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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야기 [천하제일이라는 계림의 산수] 2016-10-25
 桂林山水甲天下천하제일이라는 계림의 산수 ​  배를 타고 리지앙(Lijiang, 漓江: 이강)을 내려오면서바라보는 구이린(Guilin, 桂林: 계림)의 풍경은 필자가 이제껏 보아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예전에 중국의 내로라하는 시인들과 화가들이이곳으로 몰려와서 천하제일이라는 말을 서슴없이내뱉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환상적인 풍경을 안고있었기 때문이다. 안개가 낀 날이라면 시라도 한 수읊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다. 중국의 지폐 뒷면에는 중국의 아름다운 풍광들이그려져 있다. 50위안에는 티베트 포탈라 궁전이, 1위안에는 항저우 서호(西湖)의 모습이, 그리고 20위안에는 구이린의 황부탄다오잉(Huang bu tandaoying, 黄布滩倒影)이 자리하고 있다. 그만큼 구이린은 중국에서도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곳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2개의 강과 4개의 호수, 그리고 비고속철을 타고 광동성을 지나 광시성에 들어서면주위의 기묘한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그림을 그리는 대상으로 생각해왔던 산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다. 마치 전북 진안의 마이산 같은 산들이 주위에 널려 있다. 마이산은 2개의 봉우리가 생뚱맞게 올라와 있지만 이곳에서는그런 모습의 크고 작은 산들이 수백 km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구이린의 절경은 수억 년 전 바다였던 곳이 지각변동으로 인해 지상으로 돌출되어 수만 년동안 침식작용과 비바람에 씻기면서 만들어졌다.지질학자들에 따르면 가르스트(Karst)라고 하는 석회암으로 조성된 산들로서, 중국 계림과 베트남의 하롱베이가 이와 비슷한 구조다.​​광저우에서 계림까지 고속철로 연결된다​카르스트라는 형태의 석회암으로 구성된 산들이 계림(구이린)의 주위를 감싸고 있다(고속철 안에서 찍은 사진) 구이린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큰 도시에서 보았던 8차선 같은 대로는 없고 높은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연간 1,50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들이 찾는 도시이지만 그리 고급스럽거나 화려한 건물이 없다는게 신기할 정도이다. 도로에는 이층버스가 돌아다니고 무엇보다 모터사이클이 많다. 베트남의 호치민이나 동남아시아의 큰 도시만큼 많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이 모터사이클을 운전하며 이동하는 모습을 보니 이곳의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이 아마 오토바이인 모양이다. ​​관광객을 위한 2층 버스와 구이린 시민들의 발인 모터사이클​ 구이린에는 메리어트와 쉐라톤 등 세계 유수의 체인호텔들이 대부분 들어와 있지만 한결같이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작은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맥도날드와 스타벅스 매장은 있다. 그동안 필자는 베이징이나 난징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큰 도시에서 고대건물들을 별반 볼 수 없는 점을 특이하게 생각해왔다. 중국 남부의 최대 도시인 광저우에도 옛 성터의일부가 웨이슈 공원에 남아 있을 뿐 오래전에 지어진 건축물이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구이린에서도이러한 건축물을 볼 수 없었다. 중국은 최근까지도 경제개발이 모든 정책에서 우선시되어왔기 때문에 문화재 보호에는 관심이 없었다. 공산당과 연결되지 않는 역사적인 건축물들은 모두 헐어버리고 새시대의 건물들을 짓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라 생각해왔다. 구이린은 2,0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진시황 시절부터 천하의 구이린이란 소리를 들어왔고, 한때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区)의 성도였지만(지금은 난닝(南宁)이 성도) 변변한 역사적인 건축물이 없다는 것은 유감이다. 구이린은 물이 많은 도시다. 구이린의 중심부는 두개의 강과 네 개의 호수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에서봄은 베이징, 야경은 상하이, 안개는 중경, 비는 구이린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린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물과 무척 친숙하다. 구이린 관광은 배를 타고 강과 호수가 이어진 시 중심부를 도는것으로 시작된다. 여름에는 더운 날씨 때문에 사람들의 모습을 길에서 잘 볼 수 없지만 저녁이 되면 그들은 호수로 나와 더위를 식힌다. 밤늦게까지 시내의 강과 호수를 도는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즐기기도 한다.  ​ 시내에는 4개의 호수가 있다​​​구이린은 물이 많은 도시다. 도시에 2개의 강과 4개의 호수가 있고 비까지 많이 내린다​ 연중 온화한 날씨를 보이지만 여름에는 섭씨 36도를 오르내려서 무척 덥고 습도 또한 높다. 겨울에는평균기온이 섭씨 4~5도 정도이고 역시 습도가 높은 편이다. 봄에는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에 이곳을여행하려면 9월이나 10월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 20위안 지폐 속의 환부탄다오잉구이린의 진면목을 보려면 리지앙(漓江: 이강)을 따라 양수어(Ynagshuo, 阳朔: 양소)까지 이어진 강을 배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 구이린에서 양소까지63km에 이르는 강 옆으로는 그림 같은 산들이 병풍처럼 이어져 있다. 구이린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 코스를 선택한다. 여기를 보지 않고는 구이린을 구경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구이린의 선착장에는 항상 수많은 관광선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구이린은 도시 전체가 관광을 위한 도시이고 이곳 주민들은 모두 관광 가이드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텔마다 그리고 길거리의 관광안내 부스마다 여행 패키지 상품과 유람선 티켓을 팔고 있다. 식당 앞이나 택시 정류장에도 안내를해주겠다는 호객꾼들이 상주를 한다. 그렇지만 필자가 구이린에서 지내면서 받은 이곳 사람들의 인상은 대체로 순박하기 그지없었다. 구이린에서 배를 타고 양소까지는 3시간 정도가 걸린다. 강 양쪽으로 펼쳐진 비경들을 감상하다보면마치 딴 세상에 온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그러나 2시간쯤 지나면 좀 지루해지기도 한다. 워낙 멋진 풍광이지만 너무 많으니 나중에는 조금 무감각해지는느낌이랄까.​ ​유람선을 타고 이강(리지앙)을 따라 내려가는 코스가 구이린 관광의 기본이다​​아무튼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기이한 산세 때문에 이곳을 보기 위해 국내외에서 연간 1,500만 명이 훨씬 넘는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광 수익은 정부의 재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구이린 시민들의 삶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상하이나 선전처럼 돈 많은 갑부나 큰 기업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구이린의 관광 시스템은 체계적으로 잘 짜여 있다. 전날 호텔에서 예약을 하니 아침에 관광버스가 각호텔을 돌며 여행객들을 태우고 선착장까지 안내한다. 선착장에는 수많은 유람선이 출발을 위해 정박해 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나룻배 정도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생각보다 크고 깨끗한 유람선이다. 필자는 구이린에서는 사공이 젓는 나룻배를 타고 한가로이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 제 맛이라고 상상해왔다. 아마도 예전부터 구이린에 관한 자료를 보면 묘한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나룻배가 한가로이 떠다니는 장면이 꼭 나왔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최신 유람선이 우리를 반기니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우리와 같이 배를 탄 여행객 중에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 여행객도 꽤 많았다. 미국과 캐나다, 유럽 등지에서 온 외국인들을 위해 안내원이 중국어와 영어로 안내를해주었다. 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강변을 따라 늘어선 작은마을들이 보인다. 이곳에는 유람선보다 훨씬 작은5~6인승 배로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이런 마을에서 며칠 푹 쉬었다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을 따라 유유히달리던 유람선이 갑자기 속력을 늦추기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었는데 지붕이 낮은 작은 배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허름한 배가 유람선과 머리를 맞대더니 나이 지긋한 부부가 생선과 조개 등 각종 음식재료를 유람선에 전달하고 순식간에 떠나간다. 유람선에서 승객들이 주문한 음식 재료들을 이런 배를 통해 조달하는 모양이다. 모든 거래가 강 위에서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작은 마을들​​허름한 배가 유람선에 식재료를 팔고 있다​ ​조금 더 내려가다 보니 뗏목을 탄 젊은이가 위태로운 모습으로 빠른 물살을 따라 내려오더니 금방 유람선에 달라붙는다. 뗏목에는 망고, 수박 등 과일이 담겨져 있다. 지나가는 유람선에 뗏목을 대고 과일을 파는 과일장수다. 물에 익숙하다고 하지만 거의 목숨을 걸고 장사를 하는 위험천만한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뗏목을 타고 과일을 팔러 다니는 과일장사​​무협지를 보면 중국인들은 과장이 좀 심한 편이다.하늘 위를 날아다니고 손에서 장풍을 뿜어내서 상대방을 날려 보낸다. 이강에서 멋진 풍경이 몇 군데있는데 그 중 하나가 9마리 말이 달리는 모습이 보인다는 주마화산(구마화산: 九马画山)이라는 기암괴석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억지로 꿰어 맞춰도 아홉 마리의 말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데, 하여튼 중국인들은 9마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9마리의 말이 새겨져 있다는 주마화산(구마화산)​ 점심을 먹을 즈음 구이린이 자랑하는 황부탄다오잉(黄布滩倒影)에 도착했다. 잔뜩 기대감을 가지고 20위안 지폐에그려진 모습과 대조하니, 지폐의 그림이 약간 과장되게 그려졌음이 한눈에 느껴진다. 천하제일이라는풍경에 대한 기대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워낙 비슷한 풍경이 많다보니 ‘천하제일’이라는기대 효과가 반감된 걸까? 우리나라의 마이산처럼 봉우리 2개만 우뚝 올라와 있다면 마냥 신기하겠지만 이곳의 풍경은 전체가 그런 마이산 봉우리의 연속이다. 어쨌든 눈앞에 펼쳐진 황부탄다오잉의 모습은 인간이 그려낼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조각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수억 년 동안 지구의 역사를그대로 간직한 위대한 자연의 보고다.​​​계림의 제일이라는 황부탄다오잉​ 우리 입맛에 잘 맞는 구이린 음식약 3시간 동안의 유람선 여행의 종착지는 양소다. 양소는 인구 5만 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마을 전체가 천혜의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아니다. 기묘한 형상을 한 산들이 마을을 에워싸고있는 신비스런 모습이다.​ 양소의 환상적인 풍경​ 계림이 속해 있는 광시성은 광시좡족자치구(广西壮族自治区)로 불린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조선족을 포함해서 55개 민족이 있는데 그중 좡족(壮族)은약 1,600만 명 정도로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좡족은 광시성과 구이저우(Guizhou, 贵州:귀주)와 윈난성(Yunnan, 云南省: 운남성) 등 중국 남부에 널리 퍼져 있다. 또한 계림에는 좡족 외에도 묘족, 위족, 동족 등 다양한 민족이 함께살고 있다.​​​전통의상을 입은 소수민족들이 관광객들을 맞이한다​​양소에 들르면 꼭 가봐야 할 곳이 스와이타오위안(世外桃源: 세외도원)이다. 큰 호수를 끼고 소수민족들의 전통가옥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들의 생활풍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 또한 배를 타고 돌아봐야 제대로 구경할 수 있으니 계림은 역시 물이풍부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난 소수민족들의 삶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관광객들을상대로 춤을 추고 노래하며 기념품을 만들지만 이들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거의 없다고 한다. 소수민족의 대부분은 중국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외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관광지에서 얻는 이익이 이들에게 들어오지 않고 정부에귀속된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격이다.​​세외도원(世外桃源)에서 바라본 구이린의 모습​ 구이린을 거쳐 양소에 도착하면 하루 일정의 관광코스가 끝난다. 양소에서 구이린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대부분 육로를 이용한다.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도로 사정은 별로 좋지 않다. 새롭게 도로 공사를 하고있어 구이린으로 돌아오는 내내 먼지가 폴폴 날리는도로를 달려야 했다.​​중국음식은 주로 기름에 볶는 것이 많아서 우리 입맛에는 너무 느끼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구이린의 음식은 기름지고 느끼한 대부분의 중국음식과 달리 담백하고 매콤하다. 덕분에 입맛이 까다로운 한국인들에게도 이곳 음식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다. 이는 구이린 사람들이 즐겨 먹는 고추와마늘, 그리고 마를 이용한 독특한 양념 때문인데, 이 양념을 어느 음식에나 이용하기 때문에 매콤하고 쌉쌀한 맛이 오래도록 지속된다. 매운 맛이 느끼하면서 무척 매운 사천요리와는 또 다르다. 덕분에 구이린에 머무는 동안 음식 때문에 고생할 일이 없었다. 대부분의 음식이 매콤하고 쌉쌀한 맛이 나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을 듯하다.  ​구이린의 음식은 맵고 쌉쌀한 맛을 낸다 ​한편 쌀이 많이 나는 지역이라 오래 전부터 쌀로 국수를 만들어 먹은 구이린에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지닌 쌀국수 식당이 있을 정도로 오랜 쌀국수 역사를 자랑한다. 구이린 사람들도 대부분의 중국인들처럼 아침을 밖에서 사먹는다. 일반적으로 아침에 많이 먹는 죽이나 유토(油条)도 인기가 있지만 구이린 사람들이 제일 즐기는 것은 역시 쌀국수.​​​구이린의 명물인 쌀국수 ​일전에 베트남에서도 쌀국수를 정말 맛있게 먹었던 적이 있다. 허름한 식당이었지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는데 간단한 쌀국수가 어찌나 맛있었던지 지금도 입맛이 돋는다. 쇠고기 두 점과 숙주나물이 조금 올라간 것이 전부였지만 육수의 맛이 정말 환상적이었다. 반면 계림의 쌀국수는 베트남쌀국수와는 조금 다르다. 물 국수에서는 중국 특유의 약간 느끼한 맛이 나지만 비빔국수는 텁텁하면서도 끝맛은 쌉쌀한, 묘한 맛이 매력적이었다.​* 글, 사진 양인환 (중국통신원)​
포드 포커스로 달린 시드니 2016-10-20
​​​포드의 초청을 받아 호주 시드니로 날아갔다. 이번 출장의 주인공은 포커스. 그런데 일반적인 시승출장과 달랐다. 이틀을 꽉 채운 일정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먹고 놀고 운전하기. 포드는 포커스오너에 어울릴 라이프스타일을 체험시켜주고자 했다. 20년 만에 찾은 시드니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민첩한 포커스와 함께한  덕에 추억은  한층 더 명징해졌다. ​머나먼 지평선의 한 지점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서서히 고도를 낮춰가는 비행기 창밖으로 아침 햇살에 노릇노릇 물든 시드니가 펼쳐졌다. 멀리서도 오페라하우스와 하버 브리지가 또렷이 보였다. 개인적으로 20년 만에 찾는 호주, 그 중에서도 시드니. 과거 가난한 배낭여행자의 눈에 비친 시드니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문득 그때의 감흥이 밀려들었다. 이번 여정은 포드 아시아태평양 지사에서 기획했다. 출장의 주인공은 포커스. 그런데 포드 측은 “일반적인 시승 출장과 많이 다르다”고 미리 귀띔했다. 심지어 짐을 꾸려 시드니로 떠나기 전까지도 자세한 일정을 알려주지 않았다. 설렘을 한가득 안고 시드니 국제공항을 나섰다. 맑고 푸른 하늘, 늘씬한 홀덴 승용 픽업. 시드니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다만, 엄청 추웠다.​​ ​​달라진 미디어 환경 느낄 수 있어기자의 이름이 적힌 포드 푯말을 든 스태프를 만나 몬데오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이날은 저녁까지 공식 일정이 없었다. 목적지는 본다이 비치. 서퍼들의 천국으로 유명한 해변이다. 시드니 공항에서 본다이 비치까지 가는 길은 단조롭고한산했다. 20년 전엔 시드니 도심에만 머물렀다. 다른 데 갈 차편도, 돈도 궁해서였다. 도시 외곽의 허름한 풍경이 퍽 낯설었다.​한 시간여를 달려 본다이 비치에 도착했다. 해변을 이웃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여름 시즌에 장기 투숙하는 서퍼들이 많은지, 콘도미니엄처럼 취사 시설은 물론 세탁기까지 완벽하게 갖춰놓았다. 짐을 대충 풀고 서둘러 바닷가로 나섰다. 과연 서퍼들이 사랑할 만했다. 하늘은 맑았지만 바람은 거셌다. 짙푸른 바다는거대한 파도를 연신 둥그렇게 말고 있었다.​​​​정오쯤 되어 담당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근처 레스토랑을 예약해 놓았으니 점심을 먹자고 했다. 식당에서 대만과 중국 기자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홍보 담당은 “다른 기자들 체크인을 챙겨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대만에서 온 기자 빈센트에게 물었다. “이번 출장 뭐하는 거래?” 빈센트 왈, “글쎄~.” 나머지 기자들 역시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 가진 분명했다. 시대가 확실히 바뀌었다. 과거 기자들은 으레 돼지저금통만 한 DSLR과 수첩을 들고 다녔다. 그런데 이제 고프로나 액션캠, 스태빌라이저가 필수다. 컨텐츠도 달라졌다. 이날 함께 한 기자 넷 가운데 셋은 영상컨텐츠를 만들러 왔다. 대만에서 온 꽃미남 친구는 공중파 프로그램의 진행자라고 했다. 어쩐지 얼굴이 조막만하더라니.​나중에 만난 중국의 또 다른 친구는 유명 음식 칼럼니스트다. 말레이시아에선신문사가 운영하는 방송국의 여기자를 보냈다. 장비도 장난이 아니다. 삼각대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늘 보던 친구들이 모이는 자동차 전문지 대상의 시승회와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아이폰 하나로 찍어보겠다고 캠코더도 마다하고온 나 자신이 무척 부끄러워졌다. 이날 저녁, 모든 기자들이 호텔 로비에 모였다. 중동과 호주, 아시아 각국을 아우른 다국적 기자단. 우린 포드가 마련한 버스를 타고 시드니 도심으로 향했다.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시드니의 마천루가 눈앞에 한가득 펼쳐졌다. 꼬깃꼬깃 아껴둔 호주의 플라스틱 돈을 모아 킹스크로스 인근의 한국 식당을 찾던 20년 전 내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찡했다.​저녁을 먹고 돌아와 웰컴패키지를 열어 보니 일정을 소개한 책자가 있었다. 어색한 오탈자나 삐뚤빼뚤한 서체 없이 완벽한 한국어판이었다. 책자의 한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여러분은 단순한 차를 넘어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서 포커스의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나만의 콘텐츠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사진과 영상 스태프가 대기 중”이라고 했다.​​​​라이프스타일 체험 위주의 행사다음날인 8월 24일 아침이 밝았다. 낭패였다. 창밖엔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고있었다. 처음 겪는 겨울의 호주. 날씨는 걱정 이상으로 춥고 스산했다. 우린 셔틀을 타고 본다이 비치를 바로 옆에서 굽어보는 ‘본다이 아이스버그’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브리핑을 들었다. 비바람을 헤치고 파도를 타는 서퍼가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기자는 대만 꽃미남과 한 조였다. 그는 오른쪽 운전석이 부담스러웠는지 한사코 운전대를 양보했다. 결국 기자가 먼저 몰고 나섰다. 포커스의 행렬은 샤워기로 쏟아 붓는 듯한 빗줄기를 헤치며 본다이 비치를 빠져 나갔다. 이 친구는 스스로를 방송인이 아닌, 유튜버라고 했다. “개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 지 1년 반 정도 됐다”고 했는데, 한국 미디어에 궁금한 게 많았다.​포드가 준비한 첫째 날 여정의 테마는 ‘남부 해변 어드벤처’다. 본다이 비치를 출발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는 코스였다. 일반적인 시승회처럼 출발 이후 도착지까지 알아서 가는 방식이 아니었다. 중간 중간 콘텐츠를 만들 포인트와 운전자 교대장소, 커피 스톱을 마련해 지루할 짬이 없었다. 한참을 달려 로열 내셔널파크에 도착했다. 비는 아직도 그칠 조짐이 없었다.​​​​​​​로열 내셔널 파크는 호주의 흔한 공원처럼 야생동물이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이곳을 점령한 동물은 앵무새와 오리였다. 포드 스태프는 코알라 주식인 유칼립투스 잎으로 만든 이 지역의 전통차와 쿠키 등 주전부리를 한 상 차려놨다. 문제는 우리보다 새들이 이 간식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점. 특히 앵무새는 끊임없이 과자를 노렸고 짬짬이 훔쳐 먹었다.​​​​ 간식을 지키는 우리와 호시탐탐 노리는 앵무새의 실랑이를, 포드의 사진과 영상 스태프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기록했다. 