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밥은 안 해놨지만… 김경미<시인, 방송작가>.. 2003-11-04
90년대 초, 나는 주위 친구들에 비하면 비교적 일찍 운전을 시작했다. 일찍 시작했을 뿐더러 다른 데서는 거의 가져본 적이 없는 지나친 자신감까지 갖고서였다. 그 탓이었는지 운전이 거칠고 과격했다! 당시 일을 함께 하던 방송국 PD는 딱 한 번 내 차를 타고 가면서 옆자리에서 계속 앗! 읏! 훗! 갖은 소리를 다 토해내더니 그 뒤론 어딜 함께 갈 일만 생기면 `나 택시 탈래` 손부터 내젓곤 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때 왜 그랬을까.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어떤 좁고 위험한 길이든 겁도 없이 막무가내로 들어가고 올라가고 넘어갔다. 까짓 계단인들 못 올라가겠냐는 듯이. 하지만 이 년쯤만에 운전을 그만둔 이후론 정작 하지도 않는 운전이 점점 겁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꼭 그만큼씩 운전을 하는―`잘하는`도 아니고 `그냥` 하는― 이들이 더없이 용감하고 부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운전석에 앉은 이들이 번지점프에 성공한 이들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진해서 그만둔 운전이었고 무슨 사고를 냈던 것도 당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독립심하고 관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운전을 즐기고 잘하는 여성일수록 독립 심이 높다고 한다. 실제로 생각해보면 운전을 씩씩하게 하고 모르는 길도 잘 가던 그 시절에는 여러 모로 독립심이 정말 강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독립심이 약해지면서 운전에 대한 겁도 늘어난 것인지. 어쨌든 올해 들어 다시 운전이 하고 싶었다. 해야 할 일도 많았다. 그런데 막상 7, 8년만에 다시 운전을 하려고 나서니 방해물이 엄청나게 많았다. 무엇보다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아파트까지의 좁은 길 양편에 항상 빽빽이 주차중인 차들과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면서 항상 뒤로 옆으로 얽히는 차들, 그리고 마을버스 속에서 자주 보고 듣는 비난들. 특히 마을버스 속에서 아저씨들이 바깥의 여성 운전자들을 향해서 퍼붓는 비난들―저럴 거면 차를 갖고 다니지나 말지. 저 여자들 틀림없이 밥도 안 해놓고 살림도 엉망으로 해놓고 쓸데없이 나돌아다니는 걸 거야―은 항상 불편하고 불안했다. 하긴 하도 그래서 요즘은 차 뒤에다 아예 `밥 다해놨음` 하고 써붙이고 다니는 주부 운전자도 있다던가. 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고 또 내고싶을 만큼 운전에의 필요와 욕구가 간절했다. 그래서 지난 추석 연휴에는 드디어 7, 8년만에 처음으로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불광동의 큰집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명절 연휴라 차들이 드물 거라는 짐작과 옆자리의 남편만 믿고서였다. 아닌 게 아니라 도로에는 차들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시종일관 혼비백산이었다. 도대체 내가 한때 운전을, 그것도 그토록 자신있게 했었나 싶었다. 그러다 드디어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입구에서 마을버스와 마주친 순간 내 입에서는 저절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나 못해! 나 안 해!` 하지만 그래도 지금 난 확신해 마지 않는다. 올해는 첫눈을 운전석에 앉아 맞이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때로 시를 쓰다가, 혹은 하루치 방송원고 일을 끝내고 기지개를 켜다가 그대로 달려나가 노을지는 길을 음악을 들으며 달리기도 하리라는 것을. 아마도 차 뒷유리에 `밥은 안 해놨지만 나도 어쨌든 운전할 일이 있음!`이라고 써붙인 채.
