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잊지 못할 첫 드라이브 에세이 2003-11-04
내게 있어 자동차와의 첫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20년을 거슬러 올라간 초등학교 4학년 때가 아닌가 싶다. 물론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때는 할 일이 없으면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루에 자동차가 몇 대나 지나다니나 색깔별로 분류해서 세곤 했다는 부모님의 세대와는 확실하게 틀려서 아침 등교길에는 늘 길조심, 차조심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을 정도로 차가 많이 보급된 시절이긴 했지만, 우리집이 자가용이라는 것을 소유하게 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오너 드라이버가 되신 아버지는 면허를 딸 때 운전에 `자신 있다!`며 운전학원 한 번 다니시지 않고 시험을 보았다. 아버지의 장담처럼 필기시험은 쉽게 합격했지만, 정작 중요한 실기시험 날은 드링크제를 잘못 마셔 어지러워서 주행시험에 떨어졌다는 엉뚱한 핑계를 댔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실기시험에 도전해 나중에는 인지를 붙이는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면허시험을 보다가 그리도 애타게 바라던 운전면허증을 땄다. 며칠 뒤 우리집에는 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흔하지 않은 색인 진한 갈색의 포니2가 도착했다. 차가 오던 날 온 식구가 집 앞을 서성이며 차가 언제나 도착하는 지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났을까? `지이이익` 포니2가 좁은 골목을 미끄러지듯 통과해 우리집 앞에 도착했다. 호기심에 찬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며 신기하기만 한 새차 구경이 모두 끝났을 즈음 우리 식구 모두는 차에 올라타고 시승식을 하게 되었다. `부릉부릉` 시동이 걸렸고, 뒤에 탄 철없는 동생들과 나는 마냥 신이 나 차 안에서 `쿵쾅쿵쾅` 뛰었다. 동네 한 바퀴 드라이브를 시작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시동이 몇 번인가 꺼져서 거리 한가운데 차가 꼼짝 않고 서 있었던 기억이다. 10분쯤의 첫 드라이브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을 때 어머니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십년 감수했다`고 말했다. 그 뒤에도 우리 식구들은 그렇게 중간에 뚝뚝 끊어지는 아버지만의 운전솜씨에 의지해 드라이브를 몇 번인가 더 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첫 드라이브를 떠나던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다른 가족들이 얼마나 조마조마하며 마음을 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는 늘 든든한 아버지의 뒷모습이 너무 크게 보였기 때문에 자동차와의 첫 만남 역시 따뜻하고 즐거웠던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지난 기억이 아름다워서일까? 아니면 지난 기억에 익숙해서일까? 아직도 난 누군가가 운전하는 차의 옆자리에 앉아서 편안하고 느긋하게 차창 밖을 둘러보며 드라이브 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떻게 손과 발을 약간씩 움직이기만 하는데도 차가 가는 것일까?` 라는 대책 없는 질문으로 친구들을 황당하게 할 정도로 운전에 대해 무지하다. 아직 한 번도 내 손과 발을 움직여 운전을 해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나도 면허증을 따서 멋진 내 차를 갖게 된다면, 아버지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오랜 시간을 두고 기억할 수 있는 멋진 드라이브를 시켜주고 싶은 것이 나의 바램이다.
격세의 기억 속 오펠차 에세이 2003-11-04
지금부터 30년 전, 그러니까 1970년 초에 우연히 운전면허를 딸 기회가 있었다. 그때는 차가 없었으니까 연수는 물론 안 한 상태였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학교 근처 기숙사에 살고 있었기에 굳이 차가 필요치는 않았다. 그런데 2년 후에 헤어져 있던 아내와 두 살 된 딸아이가 독일로 오게 되어서 형님(나보다 먼저 공부하러 독일에 오셨음)이 어디서 얻어 쓰던 15년 된 오펠의 차를 내가 쓰기로 했다. 형님은 마침 직장에서 차를 제공받았으니까 그 차가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부랴부랴 연수를 하고 겨우 초보운전 상태로 어느 날 이삿짐을 싣고 뮌스터의 우리집을 향해 아우토반을 달리고 있는데, 보네트 앞 쪽에서 하얀 연기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어쩐지 고물차라 걱정이 좀 되더라니). 아뿔싸! 이게 뭐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차를 세우더니 라디에이터의 물을 확인하라고 했다. 둘러보니 저만치 눈앞에 주유소가 보였다. 물통을 빌려 물을 담아오는데 땀은 비오듯 하고 왜 그리 처량 맞던지..... 와서 낑낑거리며 물을 붓고는 두 시간이나 지나 겨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후 꽤 운전에 자신이 붙은 어느 날 쾰른에 볼일이 있어서 고속도로 입구를 막 지나고 있는데 배낭족 두 사람이 엄지손가락을 흔들고 있었다. 