조명까지 동원한 스태프에게 에워싸여 있다 보니 예능 프로그램 촬영 현장에 서 있는 기분이 들어 왠지 으쓱했다. 그런데 바쁜 건 스태프뿐이 아니었다. 각 나라의 기자들은 저마다의 장비로순간순간을 기록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일반적인 시승회와 분명 달랐다. 우린 시드니 인근의 명소를 따라 밟는 투어를왔는데, 다만 이동수단이 포커스일 뿐이었다. 이번엔 꽃미남이 운전대를 쥐었다. 그는 오른쪽 운전석이 익숙지 않은지 자꾸 왼쪽 갓길로 차를 붙였다. 그때마다 “차선 가운데로 달리라”는 무전이 날아왔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꽃미남은 웅웅거리는 영어 무전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교대 포인트에서 운전자를 바꾸고, 포커스의 행렬은 시클리프 브릿지로향했다. 높직한 교각 형태의 도로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해안 절벽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절경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비바람이 워낙 드셌기 때문. 궂은 날씨 속에서도, 포커스는 네 바퀴를 지면과 밀착시킨 채 늠름하게 달렸고, 실내는 쾌적하고 아늑했다. 안팎 다듬고 1.5L 에코부스트 엔진 얹어땅거미가 질 무렵, 첫째 날 일정의 종착지인 패퍼스 매너 하우스에 도착했다. 드넓은 농장을 낀 저택을 개조한 호텔이었다. 포드는 앞마당에 유리창을 검게 칠한 포커스 한 대를 준비했다. 직각 주차보조 기능을 체험할 기회였다. 한 번에성공한 기자에겐 샴페인을 건넸다. 기자들은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다른 이들의 실수에 탄식하고 성공에 환호했다. 둘째 날은 눈부시게 화창했다. 이날 일정은 좀 더 운전 위주였다. 벤들리 에스테이트, 버랑고랑 전망대, 글렌브룩, 시드니로 이어지는 코스였다. 포커스는 포드의 간판 해치백이다. C세그먼트에 속해 폭스바겐 골프, 푸조 308 등과 경쟁한다. 현재 140개국에서 판매 중인 포드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로 지난해 전세계시장에서 40분마다 한 대꼴로 팔았다.​​​ 포드를 대개 미국 빅3 중 한 브랜드로 알고 있지만 사실 유럽에 뿌리 내린 지100년이 넘었다. 1909년 영국 포드(Ford of Britain), 1916년 프랑스 포드, 1925년독일 포드(Ford Germany)를 통해 유럽 현지형 포드를 만들어오다 1967년에는유럽 전체를 총괄하는 유럽 법인(Ford of Europe)을 독일 쾰른에 설립했다. 보다 적극적으로 유럽 시장과 궁합이 좋은 차종을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해서다.유럽 기반의 포드는 앵글리아, 타우너스, M시리즈, 에스코트, 카프리, 컨설, 코티나, 그라나다 등 북미와는 다른 유럽 스타일의 포드를 만들었다. 현대자동차가 60~70년대 라이선스 생산한 코티나와 20M, 그라나다도 바로 유럽 포드에서 만든 것이다. 포커스는 1998년 에스코트의 후속으로 데뷔했으며, 현행 모델은 2010년 나온 3세대다.​이번에 시드니에서 만난 포커스는 최근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최신형이다. 포드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도 ‘싱크3’으로 진화했다. 애플 카플레이가 기본이고 기존의 장점이던 음성인식기능도 한 차원 업그레이드했다. 그래서 이제 단어뿐아니라 문장도 인식한다. 가령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말하면 주위의 커피숍을 가까운 곳부터 일목요연하게 띄우는 식이다.​​​​국내에서 판매 중인 포커스는 4도어 세단과 5도어 해치백으로 나온다. 엔진은 직렬 4기통 1.5L 디젤 터보(TDCi) 한 가지로, 최고출력 120마력, 최대토크27.5kg·m를 낸다. 변속기는 6단 듀얼 클러치. 반면 시드니에서 시승한 포커스는 직렬 4기통 1.5L 가솔린 터보(GTDi) 엔진을 얹고 180마력, 24.4kg·m를 낸다. 변속기는 자동 6단 ‘파워시프트’다. 실내 구성은 국내에서와 정확히 반대다. 운전석 위치가 바뀌었을 뿐인데, 포드코리아의 배려로 출국 직전까지 몰던 포커스와 느낌이 사뭇 다르다. 계기판을비롯한 디스플레이는 정교하고 컬러풀하다. 그래서 여기저기 시선을 옮겨 정보를 살피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만, 워낙 다양한 요소를 짜임새 있게 배치하다 보니 실제보다 공간이 빠듯해 보이는 단점도 있다.​이번에 포커스에 새로 얹은 1.5L 에코부스트 엔진은 기존의 1.6L 에코부스트를대신하게 된다. 포드는 “배기량을 살짝 다독이면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낮췄다”고 밝혔다. 그러나 힘은 아담한 차체를 끌기에 차고도 넘친다. 특히 토크는터보가 본격적으로 개입하면 화끈하게 치솟는데, 이 순간이 퍽 극적이어서 본의 아니게 ‘터보랙’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포커스의 장점 부각시킨 프로그램이날 환상적인 날씨에 힘입어 포커스의 행렬은 움직임의 템포를 바짝 당겼다.대만 꽃미남도 어제보단 오른쪽 운전석에 적응한 듯 운전이 한결 자연스러웠다. 포드 측은 정숙성도 강조했다. 포드의 자랑엔 과장이 없었다. 꽤 속도를 높여 달리면서도 우린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플로어 카펫과 옆 유리창 두께, 엔진룸 방음에 남다른 공을 들인 결과다.​포커스의 또 다른 장점은 민첩하고 굳건한 몸놀림이다. 국내 시장엔 실용적인엔진만 얹는데, 사실 포커스의 꼭짓점은 스펙이 막강하다. 최근 나온 포커스 RS는 직렬 4기통 2.3L 에코부스트 엔진을 품고 무려 350마력, 48.3kg·m를 뿜는다. 0→시속 100km 가속 시간은 4.6초로, 폭스바겐 골프 R보다 0.5초 더 빠르다. 최고속도는 시속 266km.​​​​1.5L 에코부스트를 타면서 RS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섀시의 잠재력을 설명하기위해서다. 신나게 달린 이날의 결론은 명확했다. 섀시가 엔진을 압도했다. 이따금씩 평정심을 잃고 과욕을 부려도, 섀시는 눈 하나 꿈쩍 않고 다 받아줬다. 격렬하게 달리다 종종 노면을 놓치기도 했는데, 그건 섀시의 밸런스보단 경제적인 사이즈와 소재의 타이어 문제였다. 둘째 날은 다들 어제의 우중충한 기분에서 벗어나 시원하게 달렸다. 포드는 구간별, 운전자별로 연비 테스트를 진행했다. 가속 페달을 깻잎 두께로 밟는 ‘신공’을 동원한 끝에 기자는 평균 30km/L를 넘겼다. 그러나 아쉽게도 2등에 머물렀다. 기름 값도 싼 말레이시아에서 ‘연비의 달인’을 보냈을 줄이야. 포드는 주차장을 막아 짐카나와 J턴 체험도 진행했다.​​​​이른바 ‘다이내믹 체험’을 하는 사이,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어느덧 각자출국 일정에 맞춰 헤어질 시간. 그새 친해진 우린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본다이 비치에서 하룻밤을 더 보낸 뒤 기자는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서서히 기수를 높이는 비행기 창밖으로 시드니가 아련히 멀어졌다. 이번 역시20년 전처럼, 코알라는 코빼기도 못 본 채.​* 글 김기범  사진 포드자동차​​​
인천 송도 미래길 2016-10-18
 2010년 4월 인천 송도에 조성된 ‘미래길’은 인천지하철 센트럴파크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해 ​컴팩스마트시티와 트라이볼, 송도센트럴공원 웨스트보트하우스, 인천대교 전망대, 커넬워크등을 거쳐 다시 센트럴파크역으로  돌아오는총 4.5km의 구간이다. 길이 잘 조성되어 있고평탄해 2시간 정도 걸으면 송도의 오늘과 미래를 ​만날 수 있다. ​ 컴팩스마트시티는 오전 10시부터 문을 열어 오후 6시면 닫고 월요일, 추석과 설 당일은 쉰다.  바다를 타고 넘어온 선선한 바람이 한순간 가을을 데려 놓았다. 전혀 누그러들지 않을 것 같은 태양의 기세는 꺾일 대로 꺾였고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하다 못해 쌀쌀한 기운마저 살갗을 자극한다. 그야말로 계절의 변화는 몸으로부터 온다는 말을 절감하는 요즘이다.​여행이라……. 마음은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지만 막상 몸과 현실은 따라주지 않아 현대인 열 명 중 겨우 한 명이 문밖을 나서는 여행을 떠난다는 얘기가 있듯이, 오늘날 우리들은 여행이나 떠남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결단을필요로 한다. 하지만 거창하게 ‘여행’이란 이름표를 붙이지않아도 주위를 둘러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을 채우거나 비울 수 있는 곳이 의외로 많다.​총 4.5km 구간의 도심 속 미래길글로벌 미래도시를 지향하는 인천 송도의 ‘미래길’은 사색을 즐기려는 이들이나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려는 연인들,그리고 나들이를 떠나려는 가족들에게 추천해도 고개가 끄떡여지는 곳이다. 2010년 4월에 조성된 이 미래길은 인천지하철 센트럴파크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해 컴팩스마트시티와 트라이볼, 송도센트럴공원 웨스트보트하우스, 인천대교 전망대, 커넬워크 등을 거쳐 다시 센트럴파크역으로 돌아오는 총 4.5km의 구간이다. 길이 잘 조성되어 있고 평탄해 2시간 정도만 걸으면 별 어려움 없이 송도의 오늘과 미래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걷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길에서 만나는 송도 신도시의 숨겨진 매력을 찾다보면 하루가 부족할 정도다.​자, 준비가 되었다면 최대한 편한 차림으로 길을 나서자. 초입에서 만나는 ‘컴팩스마트시티’는 인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인천광역시립전시관으로,고대에서 근대 개항기의 인천으로 시간여행을 돕는다. 또한 현재 인천자유경제구역 개발을 통해 글로벌 인천으로변화되고 있는 인천의 미래를 최첨단 전시시설로 보여준다. 오전 10시부터 문을 열어 오후 6시면 닫고, 월요일과 추석 및 설 당일은 쉰다. 관람료는 무료다.​3차원 곡명 형태로 만들어진 ‘트라이볼’은 그 웅장함이 눈길을 사로잡아 자연스럽게 발길을 멈추게 한다. 3개의 사발모양은 공항과 항만, 그리고 광역교통망을 상징하는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조형물도 특이하지만 그 아래의 담수와 그림자가 아름답게 하모니를이루고 있으며, 밤에는 불빛을 받아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트라이볼에서는 전시회도 자주 열리는 만큼 겉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치기보다는 안을 한번 둘러보는 것이 좋다.​​3차원 곡명 형태로만들어진 트라이볼.공항과 항만, 그리고 광역교통망을 상징하는 ‘하늘과 바다,그리고 땅’의 의미를 형상화했다​​​한국 속의 작은 유럽, 커넬워크센트럴파크를 가로지르는 1.8km의 인공호수는 국내에서는처음으로 바닷물을 활용해 조성한 것으로, 폭이 최소 12m에서 최대 110m에 이른다. 호수를 따라 난 길을 이정표가 안내하는 곳으로 향하면 수상택시를 탈 수 있는 서쪽의 보트하우스에 이른다. 물살을 가르며 송도의 고층건물 속으로달리는 낭만을 선사하는 ‘미추홀호’는 성인 기준으로 요금이 4,000원, 소요시간은 20분 정도로 짧지만 굵직한 추억을 갖고 돌아오기에 충분하다.​​​​​길이 740m에이르는 쇼핑상가‘커넬워크’.중앙수로 곁으로쉴 공간이 많다​​​인공호수를 오가는 미추홀호.성인 기준으로 4,000원이면 20분동안 낭만 여행을 즐길 수 있다​​인천대교 전망대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다. 잘조성된 지금까지의 길과 달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건물,그리고 하늘과 키 재기를 하고 있는 이름 모를 각종 풀들이다소 거친 풍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뒤로하고 탁 트인 전망대에 올라서면 끝없이 펼쳐지는 갯벌과눈에 잡힐 듯 보이는 웅장한 인천대교가 불쾌했던 감정을누그러뜨리고도 남는다. 컨테이너로 만든 독특한 모양의 전망대는 건물 디자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한데, 알고 보니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으로 꼽히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2010년 건축조형물 분야 대상으로 선정되었단다.​​인천대교 전망대. 컨테이너를 활용해 만든 이 조형물은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2010년 건축조형물분야 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걷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울 즈음 만나는 ‘커넬워크’는 대한민국 속의 유럽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곳은 총 길이 740m에 이르는 유럽형 쇼핑 상가로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테마로 조성되어 중앙의 수로를 따라 340여 개의 유럽풍 매장이 늘어서 있다. ​​​​커넬워크 여름 테마가시작되는 곳. 중앙수로의말과 돌고래 조형물이운치를 더해준다.​​​수로 옆에 마련된 벤치와 파라솔에서 차를한 잔 시켜놓고 앉아 느림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도 좋을 듯. 아이스크림, 팥빙수, 다양한 차를 파는 곳들과세련된 레스토랑들의 차림표가 윈도에 나열되어 있어 유혹을 떨쳐내기 힘들다면 그대로 자리를 잡고 주문하면 될 일이다. 샘솟는 입맛의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면 그대로 자리를 잡으면 된다​​여정은 아직도 남아 송도센트럴공원과 송도 신도시의 랜드마크인 ‘송도컨벤시아’ 등으로 이어지지만 이쯤에서 발길을 멈춰도 좋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넘어가면 미래길이 송도를 환하게 밝히면서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호숫가 난간에 기대어 깊은호흡을 하다보면 송도의 오늘과 미래가 아닌, 오늘까지 쉼 없이 열심히 살아온 나의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한 보석 같은 쉼터, 바로 송도 ‘미래길’이다.​​​​송도 미래길에서만날 수 있는조각상. 세계의탈들을 형상화한조형물이다​​* 글, 사진 김태종​​     
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 2016-09-08
드레스덴에서 찾아낸 밀리터리 마니아의 성지​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    옛 동독지역 드레스덴에 자리잡고 있는 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은 소장품의 다양성과규모에서 첫손에 꼽을 만한 군사 관련 박물관이다. 프로이센부터 독일 제국, 두 번의 세계 대전과냉전에 이르기까지 독일군이 걸어온 드라마틱한 역사 속의 유산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이곳은밀리터리 마니아라면 꼭 한번 가볼 만한 명소다. ​생각 없이 시작했던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경우가 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남아 오전 중에 뭔가 할일이 없을까 빈둥거리던 차에 근처에 군사 박물관이있다는 말을 듣고 무심결에 따라 나선 길. 생각지도못한 수장품 규모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다 보니 금세 출발 시간이 되어버렸다. 드레스덴에 위치한 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 얼치기 밀덕인 기자는 몰랐지만 사실 이곳은 군사 역사 박물관으로는 유럽최대, 독일 역사 박물관으로도 빅3에 꼽히는 명소다. ​독특한 건물 속 충실한 수장품들숙소를 떠난 지 불과 5분. 올브리히트 공원을 가로지르자 모습을 드러내는 연한 베이지색 건물은 마치 거대한 금속 피라미드가 박혀 있는 듯한 기괴한 형상이다. 원래 병기고로 지어졌던 옛 건물을 바탕으로 미국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7년에 걸쳐 개축했다. 위에서 보면 ㄷ자형 건물 중간에 거대한 금속 화살이박힌 모습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부모 밑에서 성장한 폴란드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 건축가 리베스킨트는 베를린 유다야 박물관, 영국 맨체스터의 국립전쟁박물관, 캐나다 왕립 온타리오 박물관 등을 담당했던 건축계의 거물이다.​기본 건물은 19세기 말 빌헬름 1세 때 병기창으로 지어졌다가 1914년 작센 왕국군 박물관이 되었다. 한편포츠담에서 1961년 개관했던 독일군 박물관이 1972년이곳 드레스덴으로 이관되어 동독 군사박물관으로이름을 바꾸었다. 당시에는 동독군과 바르샤바 조약기구(WTO)의 역사를 주로 다룬, 조금은 딱딱한 구성이었다. 그런데 독일이 통일되면서 1990년 독일연방군에게 넘겨져 지금의 독일연방군 군사역사 박물관으로 거듭났다.​건물 밖에는 제2차 세계대전부터 냉전 시대를 아우르는 각종 전차와 장갑차, 자주포는 물론 비교적 최근일선에서 물러선 레오파르트2와 zh2000 자주포,패트리어트 미사일 등이 관람객을 맞는다. 다른 박물관이라면 애지중지할 물건들이지만 소장품이 넘치는이곳에서는 실내에 발을 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조명을 다소 어둡게 세팅한 실내는 1~3층에 시대별로 나누어 프로이센과 독일 연방, 독일 제국으로 이어지는 독일군 장비들을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옛 동독 지역에 자리잡은 지리적 요건 덕분에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유산까지 풍성하게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은 이 박물관의 장점. 비교적 크기가 작은 군용차나 자동차들은 실내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실물을 꼭 한번 보고 싶었던 영국산 장갑차 유니버설 캐리어가 무척이나 반가웠다.​비행기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건물을 나서는데 아까보았던 건물 밖 기갑차량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레오파르트1과 T-72 전차는 냉전 시절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주력 전차들이다. 현역 시절, 자신들이 은퇴한 후 통일된 독일에서 이렇듯 사이좋게 마주보며 여생을 보내리라고는 상상도못 했을 터. 분단국가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묘한 감흥에 젖게 하는 광경이었다.​​​T-72M 전차 (소련, 1983)​냉전시대 소련의 기갑전력을 대표하는 존재 중 하나였던 T-72는 사실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T-62의 후계기종을 계획하던 소련군은 모로초프 설계국(오비옘트 432)에게 차기 전차 개발을 맡겼는데, 검증되지 않은 신기술에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일종의 보험으로 우랄열차공장이 제출했던 오비 트 167도 계속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T-64로 제식화된 오비 트 432가 실패작으로 판명되면서 오비 트 167이 T-72로 제식화될 수 있었다.동독이 1978~86년 사이 196대 도입했던 T-72M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산되었던 수출형. 장갑이 얇고 장비 등이 일부 빠진 다운 그레이드 버전이다. 이곳에 전시된 T-72M은 러시아 니즈니타길에 위치한 우랄열차공장에서 생산된 것이다.​​​BMP-2 장갑차 (소련, 1983)​1967년 공개된 BMP-1은 병력수송과 함께 어느 정도 전투까지 가능한 보병전투차였다. 1980년에는 단점으로 지적되던 화력을 보강한BMP-2로 진화했는데 명중률이 낮았던 73mm 저압포를 30mm 기관포로 교체했지만 대량생산과 도하능력 등을 위해 장갑은 그다지 보강되지 않았다. 6기통 300마력의 UTD-20 디젤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65km, 행동반경 600km를 갖추었으며 물 위에서 시속 6km로 이동할 수 있었다. 전시차는 동독 시절인 1983년 소련으로부터 도입했던 23대의 BMP-2 중 한 대다.​​ ​​​​M109 A3 GE A2 자주포 (독일/미국)​한국전쟁을 거치며 기동력과 방어력을 갖춘 대포, 즉 자주포의 필요성을 절감한 미국은 전차 차대에 대포를 얹은 형태였던 M107을 대체할 새로운 자주포 개발을 시작했다. 1956년 개발에 들어간 M108은 105mm 포의 위력이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에 1961년 등장한 M109로 금세 대체했다. 70년대 중반까지 2,500대,89년까지 5,000대가 넘는 M109가 만들어졌으며 M109 A2부터는 반동을 줄인 신형 포 받침대를 장비하는 등 지속적으로 개량되었다. 한국 포병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K55 자주곡사포는 바로 이 M109 A2를 라이선스 생산한 것이다. 독일연방군은 1964~73년 사이 586대를 도입해 개량을 거친후 M109 G라는 제식명을 붙였으며, 1986~91년 사이 다시 한번 업그레이드해M109 A3 GE A1으로 만들었다. 미국의 M109 A6 팔라딘, 독일의 PzH2000이 나오기 전까지 서방세계를 대표하는 자주포였다.​​​루크스 A2 정찰장갑차 (서독, 1975)​​스라소니’라는 뜻의 루크스(lynx의 독일어)로 이름 붙인 이 차륜 장갑차는 1968년 시작해 1983년까지 408대가 독일에서 생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사용했던 Sd Kfz 231과Sd Kfz 234의 후계자로 다임러 벤츠가 개발을 담당했다. 캐터필러 방식과 달리 고무 타이어를 사용하는 차륜 장갑차는 포장도로에서 속도가 빠르고 제작비가 싸며 승차감과 정숙성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방어력과 험로주파성에서는 뒤처진다. 벤츠의 OM403 디젤(V10 389마력) 엔진을 얹어 전후진최고시속 90km를 낼 수 있으며 행동반경은 730km에 이른다.​​​레오파르트1 A4 전차 (서독, 1974)​​동서로 갈린 독일은 이어진 냉전 시기에 서방과 공산세력이 대립하는 최전선이 되었다. 1955년 창설된 독일연방군(Bundeswehr)은 적의 막강한 기갑전력을 감안해 미국 패튼과 영국산 센츄리온 전차를 도입했지만 마음에 차지 않았다. 1957년 시작했다가 지지부진해진 프랑스와의 차세대 전차 공동개발 프로젝트를 중단한 독일은 독자개발로 전환, 포르쉐와 아틀라스 등이 공동개발한 차대에 라인메탈과 베르그만이개발한 포대를 얹어 레오파르트1을 완성했다.1974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이 전차는 기동력에주력하느라 방어력에 약점을 보였지만 네덜란드,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에도 도입되어 NATO지상 전력의 일익을 담당했다. A4형은 전자식탄도계산기와 야간관측장비가 추가된 모델로1974년 하반기에 생산되었다. 레오파르트1은레오파르트2의 등장에 따라 2003년부터 점차일선에서 퇴역했다.​ ​M113 A1 GE 장갑차 (미국/서독, 1974)소련 BMP 시리즈에 대항하는 서방의 병력수송차를 미국에서는 APC(Armoured PersonnelCarrier)라고 부르는데, ‘전장의 택시’라는 별명으로 널리 일컬어진다. 그 대표기종인 M113은1960년 등장해 오늘날까지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M59 시절부터 전통이 된 상자형의 차체는내부공간 확보를 위함이며 알루미늄 합금으로무게를 줄여 물길도 건널 수 있다. 