황홀한 운전, 스스로 움직이는 차 유성호<문학평.. 2003-11-04
자동차가 정말로 귀하던 시절, 우리 집과 나란히 살고 있던 성철이네 아저씨는 어느 사장님 자동차를 운전하는 분이었다. 해가 다 지고 난 늦은 저녁, 그 분은 언제나 새까맣고 커다란 승용차를 몰고 귀가했다. 물론 그 분이 하루 종일 몰고 다녔을 그 차의 주인은 따로 있었겠지만, 우리들의 어린 눈에 그 자동차는 분명 그 분의 손길과 체온이 담긴 경이로운 존재였을 뿐이다. 아저씨는 아침이면 언제나 그 차를 정성스럽게 닦고 또 닦았다. 나는 그 때 저렇게 잘 닦아야 차가 스스로 움직이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정말 거짓말처럼 그 커다랗고 새까만 차는 스스로(自) 움직여(動) 골목을 빠져나가곤 했다. 그 귀하던 자동차가 이제는 흔하디 흔한 시대가 되었다. 대학 강사 시절인 1994년 가을, 나 같은 서생도 차를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4년여 동안 지갑에 꽂힌 채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던 `운전면허증`이 아마도 나보다 더 기뻤을 것이다. 지금 주행거리 20만km를 코앞에 두고 있는 내 차가 없었다면, 분명 나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경험과 행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내 엘란트라 94년형은 나의 `발`이요 `동반자`다. 그래서 이제는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의 촉감조차 여느 차와는 전혀 다른 우리만의 깊은 교감이 형성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남들은 폐차하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건네지만, 천만에, 나는 아무리 차가 흔해도 내 차가 숨을 멈출 때까지 다른 차를 기웃거리지 않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짝사랑처럼! 내 차가 나를 실어다준 가장 인상깊은 곳을 들라 하면, 미시령이나 해남 땅끝 혹은 정동진 같은 이미 잘 알려진 곳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자동차를 사던 그 해 가을, 초보운전의 몸으로 마음놓고 질주하던 남한강변을 잊을 수 없다. 그 때 나는 양평에 있는 한 대학에 출강하고 있었다. 강의 시작은 월요일 아침 8시 반이었다. 걱정하는 아내에게 딴청 피우면서, 나는 워커힐을 돌아 덕소를 지나 양평으로 향하는 코스로 처음 나의 차를 겁도 없이 몰았다. 아마 새벽 6시 반쯤이나 집을 나섰을 것이다. 그런데 워커힐을 돌아 덕소로 들어가던 그 코스는 그야말로 일망무제, 엄청난 속도로 차들이 달리는 도로였다. 비유컨대 우리나라의 `아우토반(Autobahn)`이었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과속운전의 묘미와 위험을 온몸으로 익힌 셈이다. 그런데 정작 나의 기억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그 아우토반의 속도감이 아니라, 그 다음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남한강변의 새벽 물안개다. 아침이 다 밝아 사방은 눈이 부시고, 그 햇살 사이로 무궁무진 피어오르는 막무가내의 물안개들…. 운전을 하면서 한눈 팔면 위험하다는 상식쯤은 그 황홀한 풍경 앞에서 번번이 무시되고 나의 눈은 글썽거렸다. 그렇게 매주 월요일, 나는 눈부시고도 위태로운 주행을 계속했다. 그 때 나는 이미 음주운전보다도, 졸음운전보다도, 무면허운전보다도, 과속운전보다도, `황홀운전`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내 차를 믿었다. 당시 TV에서 하던 외국영화에서, 주인을 그냥 목적지까지 데려다줌은 물론 총도 쏘고 말도 나누고 걱정까지 해주는 자동차가 있었다. 아마 그 이름이 `키트`였을 것이다. 그 황홀한 남한강변을 나의 차는 `스스로 움직이는` 키트가 되어 나를 안개에 젖게 하였다. 그 순간만은 내가 운전을 한 게 아니라 차가 `스스로 움직인` 것이었다. 정말 자동차(自動車)였다.
내 아내는 닭띠 -신중경<축구평론가, 소설가&.. 2003-11-04
내 아내는 닭띠다. 그것도‘삼복더위 닭띠`라 잊어먹기도 잘하고 졸기도 잘한다. 물론 미용실을 경영하다 보니 너무 힘든 탓도 있겠지만, 그런 아내를 바라볼 때마다 늘 미안하고 불쌍해서 안쓰럽기만 하다. 그런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생각이 일었는지 운전면허를 따야겠다고 하면서 학원에 등록했고, 떨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하더니 기어코 합격했다. 물론 그 날은 친구들까지 초청, 웃음꽃을 피워가며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도로주행을 하면서 불거져 나왔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아내는 당황해서 시동을 꺼먹기 일쑤였고, 기어도 제대로 못 넣어 엔진이 터질 지경이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질부터 벌컥 냈다. `좀 제대로 해! 이, 닭대가리야!` `뭐, 닭대가리라고? 자기는 전과자잖아?` `뭐야?` 아내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면서 내 약점을 파헤쳤고 두 번 다시 내게 배우려들지 않았다. 정나미가 뚝 떨어졌던 모양이다. 사실 아내의 말대로 나는 전과자다. 내가 자동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15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조기축구를 할 때라 자동차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원들끼리 점심을 먹다 갑자기 자동차 얘기가 나왔고, 결국 가장 늦게 면허를 따는 사람이 저녁을 사기로 약속하면서 역사는 시작되었다. 운전학원에 등록한 지 1주일 후, 필기시험을 치르고 전광판을 바라보니 모두가 80점을 넘었는데 내 수험번호 밑에만‘68’이라는 숫자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평소 남보다 머리가 좋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터라 분하고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결국 7전 8기 끝에 면허증을 받아들고 직원들에게 저녁을 대접하였으나 그때만큼은 정말 돈이 아깝지 않았다. 그 후 우리는 중고차를 한 대씩 구입했는데 내 차에서는 언제나 몬테네그로 악단이 연주하는‘방랑의 휘파람’이 흘러나왔고, 나는 또 마카로니 웨스턴의 주역배우인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가운데 친구들과 함께 눈동자가 풀어지도록 술을 마신 나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다 가로수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다행히 인사사고가 아니어서 면허가 취소되고 벌금으로 처리되었으나 또다시 자전거 신세가 되어야 했다. 명색이 공직자에다 축구심판이라는 사람이 정말 부끄럽고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 아픈 과거를 안고 있는 내가 뭐가 그리 잘났다고 착한 아내를 구박하였으니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그때 일로 아내는 녹색운전면허증을 가졌지만 아직도 운전을 하지 못한다. 아마 그때 일이 시멘트 자국으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초겨울의 문턱에서 거리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해본 일이다. ‘과거를 되돌아볼 수는 있어도 결코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내 진리를 망각한 채 말이다.
