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번지 없는 유목민의 나라 몽골 2008-08-06
몽골이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뉜 것은 사실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200여 년 동안 몽골에게 조공을 바쳐왔던 러시아는 나라가 강대해지자 몽골을 거쳐 남진하고, 이때 러시아와 청(淸)조는 몽골을 완충 경계 지역으로 삼았다. 청조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외몽골 지역의 몽골인은 독립을 선언하고 내몽골 지역까지 병합, 하나의 제국을 재건하려 했지만 결국 중국과 러시아의 압력으로 그 꿈이 좌절됐다. 이후 1971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붉은 혁명이 성공한 뒤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외몽골은 독립권 확보를 위해 중국과 러시아(백군, 반혁명 세력)의 지원을 받고 있는 몽골 활불 정부와의 싸움에서 승리, 반쪽의 독립국이 됐다. 그런 상황에서 1945년 중국을 대표하던 장제스 정부와 러시아의 스탈린은 대일본 전쟁을 위해 외몽골을 끌어들이고, 당시 대장정을 마치고 섬서 성 연안에 머무르고 있던 마오쩌둥은 일본의 점령지 내몽골을 이후 자치구로 인정할 것을 약속하게 된다. 이 약속은 1947년 5월 1일 지켜져 내몽골은 중국에서 첫 번째 자치구가 됐다. 하지만 외몽골은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독립정부를 구성, 당시까지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정부에서도 외몽골 지역을 건드릴 수 없었다. 양떼를 모는 모터사이클 중국은 무서운 나라다. 춘추전국시대 이전부터 북쪽 오랑캐 몽골에 그렇게 시달리다 진시황이 마침내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가을이면 몽골 기마병이 마술 장애물 넘듯 만리장성을 넘어와 한족이 추수한 곡식과 가축을 빼앗아 바리바리 가져갔다. 마침내 13세기에는 징기스칸의 몽골 기마병이 한족의 중국을 휩쓸어 원(元)나라를 세웠다. 오늘날 중국의 사가들은 1세기가 넘게 북쪽 오랑캐 몽골에 정복당한 엄연한 사실을 외세에 짓밟힌 치욕으로 보지 않고 내란으로 정권이 바뀐 것 뿐이라 말한다. 징기스칸도 중국의 영웅이라 치켜세운다. 이것은 몽골이 원래 중국의 일부라는 걸 태연스럽게 강조하는 것이다(동북공정이 겁나는 것도 이런 중국의 야욕 때문이다). 중국이 골치를 앓는 것은 티벳만이 아니다. 위구르 자치구와 내몽골에서도 끊임없이 지하 독립운동이 펼쳐지고 있지만 중국정부의 언론통제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독립한 몽골공화국이 중국 위에 고구마처럼 누워 있고 중국의 자치주인 내몽골은 몽골 남동쪽에 붙어 있다. 내몽골은 우리 남한의 열두 배가 넘는 드넓은 땅에 인구는 2,000만 명이 넘지만 몽골족보다는 중국 한족이 훨씬 많다. 중국의 이민정책으로 내몽골의 몽골인은 제 나라 땅에서도 이제 소수민족이 되어 버렸다. 천하를 호령하던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서글픈 신세가 되었다. 뉴 밀레니엄 2000년대가 밝기 전,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천 년간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징기스칸을 꼽았다. 13세기, 징기스칸은 어떻게 10여 만의 병사를 이끌고 지구의 6할을 정복할 수 있었는가? 징기스칸은 어떻게 모래알처럼 흩어진 유목민을 끌어 모아 알렉산더대왕, 나폴레옹, 히틀러가 차지했던 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넓은 땅을 정복할 수 있었는가? 그 해답은 말(馬)에서 찾을 수 있다. 몽골인은 4세만 되면 엄마로부터 말 타기를 배운다. 남녀 가리지 않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도 말 등에만 올라타면 쏜살같이 달린다. 700마리의 양떼는 물결처럼 초원에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린다. 양떼의 쏠림을 조율하는 것은 목동이다. 목동은 말을 타고 박차를 가하며 양떼를 몬다. 하지만 세월은 바뀌어 목동을 태우고 초원을 질주하던 말은 이제, 모터사이클로 대체되었다. 42세 우제중은 모터사이클에 걸터앉아 멋쩍게 웃는다. 말을 버리고 모터사이클로 초원을 누비는 것이 몽골인의 정체성을 내팽개친 것 같아 썩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효율성, 편리성, 기동성을 따져보면 말은 모터사이클의 적수가 될 수 없다. 특히나 모터사이클의 경적은 양떼를 모는 데 효과만점이다. 