다만 경량화에 주력하느라 방어력은 상당히 취약해 현지에서 강철판을 덧대는 개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독일은 1982년 괴팅겐에 주둔한 45 보병 대대를 통해 M113G A2를 처음 도입했고 3년 후 티센-헨셸이 이를 개량했다. 디트로이트 디젤의V6 디젤 210마력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64km를 내며 평지에서 300km를 이동할 수 있다.   알비스 스탈워트 Mk2 FV622 (영국)유럽 전선에서 자동차의 유용성을 실감한 각국은 다양한 노면과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군용차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6륜 구동에 수륙양용이 가능한 영국 알비스의 스탈워트는 1966년부터 1971년까지1,110대가 만들어졌다. 롤스로이스제 8기통 220마력 가솔린 엔진(B81MK8B)을 짐칸 아래에 두고 그 앞쪽에 기어박스와 트랜스퍼를 배치한 구조로, 완전군장한 군인 30명 혹은 5톤의 화물을 싣고 지상에서는 시속 64km, 워터제트로 수상에서 시속 10km의 속도로 이동이 가능했다. FV622로 불린 개량형 Mk2는 적재인원이 38명으로 늘었고워터젯 성능도 개량되었다.​​​M16 MGMC 반궤도 장갑차 (미국)병력을 안전하게 전장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병력수송 장갑차는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 필요성이 빠르게 대두되었다. 하지만 타이어가 달린 일반적인 트럭으로는 이동성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구동륜을 캐터필러로 대체한 물건들이 개발되었는데, 바로 미군의 M3와 M5,그리고 독일군의 Sd.Kfz 251 등이다. M16 MGMC(Multiple Gun MotorCarriage)는 M3를 기반으로 대공포를 올린 개량형으로 M2 기관총 4문을 뒤에 실어 대공사격이나 지상전투에서 널리 쓰였다. 전시차에서는기관총이 제거되어 있었지만 그 강력한 화력 덕분에 ‘미트초퍼’(meatchopper, 고기 다지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HS30 장갑차 (서독)종전 후 재편된 서독 연방군은 초창기에 미국산 전차를 주로 도입했다.하지만 장갑차의 경우는 달랐다. 오직 병력 수송에만 중점을 둔 미국산M113과 달리 서독연방군은 전차와 함께 이동하며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보병전투차를 원했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이스파노스이자가 독일을위해 개발한 HS30은 피탄율을 고려한 낮은 차고에 20mm 기관포를 장비했다. 그런데 당초 1만 대를 발주할 예정이었던 HS30은 공간부족 등각종 문제점이 드러난 데다 뇌물 스캔들까지 겹치면서 2,000여 대가만들어지는데 그쳤다. 1956년 이를 대체하기 위한 마더 IFV의 개발이진행되면서 HS30은 1971년을 마지막으로 일선에서 사라지게 된다.    다크스2 A1 전투공병차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영국이 선보였던 퍼니 전차는 독일군 지뢰밭과 대전차 방어물, 토치카 등을 무력화시키며전투공병차라는 새로운 무기체계를 제시했다. 전투공병차는 말 그대로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땅을파고 다리를 만들기 위한 군용차. 현역 공병차 중 최고로 평가받는 다크스2는 레오파르트1 차대를 기반으로 크레인과 쇼벨 등으로 갖추어 기갑부대를 따라다니면서 각종 토목작업을 수행한다. 도하장비를 갖출 경우 수심 4m정도는 물속으로 건널 수도 있다. 방어용의 7.62mm 기관총과 연막탄을 갖추고 있으며 MTU의 10기통 37L 830마력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62km를 낸다. 1988~90년 사이 140대가 생산되었다.​  ZSU 23/4W1 쉴카 자주대공포 (소련, 1970)소련은 독일군의 자주대공포를 참고해 대구경 57mm2연장 기관포를 갖춘 ZSU-57/2를 개발했다. 탄 자체의 위력은 셌지만 발사속도와 포탑 선회가 느린데다 레이더도 없어 점차 빨라지는 제트기에 대응할 수없었다. 이런 요구에 따라 23mm 기관포 4문을 갖춘ZSU-23/4 쉴카가 1962년 등장했다. 대공포로는 최초로 레이더를 갖추고 연사속도를 높인 쉴카는 중동전쟁 당시 대공미사일과 함께 사용되어 이스라엘 공군을 괴멸시키다시피했다. 여기에 위기를 느낀 미국은 스텔스 기술 개발에 박차가했다. 이론상으로는분당 4,000발도 가능했지만 실제로는 고질적인 냉각 문제로 1문당 15초 이상 연사되지 않도록 제한했다. 1974년에는 이런 단점들을 해결한 개량형 ZSU-23/4M이 나왔다.    하노마그 AL28 (서독)하노버에서 1835년 창업한 하노마그는 증기기관을 시작으로 자동차와 농기계 등을 만들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걸작 반궤장갑차인Sd.Kfz 251을 개발했다. 그밖에도 다양한 트럭과 군용차를 만들었던 하노마그가 종전 후 처음개발한 L28은 군용 앰뷸런스나 수송용 트럭 외에 일반 상용 트럭으로도 애용되었다. AL28은뒷바퀴굴림이었던 L28을 기반으로 제작된 네바퀴굴림 버전. 1953년부터 71년 사이에 다양한버전의 AL28이 6,000대 이상 제작되었다. 4기통 2.8L 디젤 65마력 엔진을 얹었고 최고시속은70km. 하노마그는 1952년 라인슈탈, 69년에 헨셸 상용차 부문에 인수되었다가 현재는 메르세데스 벤츠에 흡수되었다.    레오파르트2 A4​1960년대 초 독일과 미국은 차세대 전차를 공동개발하기로 하고 유기압 서스펜션, 1,500마력 디젤 엔진, 레이저 거리측정기와 관측장비를 갖춘 신형 사격통제장치 등을 탑재한 프로토타입을 KPz.70(미국은 MBT-70)이라는 이름으로 개발했다. 하지만 혁신적인 신기술 탓에 가격이 폭등하자 결국 파트너십을 끊고 독자개발로 돌아서 MBT-70은 훗날 미국의 M1 에이브람스, KPz.70은 레오파르트2가 되었다. 70년대 초 시제품이 만들어졌지만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벌어지면서 신형 전차에 더욱 강력한 방어성능이 요구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레오파르트2는 1977년 서독 국방부의 정식 승인을 얻어 2년 후부터 배치되기 시작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1982년부터 92년까지 695대가 생산된 레오파르트2 A4 중 한 대로 개선된 사격통제장치와 신형 장갑을 갖추었다. V1247.6L 디젤 1,500마력 엔진을 얹어 55.4톤의 거구임에도 시속 68km로 달릴 수 있다. 장갑과 무기 등 꾸준한 개량이 이루어진 레오파르트2 시리즈는 현역 전차 중 최강으로 평가받는다.​​패트리어트 대공 미사일 발사대​​한반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종말고고도 요격 미사일 ‘사드’(THAAD)의 배치가 결정되면서 수도권 방어에 대한 논란이있었다. 하지만 비교적 저공으로 날아드는 스커드 미사일은패트리어트 미사일로 막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한다. 한국은이미 독일에서 운용하던 패트리어트 팩2를 도입했을 뿐 아니라 최신 팩3를 추가로 들여와 방어진영을 더 촘촘하게 짜기로 했다. MIM-104 패트리어트는 1970년대 미국 레이시온에서 미사일 방어를 목적으로 개발을 시작한 대공 미사일 시스템으로 팩2(MIM-104C)는 탄도탄 대응력을 개선, 걸프전에서스커드 미사일을 격추시켜 화제를 모았다. 패트리어트라는애칭은 애국이라는 뜻과 함께 Phased Array Tracking RadarIntercept On Target(목표물을 요격하는 추적 위상배열 레이더)의 약자이기도 하다. 만 트럭에 실린 하나의 발사대에는 9기의 미사일이 수납되며 1개 중대는 5~8개의 발사기와 레이더 시스템, 전용 발전기 등으로 구성된다.  푸크스 A6 A1 장갑수송차 NBC 방어 버전푸크스는 여우를 뜻하는 독일어. 독일연방군 두 번째 차륜장갑차인 푸크스는 다임러 벤츠와 포르쉐의 조인트벤처에 의해개발되었으며 생산은 타이센-헨셸이 담당했다. 8기통 디젤428마력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98km가 가능하며 뒤에는 스크류 2개를 달아 물 위에서도 이동이 가능하다. 1979년 배치를시작해 주로 특수임무에 투입되어왔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NBC 방호 버전으로 방사능, 생물학전, 화학전 상황에서도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2002~2003년에는 항구적 자유 작전(Enduring Freedom)의 일환으로 쿠웨이트에 주둔했다.​  비젤1(Mk20) 공수장갑차 (독일, 1991)기갑사단계의 카이맨? 서독 공수부대가 사용하던 크라카를 대체하기 위해 1970년대 개발된 비젤은 포르쉐가 개발에 참여했다. 1975년시제품이 만들어졌지만 당시 독일연방군은 레오파르트2 개발에 돈을 쏟아붓느라 1984년에야 프로젝트를 재개할 수 있었다. 7.62mm 이하철갑탄이나 고폭탄 파편까지는 방어가 가능하고 20mm 캐논 외에 TOW 미사일, HOT2 대전차 미사일 탑재도 가능했다. 폭스바겐의 5기통2.0L 디젤 직분사 87마력 엔진을 얹어 400km순항에 최고시속은 80km. 2.69톤으로 0.75톤의 크라카에 비해 한결 무거워져 공중투하는 불가능하지만 대형 수송헬기인 CH-53로 최대 3대 공중수송이 가능하다. 전시된 비젤은 독불여단(Deutsch-Franzosische Brigade) 292 보병연대 소속으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니바,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활약했다.     PzH2000 자주포 (독일, 2001)한국이 자랑하는 명품 자주포 K9은 결코 세계 1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 바로 PzH2000과 동시대에태어난 탓이다. 1970년대에 미국산 M109를 대체할155mm 자주포를 공동개발하기 시작한 서독과 영국,이탈리아는 1986년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개발로 돌아섰다. 독일은 이듬해 새 프로젝트에 착수해 크라우스-마파이와 라인메탈이 개발을 담당했는데, 당시요구조건은 로켓 보조장치 없이 최대 사거리 30km확보, 자동 장전장치에 의한 빠른 연사속도, 60발 분량의 탄약과 장약 탑재, 높은 기동력과 신뢰성, 독자적으로 전투가 가능한 시스템, 상부공격에 대한 방호력 등 무척이나 까다로운 것이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막강 기갑전력과 전면전을 상정하느라 화력과성능에서 세계 최고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2000년대 실전배치를 목표로 PzH2000라는 이름을붙인 이 신형 자주포는 155mm 포신에 자동장전장치를 결합해 분당 8발을 쏠 수 있었으며 테스트에서 1분에 12발, 1분47초에 20발을 쏘기도 했다. 최신 둔감 화약을 사용한 덕분에 과열로 인한 오폭 위험 없이 지속적인 연사가 가능하다. 미국의 크루세이더 프로젝트가 어그러지고 러시아제 코아실리차SV가 쌍열포를 포기함에 따라 PzH2000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 최강 자주포의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그대가로 엄청난 가격표가 붙었지만 말이다.    프러시안 모델 1865 드라이제 췬트나델 게베어프로이센 기술자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는 1836년에 볼트액션식 소총을 개발해 소총 역사에 혁명을 불러왔다. 기존에는 총구 앞에서 화약과 총알을 쑤셔 박아야 하는 전장식이었지만 볼트액션식 소총 덕분에 노리쇠를 당겨 뒤에서 장전이 가능해진 것이다. 야금술이나 제조정밀도의 한계로 가스가 새거나 볼트가 부러지는 문제를 노출했지만1분당 1발 정도였던 발사속도가 5발로 빨라짐으로써 전투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연사속도가 획기적으로 높아짐에 따라 대열을 지어걷다가 한 발씩 쏘던 이전까지의 전투방식은 사라지게 됐다. 무기의발전이 전장의 양상을 바꾼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1866년 쾨니히그레츠 전투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오스트리아군은 드라이제의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프로이센군에게 괴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공군용 보온병전쟁용으로 개발된 기술이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활용된 경우도 수없이많다. 2차대전 당시 고고도를 장시간 비행하며 추위와 싸우던 승무원들에게는 몸을 덥혀줄 보온병이 지급되었다. 이를 발전시켜 외병과 내병사이를 진공으로 만들어 열전달을 차단하는 기술이 19세기 말에 발명되어 1904년 독일 서모스를 통해 상품화되었고, 1940년대 군용으로 처음 보급되었다.​    V2 로켓 A4패전의 위기에 몰린 히틀러는 눈엣가시 같은 영국에 큰 타격을 주고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 있는 혁신적인 무기를 원했다. 그중에서도후세에 미친 영향력으로 첫 손에 꼽히는 것이 바로 V2 로켓이다. 액체 로켓으로 추진력을 얻고, 기계식 자이로를 사용해 스스로 자세를잡으며 아날로그 계산기가 엔진을 멈추는 이 물건은 오늘날 대륙간탄도 미사일의 시발점이 되었다. 비행기처럼 날아가는 V1과 달리 포물선을 그리다가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는 V2는 요격이 거의 불가능했다. V2 개발을 주도했던 베르너 폰 브라운은 미국의 페이퍼클립작전에 따라 미국으로 망명해 아폴로 프로젝트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V2 로켓과 시제품들 역시 미국과 소련, 영국 등에 의해 철저하게 수거되어 뒤이어 벌어진 우주경쟁의 토대가 되었다.    프러시안 청동포불화살과 돌을 날리던 유럽의 공성전은 화약을 이용한 대포의 등장으로 완전히 다른 양상이 되었다. 17세기에 전장의 사신으로 떠오른 대포는 19세기 말 강철제련법의 발달에 힘입어 값싸고 단단한 강철제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으며, 뒤쪽에서 포탄을 장전하는 후장식 시스템의 개발로 발사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이곳에 전시된 프러시아의 야포는 청동포의 마지막 시대에해당되는 188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청동포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날렵한 포신에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인 강선을 넣었다. 1870년 보불전쟁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아직 포병의 주력은 이런 전장식 청동포였다.​ ​800mm 포탄히틀러의 독특한 무기 취향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포인 구스타프 열차포를 탄생시켰다. 50m 길이의 철도차량에 35m 포신을 얹은구스타프는 무게가 1,350톤에 달해 복선 철로가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원래 프랑스의마지노선을 공격하기 위해 개발되었지만 프랑스가 너무 쉽게 항복하는 바람에 쓸 기회가 없었다. 1호는 구스타프, 2호는 도라로 불렸는데,도라는 실제 전투에 투입되지 못한 채 파괴되었다. 800mm 구경의 구스타프용 고폭탄은 포탄무게만도 4.8톤에 달했으며 러시아 세바스토플을 공격할 때 그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1942년 크림반도에 배치된 구스타프가 발사한고폭탄은 세바스토플 시내에 떨어져 무려 높이350m에 이르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만들어냈다. 한편 철갑탄은 천연암반 27m를 관통해 요새의 지하 탄약고를 박살냄으로써 요새 함락에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유즈29 (소련, 1978)소련의 유인 우주선 최초 발사에 충격을 받은미국이 달착륙 성공으로 응수하자 소련 역시 달착륙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하지만 N-1 로켓 개발 실패로 타이밍을 놓친 소련은 대신 우주정거장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1971년 살류트 1호를시작으로 우주인들이 장시간 우주에 머물며 다양한 연구에 사용했다. 1978년 8월 26일 동독군대령 지그문트 옌은 소유즈 31호를 타고 살류트6호에 도착, 8일간 우주에 머물렀다가 소유즈29호를 타고 지구로 귀환했다. 독일인으로서는 최초의 우주여행이었다.​​ 레프레센탄트 퍼레이드카 (동독)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에 의해 관리되던 호르히 공장에서 개발된 P240은 6기통 엔진을 얹은 고급차로 1958년까지 생산되었다. 당시에는 작센링이라는 브랜드명을 사용했는데, 인근의 서킷이었던 작센링에서 따온 것이다.이 공장에서는 1957년부터 동구권을 대표하는 대중차 트라반트가 만들어져 1991년까지 370만 대나 생산되었고현재는 폭스바겐에 인수되어 아우디 공장이 되었다. 이 차는 P240의 지붕을 잘라낸 퍼레이드 전용차로 동독 국가인민군을 위해 제작되었다. 보디는 VEB 카로세리베르케 드레스덴에서 담당했다. 동독 시절 국경일이나 군사퍼레이드 등에 사용되었다.​ AWO 425 T 모터사이클 (동독, 1952)​​전쟁 당시 무기나 차를 생산했던 기업 몇 군데가 소련 점령 하에서 아브토벨로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동독 튀링겐 주 쥘에서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1948년에는 단기통 12마력 4스트로크 엔진을 얹은 모터사이클AWO 425를 선보였는데, 모델명의 4는 4스트로크, 뒤의 25는 250cc의 배기량을 의미했다. 최고시속 100km에 L당 33.3km를 달릴 수 있었던 이 모델은 외모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BMW R23의 데드카피였지만 출력을살짝 높인 고출력형 425S나 배기량을 350cc로 키운 레이싱 버전도 만들어졌다. 생산대수는 약 21만 대.​​​​Mod 56 105mm 산악포 (이탈리아, 1956)​머신건이나 함포 등 비교적 대구경 화포에 능통한 이탈리아의 오토멜라라는 그 역사가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범기업으로 종전 후 트랙터나 직조기계를 제조하던 오토멜라라는 금새 본업인 병기 제조에 복귀해 현재는 핀메카니카의 방위 부문에 흡수된 상태. 1956년 선보인 이 곡사포는 이탈리아의 산악지대를 위해개발한 산악포로 1.29톤의 비교적 가벼운 무게를 자랑한다. 게다가 간단하게 분해조립이 가능해 자동차나 노새, 헬리콥터로 공수가 가능했다. 성능과 기동력이 뛰어나 이탈리아는 물론 영국과 캐나다, 독일, 포르투갈, 뉴질랜드 등 많은 나라에서 사용되었다.​​​바르카스 앰뷸런스 (동독)​​냉전 시절을 소재로 한 스파이 영화에서 한번쯤 보았음직한 이 원박스 밴은 동독 바르카스에서 생산한 B1000. 동독 지역 캠니츠(당시 명칭은 칼-막스-슈타트)에 있던 바르카스는 원래 덴마크인 외르겐 라스무센이 작센 주에 설립했던 프라모를 국영화한 것으로그 이름은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성에서 따왔다. 1969년부터 91년까지 이곳에서 생산된 B1000은 DKW의 3기통 2스트로크 엔진을 얹고 밴과 트럭, 미니버스 등 다양한 베리에이션이 있었다. 17만 대 이상 생산된 공산권의 대표 밴으로 우편배달과 소방차, 구급차, 경찰차, 앰뷸런스 등에 사용되었으며통일 후에도 연방군 소속으로 제한적인 용도에 활용되었다.​​ 유니버설 캐리어 (영국, 1950년대)전쟁이 꼭 크고 화려하고 강력한 무기들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유니버설 캐리어는제2차 세계대전 내내 무려 11만3,000대가 생산된 베스트셀러이자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기갑차량으로 연합군의 사랑을 받았다. 작은 상자형 차체에 캐터필러를 붙인 단순한 형태는 오스틴 미니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절약의 극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보병 기동력에 필요성을 절감한 영국이 개발에 들어갔지만 채용되지 못하다가 2차대전 직후 대량으로 생산을 시작했다. 다양한 버전에 비커스 중기관총, 브렌 경기관총,보이즈 대전차 라이플 등을 달았는데, 브렌 경기관총을 기본으로 한 까닭에 ‘브렌건 캐리어’라 불리기도 했다. 종전 후 1956년, 서독이 300대의 T-16 유니버설 캐리어(포드 캐나다가 생산한 미국형)를 구입했고, 동독은 전쟁 당시 연합국이었던 소련에 랜드리스 형식으로 제공되었던 것을 공여받음으로써 동독과 서독이 동시에 사용했다.   호르히 830BL 컨버터블 (독일 제국, 1938)제2차 세계대전의 개전 초기인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순식간에 항복하자 샤를 드골은 영국으로 망명해 자유 프랑스를 조직했다. 그런데당시 프랑스군의 주력은 사실상의 괴뢰정부인비시 프랑스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드골과 자유 프랑스의 영향력은 아직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파리 해방을 주도하면서 급격하게 입지를 키운 드골은 전쟁이 끝난 후 1958년 프랑스의 제5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 호르히 830BL 컨버터블은 파리를점령했던 디에트리치 폰 콜티츠 중장(히틀러의파리 파괴 명령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의 차고에서 압수한 것으로, 드골이 2차대전 말부터 대통령 초기인 1959년까지 사용했다. 호르히는 벤츠에서 독립한 아우구스트 호르히에 의해 1898년 설립되어 1920년대 8기통의 대형 고급차를생산하다가 1932년 아우토우니온에 통합, 오늘날 아우디의 뿌리가 된 메이커다.  트루펜파라드 25 대전차 자전거 (독일, 1925)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1945년, 물자와 연료까지 바닥이 난 독일군부에서는 연합군의 탱크에 대항하기 위해 이런 무기까지 만들기에 이른다. 바로 자전거 앞에 판처파우스트 60M 2기를 매단 대전차 결전병기다. 육상전의 황제라는 전차에 병사가 60m안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판처파우스트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고 강력한 대전차무기였다.긴 막대 부분에 넣은 추진제에 따라 30m, 60m, 100m 버전이있었으며 성형작약탄두는 무려 85%의 격파율을 자랑했다.   HK-101 반궤도 모터사이클 (독일, 1942)군용차 중에는 타이어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구동륜만무한궤도 방식으로 바꾼 이른바 반궤도 차량이 있다. 구조가 비교적 단순하고 값싸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개중에는 모터사이클 뒷부분에 캐터필러를 단 괴이한 물건도 있었다. Sd Kfz2 케텐크라프트라드 HK101이 그 주인공. 로터리 엔진으로 유명한 NSU가 독일 군부의 지시를 받아 1939년 개발을 시작해 공수부대나 항공기 견인용으로 활용되었다. 캐터필러의 안정적인 트랙션 덕분에 진창이 많았던 동부전선에서도 연락용이나 통신선 설치, 병력수송 등에 애용되었다.   골리앗 V 원격조종 지뢰 (독일, 1944)1차대전 때 등장한 최초의 전차 마크Ⅰ의 축소모형처럼 보이는 이것은 독일에서 1944년 등장했던 원격조종 지뢰다. 폭약을 싣고 고정목표물이나 군용차를 공격하는 데 사용된 이 유선 원격조종 무기는사실 프랑스의 아돌프 케그레스에 의해 고안된 것이었다. 프랑스 침공 때 강 속에 숨겼던 설계도를 독일이 입수해 개발을 진행시켰고,모터와 엔진 두 가지 동력원으로 만들어졌다. 전동식은 60kg, 엔진식은 75kg과 100kg 등 세 가지 버전이 있었다. 주로 공병부대에서사용했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유타 해변(영화 ‘마이웨이’의 무대가 되었던 곳)에서 여러 대의 골리앗이 투입된 기록이 있다.​ ​AGM-88 함 대레이더 미사일 (2006)​​​월남전 당시 월맹군의 대공미사일(S-75)에 크게 놀란 미국은 적의 레이더를 전문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었다. 이미 개발이 완료된 슈라이크 외에 스탠더드라는 신형 미사일을 개발한 미국은 베트남 방공망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들의 후계 기종인 AGM-88 함(HARM)은 레이시온에서 개발해 1985년 배치를 시작했다. 다양한 레이더 주파수를 추적할 수있을 뿐 아니라 마하2의 빠른 속도로 레이더 기지가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전작들의 문제점을 개량한 덕분에 걸프전 당시 이라크의 방공망을 ‘탈탈 털어버린’ 일등공신이 되었다. 코소보 전쟁 때 NATO 일원으로 참전했던 독일은 구형의 타입B를사용해 세르비아의 방공망을 무력화시켰다.​ *글 사진 이수진 편집위원​​