스타일 에세이 2003-11-04
현대사회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수단 이외의 많은 의미들을 갖고 있다. 자동차는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물건이 아니다. 이미 생활의 일부이자 이동수단으로써 큰 역할을 차지한 지도 오래되었다. 따라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으면 시선을 끌지 못하는 세상의 이치에 따라 이제 자동차는 십수 년 전의 컴퓨터처럼 신기하고 희귀한 물건이 아닌 삶의 기본적인 요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반면에 자동차는 개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표출해주는 중요한 도구다. 단순히 움직이기 위한 쇳덩어리가 아닌, 자기 생활의 그림 속에 절대로 빠트리기 싫은 요소인 셈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길 원하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최근 데뷔한 새차들이 지닌 컨셉트와 디자인을 보면 이런 경향은 더 쉽게 알 수 있다. 소수 매니아들을 위한 고성능 모델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자동차들이 `당신의 풍요롭고 윤택한 라이프 스타일을 위한 필수품`이란 보이지 않는 카피를 걸고, 소비자들이 좋아할 만한 편의장비와 디자인을 지녔음을 강조한다.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기를 원하는 사람들 중 라이프 스타일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지, 어떻게 표현하는지, 어떻게 입는지, 어떤 음악을 듣는지, 어디를 즐겨 찾는지, 어떤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지 등의 모든 것들이 다 자기 스타일의 표현도구들이지만 어떤 차를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야말로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유치한 과시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원했던 차를 구입한 뒤 스스로 얻는 강한 만족감을 맛본 이라면 더욱 동감할 것이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차를 선택할 때 고려하는 기준은 자신이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과 최대한 맞아떨어지는 이미지를 지녔는지 따져보는 것이다. 물론 차값, 배기량, 출력, 연비 등도 고려하겠지만 그보다는 자기와 닮아 거리에서 자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차를 가지고 싶을 것이다. 물론 자신만의 스타일이 없는 이라면 자동차에 의미와 애착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역시 몰개성을 추구하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닌 것이다. 애시즈 재즈를 들으며 하늘을 지붕 삼아 가로등이 펼쳐진 길게 뻗은 밤 도로의 바람을 맞으며 달리기를 원한다면 컨버터블을 선택할 것이다. 주위 사람들과 여럿이서 자전거를 몇 대 싣고 교외로 나가 숲내음 맡으며 마운틴바이크를 즐기고 싶다면 도심에서 운전하기 불편하더라도 큼지막한 밴을 원할 것이다. 차의 엔진소리가 어떤 음악보다 아름답게 들리며 그 엔진소리로 인해 피가 끓어 넘쳐 바로 운전석에 앉아 고단기어에서 rpm을 레드존으로 골인시키고 싶은 욕망을 주체할 수 없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하루 저녁보다 차가 더 좋은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스타일을 중요시한다면 그들에게 자기 차의 의미는 남다를 것이다. 누가 스타일 없이 살고싶어할까?
장애인과 자동차 에세이 2003-11-04
세계에 자랑할 만한 한국의 파란 가을하늘을 보면 가끔 모든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한 강변도로나 숲속길로 드라이브를 하며 싱그러운 가을바람에 젖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한다. 도시의 교통지옥 속에서 자동차를 원망하면서도 안식의 시간까지 자동차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이기심일까? 국가경제가 발달하면서 도시화가 날로 가속됨에 따라 우리 주변의 생활환경도 복잡해지고 있다. 급속히 증가하는 고층빌딩과 자동차, 정보·통신수단의 발달은 이러한 변화의 대표적인 현상이다. 특히 이미 1천300만 대를 육박하는 자동차 등록현황이 보여주듯이 농경사회와 달리 초스피드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교통수단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중요한 삶의 요소에서 소외되고 있는 대표적인 계층이 바로 장애인이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우리 장애인들은 일반인에 비해 교통수단 이용에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복지정책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온 장애인들의 생활환경은 높은 계단과 턱으로 가로막히고 이용이 불가능한 교통시설로 인해 자유로운 외출조차 허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자립과 자활의 의지를 지닌 장애인들이 경제적 부담을 무릅쓰고라도 대중교통의 대체수단으로 승용차를 구입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이런 때문이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불행한 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절단했지만 30대의 젊은 나이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고, 장애인에게는 운전면허가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에도 무면허 운전으로 사회활동을 감행했던 것은 차선책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후로 내가 장애인단체를 이끌면서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요구와 함께 목소리 높여 주장한 것이 당연히 자동차와 관련된 정책이었다. 