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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일근 돌아 오라 귀신고래여, 동해 앞 바다로 2005-01-13
참 맑아라/겨우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열이, 열이가 착하게 닦아 놓은/유리창 한 장 먼 해안선과 다정한 형제 섬/그냥 그대로 눈이 시린/가을 바다 한 장 열이의 착한 마음으로 그려 놓은/아아, 참으로 맑은 세상 저기 있으니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는 ‘바다가 보이는 교실’의 저자 정일근 시인은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라는 시로 당선되었고, 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인의 첫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에 실려 있는 위의 시는 대학 졸업 후 국어 교사로 첫 발령을 받은 진해남중학교에서 쓴 것으로 같은 제목의 연작시 가운데 10번째로 ‘유리창 청소‘라는 부제가 붙은 시이다. 울산에 거주하고 있는 정 시인을 서울 인사동의 찻집 인아에서 만난 것은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본심 심사를 보고 난 다음날이었다. 한때 신춘문예에 한번 응모해 보지 않은 문학청년이 어디 있을까. 요즘의 열기는 어떤지 궁금했다. “20년 전에 저를 뽑아준 이근배 시인과 함께 심사를 보았어요. 그동안 상금도 많아지고 문학적 환경도 좋아졌지만 원고를 보니 예전보다 열기가 식은 것 같아요. 요즘은 대부분 워드 프로세서로 쓰니 밤새워 원고지에 정서하던 때와는 다르지요. 문학이란 사람의 향기, 체온일텐데 그런 부분에서 기계의 냄새가 난다고 할까요?” 시대가 어려울수록 문학의 꽃이 핀다는 말이 있다. 경제위기 탓인지 작품 수는 많아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열기란 과거 20대의 응모작이 많았다면 지금은 40대가 많은 식이다. 예전의 그 20대가 아직도 응모한다는 얘기는 문학의 단절, 혹은 문학적 열정의 차이가 그만큼 벌어졌다는 게 아닐까. 귀신고래는 생명의 복원, 통일의 아이콘 사실 정 시인은 신춘문예 얘기보다 고래이야기를 하고싶어 했다. 그것도 귀신고래. 귀신고래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귀신처럼 잘 도망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새끼고래를 업고 가는 고래는 귀신고래라 보면 되요. 언양 반구대의 선사시대 암각화 200여 점 중 50점이 고래 그림이에요. 바로 귀신고래지요. 3천~4천 년 전부터 한국인과 친숙했던 고래지요.” 우리가 먹는 미역을 고래의 선물이라 한다. 그 이유는 고래가 미역을 뜯어 새끼에게 먹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따라 먹기 시작했기 때문. 고래만큼 모성애가 강한 동물도 드물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해바다를 뒤덮었던 그 많던 고래는 다 어디 갔을까? “예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래를 먹지 않았어요. 일본사람들이 고래를 먹게 만든 것이지요. 일본은 원래 포경업이 발달했던 나라로 고래고기를 미친 듯이 좋아해요. 포경의 역사는 곧 남획의 역사입니다. 육지에서의 36년 수탈뿐 아니라 바다에서는 아예 씨를 말린 것이지요.” 1912년 미국의 탐험가 앤드류가 장승포에 와서 귀신고래를 찍은 사진이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귀신고래의 유일한 사진이다. 오호츠크해에서 우리나라로 회유하는 고래를 일컬어 ‘코리아 그레이 웨일’(korea Gray Whale)이라고 앤드류가 명명했다. 그 귀신고래가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하자는 운동에 정 시인은 발벗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울산사랑 시노래회 푸른고래의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내년 울산에서 열리는 2005년 IWC(국제포경위원회) 연례회의의 성공을 위한 ‘시노래 콘서트’를 개최, 고성, 양양, 울진, 울산 등 동해안 고래 출몰 지역을 돌면서 귀신고래에 대한 관심을 호소해나갔다. “김남조, 고은 등 대표시인들이 참여하는 고래시집을 영문으로 만들고 있어요.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문화예술적 심성을 전달하고 코리아 그레이 웨일이란 이름을 찾는 것이 목표예요. 귀신고래가 한국으로 회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본인들이 그 이름을 없애려 하기 때문입니다. 독도 문제 못지 않게 심각한 일입니다.” 고래의 회유는 숙명적인 것이다. 그래서 왜 귀신고래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남북한의 공동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알래스카의 얼음에 갇혀있던 귀신고래를 구하기 위해 미국과 구 소련이 처음 만나면서부터 데탕트가 시작되었듯이 귀신고래를 통해 통일의 길도 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서 귀신고래는 통일의 아이콘입니다. 그리고 고래가 돌아오려면 바다가 변해야 합니다. 바다가 변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변해야 하겠지요. 바다를 살리는 것은 곧 우리들을 살리는 길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통로에서 공연예술의 미래를 외치다.. 2004-12-20
계 분침은 약속한 시간을 넘어섰고, 눈앞에는 브레이크등이 반복적으로 점멸하는 차들로 가득하다. 애꿎게 클랙슨만 눌러댄 도심 한복판의 초조한 순간에 그가 보낸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천천히 오세요. 극장은 제게 있어 집이며 공부방입니다. 공부하고 있겠습니다.” 그 진지함, 그리고 그 섬세한 배려란 정말 누구에게나 대접받을 만하며 안심을 주는 것이었다. 연극인이자 ‘마지막 변사’ 신출 선생의 수제자인 정찬교(42) 씨의 첫인상은 이렇듯 따사로웠다. 20년 연기생활 거쳐 변사의 후예로 정찬교 씨는 지난 10월 12일 극단 양산박 퍼포먼스가 주최한 ‘마지막 변사 신출 선생님의 첫 제자 뽑기 오디션’을 통해 변사로 입문했다. 변사(辯士)는 1940년대 이전의 무성영화 시대에 움직이는 성우이자 배우 혹은 감독이었다. 하지만 무성영화가 사라지면서 그 속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변사 역시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고 지금은 신출(76) 선생만이 이 시대의 ‘마지막 변사’로 남아계실 뿐이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없는 세상도 만들어내고 멀티채널 서라운드 시스템이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하는 사운드를 뽑아내는 지금의 영화 세상에서 그는 왜 마지막 변사의 후계자가 되었을까. “1984년 극단 예맥에서 ‘이상의 날개’라는 작품으로 연극생활을 시작했어요. 지난 20년 동안 서른 편이 넘는 연극과 실험극에 출연했고요. 막힌 공간인 소극장과 열린 무대 등에서 다양한 연기를 펼쳐왔지만 좀더 진취적인 연극을 하기 위해서는 스펙트럼을 더욱 넓혀야 했지요. 연기력은 물론 경험 면에서도 많은 공부가 필요한 시점이었어요.” 변사 공개 오디션에는 약 200여 명이 지원했다. 하지만 실제 접수자는 100명 남짓, 오디션 장소에 찾아온 이는 20여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실제 무대에 올라 변사의 자질을 시험받은 응모자는 10여 명 안팎. 