PROPLE 박광현 2016-09-07
​연기자, 골퍼, 자동차 마니아의 3색 조화​​데뷔 20년이 넘은연기자이자 수준급 실력을자랑하는 골퍼이고 연예인레이서로도 활약했던자동차 마니아 박광현.얼마 전 종영한 TV 드라마‘최고의 연인’에서 한때짝사랑했던 이혼녀에게일편단심 순애보를선보이며 시청자들의사랑과 지지를 받았던 그는자동차에 대한 해박한지식으로 XTM ‘더 벙커7’의MC를 맡아 프로그램을이끌어가고 있다.​​​​  ​배우 박광현을 처음 봤을 때 30대 초반인 줄 알았다. 동안 비결을 물었더니 단박에 “없다”는 대답이나온다. 연기 활동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관리만 받는다고. “제가 진짜 싫어하는 게 머리 염색하고 지지고 볶는 거예요. 얼굴 마사지도 싫고요.”​인위적으로 꾸미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솔직 담백함이 그가 꾸준하게 배우 생활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그가 연기를 시작한 때는 1997년이다. 처음 그를 30대 초반으로 봤을 때 얼추 계산해보니 연기 경력이 10년 정도려니 했는데, 실제 나이를 알고 난 후 따져보니 벌써 20년째 연기 생활을 하고 있는 베테랑이다.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연예 병사로 활동했으니 공백기도 없는 셈이다.“변화무쌍한 방송계에서 2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드라마를 찍었어요. 한 직업을 20년 동안 이어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가장 최근에 출연한 작품은 MBC에서 방영한 ‘최고의 연인’.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통상적인 일일 드라마다.“우연히 짝사랑했던 여자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이혼을 하고, 아이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건 따지지도 않고 오로지 그 여자만 사랑하는 역할이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찾기 힘든 사람이죠. 벌써 이런 역할만 세 번째라 어렵지는 않았어요.”​​​순발력의 원동력은 ‘온 에어 증후군’20년이면 강산이 두 번은 변했을, 꽤 오랜 시간이다. 어느새 중견(?)의 위치에 접어들었으니, 연기자로서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해 감회도 크고 고민도 깊을 법하다.“나이대에 맞는 연기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동안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을 만큼 어려 보이는 얼굴이라 실제 나이보다 한참 적은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앞으로는 나이에 맞는 연기를 하고 싶습니다. 악역도 해보고 싶고요.”​이제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 그야말로 자신만의 캐릭터가 살아 있어야 할 때다. 박광현 하면“이런 배우다!”라고 단번에 특정지을 수 있는 특색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연기할 때 순발력이 좀 뛰어난 편이에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느낌을 상황에 맞게 살리려고 미리 준비하지만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나오는 게 더 많아요. 제 스스로는 이를 ‘온 에어 증후군’이라고 부르죠(웃음).”​​​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대사를 애드립이라고 하는데 박광현은 “애드립은 웃기려고 하는 게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표현이 애드립의 본질이라는 게 그의 주장.“대본에 적힌 대사대로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봐요. 재료는 같지만 그것을 어떻게 순발력 있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확 달라지거든요. 어떤 배우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설정으로 가면서 훌륭한 연기를 펼치기도 하지만, 저는 설정보다는 장면에 대한 느낌이나 상대방과의 호흡 등을 파악해서 제가 생각한 것과다르게 돌아가더라도 순발력 있게 대응합니다.”​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20년 후, 그러니까 지금까지 연기를 할 줄은 몰랐다는 박광현. 그 사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많이 겪었을 게 분명하다.“군대를 갔다 온 후 환경이 바뀌어서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전에는 방송국 자체 제작 위주여서 방송국 라인 하나만 잡으면 출연에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군대를 갔다 오니 한류 열풍이 불었죠. 동료 연기자들은 자연스럽게 한류 덕을 봤지만 저는 군대 때문에 그러지 못했어요. 외국에서 한류 스타로 떠올라야 드라마에 캐스팅됐거든요. 그러나 힘들어도 견디니까 이런 저런 작품이 많이 들어오더군요. 지금은무조건 한류 스타만 찾는 분위기가 수그러들어서 기회가 더많아졌습니다.”​연기자라고 해서 평생 연기만 하면서 사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대부분 미래를 위해 다른 일을 준비한다. 박광현은 앞길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20년 후에도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제 20년했으니 앞으로 20년은 더 해야죠. 저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연기자들은 돈벌이에 연연하지 않고 편하게 연기하는 게 로망이에요. 생계 수단으로 스트레스 받으면서 연기하고 싶지는 않거든요.”​경제적인 문제는 다른 일을 통해 해결한 뒤 연기를 편하게 즐기면서 하고 싶다는 박광현. 물론 아직 연기 이외에 확실한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다른 생계 수단’ 얘기가 나오니박광현의 골프 실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골프는 그가 말하는 다른 생계 수단은 아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제2의 길로 삼아도 될 정도로 수준급 실력이다.“제가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에요. 아버지를 따라서골프장에 놀러 갔는데 처음에 스윙한 게 헛스윙이었어요. 오기가 발동해서 그날로 골프채를 사서 골프를시작했습니다.”​​​​연기생활을 하면서 골프까지 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 여러 가지 에피소드도 많았을 듯하다.“드라마 촬영장에 골프채를 가지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연습하러 다녔습니다. 오후 촬영이면 새벽에 골프장에 갔다가 촬영하러 갔고요. 선수들만 간다는 전지훈련도 두 달 동안 참가했습니다. 그때 실력이 많이늘었어요. 작년에는 대학에서 골프 수업을 맡기도 했죠. 치는 것도 좋지만 가르치는 일도 재미있어요.”​대학에서 골프 강의도 하고 매체에 골프 관련 기고도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골퍼 박광현에게 초보자들을 위한 원 포인트 레슨을 요청했다.“골프를 치는 사람들 중 스윙 자세에 신경 쓰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스윙 자세는 선수들에게나 해당되는얘기입니다. 아마추어는 스윙을 가다듬을 시간이 없거든요. 따라서 처음 시작할 때 스윙과 퍼팅을 병행해서 열심히 하면 스코어를 많이 올릴 수 있을 거예요.”​한때 연예인 레이서로도 활동해 박광현은 자동차에도 관심이 많아 한때 연예인 레이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요즘은 자동차 관련 프로그램 ‘더벙커7’ 진행을 맡아 활력을 더하고 있다.“연예인들로 구성된 레이싱팀 알스타즈에서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어요. 그때 같이 하던 친구들이 지금은 프로 대회도 나가고 단장도 맡고 있죠. 1년 반 정도 활동했었는데 왠지 레이싱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었어요. 당시 골프에 완전히 미쳐 있었거든요.100% 동적이기만 한 레이싱과 달리 정적인 부분과 동적인 부분이 어우러진 골프에 더 관심이 끌려 결국 레이싱은 포기하고 말았죠.”​지금은 시들해졌지만 한때는 튜닝에도 관심이 많았다(그리워서 가지고 다니는 사진이 있다며 전화기에 보관된 오래된 사진을 직접 보여준다. 차에대한 관심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튜닝을 엄청나게한 차다).“예전에는 튜닝을 즐겼어요. 2003년쯤 타고 다녔던차인데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납니다. 요즘에는 양산차들이 워낙 잘 나와서 딱히 차에 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지만 튜닝에 대한 관심은 여전합니다.”​레이서 경험도 있고 튜닝에도 조예가 깊은 박광현은 국내 판매 중인 타이어는 거의 다 써봤을 만큼 타이어에 대해서도 관심이 남다르다.“노면에서 소음이 올라오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소음이 적은 타이어 위주로 선택합니다. 대체로 수입타이어는 부드럽고 국산타이어는 딱딱한 느낌이 강한 편이지요. 지난 겨울에는 스노타이어를 끼웠는데 겨울철 노면을 찐득하게 밟고 지나는 느낌이 좋더라고요. 소음이 적고 승차감이 좋아서 4월까지 끼우고 다녔습니다. 아내는 안전을 위해 런플랫 타이어를 달았고요.”​마음에 드는 연기자가 있으면 그에게 푹 빠져들게 된다. 그가 출연한 드라마나 영화도 찾아보면서 그를 열렬히 지지하는 팬이 된다. 만약 어떤 드라마를 봐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 드라마에서 보아왔고 좋은 연기를 선보여온 박광현 이름 세 글자를 찾으면 후회 없는 선택이 될 듯하다.​   *글 자동차생활 
TRAVEL: 속리산국립공원 법주사 & 문장대 2016-08-30
​속리산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에 만난 ‘정이품송’은 예전 그림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노쇠한 모습이었다. 1,600여 년이나 된 사찰 법주사는세계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 청동미륵불상과 팔상전 등 많은 보물과 유물을 간직하고 있었고, 문장대로 향하는 길은 만만하게 생각했던것과 달리 고되고 힘들 정도로 가팔랐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자 사방으로 펼쳐진 기암괴석들의 멋진 모습에 절로 탄성이 일었다.​​올해 여름은 더워도 너무 덥고, 한낮의 태양은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폭염주의보와 경보를 발령했다는 뉴스를 앵무새처럼 틀어댔고, 화면 속의 한반도 지도는 아궁이에 장작을 끊임없이 집어넣으며 불을 지펴 설설 끓는 아랫목 같았다. 맞서는 것보다는 피하는것이 상책이라는 듯 도시가 그렇게 비워지고 있을 즈음 허물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없는 오랜 벗이 “휴가는 갈 거야? 가면 어디로 가는데?”라며은연중 동행을 청했다. 이에 “글쎄, 최근 몇 년 동안은 휴가다운 휴가를가보지 못한 것 같아서 올해도 비슷하지 않을까?”라며 말을 흐렸다. 그나마 기자는 매달 여행을 떠나고 그것을 <자동차생활>에 연재하고 있다는 데 위안을 삼으면서……​​​속리산 자락에서 하룻밤을 보내다그럼에도 휴가라는 단어의 여운은 남아 희미한 기억 속의 ‘속리산’을 떠올리자 ‘화양계곡’과 ‘법주사’가 따라나섰다. 속리산은 산 타기를 좋아할 무렵부터 ‘가고 싶은 곳’ 중 하나였지만 쉽게 연이 닿지 않았다. 정상(문장대와 천왕봉)을 밟은 이들이 입을 모아 ‘괜찮은 곳’이라고 추천했음에도 ‘그곳은 교통이 불편한 오지’라는 선입견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꽤 오래전 속리산 자락에 눌러 앉은 충북 보은군을 찾았을 때 시간이 아주 더디게 흘렀고 몹시도 지루했었던 기억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하지만 그 사이모든 것은 달라져 있었다. 내비게이션을 통해 확인한 서울과 속리산과의거리가 채 200km가 되지 않았고, 시간도 2시간 30분이면 보은군청 앞에다다를 수 있었다. 그곳에서 20여 분이면 속리산국립공원에 닿으니 머뭇거리거나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마음이 일자 서둘러 길 떠날 채비로 바빠졌다. 속리산으로 향하는 길은 쭉쭉 뻗어 있었고, 휴가철의 고속도로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의외로 한산했다. 해가 제법 남아 있을 때 도착한 보은읍내는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했지만 길이 넓어지고 도시는 확대되어 있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에 산으로 가자”는 제안에모처럼 동행을 한 아내와 아들이 “그럼 숙소를 정하고 빨리 저녁을 먹자”며 거든다. ​급하게 떠나온 길이어서 숙소를 예약하지 못했지만 특별한 일 아니면 당일의 상황에 따라 숙소를 잡는 습관이 배어 있기에 읍내를 둘러본다. 웬만한 도시의 편의시설을 다 갖췄음에도 읍내는 하룻밤을 묵어갈 잠자리를 보여주지 않았다. 검색을 통해 “여기 어때?”라고 묻자 “어, 조금 아까지나쳐 온 곳인데”라며 길을 일러준다. 값을 치르고 열쇠를 건네받은 후 들어간 룸은 아담하고 깨끗했다. 세면도구 등은 비닐 팩을 통해 제공되었고, 미니 냉장고는 생수와 음료수로 채워져 있었다.​대충 짐을 풀고 거리로 나서자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이 발길을 이끈다.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보은군에서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여는 야단법석야시장이다. 흥겨운 트로트와 감성적인 발라드가 묘한 조화를 이룬 가운데 입맛을 돋우는 음식들과 한 잔의술을 곁들이다며보니 한여름 뙤약볕에 맥을 못 추던 더위도 기세를 꺾는듯했다.​​​​법주사 경내에는 국보급 보물이 가득다음날 속리산국립공원으로 길을 잡자 20여 분이 채 되지 않아 도로 옆의 ‘정이품송’이 여행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이품송은 수령을 600년으로 추정하는데 높이가 15m에 이르고 동서남북으로 뻗은 가지가 차이는 있지만 각각 10m에 이른다. 조선의 7대 임금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가지에 걸릴까 염려해 “연(輦)걸린다”고 하자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어가(御駕)를 무사히 통과하게 했다. 이에 세조는 이 소나무에 정2품(지금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나무는 예전의 그림을 통해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세월의 흐름을 비껴나지 못했는지 아니면 또 바뀌어 갈 미래를 위한 환골탈태를 진행하는 건지……. 노송의 모습에서 오늘과 내일이 또 다를 것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본다.​​속리산국립공원으로 가는 중에 만나는 정이품송​​​그곳에서 5분여를 더 달리니 법주사와 인연을 맺은 상가들이 이른 아침부터 손님맞이에 바쁜 모습이다. 이곳에는 법주사를 찾는 신도들이나 여행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상가거리가 거창하게 형성되어 있다. 길에는 말린각종 나물과 집에서 손수 기른 채소들을 가져와 손질하고 있는 아낙들의 난전이 손님을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다.​​​이른 시간임에도 아낙들은 여행객들에게 팔 물건을 다듬고 있었다.​​속계와 진계를 뚜렷하게 갈라내준다는 일주문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경계가 불투명했다. 최인호 선생은 ‘길 없는 길’에서 일주문이란 문아래 이르기까지 세속의 파도가 밀려와 출렁거린다 해도, 이제부터 세속을 떠나이 문을 들어설 때부터는 오직 일심(一心)에 귀의한다는 뜻으로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만 세워 짓는다고 했다.​​​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만나는 숲의 길​​일주문을 지나자 나무와 나무가 엮어내는 숲의 터널이 서서히 한여름의 기온으로 달궈지고 있는 머리 위와 발아래의 기운을 붙든다. 그럼에도 꾸준히 상승한 대기온도의 여파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방울방울 맺힌 이슬들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온 몸 곳곳에서 흘러내릴 곳을 찾기에 여념이 없다. 작은 바람에도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의 춤사위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덥긴 하지만 대도시에서와는 차원이 다른 상쾌함이 밀려온다.​일주문에서 20여 분을 더 걸어가야 모습을 드러내는 법주사는 유서가 깊다. 553년(진흥왕 14년)에 의신 스님이 창건한 후 776년(혜공왕 12년)에 진표 율사가 중창했다. 절 이름은 의신 스님이 서역에서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절은 진표 율사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 되면서 한창때는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렸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불타버린 것을 1605년(선조 38년)부터 1626년(인조 4년)에 걸쳐 사명대사가 팔상전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경내로 들어서면 세계 최대의 크기(높이 33m)를 자랑하는 청동미륵불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진표 율사가 7년간의 노력 끝에 조성해 1,000년이 넘도록 법주사를 지켜왔던 미륵불상은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당백전(동전)의 재료로 쓰기 위해 훼손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 시멘트로 불상을 만들었으나 균열이 생기자 국비와 시주를 통해 청동 160톤, 주석 16톤,아연 3톤으로 1990년 시멘트 미륵대불을 그대로 탁본을 떠 지금의 불상을완성했다.​​​법주사 청동미륵불상은 높이가 33m에 달한다​​법주사에는 이 밖에도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과 팔상전(국보 제55호), 석연지(국보 제64호) 등 3점의 국보와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법주괘불탱화(보물 제1259호) 등 10여 점의 보물을 비롯해 수십여 점의 문화재를 품고 있다. 때문에 수행자나 신도가 아니더라도 법주사가 품고 있는 웅장하고 멋있으며 운치 있는 불교 유적 앞에서 누구나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문장대에 올라서 세상을 내려다보다속리산의 정상인 천왕봉과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문장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세심정은 둘 사이를 가르는 갈림길이다.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천왕봉이고, 왼쪽으로는 문장대를 향한다. 7시간이나 걸린다는 천왕봉 대신 문장대로 발걸음을 옮기자 울창한 숲이 펼쳐지고, 길을 따라 청량한 계곡이 이어졌다.​​​문장대로 오르는 길에 만난 계곡​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걸음을 떼다보니 용바위골 휴게소가 비 내리듯 흐르는 땀을 식혀가라고 의자를 내어준다. 침샘을 가득 자극하는 해물파전과 서늘하다 못해 입안을 그대로 얼어붙게 할 것 같은 탁주 한 사발에 축 늘어졌던몸의 세포들이 다시 기지개를 켠다.​​​용바위골 휴게소에서 파전과 탁주 한 잔을 들이키며 잠시 쉬어가는 건 어떨까?​​산은 빈틈이 없었다. 만만하게 생각했던 길이 이토록 고되고 힘들까 싶었지만 가파른 길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고개를들어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막바지에 이른 듯 점점 열리는 하늘은너무도 맑고 또 뜨거웠다. 문장대를 200여m 앞둔 평지의 나무 그늘아래엔아침부터 산에 올랐을 사람들이 가쁜 숨을 죽이고 있었다.산 정상에 자리를 잡은 넓은 바위 봉우리인 문장대(대라는 것은 경지 좋은곳에 자리한 너른 바위라는 뜻)는 오르내리기 편하게 철제 계단이 놓여 있었다. 한여름의 볕을 고스란히 맞으며 문장대에 오르자 사방으로 기암괴석들의 멋진 모습이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탄성이 절로 인다. 사람들이 그토록이곳을 오르려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리라.​최인호 선생의 소설 ‘길 없는 길’로 소개된 경허 스님의 시 구절이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산도 절도 푸르고, 물도 절로 푸른데 맑은 바람 떨치고 흰구름만 돌아가네.”​​​ * 글, 사진 김태종       여행과 함께한 차, 푸조 508 GT508 GT는 2.0L 블루HDi 디젤 엔진을 얹어 최고출력 180마력, 최대토크 40.8kg·m의 성능을 내는 푸조의 플래그십 세단이다. GT라는 배지에 걸맞게 GT 시그니처, 강렬한 레드 스티치, 트윈 머플러 등 스타일링 포인트로 스포티한 감성을 살렸다. 프리미엄 세단의 감성과 GT의 강렬한 퍼포먼스가 조화를 이룬, 그러면서 도 복합 13.2km/L(도심 12.5, 고속 14.2)의 좋은 연비를 내는 실속 모델이다. 길이×너비×높이는 4,830 × 1,830 × 1,455mm 이며 휠베이스는 2,815mm. 508 라인업에는 같은 2.0L 디젤 엔진에 GT 스타일링 포인트가 빠진 펠린이 있으며, 보다 경제적인 1.6L 120마력 디젤 엔진을 얹은 얼루어와 1.6 모델에 출력 보강 없이 GT스타일링을 더한 GT 라인도 있다. 어느 모델이든 값이 4,000만원대로 실속과 품위를 동시에 누릴 수 있다. 보다 개성적인 차를 원한다면 왜건인 508 SW나 차고를 높인 크로스오버 모델인 RXH를 선택하면 된다. SW 는 1.6L 120마력 디젤 엔진을, RXH는 2.0L 180마력 디젤 엔진을 얹는다. 값은 508 1.6 4,340만원, 2.0 4,740 만원, 1.6 GT 라인 4,540만원, 2.0 GT 4,990만원이며, SW는 4,390만/4,590만원, RXH는 5,390만원이다. 
