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이 땅에서 자동차 없이 살기 2003-11-04
마흔 다섯 살, 많이 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리지도 않은 나이다. 나이 마흔 몇을 헤아리게 되면서 생겨난 변화는 이제껏 살아온 방식으로 앞으로도 살게 될 거라는 체념과 고집이 늘어난 것이다. 씩씩한 인생 설계자들은 언제 어느 때라도 새로운 시작,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번거로운 일이다. 이제 와서 뭘 새로 시작해서 무슨 영광 보겠다고... 돌이켜 보니 내 삶은 안 하고, 못 하고, 없이 사는 것, 그저 그냥 사는 것이 대세였다. 대부분의 사내들이 일하고 남는 시간에 흔히들 하는 놀이 중에 무엇 하나 해본 것이 없다. 당구장에 가본 일도, 노름을 해본 일도, 등산, 낚시, 스키, 골프, 어느 것 하나 해 본 일이 없다. 물론 주식, 부동산, 저축 같은 심오한 일에 관여한 적도 없다. 적극적으로 기피하는 것도 많다. 가령 노래란 흥이 날 때 어쩌다 부르는 것이련만 오로지 노래를 부르기 위한 목적으로 컴컴한 방에 빼곡하게 모여 목청을 높이는 일은 정말 질색이다. 모임 후에 노래방엘 가게 되면 말 없이 슬쩍 내뺀다. 헬스클럽, 교회나 절, 각종 공부모임이나 시민운동단체 등등 적극적으로 기피하는 일이 참 많다. 지난 여러 해 동안은 TV와 신문도 거의 끊고 살고 있다. 인터넷 하나로도 정보가 넘쳐나는 판에 그것들은 쓸데없는 것을 너무도 많이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안 하고 못 하고 사는 가운데 늘 의식해야 하는 것이 자동차다. 프리랜서인 탓에 여의도와 우면동에 있는 방송사들을 매일 오가야 하고, 원고 일로 각종 신문, 잡지사를 찾아갈 일이 많은데 승용차 없이 살기란 고통이다. 요즘같이 추운 겨울에 산더미 같은 자료를 떠매고 어딘가를 가야 할 때는 정말 처량하기 이를 데 없다. 주위에서 쓰던 차를 거저 주겠다는 제의도 여러 번 받았다. 하지만 나는 운전을 배워본 일이 없다. 면허가 없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무슨 괴상한 인생철학을 지녔는가 하면 천만 아니다. 무슨 철학, 무슨 관을 `지니는` 것도 또한 될수록 기피하고자 하는 일 중에 하나니까. 실제 이유는 싱겁도록 간단하다. 음반을 모으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토록 음반을 모으고 음악을 들어왔다. 그 일에는 시간과 돈과 에너지가 든다. 다른 일에는 전혀 여력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 친구들이 일제히 운전을 배우러 다니고, 상계동에 이어 일산 쪽으로 주택청약인가를 들 때도 나는 오로지 음반을 구해 듣느라 돌아가는 사정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내 나이 마흔 몇. 하지만 되묻는다. 이렇게 살아서 뭐 잘못된 것이 있는가. 남들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국민교육헌장이 있는가. `내게는 한 사람도 너무 많다`고 니체가 말했다. 내게는 음악 한 가지도 너무 많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게 되겠지? 불편이야 견디면 되는 일이고.
휘발유 엔진, 디젤 엔진, 그리고 SUV 이형수<.. 2003-11-04
자동차를 고르는 기준은 사람들마다 서로 다를 것이다. 보통은 자신이 추구하는 생활방식이나 멋, 자동차의 성능 등에 따라 자신만의 기준을 정하고 맘에 드는 차를 사기 마련이다. 다른 오너가 자신의 생활에 꼭 맞는 차를 골랐고 만족한다면 그 기준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차종이야 어떻건 자신의 차를 정말로 아끼고 만족스러워하는 오너야말로 진정한 멋쟁이가 아닐까? 하지만 가끔 자동차의 특성 자체를 잘못 알고 있는 상태에서 영업사원이 강조하는 차의 특징만을 믿고 차종을 결정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안타까울 때가 있다. 주로 처음으로 자신의 차를 사는 친구들이 많이 저지르는 실수다. 개인적으로 자동차를 고를 때는 어떤 방식의 엔진을 선택할 것이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동차의 특성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휘발유 엔진은 연료를 많이 먹지만 조용하고, 디젤 엔진은 연료비가 싸지만 시끄럽다고 쉽게 평가한다. 물론 이것은 각 엔진의 특징 중 하나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중요한 특징일 수 있다. 특히 고유가 정책에 따라 기름값이 비싼 국내 사정에서는 오너들에게 엔진의 규격이나 특징보다는 연료비가 중요한 차종 판단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각 엔진의 절대적인 선택 기준은 아니다. 휘발유 엔진은 단가를 싸게 제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엔진의 무게가 가벼운 편이고, 동급 배기량의 디젤 엔진에 비해 높은 마력을 뽑아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구조가 단순해 자가정비가 쉽고 튜닝도 자유롭다. 그러나 휘발유 엔진은 연료를 점화시키기 위해서는 전기가 필요하다는 구조상의 문제 때문에 극심한 먼지와 습기, 비바람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디젤 엔진 어떨까? 디젤 엔진은 휘발유 엔진에 비해 부피가 크며 무겁고 같은 배기량에서는 휘발유 엔진보다 출력이 떨어지므로 구조상 소형 엔진에 불리하다. 엔진의 내구성이 강해 잔고장이 없지만 개조나 튜닝은 거의 불가능하다. 디젤 엔진 튜닝카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디젤 엔진은 피스톤의 긴 스트로크 운동을 이용하기 때문에 낮은 엔진회전수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고 열효율이 높아 일반적으로 휘발유 엔진보다 연료를 적게 먹는다. 또 전자장치가 적은 탓에 비바람이나 습기에 강하고, 극심한 먼지도 연료계통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디젤 엔진은 무거운 짐을 옮기거나 다른 차를 견인하는 등 큰 힘이 필요한 차와 험난한 오지를 탐험하는 SUV에 제격이다. 지난해 국내에서는 SUV가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과연 대다수 SUV 오너들이 악천후의 기상조건에 유리한 디젤 엔진의 특성을 제대로 알고 있을지 의문이다. 그보다는 일반 승용차처럼 잘 포장된 온로드만 다니는 오너들이 값싼 연료비를 고려해 SUV를 선택했을 것이다. SUV가 거칠고 도전적이며 자유로운 활동성 대신 그저 싼 디젤을 연료로 이용하는 운송수단으로만 받아들여지는 우리 현실이 안타깝다.
