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과거의 상처를 성장의 밑거름으로 - 체코 2008-10-13
체코 프라하 거리를 걷다 보면 베트남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베트남도 이제 해외여행 붐이 일어나 이 먼 곳까지 활개치고 다니는구나’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1960년대 중반, 인도차이나 반도가 베트남 전쟁으로 불을 뿜을 때 미국을 대적해 싸우던 월맹과 베트콩 뒤엔 소련이 버티고 있었다. 그 당시 다른 동구 국가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압력으로 무기를 제조해서 월맹으로 보냈다. 무상은 아니었고 차관 형식이었으니 외상 장사를 한 셈이다. 1975년, 마침내 월남이 패망하자 미국은 시궁창에서 발을 빼 제 나라로 돌아가고 월맹은 승리의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러자 체코슬로바키아는 빚 독촉을 시작했다. 하지만 월맹은 승전은 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국고는 땡전 한 푼 없이 비어 있어 월맹은 인력송출이라는 결제수단을 제시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양해를 받았다. 당시 동구의 여러 소련위성국 가운데서도 체코슬로바키아는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다.하나의 국기를 사용한 체코와 슬로바키아체코슬로바키아는 특히 기계 제작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많은 공장이 활발하게 돌아갔다. 일손이 모자라던 차에 월맹으로부터 3만 명의 인력을 공급받아 3D 업종에 밀어 넣었다. 월맹에서는 지원자가 넘쳐났다. 월급의 반 이상을 국가에 바쳐 채무 변제에 충당했지만 월맹 청년들에게는 인생을 바꿀 호기였다. 그들은 유럽이라는 신천지에서 열심히 일해 월맹은 국가 채무를 모두 갚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3D 업종의 갑작스런 공백을 우려해 그들에게 영주권을 주어 붙잡았다. 지금 체코에는 6만 명의 베트남인들(주로 하노이쪽 사람)이 살고 있고, 여러 분야에서 뿌리를 내려 젊은 월남인들은 패션도 산뜻하고 골프장에서 여유 있게 라운딩하는 모습도 보인다. 중국의 대표 영화감독 ‘장이모’가 연출한 화려한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이 끝나자 세계의 이목은 ‘누가 첫 금메달을 목에 걸까’에 쏠렸다. 지난 8월 9일, 베이징사격관에서 여자 10m 공기소총에서 올림픽 신기록이 터졌다. 첫 금메달의 주인공은 체코의 카트리나 에몬스. 그녀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격 선수들이 사용한 총은 모두 체코제였다. 이는 월남전에 체코가 무기를 수출한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체코의 기계 공업이 얼마나 발달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일본에서 들여온 차가 가뭄에 콩 나듯이 돌아다니고 일본인이 차린 자동차 수리점이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의 효시일 때인 1920년대, 체코는 벌써 완성차를 생산해 냈다. 슈코다(SKODA)라는 브랜드로 생산된 자동차가 바로 그것. 이 차는 상당한 인기를 얻어 냉전시대 땐 공산권에 대량 수출되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슈코다는 인기모델로 출고되어 지구촌 곳곳을 누빈다. 슈코다의 주식은 폭스바겐으로 넘어갔지만 슈코다는 여전히 체코차다. 슈코다 옥타비아(1.8L&2.0L)는 폭스바겐 파사트, 슈코다 파비아(1.3L&1.5L)는 폭스바겐 골프와 엔진이 같다. 체코에서는 자동차가 무척 비싸다. 우리나라에서 6,000만 원대인 아우디 A6(2.0L)가 체코에서는 9,000만 원이 넘는다. 우리의 현대가 기계공업이 꽃피는 나라를 외면할 리가 없다. 현대는 체코의 동북쪽, 오스트라바에 공장을 짓고 있다. 오는 11월이면 i30을 주력으로 몇 가지 모델을 생산 출시할 예정이다. 옆 나라 슬로바키아에는 기아자동차 공장이 활발하게 돌아간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원래 인종도 다른 이웃나라였다. 1차대전에 휩쓸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게르만에 혼쭐이 난 미국이 게르만 인접국가인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를 통합, 힘을 키워야 게르만이 쉽게 넘보지 못할 거라고 설득했다. 마침내 1918년 두 나라는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이름 밑에 프라하를 수도로 한 나라가 되었다. 냉전시대를 거쳐 소련이 와해되고 동구의 위성국가들이 소련으로부터 해방되던 1990년대 초, 체코슬로바키아도 민중 봉기로 총성 한 번 없이 공산당 지배에서 벗어났다. 소위 ‘벨벳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1차대전 후 반강제적으로 통합했던 나라를 원위치로 돌려놓자는 데 양쪽의 의견이 일치, 한 나라 국기 밑에 있던 두 나라는 1993년 체코 공화국(CZECH REPUBLICS)과 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체코는 냉전시대, 소련의 지배 아래 있던 잃어버린 50년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그 세월, 자본주의 체제하에 국가가 발전했다면 세계의 부국대열에 진입했을 거라는 아쉬움 때문이다. 체코의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뒷걸음치는 우리와는 달리 전력질주를 하고 있다. 땅은 남한보다 조금 좁고 인구는 우리나라의 4분의 1도 안 되는 이 맹랑한 나라는 실업률 제로의 완전 고용상태다.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가득률 높은 관광사업이다. 비공식 통계이지만 연간 1억 명이 넘는 관광객이 달러를 뿌리고 다닌다. 프라하는 이웃나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와 극명하게 비교된다. 폴란드는 1939년 침공하는 독일군에 격렬하게 맞섰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일찌감치 역부족을 간파, 두 손을 들어버렸다. 고색창연하던 바르샤바는 초토화되었고 프라하는 가로등 하나 넘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되었다. 오늘날 달러 지갑은 바르샤바가 아닌 프라하에서 열린다. 누가 프라하는 겁쟁이였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체코 프라하까지는 체코항공과 대한항공의 직항 비행기가 주 4편 운항한다.