차이나 스토리 [ 홍콩 ] 2016-08-18
​     홍콩은 한때 제조업 분야에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로 일컬어졌다. 특히 금융 분야에서는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중국의 개혁 이후에도 한동안 중국과 서방의 무역을 중계하면서 막대한 부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일국양제를 유지하고는 있으나 부동산을 비롯한 사회·경제의 모든 분야가 중국에 예속되면서 이젠 홍콩인이란자부심을 접고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침사추이 커피숍에서 제임스를 만나는 날 홍콩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지난해 홍콩에서 민주화 시위가 한창일 때 홍콩의 번화가 몽콕에서 우연찮게 만났던 제임스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고 연락이 왔다. 경제는 엉망이고 행정은 중국에의해 조종되는 홍콩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의 말대로 한때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했던 홍콩의 입지가 최근들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홍콩인들은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홍콩인으로 남고 싶지만 중국이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다. 이제 홍콩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 사실이 홍콩인들을 혼돈스럽고 또 더욱 깊은 좌절감에 빠져들게 한다.​광저우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썬전역에 내리면 바로 홍콩과의 국경이다. 이곳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다리를 하나 건너면 홍콩이다. 홍콩은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되어 이젠 중국 땅이지만 50년 동안 자치를 인정하기로 해 현재 일국양제로 운영되고 있다. ​​​​   한땐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원래 중국 땅이었던 홍콩의 역사를 살피려면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전쟁이라는 아편전쟁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부터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발생한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다. 인도의 벵갈 지역에서 아편을 대량으로 재배해 청나라에 수출하는 방식이었다. 한번 맛들이면 끊기 어려운 중독성 때문에 한때 중국은 아편 중독자가 5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아편이 삽시간에 확산되었다. 커다란 수입원을 보장받았던 영국 입장에서 아편은 절대 손을떼기 어려운 사업이었다.​아편 폐해의 심각성을 인식한 중국은 1792년 아편 금지령을 선포한 후 여러 차례 아편 수입 단속에 나섰다. 하지만 부패한 관리들로 인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급기야 광동지역 관리로 임명된린저쉬(임칙서)가 아편을 몰수해 불태우면서 영국 상인들과 마찰을 빚자 영국 정부가 텐진과 닝보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세계 최고였던영국 군의 화력에 밀린 청나라는 1842년 막대한배상금과 함께 홍콩을 영국에 넘긴다는 난징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영국의 통치를 거치면서 홍콩은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에 점령당하기도 했지만 해방 이후 제조업 분야에서 한국,대만과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을 펼치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금융은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홍콩은 한동안 중국의 정보를 서방에 전달하는 소식통역할도 했다. 중국은 철저한 언론 통제를 통해 죽의 장막 안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일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했다. 다만 유일하게 일부 소식이 암암리에 전해지는 통로가 있었으니 바로 홍콩을 통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중국인들은 홍콩에가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거나 로후천을 가로질러 자유의 땅인 홍콩으로 향했다.​​​​​ ​​덩샤오핑이 최고 자리에 앉은 이후에도 홍콩은 성장을 계속했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의 후유증으로 중국 국민들이 배를 곯는 상황에서도 홍콩은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세계의 모든 경제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홍콩의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들으라면 덩샤오핑과 리자청이 첫 손에 꼽힌다. 덩샤오핑은 대약진 운동의 후유증으로 2,000만 명 이상의 인민이 굶어 죽는 것을 목격하고 시장 경제의 필요성을 인식, 197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개방정책을 제시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를 채택하는이율배반적인 정책을 펴는 도박을 감행했으니 가히 그를 작은 거인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데 그의 뒤에는 리자청이 있었다. 덩샤오핑은 홍콩의 최고 갑부 리자청에게 중국 개방의 조타수 역할을 요청했고, 그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썬전과 산토우에 경제 특구를 만들었다. 산토우는 리자청의 고향이다.​중국의 개방정책에 힘입어 최고의 경제적 특혜를 누린 홍콩은 중국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서방의 어느 누구도 중국을 직접 방문하기 어려울 때 홍콩인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최대한 활용해 중국과의 교역을 늘려 나갔다. 개방정책 이후1990년대 중반까지 이런 특혜를 누리면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중국은 홍콩을 통해서’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으니……. 필자가 처음 중국과 거래를 한 것도 홍콩의 무역회사를 통해서였다. ​당시에는 중국 공장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이들이 홍콩 사람들밖에 없었다. 중국인들과 설사 말이 통한다 해도 직접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중국의 문화와 산업구조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있었던 것. 오로지 홍콩 사람들만이 중국인들과 대화를 통해 거래 조건을 성사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중국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돈을 번 홍콩인들은 주말이면 중국으로 넘어와 돈을 흥청망청 쓰고 다니면서 자신들이 중국에서 차지한 우월적 지위를 최대한 즐겼다. 중국인들은 그런 홍콩인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경제적인 차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지금은 중국에 좌우되고 있는 상황그러나 2000년대가 되면서 중국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냈던 홍콩 무역회사들의 수입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비싼 중계 수수료를 물어가며 홍콩 회사들과 거래를 했던 서방의거래처들이 직접 중국과의 교역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홍콩과 거래했던 유럽과미국의 많은 거래처들이 중국 공장들과 직접 거래하기 시작했고, 중국 업체들도 각종 무역 전시회를 통해 자신들의 역량을 알려 나갔다. 중국에대한 장막이 걷히면서 홍콩의 도움 없이도 거래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알다시피 홍콩은 중국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한때 세계 최대 항구로 이름을 날렸었다. 하지만 중국이 썬전항을 만들면서 직접 수출을 시작하자 홍콩을 통해 선적을 하던 엄청난 물동량이 홍콩으로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굳이 비싼 운송료를내고 홍콩까지 운반해 수출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상하이와 썬전의 주식 시장이 개장되자 홍콩으로 들어오던 자본마저 끊겼다. 막대한 중국의 자본이 홍콩보다는 썬전이나 상하이 증시에 투입되면서 홍콩이 누리던 아시아 금융 시장에서의 독점적인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홍콩의 고급 주택가. 중국인들이 홍콩 부동산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이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부동산 시장의 지각변동이다. 20여 년 전만 해도 홍콩인들은 중국의 부동산을 매입하는 데 열을 올렸었다. 썬전을 비롯하여 산토우와 동관, 광동성 일대가 주된 먹잇감이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오늘날은 상황이 반전되었다. 중국인들이 그동안 축적한 두툼한 지갑을 들고 홍콩의 부동산에 손을대기 시작한 것이다. 상권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홍콩인들은 임대료를 부담하기도 어려운상황. 얼마 전에 161평짜리 아파트가 891억원에팔렸다는 뉴스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평당 5억원이 넘는 셈이니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홍콩은 예외다. 홍콩에서는 부동산 증여세와 상속세가부과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중국 부호들이 너도나도 홍콩의 부동산 구입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홍콩에서는 부동산증여세와 상속세가 부과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중국 부호들이 너도나도 홍콩의 부동산구입에 나서고있는 것이다​​​홍콩의 서민주택들. 주택난이 가중되면서 작은 아파트를 여러 개로 쪼개어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홍콩은 도시국가라는 특성상 주거면적이 제한적이다. 많은 인구가 좁은 지역에 살다보니 부동산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홍콩에서는 임대주택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해왔으며, 그 비율이30%가 넘는다. 그런데 중국인들의 부동산 투기열풍이 임대주택 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임대주택보다는 당장 돈이 되는 아파트와 일반주택 분야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주택자금을 마련하기 어려운 홍콩의 서민들이다. 전에는 그나마 임대주택이라는 안전장치가 있었지만 부동산 투기로 공급이 끊기면서 외곽에서 다시 외곽으로 밀려나가는 추세다.​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요즘 홍콩에는 벌집 형태의 아파트가 유행이다. 예전에 한 가구가 살던 13평 아파트를 쪼개고 쪼개서 네 가구가 사는 공간으로 개조한 형태다. 물론 홍콩 정부에서도 할 말은 있다. 홍콩인들이 주택을 살 경우 취득세가 3%인 데 비해 중국인에게는 21%를 부과함으로써 홍콩의 재정부담을 줄이는 데 이만 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홍콩인들은 부동산뿐만 아니라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과 홍콩의 국경에는 아침마다 홍콩으로 등교하는 학생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아침에 홍콩에 있는 학교와 유치원에 갔다가 오후에는 중국으로 돌아오는 학생들이 수없이 많다. 홍콩의 많은학교와 유치원을 중국 학생들이 차지하는 바람에 정작 홍콩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실정이다. ​​홍콩과 중국의 국경은 아침마다 홍콩 유치원으로 가는 중국 유치원들로 붐빈다​​​홍콩에 가정부로 취업해 있는 필리핀 여성들 휴일이면 공원에 나와 친구들을 만난다​​ 또한 국경에는 홍콩 식품들을 주로 운반하는 보따리상들이 진을 치고 있다. 중국에서 멜라민 분유나 불량식품 문제가발생하면 홍콩의 식료품은 거덜이 난다. 상황이 이러하니 홍콩인들의 중국인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될 수밖에. 시위 밑바탕에는 경제 문제도 있어 홍콩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무시해왔던 중국인들이 홍콩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며 주인 행세를 하는 모습에 분노를 표시해왔다. 하지만 이제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지난해 정치적인 문제로 야기된 홍콩의 민주화 시위는 사실 경제적인 측면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홍콩의 지도자인 홍콩 행정장관은 800명의 선거인단에 의해 간접선거로 선출된다. 그런데 홍콩 시민들은 선거인단이 친 중국 성향의 인물로 구성되었다며 중국 지도부에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하지만 홍콩인들의 시위행태는 목숨을걸 만큼 절실하지 못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사례로 들면서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했지만 죽기 살기로 민주화를 쟁취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목소리가오래도록 힘을 쓰지 못한 이유는 이를 반대하는홍콩인들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시위가 지속되면서 관광객들이 감소하고 상점마다 매출이 급감하자 시위를 반대하는 또 다른 시위가 일어났던 것. 같이 힘을 모아 정부에 대항해도 부족한 판에 시위를 반대하는 무리의 등장은 한껏 달아오른 반정부 시위의 열기에 찬물을 뿌리는격이었다.​​​​지난해 홍콩 민주화 시위 때읜 모습. 정치 민주화를 내세웠지만 사실 경제적인 측면이 바탕에 깔려있다​​​​민주화 시위를 반대하는 시위대의 모습  앞서도 말했지만 홍콩인들이 홍콩의 민주화를외치며 반정부 시위에 나선 배경에는 그동안 홍콩이 누려왔던 각종 특혜가 없어진 것에 대한 강한 불만이 배어 있다. 경제는 점점 어려워지는데다 그동안 홍콩인들이 누리던 각종 혜택을 중국인들이 빼앗아가는 현상이 홍콩인들의 감정을자극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앞으로도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전망에 있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어려운 국면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해 홍콩의 경제성장률은 2.6%였으나 올해는 1.6%로 예상되고 있다. ​홍콩은 이제 중국의 경제에 완전히 예속되었다. 중국 관광객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다. 싫지만 이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홍콩인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홍콩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은 중국인이 아니라 홍콩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으나 이제는 좋든 싫든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곳에는 이미 인민해방군이 진주해 있다. 홍콩인들은 침체돼 있는 지금의 홍콩을예전의 활기차고 역동적인 곳으로 되돌려 놓고싶지만 자신들만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의 미래는 홍콩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국 정부의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왼쪽이 중국. 오른쪽이 홍콩이다​글,사진 양인환(중국 통신원)​​양인환 중국통신원- 1957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나 91년까지 금융권에서 일하다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 자동차와 함께 하는 삶에 새롭게 도전했다. 91년 국산 자동차로 미국 48개 주를 일주해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92년 아시아 록스타로 호주를 일주했다. 93년 호주 웨스턴 랠리스쿨을 이수한 뒤 호주 웨스턴 랠리 침피언십, 홍콩-북경 랠리(94년), 태국랠리(94년) 등에서 전문 드라이버로 활동했다. 93년부터 96년까지 본지의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참가한 랠리를 비롯해 세계의 다양한 자동차 경주와 시승기를 소개했다. 저서로 ‘대머리 돈키호테’, ‘차를 알고 문화를 세우는 여유로운 운전’이 있다. 2002년부터 중국 저장성 이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양인환 통신원은 앞으로 중국을 비롯한 북미, 남미, 아시아, 유럽 등의 재미있는 여행기를 소개할 계획이다. 머지않아 미국과 호주에 이어 중국과 남미대륙을 일주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늘 지나쳤던 그곳의 재발견-목포 2016-08-04
  기자에게 있어 목포는 일을 할 때는 지나치는 경유지였고,쉴 때는 남도의 섬들을 찾아가는 길목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작정하고 목포 여행에 나섰다. 그 곳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고,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볼거리를 보여주었다. 낮보다 밤이 아름답다는 목포.그러나 밤 기행은 훗날을 기약한 채 이른 아침 이곳을 거닐었다.    ‘보라, 좋은 것은 가까이 있다. 네가 보려고만 한다면…….’ 제대로 기억의 한 페이지를 끄집어낼 순 없지만, 기자가 목포를 처음 찾은 것은 아마도 2008년 즈음의일이다. 당시 전라남도는 세계 모터스포츠의 최고봉인 F1 그랑프리를 유치한 후 2010년 첫 개최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각계의 의견을 구하고 있었다. 모터스포츠를 담당하고 있던 기자 또한 전라남도 관계자의 초청으로 난생 처음 목포를 찾았다.​전라남도 도청은 당시 광주광역시에서 목포와 맞댄전남 무안군 남악면으로 막 이전해 주변 조성이 한창이었다. 자가용이 아닌 대중교통(고속버스나 기차)을 이용하면 목포역이나 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나 시내버스를 타야 하는데, 기자 역시 터미널에 도착한후 택시로 도청을 찾았다. 관계자들과의 만남이 끝나자 몇 차례 서울에서 얼굴을 익혀 허물없이 지내던 한 직원이 “괜찮다면 저녁을 함께 하면서 더 많은 조언을 듣고자 한다”며 식사를 청했다. 이미 시간은 그들의 퇴근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애초 당일 미팅을 끝낸 후 곧바로 서울로돌아갈 예정이었지만 “지금 올라가면 자정이 다 되어 피곤할 것 같으니 목포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나쁘지 않을 것 같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그렇게 둘은 도청에서 택시를 타고 목포시 하당동 근처로 갔다. 직원이 안내한 곳은 홀에 테이블이 4개 정도밖에 없는 조그마한 실비집이었다. 제철에 맞는 회를 아주 적당량만 줘 남기는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에 이어 민어와 병어 등이 상을 채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를 그다지 즐기지 않았지만 그곳의 분위기와 맛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언제 한번 다시 찾으리라 다짐하며 F1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유지 또는 길목이었던 목포그 뒤로 F1 그랑프리가 개최되기 이전까지 서너 차례목포를 방문하면서 가끔 그때의 맛과 분위기를 그리워했지만 발걸음은 쉽게 닿지 않았다. 언제나 숙소는목포 시내에서 상대적으로 깔끔한 평화광장 주변에 잡았고, 대부분의 식사나 만남도 그곳에서 해결했다. 2010년 F1 그랑프리가 전남 영암의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에서 개최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금요일부터 개최되는 일정보다 하루 먼저 내려갔지만 그때는 강진과 장흥, 진도와 해남, 보성, 그리고 더 멀리 있는 순천의 볼거리에 더 관심이 갔다. 그렇게 여러 해에 걸쳐 수십 차례나 목포를 찾았지만 기자에게 목포는 단지 인근 목적지로 향하는 경유지이거나 전라남도의 섬들을 찾아가는 길목일 뿐이었다.​그러다 지난 7월의 어느 날, 취재를 위해 목포를 찾았을 때 문득 쳇바퀴 돌듯 이곳을 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광장 주변의 숙소에서 선잠 깨듯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치고 신발 끈을 조인 후 문을 열었다. 밖은 옅은 안개가 살랑거리고 있었고, 영산강하구원의 바다를 접한 산책로에는 이른 시간임에도사람들이 하나 둘 스치듯 지나갔다. 자그마한 어선들을 품은 바다는 고요했고, 동쪽 하늘에서는 콩알보다도 작은 해가 기지개를 켜며 안개를 뚫고 은은하게모습을 드러냈다. 바다와 해, 돛대를 세운 배, 그리고갈매기가 캔버스를 수놓고 있는 모습은 화폭의 한 장면에 다름 아니었다. 이곳이 내가 늘 오갔던 바로 그목포였던가?​​​​숨을 고르듯 그렇게 멍하니 세상이 그려낸 작품 하나를 가슴에 들여놓고 발길을 떼다보니 유람선 선착장이 눈에 들어온다. 유람선에서는 목포 해안의 야간 절경을 1시간 가량 감상할 수 있다는데 지금은 이른 오전이라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아쉬움을 가득 안고바닷물의 높낮이에 따라 높이가 조절되는 해상보행교에 올라서자 목포가 자랑하는 갓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이 나란히 삿갓을 쓰고 서 있는 형태인데 예전에는 배를 타고 나가야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정처 없는 발걸음은 이제 목포자연사박물관과 목포생활도자박물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이어진다. 