한국차의 미래가 밝은 이유 서현석<한국예술종합학교.. 2003-11-04
내가 유학생이던 70년대 후반만 해도 우리나라는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였기에 유학길에 오른다는 것이 여러 모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독일 쾰른에 있는 아헨국립음대.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빨리 학교를 졸업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데 온 힘을 쏟았기 때문에 아침이면 기차나 전철을 타고 학교로 향하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참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반복했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고독한 타향살이의 어려움을 이겨내던 시기였다. 하지만 당시에도 주말이면 차를 빌려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가는 여유 있는 학생이 가끔 있었다. 나는 독일 친구를 따라 벤츠나 BMW의 조수석에 앉아 본 경험이 있었는데, 자동차 자체가 귀했던 시기에 접해본 독일차들은 품질과 성능이 분명 뛰어나 보였다. 요즘 주위를 보면 참 많은 학생들이 유학길에 오르고 있다. 음악뿐 아니라 갖가지 학문을 배우기 위해 다양한 나라를 향해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유학생활의 고달픔과 외로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테지만 중고차 하나쯤 구입해 굴리는 일은 흔하게 볼 수 있다고 하니, 나의 유학시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풍족하고 여유있는 생활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요즘 학생들의 커진 씀씀이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현재 몰고, 접하고 있는 차들은 대부분 한국차가 아닐 것이다. 요즘 유학을 다녀온 학생들은 이전 세대들보다 훨씬 다양한 차를 타고 경험함으로써 수입차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고 자동차 선진국의 차와 국산차의 차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자동차에 대한 지식도 우리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가지고 있다. 소비자들의 눈이 높아졌다는 것은 그들이 선택하는 차의 수준도 그만큼 성장했음을 반증한다. 지금까지 내 손을 거쳐간 차들은 모두 대우차였다. 맵시나를 시작으로 에스페로 그리고 지금은 레간자를 타고 있다. 물론 맵시나 시절에는 차의 성능이나 품질이 `세계`를 논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세 모델의 발자취를 보면 국산차가 짧은 순간에 얼마나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루었는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높아진 소비자의 눈을 만족시키고 나아가 세계 메이커들과 경쟁하려는 노력이 지금의 한국차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요즘 미국이나 유럽에서 한국차를 심심지 않게 볼 수 있음은 한국차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벤츠가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지만, 한국차는 그들보다 훨씬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만큼의 성장을 이루어냈으니 더 놀랄 만한 일이 아닐까. 내가 한국차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발전의 속도를 늦추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만들어낸 차들이 일본이나 독일차를 누르고 세계시장에 우뚝 설 날을 꿈꿔보는 것도 결코 헛된 망상이 아닐 것이다.
