것들을 모아놓은 만물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특히 기술 강대국이라 불리는 독일에는 기술 관련 박물관이 많다. 철도, 자동차, 배, 항공기 등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교통 기술에 대해 독일만큼 잘 보존하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 ​웰컴 투 ‘오덕’ 월드! 진스하임 오토 & 테크닉 박물관(이하 진스하임 박물관)은 슈파이어 기술 박물관과 같은 그룹에서 운영한다. 하지만 두 박물관은 여러 모로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두 곳을 ‘처치곤란 골동품을 모아놓은 곳’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자동차와 항공기를 비롯한 기계, 군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입장과 동시에 정신줄을 놓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슈파이어 기술 박물관도 규모 면에서는 여느 박물관 못지않지만 본점(?) 격인 진스하임은 더 많은 소장품을 소유하고 있다. 특히 자동차를 더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  진스하임 박물관은 이름그대로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진스하임에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면 진스하임 박물관의 상징인 커다란 굴뚝의 끝자락이 보인다. 굴뚝에 가까이 가면 진스하임 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인 콩코드와 투폴레프 Tu-144의 모습이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낸다. 속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한눈에 보여주는 두 대의 음속 민간항공기는 진스하임 박물관의 또 다른 아이콘이다.1981년 개관한 진스하임 박물관은 개인이 운영하는 유럽 박물관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전체 면적은 5만㎡로 연간 방문객이 100만 명에 이른다. 전시 품목도 다양해 초음속 항공기, 일반 항공기, 자동차, 전차, 증기 엔진, 기관차 등 3,000여 점이 넘는다. 단일 품목으로 가장 많은 전시물을 자랑하는 자동차는 300여 대의 빈지티카와 1950년대 아메리칸 드림카, 마이바흐 컬렉션, 독일에서 가장 많이 부가티를 모아 둔 부가티 컬렉션 등으로 나뉜다. 또한 200여 대의 모터사이클, 150여 대의 트랙터, 50여 대의 항공기, 각종 엔진과 부품들, 2차대전 컬렉션까지 포함하면 전시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이 많은 소장품을 꼼꼼하게 보려면 넉넉히 3일은 투자해야 할 것이다.     Don’t Miss!콩코드 F-BVFB & 투폴레프 Tu-144  음속 민항기인 콩코드와 Tu-144는 속도경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런던부터 뉴욕까지 3시간 20분 만에 주파가 가능한 콩코드는 음속 민항기 시대를 알렸지만 환경문제와 채산성을 이유로 지난 2003년 퇴역했다. 전체 생산대수는 20대로 에어프랑스와 브리티시에어라인만 운용했으며, 진스하임 박물관에는 2004년 6월부터 전시되기 시작했다. 투폴레브 Tu-144는 콩코드에 맞서기 위해 탄생한 음속 민항기이다. 콩코드가 서방 진영의 상징이었다면 Tu-144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 기술의 상징이었다. 콩코드에 비해 실용화는 조금 늦었지만 크기에서는 콩코드를 압도한다. 두 항공기를 냉전시대 소모적인 기술경쟁의 아이콘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진스하임에는 콩코드보다 빠른 2001년에 들어왔다. Tu-144의 퇴역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진스하임 박물관에서는 이 두 음속 항공기의 실내도 구경할 수 있다. ​​발을 들여 놓으면 시간 감각이 없어진다 전시장은 크게 네 곳으로 나뉜다. 실내에 마련된 제1전시장과 제2전시장은 각기 다른 두 개의 테마로 꾸며져 있고 항공기가 전시된 야외전시장과 3D 아이맥스 영화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래된 공장 건물을 개조한 제1전시장과 제2전시장은 동선이 매우 복잡하다. 공간 크기에 비해 많은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고, 천장에는 각종 항공기들까지 매달아놓았다. 항공기 사이사이에는 채광창이 달아 자연광을 최대한 살리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하면 유지관리 비용은 높지만 직접 조명보다 관람객 눈이 덜 피로하다는 장점이 있다. 자동차를 비롯한 운송수단은 모두 하얀색 자갈 위에 전시해두었다. 슈파이어 기술박물관과 프랑스 국립 자동차 박물관도 이같은 방식을 사용한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하얀 자갈은 방충 효과가 있고 습도 조절에 도움이 되며, 자동차와 같은 운송 수단의 경우 오일 누유를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은 미국차들을 전시한 1950년대 아메리칸 드림카 섹션. 할리우드를 주제로 꾸며진 이 공간은 1950년대를 풍미했던 미국차들과 할리우드 배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핑크 캐딜락부터 뷰익과 올즈모빌, 쉐보레 콜벳, 포드 선더버드, 플리머스 퓨리 등 미국 자동차를 대표하는 아이콘들이 눈길을 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자동차 메이커들도 있고 현존하지만 예전의 명성에는 한참 못 미치는 미국차들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해진다. ​    ​Don’t Miss! 크라이슬러 300G풍요롭던 시절의 아이콘, 크라이슬러 300G는 전형적인 미국차의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길게 뻗은 테일핀과 늘씬한 보디라인은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다. 차체 길이는 5.7m에 이른다. 300은 크라이슬러의 럭셔리 라인업이며 컨버터블인 300G는 300시리즈 중에 가장 희소가치가 높다. 엔진은 V8 6.8L를 얹었으며 최고시속은 232km에 육박했다. 진스하임 박물관의 크라이슬러 300G는 1961년에만 생산되었으며 총 생산대수는 337대이다.​​​​Don’t Miss! 