내몽골 치링거러 대초원은 해발 1,000m가 넘는 고원으로 황사의 주요 발원지이기도 하다. 급격하게 확산되는 초원 사막화의 주범은 양떼로 지목됐다. 양떼는 풀만 뜯어 먹는 것이 아니라 뿌리까지 캐먹어 초원을 황막하게 만든다. 때문에 구획정리로 양의 사육두수를 제한하는 중국 당국의 조치에 몽골인은 벌컥 화를 낸다. 초원을 갈아엎어 밭을 만드는 중국 한족들이야말로 사막을 확산시키는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가도 가도 끝없는 내몽골 치링거러 대초원. 초루멍 씨네 집이 떠들썩하다. 몽골의 이동주택 ‘파오’를 세우는 것이다. 몽골인들은 벽돌집에서 살지만 봄이 오면 마당에 파오를 세워 겨울이 올 때까지 그 안에서 생활한다. 동물의 본능처럼 그들의 조상들이 누워서 별을 쳐다보다 잠이 드는 파오의 유전인자가 초루멍 씨의 가슴에도 단단히 박혀 있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초루멍 씨네 집에 모였다. 파오를 세워 주기 위해 자발적으로 온 남정네들은 일당을 받지도 않고 품앗이나 두레처럼 일 빚을 갚는 일도 없다. 그저 여러 손을 합쳐 파오를 세우는 것이다. 먼저 사막에서 나는 버드나무로 만든 ‘하니’라 부르는 격자 벽을 빙 둘러친다. 젖었을 때 형태를 만들어 말리면 고정된다. 다음으로 대들보격인 ‘토니’를 한복판에 받쳐 들고 ‘론 톨로굴라’라 불리는 4개의 기둥을 세운다. 토니는 하늘창(天窓)으로 비가 올 땐 천막을 덮지만 맑은 날은 열어둬 누워서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다. 천창을 떠받쳐주는 론 톨로굴라는 용 기둥으로, 용이 하늘을 받쳐 주는 격이다. 파오는 유목민인 몽골인의 이동식 집이라 조립과 해체가 수월하지만 하늘창 홈에 용주 네 개를 박아 고정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후의 작업은 일사천리다. ‘우니’라 불리는 혁가레를 벽과 하늘창에 끼워 넣으면 골격이 완성된다. 천을 씌우는 일은 두 사람의 반 시간 일거리다. ‘파오’는 중국식 이름이고, 몽골어로는 ‘겔’이라 부른다. 치링거러 대초원으로 가는 길 안내 0505-557-8000
France PARIS 자유로운 영혼의 안식처 2008-08-06
파리에서의 여행은 ‘고독’이라는 테마와 어울린다. 파리의 하늘이 새파랗든 아니면 우울 모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파리의 중심가인 샬렛 거리를 걷거나 에펠탑, 샹젤리제로 대변되는 흔한 관광지를 배회하더라도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폼나게 깃을 올려 세우거나, 바람에 흩날리는 파리지엥의 스카프 향수향 너머로도 고독 모드 여행의 잔상은 묻어난다. 계절이 달리 중요한 것은 아니어서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에서의 파리 역시 잔뜩 파리스럽다. 파리에 대한 인상을 달리 언어로 규정짓기 힘들 듯, 여행자에게 파리는 오랜 시간 막연하게 꿈꿔 왔던 로망과도 같은 도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에서의 환상은 늘 타인과 공유된다. 누구나 레드 와인 한 잔에 낭만을 논하고, 세련된 패션에 눈을 지치게 하며, 고풍스런 건물들이 감싸고 있는 오래된 것에 현혹된다. 파리답지 못한, 회색빛 빌딩만 높게 솟은 다른 나라의 수도들은 억울하게 저급한 것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몽마르뜨 언덕 위에서 파리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망울은 그런 동질의식 때문인지 어느 정도 닮아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로떼르담 성당이 솟은 시떼 섬으로 연결되는 파리의 골목들을 칭송하고, 세느 강변의 다리 위를 서성거리며, 뤽상부르 공원에서의 달콤한 낮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파리를 오가는 수많은 이방인들의 배낭 안에는 딱딱한 바게뜨 빵이 소담스러운 상징처럼 꽂혀 있다. 파리를 공유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여기저기서 무의식적으로 이뤄진다. 인파를 피해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한적한 골목에 들어서거나 어둑한 조명의 낯선 카페를 기웃거리게 된다. 그 작은 소망을 가슴에 담고 메트로에 오른 뒤 소르본느 대학을 찾는다. 서울의 대학로나 홍대 앞을 기대했건만 무수한 호텔과 헌책방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우선 생뚱맞다. 대학정문 앞 노천카페는 샤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자주 들렀다는데 이미 여러 여행 책자에 소개된 곳이다. 