내겐 수호천사가 있다 최원일<미국 공인회계사, .. 2003-11-04
한국에서는 30대 치매가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치매에 버금가는 증상이 내겐 20대부터 있었다. 시애틀에서의 일이다. 유학생이라기보다는 고학생이었던 나는 동포 언론사에서 취재기자로 일하며 학비를 벌고 있었다. 하루는 한인이 연루된 중요한 재판이 있어 급히 법원으로 가던 중이었다. 마침 사진기자가 다른 일로 자리를 비워 내가 사진까지 찍을 요량으로 카메라를 챙겼다. 신문사 앞에 주차해 놓은 차를 뺀 뒤 서너 블록을 갔을까? 멈춤 신호에서 멈춰섰을 때다. 갑자기 어깨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아까부터 룸미러에서 나의 시선을 성가시게 하던 뒤차의 운전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꾸 차창 밖으로 팔을 뻗어 마치 욕을 하듯 손가락을 펼쳐 보이던 그다. 그러나 별놈이 다 있는 미국 땅에서 그런 것에 일일이 대꾸하다가는 내 볼일 못 본다는 것쯤은 알고 있던 터라 무시하고 오던 길이다. `If you don`t need this, can I take it?(이거 필요 없으시면 제가 가질까요?)` 내 차의 지붕에서 카메라를 집어내려 내게 주며 그가 건넨 농이었다. 아차! 자동차 문을 열면서 지붕 위에 올려놓은 그것을 깜빡 잊고 서너 블록을 달려온 것이다. 다운타운인지라 속력을 낼 수 없는 탓에 거의 기어오듯 오지 않았더라면, 또 정지신호에서 천천히 멈추지 않았더라면 내 몇 달치 봉급을 고스란히 토해내야 할 상황이 벌어졌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것도 모르고 손가락으로 내 차 지붕을 가리키며 그 아슬아슬한 상황을 알리려 하던 그를 아무 이유 없이 손가락 욕이나 해대는 불한당 취급을 하고 있었으니…. 그가 떠나면서 그랬다. `How was your road test?(로드 테스트 어땠나요?)` 텍사스로 학교를 옮긴 다음 봄방학을 맞아 난생 처음 캘리포니아 여행을 하고 있을 때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지나는 고속도로변 주유소에서 나의 건망증은 또다시 일을 만들었다. 기름을 넣고 커피를 한 잔 마신 뒤 자동차 문을 열려는데 열쇠가 없다. 어디에 있을까? 한참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 주머니를 뒤져보고 주유소 화장실을 가보고 계산대를 찾아보고, 내 차 밑, 남의 차 밑을 샅샅이 뒤지고 애꿎은 주유소 마당을 뚫어져라 훑었지만 별 무소용. 두 시간을 찾아 헤맸으나 보이는 것은 속절없이 내 옆을 오고 가는 다른 차들뿐이었다. 고산지대라 해는 이미 기울기 시작하는데 그 날 밤 안으로 LA에 도착해야 할 사정이 꼭 있는 나로서는 정말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벤치에 걸터앉아 있는 내게 이윽고 수호천사가 나타났다. 주유소에서 일하는 허름한 차림의 멕시칸 청소부. 사람 좋게 웃으며 낯익은 키를 내게 건넨다. 쓰레기 소각장에서 찾아온 것이라며…. 주유소 계산대 현관의 쓰레기통을 안 뒤져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동차 키는 훨씬 정교한(?) 방식으로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었다 한다. 다 피운 담뱃갑 안에 들어 있었다니. 그러고 보니 주머니에 있던 빈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버렸던 생각이 난다. 주머니 안에 넣는다는 키를 주머니 속 빈 담뱃갑에 넣었던 것이고, 그 담뱃갑이 들어간 쓰레기통은 두어 시간 후 소각장으로 옮겨졌으니 내 자동차 열쇠는 `화형` 일보 직전에 살아 나온 셈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흑인이나 히스패닉계 인종에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들 한다. 그 `일반적`이라는 말이 주는 우악스러운 획일화를 나는 원래부터 좀 싫어한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호감을 가지고 보려 하는 이유는 훨씬 구체적이다. 그들이 내게 먼저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전히 그 고마운 이들을 기억하는 것으로 아직 치매에 걸리지 않았음을 확신하며 안도할 수 있으니 그들은 지금도 내게 있어 수호천사다.
밥은 안 해놨지만… 김경미<시인, 방송작가>.. 2003-11-04
90년대 초, 나는 주위 친구들에 비하면 비교적 일찍 운전을 시작했다. 일찍 시작했을 뿐더러 다른 데서는 거의 가져본 적이 없는 지나친 자신감까지 갖고서였다. 그 탓이었는지 운전이 거칠고 과격했다! 당시 일을 함께 하던 방송국 PD는 딱 한 번 내 차를 타고 가면서 옆자리에서 계속 앗! 읏! 훗! 갖은 소리를 다 토해내더니 그 뒤론 어딜 함께 갈 일만 생기면 `나 택시 탈래` 손부터 내젓곤 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때 왜 그랬을까.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어떤 좁고 위험한 길이든 겁도 없이 막무가내로 들어가고 올라가고 넘어갔다. 까짓 계단인들 못 올라가겠냐는 듯이. 하지만 이 년쯤만에 운전을 그만둔 이후론 정작 하지도 않는 운전이 점점 겁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꼭 그만큼씩 운전을 하는―`잘하는`도 아니고 `그냥` 하는― 이들이 더없이 용감하고 부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운전석에 앉은 이들이 번지점프에 성공한 이들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진해서 그만둔 운전이었고 무슨 사고를 냈던 것도 당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독립심하고 관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운전을 즐기고 잘하는 여성일수록 독립 심이 높다고 한다. 실제로 생각해보면 운전을 씩씩하게 하고 모르는 길도 잘 가던 그 시절에는 여러 모로 독립심이 정말 강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독립심이 약해지면서 운전에 대한 겁도 늘어난 것인지. 어쨌든 올해 들어 다시 운전이 하고 싶었다. 해야 할 일도 많았다. 