장애인 운전면허제도를 도입하고 각종 세금의 면제, 저렴한 LPG 사용, 주차제도 등 승용차가 장애인의 발이 될 수 있도록 각계에 요구하고 호소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과 자동차의 인연이 이렇듯 좋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장애인구는 450만 명에 이르고 질병과 사고로 인한 후천적 장애인이 90%에 달하는데, 장애발생의 주요 원인이 자동차에 의한 교통사고다. 실제 작년만 하더라도 29만여 건의 교통사고로 1만 여 명이 사망하고 42만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부상자들 중의 대부분은 신체적 장애를 갖고 살아가야 한다. 자동차는 장애인에게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 자동차로 인해 장애인이 될 수도 있으니 기막힌 인연이다. 경제적 어려움, 정치적 불안정 등으로 체감하기 힘든 사실이지만 우리는 OECD에 가입한 선진국가에 살고 있다. 장애인이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벽을 없애고 자유롭고 편하게 이동하고 생활할 수 있게 하는 사회. 이것이 바로 선진복지사회이며,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이 윤택해질 수 있는 사회다. 이런 사회가 되려면 정부의 정책적인 노력도 중요하지만 장애인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여기는 사회 전체의 의식도 필요하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며 버스를 가로막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휠체어 장애인과 차가 막힌다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민, 장애인들을 격려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십년지기, 내 좋은 친구 에세이 2003-11-04
올 봄 국내 극장을 강타한 영화 `친구`에서 배우 유오성은 `친구가 한자(漢字)인줄 알았는데 우리말`이라며 장동건에게 친구의 뜻을 설명한다. 친구는 우리말이 아닌 한자인 것을 극중 유오성은 알지 못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친구는 `오래 두어도 좋은 벗`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에겐 아내를 평생의 좋은 벗으로 만들어준 정말 좋은 친구가 있다. 10년이 훌쩍 넘은 자동차가 바로 그 친구다. 십년지기면 오래두어 좋은 친구의 범주에 당당히 들어가리라. 친구인 자동차는 아내와 모든 추억을 함께 공유하고 있어 더욱 애착이 간다. 결혼 전 아내와 나는 주말마다 추억을 편집하듯 경치 좋은 곳, 가볼 만한 곳으로 소개된 곳들을 찾아 다녔다. 양수리의 아침 물안개를 맞으며 유혹 많은 양평을 지나 젊음의 괜한 자유가 느껴지는 춘천으로, 메밀꽃이 하얀 바다를 이룬다는 소식에 찾아갔다가 빈 물레방아간만 보고 돌아왔던 봉평, 아직도 있을까 궁금한 사랑의 메시지를 적어 장승 밑에 파묻어 놓고 왔던 평창 장승마을, 허브가 동화를 만드는 허브나라, 보기만 해도 신이 나는 설악산, 그리고 낭만을 찾는 연인들의 종착지인 동해안 정동진이 모습을 매년 화려하게 바꿔가는 것도 지켜봤다. 듣기에는 느긋하기 만할 것 같은 옛날 영화 필름 같은 추억 속에는 우리만의 조급함이 묻어있다. 어디를 가서든 늘 하루 안에 돌아와야 한다는 장인어른의 말씀을 거슬리지 않기 위해, 어머니 시대의 통금 5분 전처럼 손을 잡고 뛰지는 않았으나 달리는 자동차에 채찍질을 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동해안까지 가서 하루 안에 돌아오려니 어느 날은 18시간을 운전한 적도 있다. 아내를 평생 반려자로 만들기 위해 며칠 걸려 할 운전을 하루에 다 하는 고생을 기꺼이 감수했던 것이다. 그렇게 추억을 쌓아가던 어느 날 친구가 심술이 났는지 충청도 옥천 근처에서 멈춰버린 일이 있다. 겨울 7시, 낯선 지방에서의 겨울 어스름과 반갑지 않은 눈은 갈 길이 막막한 우리에게 불안감을 더해줬다. 처음으로 레커차에 매달려 덜컹거리는 자동차를 타보았다. 새로운 경험이지만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곤 고치는데 몇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라는 카센터 주인의 우울한 선고를 받았다. 밤을 넘기지 않겠다는 장인어른과의 약속을 못 지킬 지경이었다. 무작정 아내를 데리고 옥천 버스터미널로 갔다. 서울행 막차가 출발 5분을 남겨 놓고 있는데 버스표가 매진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머리 속에 한 자씩 타이핑되는 기분이었다. 그때 갑자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저, 죄송한디유. 이 표 환불 안되남유?` 초로의 한 아주머니가 표를 환불하러 온 것이었다. `네, 제가 살게요.` 표를 빼앗듯 받아든 나는 아내에게 표를 쥐어주고 등을 떠밀어 버스에 올라 좌석을 확인해 줬다. 나를 홀로 남겨두고 가는 데 대한 미안함과 걱정으로 아내의 큰 눈은 검은빛이 되었다. 아내는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나와 친구는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옥천을 출발했다. 그후로 장거리를 갈 때엔 친구의 상태부터 꼼꼼히 살피는 좋은 습관이 생겼다. 통계를 보니 국내에서의 자동차 수명은 평균 3.7년이라고 한다. 그 정도 세월을 함께 하면 친구라 할 수 있을까? 그에 비하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75살임을 감안할 때 10년 된 나의 자동차는 200살이 넘은 나이다. 비록 노구지만 친구는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이제 친구는 아내와의 추억을 머금은 채 지난해 태어난 10개월 된 아들녀석과 의 새로운 추억을 기다리고 있다. `오래 두어 좋은 벗, 친구여. 함께 있어주어 고마우이.`
교육 환경이 교통문화를 바꾼다 에세이 2003-11-04