칠산 바다에 소금꽃 피면 - 영광 2008-10-12
밤마다 조기떼들의 울음소리가 자는 머리맡까지 들리던 때가 있었다. 조기가 어찌나 많은지 어부들은 조기가 아닌 ‘돈을 실으러 간다’며 허풍 아닌 허풍을 떨었던 때다. 성대한 조기 파시가 열리던 법성포는 밤마다 어부들의 술판에 불야성을 이루고 각시들의 노랫가락은 포구의 비린내와 섞여 춤을 추었다. 그렇듯 씨알이 많던 조기가 지금은 어디로 사라지고 어부의 한숨은 그늘처럼 늘어진 지 오래다. 과거의 영광이 희미하게 기억되는 쓸쓸한 바닷가, 법성포의 그날은 다시 못 올 축제인가…….나체를 드러낸 모래톱 위로 해수(海水)에 잠겨 있던 밑바닥이 드러난다. 자신은 끝까지 보일 수 없었던 속내를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내보일 때면 현실은 초라해진다. 허나 때로는 극명하게 마주하는 현실이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하니 물이 빠지고 헐벗은 갯벌이 그렇다. 질퍽한 갯벌이 늙고 보잘것없는 어머니의 품처럼 맥없이 가슴 시리다.조선 강항(姜沆) 선생의 기백만큼 곧고 위용스런 홍살문이 내산서원을 지키고 서 있다. 고택의 묵은 목향이 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질이고, 빛바랜 툇마루 끝으로 입신양명을 꿈꾸던 선비들의 낭랑한 글소리가 들릴 듯하다. 안뜰의 빛은 맑고 솔잎의 흔들림이 청명하니 잠시 세월을 잊은 길손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한때다.가을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논이다. 벼 익는 소리는 오감을 동원해야 비로소 들린다. 소슬바람의 스침은 그 소리마저 푸르고 빛의 흐름은 찬란하다 못해 극적이다. 풀벌레의 울음은 하나가 아니고, 벼잎의 서걱거림도 한 소리가 아니다.       자연은 이렇게 인간에게 듣는 법을 가르친다. 발아래 떨어진 햇살 한 조각이 가을처럼 노랗게 물이 든다.짓뭉개진 둑길 옆 무채색 수면 위로 흰 꽃이 폈다. 그 꽃이 쌓이니 소금산이다. 점점 쇠락해 가는 염전은 설 자리를 잃어가며 어느덧 천덕꾸러기 신세. 한 시인은 염전을 두고 갯바람과 쓰라린 뙤약볕을 인내하며 소금을 잉태하는 ‘자궁’과 같은 존재라 했다.               그래서 소금의 맛은 하늘이 결정한다 했던가……. 하늘과 바다에 믿음을 둔 순박한 염부의 어깨는 오늘도 산파의 역할을 묵묵히 짊어진다.누구든 한번쯤은 세상을 내동댕이치고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휘청대듯 달리다 보면 마음을 위로하는 것들을 만나게 된다. 백수해안도로의 길이 그렇다. 이런 것을 눈에 담으려고 여기까지 왔던가……. 해무(海霧), 파도의 출렁임, 해당화 향기, 모든 것이 허기진 마음을 달래기 충분하다. 운이 좋아 낙조라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여행은 낭비일 터.Travel Tip전남 영광 가는 길은 서해안고속도로가 가장 빠르다. 서울에서 영광IC까지는 약 3시간. 영광IC를 나와 22번 국도를 타고 5분쯤 달리면 영광읍이 나온다. 백암리에서 법성포를 잇는 백수해안도로(77번 국도)는 탁 트인 바다와 완만한 해안선이 가히 환상적. 중간지점에 있는 동백마을은 영화 ‘마파도’의 배경으로 영화 속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염산면 두우리에는 바닷물이 빠지면 약 4km를 자동차로 달릴 수 있는 갯벌이 있다. 바닷물이 배어 있는 곳을 호미로 파면 백합과 맛조개 등을 채취할 수 있다. 영광 하면 역시 굴비다. 법성포항 근처엔 유명한 굴비정식집이 많은데, 1인분 1만5,000원이면 수라상 부럽지 않은 상차림을 맛볼 수 있다. 취재차 BMW X6, 직렬 6기통 CRDi 디젤 3.0L 235마력 엔진, 9,390만 원, 080-269-2200
골퍼와 여행자의 천국 - OKINAWA 2008-10-11
가즈토시가 청이의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청이는 일본인들과 달리 앞이마를 면도하지 않은 채 뒤로 넘겨 붙들어 맨 가즈토시의 상투머리 동곳을 뽑고 매듭을 풀었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가즈토시가 물속에서 청이의 가슴께를 어루만지고 무릎에서 허벅지 아래로 하여 둔부를 두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얼굴을 기울여 청이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중략>…… 청이가 말했다.“방으로 가셔요. 너무 더워요.” 황석영의 소설 ‘심청’의 일부분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심청은 황석영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그는 소설에서 근세판 심청의 파란만장한 삶의 행간에 이부자리 얘기를 질펀하게 쏟아낸다.구한말 제물포에서 중국 상인들한테 팔려간 15살의 심청은 인당수의 제물이 되는 대신에 중국 난징으로 끌려가 부호의 첩실이 되어 유곽으로 술집으로 떠도는 화류(花柳) 오디세이의 서막을 연다. 난징에서 진장으로, 대만으로, 싱가포르로 떠돌다가 배를 타고 류큐까지 왔을 때 제물포를 떠난 지 10년이 흘러 그녀 나이 스물다섯이 된다. 앞의 인용부분은 그녀가 나하에 차린 술집 ‘용궁’에서 수심에 가득 찬 왕족 가즈토시를 만나 밤을 보내는 장면이다.파란만장한 오키나와의 역사류큐는 지금의 오키나와로, 소설 속 심청이 류큐에 흘러들어갔을 때는 이미 일본이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있을 때였다. 때문에 류큐의 왕족인 가즈토시는 답답한 가슴에 술만 퍼부어 댈 수밖에.사쓰마 번의 시마즈 다이묘가 바쿠후(幕府)로부터 류큐 침공 허가를 받은 것은 200여 년 전이다. 철포와 장창으로 무장한 병력 삼천 명이 전선 1천여 척에 나누어 타고 가고시마의 야마가와 항에서부터 서남쪽으로 연이어진 섬의 길을 따라서 출전했다. 그들은 아마미 제도를 차례로 휩쓸고, 출정한 지 한 달도 못 되는 같은 해 사월 초하루에 우치나의 나하에 상륙하여 슈리성을 점령해버렸다.류큐에는 궁성을 지키는 군사 수백이 의례에나 쓰는 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쇼네이(尙寧) 왕은 화친을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류큐의 왕과 사족들을 사츠마를 거쳐 에도(도쿄까지 연행해 갔다. 왕과 대신들은 에도에서 2년 반 동안 잡혀 있어야 했고 쇼네이 왕과 중신들 모두가 사츠마 번에 종속되기를 서약한다는 내용의 기청문에 서명을 하고서야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의 통치 지역이던 아마미 제도를 직할영지로 선포했고, 우치나를 오키나와로 바꾸고는 남쪽 섬들은 쇼네이 왕의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지행목록(知行目錄)을 내려서 번의 다이묘가 토지를 가신에게 내려주는 형식을 취했다. 그리고는 류큐로 하여금 겉으로는 형식적인 왕국을 유지하도록 했다. 그것은 중국과의 조공 무역을 유지시키기 위해서였다.오키나와는 역사의 바람 따라 이리저리 휩쓸렸다. 류큐 왕국의 잔상은 일본의 그늘에서 점차 빛이 바래졌다. 그리고 마침내 2차 대전의 패전국이 된 일본은 오키나와를 미국에 넘긴다. 지금은 오키나와가 다시 일본 영토가 되었지만 오키나와 사람들 가슴 속엔 류큐 왕국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고, 미군들은 아직까지 오키나와 땅의 10%를 기지로 사용하고 있다.자신들만의 문화를 이어가는 오키나와오키나와 사람이 동경에 가면 “일본말을 현지인처럼 잘 하네요”라는 말을 곧잘 듣는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 국적으로 태어나 일본 이름을 얻어 일본어를 들으며 자라났지만 그들의 모습은 일본 본토인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가무잡잡한 동남아 사람에 가깝다.오키나와 문화의 뿌리는 일본 본토보다 가까운 중국에 치우쳐 있다. 오키나와의 수많은 섬을 끌어 모아도 경상남북도보다 작고 인구는 150만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드넓은 북해도가 완전히 일본 문화에 녹아들어 원주민인 아이누 족의 뿌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데 비해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 문화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들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다.자신들만의 문화를 지키고 있는 오키나와에는 볼거리가 수두룩하다. 류큐 왕조 시대의 슈리성을 비롯해 300여 채의 유곽에 3천 명의 아름다운 기녀들이 있었다는 유곽터는 지금도 요정과 클럽이 줄을 잇고 있다. 지금의 유곽터는 아름다운 기녀들 대신 늘씬한 아가씨들이 헤픈 웃음을 날리는 곳이 되었다. 오키나와 본섬 북부 서해안 모토부쵸에 자리 잡은 해양박람회 공원의 쓰라우미 수족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7천500톤으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수족관은 직사광선이 들어오게 설계되어 산호초가 살아 있다. 바다 그대로인 셈이다. 세계적 희귀종인 거대한 고래상어와 농구코트만한 쥐가오리가 떼 지어 유영하는 모습은 대장관이다. 여행하기도 골프 하기도 좋은 철오키나와엔 16개의 골프코스가 흩어져 있다. 좋은 골프 코스를 찾아갈 수 있는 베이스캠프로는 전일본항공(ANA)이 운영하는 만자비치호텔이 안성맞춤이다. 오키나와 최대이자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이 리조트 호텔은 수많은 놀이시설이 있어 가족들을 호텔에 떨어뜨려 놓고 골프코스로 내빼도 불평을 들을 일이 전혀 없어 좋다.해양 박람회 공원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아라시야마 GC는 울창한 아열대 우림에 둘러싸인 전장 6천930야드의 챔피언 코스다. 아라시야마 GC는 남성적 코스 설계로 유명한 아라이 쓰요시의 작품으로 구릉지형을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아라시야마 GC의 코스는 페어웨이가 험악한 계곡을 건너뛰고, 숨막히는 산허리를 돌다가 널찍하고 평탄한 개활지를 지나며 골퍼의 가슴을 쓸어내게 하는가 하면 갑자기 워터 해저드가 앞을 가로막는 등 난이도 템포가 절묘하다. 페어웨이, 그린, 벙커 모두가 최상이다. 모든 홀이 원 그린이지만 특이하게도 파3, 4번 홀은 그린이 두 개다. 시그니처 홀인 파 4천 411야드 12번 홀은 드라이브샷은 워터 해저드를 끼고 내려갔다가 세컨드샷은 물을 건너며 올라가야 하는 롤러코스터 홀이다. 아라시야마 GC는 베이스캠프인 만자비치 호텔에서 40분이 걸리지만 현대적 골프 코스인 부세나 GC는 10분 거리로 가까워 골퍼들이 많이 찾는 곳 중 하나다. 거의 매홀 코발트색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타테라스 GC도 10분 거리에 있다. 오키나와는 그야말로 골퍼에게도 여행객에게도 천국인 곳이다.