그런데 막상 7, 8년만에 다시 운전을 하려고 나서니 방해물이 엄청나게 많았다. 무엇보다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아파트까지의 좁은 길 양편에 항상 빽빽이 주차중인 차들과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면서 항상 뒤로 옆으로 얽히는 차들, 그리고 마을버스 속에서 자주 보고 듣는 비난들. 특히 마을버스 속에서 아저씨들이 바깥의 여성 운전자들을 향해서 퍼붓는 비난들―저럴 거면 차를 갖고 다니지나 말지. 저 여자들 틀림없이 밥도 안 해놓고 살림도 엉망으로 해놓고 쓸데없이 나돌아다니는 걸 거야―은 항상 불편하고 불안했다. 하긴 하도 그래서 요즘은 차 뒤에다 아예 `밥 다해놨음` 하고 써붙이고 다니는 주부 운전자도 있다던가. 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고 또 내고싶을 만큼 운전에의 필요와 욕구가 간절했다. 그래서 지난 추석 연휴에는 드디어 7, 8년만에 처음으로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불광동의 큰집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명절 연휴라 차들이 드물 거라는 짐작과 옆자리의 남편만 믿고서였다. 아닌 게 아니라 도로에는 차들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시종일관 혼비백산이었다. 도대체 내가 한때 운전을, 그것도 그토록 자신있게 했었나 싶었다. 그러다 드디어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입구에서 마을버스와 마주친 순간 내 입에서는 저절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나 못해! 나 안 해!` 하지만 그래도 지금 난 확신해 마지 않는다. 올해는 첫눈을 운전석에 앉아 맞이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때로 시를 쓰다가, 혹은 하루치 방송원고 일을 끝내고 기지개를 켜다가 그대로 달려나가 노을지는 길을 음악을 들으며 달리기도 하리라는 것을. 아마도 차 뒷유리에 `밥은 안 해놨지만 나도 어쨌든 운전할 일이 있음!`이라고 써붙인 채.
황홀한 운전, 스스로 움직이는 차 유성호<문학평.. 2003-11-04
자동차가 정말로 귀하던 시절, 우리 집과 나란히 살고 있던 성철이네 아저씨는 어느 사장님 자동차를 운전하는 분이었다. 해가 다 지고 난 늦은 저녁, 그 분은 언제나 새까맣고 커다란 승용차를 몰고 귀가했다. 물론 그 분이 하루 종일 몰고 다녔을 그 차의 주인은 따로 있었겠지만, 우리들의 어린 눈에 그 자동차는 분명 그 분의 손길과 체온이 담긴 경이로운 존재였을 뿐이다. 아저씨는 아침이면 언제나 그 차를 정성스럽게 닦고 또 닦았다. 나는 그 때 저렇게 잘 닦아야 차가 스스로 움직이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정말 거짓말처럼 그 커다랗고 새까만 차는 스스로(自) 움직여(動) 골목을 빠져나가곤 했다. 그 귀하던 자동차가 이제는 흔하디 흔한 시대가 되었다. 대학 강사 시절인 1994년 가을, 나 같은 서생도 차를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4년여 동안 지갑에 꽂힌 채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던 `운전면허증`이 아마도 나보다 더 기뻤을 것이다. 지금 주행거리 20만km를 코앞에 두고 있는 내 차가 없었다면, 분명 나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경험과 행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내 엘란트라 94년형은 나의 `발`이요 `동반자`다. 그래서 이제는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의 촉감조차 여느 차와는 전혀 다른 우리만의 깊은 교감이 형성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남들은 폐차하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건네지만, 천만에, 나는 아무리 차가 흔해도 내 차가 숨을 멈출 때까지 다른 차를 기웃거리지 않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짝사랑처럼! 내 차가 나를 실어다준 가장 인상깊은 곳을 들라 하면, 미시령이나 해남 땅끝 혹은 정동진 같은 이미 잘 알려진 곳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자동차를 사던 그 해 가을, 초보운전의 몸으로 마음놓고 질주하던 남한강변을 잊을 수 없다. 그 때 나는 양평에 있는 한 대학에 출강하고 있었다. 강의 시작은 월요일 아침 8시 반이었다. 걱정하는 아내에게 딴청 피우면서, 나는 워커힐을 돌아 덕소를 지나 양평으로 향하는 코스로 처음 나의 차를 겁도 없이 몰았다. 아마 새벽 6시 반쯤이나 집을 나섰을 것이다. 그런데 워커힐을 돌아 덕소로 들어가던 그 코스는 그야말로 일망무제, 엄청난 속도로 차들이 달리는 도로였다. 비유컨대 우리나라의 `아우토반(Autobahn)`이었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과속운전의 묘미와 위험을 온몸으로 익힌 셈이다. 그런데 정작 나의 기억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그 아우토반의 속도감이 아니라, 그 다음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남한강변의 새벽 물안개다. 아침이 다 밝아 사방은 눈이 부시고, 그 햇살 사이로 무궁무진 피어오르는 막무가내의 물안개들…. 운전을 하면서 한눈 팔면 위험하다는 상식쯤은 그 황홀한 풍경 앞에서 번번이 무시되고 나의 눈은 글썽거렸다. 그렇게 매주 월요일, 나는 눈부시고도 위태로운 주행을 계속했다. 그 때 나는 이미 음주운전보다도, 졸음운전보다도, 무면허운전보다도, 과속운전보다도, `황홀운전`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내 차를 믿었다. 당시 TV에서 하던 외국영화에서, 주인을 그냥 목적지까지 데려다줌은 물론 총도 쏘고 말도 나누고 걱정까지 해주는 자동차가 있었다. 아마 그 이름이 `키트`였을 것이다. 그 황홀한 남한강변을 나의 차는 `스스로 움직이는` 키트가 되어 나를 안개에 젖게 하였다. 그 순간만은 내가 운전을 한 게 아니라 차가 `스스로 움직인` 것이었다. 정말 자동차(自動車)였다.