포드 갤럭시 500 뉴욕 경찰차 1960년대 말부터 뉴욕 경찰이 사용하기 시작한 포드 갤럭시 500은 V8 325마력 엔진을 탑재한 고성능 차이다. 경찰차로는 어울리지 않는 쿠페 타입이었지만 넉넉한 출력과 민첩한 핸들링 덕에 자동차를 이용한 범죄 수사나 도심 추격전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뉴욕 경찰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갤럭시 500은 이후 크라운 빅토리아에게 바통을 넘겼다. 갤럭시 500은 미국 경찰이 본격적으로 퍼포먼스카를 경찰차로 사용하기 시작한 첫 모델로 꼽힌다.    ​​ 제2차 세계대전 디오라마 아메리칸 드림카 섹션을 지나면 제2차 세계대전을 테마로 꾸민 디오라마 부스가 나타난다. 독일에게는 흑역사이긴 하지만 현대 과학 기술이 가장 빠르게 발달했던 시기가 1940년대라는 걸 생각하면 굉장히 중요한 자료들이 복원되어 있는 셈이다. 이 곳은 ‘밀덕’(밀리터리 마니아)에게는 필수 코스나 다름없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하늘에서 활약했던 독일의 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판터 5호와 같은 전차들이 가득하다. 이 섹션에서도 자동차가 등장한다. 나치의 수송 장비 대부분이 메르세데스 벤츠와 마이바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메르세데스 벤츠는 총독 의전차부터 시작해 각종 트럭과 수송 장비들을 나치에 제공했으며, 마이바흐는 탱크나 자주포에 쓰이는 특수 엔진과 항공기용 엔진을 제공했다. 전쟁 상황에서 자동차 메이커가 살아남는 과정을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자동차 마니아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Don’t Miss! 융커스 Ju-78  제2차 세계대전을 풍미했던 독일의 항공기를 꼽으라면 단연 융커스 Ju-87을 들 수 있다. 수투카로 불린 이 소형 폭격기는 다이브 밤버(dive bomber)라 불리는 수직 폭격기로 유럽과 연합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수직 강하 때 발생하는 독특한 마찰음은 멀리서도 수투카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총 6,500대가 생산되었는데 의외로 원형이 남아 있는 건 단 2대에 불과하며 현재 미국과 영국에 각각 보관 중이다. 진스하임 박물관에는 독일과 프랑스가 1989년 지중해에서 발굴한 잔해가 전시되어 있다. 잔해만 남은 수투카 역시 전세계에 단 3대뿐이다. 엔진은 메르세데스 벤츠 엔진을 사용했다. ​​ 본격적인 컬렉션은 이제부터제1전시장은 역사의 흐름을 나름대로 해석해 놓은 공간이었다. 진짜 시작은 제2전시장부터였다. 야외로 나와 하늘 한 번 보고 제2전시장에 입장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진스하임이 자동차 컬렉션이 본격적으로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 제2전시장은 그야말로 자동차 마니아들의 천국이었다. 입구부터 심상치 않았다. 지금은 전설이 된 그룹C 경주차부터 F1 머신, 챔프카 등이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2층에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멋들어진 자동차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티렐의 6륜 F1 머신과 블루 플레임이라 불리는 최고속력 경신용 로켓 비클까지 자동차의 역사 중에서도 속도에 대한 도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제2전시장을 돌아다니다보니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제1전시장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어디든 볼만한 것이 있다는 점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포츠카를 모아놓은 스포츠카 컬렉션과 정말 다양한 자동차를 만들었던 마이바흐 컬렉션, 그리고 독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부가티 컬렉션이었다.한편으로는 오래된 차들이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모델을 구분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친절한 설명판이 없었다면 어떤 차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좀 아는 차들이 모여 있는 곳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스포츠카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데토마소 판테라 GTS를 비롯해 페라리 250 GT 루소, 람보르기니 미우라는 어린 시절 자동차 관련 서적에서 많이 봤던 차들이다. 자동차 쪽으로 직업을 정한 후에도 몇 번 실차를 봤지만 볼 때마다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차들이다.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차를 실제로 만난 부가티 컬렉션의 감동은 지금까지 보고 싶은 차들을 찾아 방방곳곳을 누비던 필자의 경험 중에 가장 값진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동차는 그림이나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 모습을 보는 것, 그리고 직접 운전해 보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 ​​​2층과 제2전시장 뒷부분에는 각종 산업용 엔진과 기관차가 전시되어 있다. 기술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내연기관은 현재까지도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내연기관의 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곳은 상상 이상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선박 엔진부터, 부피가 작고 무게가 가벼운 로터리 엔진과 바이크 엔진 등 다양한 내연기관을 둘러볼 수 있다.진스하임 박물관은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풍성한 볼거리가 있다. 때로는 흑역사였기도, 때로는 인간의 무모한 도전이었기도 하지만,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편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인간의 욕심과 욕망 속에 발전해온 현대 기술을 짧은 시간에 모두 본다는 것이 무리이긴 하다. 