청평에서 만나는 프랑스 전원 마을 PetiteFranc.. 2008-09-14
“여기 우리나라 맞아?”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이런 곳이 발견된다. 이국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새로움을 찾아 떠난 나그네를 들뜨게 하는 것. 청평댐에서 남이섬 방향으로 10km쯤 가다 보면 이런 곳이 있다. 하얀 집들이 언덕 위로 옹기종기 모여 있어 마치 지중해 연안의 어느 마을 같기도 하고, 알프스 산록의 전원 마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기도 한 프랑스 문화마을, 바로 ‘쁘띠프랑스’다. 프랑스의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 성문처럼 생긴 ‘쁘띠프랑스’의 입구를 지나면 바로 원형 야외무대가 나온다. 야외무대는 팬터마임이나 악기 연주 같은 작은 공연이 열리는 곳으로, 공연이 없는 시간에는 잠시 휴식하기 좋다. 이곳을 중심으로 언덕을 따라 세워진 건물들은 영락없이 프랑스의 한 마을이다. 어느 건물이건 청평호를 향해 창이 나 있고, 주택과 주택 사이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계단과 계단이 이어진다. 건물 가운데 유독 나이가 짙어 보이는 건물은 ‘프랑스 주택전시관’이다. 오래된 목재와 기와, 벽 등이 눈길을 끄는데, 150~200년쯤 된 프랑스 고택을 고스란히 옮겨다 재건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프랑스 가정에서 쓰던 가구와 소품, 의류 등이 전시되어 있어 마치 프랑스인이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고택 왼쪽으로 연결된 건물은 허브와 아로마를 체험하는 곳으로 2층으로 올라가면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며 시음을 할 수 있다. 주택전시관 오른편의 작은 건물은 갤러리로, 지금은 개장 기념으로 프랑스의 상징인 ‘닭’에 관한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갤러리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면 전망대가 나온다. 마을 전경이 한눈에 보이고 그 앞으로 호명산과 청평호수가 펼쳐져 가슴까지 상쾌해진다. 전망대로 가는 길에는 야생화가 잔뜩 피어 있어 이만한 운치가 없다. 쁘띠프랑스의 핵심은 바로 ‘생텍쥐페리 기념관’이다. 1층부터 3층까지 전 층을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1층은 생텍쥐페리의 탄생과 죽음, 성장기와 가족 등에 관한 사진과 패널이 전시되어 있어 그의 생전 삶을 엿볼 수 있다. 2층은 생텍쥐페리의 작품관으로 1943년 출간된 ‘어린왕자’의 영어 초판본과 그의 그림, 자필 원고 등이 전시돼 있다. 3층에는 생텍쥐페리의 영상자료와 어린왕자에 관련된 뮤지컬 및 영화 자료들이 보관돼 있다. 한눈에 보아도 규모가 큰 쁘띠프랑스의 건물은 모두 1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몇 개를 제외하면 대부분 1층은 전시 및 체험시설로, 2층 이상은 숙박을 위한 방으로 꾸며져 있다. 숙박실은 모두 34개로 최대 200여 명까지 수용할 수 있어 학교 단체 수련회나 MT 장소로도 그만이다. 똑같은 구조의 방이 하나도 없는 것이 인상적이다. 찾아가는 길/ 미사리를 지나 팔당대교를 건넌다. 양평 방향으로 5개의 터널을 지난 후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의 조안면 방향 도로로 진입한다. 구 양수대교 앞에서 왼쪽방향으로 직진. 금남리를 지나 청평댐 방향으로 75번 국도를 타고 10km를 달리면 프랑스 문화마을 ‘쁘띠프랑스’가 나온다. 쁘띠프랑스 (031)584-8200 www.petitefrance.kr
중국의 대제국 꿈에 갇힌 소수민족 위구르 2008-09-14
올림픽을 전후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곳이 티벳이다. 성화 봉송 길에 티벳 독립을 외치며 성화를 끄려는 사람들은 티벳뿐만이 아니라 티벳에 동조하는 외국인도 부지기수였다. 지구촌 방방곡곡에 티벳은 그들의 독립의지를 인상 깊게 심어놓았다. 중국의 골칫거리는 티벳만이 아니다. 중국 서북부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도 티벳 못지않은 독립 열기로 중국에 저항하고 있다. 티벳 위에 붙어 있는 위구르 자치구의 지하 독립단체는 티벳과의 연계 움직임마저 보여 중국 공안당국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위구르 자치구의 지하 독립운동은 중국 당국에 의해 언론에 철저히 통제되어 외부에 노출되지 않다가 인터넷에 의해 하나 둘 들통이 나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서만도 수도인 우루무치에서 지난 1월 독립운동원 두 명이 사살당하고, 3월 초엔 중국 남방 항공 폭파 시도가 적발되었다. 또 3월 하순엔 허톈 시에서 대규모 군중시위가 열렸고 서북부 지역에서는 독립운동원 51명이 체포되었다. 올림픽이 임박한 7월엔 우루무치와 북경에서 4차례의 테러가 있었으며, 8월 4일엔 카스에서 폭탄 테러로 중국 무장경찰 16명이 죽고 16명이 부상당해 세계의 이목이 티벳에서 위구르 자치구로 옮겨졌다. 지하 단체들의 지속적 독립 투쟁 티벳과 위구르 자치구의 독립 투쟁 양상은 판이한 면이 두 가지다. 첫째, 티벳엔 비록 인도에 망명 중이긴 하지만 ‘달라이 라마’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는 반면 위구르 자치구엔 전력을 응집시킬 지도자가 없다. 분산된 많은 지하 독립단체들은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아 저항의지를 바깥세상에 알릴 수 있는 목소리가 약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위구르가 티벳보다 훨씬 유리한 면으로, 티벳 밖의 티벳인들은 대부분 중국 영토 안에 있어 중국의 통제를 받아 티벳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되지 못하지만 1,700만 위구르 자치구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위구르족은 중국이 통제할 수 없는 접경한 외국 즉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 거주하고 있어 안팎 연계 투쟁이 가능하다. 신장 위구르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지하 단체들은 이슬람 국가인 주변국에 거주하는 동족들과 연계해 국경 주변 산악지역에 은신하며 세력을 키워 끊임없이 중국정부를 위협해 왔다. 250만 명에 불과한 티벳족이 인근 쓰촨, 간쑤, 칭하이 성 등에 분산 거주하는 데 비해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대부분 밀집 거주하는 위구르족은 이슬람을 믿으며 단결력도 강하다. 중앙아시아의 회교권 국가들의 이름은 모두가 ‘스탄’으로 끝난다. ‘스탄’은 ‘땅’이란 뜻이다. ‘키르기스스탄’은 ‘키르기스인들의 땅’이란 뜻이고,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간 사람들의 땅’이란 뜻이다. 위구르인만이 ‘위구르스탄’이라는 나라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신장 위구르 자치주’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예속되어 있다. 중국은 왜 인종도 판이하고 종교, 전통, 문화도 전혀 다른 신장 위구르 자치주를 움켜쥐고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위구르 지역은 지하광물자원이 무진장인 데다 북부 텐샨 산맥에서 남쪽 쿤룬 산맥까지 펼쳐진 타림 분지엔 100억 톤이 넘는 원유와 8조㎥의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어 ‘제2의 중동’으로 불린다. 이 지역의 석유와 천연가스는 서쪽의 에너지를 동쪽에 보낸다는 중국의 국가전략 ‘서기동수’(西氣東輸)에 따라 4,000km의 파이프를 타고 멀리 상하이까지 공급된다. 또 위구르 지역은 러시아, 인도, 파키스탄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안보상 요충지이기도 하다. 