내 아내는 닭띠 -신중경<축구평론가, 소설가&.. 2003-11-04
내 아내는 닭띠다. 그것도‘삼복더위 닭띠`라 잊어먹기도 잘하고 졸기도 잘한다. 물론 미용실을 경영하다 보니 너무 힘든 탓도 있겠지만, 그런 아내를 바라볼 때마다 늘 미안하고 불쌍해서 안쓰럽기만 하다. 그런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생각이 일었는지 운전면허를 따야겠다고 하면서 학원에 등록했고, 떨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하더니 기어코 합격했다. 물론 그 날은 친구들까지 초청, 웃음꽃을 피워가며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도로주행을 하면서 불거져 나왔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아내는 당황해서 시동을 꺼먹기 일쑤였고, 기어도 제대로 못 넣어 엔진이 터질 지경이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질부터 벌컥 냈다. `좀 제대로 해! 이, 닭대가리야!` `뭐, 닭대가리라고? 자기는 전과자잖아?` `뭐야?` 아내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면서 내 약점을 파헤쳤고 두 번 다시 내게 배우려들지 않았다. 정나미가 뚝 떨어졌던 모양이다. 사실 아내의 말대로 나는 전과자다. 내가 자동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15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조기축구를 할 때라 자동차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원들끼리 점심을 먹다 갑자기 자동차 얘기가 나왔고, 결국 가장 늦게 면허를 따는 사람이 저녁을 사기로 약속하면서 역사는 시작되었다. 운전학원에 등록한 지 1주일 후, 필기시험을 치르고 전광판을 바라보니 모두가 80점을 넘었는데 내 수험번호 밑에만‘68’이라는 숫자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평소 남보다 머리가 좋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터라 분하고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결국 7전 8기 끝에 면허증을 받아들고 직원들에게 저녁을 대접하였으나 그때만큼은 정말 돈이 아깝지 않았다. 그 후 우리는 중고차를 한 대씩 구입했는데 내 차에서는 언제나 몬테네그로 악단이 연주하는‘방랑의 휘파람’이 흘러나왔고, 나는 또 마카로니 웨스턴의 주역배우인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가운데 친구들과 함께 눈동자가 풀어지도록 술을 마신 나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다 가로수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다행히 인사사고가 아니어서 면허가 취소되고 벌금으로 처리되었으나 또다시 자전거 신세가 되어야 했다. 명색이 공직자에다 축구심판이라는 사람이 정말 부끄럽고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 아픈 과거를 안고 있는 내가 뭐가 그리 잘났다고 착한 아내를 구박하였으니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그때 일로 아내는 녹색운전면허증을 가졌지만 아직도 운전을 하지 못한다. 아마 그때 일이 시멘트 자국으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초겨울의 문턱에서 거리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해본 일이다. ‘과거를 되돌아볼 수는 있어도 결코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내 진리를 망각한 채 말이다.
스타일 에세이 2003-11-04
현대사회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수단 이외의 많은 의미들을 갖고 있다. 자동차는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물건이 아니다. 이미 생활의 일부이자 이동수단으로써 큰 역할을 차지한 지도 오래되었다. 따라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으면 시선을 끌지 못하는 세상의 이치에 따라 이제 자동차는 십수 년 전의 컴퓨터처럼 신기하고 희귀한 물건이 아닌 삶의 기본적인 요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반면에 자동차는 개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표출해주는 중요한 도구다. 단순히 움직이기 위한 쇳덩어리가 아닌, 자기 생활의 그림 속에 절대로 빠트리기 싫은 요소인 셈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길 원하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최근 데뷔한 새차들이 지닌 컨셉트와 디자인을 보면 이런 경향은 더 쉽게 알 수 있다. 소수 매니아들을 위한 고성능 모델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자동차들이 `당신의 풍요롭고 윤택한 라이프 스타일을 위한 필수품`이란 보이지 않는 카피를 걸고, 소비자들이 좋아할 만한 편의장비와 디자인을 지녔음을 강조한다.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기를 원하는 사람들 중 라이프 스타일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지, 어떻게 표현하는지, 어떻게 입는지, 어떤 음악을 듣는지, 어디를 즐겨 찾는지, 어떤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지 등의 모든 것들이 다 자기 스타일의 표현도구들이지만 어떤 차를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야말로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유치한 과시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원했던 차를 구입한 뒤 스스로 얻는 강한 만족감을 맛본 이라면 더욱 동감할 것이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차를 선택할 때 고려하는 기준은 자신이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과 최대한 맞아떨어지는 이미지를 지녔는지 따져보는 것이다. 물론 차값, 배기량, 출력, 연비 등도 고려하겠지만 그보다는 자기와 닮아 거리에서 자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차를 가지고 싶을 것이다. 물론 자신만의 스타일이 없는 이라면 자동차에 의미와 애착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역시 몰개성을 추구하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닌 것이다. 애시즈 재즈를 들으며 하늘을 지붕 삼아 가로등이 펼쳐진 길게 뻗은 밤 도로의 바람을 맞으며 달리기를 원한다면 컨버터블을 선택할 것이다. 주위 사람들과 여럿이서 자전거를 몇 대 싣고 교외로 나가 숲내음 맡으며 마운틴바이크를 즐기고 싶다면 도심에서 운전하기 불편하더라도 큼지막한 밴을 원할 것이다. 차의 엔진소리가 어떤 음악보다 아름답게 들리며 그 엔진소리로 인해 피가 끓어 넘쳐 바로 운전석에 앉아 고단기어에서 rpm을 레드존으로 골인시키고 싶은 욕망을 주체할 수 없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하루 저녁보다 차가 더 좋은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스타일을 중요시한다면 그들에게 자기 차의 의미는 남다를 것이다. 누가 스타일 없이 살고싶어할까?