이 날 오디션을 통해 모두 5명의 제자가 뽑혔지만 지금은 정 씨와 최초의 여성 변사로 기록될 가애(26) 씨 두 명만이 남아 있다. “연극 연기자로의 생활도 풍족하지 못한 마당에 하물며 설 기회조차 변변치 않을 무성영화의 변사가 된다는 데는 그만큼의 각오와 앞날을 위한 스스로의 계획이 필요했던 거지요. 더구나 신출 선생님은 자신의 제자가 연기자가 아닌 ‘쟁이’가 되기를 원하세요. 하지만 저 역시 변사로서만 기억되고 싶진 않습니다. 우선은 변사로서의 실력을 키워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무성영화의 시대를 복원하는 데 만족하진 않을 겁니다. 무성영화를 공연예술의 새로운 장르로 발전시키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장르화된 무성영화는 21세기인 지금에도 실제로 존재한다. 이태리의 시골마을인 포르데노네에서 매년 10월에 열리는 무성영화의 축제 ‘포르데노네 영화제’는 올해로 벌써 23회 째를 맞이할 만큼 꾸준하고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변사 없이 오케스트라나 재즈 뮤지션 등이 효과음만을 더하는 것이 우리네 무성영화와의 차이점일 뿐이다. “아시아권에서는 기술적인 한계로 기계에 의존하는 대신 변사가 배우들의 대사며 지문 등을 일일이 읽고 연기해주었지요. 현대적인 변사의 역할을 여기서 찾을 수 있어요. 유성영화를 무성영화화해 저와 같은 변사가 음향기기의 역할을 대신하는 겁니다. 연극과 영화의 접목을 통해 매우 색다른 감성의 공연이 탄생할 수 있을 겁니다.” 정찬교 씨의 변사 수업은 이미 시작되었다. 지난 10월 2일 시작한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의 전국순회공연 투어 3회 째에 합류했고 거의 매주 전국 방방곳곳을 도는 강행군을 소화해왔다. 스승은 매일 침을 맞고 허해진 심장을 다스리면서도 연기의 전부를 책임지고, 제자에게는 영사기조차 만지지 못하게 할 만큼 변사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정 씨가 스승에게 처음 한 달간 들었던 얘기라고는 “목소리가 그래서 되겠어? 목청 키우고 대본 빨리 외워야 돼”가 전부였지만 지난 11월 13일의 울릉도 공연 뒤에는 “그래, 그거야”라는 칭찬까지 얻었다. 그리고 정 씨는 내년 2월부터 정식으로 무성영화 연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선생님은 폭포수 밑에서 피 토해가며 목소리를 얻었다는데, 그 성량은 정말 대단해요. 머릿속에는 온통 변사 연기에 대한 생각뿐이시지요. 어렵고 부담스런 상황이라 정수리는 무겁지만 기분은 황홀할 만큼 좋아요. 연극, 영화, TV 드라마 그 어떤 종류의 연기라도 이제는 소화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고 사라질 뻔했던 변사의 후계자로 창조적인 공연을 만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으니까요.” 테이프 레코더를 켜고 ‘검사와 여선생’을 연기하는 스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그의 눈가에선 어느새 촉촉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왜 울고 있는가? 그리고 눈물 아래 비치는 그 웃음은 또 무엇인가? 과거와 현재의 통로에서 만난 변사 정찬교의 모습은 그렇게 진실되고 아름다웠다.
연기자 진재영 ‘색즉시공’, ‘낭만자객’으로 화려하.. 2004-12-14
10년쯤 전이었던가? 부산사투리를 쓰던 갈래머리 소녀가 있었다. 청순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맛깔스런 경상도 사투리는 시청자들을 브라운관으로 끌어 모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겹치기 출연과 방송 스케줄……. 그렇게 그녀는 1998년 KBS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를 찍을 때까지 그야말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 그녀가 돌연 브라운관에서 자취를 감췄다. 스캔들에 휩싸이면서 주변의 눈총에 견디지 못해 연기생활을 접은 것. 그리고 4년. 그녀의 얼굴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갈 즈음 ‘색즉시공’이란 영화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제는 편안한 역 하고 싶어요” 진재영은 2002년 12월 ‘풍기문란 섹시코미디’로 자청하며 웃기고 야한 장면은 다 집어넣어 관객을 포복절도하게 만든 영화 ‘색즉시공’에서 육감적인 몸매를 과시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결과는 420만 명이라는 관객 동원으로 이어졌다. 그녀조차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안 좋은 일을 겪고 나니 연기생활이 싫어졌어요. 그래서 다 접고 조용히 지냈지요. 그랬더니 정말 아무 곳에서도 연락이 없었어요. 그렇게 4년이 흘렀는데 윤제균 감독님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어요. ‘이런 영화가 있는데 혹시 출연해보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시나리오를 읽어봤는데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당장 감독님께 전화를 해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어요.” ‘색즉시공’에서 그녀가 맡은 역은 극중 하지원과 섹시 대결을 펼치는 에어로빅부 학생 김지원. 완벽한 에어로빅 동작을 선보이기 위해 크랭크인 3달 전부터 훈련에 들어갔고 낮에는 연기, 밤에는 연습으로 쉴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1년 후. 진재영은 영화 ‘낭만자객’으로 다시 스크린에 섰다. 이번엔 얼굴은 왕조현인데 입만 열만 상소리가 튀어나오는 귀신 ‘향이’였다. “향이는 얼굴만 보면 청순하고 예쁜 귀신이에요. 하지만 입만 열만 사투리와 욕이 쏟아지죠. 전 그런 솔직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어요. 관객들 반응이요? 물론 천차만별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에 연연해하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이렇게 봐주세요’라고 해도 그렇게 안 봐주시잖아요. 연기는 연기일 뿐인데…….” 그녀는 ‘낭만자객’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를 보였다. 무술을 해야하는 역 때문에 틈틈이 칼을 쥐고 다녔고 와이어 연기를 선보이기 위해 강도 높은 스턴트 훈련을 받았다. 과격한 행동이 많아 영화를 찍을 때는 온몸에 멍이 들기도 했지만 다시 시작한 연기인 만큼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꾀를 부릴 수 없었다고. “그래서 대역도 거의 쓰지 않았어요. 촬영이 끝나면 거의 녹초가 되곤 했지요. 하지만 정말 재미있게 찍었어요.” 지난 9월 막을 내린 MBC 드라마 ‘황태자의 첫사랑’을 끝으로 그녀는 잠시 쉬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섹시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편안한 얼굴로 다가가고 싶다는 진재영. 그래서 다음 작품을 고르는 일도 조심스럽다. “다양한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하나의 이미지에만 묶여 있으면 여러 모습을 보여줄 수 없잖아요. 정신병자 같은 역할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이 귀여운 부산아가씨는 2편의 영화로 연기자로 돌아왔다. 어쩌면 내년쯤에는 갈래머리 소녀였던 진재영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보다 성숙해진 배우의 모습으로…….