외신들이 전하는 중국 정부의 위구르 민족의 종교, 문화 통제 정책은 일본 강점기 때 한민족에게 가해진 ‘민족 말살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위구르인은 대부분 무슬림이지만, 위구르 남성은 18세가 되기 전엔 모스크에 갈 수 없다. 공무원도 모스크 출입이 금지되고 교사는 수염도 기를 수 없으며,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히잡’(이슬람 여성의 머리 두건)을 쓰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미국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CSM) 보도에 따르면 위구르인은 주로 단순 육체노동을 하고 있고 기업을 운영하거나 관청에서 일하는 것은 모두 한족의 몫이다. 위구르인의 90%가 극빈층이라는 통계도 있다. 고선지 장군의 실크로드 정벌전의 중심 ‘쿠차’ 위구르 자치구의 도시 ‘쿠차’에는 위구르족 왕조 12대손인 ‘다우드 메수트’(Daoud Mehsut 82) 왕이 산다. 그는 한때 위구르인에게 존경받는 왕이었으나 지금은 중국 돈 200위안(약 2만8,000원)을 내고 티켓을 사면 만날 수 있는 ‘관광상품’이다. 다우드 메수트 왕은 자치구 중부 지역에 있는 인구 7만 정도의 소도시 ‘쿠차’(龜玆) 지역을 지배해온 위구르족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가운데, 천산 산맥 아래 자리잡은 쿠차는 우리와도 인연이 있는 곳이다.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는 망국 고구려인의 저항 운동을 막기 위해 20여만 명을 중국의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고사계(高舍鷄)이고 그의 아들이 그 유명한 고선지(高仙芝) 장군이다. 중국의 황금기는 당나라고 당나라의 꽃은 현종 때다. 고선지 장군은 안서부도호로 쿠차를 베이스캠프 삼아 흉노, 돌궐, 토번 족들을 물리치는 데 맹활약했다. 현종의 명을 받고 고선지 장군이 서역 정벌에 나섰을 때 서역의 정세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아라비아반도에서 알라에 대한 믿음 아래에 불같이 일어난 사라센 제국이 파미르 고원을 향해 크게 세력을 내뻗으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서돌궐이 중간에 끼어 있어 직접 부딪칠 때가 없었으나, 이제는 파미르 고원을 무대로 당나라와 세력을 판가름하게 된 것이었다. 고선지 장군은 사라센 제국과 맞서기 전에 우선 토번족과 사라센 제국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다. 토번족은 당나라의 서쪽 진출에 늘 위협을 주던 티벳 고원의 억센 종족이었는데, 이들은 한때 천산북로(天山北路)로 진출하려다 실패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을 넘어 아무르 강의 상류 등지로 나아가 사라센 제국과 손을 잡고 당나라의 세력을 꺾으려 하였고, 당의 동맹국이었던 소발률(小勃律)국에는 공주를 시집보내 동맹을 맺었다. 이리하여 소발률국을 비롯한 20여 나라가 당의 세력권에서 이탈한 상황이었다. 현종 6년인 서기 747년 3월, 행영절도사가 된 고선지 장군은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가는 족족 적을 물리쳐 서역을 평정하고 쿠차로 돌아왔다. 현종 10년엔 7만의 군대를 이끌고 천산 산맥을 넘어 탈라스에서 사라센제국과 운명의 한판승부를 펼쳤지만 고선지 장군은 처참한 패배로 퇴각했고, 당은 더 이상 서진하지 못했다. 그 후 현종 14년, 안록산의 난 때 고선지 장군은 어이없는 누명을 쓰고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지금, 위구르족의 시각으로 볼 때 당시의 고선지 장군은 현재의 중국 통치자에 다름 아니다. 고선지도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땅 위에 말라버렸다.
여행이 시작되는 곳, 그곳이 바로 여행지 영종도 2008-09-17
인천 영종도. 해외 여행길에 스쳐 지나가기 일쑤인 영종도가 수도권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힌다는 사실을 아는지. 쉽게 일몰을 볼 수 있는 해변과 각종 먹거리,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초일류 국제공항, 그리고 뜨고 내리는 전세계 항공기들을 느긋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영종도를 오가는 왕복 6~10차선 고속도로는 절대로 막히는 일이 없어 주말에도 여유 있게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그뿐인가. 영종도에는 특급 호텔인 하얏트리젠시 인천을 비롯한 각종 관광호텔과 분위기 좋은 펜션이 있고 차를 배에 싣고 다녀올 수 있는 섬들이 흩어져 있다. 각종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섬들은 가족 나들이는 물론이고 데이트 코스로도 좋다. 이처럼 영종도는 한나절의 드라이브 코스로도 1박 2일 여행지로도 안성맞춤인 코스다. 영종도의 문을 여는 영종대교 현재까지 영종도와 육지를 잇는 도로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유일하다. 서울에서 이 도로를 타는 곳은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 김포공항 등 3곳.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노오지분기점과 북인천 나들목에서도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를 탈 수 있다. 요금은 편도 7천100원(북인천에서는 3천400원)으로 조금 비싼 편이지만 대신 뻥 뚫린 10차선의 쾌적한 도로를 보장받는다. 거리는 서울 방화대교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편도 40km. 요금을 내기 위해 톨게이트 부스를 지날 때는 부스 앞쪽에 비치된 여행안내 책자를 꼭 챙기자. 영종도의 볼거리와 먹거리, 지도 등 다양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고속도로에서 톨게이트를 지나 처음 만나는 영종대교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의 상징으로 신공항, 해변과 함께 영종도 최고의 볼거리 중 하나다. 이 다리는 2002년 ‘아름다운 도로’ 우수상,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꼽힐 정도로 이름난 코스 중 하나. 박진감 넘치는 브리지스톤 TV 광고에도 멋진 다리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영종대교는 대교 위와 아래로 지나갈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량 과학관인 영종대교 기념관을 들르기 위해서는 하부도로를 타야만 한다. 이곳에서는 영종대교와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고 공사 사진 및 영종대교의 특징을 담은 영상과 모형, 세계 10대 현수교 등을 관람할 수 있다. 2층과 3층 전망대에서는 한옥의 처마 곡선을 살린 영종대교와 서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종도행 고속도로 중에서는 유일한 주유소도 여기 있으니 참고할 것(영종도에 도착하면 몇 개의 주유소가 있다). 공항신도시를 지나 신불 인터체인지 오른쪽으로 빠지면 넓은 골프 코스가 눈에 들어온다. 영종도에는 동북아 최대 규모의 골프코스인 스카이72 골프클럽과 세계 최대의 원형 골프 연습장인 드림 골프 레인지, 인천골프클럽(퍼블릭 9홀) 등이 있다. 이들 중 가장 큰 것은 스카이72 골프클럽으로 이름 그대로 18홀 골프코스의 4배인 72홀을 운영한다(바다코스 54홀, 하늘코스 18홀). 드림 골프 레인지에서는 답답한 그물 없이 드넓게 펼쳐진 잔디밭으로 공을 치며 골프 연습을 할 수 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즐기는 공항 골프장을 지나 영종도 서쪽으로 향하면 비행기가 낮게 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인천국제공항과 가깝기 때문으로, 머리 위를 날아가는 다양한 국적의 항공기를 아주 가까이에서 올려다볼 수 있다. 