장애인과 자동차 에세이 2003-11-04
세계에 자랑할 만한 한국의 파란 가을하늘을 보면 가끔 모든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한 강변도로나 숲속길로 드라이브를 하며 싱그러운 가을바람에 젖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한다. 도시의 교통지옥 속에서 자동차를 원망하면서도 안식의 시간까지 자동차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이기심일까? 국가경제가 발달하면서 도시화가 날로 가속됨에 따라 우리 주변의 생활환경도 복잡해지고 있다. 급속히 증가하는 고층빌딩과 자동차, 정보·통신수단의 발달은 이러한 변화의 대표적인 현상이다. 특히 이미 1천300만 대를 육박하는 자동차 등록현황이 보여주듯이 농경사회와 달리 초스피드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교통수단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중요한 삶의 요소에서 소외되고 있는 대표적인 계층이 바로 장애인이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우리 장애인들은 일반인에 비해 교통수단 이용에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복지정책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온 장애인들의 생활환경은 높은 계단과 턱으로 가로막히고 이용이 불가능한 교통시설로 인해 자유로운 외출조차 허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자립과 자활의 의지를 지닌 장애인들이 경제적 부담을 무릅쓰고라도 대중교통의 대체수단으로 승용차를 구입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이런 때문이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불행한 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절단했지만 30대의 젊은 나이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고, 장애인에게는 운전면허가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에도 무면허 운전으로 사회활동을 감행했던 것은 차선책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후로 내가 장애인단체를 이끌면서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요구와 함께 목소리 높여 주장한 것이 당연히 자동차와 관련된 정책이었다. 장애인 운전면허제도를 도입하고 각종 세금의 면제, 저렴한 LPG 사용, 주차제도 등 승용차가 장애인의 발이 될 수 있도록 각계에 요구하고 호소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과 자동차의 인연이 이렇듯 좋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장애인구는 450만 명에 이르고 질병과 사고로 인한 후천적 장애인이 90%에 달하는데, 장애발생의 주요 원인이 자동차에 의한 교통사고다. 실제 작년만 하더라도 29만여 건의 교통사고로 1만 여 명이 사망하고 42만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부상자들 중의 대부분은 신체적 장애를 갖고 살아가야 한다. 자동차는 장애인에게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 자동차로 인해 장애인이 될 수도 있으니 기막힌 인연이다. 경제적 어려움, 정치적 불안정 등으로 체감하기 힘든 사실이지만 우리는 OECD에 가입한 선진국가에 살고 있다. 장애인이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벽을 없애고 자유롭고 편하게 이동하고 생활할 수 있게 하는 사회. 이것이 바로 선진복지사회이며,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이 윤택해질 수 있는 사회다. 이런 사회가 되려면 정부의 정책적인 노력도 중요하지만 장애인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여기는 사회 전체의 의식도 필요하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며 버스를 가로막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휠체어 장애인과 차가 막힌다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민, 장애인들을 격려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십년지기, 내 좋은 친구 에세이 2003-11-04
올 봄 국내 극장을 강타한 영화 `친구`에서 배우 유오성은 `친구가 한자(漢字)인줄 알았는데 우리말`이라며 장동건에게 친구의 뜻을 설명한다. 친구는 우리말이 아닌 한자인 것을 극중 유오성은 알지 못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친구는 `오래 두어도 좋은 벗`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에겐 아내를 평생의 좋은 벗으로 만들어준 정말 좋은 친구가 있다. 10년이 훌쩍 넘은 자동차가 바로 그 친구다. 십년지기면 오래두어 좋은 친구의 범주에 당당히 들어가리라. 친구인 자동차는 아내와 모든 추억을 함께 공유하고 있어 더욱 애착이 간다. 결혼 전 아내와 나는 주말마다 추억을 편집하듯 경치 좋은 곳, 가볼 만한 곳으로 소개된 곳들을 찾아 다녔다. 양수리의 아침 물안개를 맞으며 유혹 많은 양평을 지나 젊음의 괜한 자유가 느껴지는 춘천으로, 메밀꽃이 하얀 바다를 이룬다는 소식에 찾아갔다가 빈 물레방아간만 보고 돌아왔던 봉평, 아직도 있을까 궁금한 사랑의 메시지를 적어 장승 밑에 파묻어 놓고 왔던 평창 장승마을, 허브가 동화를 만드는 허브나라, 보기만 해도 신이 나는 설악산, 그리고 낭만을 찾는 연인들의 종착지인 동해안 정동진이 모습을 매년 화려하게 바꿔가는 것도 지켜봤다. 