하지만 자동차를 좋아하고 비행기나 각종 기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방문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더군다나 박물관에 전시된 자동차는 100% 운행이 가능하며 전차나 기관차도 90% 이상이 운행할 수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Don’t Miss! 페라리 250 GT 루소  지구상에서 단 한 대의 차를 줄 테니 선택해보라는 농담을 들으면 필자는 주저 없이 이 차를 꼽는다. 1963년부터 1964년까지 단 351대만 만들어진 250 GT 루소는 에릭 클랩튼과 스티브 맥퀸이 소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피닌파리나의 디자인과 페라리의 언더 섀시, 그리고 스칼리에티가 제작한 250 GT 루소는 250 시리즈 중에서 250 LM 다음으로 희소가치가 높다. 공식적인 거래가격은 4억~5억원 사이. 경매가로 45억원을 기록한 적도 있다. 엔진은 뱅크각 60도의 3,000cc 콜롬보 엔진이 탑재되었으며 최고속도는 시속 240km.  Don’t Miss! 데토마소 판테라 GTS  1971년부터 1992년까지 생산된 데토마소 판테라의 GTS 버전은 극소수만 만들어진 희귀 모델이다. 마르첼로 간디니의 디자인에 포드 클리브랜드 엔진을 올린 판테라는 특히 날렵한 외관과 컨트롤하기 힘든 동력계로 유명했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브랜드의 자동차이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이탈리아 디자인에 남성적이고 와일드한 터치를 불어넣은 외관만으로도 소장할 가치가 충분하다. 진스하임의 판테라 GTS는 1974년식으로 판테라 시리즈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모델이다. 판테라는 데토마소의 대표 모델인 망구스타의 후속으로 개발되었으며 데토마소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차로 꼽힌다. 1990년대 데토마소는 판테라의 뒤를 잇는 구아라를 발표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미지근했고 이후 2004년 데토마소가 파산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Don’t Miss! 브루투스 1908년 제작된 브루투스는 전투기 엔진을 올린 경주차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투기 생산이 금지된 독일에서 전투기 엔진을 납품하던 회사들이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판로가 바로 경주차에 전투기 엔진을 올리는 것이었다. 브루투스의 엔진은 BMW에서 개발한 V12 50L였는데 1,530rpm에서 550마력, 1,700rpm에서 750마력의 힘을 냈다. 브루투스가 한 번 움직이면 운전자는 매우 긴장했다. 엔진의 백파이어 불꽃이 옷에 붙기는 예사였고 실린더의 실화를 확인하기 위해 시동을 걸고 배기구를 들여다봐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체인 구동방식을 채택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 차는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보다 ‘사람을 잡는 데’ 더 최적화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Don’t Miss! 애스턴마틴 DB6 밴티지 007 시리즈의 본드카로 유명한 DB6 밴티지는 1964년 작품인 ‘골드핑거’에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애스턴마틴의 간판 모델이자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DB 시리즈 중 가장 인기가 많은 DB6 밴티지는 애스턴마틴이 추구하는 바를 가장 잘 나타낸 모델이기도 하다. 사실 국가기관의 정보원이 애스턴마틴 같은 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것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한때 영국을 대표했던 스포츠카 브랜드인 만큼 픽션과 논픽션은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스하임의 애스턴마틴 DB6 밴티지는 직렬 6기통 4.0L 엔진을 얹고 최고출력 324마력의 힘을 냈다. ​​​Don’t Miss! 독일 최대 규모의 부가티 컬렉션  진스하임의 자랑인 부가티 컬렉션에는 총 7대의 부가티가 전시되어 있다. 에토레 부가티의 최전성기 시절 만들어진 부가티 타입 57을 비롯해 타입 35, 타입 37, 타입 30, 타입 41 르와이얄, 타입 57 벤톡스, 마일리카 CC, 푸조와 협업으로 만들었던 베베 등이 그것. 이 중 가장 희소가치가 높은 타입 41 르와이얄은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총 6대가 만들어졌으며 각 보디의 디자인이 조금씩 다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컬렉션에도 있었던 르와이얄은 진스하임과 프랑스 국립 자동차 박물관에 있는 것들이 현재까지 공개된 모델의 전부다. 희소가치와 클래식카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꼭 봐야 할 컬렉션이다. ​​​Don’t Miss! 재규어 D타입  레이스를 위해 제작된 재규어 D타입은 1955년부터 1957년까지 르망 24시간 레이스를 제패한 경주차이다. 1954년에는 스털링 모스가 이 차로 시속 270km에 도달했으며 이후 재규어 스포츠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진스하임의 재규어 D타입은 1954년식으로 직렬 6기통 3.4L 엔진을 얹어 253마력의 최고출력을 냈다. D타입의 아름다운 디자인과 모터스포츠에서의 눈부신 활약은 재규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차로 꼽히는 E타입으로 이어졌다.​​​Don’t Miss! MAN 24실린더 디젤 엔진 상용차 시장의 강자 만(MAN) 역시 역사가 길다. 진스하임에는 만에서 제작한 엔진이 여러 개 전시되어 있는데 1943년 선박용으로 제작되어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전함에 채용된 이 엔진은 배기량이 무려 850L로 1만2,600마력의 힘을 냈다. 전시된 만의 엔진 중 배기량이 가장 크다. 독특한 점은 디젤 엔진임에도 불구하고 투 스트로크 방식이라는 점이다. 실린더는 총 24개이며 실린더 하나의 크기가 웬만한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는다. ​​​Don’t Miss! 