얼결에 차를 세우고 물어보니 마침 방향이 같았다. 친절하게 뒷자리에 태우고 달리면서 몇 마디 말이 오갔는데, 불현듯 며칠 전에 있었던 히치하이커 사건이 떠올랐다. 룸미러로 뒤를 보니 수염이 덥수룩하고 남루한 옷차림에 덜컥 의심이 들었다. 궁리 끝에 `내가 급히 나오느라 서류를 빠뜨렸다. 다시 돌아가야 하니 적당한 곳에서 내려주어야 하겠다`고 했더니 그들은 선선히 알았다면서 늦지 않게 조심하라며 오히려 나를 염려하면서 내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안심은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사람들은 순수한 배낭족들로 단순한 도움을 청한 것뿐인데 내가 괜히 외모만 보고 남을 의심한 결과가 되었다. 이까짓 고물차 준다고 해도 싫다고 할 판인데,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그들은 내린 뒤였다.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한 번은 졸업시험을 앞두고 머리도 식힐 겸 아내와 함께 50km쯤 떨어진 도르트문트 가극장으로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을 보러 갔다. 돌아올 때는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귀할멈, 진짜 같은 과자로 만든 집 등의 얘기를 하면서 고속도로로 들어서기 위한 시내 교차로 사거리를 지나게 되었다. 중간에 갑자기 바뀐 노란불을 보고서 빨리 지나가기 위해 액셀레이터를 밟는데 쿵! 하고 오른쪽에서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피! 피다!`하고 아내가 소리를 지를 때만 해도 그것이 나한테서 흐르는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오른쪽에 탄 집사람만 걱정을 했다. 한 2~3분 지났을까? 구급차가 왱왱거리며 나타났고 우리는 실려서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나는 이마가 V자로 찢어졌고 왼쪽 눈가를 5~6cm나 꿰맸다. 하마터면 왼쪽 눈을 크게 다칠 뻔했는데 그만 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무엇보다도 다행인 것은 오른쪽 옆구리를 부딪친 아내는 거짓말 같이 말짱하고 나만 앞유리를 머리로 받은 것이었다. 그 사고로 나의 고물 오펠차 시대는 막을 내리고, 나는 곧 귀국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인 97년에 해외파견 교수로 쾰른에서 1년간을 지내게 되었는데, 하나뿐인 딸 예림이가 쾰른음대에 입학하게 되어 세 식구가 매일 라인강을 지나다닐 수 있었다.그린색 BMW차를 장만해 독일 여러 곳을 차를 타고 다니며 격세의 느낌을 얘기하곤 했는데(물론 차에서 연기가 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 딸이 올 7월에 졸업을 했으니 격세의 격세라고나 할까?
`아∼ 가스` 2003-11-04
16개월 된 아들과 차가운 날씨를 피해 집안에서 씨름하고 있던 어느 겨울 오후,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일이 일찍 끝났는데 아이 데리고 놀이공원이나 갈까?` `좋아요, 좋아. 그렇지 않아도 집안에만 있어 답답했는데….` `그럼 차 가지고 사무실 앞으로 나와.` 부리나케 아이와 외출준비를 마치고 차 시동을 거는 순간, 대시보드 쪽에서 `연료가 부족합니다`라는 웬 아가씨의 극히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고 때 옵션으로 달려나온 음성경고음이었다. 며칠 전 집에 돌아올 때 가스충전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내 차는 남편의 권유로 고른 트라제 XG LPG 모델. 운전경력 10년 동안 사고나 말썽 한 번 없이 지내온 나는 LPG 충전소가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해 만들어 놓은 음성경고를 쉽게 무시하곤 했었다. 드디어 남편의 사무실 앞. 남편이 아이에게 `엄마랑 잘 놀았어?`하며 조수석에 앉기도 전에 `조수석 문이 열렸습니다` `연료가 부족합니다`라는 잔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남편은 내심 불안했는지 `충전소 들렸다 오지 그랬어`하며 걱정을 했다. 나는 `괜찮아요. 이 정도면 놀이공원 들렀다가 집까지 충분히 갈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라며 남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 동안 줄곧 휘발유 승용차를 타왔던 나는 연료가 끝까지 떨어져서야 주유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 LPG차를 타면서부터 그런 버릇은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경고표시를 보고서야 충전하는 버릇은 여전했다. 때로는 `연료가 부족합니다`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경고음조차 무시하곤 한다. 어찌되었든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올 무렵, 쉬지 않고 들려오는 `연료가 부족합니다`라는 경고음은 더 이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익숙해져 버렸다. 계속 불안해하는 남편을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듯 달래던 중이었다. `걱정 마세요. 근처 충전소까지는 충분히 달릴 수…` 순간 차가 이상했다. 액셀 페달이 힘없이 푹 들어가 버리더니 차는 울컥거리며 이내 멈춰버렸다. 꽉 막힌 올림픽대로 한남대교쯤에서 사건은 벌어지고 만 것이다. 