인천국제공항은 매번 비행기를 타기 위해 그냥 지나치기 일쑤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공항 그 자체로도 충분히 볼거리가 많다. 아이들을 위한 체험학습의 장으로, 연인과 가족을 위한 한적한 산책코스로, 쇼핑과 여가를 즐기기 위한 곳으로 손색이 없다. 탑승동A(4층)에 들어선 한국문화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공동으로 운영하는 곳으로 궁중문화와 전통미술, 전통음악, 인쇄문화 등을 전시한다. 조선왕조시대의 생활과 복식,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석탑과 범종 등 국보급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 여객터미널 4층 환승라운지 동·서편에 위치한 전통공예전시관은 ‘한국의 공예 선 線’(The line of Korea)이라는 주제로 인간문화재와 중요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의 전통공예품을 전시한다. 한국 도자공예와 복식 및 장신구 등이 전시된다. 그 외에도 여객터미널 입국장 4곳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를 주제로 한 사진과 공예품, 석조물 등이 눈길을 잡아끈다. 여객터미널에 마련된 정원도 인천국제공항의 명소다.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 정원,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살린 목분원, 해마다 다른 주제로 조경되는 선인장 정원, 물을 주제로 청량감을 주는 수경원 등 4계절 내내 각각 다른 식물과 꽃들이 피어나는 다양한 컨셉트의 정원이 있어 산책코스나 데이트 코스로 이용해도 좋다. 이곳은 지난해 종영한 MBC 드라마 ‘에어시티’에서 이정재와 최지우가 종종 데이트를 하던 장면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또한 인천공항에는 멀티쇼핑센터와 국내 유수 호텔의 직영 식당 등이 자리하고 있어 쇼핑과 식사를 즐기기에도 손색없다. 해외여행 시에는 면세점을 이용할 수 있어 눈길이 가지 않았던 곳이지만 의외로 다양한 제품을 전시·판매하고 있다. 한편 인천국제공항 주변에는 국제업무단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하얏트리젠시인천과 이마트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공항 진입로 주변에서는 유채꽃 등 우리나라의 사계절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드넓은 꽃밭과 잔디밭, 그리고 엄청나게 커다란 인천공항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인 Flying to the future라는 거대한 조형물도 자리하고 있다. 배에 차를 실어 또다른 섬으로… 영종도에는 큰 나무가 드물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섬인 탓도 있지만 인천국제공항을 건설하면서 부지 확보를 위해 영종도, 용유도, 삼목도 세 개의 섬을 합쳤고, 이 과정에서 새로 심은 나무가 많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종도는 역동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이런 분위기는 영종도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남방·북방도로를 달리면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앞서가는 차들이 콩알보다도 작아지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섬 주변 일주도로는 쭉 뻗은 직선으로 이뤄져있고 통행량도 많지 않아 여유 있는 드라이빙을 즐길 수 있다. 물론 한적한 국도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옛 도로도 영종도에는 널렸다. 영종도 서쪽 끝자락에는 을왕리해수욕장과 왕산해수욕장, 선녀바위 등 바다를 감상하며 모래사장을 걸을 수 있는 다양한 해변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을왕리해수욕장은 호텔과 민박 등 숙박시설과 횟집, 주점, 노래방 등 다양한 놀거리가 많아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특히 해안선을 붉게 물들이는 일몰의 장관이 유명해 여름철이 아니어도 관광객이 줄을 잇는다. 왕산해수욕장은 을왕리해수욕장에 비해 북적이지 않아 한적한 바닷가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좀더 한가로운 해변을 즐기고 싶다면 용유·마시란 해변과 선녀바위 주변을 추천한다. 이곳 해변의 뒤쪽에는 소나무 숲이, 앞쪽에는 너른 해변이 펼쳐져 있어 숲과 바다 두 가지 모두를 즐길 수 있고 을왕리해수욕장처럼 사람이 많지 않아 한가로운 산책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영종도 서편 끝자락에 위치한 잠진도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영종도 주변에서 가장 큰 섬인 무의도로 건너갈 수 있다(승용차 왕복 2만 원). 무의도는 고운 모래로 이뤄진 하나개해수욕장과 지금은 실미해수욕장이라고 알려진 큰무리해수욕장 등 영종도와는 또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해변들이 자리하고 있다. 서해 바다를 굽어보며 등산할 수 있는 호룡곡산에는 드라마 ‘천국의 계단’ 촬영지가 있다. 또 물이 빠지면 ‘모세길’이 열리면서 영화로 유명해진 실미도에 걸어서 들어갈 수도 있다. 영종도 서쪽에서 공항남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면 바다를 바라다볼 수 있는 사우나 시설인 해수피아가 있다. 이곳에서는 사우나뿐만 아니라 야외에 여러 조각작품과 연못 등 조경시설에도 신경을 써 놓아 목욕 후 산책을 하기에도 좋다. 공항남로를 따라 더 달리면 해산물을 싸게 살 수 있는 어시장과 낚시터도 만날 수 있다. 한편 섬 반대편에 있는 공항북로에서 있는 삼목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장봉도와 모도, 신도에 갈 수 있다. 신도와 모도는 연육교로 연결되어 있고 배를 이용해 차를 갖고 들어갈 수 있다(승용차 왕복 2만 원). 이곳은 드라마 ‘슬픈연가’와 ‘풀하우스’ 세트장이 있어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 모도에 있는 배미꾸미 조각공원은 바닷가 앞쪽 잔디밭에 자리하고 있어 색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장봉도 역시 3만 원(왕복)이면 차를 갖고 들어갈 수 있고, 이곳에도 한적한 해수욕장과 분위기 좋은 펜션들이 있다. 해물 반, 국수 반 황해칼국수 영종도는 먹을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섬답게 선녀바위 쪽의 해변에는 회와 조개구이, 해물칼국수 집이 즐비하고, 공항신도시로 나가면 다양한 식당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영종도에서 맛있기로 소문난 황해칼국수는 원래 슈퍼마켓. 오가는 손님들의 간단한 식사를 해 주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슈퍼마켓보다 칼국수집이 훨씬 커졌다. 분위기보다는 맛으로 승부하는 곳으로, 무위도로 가는 잠진도 선착장 주변 거잠포 해변에 자리하고 있다. 황해칼국수의 메뉴는 해물칼국수 하나다. 철에 따라 산낙지와 전복을 골라 칼국수에 넣어 먹거나 산낙지 회를 주문할 수 있지만, 대표 메뉴는 해물칼국수(6천 원). 바지락만 잔뜩 들어있는 여타 다른 해물칼국수와는 달리 제철 맞은 각종 조개가 듬뿍 들어 있다는 것이 황해칼국수의 특징으로, 그야말로 해물 반 국수 반이다. 어디 그뿐인가? 맛있는 겉절이와 깍두기가 입맛을 돋운다. 해물과 북어로만 국물을 내는 시원한 국물 맛도 장점. 유일한 단점이라면 칼국수 면을 바로바로 뽑아 넣기 때문에 음식이 조금 늦게 나오고, 점심시간에 오면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손님이 많다는 것이다. 양도 많아 여자들은 1인분을 다 먹기 벅찰 정도. 그래서 조개만 골라먹어도 배가 부른 사치를 부릴 수도 있다.