카페 안에는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거나 대낮부터 생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시인이 된 폼으로 앉아 있는 관광객들이 빼곡하다. 대신 정문 옆을 지나치면 작은 공원이 있고 공원을 바라보고 한적한 바들이 있다. 그 공원의 얼룩진 계단에 앉아 책을 읽거나 어두침침한 바에 앉아 흐르는 음악소리에 몇몇 청춘들이 몸을 들썩인다. 바로 보고 싶었던 파리의 풍경이다. 골목길에서 맞는 또 다른 여유 파리에서의 여행은 반복과 함께 일종의 업그레이드 수순을 밟게 된다. 예를 들면 할인쿠폰을 들고 세느 강에서 바토무슈 유람선을 타는 것보다 퐁데자르 다리 난간에서 유람선을 발 밑으로 내려다보며 한가롭게 앉아 있는 것이 운치 있다. ‘예술의 다리’라는 별칭답게 나무로 바닥을 채운 퐁데자르는 세느 강의 다리 중 유일한 보행자 전용 다리인데 해질녘 그곳에 앉아 병에 담긴 와인을 기울이는 것으로 파리지앵 흉내를 내볼 수 있다. 이왕 흉내를 낸다면 시떼 섬에서 세인트 미첼 거리로 이어지는 노천카페에도 무심코 시간을 쪼개 볼 일이다. 볕이 드는 큰 도로에 늘어선 카페들의 테이블 좌석은 한 방향만 바라보고 겹겹이 늘어서 있다. 마치 파리의 정경과 지나치는 사람들을 하나의 동영상처럼 감상하는 구조다. 커피 값은 2유로. 1,600원대로 환율이 올랐지만 한국 돈 3,000원 정도의 값이다. 파리 지하철 가격이 1.5유로인 것을 감안하면 오후의 여유를 즐기는 것에 있어 이곳에서는 누구에게나 낮은 평등이 주어진다. 한국 카페의 커피 값이 5,000원을 넘나들고 지하철 요금의 5배에 가까운 것을 생각하면 커피 한 잔의 여유에 대한 차별은 오히려 한국이 냉혹하다. 마주하는 소통보다는 대범하게 바라보거나 그 시선을 받아들이는 파리지앵들에게는 그들만의 여유로움이 깃들어 있다. 땀을 흘리며 도시 구석구석을 훑어보지 않더라도 그렇게 다가오고 사라지는 장면들 속에서 그들은 파리를 호흡하고 즐긴다. 낯선 여행자라면 루브르 박물관의 고풍스런 작품을 꼼꼼히 둘러 봤다가도 늦은 오후가 되면 퐁삐두 센터 앞에 앉아 독특한 건물을 바라보며 딱딱한 바게뜨와 책을 벗삼는 모습이 몸에 익숙해지면 되는 것이다. 파리에 대한 시선은 외곽으로 흐르면서 더욱 고즈넉해진다.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향하는 단골 코스가 귀에 친숙하지만 고흐가 마지막 작품 활동을 하며 생을 마감한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들려 프랑스 시골마을의 한가로운 풍경에 취해 보는 것도 좋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향하는 열차는 파리에 사는 구성원들이 세련된 파리지앵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듬성듬성한 열차 자리는 촌스러운 시골 청년과 다양한 유색인종들로 채워져 있다. 이곳에서 가장 낯선 풍경은 몇 안 되는 동양인 관광객이다. 고흐는 이곳에서 70여 점의 마지막 작품을 남겼고 고흐의 생가는 1층이 아직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시청, 교회, 공동묘지가 그림의 배경이 됐으며 세잔, 도비니 등 인상파 화가들도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오베르에서는 옆집 아저씨 같은 골목길 아뜰리에의 주인과 수다를 떤 뒤 고흐의 동상이 놓여 있는 한적한 공원에 앉아 나른하게 낮잠을 즐겨도 좋다. 자신의 귀까지 자르고 자살을 선택한 천재 화가의 최후는 섬뜩하지만 머릿속에서 지운 채 말이다. 이 모든 것이 파리를 즐기는 또 하나의 여유이자 방법이다. TRAVEL TIP 파리는 열차 여행의 교두보와도 같다. 파리를 시작으로 호수도시 안시를 거쳐 지중해의 니스 해변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프랑스의 도시, 산,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가 높다. 이동 때는 TGV를 이용하는데 주말에는 일찌감치 만석이 되니 사전 좌석 예약은 필수다. 파리에서 오베르 쉬르 우아즈까지는 페르상 보몽행 기차를 탄 뒤 퐁트와즈행 열차로 갈아탄다. 파리시내의 이동은 메트로가 편리한데 10장 묶음, 1주일권 등 다양한 할인티켓이 있다. 패션에 관심이 많다면 상제리제 인근의 몽테뉴 거리에서 명품 숍들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라데팡스 지역의 신개선문 역시 파리의 새로운 단면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파리의 유명한 먹자골목은 시떼 섬에서 소르본느 대학으로 향하는 세인트 미첼 거리 뒤편에 조성돼 있다. 이보다는 어둑어둑하고 간판 작은 로컬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 잔에 식사를 즐겨도 좋을 듯. 대부분 점심시간에는 와인과 메인음식이 포함된 세트 메뉴를 싼 값에 내놓는다.