다행히 한남대교로 빠지는 램프웨이 근처의 노견에 차를 세울 수 있었다. 너그러운 성격의 남편은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차에 혹시 일회용 가스 없어?`하고 물었다. 난 민망해 하며 `당연히 없지…`라고 말했다. 보험회사에 연료공급을 부탁했지만 `LPG는 안 된다`는 답변에 실망만 했을 뿐이었다. 결국 매서운 한겨울 강바람을 맞으며 남편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차 안에서 아이와 전전긍긍하며 한참을 기다리니 그는 일회용 부탄가스 몇 통을 들고 추위에 빨갛게 얼어 돌아왔다. 마침 차에는 일회용 가스를 충전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어 충전을 하려 했던 것이다. 남편은 `다행히 한강 고수부지 매점에서 일회용 가스를 팔더라구` 하며 일회용 가스통을 모두 비웠다. 가스를 채우고 힘겹게, 아주 힘겹게 시동을 건 다음 차를 출발시켰다. 재빨리 가까운 충전소를 찾아 그 곳으로 향했다. 그 곳까지 가는 동안 차는 몇 번을 푸드덕거리며 힘겹게 움직였다. 눈앞에 LP가스 충전소가 보일 무렵 차는 다시 울컥거렸다. 그 순간은 마치 운전면허를 따고 처음으로 차를 몰아 거리에 나선 기분이었다. 순간 차가 또 서려고 한다. 우리는 `조금만 더, 조금만…`을 외쳤고, 서서히 움직이던 차는 가까스로 충전소에 도착했다. 우리 가족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연료가 부족합니다`라는 경고음이 그리워졌다. `아∼ 가스.`
부디 나를 용서하시라 2003-11-04
내가 운전면허를 딴 해는 1990년이다. 직장생활 중 가장 분주한 무렵이었던 그 해의 가장 큰 과제는 오랫동안 벼르던 운전면허를 따는 것이었다. 나는 꼬박 반 년을 운전면허시험과 씨름해야 했다. 남들은 잘만 붙는 그 시험을 나는 네 번이나 도전한 후에야 통과했다. 첫 번째는 코스시험에서 선을 밟아 떨어졌고, 두 번째는 주행시험에서 차가 움직이기도 전에 시동이 꺼져 버렸다. 세 번째는 `마(魔)의 오르막 코스`에서 역시 시동이 꺼져 떨어지고 말았다. 세 번째로 불합격 통보를 받던 순간, 시험장 건너에 걸려 있던 `한 번 실패, 두 번 실패, 늘어나는 운전실력!`이란 구호의 플래카드가 참으로 얄밉게 눈에 들어왔다. 결국 네 번의 도전 끝에, 면허를 따겠다고 원서를 들이민 지 여섯 달만에 비로소 면허증을 거머쥘 수 있었다. 학창시절부터 시험에 떨어지는 데 익숙해 왔지만 성년이 된 후 겪었던 뼈아픈 `4수 고행`은 정말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지금은 운전면허시험에 실제 도로주행이 포함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1990년 당시는 면허를 따는 것과 동시에 도로주행을 새로 익혀야 했다. 면허증을 받자마자 사놓은 중고차를 몰기 위해 나는 한 시간에 2만5천 원인가 하던 강사료를 내고 도로주행 교육을 받았다. 며칠동안 그 교육을 받으면서, 면허를 따기 위한 운전교육이 실제 차를 모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토록 힘들게 익혔던 코스 운전법은 고작 좁은 길 주차에 유용할 뿐이었다. 일주일 후 혼자서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갔다. 선배 운전자들의 아량을 기대하고 차 뒤창에 붙여 놓은 `초보운전` 딱지가 막상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보운전 딱지를 달고 조심스레 움직이는 내 차의 옆과 뒤로 온통 빵빵대는 클랙슨 소리가 요란했다. 제한속도를 지키면 느리다고 빵빵, 신호 바뀌면 빨리 출발 안 한다고 빵빵, 안 비켜준다고 빵빵. 초보운전이란 운전이 서툰 것이 아니라, 규정을 지키며 운전하는 바보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지금도 잊지 못할 초보시절 기억이 하나 있다. 운전을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났을까? 시내를 지나는데 뒤차가 계속 클랙슨을 울려댔다. 빨리 가던지 비키던지 하라는 뜻이었다. 기세에 눌린 내가 비켜주는 순간, 이 운전자는 화가 났는지 내 차 옆에 자기 차를 바싹 붙이고는 차선을 넘나들며 위협을 하기 시작했다. 사고가 나기 일보직전이었다. 정말 이건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이렇게 몇 차례 도발을 한 후 난폭운전자는 도망가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내가 그 뒤를 쫓았다. 마침 가까운 위치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한 봉고 운전자의 도움으로 5km를 더 달려 그 차를 잡을 수 있었다. 우리의 기세에 눌려 차에서 기어나온 사람은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였다. 입에서는 육두문자가 저절로 나왔고, 내 손은 어느새 그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점잖던 사람들조차 왜 도로에서는 입이 걸어지고 성질이 급해지는지 알 수 있던 순간이었다. 면허를 딴 지 12년이 된 지금, 나는 거리에서 `초보운전` 딱지를 단 차가 교통흐름을 막고 있으면 클랙슨을 빵빵 울려댈 정도로 노회해졌다. 운전에 익숙해지면서 필기시험을 위해 달달 외웠던 도로교통법이니 운전자 준수사항들은 대충 무시해 버리는 나쁜 운전자가 되어 가는 것만 같다. 그러다가도 가끔 초보시절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생각나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리고는 한다. 혹시 나 때문에 마음을 졸였던 초보운전자가 있다면 이 글을 빌어 사과드리고 싶다. 올챙이 시절 생각 못했던 이 개구리 운전자를 부디 용서하시라!