어른 3,000원의 입장료를 받는 자연사박물관은7개의 전시실에 45억 년의 자연사 자료를 전시하고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세계에서 단 2점뿐이라는 공룡화석 프레노케랍토스와 전남 신안군 압해도에서발굴해 복원한 세계적인 규모의 육식공룡알 둥지 화석이 전시되어 있다. 공룡에 관심이 많은 아이와 함께 가면 좋을 듯. 자연사박물관 입장권으로 문예역사관과 생활도자박물관도 함께 관람할 수 있어 부담도적다.​​ ​​​​​목포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는데…무언가에 홀리듯 한참을 걷다 문득 돌아갈 길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진다. 걷는 것은 이쯤에서 멈추고이제는 차에 몸을 실을 차례. 숙소로 돌아가 주섬주섬 짐들을 가방에 챙긴 후 시동을 걸었다. 목포 관광안내지도는 한 청년을 사모한 세 여인이 죽어서 학이되었고, 그 학이 떨어져 죽은 자리가 섬이 되었다는삼학도로 이끈다. 여름밤에는 옛 선창의 향수가 가득한 해상파시를 재현하고, 다양한 체험행사를 통해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하는 곳이지만 이른 오전이라 조용하고 한산했다.​이곳에서 붕장어(일명 아나고) 낚시를 하는 박규선할아버지(82세, 목포시 만호동)를 만났다. 새벽 4시에 나왔는데 오전 7시가 넘은 지금까지 씨알이 굵지않은 4마리밖에 잡지 못했다면서도 환한 웃음을 짓는다. 진도에서 태어난 박 할아버지는 72년 목포로나와 45년 동안 목선을 만들었다며, 지금은 플라스틱 배에 밀려 옛날 모습을 재현하는 수준에 그치는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의 먼 뒤편으로 목포 여객선터미널이 잡힐 듯 눈에 들어왔다.​​ ​​다시 목포의 명물 유달산으로 향했다. 가는 길 왼쪽으로 하얀 부챗살을 펼친 것도 같고 학의 날개를 닮은 듯도 한, 목포의 북항과 고하도를 연결하는 목포대교가보이고 그 아래로 고속정이 물보라를 튀기며 지나간다. 해발 228m에 불과한 유달산을 차로 오르는 것은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다. 더딘 걸음으로 산으로 들어가고 나오면서 둘러보는 게 제 맛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레길에 있는 조각공원과 목포근대역사관에 관심이 있다면 차를 이용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흔히 목포는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이번에는 새벽에 불현듯 출발했지만 다음에는 해질녘부터시작해 목포의 밤에 제대로 취해볼 생각이다. 늘 머무르면서도 그냥 지나치곤 했던 목포. 그 곳을 재발견한기쁨이 뿌듯하게 다가온다.​  여행과 함께한 차, 쌍용 코란도 C 삼바에디션  서울에서 목포까지 함께한 차는 쌍용 코란도 C 삼바에디션(Samba Edition)이다. 쌍용차가 정열적인 삼바스타일로 익스테리어를 다듬으면서 상품성을 개선한 모델로, 지난 7월 5일부터 판매를 시작했다. 코란도 C 삼바에디션은 우선 겉모습에서 일반 모델과 차이가 난다. 삼바 컬러를 활용한 전용 데칼을 붙이고 수출용 윙로고 엠블럼과 스피닝 휠캡, 휠라이너 등으로 시원하고 발랄한 느낌을 더했다. 아울러 LED 도어 스카프, 테일게이트LED 램프, 센터페시아 휴대폰 무선충전기를 새로 마련하는 한편 7인치 3D 내비게이션을 포함한 인피니티 프리이머 사운드 시스템을 기본 장착해 편의성도 높였다. 갤럭시그린(Galaxy Green)을 비롯한 새로운 익스테리어 컬러도 추가했으며, 그동안 선호도가 높았던 스마트키와 운전석 통풍시트를 기본으로 갖췄다. 옵션으로 적재 활용성을 크게 높여주는 루프박스 & 스포츠 유틸리티바 패키지를 선택할 수 있으며, 현재 이 패키지를 선택하면 고급 백팩을 주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값은 2,748만원이며 9월 말까지 3개월 동안 한정 판매된다.코란도 C 외에 코란도 스포츠와 티볼리 등 3개 모델에 삼바에디션을 내놓고 있는 쌍용차는 삼바에디션 출시를기념해 8월 31일까지 다양한 온·오프라인 이벤트를 펼친다. 온라인에서는 쌍용차 홈페이지를 방문해 이벤트에 응모한 고객들 중 추첨을 통해 영화관람권(300명), 커피교환권(500명)을 준다. 또한 오프라인 쌍용차 매장을 방문해 삼바에디션 구매 견적을 낸 고객들에게는 티볼리 송풍구 방향제 등 소정의 사은품을 증정하고, 추첨을 통해 브라질 자유여행권(5명), LG 트롬스타일러(10명), 콜맨 캠핑패키지(15명), 다이슨 진공청소기(20명) 등푸짐한 경품을 제공할 예정이다(당첨자 발표는 9월 8일).       *글,사진 김태종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증도 2016-07-24
​​느려서 더 행복하다고? 그 말 믿어도 될까?​​증도는 2012년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 에서 2위를 차지한 데 이어지난해에도 다시 선정되는 등 국내를 대표하는 생태 관광지다.  다리에 걸린 석양이 갯벌을 무대삼아 춤추듯그려내는 한 폭의 동양화를 상상하며 이곳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하늘은 비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  보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국내를 대표하는 생태 관광지,  증도다.  1,004개나 된다는전남 신안군의 섬 중 하나지만 지금은 인근 사옥도와다리가 연결되어 있어 배를 타지 않아도 되는 섬 아닌섬이다.  ‘슬로시티’(Slowcity)라는 이름으로 방송과 언론을 통해,  그리고 다녀온 이들의  “한 번은 꼭 가보아야 할 곳” 이라는 말들이 그리움을 키웠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  문득  “그래,  증도?” 라는 생각이 일었다.  서울에서 증도까지는 빠르게 내달아도5시간은 걸리지만 일체의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북무안 톨게이트’ 를 빠져나와 24번 국도로 접어드니 황토밭에는 양파를 수확하는 농부들의 손길이바쁘다(무안은 양파산지로 유명하다).  길옆에는 빨간자루에 담긴 양파가 곧이어 올 트럭을 기다리고 있고, 곳곳에 걸려 있는  “마늘과 양파 작업을 하는 차량들에게 양보해 주세요” 라는 큼지막한 현수막이 눈길을끌었다.     관광안내소 직원에게 여행지 추천받아그렇게 50여 분을 바다와 들이 만나고 가끔은 크게촌락을 이룬 곳을 지나 몇 개의 다리를 건너니 ‘증도대교’ 가 떡하니 버티고 섰다.  증도는 2012년 한국관광공사 선정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  2위에 이름을 올린 후 지난해에도 다시 선정되는등 국내를 대표하는 생태 관광지로 꼽힌다.​     이 다리를 건너기만 하면 그토록 고대하던 속살과 마주한다.  첫 사랑의 여인을 다시 만나는 기분이랄까? 곧장 들어가기는 뭔가 두고 온 것 같아 어지러움이 인다.  차를 한쪽에 세우고 바다를 건너온 바람을 맞으며증도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보니  ‘느려서 더 행복한 섬슬로시티 증도’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하늘 계단을 오르는 설렘으로 다리를 건너자 증도 관광안내소가 기자를 맞이한다.  ‘안내서’ 를 집어 들고는직원에게  “처음 오는데다가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않다” 며 둘러볼 곳에 대한 추천을 부탁했다.  그러자그는  “증도에서 숙박을 하고 가실 건가요?  아니면 돌아가실 계획인가요?”  하고 되묻는다. “아,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겁니다” 라고 멋쩍게 답을 하자  “그러면 ‘장뚱어 다리’ 를 건너면서 갯벌의 매력을 느껴본 뒤 보물섬 위쪽 전망대에서 석양을 보고 가세요. 석양이 정말끝내줍니다”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장뚱어? 그러고 보니 도중에 만나는 식당들은 하나같이 ‘장뚱어탕’ 이라는 메뉴를 내걸고 있다.  서남해안 갯벌에서 주로 서식하는 짱뚱어는 소고기보다 단백질 함량이 많고 미네랄이 풍부하며 고소하고 담백해 지역민들에게 보양식으로 사랑받는 음식이다.  지난해 7월 말에는 증도 우전해변에서 ‘제1회 짱뚱어 축제’ 를 열기도 했다.​​   갯벌을 가로질러 난 장뚱어 다리는 장뚱어와 우전해변으로 닿아 있다.  해변은 아직은 때가 이른 듯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지만 볏짚을 엮어 올린 파라솔이 이국적인 정취를 풍긴다.  주말을 맞아 해송 숲에 조성된‘오토캠핑장’을 찾은 가족들이 저녁식사 준비로 분주한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그들의 여유가 부러움으로다가오자 돌려야 하는 발길이 더욱 무겁다.  현재라는아주 귀한 선물을 포장도 뜯어보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내일에 맡기려고 하니 그럴 수밖에.​    다리에 걸린 석양이 갯벌을 무대삼아 춤추듯 그려내는 한 폭의 동양화를 오늘은 내어주지 않을 심산인 듯하늘은 비구름을 머금었다.  “차를 한 잔 마시면서 기다릴까? 아니면 해가 지기 전에 섬을 더 둘러볼까?” 운전석에 앉으니 가벼운 차림의 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길을 나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이향하는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증도의 낙조 감상은 뒷날을 기약하며…액셀 페달에 발을 얹고 무심히 달리니 자그마한 섬을다리로 연결한 산 위에 정박해 있는 배가 눈에 들어온다.  1975년 한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가 걸려 올라온것을 발굴한 보물선인데,  1층은 쉼터와 카페로,  2층은유물전시관으로 꾸며 일반인들에게 1,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보물선 다리를 건너는 바로 위는 낙조전망대가 서해바다를 지긋하게 내려 보고 있다.  안내소 직원이 극찬할 만큼 명품 낙조를 자랑하는 곳이지만 날씨가 허락하지 않아 그저 덤덤하기만 하다.  첫 만남이기에 자신이 갖고 있는 속마음을 다 보여주지 않으려는 걸까? 볼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국내 최대 규모(462만㎡)의 태평염전에서는 소금박물관을 비롯해 소금밭 갯벌 길 걷기,  소금밭 체험(천일염 수포 포함),  염천창고 견학,  소금밭 습지 견학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있다.  그리고 지친 하루를 쉬어가려면 증도 곳곳에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는 펜션과 민박집의 문을 두드리면 된다.   홀로 여행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얽매임에서 한껏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그러면서도 또 이렇게 홀로인 날에는 함께 했으면 좋았을 사람이 그립다. 그것이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여행과 함께한 차, 쉐보레 캡티바올해 3월에 출시된 2016년형 캡티바는 디자인을 다듬고 유로6 대응 2.0L디젤 엔진과 6단 자동변속기를 장착하고 있다.  오펠이 공급하는 2.0L 디젤 엔진은 최고출력 170마력과 40.8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하며,  아이신 6단 자동변속기를 조합해 복합연비 11.8km/L를 낸다. 사각지대경고 시스템과 후측방경고 시스템 등 다양한 안전장비와 애플 카플레이를지원하는 마이링크를 담았다.  모든 모델에 기본 장착된 마이링크 시스템은 후방카메라 기능을 겸하며, 휴대폰 내비게이션 어플리케이션 브링고(BringGo)와 애플 카플레이 내비게이션을 동시에 지원한다. 또한 7인승 좌석을 전 트림에 옵션으로 적용해 실내거주성과 공간활용성을 높였으며, 시트를 손쉽게 접고 펼 수 있는 이지 테크(EZ-Tech)가 적용된 분할 시트 폴딩을 통해 최대 1,577L의 적재공간을 확보했다. 값은 2,809만~3,294만원.  TIP  증도를 여행하려면 관광안내소에 비치된 안내서를 한 장 꼭 챙기자.  안내하는곳으로 발길을 옮기다보면 어느새 섬 한바퀴를 돌고,  ‘느려서 행복한 섬’ 이라는말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안내서에는 낙지 초무침과 해풍건정, 장뚱어와 백합 요리 등 증도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도 소개되어 있다. 증도는 걷거나 자전거 여행을 하기에도 좋다.  ‘모실길’이라고 이름을 붙인42.7km의 길은 5개의 구간으로 나뉜다.이 길은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를 끼고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도로로 경사가완만하고 주변 경치가 빼어나다.  글, 사진 김태종 
탱고와 축구의 나라, 아르헨티나 2016-06-09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밤하늘에는 어릴 때 보았던 은하수가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중국에서 13년 넘게 지내면서 파란 하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게 아르헨티나의 맑은 하늘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공해가 거의 없는 이곳이 천국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르헨티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 곳 중 하나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나오는 대척점 근처에 있는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다. 그래서 가는 길도 멀다. 정확히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서 도착하는 곳이니만큼 직항편도 없다. 이번에는 터키 이스탄불과 브라질 상파울루를 경유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가는 터키항공을 이용했다. 비행시간만 30시간이 걸리고 경유지에서 대기하는 시간까지 따지면 편도에 34시간이 넘게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비행기를 타는 동안 다섯 번의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국회 의사당 백인이 95% 이상인 남미 국가아르헨티나는 1580년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다. 알다시피 스페인은 나폴레옹에게 패하기 이전까지 무적이었다. 이런 힘을 무기로 브라질을 제외한 남미의 모든 지역을 장악했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하면서 스페인의 철권통치가 남미 지역에서도 힘을 잃었다. 그동안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느끼던 점령지의 수장들이 이 틈을 이용하여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을 선언하면서 여러 나라로 분리되었다. 아르헨티나 역시 이 시기에 산 마르틴 장군(1778~1850년)에 의해 1816년 독립을 선언했다.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까지 세계 10대 강국에 들 정도로 대단한 부를 지닌 나라였다. 한반도의 12.5배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지만 현재 인구는 4,000여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백인이 주를 이루며(95% 이상)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에서 온 이민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언어는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92%가 가톨릭 신자이다. 인구의 약 90%가 도시에 거주하는데 전체 인구의 30% 이상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고 있다. 20세기 영화를 아직도 기억하는 아르헨티나인들은 자신들은 남미가 아니라 유럽에 속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아르헨티나는 다른 남미 국가와 달리 인구의 95% 이상이 백인이다 넓고 비옥한 땅 때문에 아직도 1차산업의 비중이 높은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국토의 40% 이상이 목장과 방목지일 정도로 목축업이 발달했으며 10%의 농지에서는 밀, 보리, 옥수수, 귀리 등을 생산한다. 아르헨티나의 농업 경쟁력은 세계에서 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강하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농산물을 수출하려면 수출세를 내야 한다. 그것도 35%로 세율이 무척 높다. 이번에 새로 선출된 대통령이 수출세를 없애 수출 경쟁력을 더욱 높이겠다고 공약했으니 아르헨티나의 농•축산물은 세계 시장에서 더욱 지배력을 높여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어쨌든 지금까지 이런 고율의 수출세를 부담하고도 다른 나라보다 싼 가격에 수출을 할 수 있으니 엄청난 경쟁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수출을 할 경우 원자재 구입에 부담했던 관세나 부가가치세를 돌려주는 게 보통이다. 그렇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수출할 때 세금을 환급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출세를 내야 하니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마도 정부의 주요한 재정수입이 농•축산물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출세에 대한 비중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마차가 다녔던 길을 지금은 차가 달린다. 이미 140년 전에 길이 50cm의 돌을 부에노스아이레스 전체 도로에 깔았다 정치 불안과 경제정책의 실패아르헨티나는 서쪽은 안데스산맥을, 동으로는 대서양을 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거대한 나라다. 그래서 동시에 사계절이 존재하는 희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북부에는 사막과 정글이 형성되어 있고 남쪽은 빙하지대가 펼쳐진 장관을 볼 수 있다. 얼마 전에 아르헨티나의 거대한 빙하가 무너져 내렸다는 뉴스를 보았다. 아르헨티나 최남단 오수하야에서는 몇 년마다 빙하가 내려앉는 장관을 연출하는 곳으로 명성이 높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넓은 농토를 가진 나라이지만 계속적인 정치 불안과 경제정책 실패로 남미의 선진국 꿈은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화를 이루었지만 계속되는 쿠데타로 칠레와 함께 오랜 기간 군사 독재정권에 의해 통치를 받는 쓰라린 경험을 겪었다. 안데스 산맥을 마주하고 있는 칠레의 칠레노트 정권의 폭압정치도 다른 나라의 질타를 받았지만 아르헨티나 역시 군사정권 시절 많은 민주인사들이 감옥에 투옥되고 고문과 사형을 당한 것으로 악명 높다. 1976년 비델라 장군이 집권할 당시 약 3만 명에 이르는 학생과 반정부 인사들이 죽음을 당했다. 지금도 이를 기념하는 ‘5월의 탑’ 앞에는 당시 희생자와 실종자들을 위한 기도회가 계속되고 있다. 워낙 쿠데타가 자주 발생해서 제대로 임기를 끝낸 대통령을 손으로 꼽을 정도로 불안한 정치상황은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버스전용차로는 전임 대통령이 한국에서 따온 제도다 넓은 국토와 비옥한 농지를 가지고 있지만 1차산업의 비중이 높고 경제정책의 실패가 이어지면서 국민들의 삶은 그다지 풍요롭지 못하다. 한때 세계 최초로 냉동선과 볼펜을 만들 정도로 산업화를 이루는가 싶었지만 공업화가 뒤처져 대부분의 중화학 제품은 수입을 하는 상황이다. 1989년 달러와 페소를 1:1로 하는 태환경제를 도입하고 물가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전기, 철도, 항공 등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등 경제의 대수술을 단행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한때 인플레이션이 5,000%에 달해 지폐로 도배를 한다고 할 정도로 불안정한 경제를 유지해왔고, 불과 지난해에도 디폴트를 선언할지 모른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달러당 페소의 교환율이 15:1에 달하니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어느 정도로 어설프게 운영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하철. 이미 100여 년 전에 지하철이 건설됐다 필자는 아르헨티나를 가기 전까지 이곳이 대단한 부자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1인당 GDP가 1만4,000달러밖에 안 되고 전기와 철도 등 공공부분이 대단히 취약하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실제로 아르헨티나의 심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길을 막고 시위를 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잘 사는 나라라고 생각했던 아르헨티나의 수도에서 섭씨 40도에 가까운 더운 날씨에 그것도 한 달 가까이 전기가 안 들어오는 상황을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페론 스토리아르헨티나의 정치를 이야기하려면 1940년대 중반 대통령을 역임한 후안 페론의 부인인 에바 페론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와 뮤지컬, 오페라로 유명한 ‘에비타’는 ‘꼬마 에바’라는 뜻이다. 시골 농부의 딸로 태어나 일국의 정치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올랐던 에바 페론의 삶은 한 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하다. 에바 페론은 팜파스의 작은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입성한 후 삼류 연극배우를 거쳐 각고의 노력 끝에 영화배우, 유명한 성우로 성공한 그녀는 후안 페론 대령을 만나게 된다. 당시 정치에 대망의 꿈을 꾸고 있던 후안 페론의 두 번째 부인이 된 에바는 노동자의 처우개선과 임금인상, 여성의 지위개선 등의 내세우며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아르헨티나의 독립영웅 산 마르틴 장군의 묘가 있는 성당 그렇지만 그녀는 현실을 무시하고 펼친 무모한 복지정책으로 부강한 아르헨티나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비난도 동시에 받는다. 가난한 빈민촌을 방문한 에바 페론은 그 동네 사람들을 모두 새롭게 주택단지를 조성해 이주시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나라였을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나라의 재정은 거덜이 났다. 일이 없으면 정부에서 수당을 주니 열심히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전형적인 포퓰리즘으로 인해 남미의 유럽을 꿈꾸던 아르헨티나는 결국 실패한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화처럼 극적인 삶을 살았던 그녀는 백혈병과 암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에비타(에바 페론)의 묘비 에바 페론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극과 극이다. 또한 그녀의 삶은 죽어서도 평탄하지 못했으니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여자라고 할 수 있다. 