메르세데스 벤츠 G4 군수용으로 개발된 G4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6륜 세단이다. 오프로드 주행을 염두에 둔 G4는 높은 생산단가로 인해 독일 육군 납품이 좌절되면서 나치의 퍼레이드용과 군무원, 사령관의 작전지휘용으로 전환됐다. 7인승 로드스터 구조는 메르세데스 벤츠가 1926년부터 시작한 G1 프로젝트에서 이어진 것이며 1934년부터 1939년까지 총 57대가 생산되었다. 엔진은 연식에 따라 5.0L부터 5.4L까지이며 모두 직렬 8기통을 사용했다. 출력은 덩치에 비해 낮은 115마력 정도. 진스하임의 G4는 복원된 모델이다. ​​​Don’t Miss! 마이바흐 SAW 엔진 개발자였던 마이바흐는 고급차만 만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메르세데스 벤츠와 마이바흐, BMW 등은 상당한 양의 자동차와 엔진을 군수물자로 독일정부에 납품했다. SAW는 전쟁 후 군용에서 민수용으로 전환된 모델로 다양한 공구를 싣고 다니는 다목적 자동차이다. 마이바흐가 이런 차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겠지만 독일이 일으킨 전쟁은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 SAW는 전쟁 이후 민수용으로 쉽게 전환된 모델로, 마이바흐의 설계 센스가 유독 돋보이는 모델이다.    Don’t Miss! 마이바흐 스페셜 레이싱카1920년 마이바흐가 만든 스페셜 레이싱카는 마이바흐 제펠린의 엔진이 올라간 경주차이다. 이름은 스페셜 레이싱카이지만 섀시는 기존 메르세데스 벤츠가 만든 승용차의 것을 사용했으며 커다란 변속기를 탑재하고 최고출력 300마력을 자랑했다. 단거리 기록용으로 제작된 이 경주차는 최고시속 160km를 기록했다. 당시 단거리 기록용 레이스는 현대의 드래그레이스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Don’t Miss! 람보르기니 미우라 P400 S현대 수퍼카의 기원이 된 미우라는 가로배치 미드십 레이아웃을 가진 스포츠카이다. 베르토네 시절의 마르첼로 간디니가 디자인한 미우라는 공력특성을 고려한 부드러운 디자인이 특징이다. 진스하임의 미우라는 1968년 토리노모터쇼에서 공개된 미우라 P400 S로 누적 주행거리는 2만km 정도에 불과하다. 진스하임 측은 ‘최초 출고 상태를 그대로 간직한 세계 유일의 미우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엔진은 V12 3.9L이며 최고출력은 미우라 P400보다 20마력 높은 370마력, 최고속도는 시속 280km다. 참고로 미우라의 최종 생산대수는 764대이다.​​*글, 사진 황욱익 ​​ 
중국이야기 [난징] 2017-01-05
중국 근대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곳난징(南京)​​장쑤성의 성도이자 경제와 교육의 중심지인 난징은 과거 삼국시대 오나라와 명나라의 수도였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지금은 인구 800만 명의 무척이나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난징조약과 난징대학살 등 중국 근대 역사에서 그 어느 곳보다 많은 질곡과 치욕, 그리고 슬픔을 품은 곳이기도 하다.​난징은 인구 800만 명의 큰 도시이다  중국의 북쪽에 베이징(北京: 북경)이 있다면 남쪽에는 난징(南京: 남경)이 있다. 베이징은 북쪽의 수도이고 난징은 남쪽의 수도라는 뜻이다. 난징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이 수도로 삼았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난징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일제에 의해 자행된 난징대학살이다. 근대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각광받았던 지역이자 가장 치욕적이고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난징은 장쑤성(江蘇省: 강소성)의 성도로 경제, 교육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약 800만 명으로 중국에서도 큰 도시에 속하며, 상하이에서 자동차로 약 3시간 거리에 있다. 난징은 중국에서 제일 긴 강인 장강(양쯔강)의 하류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자리한 장강대교는 장강에 놓인 세 번째 다리이자 길이가 6,800m에 달하는 장강에서 가장 긴 다리이다.  난징에는 공자가 세운 서원이 있다 공자서원의 모습​공자서원의 모습서원 안의 공자상 난징은 여름이 무척 더운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에서 3대 더운 지방으로 우한(무한)과 충칭(중경), 그리고 난징을 꼽는다. 한여름에는 최고 기온이 섭씨 40도가 넘고 습도까지 높아 찜통 같은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필자는 지금까지 난징을 세 번 방문했는데, 15년 전에는 기차, 5년 전에는 승용차, 그리고 이번에는 고속철을 이용했다. 이우에서 기차로 10시간이나 걸렸으나 고속철이 개통되면서 4시간이면 닿을 수 있게 되었다.  난징 지하철의 모습 난징-상하이간 고속도로는 왕복 8차선으로, 자동차로 3시간 정도 걸린다  오나라에 이은 명나라의 수도삼국시대 이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난징은 주원장(朱元璋)시대에 다시 중국의 중심으로 탈바꿈한다.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의 수도가 바로 이곳 난징이었던 것. 주원장이 태어날 무렵은 원나라가 쇠퇴기에 접어들어 상당히 혼란스러운 때였다. 황족들 간에 황제 계승을 둘러싼 다툼으로 나라는 큰 혼돈에 휩싸였고, 백성들은 관리들의 부패로 인한 고통과 더불어 기근과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주원장은 배고픔과 질병으로 어린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고 탁발승을 하며 걸인이나 다름없던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홍건적에 가담하게 된다. 도적질이라도 할 수 있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몽고족이 중심이었던 원나라는 상대적으로 남방 사람들을 업신여겼다. 주원장은 이를 기회로 남방의 세력을 하나씩 결집시켜 절대권력 같았던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운다. 1367년의 일이다. 걸인에서 시작해 일국의 황제 자리에 앉은 주원장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드라마다. 1398년 70세 때 주원장이 죽고 적손인 주윤문(朱允文: 주윈원)이 왕위를 잇는다. 