언강 윤병훈 명장 40여 년, 꼿꼿한 오죽을 닮은 .. 2004-12-14
그리 오랜 세월 동안 오죽(烏竹)을 붙잡고 살게 될 거라고는 그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40여 년 전, 우연히 오죽을 마주했을 때 언강 윤병훈(70) 옹은 헌 교과서를 모아 시골에 파는 일을 하던 범부였다. 그날도 충남 부여의 어느 중고등학교에 책을 납품하고 오는 길이었다. “농부들이 대나무를 베어내고 있는데, 가만 보니 오죽이더군요. 쓸모가 없고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고 해서 그렇게 베어 버리는 거였지요. 오죽은 이율곡의 고향 강릉 오죽헌이나 정몽주가 순절한 선죽교 등 선비의 절개가 서린 곳에서만 자생한다는 대나무예요. 인공 재배가 불가능한 만큼 귀하게 취급되어 조선시대에는 ‘선공감’이라는 관청에서만 오죽으로 공예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오죽이 함부로 버려지는 것을 보니 이대로는 안되겠다, 무언가를 만들어 보존하고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군요.” 10여 년 연구 끝에 독특한 기하화법 완성해 그 뒤 오죽을 찾아 우리나라 곳곳을 헤매고 다녔다. 전국을 돈 것만 5차례. 오죽의 분포를 기록하고 닥치는 대로 모아 쌓아두기 시작했다. 더불어 오죽공예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대나무를 가공해 수출하는 공장에 들어갔지만 별다른 기술은 배우지 못했다. 일반적인 대나무 공예는 대나무의 가닥을 서로 얽고 짜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오죽공예는 일일이 조각을 내고 빈틈없이 붙여야 완성품이 태어나므로 기법 자체가 달랐다. “오죽공예를 하는 이가 없어 배울 방법이 없더군요. 옛 문헌과 작품들을 보며 혼자 공부를 시작했지요. 하루 15시간 이상 10여 년을 집요하게 매달려 제작기술을 익혔고, 80년에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현판 ‘염원’을 만들었습니다.” 공방에 틀어박혀 보낸 10여 년 동안 배운 것은 제작기술만이 아니었다. 그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편광에 의한 기하화법’을 완성했다. 오죽은 부위에 따라 25가지의 색을 내는데, 그 부위를 조화롭게 잘라 붙여 빛을 받는 방향에 따라 무늬가 다르게 보이는 독특한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80년부터 전승공예대전에 참가해 입선과 장려상, 문화체육부장관상(94년) 등 수많은 상을 받았고 94년에는 태국 왕실 초청 아시아 죽제품 전시회에 출품, ‘오죽신품’으로 찬사를 받는 등 우리나라 죽장공예의 독창성을 세계에 알렸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95년 그는 ‘명장’의 칭호를 받았고 96년에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15호로 지정되었다. 끝내는 영광이었지만, 마디마디 두툼한 굳은살이 붙고 손가락 끝마디가 ㄱ자로 굽은 채 굳어버린 손은 그가 걸어온 외길이 얼마나 험하고 고단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오죽에 미쳐 94평짜리 집을 날리고, 하루아침에 변한 가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과 헤어지는 아픔도 손마디가 울퉁불퉁 굳어버릴 때까지 오죽을 다듬고 붙이며 잊었다. “한길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그러니 개인적으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멈출 수가 있었겠습니까. 변하지 않는 건 40년 애인, 오죽밖에 없더군요(웃음).” 2002년에는 죽제품의 제작방법에 관한 특허도 따냈다. 어떠한 자연조건 아래에서도 조각이 떨어지거나 뒤틀리지 않는 죽제품 제작기법을 고안해냈지만, 아직까지 든든한 후원자나 후계자를 찾지 못한 것이 우리나라 유일의 죽장 명장 윤병훈 옹의 안타까움이다. 오죽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는 데다 때 맞춰 오죽을 베어 실어 오려면 짐차라도 한 대쯤 갖고 있을 법하지만, 그는 항상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닌다. 먹고 자는 일 외에 온 신경이 오죽에 쏠려 있는 터라 운전면허도 따지 않았고, 버스에서 내려 이곳저곳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샅샅이 둘러보아야 오죽과 눈이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윤병훈 명장이 “주인 잘못 만나 몸이 고생”이라며 얼마 전부터 영 불편한 허리를 매만진다. 명장이 혼자 살아가는 곳이기도 한 북촌 한옥마을의 언강 죽장전시관(☎02-3676-7519)은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해 현재 개점휴업 상태. 명장, 인간문화재라는 칭호가 장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뿐 아니라 전통의 보존과 발전에도 의의를 두고 있다면, 우리 정부나 서울시는 지금 눈부신 ‘직무유기’중이다.