빛으로 물든 산수화 단양 2008-09-14
구인사를 찾은 중생의 보따리가 버려야 할 삶의 무게만큼이나 버겁다. 오방색 단청과 기와 끝 풍경이 이곳이 사찰임을 말해주나 그 웅장함과 화려함은 차라리 궁궐에 가깝다. 세속을 버린 부처의 해탈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무욕(無慾)과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을 바란 나그네의 마음이 아쉬울 무렵 기도를 마친 여인의 미소가 청자색 단청만큼이나 고와 담고 버리는 것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햇살을 가득 품은 양백산 숲길에 여름은 완연하나 더위는 잠시 주춤하다. 태양이 주체 못할 제 불덩이를 토해내면 초록은 수백 가지 색으로 깨어지며 빛을 따라 춤을 춘다. 초록이 이토록 투명했던가……. 그늘을 빌려선 나그네가 한참을 서성인다. 양백산 오르는 길이 고역이라 두 번은 못 오겠다던 투덜거림도 그 끝에 오르니 시답지 않은 투정이다. 단양 풍경이 모두 여기 있다. 엉덩이를 붙이고 끈기를 가지면 더디긴 하여도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이 한편의 파노라마를 펼친다. 노을이 베를 짜면 하늘은 자주 빛 비단이 되고 더위는 동백꽃이 되어 단숨에 떨어진다. 완벽한 어둠이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이때 현실은 몽롱한 꿈과 같다.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을 무렵 단양은 화려한 빛 치장을 시작한다. 단양 별곡리와 고수리를 잇는 고수대교가 가장 먼저다. 간혹 소박하여 아름다운 그것을 덮어버린 조명이 야단스러워 미(美)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지만, 스치고 말 발걸음을 잡고자 하는 단양의 노고를 탓할 일은 아니다. 그래도 마음 한 귀퉁이 내어주지 못하는 야박함과 무채색 같은 도시의 삶을 잠시 벗어나니 이곳의 밤이 별스럽게 따스하기도 하다. 도담삼봉 위 육각정자 꼭대기를 백로가 빙글거리며 주인 행세다. 날 선 벽과 갈라진 틈으로 바람소리 거칠고, 정자의 모양새가 위태롭기는 하나 바위섬 아래로 흐르는 남한강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어둠이 지고 도담삼봉에 오롯이 해가 뜨면 그 옛날 님 보듯 달려왔다던 정도전이 당장에라도 도포 자락 펄럭이며 시 한 수 읊을 듯하다. 여름, 남한강의 녹색은 유난히 짙고 눈앞엔 산수화(山水畵)가 펼쳐진다. Travel Tip 단양팔경은 단양읍에서 5∼30분 거리에 있다.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도담삼봉은 유람선을 타고 석문까지 한번에 돌아볼 수 있다. 장회유람선은 1시간 동안 구담봉과 옥순봉을 거쳐 제천의 청풍나루까지 왕복한다. 단양은 숙박시설이 많아 묵을 곳이 언제나 넉넉하다. 가족 단위의 여행이라면 가곡면 어의곡리에 있는 ‘한드미 마을’에 들러 다양한 산촌체험을 즐기거나, 소백산 관광목장에서 질 좋은 한우를 맛보며 하룻밤 묵어가도 좋다. 단양의 별미는 마늘과 더덕. 단양읍내 장다리 식당(043-423-3960)은 마늘 솥밥부터 마늘장아찌, 마늘 샐러드까지 마늘 요리로만 한상을 차려낸다. 더덕 요리는 어디가나 쉽게 맛 볼 수 있지만 단양읍내의 돌집식당(043-422-2842)이 맛 좋기로 유명하다. 취재차 BMW 미니 쿠퍼 S JCW, 직렬 4기통 트윈 스크롤 터보 1.6L 192마력 엔진, 4,590만 원, 080-269-2200
강화도 ‘일마레 펜션’ 일상에 쉼표를 찍으세요 2008-08-06
서울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강화도는 일상에 지친 도시인들이 지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아지트와 같은 곳이다. 가까운 거리임에도 바다와 산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어 찾는 이들이 많다. 때문에 강화도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숙박업소가 있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좋은 풍광과 즐겁고 편안한 여행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여행이라는 것은 집을 떠나 자연 속에서 재충전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왕이면 좀 더 경관이 좋고 편하고 즐길거리가 많은 곳이 더 좋지 않을까? 강화도에서는 ‘일마레 펜션’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 펜션 앞에서 조개잡이를 즐긴다 ‘일마레 펜션’은 깔끔하면서 고급스러운 외관이 돋보이는 유럽풍의 목조건물이다. 바닷가에 맞닿아 있고, 펜션 안쪽으로는 실외 수영장과 잔디밭, 바비큐 파티장이 있어 살짝 지중해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외관뿐만 아니라 실내도 패브릭 소재 인테리어로 통일해 예쁜 공주님 방을 연상시킨다. 펜션의 내외관이 예쁘고 고급스러워 각종 CF와 화보촬영 장소로도 많이 쓰였다. 가족과 함께 여행한다면 펜션 앞 잔디마당에서 공놀이를 할 수 있고, 펜션 앞에 있는 갯벌에서 조개를 잡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준다. 펜션에 준비된 호미나 꼬챙이로 특별한 기술이 없이도 조개를 잡을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낙지도 잡을 수 있단다. 맨발에 닿는 부드러운 갯벌을 느껴보고 그곳에서 만나는 생명체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자연공부가 될 것이다. 연인과 함께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 가까운 곳에 있는 미루지 선착장으로 산책을 가거나, 동막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즐기면 좋다.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해수욕장이 싫다면 펜션 안에 있는 실외 수영장에서 수영과 선탠을 할 수 있고, 자전거 하이킹도 추억이 될 것이다. 자전거는 무료로 빌려준다. 저녁에는 노을 지는 갯벌을 바라보며 바비큐 파티를 벌이자. 준비해 온 고기와 갯벌에서 잡은 조개 등을 구워 먹을 수 있다. 밤이면 펜션에 마련된 카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로맨틱한 분위기의 방에서 추억과 낭만을 갈무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강화 일마레 펜션은 8~12평형에 걸쳐 7개의 방이 있고, 객실 요금은 성수기(7월 6일~8월 23일)를 기준으로 13만~15만 원이다. 문의 | 강화 일마레 펜션 (032)937-6242 www.ilmarepension.com
정원이 담긴 레스토랑 Urban Garden 2008-08-06
서울 정동에 있는 레스토랑 ‘어반가든’은 바쁜 일상에 지친 도시인에게 여유와 자연의 풍요로움을 내어주는 휴식 같은 공간이다. 계절마다 쉐프가 기획하는 신선한 재료의 자연주의 식단을 맛볼 수 있고, 아담하지만 싱그러운 정원이 시간의 흐름을 잊게 한다. 그래서 이곳은 특별한 날 친구들과 혹은 연인과의 조용한 파티를 원하는 이들이 자주 찾는다. 푸름과 여유를 담은 웰빙 공간 ‘도심 속 정원’을 컨셉트로 한 유기농 레스토랑 어반가든은 2층 주택을 개조한 보기 드문 공간이다. 덕수궁길 골목 사이에 있어 잘 눈에 띄지는 않지만 초입부터 이정표가 표시돼 있어 찾는 데는 문제없다. 화사하고 내추럴하게 꾸며진 1층은 유럽의 농가 주택을 보는 듯하다. 바닥과 테이블, 천장, 의자 모두 그린 컬러로 포인트를 주어 유기농 레스토랑의 이미지를 한껏 살렸다. 10여 개의 크고 작은 원목 테이블이 촘촘히 배치돼 있지만 답답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 어반가든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정원’으로, 1층 동선이 끝나는 곳에 초록이 넘실거리는 미니 정원이 있다. 벽에 그려진 빈티지 그림들은 잔잔한 음악을 따라 하나하나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포근함이 느껴진다. 