주원장은 자신의 직계들로 하여금 각 지역을 분할하여 관장하게 하였다. 그중 넷째 아들인 주체(朱棣: 주디)는 베이징을 근거지로 한 북방지역을 맡고 있었다. 새로 황제에 등극한 어린 주윤문은 삼촌인 주체의 존재가 항상 두려웠다. 이 때문에 독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자객을 보내 그를 살해하려고까지 했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주체가 군사를 이끌고 난징을 함락시킨 후 새로운 황제에 등극한다. 그가 명나라를 가장 번영시킨 영락제다. 조선 초기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좌에 오른 세조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영락제는 황제에 오른 뒤 자신을 반대했던 세력을 무참하게 살육한다. 이에 난징에 머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영락제는 자신이 권력의 기반으로 삼았던 베이징으로 천도한다. 이후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로서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난징을 방문하면서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이 명나라 당시의 궁궐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상당히 웅장한 궁이 존재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흔적이 모두 없어졌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중국이 근대화되면서 고대의 역사적인 현장들이 많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난징에는 명나라 당시 세워졌던 성벽은 아직 존재한다. 난징시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성벽은 34km에 이른다. 도심에 세워진 성벽으로는 세계에서 제일 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보다 긴 만리장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북방의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한 전국적인 성벽이고 도시를 방어하는 성벽으로서는 난징의 것이 제일 완벽하고 길다. 성벽 위에는 길이 나 있어 구 난징 시가지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이곳 전시실에는 각 나라의 성벽을 비교해 놓은 자료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있다.   난징에는 명나라의 궁터만 남아 있고 실제 궁궐은 없다. 사진은 그나마 남아 있는 궁궐의 잔재​​난징도 공해가 심한 편이다. 미세먼지로 인해 평소 시야 확보가 어렵다 성벽의 길이는 34km로 도심에 형성된 성벽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 성벽 위에 당시의 무기를 재현해놓았다  난징조약과 중화민국의 거점명나라의 수도가 베이징으로 옮겨간 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난징은 청나라 말부터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한다. 영국과 벌인 아편전쟁 때문이다. 중국이 맺은 가장 치욕적이고 불합리한 조약이라 할 수 있는 난징조약을 체결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청나라의 건륭제는 “중국은 물자가 풍부해 외국과 무역을 할 필요가 없다”고 거드름을 피웠으나 실상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은 영국에 많은 비단과 차를 팔았으나 중국에 팔 물건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영국은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아편을 팔았다.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청나라는 아편대금으로 지출되는 은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나 국가 재정이 거덜 날 정도였다. 이를 보다 못한 청나라 조정에서 임칙서를 내세워 아편 거래를 엄격하게 막았다. 이에 반발한 영국이 중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제대로 된 공격조차 한번 못해보고 일방적으로 패한 중국은 결국 영국에게 홍콩을 할양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이 1842년 난징에서 이루어진 ‘난징조약’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억지이지만 당시 힘이 없었던 중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치욕스런 사건이다.청나라가 쇠락하면서 난징은 우리에게 손중산(孫中山)으로 잘 알려진 쑨원(孫文: 손문)이 건국한 중화민국의 수도가 되었다. 광동성 중산 출신으로 광동성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그는 호를 중산으로 쓸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정이 애틋했다. 손중산은 부패하고 무능한 청나라에 항거하여 민중들에 의해 일어난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삼민주의를 기본으로 한 중화민국을 건국하고 난징을 중화민국의 수도로 정했다. 소비에트공화국의 지원 아래 설립되었던 광저우의 군사학교도 난징으로 옮겨와 정부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위대한 중국을 꿈꾸었던,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었던 손중산의 꿈은 살아생전에 빛을 보지 못했다. 중국을 위해 불철주야 전국을 순방하며 세를 규합하던 1925년 베이징에서 59살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중국을 구하라”라는 말을 남긴 채.   웅장한 손중산의 묘를 올라가려면 숨이 턱밑까지 찬다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주창했던 손중산의 묘는 난징 중산능에 있다. 필자가 위대한 영웅을 참배하기 위해 중산능을 찾은 날은 평일인데도 수많은 참배객들로 가득했다. 