강릉 바다와 호수와 솔숲이 있는 영동의 중심 2008-08-06
잣나무 군락이 그늘 아래로 바람을 보낸다. 부러질지언정 눕지는 않아도 사람을 위해 머리를 조아려 길을 만들고 더위를 다스린다. 언젠가는 아름드리로 자랄 어린 것과 철갑 같던 비늘이 벌어지고 누렇게 빛이 샌 늙은 해송이 바람에 일렁이며 서로가 서로를 다독인다. 하늘을 찌를 듯 곧뻗은 장관은 아니지만 소박한 여유가 있다. 곧은 장대함과 기괴함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관동팔경의 제일경인 경포대는 그 앞을 지나가는 이는 누구나 올라 숨을 고른다. 우거진 노송 사이로 경포호와 그것을 닮은 하늘이 보인다. 예로부터 이곳에는 다섯 개의 달이 뜬다. 하늘의 달은 물론이요 바다와 호수에도 달이 뜬다. 술잔의 달은 가득 넘쳐흐르고, 임의 눈동자에 잠긴 달은 하늘보다 깊어 마지막으로 뜨는 달이다. 여유를 등지고 시간을 달리는 우리가 선조들의 풍류를 알 리 만무하지만 잠시나마 처마 밑에 앉아 하늘의 달을 가슴에 품어본다. 경포호를 따라 소금기 먹은 해송이 듬성듬성 서 있다. 물은 호수를 지나 한없이 동해로 흘러가지만 흐름은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다. 조용하지만 쉬지 않고, 깊지만 요란스럽지 않다. 마음도 그렇게 흘러가면 좋으련만 사람은 길도 아닌 길을 헤치며 너무도 요란하다. 잠들지 않은 밤이 경포항에 불을 밝힌다. 오직 바다의 시간만 존재할 뿐 세상의 시간 따윈 이곳에 없다. 뱃사람들은 검은 하늘과 바다를 뚫고 뱃머리를 움직인다. 땅만 보며 사는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길이다. 수십 년 새벽잠을 잊어 고기 비늘이 된 손들이 갑판 위로 그물을 당기고, 고깃배들은 바다의 일렁임을 타고 둥실둥실 어깨춤을 춘다. 어느새 별처럼 떨어지는 고깃배들의 불빛에 바다는 절반의 어둠과 절반의 빛이 된다. 경포대 해변은 아직 부드러운 모래를 온전히 느낄 만큼 여유롭다. 하지만 사람의 발자국이 흔적 위에 흔적을 남길 때쯤 해변은 축제의 나날이다. 바다의 흰 포말이 샴페인처럼 터지고 연인들의 탄성은 태양처럼 바다를 메운다. 여름이 끝나기까지 객들의 축제는 식을 줄 모르지만 바다는 쉽게 차가움을 잃지 않고 매일 밤 열기를 잠재운다. 7번 국도를 따르는 길은 하늘이 바다로 풀려 들어간 듯 온통 쪽빛이다. 이곳 토박이야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지만 객은 모든 것이 감탄이다. 바다가 물 비늘을 일으키면 머리를 어지럽히던 마음의 편린들이 이내 사라진다. 이 바다를, 이 하늘을, 이 바람을 그리고 여기에 선 오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신을 채 갈아 신지 않고 어느새 발을 담근 여인은 한동안 등대처럼 바다만 바라본다. Travel Tip 강릉에는 7번 국도를 타는 두 가지 매력적인 드라이브 코스가 있다. 금진항에서 심곡포구에 이르는 ‘헌화로’가 첫 번째 코스. 길이 6km의 헌화로는 강릉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신라 향가 ‘헌화가’의 배경이 된 곳이다. 해안도로변에 있는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룬다. 두 번째 정동진에서 주문진 방향으로 가는 길은 해안선과 철길이 마주한 도로로 이국의 낭만을 느낄 수 있다. 강릉에는 싱싱한 회와 초당순두부가 별미다. 특히 강릉 경포대 부근의 초당마을에서 만들어지는 초당두부는 강릉의 대표적인 음식. 두부를 굳히는 데 쓰는 간수나 화학 응고제를 쓰지 않고 맑은 강릉 앞바다 물로만 만들어 맛이 깔끔하고 부드럽다. 취재차 BMW 335i 컨버터블, 직렬 6기통 트윈 터보 3.0L 306마력 엔진, 8,990만 원, 080-269-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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