`운전경력은 20년이 되지만 서울에서 자동차를 운전할 용기는 없습니다.` 한국에서 10여 년간 살다가 귀국한 한 캐나다 선교사의 얘기였다. 그의 말대로 좁은 도로에 너무 많은 사람과 자동차가 있어 운전하기 어려운 것이 과포화 상태로 변한 서울의 모습이다. 여유 있는 넓은 땅에서 살다가 온 외국인에게 서울은 쉬운 교통환경이 아니다. 그러나 비슷한 여건을 갖고 있는 외국의 다른 도시와 비교해도 서울의 교통환경은 최악의 조건임을 부인할 수 없다. 교통문제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서울의 교통문제를 얘기한다는 것이 주제 넘는 일이라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성급하게 교통환경 및 제도를 응급처방 하듯 수시로 뜯어고치기에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를 얘기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펜을 들어봤다. 우리는 지난 30여 년간 세계에서 경이적이다 할 만큼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어 왔다. 천연의 자원도 부족한 이 땅에서 이만큼 성장한 배경에는 훌륭한 인적 자원이 뒷받침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등 지상주의, 누구나 1등이 아니면, 일류대학이 아니면, 일류직업이 아니면 행세하지 못한다는 강박관념이 어렸을 때부터 지배해온 우리의 세태가 경제발전에 저간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되었지만, 반면에 많은 부작용도 양산시켰다. 흔히 열등감과 공격성은 비례하게 나타난다고 심리학자들은 얘기한다. 일류만을 성공의 척도로 생각하는 우리의 세태에서 낙오된 많은 이류, 삼류의 사람. 이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특히 어린 시절 단순히 성적에 따라 일류와 이류 혹은 삼류로 평가되어 성장하는 청소년들에게 주는 악영향은 일생의 상처로 남게 된다. 사회는 유기체다. 각각 맡은 역할이 있고 이런 각각의 역할이 유기적으로 작용해 사회를 움직인다. 만약 금(gold)이 온통 흙 대신 이 땅을 뒤덮고 있다면 인류가 존재할 수 있을까? 금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식물이 자라나고 동물들이 뛰어놀 수 있는 터전은 되지 못한다. 지도자가 있으면 참모가 있고 다시 그 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동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양한 역할을 충실하게 할 때 건전한 조직으로 성장하게 된다. 성적이 한 인간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적성에 걸맞는 역할을 찾아 노력하느냐가 중요한 점임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자족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도 있다. 아동기 때부터 각자의 적성을 잘 파악해 그에 맞는 지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가정, 학교, 사회의 교육이 병행될 때 자신감 있고 건실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 내 차를 추월했다고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착각해 공격적으로 운전하는 우리들의 열등감, 급한 일도 없으면서 다른 차보다는 빨리 가겠다고 내달리는 어이없는 우월감에서 오는 과속행위 등 기본적인 질서를 망각한 이 모든 행동이 어릴 적 열등감의 상처에서 기인된 무의식적 행위라면, 교통제도의 개선이나 단속보다는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교육을 통해 우리의 사회교육 환경을 바꿔보는 밑바탕 작업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삶과 추억의 원근법 에세이 2003-11-04
유년의 어느날, 나는 사촌형과 함께 해거름의 어둠에 잠겨가는 마을의 신작로를 거쳐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을 어귀 앞의 줄지어 서 있는 백양나무 행렬 사이로 난 신작로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희뿌연한 어둠에 묻힌 신작로 길에 큰 트럭의 불빛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 트럭의 숫자를 거듭 헤아려 보았다. 10여 대가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랜만에 놀러온 사촌형은 앞으로 너네 마을이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했다. 얼마 후 신작로에는 점차 검은색의 아스팔트가 깔렸다. 합승 버스가 달려도 흙먼지나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한 아이는 자기 형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마치 뱀이 지나가는 것 같더라며 침을 튀기기도 했다. 마을에 자동차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시내의 어느 큰 부잣집의 자동차가 마을의 한 잔치집 마당에 와서 정차해 있으면 아이들은 제각기 뭐라고 아는 체를 하며 그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들이 내심 부러웠다. 우리집은 마을 전체에서 찻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부터도 산으로 에워싸인 사잇길을 제법 굽이 돌아야 했다. 그곳까지는 자동차가 들어올 수 없었다. 나는 깊은 밤, 짐승들의 울음소리라도 들릴 때면, 우리 집 앞에도 자동차의 환한 불빛이 지나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했다. 몇 년 전에 나는 서울에서부터 자동차를 몰고 고향에 다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처럼 나의 고향도 많이 변했다. 내 유년기의 대부분의 어른들은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늙으시거나 돌아가셨고 젊은이들은 도회지로 떠나갔다. 물론 우리집 식구들도 일찍이 서울로 올라왔기에 고향집에는 낮선 사람이 산다. 마을의 형세도 많이 변했다. 산비탈로에도 도로가 생기고 전망이 좋은 곳에는 음식점들이 들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내 유년의 집으로 난 산길은 비교적 변화가 적었다. 오히려 그 전보다 더 고적했다. 