나의 동행, 자동차는 생명 2003-11-04
자동차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솔직히 말해서 모른다. 나는 가끔 휘발유로 간다, 바퀴로 간다, 기어로 간다 이러면서 중얼거린다. 그런 내가 차를 몰고 산을 넘고 있었다. 어느 가을, 나는 내 프라이드 베타가 사람보다 믿음이 가는 든든한 친구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나는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 밤에 설악산으로 향했다. 그 너머엔 밤 속의 환한 속초가 있고 거기 어머니가 있으니 그리로 갈 수도 있다. 사람은 막막해질 때 어디론가 떠나려 한다. 그러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어느새 차는 고향 가는 길로 접어들게 마련이다. 내가 의지하게 되는 것은 가장 가까운 친구도 아니오 아내도 아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내가 괴로울 때 함께 속초까지 동행해줄 수는 없다. 그것도 한밤중에 누가 따라나설 것인가. 그렇게 따라나선들 나에게 위로가 되지 못하고 그에겐 진실이 되지 못한다. 괴로우면 나 혼자 처리해야지 주변까지 동참해 달라 하긴 어려운 노릇이다. 적막한 산길에 해가 지고 갑자기 고요해졌다. 아무 여관에나 들어가 처박혀 잠들고 싶기도 했지만 나 자신에 대한 체면 때문에 그럴 순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한밤중에 혼자 하는 운전의 묘한 쾌감이 솟아났다. 그것은 작은 차 안에서 안전벨트에 묶여 있는 나 자신과의 대면이다. 봄이 오고 있는 깊은 산중에 혼자 운전하면 고독감에 사로잡힌다. 스스로를 의식하기라도 하듯 룸미러 속으로 내 이마며 눈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작은 그 거울 속으로 나를 훔쳐보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나는 슬쩍 나를 훔쳐보도록 내버려두고 있었고 그 눈빛엔 나를 훔쳐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아보호본능이 작동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한편으론 긴장하면서도 짐짓 편안해했다. 왜 그럴까. 내가 온전히 책임져야 할 아이들과 아내를 집에 두고 이 산중에 혼자 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한계령이나 눈앞의 미시령을 두고 북쪽 진부령으로 향했다. 영(嶺)의 꼭대기에서 건봉사 쪽으로 한참 내려가다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계곡의 물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이렇게 큰 물소리는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내 귀가 그 소리를 잃어버린 것은 녹음된 물소리만 들어왔기 때문이다. 쏴아, 쏴아 한 골짜기가 다 움직이는 것 같은 바람소리가 일어났다. 나는 인두꺼비를 벗고 이상한 알몸으로 거기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캄캄한 밤이 두려워졌다. 밝은 도시의 불빛 속에서 살아온 습성 탓이다. 말하자면 눈이 멀어버린 듯. 그 어둠 속에 내가 있을 텐데, 진정한 어둠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갑자기 골짜기와 바람소리가 무서웠다. 나는 당황하며 어떤 짐승이 저쪽에서 나를 눈 속에 담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발바닥이 땅에 달라붙었다. 겨우 발을 떼어 차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나는 그때서야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밖은 환했고 안도가 되었다. 그때 내 차가 가장 귀중한 집이라는 것, 그래서 그 집은 생명이 있는 말(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전대에는 온기가 있고, 계측기들엔 마음이 있었다. 내 엉덩이만한 운전석은 부드럽고 반듯했다. 그 날 밤 어머니 곁에서 잠을 잤다. 이튿날 오후 천천히 미시령을 넘어 서울로 돌아왔지만 잊지 못할 이틀간이었다. 이미 내 속의 모든 것이 해결되고 있었다. 이렇게 차는 나를 멀고 고독한 곳으로 데려다주는 말 없는 친구다. 언제라도 어디라도 동행해주는 것이 내 차다.
`폐차 선진국`의 오명을 벗는 길 2003-11-04
국산차의 폐차주기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무척 짧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00년 건설교통부가 발표한 국산차의 평균 폐차 연령은 7.6년에 주행거리 14만km로 일본(18년, 38만km), 미국(17년, 34만km), 프랑스(16년 31만km)에 비해 반도 안 되는 수준이다. 국산차의 수명이 이처럼 짧은 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아직 국내 자동차 메이커가 선진국만큼 튼튼하게 차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과 `차를 신분과시용으로 생각하는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이 두 가지 지적은 분명히 국산차의 수명에 영향을 주는 요소지만, 현상의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근본 원인은 아니다. 외국 자동차를 그대로 들여와 조립생산을 하던 국내 자동차산업의 과거를 떠올리면 첫 번째 주장은 일면 설득력을 가진다. 실제로 같은 배기량의 차를 놓고 비교해 보았을 때 독일이나 일본의 차가 국산차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뛰어난 성능을 보이는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동차를 만드는 기술이 떨어진다고 해도 10년도 못 버티는 차를 만든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한 예로 국내에서 개발한 엔진은 폐차의 평균 주행거리의 최소 세 배를 넘는 50만∼100만km 정도는 달릴 수 있는 내구성을 갖고 있다. 폐차장에서 고물이 되어 나가는 차들 중 많은 수가 엔진의 수명이 반환점을 돌기 전에 `안락사`를 당하는 것이다. 두 번째 `신분과시용으로 차를 바라본다`는 지적도 중형 승용차가 가장 많이 팔리는 국내 자동차 시장상황을 보면 타당한 말이다. 이러한 비판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우리의 국민성까지 들먹이는 논리인데, `선진국 사람들은 20년 된 낡은 차도 당당하게 타고 다니는데, 우리는 실속도 없으면서 겉치레만 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중고차시장에서 얼마의 돈을 받을 수 있는 차를 폐차시키고,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점차 차급을 높이는 풍조는 일부 부유층을 비롯한 소수 그룹의 잘못된 관념일 뿐이지 차를 갖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국산차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의외로 `자동차문화`라는 개념은 가벼이 넘겨 버리는 경우가 많다. 자동차문화란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적인 요소 즉, 운전자들의 운전실력이라던가 자가정비 능력, 운전예절, 사회전반의 시스템 등을 이야기하는 개념이다. 이 자동차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는 나라일수록 차의 수명은 늘어나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자가운전자 수는 80년대 들어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소수의 전유물이던 자동차가 올바르게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자동차문화가 마련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 현대화의 모든 과정이 그랬듯 자동차 분야의 발전 역시 질보다는 양이 우선되어 운전자와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을 넘어서고 말았다. 