홀 중앙에는 나무로 짠 진열대가 통로처럼 세워져 있는데, 칸칸이 채워진 책들은 손님을 위한 작은 배려다. 홈바(home bar) 스타일의 2층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천장이 낮고 홀 왼쪽과 오른쪽 모두가 정원으로 연결된다. 왼쪽 정원의 테마는 ‘힐링 가든’(hilling garden). 금세 풀벌레 소리라도 들릴 듯한 이곳은 라일락, 로즈마리, 목마가렌, 단풍나무 등의 이름표를 단 나무들과 잔디로 꾸며져 있다. 토마토와 수경재배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키친 가든’(kitchen garden)은 햇살만큼이나 싱그러운 모습이다. 어반가든에서는 코스 요리와 파스타, 리조또, 피자, 스테이크, 바비큐, 샐러드, 수프 등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고 있는데, 특히 이태리 대표 채소인 쌉쌀한 루꼴라와 큼지막한 왕새우구이가 먹음직스런 ‘어반가든 파스타’를 추천할 만하다. 계절에 따라 채소, 육류, 해산물 등의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든 ‘어반가든 바비큐’도 인기 메뉴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서대문역 5번 출구로 나와 강북삼성병원 건너편 정동길(덕수궁길)로 50m 정도 들어간다. 오른쪽에 교보생명빌딩과 장수회관 사이로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어반가든’이 나온다. 자동차를 이용할 때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대문 방면으로 직진, 서대문로터리 밑으로 U턴해 정동길로 들어가면 된다. 어반가든 (02)777-2254 www.urbangarden.co.kr
번지 없는 유목민의 나라 몽골 2008-08-06
몽골이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뉜 것은 사실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200여 년 동안 몽골에게 조공을 바쳐왔던 러시아는 나라가 강대해지자 몽골을 거쳐 남진하고, 이때 러시아와 청(淸)조는 몽골을 완충 경계 지역으로 삼았다. 청조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외몽골 지역의 몽골인은 독립을 선언하고 내몽골 지역까지 병합, 하나의 제국을 재건하려 했지만 결국 중국과 러시아의 압력으로 그 꿈이 좌절됐다. 이후 1971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붉은 혁명이 성공한 뒤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외몽골은 독립권 확보를 위해 중국과 러시아(백군, 반혁명 세력)의 지원을 받고 있는 몽골 활불 정부와의 싸움에서 승리, 반쪽의 독립국이 됐다. 그런 상황에서 1945년 중국을 대표하던 장제스 정부와 러시아의 스탈린은 대일본 전쟁을 위해 외몽골을 끌어들이고, 당시 대장정을 마치고 섬서 성 연안에 머무르고 있던 마오쩌둥은 일본의 점령지 내몽골을 이후 자치구로 인정할 것을 약속하게 된다. 이 약속은 1947년 5월 1일 지켜져 내몽골은 중국에서 첫 번째 자치구가 됐다. 하지만 외몽골은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독립정부를 구성, 당시까지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정부에서도 외몽골 지역을 건드릴 수 없었다. 양떼를 모는 모터사이클 중국은 무서운 나라다. 춘추전국시대 이전부터 북쪽 오랑캐 몽골에 그렇게 시달리다 진시황이 마침내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가을이면 몽골 기마병이 마술 장애물 넘듯 만리장성을 넘어와 한족이 추수한 곡식과 가축을 빼앗아 바리바리 가져갔다. 마침내 13세기에는 징기스칸의 몽골 기마병이 한족의 중국을 휩쓸어 원(元)나라를 세웠다. 오늘날 중국의 사가들은 1세기가 넘게 북쪽 오랑캐 몽골에 정복당한 엄연한 사실을 외세에 짓밟힌 치욕으로 보지 않고 내란으로 정권이 바뀐 것 뿐이라 말한다. 징기스칸도 중국의 영웅이라 치켜세운다. 이것은 몽골이 원래 중국의 일부라는 걸 태연스럽게 강조하는 것이다(동북공정이 겁나는 것도 이런 중국의 야욕 때문이다). 중국이 골치를 앓는 것은 티벳만이 아니다. 위구르 자치구와 내몽골에서도 끊임없이 지하 독립운동이 펼쳐지고 있지만 중국정부의 언론통제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독립한 몽골공화국이 중국 위에 고구마처럼 누워 있고 중국의 자치주인 내몽골은 몽골 남동쪽에 붙어 있다. 내몽골은 우리 남한의 열두 배가 넘는 드넓은 땅에 인구는 2,000만 명이 넘지만 몽골족보다는 중국 한족이 훨씬 많다. 중국의 이민정책으로 내몽골의 몽골인은 제 나라 땅에서도 이제 소수민족이 되어 버렸다. 천하를 호령하던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서글픈 신세가 되었다. 뉴 밀레니엄 2000년대가 밝기 전,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천 년간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징기스칸을 꼽았다. 13세기, 징기스칸은 어떻게 10여 만의 병사를 이끌고 지구의 6할을 정복할 수 있었는가? 징기스칸은 어떻게 모래알처럼 흩어진 유목민을 끌어 모아 알렉산더대왕, 나폴레옹, 히틀러가 차지했던 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넓은 땅을 정복할 수 있었는가? 그 해답은 말(馬)에서 찾을 수 있다. 몽골인은 4세만 되면 엄마로부터 말 타기를 배운다. 남녀 가리지 않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도 말 등에만 올라타면 쏜살같이 달린다. 700마리의 양떼는 물결처럼 초원에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린다. 양떼의 쏠림을 조율하는 것은 목동이다. 목동은 말을 타고 박차를 가하며 양떼를 몬다. 하지만 세월은 바뀌어 목동을 태우고 초원을 질주하던 말은 이제, 모터사이클로 대체되었다. 42세 우제중은 모터사이클에 걸터앉아 멋쩍게 웃는다. 말을 버리고 모터사이클로 초원을 누비는 것이 몽골인의 정체성을 내팽개친 것 같아 썩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효율성, 편리성, 기동성을 따져보면 말은 모터사이클의 적수가 될 수 없다. 특히나 모터사이클의 경적은 양떼를 모는 데 효과만점이다. 내몽골 치링거러 대초원은 해발 1,000m가 넘는 고원으로 황사의 주요 발원지이기도 하다. 급격하게 확산되는 초원 사막화의 주범은 양떼로 지목됐다. 양떼는 풀만 뜯어 먹는 것이 아니라 뿌리까지 캐먹어 초원을 황막하게 만든다. 때문에 구획정리로 양의 사육두수를 제한하는 중국 당국의 조치에 몽골인은 벌컥 화를 낸다. 초원을 갈아엎어 밭을 만드는 중국 한족들이야말로 사막을 확산시키는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가도 가도 끝없는 내몽골 치링거러 대초원. 초루멍 씨네 집이 떠들썩하다. 몽골의 이동주택 ‘파오’를 세우는 것이다. 몽골인들은 벽돌집에서 살지만 봄이 오면 마당에 파오를 세워 겨울이 올 때까지 그 안에서 생활한다. 동물의 본능처럼 그들의 조상들이 누워서 별을 쳐다보다 잠이 드는 파오의 유전인자가 초루멍 씨의 가슴에도 단단히 박혀 있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초루멍 씨네 집에 모였다. 파오를 세워 주기 위해 자발적으로 온 남정네들은 일당을 받지도 않고 품앗이나 두레처럼 일 빚을 갚는 일도 없다. 그저 여러 손을 합쳐 파오를 세우는 것이다. 먼저 사막에서 나는 버드나무로 만든 ‘하니’라 부르는 격자 벽을 빙 둘러친다. 젖었을 때 형태를 만들어 말리면 고정된다. 다음으로 대들보격인 ‘토니’를 한복판에 받쳐 들고 ‘론 톨로굴라’라 불리는 4개의 기둥을 세운다. 토니는 하늘창(天窓)으로 비가 올 땐 천막을 덮지만 맑은 날은 열어둬 누워서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다. 천창을 떠받쳐주는 론 톨로굴라는 용 기둥으로, 용이 하늘을 받쳐 주는 격이다. 파오는 유목민인 몽골인의 이동식 집이라 조립과 해체가 수월하지만 하늘창 홈에 용주 네 개를 박아 고정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후의 작업은 일사천리다. ‘우니’라 불리는 혁가레를 벽과 하늘창에 끼워 넣으면 골격이 완성된다. 천을 씌우는 일은 두 사람의 반 시간 일거리다. ‘파오’는 중국식 이름이고, 몽골어로는 ‘겔’이라 부른다. 치링거러 대초원으로 가는 길 안내 0505-557-8000