왕래하던 재 넘어 뒷마을 사람들의 숫자가 현격히 줄었고 산림은 더욱 무성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포장 도로이긴 하지만 고향집 마당까지 자동차 한 대는 아쉬운 대로 다닐 수 있는 길이 닦여져 있었다. 나는 자동차로 고향집 마당까지 거침없이 달려갔다.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했을 때 고향에 다녀온 것 같지가 않았다. 마을에서 외딴 집까지 가면서 보게 되는 산비탈의 기묘한 바위, 개울의 송사리떼 그리고 그늘진 산골짜기와 갈려지는 굽이길을 돌아설 때 느끼던 서늘한 한기 등에 대한 확인과 체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서울에서 회고하곤 하던 아름답고 정다운 추억이 묻어나는 고향 산천의 기운과 숨결을 거의 호흡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자동차 때문이었다. 자동차의 빠른 속도와 금속성의 차체가 곡진한 고향의 정취와 나와의 교감을 차단시켰던 것이다. 내가 유년기에 아련히 꿈꾸었던 자동차의 불빛이 집 앞까지 들어오는 것의 실현이 곧 나에게 고향의 산천과 대기에 살아 숨쉬는 수많은 생명과 생기를 앗아가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유년의 마을의 형세가 크게 변한 것도 기실은 자동차문화 때문이었다. 나는 자동차문명에 새삼 절망과 회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해의 시간이 지난 지금, 고향집에 자동차가 들어간다는 사실이 언젠가 내가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 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실감을 하게 한다. 추억 속의 고향은 무한히 정답고 소박하긴 하지만 돌아가서 생활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었다. 나의 몸은 이미 자동차 문명인으로 개조된 것이다.
운전, 자신을 극복하는 시험대 에세이 2003-11-04
나는 운전면허가 없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저 인간, 분명히 음주운전 일삼다가 면허 취소당했을거야.`하지만 나는 정말로 면허가 없다. 면허를 따지 못한 것도 아니다. 애초부터 운전면허를 따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그래서 그 흔한 면허시험조차 본 적이 없다. 내가 이렇게 이상한 인간이 된 것은 선천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자전거조차 제대로 타지 못한다. 자전거에 올라 중심을 잡고 페달을 밟는 것까지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커브를 돌 때마다 나는 중심을 잃고 넘어진다. 그동안 수없이 도전했지만, 이상하게 커브를 도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자전거를 타다가 커브를 돌 일이 생기면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서 방향을 돌린 다음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우리나라처럼 길이 꼬불꼬불한 곳에서는 걸어가는 것보다 속도가 나지 않는다. 결국 나는 자전거 타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다. 자전거도 못타는데 자동차를 어떻게 몰 수 있을까란 생각이 운전에 대한 관심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 것 같다. 아내도 운전을 하지 못한다. 나와 다른 점은 운전면허는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내도 차를 몰 생각은 하지 않는다. 카레이싱 경기장 같은 곳에서 혼자 차를 몰라고 하면 즐겁게 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도로에서는 차를 몰지 못한다. 너무 겁이 많아서 차선변경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 부부지만 불편한 점은 없었다. 어디 갈 일이 생기면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고 다니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운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는 주말이면 반드시 애를 데리고 어딘가로 놀러간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우유병, 물, 기저귀를 챙기는 것이 힘들었다. 아이가 만 두 살이 되었을 때는 짐의 무게는 가벼워졌지만, 이번에는 애 자체가 무척 무거워졌다. 버스에서 내려서 조금 걸을라치면 `아빠, 힘들어`라며 안아달라고 보챈다. 15kg이 넘는 애를 안고 다니는 것은 중노동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차를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처음 내린 결론은 `택시를 타고 다니자`는 것이다. 멀리 놀러가는 일이 많기 때문에 택시비가 만만치 않게 느껴졌지만, 자동차를 사게 되면 발생하는 여러 가지 비용, 즉 할부금, 보험료, 기름값 등을 계산하면 차를 사는 것보다 필요할 때마다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싸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론은 이론인 것 같다. 우리는 놀러가면서 단 한 번도 택시를 타지 못했다. 당장 눈앞에서 남의 손으로 사라져버리는 거액의 현금을 도저히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부부는 요즘도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 놀러 다닌다. 아이가 되도록 많이 자기 발로 걷도록 갖은 방법으로 회유하고 설득하지만, 행락길의 절반 정도는 번갈아서 안고 다닌다.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는 아이의 몸무게에 피로를 느끼면서, 다시 한 번 결단을 내릴 때가 오고 있다는 예감이 든다. 아마 우리 부부는 조만간 차를 사게 될 것이고, 차로 놀러 다닐 것이다. 그런데 운전은 누가 하게 될까? 자전거도 못타는 나일까? 아니면 차선변경도 못하는 아내일까? 누가 먼저 자신을 극복하는지 스스로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넌 제발 운전하지 말아 줘 에세이 2003-11-04