쿠데타로 페론을 몰아낸 군사정부는 페론주의의 부활이 염려되어 에바 페론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빼돌린다. 또한 쿠데타로 쫓겨난 페론은 해외로 망명길을 떠난다. 그렇지만 불사신과도 같은 페론은 아르헨티나 정계에 복귀해 1973년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정말 영화 같은 사건이 아르헨티나의 근현대사를 장식하고 있다. 대통령이 된 에바 페론은 그녀의 시신을 아르헨티나로 옮겨와 레콜레타 가족 묘지에 안장시켰다. 덕분에 에바 페론의 묘소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한 번은 찾게 되는 명소가 되었다.에바 페론의 망령은 아직도 아르헨티나를 혼돈스럽게 만들고 있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나치의 잔당들이 최근까지 숨어 지내던 곳으로 유명하다. 평소 히틀러와 친하게 지냈던 페론이 독일의 패망 이후 나치의 추종자들이 아르헨티나에 머물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영향으로 히틀러가 죽지 않고 아르헨티나로 몰래 들어와서 여생을 평화롭게 살았다는 루머까지 나돌았다. 해외토픽에서 나치 잔당에 관한 소식이 들려오면 아르헨티나에서 나온 이야기가 많다. 아르헨티나에는 독일마을이 있다. 코르도바의 비샤 헤네랄 벨그라노(Villa General Belgrano)에는 독일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많이 거주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맥주는 아르헨티나에서 최고로 꼽히며 매년 10월에는 맥주축제가 벌어진다. 코르도바 에서 열리는 세계 3대 랠리(WRC)중 하나인 아르헨티나 랠리는 거칠고 험한 코스로 유명하다. 멘도사는 아르헨티나 포도주의 주산지이다. 아르헨티나의 포도주는 그동안 자국민의 소비가 워낙 높아서 해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럽의 포도주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지만 세계 명품의 포도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주원료로 쓰이는 말벡 포도는 유럽에서는 전염병으로 인해 멸종되었지만 아르헨티나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며 맛 좋고 품질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강렬한 원색으로 치장한 보카 지역 양철 집들의 모습 탱고의 발산지이자 축구강국탱고(Tango)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집시풍의 음악과 춤이다. 얼마 전에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아르헨티나를 방문해서 미녀 댄서와 탱고를 춘 것 때문에 한동안 시끄러웠었다. 탱게레(Tangere : 만질 수 있다)라는 말에서 기원하는 탱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Boca) 지역에서 탄생했다. 19세기 후반의 보카는 유럽에서 들어오는 배들이 짐을 하역하는 항구였다. 그곳에서 일하는 하층민들이 고달픈 삶을 음악과 춤으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탱고다. 보카 항구는 오래전에 북쪽으로 이전해서 지금은 물자를 나르던 노동자들이 없지만 이곳에는 아직도 가난한 이들이 많이 살고 있다. 보기에도 낡고 허름한 건물들에는 미국의 빈민촌처럼 온통 지저분한 낙서들로 가득 차 있다. 길거리에 세워진 차들은 너무 낡아서 제대로 굴러갈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탱고의 발상지에 지어진 집들은 벽과 지붕을 양철로 더덕더덕 붙여놓았다. 그렇지만 양철로 된 집들은 화려한 원색으로 칠해져 있어 마치 예술작품을 보는 듯하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조선소에서 쓰고 남은 페인트로 집을 칠하다보니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나 원색의 강렬한 조화로 인해 이곳의 양철 집들은 관광객들에게 아름다운 건출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양철로 지어진 탓에 보카의 뜨거운 여름을 견뎌 내려면 무척이나 힘들 것 같다.보카는 세계적인 축구팀 보카 주니어의 본거지다 보카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팀 보카 주니어가 있다. 영국 선원들이 건네준 축구공으로 마구잡이식 축구를 하던 보카 지역 사람들은 1905년 아르헨티나 최초의 축구팀을 만들었다. 이 팀이 아르헨티나 축구의 역사를 썼다는 보카 주니어다. 축구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고단한 삶의 애환을 풀 수 있는 돌파구였다. 이들의 결속력은 어느 지역보다 강해서 아르헨티나 최고의 팀이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축구 스타 마라도나가 이 팀에서 활약했고 현재는 한때 맨체스터에서 박지성과 함께 뛰었던 테베스가 소속되어 있다. 아르헨티나는 1978년과 1986년 월드컵에서 우승을 한 축구강국이다. 아르헨티나 보카 지역은 탱고의 발산지다 한인들, 의류 및 액세서리 시장 장악아르헨티나에는 3만여 명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다. 지금은 95% 이상이 의류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이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기 위해 간 이민자들이었다. 아르헨티나의 한국인 이민사는 50년이 넘는다. 1965년 대한민국 정부는 아르헨티나에 농업이민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현지에 840헥타르(8.4㎢)의 땅을 구입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은 아주 절박했다. 먹을 것도 없었고 일을 하려고 해도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이 없었다. 인구는 많고 식량사정도 좋지 않으니 외국으로 이민을 보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옷 시장인 아베자네이다. 한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상가다 그렇지만 아르헨티나 이민 초창기 농사를 짓던 부지런한 한국인들은 농사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의류 시장에 진출한다. 당시에는 의류업계를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무기로 의류 시장에 뛰어든 한국인들은 뛰어난 디자인 감각으로 아르헨티나의 옷 시장을 완전히 석권했다. 천하의 유태인을 몰아낸 한국인들의 저력이 대단하기만 하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계’라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자본조달 방식이 있다. ‘계’를 통해 자본을 만들고 이를 통해 사업을 키워감으로써 아르헨티나 의류 시장에서 입지를 키울 수 있었다.다보탑 모양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이 시기 크게 발전한 한국의 산업화 역시 한국인들이 의류업에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해외에 거주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원부자재를 한국에서 구입하면서 현지에서 의류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지금도 남미의 모든 나라에서 의류와 액세서리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한국인들이다. 물론 한국인 특유의 억척스러움과 열정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국인은 물건을 고르는 안목과 디자인 감각이 뛰어나 사농공상이라 하여 장사하는 것을 가장 천하게 여기던 우리 민족이 남미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을 보니 새삼스럽기까지 하다.아르헨티나에는 300여 개가 넘는 골프장이 있고 골퍼들의 평균 실력도 대단히 높다 한편,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골프 실력은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골퍼로는 US 오픈과 마스터스를 제패한 앙헬 카브레라(Angel Cabrera)와 올해 소니 오픈에서 우승한 파비앙 고메즈(Fabian Gomez)가 있다. 이들은 모두 캐디 출신으로 세계적인 골퍼가 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아르헨티나에는 300여 개가 넘는 골프장이 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차로 30여 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골프장도 수없이 많다. 게다가 골프장 사용료가 우리 돈으로 2만원 미만이니 누구나 부담 없이 골프를 즐길 수 있다. 말 그대로 골프의 천국이다. 이런 여건 때문에 아르헨티나에 사는 한국인들 중에는 골프광들이 많다.글 양인환 중국통신원1957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나 91년까지 금융권에서 일하다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 자동차와 함께 하는 삶에 새롭게 도전했다. 91년 국산 자동차로 미국 48개 주를 일주해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92년 아시아 록스타로 호주를 일주했다. 93년 호주 웨스턴 랠리스쿨을 이수한 뒤 호주 웨스턴 랠리 침피언십, 홍콩-북경 랠리(94년), 태국 랠리(94년) 등에서 전문 드라이버로 활동했다. 93년부터 96년까지 본지의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참가한 랠리를 비롯해 세계의 다양한 자동차 경주와 시승기를 소개했다. 저서로 ‘대머리 돈키호테’, ‘차를 알고 문화를 세우는 여유로운 운전’이 있다. 2002년부터 중국 저장성 이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양인환 통신원은 앞으로 중국을 비롯한 북미, 남미, 아시아, 유럽 등의 재미있는 여행기를 소개할 계획이다. 머지않아 미국과 호주에 이어 중국과 남미대륙을 일주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대자연이 빚어낸 경이로움, 이과수 폭포(IGUAZU F.. 2016-06-24
 마치 물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전율과 공포가 밀려온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내린다. 천지개벽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 틀림없다. 누가 이곳을 악마의 목구멍이라고 했는가. 이과수 폭포를 처음으로 본 필자의 눈에는 악마의 목구멍이 아니라 자연이 베푼 최고의 축복이다. 30여 시간의 비행 끝에 머나먼 나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내렸다. 아르헨티나는 한반도의 13배에 이르는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이지만 인구는 4,00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지구상에서 몇 안 되는 공해가 없는 청정지역에다 천혜의 지하자원을 보유한 나라다. 마침 이번 출장길은 업무에 그다지 긴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골프를 치며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풍광을 맘껏 즐겼다. 바이어가 꼭 구경하라며 왕복 비행기 표와 호텔을 예약해준 덕분에 이과수 폭포도 감상했다. 아르헨티나로 떠나기 전에는 예정에도 없던 일정이었는데, 이것이 내 생애 최고의 경험이 될 줄이야! 이과수는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3개국에 걸쳐 있다 들어서면서부터 감탄사 절로 나와이과수 공항은 생각보다 작았다. 이과수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국경을 가르는 아마존 강 하류에 자리한다. 이과수 폭포가 있는 아마존 강을 끼고 파라과이까지 3개 국가가 마주하지만 파라과이 쪽으로는 폭포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전에 보았던 미국과 캐나다 국경의 나이아가라 폭포에 비해 복잡하고 광범위하게 펼쳐져 처음에는 어떤 식으로 폭포가 형성되어 있는지 쉽게 알기가 어려웠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낙차가 크지만 강의 구조가 간단해서 보는 방법도 단순한 편이다. 미국과 캐나다로 구분되어 있지만 한 군데에서 보면 대략 폭포의 구조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과수는 상당히 먼 길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답사를 해야 하는 꽤나 복잡한 형태였다. 폭포의 구성은 브라질 쪽에 20%, 아르헨티나 쪽 80%의 비율로 조성되어 있다. 따라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양쪽을 모두 구경해야 이과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먼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버스를 타고 브라질 국경으로 이동한 뒤 파라과이와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구분된 삼각 지역에 다다랐다. 이과수는 원주민 말로 큰물이라는 뜻으로, 브라질 동부에서 시작되어 아르헨티나 국경과 마주하는 지점에서 거대한 폭포를 만들어낸다. 브라질의 밀림지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지류들이 합류해 엄청난 양으로 불어난 물줄기가 이과수의 장관을 연출하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다리를 하나 건너니 브라질이다. 강을 가르는 다리의 반은 아르헨티나 국기를 상징하는 색이, 나머지 반은 브라질 국기의 색이 칠해져 있다. 간단한 심사를 거쳐 브라질 국경을 통과했다. 베트남에서 캄보디아 국경을 넘을 때보다도 더 간단했다.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에 가려면 비행기나 배를 이용해야 하는데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에는 나무로 된 형식적인 바리케이드가 하나 달랑 있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과수에 들어서는 순간 감탄사가 계속 흘러나왔다. 제주도의 정방폭포만 보아도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데 엄청난 규모의 폭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이과수 강이 세 나라로 갈라져 있다. 왼쪽이 파라과이, 오른쪽은 브라질, 아래쪽은 아르헨티나다 세계적인 관광지인 만큼 독일에서 온 부부를 비롯해 영국, 이탈리아, 미국, 콜롬비아, 멕시코 등 버스에 동승한 사람들의 국적과 인종도 다양했다. 한국인은 필자 혼자였다. 스페인어와 영어로 안내되는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60만 헥타르(6,000㎢)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펼쳐진 이과수는 198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또한 이과수는 희귀 동식물의 보고로서 아르헨티나는 1934년, 브라질은 1939년에 이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 국립공원의 면적은 브라질이 아르헨티나에 비해 3배 정도 규모가 크다. 폭포의 하이라이트, ‘악마의 목구멍’브라질 쪽에서 이과수 공원 입구로 들어서자 거대한 폭포들이 장관을 이루며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하며 셔터를 눌러댄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곧 드라마의 한 장면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지막 데빌 스로우트(Devil throat, 악마의 목구멍)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에 지나지 않는다. 굉음을 내며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지는 광경은 대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 그 자체다. 낙차를 이기지 못하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물보라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순식간에 온몸을 적시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인간의 존재가 하염없이 작아지는 느낌에 전율하는 그 기분이란!이과수 관광의 하이라이트인 악마의 목구멍. 마치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악마의 목구멍은 길이 약 700m, 폭 150m의 U자형으로 형성되어 있다. 어떻게 엄청난 급류가 흐르는 이곳에 다리를 놓아 폭포를 정면에서 볼 수 있게 만들었을까? 이과수 폭포는 길이 4.5km, 높이 약 80여m에 이르며 초당 떨어지는 물의 양은 1,000톤에 달한다. 1986년 개봉된 영화 ‘미션’(Mission)에서 본 이과수의 장엄한 광경도 경이롭기 짝이 없었는데, 직접 눈으로 마주하는 이과수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충격 그 자체였다. 엄청난 양의 물줄기가 눈앞에서 천둥을 치며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보노라니 마치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 온 듯한 느낌이랄까.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은 몸으로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면서도 이과수 폭포에서 느꼈던 감동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호텔 방은 숲속 깊은 곳에 지어져 있었다 호텔은 이과수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숲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 지어진 호텔들은 모두 규모가 작고 숲 속에 있다는 것이 특징. 일 년에 아르헨티나 쪽의 이과수를 찾는 관광객이 100만 명 내외라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작은 것이 의아했다. 알고 보니 호텔 등의 숙박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설을 크게 늘리지 않는단다. 하루 최대 수용인원은 6,000명이지만 3,000명 정도가 적정 수준이라고. 하지만 시설은 아주 안락했고, 편안한 마음으로 휴가를 즐기기에 그만이었다. 맑은 공기와 새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숲 속의 휴식처로 이만 한 곳이 또 있을까. 로비에서 방까지 가는 거리가 꽤 멀었는데, 전기차로 고객을 방까지 데려다주는 호텔 측의 꼼꼼한 배려도 인상적이었다. 다만 호텔 안에 식당 외에는 편의시설이 아무것도 없어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택시를 타야 한다는 점이 아쉬웠을 뿐…….50일간 중남미를 여행 중인 한국인 모녀 아르헨티나 쪽이 볼거리 더 많아뷔페에서 토스트와 커피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과연 호텔이 유지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산했다. 다른 호텔들의 사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행사에서 제공한 버스는 각 호텔을 돌며 관광객을 태우고 집합장소로 이동했다. 마침 일요일이라 어제와 달리 큰 버스를 이용한 까닭에 많은 관광객이 한 팀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더욱 다양한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과 함께 했는데, 한국에서 온 이들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50일간 중남미를 여행하는 모녀와 사돈끼리 중남미를 일주하는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오랜만에 한국말로 수다를 떨었다. 예전에는 남미에서 한국인들은 보기가 어려웠는데 요즘은 어딜 가나 만날 수 있으니 우리의 여행 패턴도 많이 발전한 것 같다. 특히 유럽에서는 배낭을 맨 젊은이들과 많이 조우한다. 한국을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가 얼마나 좁은 울타리 안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세계 곳곳을 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을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사돈끼리 중남미 여행에 나선 한국 관광객들 아르헨티나 구간은 상당히 길면서도 다양한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워낙 넓은 지역에 걸쳐 있어 일부 구간은 기차를 이용해서 다니도록 해놓았다. 아르헨티나 국립공원에서 배포한 지도를 다시 보니 어제 우리가 감탄을 하며 넋을 놓고 보았던 폭포들이 모두 아르헨티나 쪽에 자리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폭포는 악마의 목구멍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 나머지는 모두 아르헨티나 쪽에 있는데 워낙 규모가 큰 탓에 브라질 쪽에서 보아도 장관이었던 것이다.오늘 아르헨티나 쪽에서 이과수를 보니 그 풍경이 더욱 웅장하고 멋지다. 한 면으로 쭉 이어진 폭포의 파노라마를 감상하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경험이었다. 폭포에서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소용돌이와 물보라는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폭포 주위에는 항상 영롱한 무지개가 피어났다.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물줄기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마치 그 안으로 빨려들 것 같은 공포감마저 일었다.폭포 주변은 항상 무지개가 피어오른다 아르헨티나 국기가 걸려 있는 폭포 앞에 선 안내원들은 너나없이 우산을 들고 있었다. 워낙 물줄기가 강해 바닥을 튕기며 올라오는 물방울이 만들어낸 비 폭풍이 강하게 몰아쳤다. 물줄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려 멋진 사진을 찍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게다가 강렬한 햇살로 인해 카메라의 화면이 보이지 않아 사진을 제대로 찍고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웠다.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에 옷이 젖는 것도 잊은 채 관광객들은 이과수에 흠뻑 빠져 들었다.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물줄기를 맞으며 자연에 순응하는 모습. 그렇게 그들은 탄성을 지르며 황홀한 모습으로 이과수와 하나가 됐다. 