듣기에는 느긋하기 만할 것 같은 옛날 영화 필름 같은 추억 속에는 우리만의 조급함이 묻어있다. 어디를 가서든 늘 하루 안에 돌아와야 한다는 장인어른의 말씀을 거슬리지 않기 위해, 어머니 시대의 통금 5분 전처럼 손을 잡고 뛰지는 않았으나 달리는 자동차에 채찍질을 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동해안까지 가서 하루 안에 돌아오려니 어느 날은 18시간을 운전한 적도 있다. 아내를 평생 반려자로 만들기 위해 며칠 걸려 할 운전을 하루에 다 하는 고생을 기꺼이 감수했던 것이다. 그렇게 추억을 쌓아가던 어느 날 친구가 심술이 났는지 충청도 옥천 근처에서 멈춰버린 일이 있다. 겨울 7시, 낯선 지방에서의 겨울 어스름과 반갑지 않은 눈은 갈 길이 막막한 우리에게 불안감을 더해줬다. 처음으로 레커차에 매달려 덜컹거리는 자동차를 타보았다. 새로운 경험이지만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곤 고치는데 몇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라는 카센터 주인의 우울한 선고를 받았다. 밤을 넘기지 않겠다는 장인어른과의 약속을 못 지킬 지경이었다. 무작정 아내를 데리고 옥천 버스터미널로 갔다. 서울행 막차가 출발 5분을 남겨 놓고 있는데 버스표가 매진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머리 속에 한 자씩 타이핑되는 기분이었다. 그때 갑자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저, 죄송한디유. 이 표 환불 안되남유?` 초로의 한 아주머니가 표를 환불하러 온 것이었다. `네, 제가 살게요.` 표를 빼앗듯 받아든 나는 아내에게 표를 쥐어주고 등을 떠밀어 버스에 올라 좌석을 확인해 줬다. 나를 홀로 남겨두고 가는 데 대한 미안함과 걱정으로 아내의 큰 눈은 검은빛이 되었다. 아내는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나와 친구는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옥천을 출발했다. 그후로 장거리를 갈 때엔 친구의 상태부터 꼼꼼히 살피는 좋은 습관이 생겼다. 통계를 보니 국내에서의 자동차 수명은 평균 3.7년이라고 한다. 그 정도 세월을 함께 하면 친구라 할 수 있을까? 그에 비하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75살임을 감안할 때 10년 된 나의 자동차는 200살이 넘은 나이다. 비록 노구지만 친구는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이제 친구는 아내와의 추억을 머금은 채 지난해 태어난 10개월 된 아들녀석과 의 새로운 추억을 기다리고 있다. `오래 두어 좋은 벗, 친구여. 함께 있어주어 고마우이.`
교육 환경이 교통문화를 바꾼다 에세이 2003-11-04
`운전경력은 20년이 되지만 서울에서 자동차를 운전할 용기는 없습니다.` 한국에서 10여 년간 살다가 귀국한 한 캐나다 선교사의 얘기였다. 그의 말대로 좁은 도로에 너무 많은 사람과 자동차가 있어 운전하기 어려운 것이 과포화 상태로 변한 서울의 모습이다. 여유 있는 넓은 땅에서 살다가 온 외국인에게 서울은 쉬운 교통환경이 아니다. 그러나 비슷한 여건을 갖고 있는 외국의 다른 도시와 비교해도 서울의 교통환경은 최악의 조건임을 부인할 수 없다. 교통문제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서울의 교통문제를 얘기한다는 것이 주제 넘는 일이라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성급하게 교통환경 및 제도를 응급처방 하듯 수시로 뜯어고치기에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를 얘기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펜을 들어봤다. 우리는 지난 30여 년간 세계에서 경이적이다 할 만큼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어 왔다. 천연의 자원도 부족한 이 땅에서 이만큼 성장한 배경에는 훌륭한 인적 자원이 뒷받침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등 지상주의, 누구나 1등이 아니면, 일류대학이 아니면, 일류직업이 아니면 행세하지 못한다는 강박관념이 어렸을 때부터 지배해온 우리의 세태가 경제발전에 저간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되었지만, 반면에 많은 부작용도 양산시켰다. 흔히 열등감과 공격성은 비례하게 나타난다고 심리학자들은 얘기한다. 일류만을 성공의 척도로 생각하는 우리의 세태에서 낙오된 많은 이류, 삼류의 사람. 이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특히 어린 시절 단순히 성적에 따라 일류와 이류 혹은 삼류로 평가되어 성장하는 청소년들에게 주는 악영향은 일생의 상처로 남게 된다. 사회는 유기체다. 각각 맡은 역할이 있고 이런 각각의 역할이 유기적으로 작용해 사회를 움직인다. 만약 금(gold)이 온통 흙 대신 이 땅을 뒤덮고 있다면 인류가 존재할 수 있을까? 금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식물이 자라나고 동물들이 뛰어놀 수 있는 터전은 되지 못한다. 지도자가 있으면 참모가 있고 다시 그 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동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양한 역할을 충실하게 할 때 건전한 조직으로 성장하게 된다. 성적이 한 인간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적성에 걸맞는 역할을 찾아 노력하느냐가 중요한 점임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자족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도 있다. 