그가 얼마나 중국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손중산의 묘까지 올라가는 길은 멀고도 가팔랐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가까스로 참고 마침내 정상에 올랐는데 아쉽게도 그의 묘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흉상이 있는 건물에서 그를 참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원래 손중산의 법통을 이어받은 것은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장개석)였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은 손중산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손중산의 처 쑹칭링(宋慶齡: 송경령)은 손중산의 정신을 이어받아 하나의 중국이 되길 바랐고 후에 공산당을 위해 열정을 바쳤다.   손중산의 실제 묘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다삼민주의를 제창하며 중화민국을 세운 손중산. 중국 혁명의 아버지로 불린다  손중산과 장제스는 동서지간이다. 광동의 갑부 송가수에게는 딸이 셋 있었다. 첫째인 쑹아이링(宋蔼龄:송애령)은 공자의 후손이라는 은행가와 결혼했다. 미국 힐러리 클린턴이 졸업한 웨슬리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한때 손중산의 비서를 맡았었다. 중국에서 첫째라고 할 정도로 많은 재산을 모은 그녀를 중국인들은 ‘돈을 사랑한 여인’이라고 부른다. 둘째 딸인 쑹칭링은 언니의 뒤를 이어 손중산의 비서로 들어가 결국 그의 아내가 된다. 손중산의 애국심에 반한 그녀에게 27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손중산이 사망한 후 그녀는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힘을 합쳐 하나의 중국을 만들어줄 것을 기대했으나 장제스가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국민당과 거리를 두고 공산당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그녀를 ‘중국을 사랑한 여인’이라고 부른다. 셋째인 쑹메이링(宋美齡: 송미령)은 장제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사치가 심하고 호화스런 생활을 즐겼는데, 중산릉 바로 밑에 있는 호화스런 쑹메이링 궁은 그녀의 이러한 생활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8,000평에 이르는 이 저택은 호화롭기가 이를 데 없어 유명 관광지로 개방을 하고 있다. 그녀는 장제스의 비서와 조언자 역할을 하며 대외관계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다. 그러나 그녀를 비롯한 주위의 인물들이 미국의 지원물자를 빼돌리고 부정축재를 하면서 국민당이 몰락하게 계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권력을 사랑한 여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일제가 자행한 대참사, 난징대학살난징에는 국민당의 정부가 있었던 총통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1912년 중화민국 임시총통으로 취임하여 집무를 했던 방과 행정기관, 도서관 그리고 정원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당시 행사에 동원되었던 군악대와 기마부대의 숙소가 인상적이다. 국민당 총통으로 중국을 통치하던 장제스의 집무실에는 쑨원의 사진이 걸려 있다. 장제스는 손중산의 법통을 자신만이 유일하게 이어받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공산당과 대립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온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손중산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그의 바람과는 달리 전력 면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지녔던 국민당은 공산당에 패해 타이완으로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민심이 천심이라는 국민들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멀리 대만에서 온 관광객들도 많았다. 국민당의 근거지인 이곳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총통부의 모습 인형으로 재현해놓은 국민당 총통 장제스 부부와 부총통 이종인 부부중화민국 총통과 부총통 취임식 사진전시실에는 일본군의 중국 침략사를 기록해 놓았다 근래에 난징이 우리의 뇌리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은 난징대학살이라는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금도 난징대학살은 중국에서 지어낸 허구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항상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다. 19세기 말부터 아시아를 제패하려는 야심을 품은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편입하고 중국 진출을 꾀하였다. 1895년 청일전쟁으로 기선을 잡은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점령한다. 호시탐탐 중국 내륙을 노리던 일본은 1937년 노구교사건을 트집 잡아 중일전쟁을 시작한다. 노구교사건이란 베이징 인근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병사 한 명이 실종되었다는 핑계로 중국군을 공격하면서 중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사건이다. 베이징과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있던 난징을 공략했다. 난징에 진입한 일본군은 군복을 벗은 중국군인들이 민간인에 섞여 있다는 구실로 남자들을 끌어내어 처형했다. 그들의 살해방법은 잔인하기보다는 악랄했다. 일본군인들이 중국 남자들을 총살시키는 것은 대단히 인간적인 방법이었다. 민간인들을 총검술로 죽이거나 칼로 목을 베고 생매장을 시키는 등 극도의 잔학상을 보였다. 나중에는 노인과 여성, 아이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였다. 중국에 따르면 그 숫자가 30만 명에 달한다고. 나아가 일부 일본군 장교들은 서로 칼로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을 벨 수 있는지 경쟁을 할 정도로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일본은 아직도 난징대학살을 부인하고 있지만 역사는 지울 수 없는 기록이다. 