France PARIS 자유로운 영혼의 안식처 2008-08-06
파리에서의 여행은 ‘고독’이라는 테마와 어울린다. 파리의 하늘이 새파랗든 아니면 우울 모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파리의 중심가인 샬렛 거리를 걷거나 에펠탑, 샹젤리제로 대변되는 흔한 관광지를 배회하더라도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폼나게 깃을 올려 세우거나, 바람에 흩날리는 파리지엥의 스카프 향수향 너머로도 고독 모드 여행의 잔상은 묻어난다. 계절이 달리 중요한 것은 아니어서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에서의 파리 역시 잔뜩 파리스럽다. 파리에 대한 인상을 달리 언어로 규정짓기 힘들 듯, 여행자에게 파리는 오랜 시간 막연하게 꿈꿔 왔던 로망과도 같은 도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에서의 환상은 늘 타인과 공유된다. 누구나 레드 와인 한 잔에 낭만을 논하고, 세련된 패션에 눈을 지치게 하며, 고풍스런 건물들이 감싸고 있는 오래된 것에 현혹된다. 파리답지 못한, 회색빛 빌딩만 높게 솟은 다른 나라의 수도들은 억울하게 저급한 것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몽마르뜨 언덕 위에서 파리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망울은 그런 동질의식 때문인지 어느 정도 닮아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로떼르담 성당이 솟은 시떼 섬으로 연결되는 파리의 골목들을 칭송하고, 세느 강변의 다리 위를 서성거리며, 뤽상부르 공원에서의 달콤한 낮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파리를 오가는 수많은 이방인들의 배낭 안에는 딱딱한 바게뜨 빵이 소담스러운 상징처럼 꽂혀 있다. 파리를 공유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여기저기서 무의식적으로 이뤄진다. 인파를 피해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한적한 골목에 들어서거나 어둑한 조명의 낯선 카페를 기웃거리게 된다. 그 작은 소망을 가슴에 담고 메트로에 오른 뒤 소르본느 대학을 찾는다. 서울의 대학로나 홍대 앞을 기대했건만 무수한 호텔과 헌책방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우선 생뚱맞다. 대학정문 앞 노천카페는 샤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자주 들렀다는데 이미 여러 여행 책자에 소개된 곳이다. 카페 안에는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거나 대낮부터 생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시인이 된 폼으로 앉아 있는 관광객들이 빼곡하다. 대신 정문 옆을 지나치면 작은 공원이 있고 공원을 바라보고 한적한 바들이 있다. 그 공원의 얼룩진 계단에 앉아 책을 읽거나 어두침침한 바에 앉아 흐르는 음악소리에 몇몇 청춘들이 몸을 들썩인다. 바로 보고 싶었던 파리의 풍경이다. 골목길에서 맞는 또 다른 여유 파리에서의 여행은 반복과 함께 일종의 업그레이드 수순을 밟게 된다. 예를 들면 할인쿠폰을 들고 세느 강에서 바토무슈 유람선을 타는 것보다 퐁데자르 다리 난간에서 유람선을 발 밑으로 내려다보며 한가롭게 앉아 있는 것이 운치 있다. ‘예술의 다리’라는 별칭답게 나무로 바닥을 채운 퐁데자르는 세느 강의 다리 중 유일한 보행자 전용 다리인데 해질녘 그곳에 앉아 병에 담긴 와인을 기울이는 것으로 파리지앵 흉내를 내볼 수 있다. 이왕 흉내를 낸다면 시떼 섬에서 세인트 미첼 거리로 이어지는 노천카페에도 무심코 시간을 쪼개 볼 일이다. 볕이 드는 큰 도로에 늘어선 카페들의 테이블 좌석은 한 방향만 바라보고 겹겹이 늘어서 있다. 마치 파리의 정경과 지나치는 사람들을 하나의 동영상처럼 감상하는 구조다. 커피 값은 2유로. 1,600원대로 환율이 올랐지만 한국 돈 3,000원 정도의 값이다. 파리 지하철 가격이 1.5유로인 것을 감안하면 오후의 여유를 즐기는 것에 있어 이곳에서는 누구에게나 낮은 평등이 주어진다. 한국 카페의 커피 값이 5,000원을 넘나들고 지하철 요금의 5배에 가까운 것을 생각하면 커피 한 잔의 여유에 대한 차별은 오히려 한국이 냉혹하다. 마주하는 소통보다는 대범하게 바라보거나 그 시선을 받아들이는 파리지앵들에게는 그들만의 여유로움이 깃들어 있다. 땀을 흘리며 도시 구석구석을 훑어보지 않더라도 그렇게 다가오고 사라지는 장면들 속에서 그들은 파리를 호흡하고 즐긴다. 낯선 여행자라면 루브르 박물관의 고풍스런 작품을 꼼꼼히 둘러 봤다가도 늦은 오후가 되면 퐁삐두 센터 앞에 앉아 독특한 건물을 바라보며 딱딱한 바게뜨와 책을 벗삼는 모습이 몸에 익숙해지면 되는 것이다. 파리에 대한 시선은 외곽으로 흐르면서 더욱 고즈넉해진다.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향하는 단골 코스가 귀에 친숙하지만 고흐가 마지막 작품 활동을 하며 생을 마감한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들려 프랑스 시골마을의 한가로운 풍경에 취해 보는 것도 좋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향하는 열차는 파리에 사는 구성원들이 세련된 파리지앵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듬성듬성한 열차 자리는 촌스러운 시골 청년과 다양한 유색인종들로 채워져 있다. 이곳에서 가장 낯선 풍경은 몇 안 되는 동양인 관광객이다. 고흐는 이곳에서 70여 점의 마지막 작품을 남겼고 고흐의 생가는 1층이 아직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시청, 교회, 공동묘지가 그림의 배경이 됐으며 세잔, 도비니 등 인상파 화가들도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오베르에서는 옆집 아저씨 같은 골목길 아뜰리에의 주인과 수다를 떤 뒤 고흐의 동상이 놓여 있는 한적한 공원에 앉아 나른하게 낮잠을 즐겨도 좋다. 자신의 귀까지 자르고 자살을 선택한 천재 화가의 최후는 섬뜩하지만 머릿속에서 지운 채 말이다. 이 모든 것이 파리를 즐기는 또 하나의 여유이자 방법이다. TRAVEL TIP 파리는 열차 여행의 교두보와도 같다. 파리를 시작으로 호수도시 안시를 거쳐 지중해의 니스 해변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프랑스의 도시, 산,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가 높다. 이동 때는 TGV를 이용하는데 주말에는 일찌감치 만석이 되니 사전 좌석 예약은 필수다. 파리에서 오베르 쉬르 우아즈까지는 페르상 보몽행 기차를 탄 뒤 퐁트와즈행 열차로 갈아탄다. 파리시내의 이동은 메트로가 편리한데 10장 묶음, 1주일권 등 다양한 할인티켓이 있다. 패션에 관심이 많다면 상제리제 인근의 몽테뉴 거리에서 명품 숍들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라데팡스 지역의 신개선문 역시 파리의 새로운 단면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파리의 유명한 먹자골목은 시떼 섬에서 소르본느 대학으로 향하는 세인트 미첼 거리 뒤편에 조성돼 있다. 이보다는 어둑어둑하고 간판 작은 로컬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 잔에 식사를 즐겨도 좋을 듯. 대부분 점심시간에는 와인과 메인음식이 포함된 세트 메뉴를 싼 값에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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