아동기 때부터 각자의 적성을 잘 파악해 그에 맞는 지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가정, 학교, 사회의 교육이 병행될 때 자신감 있고 건실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 내 차를 추월했다고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착각해 공격적으로 운전하는 우리들의 열등감, 급한 일도 없으면서 다른 차보다는 빨리 가겠다고 내달리는 어이없는 우월감에서 오는 과속행위 등 기본적인 질서를 망각한 이 모든 행동이 어릴 적 열등감의 상처에서 기인된 무의식적 행위라면, 교통제도의 개선이나 단속보다는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교육을 통해 우리의 사회교육 환경을 바꿔보는 밑바탕 작업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삶과 추억의 원근법 에세이 2003-11-04
유년의 어느날, 나는 사촌형과 함께 해거름의 어둠에 잠겨가는 마을의 신작로를 거쳐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을 어귀 앞의 줄지어 서 있는 백양나무 행렬 사이로 난 신작로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희뿌연한 어둠에 묻힌 신작로 길에 큰 트럭의 불빛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 트럭의 숫자를 거듭 헤아려 보았다. 10여 대가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랜만에 놀러온 사촌형은 앞으로 너네 마을이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했다. 얼마 후 신작로에는 점차 검은색의 아스팔트가 깔렸다. 합승 버스가 달려도 흙먼지나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한 아이는 자기 형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마치 뱀이 지나가는 것 같더라며 침을 튀기기도 했다. 마을에 자동차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시내의 어느 큰 부잣집의 자동차가 마을의 한 잔치집 마당에 와서 정차해 있으면 아이들은 제각기 뭐라고 아는 체를 하며 그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들이 내심 부러웠다. 우리집은 마을 전체에서 찻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부터도 산으로 에워싸인 사잇길을 제법 굽이 돌아야 했다. 그곳까지는 자동차가 들어올 수 없었다. 나는 깊은 밤, 짐승들의 울음소리라도 들릴 때면, 우리 집 앞에도 자동차의 환한 불빛이 지나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했다. 몇 년 전에 나는 서울에서부터 자동차를 몰고 고향에 다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처럼 나의 고향도 많이 변했다. 내 유년기의 대부분의 어른들은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늙으시거나 돌아가셨고 젊은이들은 도회지로 떠나갔다. 물론 우리집 식구들도 일찍이 서울로 올라왔기에 고향집에는 낮선 사람이 산다. 마을의 형세도 많이 변했다. 산비탈로에도 도로가 생기고 전망이 좋은 곳에는 음식점들이 들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내 유년의 집으로 난 산길은 비교적 변화가 적었다. 오히려 그 전보다 더 고적했다. 왕래하던 재 넘어 뒷마을 사람들의 숫자가 현격히 줄었고 산림은 더욱 무성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포장 도로이긴 하지만 고향집 마당까지 자동차 한 대는 아쉬운 대로 다닐 수 있는 길이 닦여져 있었다. 나는 자동차로 고향집 마당까지 거침없이 달려갔다.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했을 때 고향에 다녀온 것 같지가 않았다. 마을에서 외딴 집까지 가면서 보게 되는 산비탈의 기묘한 바위, 개울의 송사리떼 그리고 그늘진 산골짜기와 갈려지는 굽이길을 돌아설 때 느끼던 서늘한 한기 등에 대한 확인과 체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서울에서 회고하곤 하던 아름답고 정다운 추억이 묻어나는 고향 산천의 기운과 숨결을 거의 호흡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자동차 때문이었다. 자동차의 빠른 속도와 금속성의 차체가 곡진한 고향의 정취와 나와의 교감을 차단시켰던 것이다. 내가 유년기에 아련히 꿈꾸었던 자동차의 불빛이 집 앞까지 들어오는 것의 실현이 곧 나에게 고향의 산천과 대기에 살아 숨쉬는 수많은 생명과 생기를 앗아가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유년의 마을의 형세가 크게 변한 것도 기실은 자동차문화 때문이었다. 나는 자동차문명에 새삼 절망과 회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해의 시간이 지난 지금, 고향집에 자동차가 들어간다는 사실이 언젠가 내가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 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실감을 하게 한다. 추억 속의 고향은 무한히 정답고 소박하긴 하지만 돌아가서 생활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었다. 나의 몸은 이미 자동차 문명인으로 개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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