내 일은 책상에 앉아 하는 것이라 돌아다니는 때가 그다지 없다. 그러므로 길 막히고 차값 비싼 데 굳이 차를 끌고 다닐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기를 쓰고` 차를 가지고 다니니 나는 남의 차를 얻어 타는 경우가 많아지고, 그 사람의 운전 모습을 관찰할 기회도 많아진다. 가끔은 특이한 모습도 눈에 들어오곤 한다. 영업 쪽 일을 하고 있어서 운전 시간이 긴 친구의 차 앞유리 한 구석에 작은 쪽지가 붙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네 자리 숫자만 여럿 적혀 있는 것이 전화번호 같지는 않아서 뭐냐고 물었더니 자동차 번호라는 대답이었다. 그 친구 설명이, 자주 다니는 길 중에서 몇 곳은 도로 구조나 다른 사정상 끼어들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 있는데, 그런 때 `죽어라 하고` 끼워주지 않은 자동차의 번호라는 말이었다. 구조가 구조인지라 입장이 바뀌어서 그 친구가 양보해 줘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 `블랙 리스트`의 자동차를 만나면 절대로 끼워주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한다는 이야기다. 평소 무던한 성격의 친구였던지라 그 집요함에 놀라기도 하고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 친구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신경써서 보지 않아서 그렇지, 비슷한 시간에 같은 도로에서 같은 차를 만나는 일은 드물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메모까지 해 두고 보복을 노리는 친구의 모습에 나는 끼어들려는 차가 있으면 선뜻 끼워주어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성격과는 판이한 한 후배의 운전에 조금 놀란 적도 있다. 소심한 편에 속하는 그 후배의 차를 타 보니, 앞차와 1m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바싹 따라가는 위험한 장난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앞차 운전자의 심리까지 파악해야 하는 `정밀한 놀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초보나 여성 운전자의 차는 절대 뒤따라가지 않는다든지, 잘 아는 길에서만 한다는 등 나름대로 안전을 위한 룰을 두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위험해 보여서 나는 지금도 되도록 그 후배의 차는 사양하고 있다. `준법형` 운전을 즐기는 친구도 있다. 속력이 숫자로 표시되는 디지털 계기반을 가진 기아 세피아를 모는데, 이 친구는 제한속도의 10% 초과는 과속으로 적발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항상 `제한속도+10%`의 속도로 차를 몬다. 시속 60km면 66으로, 시속 80km면 88이라는 식이다. 요즘 그 친구는 차를 바꿀 때가 됐는데, 새차 중에서는 디지털 속도계가 달린 자동차가 없다며 고민중이다. 제한속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정말로 정확하게 지키는 사람도 있다. 운전이 미숙해 그런 것이 아니라 시내든 고속도로든 제한속도 표지판에 써 있는 이상으로는 절대 운전하지 않는 사람을 알고 있다. 서울의 성수대교가 재개통된 직후, 다리 위 도로의 제한속도가 고작 시속 40km였던 시기(현재는 시속 60km)에 강바람에 기분 좀 내느라고 시속 45km로 달렸다는 것이 평생에 손꼽을 만한 속도위반이라고 한다. 가끔은 자신과 똑같이 준법속도로 달리는 차(주로 흰 장갑에 바싹 다가앉아 식은땀을 흘리며 운전하는 사람의 차)를 만나 나란히 달리는 즐거움을 맛보기도 한다는데, 그렇게 두 `준법 차`가 차선을 메우면 뒤쪽 차들 또한 준법을 강요당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래서 뒤쪽 운전자들이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급한 성격 탓이지 법을 지키고 있는 쪽의 탓은 아닐 것이다. 비현실적인 속도제한을 정해두고 단속에만 열을 올리는 경찰에 잘못이 있을지는 몰라도, 여하튼 제한속도 표지판이 거기 세워져 있다면 그것을 지켜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악법도 법이라고 했으니까. 이렇게 옹호를 하다 보니 드러나 버린 것 같아서 털어놓지만, 이상의 편집증적인 운전모습 중 제일 마지막은 나 자신의 이야기다. 덧붙이자면 나는 운전경력 7년에 이르지만 접촉 사고는커녕 4만 원짜리 딱지 딱 한 장 밖에 끊어본 적이 없다. 다만 내 차를 얻어 탄 친구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은 있다. `서울의 원활한 교통소통을 위해 넌 남의 차를 얻어 타고 다니는 게 좋겠어.`
나, 차 샀다 에세이 2003-11-04
어느 날 우리 집 둘째가 새차를 몰고 집에 당도했을 때, 축하를 해 주면서도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는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말수가 적은 편인데, 차를 가지고 다니면 길을 물어야 할 일이 여간 많은가 말이다. 그 자신이 자주 물음을 당하면 싫어하는 성미였다. 둘째는 초중고 대학까지 제가 뜻하는 대로 마치게 되었고, 중간에 군대생활을 할 때도 별로 어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제대하고 돌아와서도 마치 수련 모임에 다녀온 사람의 가벼운 행동거지였다. 운전면허를 따겠다고 했을 때도 염려했지만 마치 학점을 보태듯 단번에 취득했다. 학업도 그렇게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마쳤다. 외국어 연수차 외국에도 일 년쯤 다녀왔고, 골라서 대기업에 취직하더니 대리 승진도 다른 동료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필요한 업무도 개발하고 대처하는 듯 싶었고, 외국에 출장도 다녀왔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하는 일은 과단성이 아니라 무슨 일을 저지른 것만 같아 겁을 먹고는 했다. 그런 그가 퇴근길에 새차를 끌고 집에 들어섰다. 특별히 운전교습을 받은 게 없고 면허증이 나온 지도 꽤 오래 되었는지라 새차를 끌고 온 게 불안하기만 했다. 그나마 시내 지리도 익숙지 못한 편이었다. 