탤런트 박은혜 크라이슬러 홍보대사로 활동중인 2004-11-15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다임러 크라이슬러 전시장.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박은혜가 다지 바이퍼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클러치 페달을 밟고 핸들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전시장만 아니었으면 당장이라도 몰고 나갈 태세다. 크라이슬러 홍보대사이기도 한 박은혜는 이날 PT 크루저, 그랜드 체로키, 그랜드 보이저 등 매장에 전시되어 있는 차에 모두 올라 시트를 조절하고 계기들을 조작해 보는 등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자동으로 열리는 그랜드 보이저 옆문이 신기한 듯 놀란 눈으로 한참 쳐다보는 모습이 귀엽다. 드라마 ‘대장금’ 덕에 최고의 전성기 맞아 박은혜의 얼굴이 금방 생각나지 않는다면 지난 3월 막을 내린 MBC 드라마 ‘대장금’을 떠올려보자. 주인공 장금의 친구로 수라간 궁녀였다가 임금의 성은을 입어 나중에 후궁으로 신분이 높아진 연생이, 그녀가 바로 박은혜다. “박은혜? 박은혜가 누구지?”라며 고개를 갸웃하던 사람들도 ‘연생이’라고 하면 “아, 연생이∼”라며 고개를 끄덕일 만큼, 박은혜는 드라마 ‘대장금’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확실히 얼굴도장을 찍었다. 길 가던 꼬마아이도 알아볼 정도로 인기스타가 되었다. 데뷔 6년 만이다. “드라마를 찍기 전에는 이 정도로 사람들의 호응이 클 줄 몰랐어요. 좋은 배역인 줄은 알았지만……. ” 박은혜는 1998년 SBS 시트콤 ‘LA아리랑’을 통해 연기에 발을 들였다. 그후 이런저런 드라마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려왔지만 올해처럼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지금이 그녀의 연기 인생에서 처음 맞는 전성기인 셈이다. “올해는 저에게 뜻깊은 한해예요. 드라마를 끝내고 바로 2개의 드라마에 동시에 캐스팅된 것도 그렇고 CF를 찍게 된 것도 그렇고……. 크라이슬러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기쁜 일이지요. 이래저래 행운이 가득한 한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박은혜는 지난 6월부터 크라이슬러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 덕에 1년 동안 크라이슬러 세브링 컨버터블을 탈 기회도 잡았다. 지난 10월에는 스케줄이 비는 틈을 타 동생과 함께 세브링 컨버터블을 타고 강원도에 있는 대관령목장에 다녀왔다. 몇 개월만에 처음 맛보는 달콤한 휴식이었다. “올라가는 길은 좀 험했지만 꼭대기까지 가보니 경치가 아주 예쁘더군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지붕을 오픈한 채로 달렸는데 기분이 끝내주더라고요. 기름값도 생각보다 적게 들고 아주 잘 쉬다 왔습니다. 운전이요? 물론 제가 했지요. 세브링은 핸들이 묵직해서 안정감이 있어요. 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전반적으로 단단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 차를 타면 왠지 안전할 것 같은 믿음이 생긴다고 할까요?” 이번에는 그녀가 바닐라색 PT 크루저 앞에 서서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는다. PT 크루저가 내심 마음에 드는 눈치다. 쇼룸 가운데에 전시되어 있는 300C에 대해서는 “부모님께 사드리고 싶은 차”라며 탐나는 표정을 짓는다. 홍보대사 자격으로 300C 새차발표회에 참석했을 때도 박은혜는 크라이슬러 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홍보대사라는 타이틀을 의식해서였을까, 아니면 차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지금 PT 크루저에 마음을 뺏겼다는 사실이다. 하늘색도 빨강색도 아닌 바닐라색 PT 크루저에.
도예가 김기철 자연으로 자연을 빚다 2004-11-15
‘웰빙’(Well-being) 바람이 거세다. 좋은 것을 먹고 입고 행복해지는 것이야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웰빙’이 지켜내고자 하는 ‘자연주의’를 실천하기보다 ‘웰빙산업의 소비자’ 노릇에만 몰두하곤 한다. 그래서 평생을 자연과 함께 살아온 도예가 지헌(知軒) 김기철(71) 선생에게 요즘 사람들의 웰빙 열풍은 매우 낯설다. “기계문명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기계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익숙한 구호지만, 모든 사람들이 원시적인 삶으로 돌아가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저처럼 원시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어야 기계 속에서 피폐해진 삶을 치유하는 데 조그마한 힘이 되리란 생각입니다.” 도예가이면서 ‘농사꾼’이란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그는 손수 밭을 갈고 채소를 가꾸며 산다. 물론 화학비료 하나 쓰지 않은 유기농 방식이다. 그는 도공의 삶과 농사꾼의 삶을 ‘마차를 끄는 두 바퀴’에 비유한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그에게 없어서는 안될 두 축이라는 얘기다.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그의 마음과 생활철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엉뚱하게도 그의 집 재래식 변소다. 그곳에는 오물 냄새보다 꽃향기가 그득하다. 오물 위에는 철철이 진달래꽃이며 국화꽃잎, 그리고 가랑잎과 메밀가루 같은 ‘자연’이 뿌려지고, 오물은 생명을 살리는 거름으로 태어난다. “도공의 삶과 농사꾼의 삶, 마차를 끄는 두 바퀴와 같다” 김기철 선생은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 어릴 적부터 꽃과 나무 가꾸는 데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그는 도시에 살면서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다. 서울 그의 옛집 넓은 마당은 온통 꽃과 나무로 가득했다. 어느 해 화분을 옮기다가 허리를 다쳐 요양하던 중 도자기 빚는 취미를 붙이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인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마흔다섯 살 무렵 우연히 들른 전통공예 전시회에서 나전칠기장 김봉룡 선생의 작품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평생 한길을 걸어온 위대한 장인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던 기억이 그를 도예가의 길로 이끌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살아왔나?’란 의문과 함께 더욱 진지하고 치열하게 자연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이천의 도자기 가마 곁에 허름한 움막을 하나 얻어 생활했습니다. 운 좋게 근처에 싼 땅을 소개받아서 가마도 짓고 집도 지었지만, 여간 고생이 아니었지요.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을 개간하다시피 했거든요. 지금은 ‘하늘이 내려주신 땅’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정이 들었어요.” 도자기를 시작하면서도 결코 빠른 길을 가지 않았다. 지금껏 국산 육송만을 땔감으로 쓰는 전통 용가마를 고집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에게 도자기는 사람과 감정을 나누는 유기체와 같은 것이어서 ‘인공’이 더해지는 순간 ‘생명’을 잃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물론, 유럽과 미국의 이름난 박물관에 작품이 전시돼 있음에도 웬만해서는 개인전을 열지 않던 그가 모처럼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세오갤러리(☎02-522-5618)에서 ‘자연의 숨결’이라는 주제로 도예전(10월 7일∼11월 4일)을 열고 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바깥쪽 표면에 유약을 바르지 않고 육송의 불길로만 오묘한 빛깔을 내 은은하고 신비한 느낌을 준다. 많은 비평가와 관람객들이 그의 도예작품을 ‘독창적’이라고 칭송하지만, 그는 “그저 자연을 고스란히 옮겼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번 도예전은 가을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디스플레이로도 눈길을 끈다. 트럭 세 대에 가득 싣고 온 억새와 솔잎, 나무 등으로 그가 손수 전시장을 꾸몄다. 관람객들은 작품과 작품의 배경 모두에서 ‘자연의 숨결’을 맡는다. 천상 ‘자연인’인 그에게 자동차란 어떤 존재일까. 김기철 선생은 뜻밖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며 웃는다. 그는 현재 트럭(기아 봉고 1톤 4WD)과 쌍용 렉스턴을 쓰고 있다. 한때는 도자기를 배우러 오던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기아 봉고 코치를 갖고 있었고 지금의 트럭은 농사일이나 작품활동에 필요해 마련한 것이다. 평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대중교통이 불편한 곳을 오갈 때는 운전면허가 없는 그를 대신해 차남이 렉스턴의 운전대를 잡는다. 여러모로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사실 자동차는 그에게 ‘최소한의 필요’에 따른 도구일 뿐이다.