대자연의 위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을 느끼며……. 바이어가 아르헨티나에 왔으면 이과수 폭포는 꼭 봐야 한다며 이과수행 비행기 표를 손에 쥐어 주었을 때 이를 한사코 사양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이곳을 안 보고 돌아갔다면 얼마나 후회했을까?이과수의 대미는 보트를 타고 폭포 밑까지 가는 것이다 쏟아지는 폭포 아래로 돌진이과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미는 보트를 타고 폭포 밑까지 경험하는 것이었다. 이곳까지 어렵게 왔으니 파라과이를 건너갔다 올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보트여행이 더 기억에 남을 거라는 가이드의 말에 따라 280페소(약 2만2,000원)를 주고 표를 샀다. 보트를 타기 전에 구명조끼를 입고 방수가방에 사진기와 기타 소지품을 집어넣었다. 폭포 밑을 통과하면 모든 게 젖기 때문이다. 보트를 타고 강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이과수 폭포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강줄기를 따라 이어진 계곡을 지나면서 보는 이과수의 광경은 제한적이지만, 강 위에서는 이과수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서 더욱 장엄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눈앞으로 거대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연출되는 그 모습이란! 가이드가 방수 가방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모든 소지품을 방수가방에 넣으라는 가이드의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보트는 폭포 앞으로 돌진했다. 순간 이대로 배가 뒤집히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하지만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엄청난 물 폭탄이 온몸을 덮쳤다. 이대로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함께 물 폭풍 때문에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처음에는 물 폭풍에 머리와 상의가 젖기 시작했지만 모험이 거듭될수록 속옷과 신발까지 완전히 젖어 버렸다. 이 때문인지 아예 수영복 차림으로 보트를 타는 관광객도 있었다. 경탄과 공포가 함께 한 보트 투어는 20여 분간 지속되었다. 나중에 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꼭 방수 카메라를 가지고 오리라.일부구간은 미니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보트를 내려서 보니 뒷주머니에 넣었던 지갑이 완전히 물에 젖어 안에 들어 있던 돈까지 물에 퉁퉁 불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쯤은 괜찮다는 듯 관광객들의 얼굴에는 즐거운 표정이 가득했다. 보트에서 내린 뒤에는 지붕이 없는 버스로 비포장도로를 따라 정글 속을 누볐다. 이곳은 아열대 지역으로 세계적으로 희귀한 동식물들이 분포되어 있다. 풍부한 강수량과 울창한 숲이 이렇듯 거대한 강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과수를 헬리콥터로 돌아보는 패키지 코스도 있다. 별도로 신청할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것도 경험해볼 작정이다. 하늘에서 보는 이과수의 장관은 분명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할 테니까.이과수는 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이 다르다 비록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이과수 여행은 알찬 내용으로 짜여진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숙소도 이색적이고 편안했으며, 무엇보다 쇼핑만을 강요하는 우리네 여행사의 패키지 여행과 다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과수에서 느낀 감동과 추억을 필자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글 양인환 중국통신원1957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나 91년까지 금융권에서 일하다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 자동차와 함께 하는 삶에 새롭게 도전했다. 91년 국산 자동차로 미국 48개 주를 일주해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92년 아시아 록스타로 호주를 일주했다. 93년 호주 웨스턴 랠리스쿨을 이수한 뒤 호주 웨스턴 랠리 침피언십, 홍콩-북경 랠리(94년), 태국 랠리(94년) 등에서 전문 드라이버로 활동했다. 93년부터 96년까지 본지의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참가한 랠리를 비롯해 세계의 다양한 자동차 경주와 시승기를 소개했다. 저서로 ‘대머리 돈키호테’, ‘차를 알고 문화를 세우는 여유로운 운전’이 있다. 2002년부터 중국 저장성 이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양인환 통신원은 앞으로 중국을 비롯한 북미, 남미, 아시아, 유럽 등의 재미있는 여행기를 소개할 계획이다. 머지않아 미국과 호주에 이어 중국과 남미대륙을 일주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다임러 트럭 코리아 조규상 대표이사 2016-06-09
"고객이 가장 신뢰하는 브랜드가 되겠습니다" 다임러 트럭 코리아가 인천 경원재 앰배서더 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Trucks you can trust’, 즉 고객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트럭을 공급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하는 동시에 서비스 센터 확충과 각종 서비스 프로그램 강화 등 고객 가치 확대 전략을 발표하기 위한 자리였다. 아울러 신제품과 주요제품을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다임러 트럭 코리아는 이날 선보인 뉴 아록스 6×4 카고트럭과 지난 3월 출시한 뉴 아록스 25.5톤 덤프트럭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핵심 모델인 뉴 악트로스 트랙터는 볼 수 없었다. 그간 미흡했던 덤프와 카고에 집중하겠다는 의도일까? 마치 주력 상품군을 늘려 시장 확대에 나서겠다는 의지처럼 보였다. 다임러 트럭 코리아의 이런 자세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는 국내 상용차 시장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지난해 국내 대형 트럭 시장에서 수입 트럭의 점유율은 최초로 30%를 넘었다. 총 1만4,275대의 판매량 중 무려 4,396대(30.8%)가 수입 트럭이었다. 지난 2005년 수입 대형 트럭의 국내 점유율은 10% 미만이었다. 점유율이 수직 상승한 건 최근 3년간의 일이다. 2013년 19.6%, 2014년 25.6%로 매년 6%대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업계는 올해도 수입 대형 트럭의 판매량이 20~25%(점유율 6~7.5%)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힘입어 트럭 수입사들은 판매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볼보트럭 코리아는 향후 4년간 판매량을 현재의 두 배로 키우겠다고 밝혔고, 만트럭버스코리아도 버스를 수입해 판매 확대에 나서겠다는 전략을 발표했다.  성장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날 다임러 트럭 코리아는 판매량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저 새 제품의 장점과 고객 만족도 제고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경쟁 회사들과는 사뭇 다른 자세. 지난해 7월 취임한 다임러 트럭 코리아 조규상 대표이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판매량보다 고객이 더 중요합니다. 고객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트럭을 선보이고, 또 그런 브랜드가 되는 것이 목표이지요. 오늘 우리가 발표한 ‘Trucks you can trust’라는 비전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객이 필요로 하는, 고객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고 고객이 만족하는 서비스를 구축해 고객의 신뢰를 얻다 보면 성장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이니까요.”  조규상 대표이사의 이력은 독특하다. 자동차와의 인연은 1996년 삼성자동차 중앙연구소 입사와 함께 시작됐다. 그는 당시 설계팀에서 차체를 만들었다. 삼성자동차가 경영난을 겪기 시작하던 2000년에는 스카니아 코리아로 이직해 기술지원 및 기술교육 업무를 맡았다. 2005년에는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로 옮겨 서비스 운영과 신차인증을 담당하다 서비스 & 파트 부문 부사장에까지 올랐다. “보통 대표이사는 세일즈 출신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계공학을 전공한, 전형적인 엔지니어입니다. 삼성자동차에서 차체 설계를 할 때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전공과도, 꼼꼼한 저의 성격과도 잘 맞았습니다. 스카니아 코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승용차만 알고 있다가 트럭을 처음 배웠기 때문이죠.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에서는 주로 AS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즉, 엔지니어와 AS를 맡아오다가 갑자기 세일즈까지도 총괄하는 대표이사 직책을 맡게 된 거죠. 이처럼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이력이 아마도 저의 강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회사가 조금 더 건전한 방향으로 가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다임러 본사에 회의를 하러 가면 저와 비슷한 이력을 가진 대표이사들을 종종 만나곤 한답니다.” 그런데 조규상 대표에게 이러한 이력보다 더 화려한 타이틀이 있다. 바로 다임러 트럭 코리아 최초의 한국인 CEO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이 또한 역시 자신의 강점이라고 말한다. 한국인이라서 고객과 소통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다. “본사 임원들과의 인터뷰에서 제가 한 말이 있습니다. CEO가 된다면 한국인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겠다는 것이었죠. 고객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트럭. 그 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가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고객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주요 고객들을 일일이 찾아 허심탄회한 쓴 소리와 여러 가지 제안들을 직접 들으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 CEO라면 이런 부분에서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특히 국내 상용차 시장처럼 개인 고객 비중이 매우 높은 시장에서는 더욱 그렇죠.”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와 다임러 트럭 코리아는 모두 독일 다임러 그룹의 자회사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엄연히 별개의 조직이다. 벤츠를 구매할 때 금융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메르세데스 벤츠 파이낸셜 코리아 역시 마찬가지다. 조규상 대표처럼 관계사간 이동을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법인이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다. 하지만 조규상 대표는 핵심만큼은 같다고 말한다. 바로 고객을 상대한다는 점이다.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에서 제가 항상 하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 차는 세일즈가 팔지만, 두 번째 차는 AS가 판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상용차에서 더욱 부각됩니다. 우리 고객에게 트럭은 사업 수단이기 때문이죠.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해 차를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을 최대화하는 것과 서비스 비용을 낮춰 ‘총 소유 비용’(TCO, Total cost of Ownership)을 최소화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저희가 발표한 서비스 센터 확충 계획이나 서비스 컨트랙트, S2S(Sales-to-Service) 프로그램 등이 바로 이런 고민의 결과하고 할 수 있습니다.” 총 소유 비용의 최소화다임러 트럭, 즉 메르세데스 벤츠 트럭이 트랙터 분야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뛰어난 연비에 있다. 상용차에서 연비는 수익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물론 차 가격과 서비스 비용도 중요하다. 이날 다임러 트럭 코리아와 조규상 대표이사가 총 소유 비용을 유독 강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된 유로6 모델들은 어떨까. 높은 배기가스 기준을 만족하기 위해 여러 장치들이 추가되며 차 가격과 유지보수 비용이 다소 높아졌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다. “유로6 모델로 거듭나며 가격이 조금 상승한 것은 사실입니다. 한층 더 엄격해진 배기가스 기준 때문이죠. 하지만 총 소유 비용은 낮아졌습니다. 유럽의 한 외부기관에서 장시간/장거리 테스트를 한 결과 1km당 평균 유지보수 비용이 약 70원에 불과했습니다. 유로5 모델에 비해 약 29% 낮은 수치죠. 개선된 연비도 연비이지만 이런 결과에는 각종 부품의 수명이 늘어났다는 것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선보인 뉴 아록스 카고와 덤프 역시 이런 장점을 무기로 삼는다. 이들은 다임러 트럭의 대표 트랙터인 악트로스와 플랫폼이 같다. 때문에 성능과 효율이 거의 동일하다. 물론 목적이 다른 모델인 만큼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특장 작업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도 뉴 아록스만의 장점이다. “제가 만난 건 고객만이 아닙니다. 여러 특장 업체들도 찾아갔습니다. 트럭은 판매 이후에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적재공간이 탱크로리로 바뀔 수도 있죠. 게다가 개조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용도에 따라 두 번, 세 번 진행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특장 용이성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부분이 미흡하면 고객은 큰 손해를 봅니다. 작업이 지연되거나 원하는 방향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요. 때문에 우리는 차를 파는 게 끝이 아니라 고객과 특장 업체 사이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국내에는 중소 규모의 특장업체가 굉장히 많습니다. 대형 업체가 주도하고 있는 유럽과는 상황이 다르죠. 특장 업체들은 차의 기술적인 부분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싶어 합니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개조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직접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매뉴얼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차를 가지고 현장에 가서 개조에 필요한 교육을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차를 직접 측정하고 레이아웃도 검토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현재 이런 활동을 하고 있는 곳은 다임러 트럭 코리아 뿐입니다.” 뉴 아록스는 시장 확대를 위한 전략 제품이다. 하지만 다임러 트럭 코리아는 이미 경쟁력이 뛰어나고 아주 독특한 제품을 보유하고 있다. 바로 유니목과 스프린터다. “유니목은 저희에게 아주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고유 성격 때문에 도로공사나 관공서 위주로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죠. 개인 고객을 포함한 판매 다각화의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고 이에 맞는 전략을 검토 중입니다. 스프린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내에서는 특장 작업을 거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과 사업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미드사이즈 밴이요? 필요하다면 벤츠 V클래스의 상용차 버전인 비토를 들여올 생각입니다. 우리는 시장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다시 강조한다. 판매량 제고를 위한 라인업 확충보다는 고객과의 신뢰가 더 중요하다고. 그것을 위해서는 고객의 가치를 확대하는 것이 우선이라고.“여러 차례 말씀 드렸듯이 트럭에서는 총 소유 비용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뛰어난 연비는 이미 널리 알려진 벤츠 트럭의 장점입니다. 이제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서비스를 위한 노력이죠. 저희는 비용을 낮추기 위해 여러 독보적인 서비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비스 컨트랙트가 대표적이죠. 소비자는 오일, 필터 등의 소모성 부품을 교환해야 합니다. 옵션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 가입하면 약정 기간 동안 추가 비용 없이 조금 더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약 26%의 비용 절감 효과가 있죠. 업계 유일의 멤버십 제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서비스 센터에서 사용한 결제금액의 일부가 포인트로 적립되고, 이것을 다시 현금처럼 쓸 수 있는 제도입니다. 현재 고객들의 전체 수리 비용 중 약 8%가 포인트로 결제되고 있습니다. 또한 2016년 1월부터 교체 빈도가 가장 높은 7종 1만5,000개 부품의 값을 약 10% 인하했습니다.” 고객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조규상 대표이사가 다임러 트럭 코리아로 옮긴 지 약 9개월이 지났다. 대표이사 업무가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더 재미있다고 답한다. 조직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책임감이 따르지만, 회사 방향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게 아주 큰 매력이라고. 그는 자신의 엔지니어적인 성향을 회사 운영에 십분 활용하고 있다. “엔지니어에게는 인풋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죠. 입력되는 정보를 일련의 처리 과정에 넣고 결과물을 뽑아내는 절차에 굉장히 익숙합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입력 정보는 고객의 목소리입니다. 현장에서 들은 이 이야기들을 토대로 회사의 방향을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회사 구조는 물론, 저의 업무 구조에도 변화를 주기 위해 매일 아침 출근을 할 때면 ‘내가 오늘은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임직원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조금 더 능동적인 태도를 가졌으면 하는 거예요. 다임러 트럭 코리아는 국내 대기업과는 달리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작은 조직입니다. 그렇다고 일의 방식을 바꾸거나 더 많은 일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각자가 하던 일을 하되 조금 더 고객에게 다가가면서 하자는 것이죠. 능동적인 고객 케어 프로세스는 대단한 게 아닙니다. 이런 작은 변화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저는 이런 변화를 만드는 게 아주 즐겁습니다. 혹시 주말에도 일하는 거 아니냐고요? 하하, 주말에는 취미생활에 푹 빠져서 지냅니다.” 그는 자동차와 비행기 마니아다. 자동차는 만지고 운전하는 것 모두 좋아한다. 자동차 정비기능사 자격증까지 보유해 간단한 건 직접 수리까지 한다고. 가장 좋아하는 차를 묻자 메르세데스 벤츠 SLK(SLC)를 꼽는다. 현재는 트럭 면허를 준비 중이다. 다음 달쯤 취득하게 될 예정인데, 곧 트럭 드라이브에 도전해볼 계획이다. 비행기에 대한 관심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의 아버지는 비행기 조종사였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비행기 시뮬레이션에 빠져 살았다. 특히 보잉 737을 쉬지 않고 몰았다. 출장 등으로 비행기를 탈 때면 ‘비상상황으로 조종사를 찾는다면 가장 먼저 뛰어나가야지’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단다. 이런 엉뚱한 면도 있지만 그는 역시 철저한 기업가였다. 지난 9개월간 다임러 트럭 코리아에서의 생활이 어땠냐는 마지막 질문에도 회사 이야기를 늘어놨다.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상용차와 승용차 시장의 차이가 명확하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트럭 시장은 경기에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습니다. 경제 활동에 사용되는 사업 도구이기 때문에 물류 경기, 건설 경기에 크게 좌우됩니다. 국내 대형 트럭 시장에는 전세계 주요 브랜드의 대부분이 진입해 있습니다. 고객에겐 선택권이 많죠. 우리는 우리 제품 특유의 좋은 연비와 안전성에 만족하지 않고 고객 가치 확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앞으로의 변화, 기대해주세요.”글 류민 기자사진 최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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