당시의 여러 가지 정황과 증언, 기록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중국에서는 난징대도살 기념관이라고 부른다)은 당시 일본의 잔학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어찌 보면 중국으로서는 치욕의 역사이지만 이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중국 젊은이들에게 이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좋은 교훈이 되리라.  중국은 난징대학살의 희생자가 30만 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중국은 난징대학살의 희생자가 30만 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죽은 이들의 호구(호적)가 보관된 장소 일본군인들의 잔학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당시 잔혹하게 살해되었던 중국인들의 유골. 발견된 장소를 그대로 보존해놓았다 올해 전지현이 주연으로 등장한 ‘암살’이라는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다. 일제에 대항해서 싸우는 독립군에 관한 영화였다. 요즘은 별로 없지만 필자가 어릴 적에는 일본군과 싸우는 독립군에 관한 영화가 많았었다. 독립기념관이 있기는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시절은 우리에게 많이 잊혀진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도 일본과 보이지 않는 전쟁을 진행 중이다. TV를 켜면 아직도 일본과 전쟁을 하는 드라마를 매일 볼 수 있다. 일본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크기에 그런지 짐작이 간다. 일본기업들이 중국에 많이 들어와 있지만 중국과 외교적 마찰이 있을 경우에는 불매운동을 하고 일본 제품을 불태우기도 한다. 이런 때에는 중국에 상주하는 일본인들은 외출을 자제한다. 중국에서 일본차가 많이 팔리기는 하지만 아직도 한국의 현대자동차도 따라잡지 못한다. 다른 나라 시장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만약 중국에서 반일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본차의 판매량은 몇 배나 증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도 중국 침략에 대해 반성하거나 사죄할 생각이 없다. 일제의 침략을 받았거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반일감정이 남아 있는 나라는 현재 한국과 중국밖에 없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보면서 일본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앞으로도 결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 난징대학살 기념관. 중국에서는 난징대도살 기념관이라 부른다​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겨울바다 2016-12-29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겨울바다영종•용유•무의도​​겨울바다를 찾아 나선 영종도. 간조 때라 바다는 저 멀리 물러섰고, 한여름 그렇게 북적였을 해변은 철이 지나 찬바람만 휑하며, 상점들은 죄다 문을 닫았다. 그런 속에서도 드넓은 바다를 품고 싶은 한 쌍의 연인은 팔짱을 끼고 수평선을 향해 느긋하게 발걸음을 뗀다.​용유도에서 바라본 바다​​하늘은 온통 잿빛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은 잃어버린 무엇을 찾기라도 하듯 간간이 햇살을 드러내고는 이내 새색시마냥 얼굴을 붉히며 회색의 커튼 뒤로 얼굴을 가렸다. 전형적인 겨울 날씨다. 어느 순간 흰 사라기 눈이나 비를 뿌려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날이다.그럼에도 ‘떠남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던 누군가의 말이 장막을 비집고 진군하는 화사한 빛으로 다가선다. 굳이 ‘이런 날’이라는 생각의 문은 굳게 빗장을 걸었고, 잠시 후 제2경인고속도로를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들과 경합하듯 나란하게 달리고 있다. 나설 때만 해도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지만 주택가의 이면도로에서 큰 도로로 들어서니 한나절의 드라이브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어진다. 거기다가 추억의 한 페이지를 열 수 있는 곳이라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그리하여 정해진 목적지는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용유도와 주변의 섬. 신도와 시도, 장봉도 등이 지척이지만 주변의 작은 섬은 무의도 하나로 결정했다. 인천공항이 들어서면서 이젠 두 개의 큰 다리(영종대교와 인천대교)가 육지와 섬을 잇고 있지만 이전에는 영종도로 가기 위해선 월미도나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야 했다. 카페리에 자동차를 싣고 10여 분 만에 닫는 영종도의 선착장에는 인근 바다에서 나는 각종 생선들로 회를 떠주는 좌판이 벌어졌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당시에는 삼목도와 용유도가 영종도 부근의 섬이었지만 이들 사이의 간석지를 매립한 후 인천공항이 들어서면서 세 개의 섬은 이제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었다.영종도 선착장에서 10여 분 떨어진 곳에서는 80~90년대 스피드를 자랑하던 이들이 드넓은 공터에 일정한 코스를 만들고 경주용으로 꾸민 자동차로 경기를 벌였었다. 굉음을 토해내면서 흙바람을 일으키고 질주하는 경주차들의 박진감 넘치는 레이스에 넋을 놓았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카페리가 아닌 영종대교와 인천대교를 이용하면 된다. 편안함이 생긴 대신 기억의 한 페이지가 희미해져 가는 것이 못내 아쉽다.​​아름다운 낙조로 유명한 을왕리해수욕장제2경인고속도로와 이어지는 인천대교는 다리 길이만 21.23km에 이르는 국내에서 가장 긴 사장교로 주탑의 높이가 238m에 달한다. 중간 부분을 높게 만든 것은 인천항을 드나드는 큰 배들을 위해서다. 다리에 진입하자 갯벌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송도의 마천루가 도열하듯 늘어섰다. 