개그맨 정찬우·김태균 컬트삼총사에서 컬투로 다시 선 2004-10-19
서울공연에 이어 전국으로 웃음몰이 나서 컬투의 족보를 따지자면 19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MBC 개그맨 공채 5기였던 정찬우와 김태균은 동기 정성한과 함께 컬트삼총사라는 이름으로 거리공연을 나섰다. 이들은 개그와 공연을 결합한 개그콘서트를 선보이며 스탠딩 개그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에는 남을 웃기는 일이 주로 몸으로 이루어졌다. 우스꽝스런 복장과 과장된 몸짓으로 웃음을 이끌어내는 것이 코미디 프로그램의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컬트삼총사는 개그콘서트를 시작하며 말로 웃기는 진정한 ‘개그’를 보여주었다. “대학 축제나 마을잔치를 찾아다니며 공짜로 공연을 했어요. 관객과 직접 호흡하며 역량을 쌓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꼬박 1년을 공연했더니 개그가 뭔지 조금 알겠더군요.” 이들은 주로 방송보다는 공연을 통해 얼굴을 알렸다. 공연이 인기를 얻으면서 컬트삼총사란 이름도 차츰 일반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8년 동안 컬트삼총사란 이름으로 활동하다 지난해 정성한이 빠지면서 컬트삼총사는 컬투가 되었다. “세 명에서 두 명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TV며 라디오에 열심히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SBS 코미디 프로그램 ‘웃찾사’에 출연한 것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을 한 것도 그런 이유지요.” 컬투는 ‘웃찾사’의 고정 코너를 맡으면서 ‘장하다! 한국말’,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비둘기 합창단’, ‘먹어! 배고프니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특히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김태균이 보여주었던 옥희의 성대모사는 시청자들을 쓰러지게 했다. ‘비둘기 합창단’에서 정찬우 역시 김정일 캐릭터로 분해 웃음을 자아냈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냥 밥 먹다가 문득 떠오르기도 하고 이동할 때 차안에서 생각나기도 하고요. 8년이나 같이 붙어 다녀서인지 ‘아’ 하면 ‘어’ 할 정도로 호흡이 딱딱 맞아요. 그래서 아이디어가 더 잘 나오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지난 6월, 1년 4개월여 동안 해왔던 SBS ‘웃찾사’의 활동을 그만두고 ‘컬투 여름 개그콘서트’를 준비했다. 다시 공연으로 돌아간 셈이다. 공연 제목처럼 처음에는 여름에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8월 6일부터 시작된 이들의 서울공연은 전좌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쭉쭉 올라가는 인기에 힘입어 이들은 지난 9월 18일 부산을 시작으로 수원, 인천, 창원, 대구, 광주 찍고 울산까지 지방공연을 계속할 계획이다. “직접 와서 보시면 훨씬 재미있을 겁니다. TV에서는 할 수 없었던 거친 말들도 많이 나와요. 마술쇼, 음악쇼, 개그쇼, 연인쇼 등 다양한 쇼들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는 영화 ‘올드보이’를 패러디했는데 관객들이 많이 좋아하시더군요.” 김태균은 얼마 전 타고 다니던 지프 그랜드 체로키를 팔았다. 정찬우 역시 스타크래프트 쉐비 밴을 팔고 회사 차로 다닌다. 기름값이라도 아껴 공연에 더 투자하려는 생각에서다. 컬투 개그콘서트는 올 11월까지 계속된다. 방송 심의에 걸릴 일이 없으니 이들의 입담은 더욱 거칠어질 것 같다. 아무렇게나 던지는 듯하지만 말속에 뼈가 있고, 생각 없이 즐겁기만 할 것 같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는 컬투 여름 개그콘서트는 여름을 넘어 가을, 겨울, 어쩌면 내년 봄까지 관객을 찾을지 모른다. 왜? 재미있으니까.