어느 날은 시내 길을 잘 안다는 동료와 제 회사를 찾아간다는 게,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감으로 알고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왕십리에서 종로로 가는데 강남으로 가는 다리를 건넜다니 정 반대방향으로 달린 셈이다. 둘째는 한 동안 지리를 익히기 위해 열심인 것 같았다. 인터넷을 통해 뽑아낸 자료에는 여기저기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쳐놓았다. 미사리, 양평 등 카페촌을 비롯해 대개는 지리를 잘 알지 못해도 달릴 수 있는 코스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수도권은 전체 인구의 반이나 사는 넓은 지역인데 그게 그리 쉽게 정복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어느 날, 노래를 잘 해 사장으로부터 스카웃되어 귀염을 받으며 회사에 다니는 제 사촌이 둘째의 회사 근처에 갔다가 만났다고 아내한테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대강 엮어보면 이렇다. `며칠 전에 둘째 형 만나서 점심까지 얻어먹었는데 말씀 못 들으셨어요?` `못 들었다. 너희들끼리는 만나기도 하니?` `만나고 말고요. 대화가 통하는데요.` `대화가?` `그럼요.` `점심이라도 사주든?` `제가 좋아하는 피자를 사주었어요.` `그래 피자까지 먹으면서 대화를 했다는데 무슨 말을 했니?` `차를 샀다고 하던데요. 무슨 차예요?` `대화를 많이 했다면서, 무슨 찬지도 모르니?` `피자를 먹으러 가서 헤어질 때까지 형은 딱 한 마디밖에 안 했거든요.` `뭐라고?` `나, 차 샀다.` `그 한 마디 뿐이었단 말이지?` `네!` 둘째는 차를 뽑아온 지 며칠 뒤 제 길잡이 노릇을 할 내비게이터를 달았는데 그 말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 이야기를 하자면 피자 한 판은 더 먹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정치가와 조폭은 검은 차만 좋아한다? 에세이 2003-11-04
몇 년 전 장안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고위층과 조직 폭력배들이 모일 때 항상 검은색 세단이 줄지어 달리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필자가 유학하던 러시아에서도 마피아들이 모일 때는 예외 없이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줄을 이었다. 차종은 대부분 벤츠와 BMW, 볼보 등 내로라하는 수입차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 도로를 달리던 승용차는 대부분이 70년대 피아트를 라이센스 생산한 모델들이었다. 품질이나 성능 면에서 한국차와 비교해도 수준차이가 많이 나는 차들이었지만 그들은 전혀 불편함 없이 몰고 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 사람들 역시 자동차 선진국의 오너들처럼 자신의 자동차 수리는 자신이 직접 했는데, 이런 구식 차가 오히려 수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피아들이 타는 수입차와 서민들이 타는 러시아차의 성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많았다. 게다가 보이지 않아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의 신분이 어떠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한 번은 필자가 택시를 타고 시내를 달리던 중 벤츠 한 대가 우리 차를 추월해 지나쳤다. 아주 위험할 정도로, 거의 직각에 가깝게 차선을 바꾸며 내달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 같으면 상향등을 깜박이며 경적을 마구 울리겠지만 그때 택시 운전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뭐라 중얼중얼거릴 뿐. 그 이유를 물어 보았더니 택시 운전수의 대답은 두 가지로 요약되었다. 첫 번째는 그 차가 마피아 소유일 가능성이 크고, 둘째는 성능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에서 검은색 대형 세단은 성능 좋은 고급차보다는 위압감의 상징으로 비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필자는 세계 어디서나 `조직폭력배` 혹은 `마피아`의 상징은 검은색 고급 승용차란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옛날부터 거의 모든 관용차가 검정색이어서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조직 폭력배까지도 그 흉내를 낸다고 생각했는데, 러시아도 마찬가지라는데 흥미가 느껴졌다. 얼마 전에는 신문에서 정치인과 조직 폭력배의 공통점이 `검은색 승용차를 타고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사람`이란 글을 읽고, 옛 생각도 나고 해서 한참을 웃었다. 검은색이 나타내는 상징성은 대체 무엇일까? 요즘은 국산차의 색도 80년대와 비교해 보면 많이 다양해졌다. 95년 대우에서 처음 선보였던 빨간색 르망(그 이전에는 빨간색에 대한 규제가 있었다)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너무 예쁜 색상은 도로에서 단연 시선을 끌었고 외제차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형형색색의 차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다. `옷차림도 전략이다`라는 광고 카피처럼 자동차의 색도 그 사람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개성이 존중되는 현대사회에서 자동차의 색은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하지만 왜 정치가와 조직 폭력배들은 여전히 검은색만을 고집하는지! 그들도 다른 색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부드럽고 개성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저 그 무리에 속하면 당연히 같은 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신을 지키고, 개성을 존중한다면 이들도 조금은 멋진 집단으로 변화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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