손에도 쥐어질 듯한 여객선은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하면서 휘적휘적 인천항으로 향한다. 인천대교의 이용요금은 6,200원으로 민간출자 방식으로 건설됐기에 결코 싸지 않은 금액이다.   ​ 인천대교는 다리 길이만 21.23km에 이르며 주탑의 높이는 238m에 달한다 인천대교 고속구간이 끝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으면 장봉도와 신도, 시도를 가는 삼목여객터미널을 오른쪽에 둔다. 삼목교차로까지는 공사 등으로 인해 길이 조금은 불편하지만 이곳을 지나면 ‘인천공항북측방조제’의 탄탄대로가 펼쳐진다. 아쉬운 것은 제한속도가 60km라는 것. 오른쪽 방조제 위로 보호철조망을 친 탓에 달리면서 조망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점도 아쉽다.방조제의 끝 지점에서 왼쪽으로 돌아서자 이정표가 친절하게 왕산해수욕장으로 안내한다. 때마침 간조라 겨울바다는 저 멀리 물러서 있고, 한여름 그렇게 북적였을 해변은 철이 지나 바람만 휑하다. 상점들도 죄다 문을 닫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드넓은 바다를 품고 싶은 한 쌍의 연인은 팔짱을 끼고 수평선을 향해 느긋하게 발걸음을 뗀다.  왕산해수욕장 입구 왕산해수욕장에서 나와 5분 정도 달리니 ‘용유도’에 펼쳐진 넓은 모래밭 을왕리해수욕장에 다가선다. 늘목 또는 얼항으로도 불리는 곳으로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백사장 길이가 약 700m에 이르고 울창한 송림과 해수욕장 양쪽 옆으로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서해안에서 낙조가 아름답기로 손꼽힌다고 하는데 하늘을 보니 오늘은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해수욕장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마치 다운타운을 연상시킨다. 여러 숙박시설과 다양한 메뉴판을 건 즐비한 식당들, 그리고 잠시 쉬어가기를 권하는 멋진 카페. 차를 세우고 걸으면서 여유 있게 분위기를 감상하며 식욕을 돋궈보아야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일부 식당에서의 호객행위가 부담스러워 선뜻 들어서기가 주저된다. 바닷가에는 많은 이들이 백사장에 추억을 새기면서 귀밑으로 매섭게 파고드는 겨울바람을 만끽한다. 서울에서 불과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데다가 대중교통으로도 접근이 쉽기 때문에 평일에도 찾는 사람이 꽤 있는 모양이다.선녀바위는 해수욕장에서 ‘국립수산과학원서해수산연구소’ 방향으로 5분이면 닿지만 전혀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세월을 온 몸으로 맞아 부서졌거나 부서지고 있는 굴과 조개껍데기가 버물려 있는 것처럼 하얀 띠를 두르고 있는 해변을 ‘사각사각’ 밟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왼쪽으로 황토 빛깔의 괴석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데 이게 바로 선녀바위다. 온갖 상상의 나래를 다 펴보고 조목조목 뜯어봐도 도저히 맞춰지지 않는 퍼즐 같다. 앞이 아닌 뒤쪽 모양 때문인가? 이건 더 아리송하다. 선녀바위라는 이름을 어떻게 갖게 됐을까? 맑은 날에는 선녀들이 놀러 와서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전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선녀바위의 모습. 이름이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다​​​선녀바위 부근에서 해풍을 맞고 있는 생선들​​머지않아 추억이 될 무의도 뱃길영종도(용유도 포함)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을왕리해수욕장에서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는 영종도를 절반밖에 즐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선녀바위를 지나 더 달리면 오른쪽으로는 드넓게 펼쳐진 서해바다와 이따금씩 만나는 송림, 그리고 조망이 아주 뛰어난 식당(대부분 조개구이와 해물칼국수가 주메뉴)이 늘어서 있다. 길은 마시란로로 이어져 영종도 용유솔밭을 지난다. 오가는 차가 드물어 천천히 달리며 주변의 경치를 여유 있게 감상하기에 그만이다.슬그머니 시장기가 고개를 들자 유명세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황해해물칼국수’를 찾는다. 용유역 근처에 자리잡은 이 집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분점을 냈는데 각종 조개류에 황태와 새우 등으로 국물을 낸 칼국수의 시원한 감칠맛이 일품이다. 여기에 갓 버무려낸 겉절이와 알맞게 익은 깍두기를 곁들여 기분 좋은 포만감을 선사한다. ​​​시원한 감칠맛이 일품인 황해해물칼국수​용유역에서 무의도는 바로 지척에 있지만 잠진도 선착장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항하는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다. 배로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데도 왕복 이용요금이 3,800원(외래객 기준)이나 한다. 승용차는 여기에 2만원을 더 내야 한다. 무의도까지 다리를 놓는 공사가 한창이어서 이 뱃길도 머지않아 추억이 될 듯. 주변에는 실미도, 소무의도 등의 섬이 있는데 과거에는 무의도에서 소무의도로 가기 위해서는 작은 어선을 이용해야 했으나 현재는 연륙교가 연결되어 있어(광명항 선착장에서 소무의도 사이) 걸어서 10~15분이면 갈 수 있다.  잠진-무의를 오가는 잠진도의 여객터미널 무의도에서 가장 큰 갯벌이라는 하나개해수욕장은 선착장에서 차로 10분이면 닿는다. 하나개라는 지명은 ‘큰 갯벌’이라는 뜻이라고. 주변에 호룡곡산, 국사봉 등이 있어 등산까지 즐길 수 있다. 밀가루처럼 입자가 고운 모래가 깔린 갯벌 앞으로 시원한 바다가 펼쳐지는데 날씨가 맑은 날이면 멀리 황해도 장산곶까지 보인다고. 바닷가에 원두막식으로 지은 방갈로가 늘어서 있으며, 드라마 ‘천국의 계단’ 세트장을 둘러보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겨울의 짧은 해가 점점 빛을 잃어갈 즈음, 먼 곳으로 물러나면서 갯벌을 내어줬던 바닷물이 다시 찰랑찰랑 마중을 나온다. 겨울날의 짧은 해가 이내 바닷속에 잠기며 또 하루가 저물어간다.  글, 사진 김태종 무의도의 하나개해수욕장. 하나개는 큰 갯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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