한나절만에 운전면허를 따는 사람이 쏟아져 나왔고, 집에 주차장이 없어도 차를 사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워셔액 넣는 곳이 어딘지 몰라도 운전은 할 수 있는 운전자들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미처 넓히지 못한 도로를 먼저 빠져나가려면 클랙슨쯤은 예사로 울릴 줄 알아야 하고, 깜박이 없이 끼어들기는 기본으로 할 수 있어야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동차의 메커니즘이나 정비에 필요한 지식은 하루아침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동안 꾸준히 자동차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제대로 된 지식이 된다. 자동차 선진국의 예비운전자들은 주말마다 차고에서 간단한 고장쯤은 스스로 정비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자라난다. 반면 우리 운전자 중 차를 돌볼 시간과 정비할 공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단히 적다. 똑같은 차라 해도 자동차문화가 정착되어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에서의 수명 차이는 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10년간 10만 마일(약 16만km)의 무상보증을 실시하고 있는 국내 자동차 메이커가 우리 운전자들에게는 똑같은 조건을 제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를 오래 타는 것이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 사회 시스템도 뒤떨어진 자동차문화의 한 단면이다. 예를 들어 10년이 넘은 1천500cc 소형차를 타고 다니다가 추돌사고가 일어났다고 하자. 보험회사에 수리를 의뢰하면 제대로 원상복구를 받을 수 있을까? 50만 원도 안될 것이 분명한 `자기차량손해`의 보상범위를 넘어서는 수리비 청구는 아예 불가능하다. 자동차의 가치를 고철의 무게로만 판단하는 잘못된 관행 때문이다. 사고 후에 그나마 부품을 구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각 메이커는 자동차 단종 후 7년까지 의무적으로 부품을 공급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차를 10년 넘게 타고자 마음먹은 사람이 받는 스트레스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구하기 어려운 부품들은 미리 폐차장을 찾아다니며 `사재기`를 해 놓아야 하고 메이커의 공식 AS를 받는 것은 아예 포기해야 한다. 2년마다 한 번씩 받게 되어 있는 승용차의 정기검사도 10년이 넘은 차는 고장 가능성이 많다는 이유로 1년마다 한 번씩 받아야 한다. 그나마 올해부터 실시되는 자동차세 차등부과제도가 위안이 되는 정도다. 기자의 주변에는 멀쩡한 차를 폐차시키는 운전자가 없다. 차를 폐차시키는 것이 타고 다니는 것보다 이익이라는 판단이 들 때 사람들은 비로소 정들었던 차와 이별하게 된다. 자동차10년타기시민운동연합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폐차주기를 1년 연장했을 때 국가 전체로는 연간 10조 원의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나라 살림에 이 정도면 어딘가. `폐차 선진국`의 오명을 벗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홍보성 캠페인을 남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차를 스스로 관리하려는 운전자들의 의식변화와 오래된 차를 타는 사람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주는 제도의 뒷받침 그리고 메이커의 노력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초보 2년 보고서 2003-11-04
태권브이로 유명한 만화가 김형배 선생님은 평생 운전을 하지 않고 사신다. 자동차가 여러 가지 문제로 자유를 앗아간다는 것이 이유다. 만화가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많고 나 자신도 그랬었다. 그런 내가 서른이 넘어서야 자동차를 몰고 싶어진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여자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왠지 서른이 넘겨 여자를 사귀려니 뚜벅이로는 폼이 안 난다는 생각에 아담한 아토스 유로파를 홀딱 사버렸다. 차를 먼저 사놓으면 아까워서라도 면허를 빨리 따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제대로 치러본 시험이 없는 내가 면허시험을 한 번에 덜컥 통과한 것은 내가 봐도 자랑스러울 정도다. 면허증을 발급 받던 날은 몇 년만의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그런 최악의 눈길에서 “기름을 넣어러 가자”는 친구의 꼬임(?)에 빠져 서울에서 성남까지 운전했다. 자신이 붙어 다음 날에는 일산과 분당으로 차를 몰아대더니 한 달이 지나기 전 창원까지 왕복 12시간이 넘는 길을 겁 없이 오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위험한 초보운전자가 아니었나 싶다. 2년간 차를 몰다보니 초보티는 벗었지만 우리나라에는 또 다른 초보운전자가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든다. 면허를 딴 지 10년이 지났어도 기본을 모른다면 그는 영원한 초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종 자기 자신이 시속 100km를 넘나들며 질주하는 쇠깡통 속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겁 없이 질주하는 초보운전자들…. 아니 인간초보가 너무나 많다. 위험한 곳일수록 더욱 광분하며 달리는 자동차들 때문에 죽을 맛이다. 차선을 바꾸려고 깜박이를 켜면 그 신호를 가속신호로 생각하는 초보들, 횡단보도 신호등이 바뀌기도 전에 출발하라고 빵빵대는 젖먹이 운전자들, 조금만 수 틀리면 옆에 붙어서 온갖 손가락질과 욕설을 내뱉고 심지어 앞을 가로막고 브레이크를 밟는 운전자들도 자주 본다. 나는 절대로 새벽녘에는 중앙선 근처로는 얼씬도 중앙선을 넘나들며 S자로 곡예를 하는 폭주족들과 정면충돌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일전에는 미친 듯 질주하는 음주차에 뒤를 받혀 하마터면 고가 아래로 떨어질 뻔한 사고가 있었다. 충돌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줄 알았었다. 그 운전자는 뺑소니를 쳐버렸다. 초보 시절 복잡한 시내 도로에서 내 차가 횡단보도를 가로막았기에 차를 뒤로 빼다가 뒤에 있던 택시를 받은 적이 있다. 소리가 커서 놀라 나가 보았으나 부서진 곳은 없었다. 운전석 쪽으로 가서 사과를 드렸더니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가 “나는 괜찮은데 차가 좀 아팠겠어”라며 온화하게 웃었다. 이런 분도 있구나…. 험난한 서울의 도로에서 간혹 보게 되는 이런 분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보다 훨씬 먼저 면허를 땄지만 장롱면허인 여자친구가 요즘 도로연수를 받고 조금씩 차를 혼자 몰고 나간다. 초보들이 판치는 서울에서 잘 해나갈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간 폭주차가 결국에는 다음 신호에서 느긋하게 달린 내 차 앞에 서 있는 것을 그 운전자는 왜 모르는 것일까. 폭주와 경쟁이 운전의 재미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나는 지금 폭주하는 차들 틈바구니 속에서 운전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애지중지하는 차와 함께 느긋한 대화를 나눈다는 기분으로 달리다 보면 없던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
비와 자동차 2003-11-04