아침고요수목원 설립자 한상경 교수 “중요한 것은 .. 2004-10-19
경기도 가평에 있는 아침고요수목원을 찾는 이는 한해 50만 명이나 된다. 전국에 수목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생겨나는 곳들 대부분이 적자를 보고 있지만, 아침고요만큼은 재투자가 원활하게 이뤄질 정도로 성공한 수목원으로 자리잡았다. 3년간의 준비기간과 불확실한 출발 그리고 성공까지, 설립자인 한상경 명예교수(54, 삼육대학교 원예학과)에게 쉬운 일이 어디 있었을까. 지난해 한 교수가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 펴낸 수필집 ‘아침고요 산책길’(샘터 간)에는 어려웠던 개장 초기의 회상이 실려있다. 진입로 한가운데 커다란 바위를 갖다놓는 사람, 차들이 다니지 못하게 포크레인으로 도랑을 파놓는 사람, 길옆에 필요하지도 않은 축대를 쌓는 사람, 일부러 경운기나 차를 세워놓아 통행을 방해하는 사람, 진입로를 알리는 이정표를 뽑아서 내팽개치는 사람……. 그에게 자연과의 싸움보다 힘들었던 것은 그악스레 길을 막는 사람들과의 대면, 그 과정에서 입은 상처였을지 모른다. “한국정원의 아름다움, 세계에 알리고 싶다” 하지만 8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침고요에서 만난 한상경 교수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넉넉했다. 달라진 것은 ‘명예교수’로 바뀐 그의 직함과 수목원의 풍경이다. 개장 초기만 해도 황량했던 수목원은 이제 빈곳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풍성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시야를 꽉 채운다. 특히 19개의 주제정원 중 하경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하경정원은 그가 제시하고 가꾸고자했던 한국정원의 진수다. “캐나다 빅토리아 섬에 부처드가든이 있습니다. 만들어진 지 1세기가 지난 정원이에요. 특히 그곳의 하경정원은 아름답기로 유명하지요. 항상 부처드가든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이제 어느 정도 이루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특히 아침고요의 하경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정원의 모습은 세계의 어느 정원하고도 겨룰 만합니다.” 아침고요수목원은 올해 관람객들에게 설문지를 돌려서 고객만족도 조사를 했다. 800통쯤 걷힌 설문지를 분석했더니 ‘매우 만족’과 ‘비교적 만족’이 94%에 이르렀다. “나 여기서 죽고 싶어”라고 소리치는 아주머니,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어디 있는 줄 알아? 끝내주는 데 있어”라고 자랑하던 청년……, 관람객들의 행복한 표정은 숱하게 보아왔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그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은 감동을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방황을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어느 한 장소를 보고 감동을 받으면 그 기억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주변에 얘기하고 나누고 싶어하기 마련이지요. 아침고요의 사훈이 ‘가슴속에 감동을’, 행동지침이 ‘아름답게, 깨끗하게, 따뜻하게’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침고요를 사이에 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만남이 소중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한 교수는 이 정도 성과에 만족하는 눈치가 아니다. 얼마 전 27년간 근무한 대학을 떠나 명예교수로 남은 것도 더 많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학교에는 ‘자연을 사랑하는 한상경이 결국 자연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떠난다’는 얘기가 돌았지요(웃음). 더 늦기 전에 할 일이 많다는, 일에 대한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어요. 아침고요에 관한 구상을 한 게 미국 교환교수 시절인데, 이번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한국정원을 만들어 교민들이 긍지를 갖고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 정원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문화적인 점령에 나서자는 생각도 있고……. 구체적으로 결정한 것은 없지만 계획은 몇 가지 갖고 있지요.” 최근 그는 ‘아침고요입양복지회’라는 단체도 만들었다. 몇 년 전 우연히 국내 입양 관련 일을 열심히 하는 이들을 보고 감동을 받았고, 본격적으로 나서지는 못하더라도 지원하고 격려해주는 사람도 필요할 것 같아 시작한 일이다. 일면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수목원과 입양복지회 일의 공통분모는 모든 생명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이다. 한상경 교수가 ‘자연’과 ‘인간 세상’을 바삐 오갈 때 타는 차는 쌍용 렉스턴이다. 82년 면허를 따서 지금까지 현대 포니1, 대우 로얄 XQ, 현대 쏘나타, EF 쏘나타를 타다가 얼마 전에 장만한 차다. 그 가운데 어떤 차가 가장 마음에 들었냐고 물었더니 “탈 때마다 다 좋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자동차에 관한 그의 욕심은 일 욕심에 턱없이 못 미친다.
건축가 황두진 “선하고 소박한 사람이 좋은 건물을.. 2004-09-16
서울 통의동에 자리잡은 황두진(42) 씨의 건축사무소에는 그 흔한 간판 하나 찾아볼 수 없다. 황 씨의 일터임을 알리는 흔적은 대문 옆 기둥에 붙여놓은 작은 명함뿐. 지금 건물로 이사온 지 만 2년이 넘었지만 황 씨에게는 여전히 간판 욕심이 없다. “수십 년 동안 통의동을 지켜온 토박이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고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통의동을 바라보는 건축가 황두진의 예사롭지 않은 시각은 그가 건물을 설계하는 바탕이 되고 세상을 읽는 바로미터가 된다. “좋은 건물이란 주인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 오가며 보는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해요. 건물주는 과시욕 대신 선하고 소박한 마음을, 건축가는 건물이 일개 조형물이 아니라 도시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주위의 모든 사물과 소통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물·환경·문화와 대화하는 건축 통의동은 효자동과 경복궁 사이에 자리한 작고 조용한 동네다. 