요즘처럼 모든 국민이 비를 애타게 기다리고, 온갖 살아 있는 생물들이 물을 찾다가 말라버리는 때에 비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비와 더불어 보낸 젊은 날의 방황과 시행착오의 시간들을 되새김해본다. 비를 몹시 좋아하는 나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거리로 나선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체면유지 때문에 써버린 우산을 벅차하면서 무게를 싣고 쏟아져 내리는 그것들을 고스란히 느끼며 거리를 걷는 것이다. 치고 올라오는 감성을 주체 못하던 때가 있었다. 스물아홉의 어딘지 모를 막막함이 절망처럼 느껴져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시들해지고 앞이 보이지 않는 뿌연 것 속에 갇힌 것 같던 그때에 비가 오면 서둘러 차 키를 찾아 나서곤 했다. 쏟아지는 무게를 유리로 받으며 커다란 차를 뒤쫓으면 앞다투어 달라붙던 포말이 좋아서, 하얗게 부서지며 쩌렁쩌렁 울리는 듯한 그 질주가 좋아서 속도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나가던 그런 때가 있었다. 음악을 잘 모르면서도 유독 좋아하던 첼로 연주곡은 또 왜 그리 황홀했는지. 무겁게 가라앉은 첼로음이 차 안에 가득하게 퍼지면 빗물을 온통 몸으로 받아내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지금의 난 그 작은 행복을 버렸다. 적어도 폭우 앞의 질주만큼은 아주 버렸다. 아찔한 순간 커다란 차에 빨려 들어갈 뻔한 위협을 느끼고 차를 멈췄을 때 차가 한 바퀴 팽그르 도는 소름 끼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세상이 정지되고 내 심장까지도 멎어서 아무 것도 아닌 상태에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데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가장 먼저 떠오른 내 아이의 얼굴에서 아직은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다고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차 키를 스스로 버렸다가 다시 찾는 데 꼭 7년이 걸렸다. 7년의 시간 동안 난 조금은 깊어졌나보다. 두 아이를 태우고 움직이는 일이 많아지고, 그럴 때마다 조금의 불안이라도 아이들에게 전해주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내 모습을 보며 새벽마다 거리를 질주하며 미친 듯이 달려나가던 시간들이 부끄러움으로 자리잡는다. 이젠 비가 내리면 차를 몰기보다는 거리를 걷는다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아이들과 맛난 것을 만들어 먹으며 열심히 종알댄다. 비오는 길목을 우산에 의지해서 걷다보면 나와 같은 증세로 거리를 걷는 어느 목소리를 듣는다. “남시인? 비가 와서 혹시 하고 전화했어요….” 사람들끼리 마주하지 않아도 위안이 되는 건 아마도 동질의 감성을 지녔기 때문일까? 유독 빗길 드라이브를 즐겼던 7년 전의 나와 같은 감성을 지닌 이들에게 한마디 남긴다. “안전운전하세요!”
공존(共存)을 위한 여유 2003-11-04
언젠가 시내 어떤 호텔의 로비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잠시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우리 학회에서 강연하기 위해 외국에서 온 연자(演者)를 기다리며, 처음 만나는 연자와의 인사, 함께 나눌 이야기 등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다 우연히 그 그림을 보게 되었다. 흰색 바탕에 담채색(淡彩色)이 한가로운 그 그림은 호텔의 분위기에 잘 어울렸는데, 나의 관심이 간 것은 그림 귀퉁이에 작가가 연필로 써 놓은 ‘느리게 사는 아름다움’이란 제목이었다. 그 제목을 보며 나의 삶이 너무 바쁘게, 여유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추구하는 일들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인지, 일견 사치스럽게 생각하며 의식의 후미진 곳으로 미뤄 놓았던 문제들이 떠오르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닌 모양이다. 신문의 서평에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이 나온 것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나를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독자들의 호응이 상당하였다. 뒤를 이어 갖가지 ‘느림의 철학’을 다룬 책들이 발간되었고,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어 당분간 이 유행이 지속될 것 같다. 이들 책들은 느리게, 게으르게,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물질적으로 검소하게 살 것을 독자에게 권하고 있다. 가끔 일에서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근무시간 외에는 일을 위해 가족과의 시간을 희생하지 말며, 음악과 미술품 감상을 자주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가지라고 권하는 내용을 읽으며, 나의 삶을 반성하게 된다. 우리는 40년 전만 해도 외국의 원조에 의존해 사는 절대 빈곤국가였지만 현재는 세계 10대 교역국으로 자동차 생산 세계 7위, 철강 생산 4위, 국민 인터넷 이용률 10위의 자랑스런 OECD 국가의 하나로 발전해 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현기증 나는 변화를 경험했고, 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빨리 빨리’ 일을 진행하고 천천히 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바람직한 습관일 수 있으나 때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위험한 습관일 수도 있다. 10여 년 전 내가 뉴욕에서 공부할 때,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이 멈추어 서서 1시간 넘게 객차 안에 갇혀 있었던 적이 있다. 간혹 열차에 이상이 있어 수리중이라는 짤막하고 여유 있는(?) 안내방송만 나오고 열차는 꼼짝할 생각도 않는 것이었다. 지하에 갇혀 있으려니 불안하기도 하고, 출근길에 붙잡아 놓는 것도 짜증이 나서 좌우의 다른 승객들을 보니, 모두 천하태평이었다. 나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람도 없고, 간혹 나와 눈이 마주치면 생긋 웃으며 장난 삼아 윙크를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과연 큰 나라 사람들은 다르구나’ 하고 감탄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하철이 고장 나 열차가 연착하였을 때 승객들이 떼지어 매표구로 몰려가 환불을 요구하며 유리창을 깨고 난동을 부렸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고, 뉴욕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며 서글펐던 적이 있다. 나라가 작으면 사람도 작아야 하는가. 우리나라 40대 남자의 돌연사(突然死)가 세계 1위인 점이나 교통사고율이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 이어 세계 상위권을 달리는 것 모두 우리의 조급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속도로에서 자기 차를 추월했다고 끝내 쫓아가 그 차를 옆으로 밀어붙여 대형사고를 낸 어느 고속버스 운전수의 뉴스를 들으며, 우리 모두 약간 미친 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경제발전에 도움을 준 우리의 조급증이 이제는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지도 모른다. 자기 앞으로 차가 끼어든다고, 앞의 초보운전자가 꾸물거린다고 화내지 말고, 그들을 위해 좋은 일 한 번 한다 생각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자. 우리의 인생이 짧다고 하나 그렇게 악착같이 살지는 말아야 하겠다. 잠깐의 기다림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우리 자신과 이웃의 삶을 더욱 여유 있게 만들 것이다.
매연과 가뭄 2003-11-04
수도권에서 꽤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의 골목길에도 차들은 어김없이 서 있다. 대형차에서 소형 승용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차들이 마당 한 귀퉁이나 골목길 옆에 늘어서 있는 것이다. 웬만한 집에는 두 대 이상도 주차되어 있어 아마 식구들 나름대로 차를 쓰겠거니 싶기도 하다. 뿐만이 아니다. 논이나 밭머리에도 일하러 나온 이들의 차는 어김없이 서 있다. 마치 대도시의 주부들이 시장이나 백화점 나들이에 차를 몰고 가듯이 시골의 농사일에도 차는 이제 필수품이 된 것이다. 이런 풍경은 특정한 고장에서만 접하는 것도 아니어서, ‘이 나라는 가히 자동차의 홍수로구나’라는 감탄을 거듭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자동차가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의 수준을 가늠하는 표지로서의 의미를 잃은 지도 꽤 오래 되었다. 물론 고급차종의 경우는 지금도 그 차주인의 이러저러한 신분과 형편 등을 상징하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지난 한 세대 전쯤의 사회에서 자동차가 지녔던 상징적 의미와 비교해 보면 이는 지극히 미미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놀랄 만한 정도의 자동차 보급은 자연히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들을 빚어내고 있다. 잘 알려진 그대로 공해문제, 그것도 자동차 매연에 의한 대기오염의 문제가 심각해 것 역시 한두 해 전의 일이 아닌 것이다. 아마도 대도시에 사는 사람치고 폐벽에 그을음이 앉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손 들고 나와 보라고 하고 싶다. 공기오염의 심각성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 심각한 문제 때문에 차를 팔거나 운행을 포기했다는 말은 듣지를 못했다. 내가 아닌 남들이 그렇게 해 주기를 모두가 바라고 있을 뿐 정작 나는 예외 노릇을 하고 싶기 때문이리라. ‘나만 빼고’라는 생각들인 것이다. 얼마 전에는 이런 말을 들었다. 마침 전철 안에는 나이 든 아줌마들이 떼로 몰려 서서 떠들고 있었다. “얘, 그 순자 있잖아. 스물일곱번 째도 떨어졌대. 그래 놓고는 나라 욕만 바가지로 퍼붓고 있드라고.” “걔 학교 다닐 때도 약간 이상했었잖아.” 이런 말끝에 그들은 주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일제히 입에서 거침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꽤는 뻔뻔하고 철면피한 중년 아줌마 특유의 질탕함이 그들의 웃음소리 속에 깔려 있었다. 그들은 운전면허시험에 스물일곱번 째 응시했다가 또 낙방한 어느 친구를 그렇게 입방아에 올려서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 탓에 제일 합격이 어려운 국가고시가 운전면허시험이란 농담이 생겨났을 터이다. 요즈음은 석 달 이상 계속되는 가뭄 탓에 온 나라가 중병 앓듯 시끄럽다. 저수지와 하천의 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지고 논밭의 작물이 모두 타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뜻하지 않은 가뭄에 시달리는 이 나라의 논밭을 보면서 나는 문득 그 가뭄은 전국 어디서나 홍수를 이루는 저 자동차 탓이 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지구 온난화와 사막화 현상에는 매연으로 도배질된 대기권도 한 몫 거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내 생각이 제발 틀렸기를 바라고 있다.