은행나무 길로 유명한 효자로를 중심으로 길 건너에 경복궁이 보이고 위로는 청와대가, 아래쪽으로는 정부종합청사를 비롯한 주요 행정관청이 밀집해 있는 서울의 중심부. 하지만 통의동은 흑백필름처럼 1950~60년대 모습 그대로이고 이곳을 제대로 아는 이도 거의 없다. “도서출판 열린책들의 사옥을 설계하고 감리를 거치면서 통의동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권력의 통제를 받았던 탓인지 지난 몇 십 년 동안 개발되지 못하고 정체상태에 머물러 있더군요. 완전히 새로워진 서울 안에서 숨어 있던 역사를 발견했다고 할까요?” 건물 한 채를 세우기 위해서는 길과 공간을 이해해야 한다. 황 씨는 열린책들 사옥을 짓기 위해 통의동의 과거를 연구했고 자연스레 서울의 역사와 한국건축의 미래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통의동에 대한 황 씨의 애착은 스스로에 대한 의무감이며 미래전략의 일환인 셈. 그가 생각하는 통의동의 미래는 ‘일하면서 살기에 좋은 동네’다. 주거와 상업의 기능을 접목하되 인사동처럼 상업이 전부가 되어버리는 것은 금물. 황두진 씨는 이에 대한 해답으로 아래층은 사무실로, 위쪽은 거주공간으로 활용하는 ‘저층 주상복합건물 지구’를 구상하고 있다. 건축이 건물과 주변환경간의 어우러짐이고, 엔지니어링과 아트 혹은 디자인의 결합임을 생각할 때 황 씨의 관심사가 비단 통의동이나 건축물에만 매달려 있지 않음은 매우 당연한 일. 특히 자동차의 경우 건축과 비슷한 부분―공간, 편의성, 안전에 대한 고려, 공학설계와 디자인의 조화 등―이 많아 가벼운 관심 이상의 애정을 보인다. “건축물이 움직이지 않는 생활환경이라면, 차는 아주 동적인 생활환경이지요. 건축과 자동차는 실제로 대단한 라이벌이자 동반자적 관계에 놓여 있지만, 국내의 경우 자동차와 건축산업의 깊이 있는 대화가 아직까지 전무합니다. 이제는 폭스바겐의 볼프스부르크나 드레스덴, 아우디 잉골슈타트 같은 ‘자동차 문화단지’가 생겨나야 하고, 또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깔끔하게 꾸며둔 자동차 창고에 불과한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의 자동차 전시장이 그의 마음에 들 리 없다. “롤스로이스 팬텀은 참 못생긴 차이지만 그 속에는 ‘보수와 전통’이라는 롤스로이스만의 명확한 코드가 있어요. 전시장도 마찬가지예요. 자극적이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그 브랜드만의 미학이 잘 녹아든 그런 건물이 있었으면 해요. 우리 대중은 더 이상 금발머리에 속지 않아요. 기능주의나 상업주의적인 한계를 벗어나 문화적인 코드, 매니아적인 코드를 찾아야 하고 저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건축은 지탱해야 할 무게보다 자신의 무게가 더 나가는 모순에 고민하고, 건축가는 건물의 경량화라는 숙제를 짊어지고 산다. 하지만 황두진 씨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었고 그 실마리를 로터스 창업자 콜린 채프먼의 한마디에서 찾을 수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레이싱카는 결승점을 통과했을 때 산산이 부서지는 차다. 왜냐하면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부재와 강도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배우 권해효 로버 미니 타는 소문난 카 매니아 .. 2004-09-14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내려오는 한 남자. 불꺼진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더니 호흡을 가다듬고는 무대 위에 오른다. 잠시 후 조명이 켜지고 남자는 기계처럼 빠른 속도로 대사를 쏟아낸다. 배우 권해효다. 무대 위에서는 연기자, 무대 밖에서는 사회운동가 얼마 전까지 드라마에서 한 여자를 짝사랑하는 순진한 사내를 연기하던 권해효가 이번엔 무대를 바꿔 대학로 연극판에 섰다. 작품은 세 남자의 질투와 우정을 그린 연극 ‘아트’. 이 연극에서 그는 지방대학의 교수인 규태를 연기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트’는 코미디다. 이 연극에서 권해효는 조희봉, 이대연과 함께 수·금·일요일 3일만 무대에 선다. 월요일을 빼고 나머지 3일은 정보석, 이남희, 유연수가 연기한다. 드라마를 끝내자마자 또 다른 드라마를 시작하고, 그것도 모자라 연극에까지 출연하느라 그의 하루는 요즘 바쁘게 돌아간다. “오늘도 전라도 광주에서 촬영을 끝내고 지금 막 올라오는 길입니다. 인터뷰에 TV 출연에 공연까지, 요즘은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바쁜 일상이 싫지만은 않은 눈치다. 역시 그에게는 바쁘게 돌아가는 삶이 잘 어울린다. 쉼 없이 자신을 몰아치는 것이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방식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연기자니 배우니 하는 말 말고도 타이틀이 여럿 붙었다. 그 중에는 호주제 폐지 홍보대사나 탄핵무효 촛불집회 사회자 등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타이틀도 있다. “민가협에서 주최하는 ‘양심수 1일 감옥 체험’ 행사에 참여한 일을 계기로 그해 겨울부터 ‘양심수 석방을 위한 시와 노래의 밤’ 행사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그후 여러 행사에 참여하면서 이런저런 타이틀이 붙게되었지요. 특별히 활동을 열심히 해서라기보다 그냥 연예인이니까 그런 이름들을 붙여준 것 같아요.” 짧은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그는 아주 진지했다. 브라운관에서 혹은 연극에서 보아온 장난스럽고 정신없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본지 8월호 표지를 보고 “야, 인피니티네”라고 감탄할 만큼 그는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자동차 매니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입차는 물론 국산차의 제원과 형식을 줄줄이 꿰고 다닐 정도였다니 그 수준을 짐작할 만하다. 지금도 200여 종의 차쯤은 엉덩이만 보고도 모델이 뭔지 알 수 있단다. “차를 무척 좋아합니다. 지금은 랜드로버 디스커버리와 로버 미니를 몰고 있어요. 디스커버리는 1년 전에 샀는데 덩치가 커서 둔하긴 하지만 긴장감을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그 차를 타면 내가 운전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미니는 제 드림카였어요. 우리나라 차들 너무 밋밋하잖아요. 색상도 그렇고……. 그런 점에서 미니는 정말 재미있는 차지요. 사람들이 다들 제 차를 보면 웃어요. 남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무대 위에서는 연기자로, 무대 밖에서는 사회운동가로 살아가는 권해효는 정말 멋진 남자다. 바쁜 일이 조금 잠잠해지면 그는 또 광화문 네거리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물론 그럴 일이 아주 없기를 바라지만.