꿈의 컨버터블, 내게는 악몽의 차 2003-11-07
컨버터블에 얽힌 이야기 하나. 몇 년 전인가 선배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올림픽도로를 달리던 중이었다. 선배의 차는 기아 카니발이었는데 앞에서 벤츠 카브리올레 한 대가 지그재그로 가고 있었다. 경적을 몇 번 울렸는데도 앞의 차는 아랑곳없이 우리 차의 진행을 방해했다. 화가 난 선배가 그 차의 옆을 통과해 앞지르기를 하려는 순간 벤츠 카브리올레의 지붕이 열렸다. 차 안에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녀가 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운전 틈틈이 키스를 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애정행각에 정신이 없었다. 한성질(?)하는 선배, 급히 컨버터블 앞으로 끼어들어 차의 속도를 급격히 줄였다. 뒤차도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서 선배는 깊숙이 가속페달을 밟았다. 카니발 배기구에서 시커먼 배기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뒤따르던 컨버터블 속의 남녀는 그 매연을 고스란히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 최근 소문난 자동차 매니아인 연예인 후배와 술을 한 잔 했다. 내 차는 매니저가 먼저 가지고 갔고, 후배는 차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다며 음료수만 마셨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해서 후배의 차에 올랐다. 차는 사브 9-3 컨버터블이었다. 후배는 “친구와 차를 잠시 바꿔 타고 있는데 컨버터블이어서 너무 좋다”고 흐뭇해했다. 올림픽도로를 따라 김포공항 방면으로 가는데, 갑자기 나타난 덤프트럭 3대가 우리 차를 가로막았다. 운전실력이 뛰어난 후배가 트럭들을 제치고 앞서 나가려고 했지만 집채만 한 트럭 3대를 앞지르기란 쉽지 않았다. 후배는 몇 번의 경적을 울렸다. 그러자 앞서 가던 3대의 트럭 모두가 속도를 줄였다가 급발진했고, 시원스럽게 지붕을 열고 달리던 우리는 3대의 트럭에서 나오는 배기가스를 온몸으로 뒤집어썼다. 몇 년 전 벤츠 컨버터블 속의 남녀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이야기. 지난 5월 어느 일요일, 매니저가 빌린 BMW Z3를 타고 강원도 속초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내가 고집을 부려 영동고속도로가 아닌 미시령을 넘어 국도를 따라 서울로 향하고 있었는데, 인제쯤 이르러 교량공사 하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꼬불꼬불한 길은 공사 때문에 편도 1차선으로 줄어 있었고, 앞에는 수십 대의 군용 트럭이 가고 있었다. 트럭들의 평균시속은 30~40km. 갑갑증을 느낀 매니저가 추월을 하려 했지만 중앙선을 넘어가며 적어도 20대가 넘어 보이는 트럭을 추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매니저가 2대의 트럭을 추월해 우리의 차는 트럭들 사이에 끼게 되었다. 추월 당한 트럭이 라이트를 번쩍였지만 매니저는 또다시 추월을 노리고 있었다. 그 순간 군용 트럭 2대가 동시에 경적을 울렸다. 지붕이 열린 컨버터블에서 듣는 경적소리란! 그 엄청난 소리에 너무나 놀라 하마터면 오른쪽 벼랑으로 떨어질 뻔했다. 나는 앞으로도 어지간하면 컨버터블을 타지 않을 생각이다. 젊은이들에게는 꿈같은 차겠지만, 내게는 너무나 끔찍한 기억만 남긴 악몽의 차다.
철없던 시절, 자동차와 나 2003-11-07
자동차와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년시절을 부산에서 보냈던 나는 사업수완이 좋은 아버지 덕분에 기사 아저씨도 있고 차도 있었다. 그리고 아저씨가 심부름을 나갈 때면 난 만사를 제쳐두고 차의 옆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물었는데 아저씨는 그때마다 참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사아저씨와 함께 차를 타고 부산에 있는 연산전화국에 심부름을 갔었다. 당시 전화국 앞 골목길은 꽤 넓은 도로였다. 주차장까지 들어가기가 귀찮았는지 아저씨가 “차 안에서 기다려라” 하고는 전화국으로 휑하니 들어가 버렸다. 이후 나는 아저씨가 자세히 알려줬던 것을 하나둘 복습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건 클러치, 이건 브레이크, 저건 액셀 등등……. 그런데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사이드 브레이크였다.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이리저리 만져보았는데 브레이크가 풀리면서 차가 서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조수석에 앉아서 미끄러지는 차를 보면서 ‘금방 제자리에 서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차는 점점 가속이 붙기 시작했고 두려움과 공포는 커져만 갔다. 차를 세우기 위한 노력은 그 문제의 사이드 브레이크를 부여잡고 앞에 있는 담벼락에 부딪히지 않기를 기도하는 일밖에 없었다. 다행히 하늘이 내 기도를 알았는지 마침 길을 지나던 중년의 아저씨가 차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급히 올라타 브레이크를 밟고 문제의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겼다. 이로써 영화 같은 한 장면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저씨에 대한 감사와 안도의 한숨이 동시에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아저씨를 맞았다. 나의 완강한 거짓말은 무려 150m나 굴러온 자동차를 보며 기사아저씨가 자기의 건망증을 의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차에 대한 관심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커져 고1때는 제법 익숙해진 솜씨로 동네를 한바퀴 돌아오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유일한 꿈은 차 안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드라이브하는 것이었다. 서울예전에 입학하면서는 드디어 어릴 적 꿈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KBS 공채 개그맨이 된 나는 모든 관심이 자동차로 쏠렸다. 공인이기에 운전을 할 수 있으니까 면허증을 따는 것은 미룰 수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교통경찰의 단속에도 연예인이라며 봐달라면서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다. 나의 잘못은 점점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변해갔고, 한참 리포터로 활동하던 때에는 전국을 무면허로 여행까지 했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결국 사고가 나고 말았다. 상대방의 차가 나의 차를 박은 것이다. 나는 죄값을 톡톡히 치러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 하라고 해도 하지 못할 철없는 모습이다. 이후 정신을 차리고 제대하자마자 2종 운전면허에 응시, 당당한 드라이버가 되었다. 나의 철없는 시절 경험담이 차를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그릇된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는 이들에게 귀감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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