음악평론가 이해성 ‘카오디오 음악산책’의 20년지기 2004-09-14
창간 20주년을 맞은 은 20년된 친구들을 많이 갖고 있는 행복한 잡지다. 창간호부터 을 읽으며 자동차에 대한 꿈을 키워온 전국 곳곳의 독자들은 물론이고, 조경철(아폴로박사, 한국우주과학연구소장), 조주청(만화가, 여행가), 이해성(음악평론가), 전영선(자동차연구가) 등 지면을 빛내주고 있는 필자들은 의 20년지기 죽마고우다. 그 가운데 연재를 시작해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음악란을 지켜오고 있는 필자가 음악평론가 이해성(64) 선생이다. 이해성 선생의 첫 칼럼이 에 실린 것은 통권 5호인 85년 1월호. 이번 9월호가 231회째이니 20년 동안, 정확히 19년 9개월 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고 칼럼을 연재해왔다는 얘기다. “장르 불문하고 사랑이 녹아 있는 음악에 관심” “예전 미국에서는 포드 등 자동차 메이커들이 새차를 홍보하기 위해 노래를 만들어 배포하고 그랬어요. 에서 관련 자료를 주면서 이야기를 재미있게 엮어달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담당기자가 ‘얘기 나온 김에 음악칼럼 하나 쓰는 건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시작했는데,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네요.” 말이 쉬워 20년이지, 한 회도 빠지지 않고 20년간 연재를 한다는 것은 보통 필자라면 쉽지 않은 일이다. 해외여행을 떠날 때도 있고, 다른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도 있었지만 그의 ‘카오디오 음악산책’ 원고는 꼬박꼬박 제 날짜에 편집부로 도착했다. 20년 동안 지면을 통해 음악이야기를 풀어왔지만, 그의 가슴속 음악창고에는 아직도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쌓여 있다. 특히 그가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장르를 불문하고 사랑과 감동이 녹아 있는 음악, 작가정신을 지닌 작곡가나 주관을 갖고 활동하는 뮤지션들에 관한 것이다. 이해성 선생은 1964∼75년 동아방송 PD시절부터 미국 팝은 물론 칸소네, 샹송, 제3세계 음악들에 관심을 가졌다. 79∼87년에는 KBS 제2FM에서 ‘세계의 유행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을 직접 진행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월드뮤직’을 다룬 첫 프로그램이어서 반응이 무척 좋았다. 요즘이야 PD, 작가, DJ로 역할이 나뉘어 있지만, 그때는 자료조사부터 원고, 진행까지 혼자 도맡던 시절이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을 소개하려다 보니 자료를 찾는 일이 무척 힘들었지요. 그만큼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고 깊이 알아가면서 세계 곳곳의 음악이 전하는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요즘 한림대에서 ‘라디오제작’을 강의하고 있는데, 학생들에게 늘 강조하곤 합니다. 조금 거창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방송이나 음악이나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이지요. 사랑이 없으면 커뮤니케이션이 안되잖아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칼럼 ‘카오디오 음악산책’의 애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다. 자동차생활 20년 필자이고 독자이면서도 자동차에 대한 욕심은 별로 키워오지 않은 모양이다. 이해성 선생이 지금 타고 있는 차는 8년 된 현대 마르샤다. 71년에 운전면허를 따고 75년에 중고 피아트 124로 첫 운전을 시작했다. 워낙 고물차여서 몇 개월 못 타고 폐차한 뒤 76년 현대 포니를 샀고, 그 뒤 스텔라, 쏘나타를 거쳐 마르샤까지 현대차만 타왔다. “차에 대해서는 욕심이 별로 없는데, 꿈이 하나 있어요. 웹서핑을 하다보니 유럽 푸조에서 유럽인이 아닌 사람에게 차를 리스해주더군요. 비용도 렌터카를 빌리는 것보다 싸요. 한국에서 신청하면 파리 드골 공항에 내리자마자 푸조의 새차를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 차를 타고 프랑스의 해안선을 따라 자동차여행을 한번 해보자, 친한 친구와 이 멋진 프로그램을 놓고 의기투합 중이에요.” 유럽 자동차여행의 꿈이 실현된다면 이해성 선생은 어떤 CD를 챙겨서 파리로 날아갈까. 어떤 곡이 낙점될지는 알 수 없지만, 선곡의 원칙만큼은 20년 전 그가 지면을 통해 들려주었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나치게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은 피해야 한다. 안전운전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조용한 여운을 살려야 하는 음악도 적당치가 않다. 어느 정도의 적정 볼륨을 유지하는 음악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심포니처럼 장시간을 요하는 음악도 적절하지 않다. 자연 차에서 듣는 음악은 이지 리스닝 계열이 부담을 주지 않는다(본지 85년 1월호 ‘카오디오 팬을 위한 음악 산책’에서).’ 올해 안에 이해성 선생의 ‘카오디오 음악산책’ 원고가 프랑스 어느 곳의 인터넷망을 타고 편집부로 날아들기를 기원한다.
건전한 소비와 건강한 제조산업을 만지다 얼리어답터 .. 2004-08-23
리어답터’(Early Adopter)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2년여 전. 당시 신문이나 TV를 통해 소개되던 그들의 모습은 새로 나온 제품이면 무엇이든 사고 싶어 안달하는 소비지향적인 보보스 정도로만 비쳐졌다. 하루가 멀다하게 새로운 트렌드세터 그룹이 생겨나고 세상 풍속이 빠르게 변해 가는 시대에 살다보니 ‘금방 시들어 없어질 유행’으로 치부된 것도 사실. 하지만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소비가 한껏 움츠러든 지금까지도 얼리어답터는 꿋꿋이 살아 있고 이전보다 더욱 왕성한 활동으로 시장경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최문규(35) 씨는 자칫 소비광(狂)으로 내몰릴 수 있었을 대한민국의 ‘얼리’들을 결집하고 시장경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한 인물. 국내에 얼리어답터의 개념을 처음 소개한 것도, ‘얼리어답터’라는 홈페이지를 열고 회사를 차려 이들의 산업적인 가치를 입증한 것도 그의 몫이었다. 쇼핑광에서 제조산업의 조언자로 “대학교 땐가, 정말 갖고 싶은 카메라가 있는데 아무리 해도 돈이 모이질 않는 거예요. 당시 돈으로 200만 원쯤 하는 최고가 제품이었는데, 때마침 건축과 컴퍼티션 최우수상 상금이 그 정도 되더라고요. 다행히 1등에 뽑혔고 상금으로 꿈에 그리던 모델까지 구입했는데, 사고 나니까 다시 다른 물건에 눈길이 가더군요. 친구들에게 ‘이 제품은 이런 부분이 좋다’며 떠들고 다니긴 했지만 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본 일은 거의 없어요.” “쇼핑이 유일한 취미였다”고 밝히는 최 씨의 소비행각(?)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신상품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구입한 제품은 산산이 분해하고 조립해가며 장단점을 줄줄이 꿰고 다녔지만, 제 용도로 쓰인 물건은 손에 꼽을 정도다. 최 씨 자신이 얼리어답터 성향의 사람임을 알게 된 것은 미국에서 교수로 있는 매형 덕분이다. 박사 과정에서 얼리어답터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던 매형이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꼭 얼리어답터다”며 애버릿 로저스가 지은 이란 책을 보내온 것. “은 57년에 첫 인쇄물이 나왔지만 그의 이론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95년쯤 2판 인쇄본이 나왔는데, 30년 넘게 수면 아래 있던 책이 다시 등장한 데는 소비 시장에 어떤 변화가 생겼기 때문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아요. 반도체 기술의 발달로 생겨난 이전과는 다른 혁신적인 카테고리, 디지털 제품의 등장이지요.” 인터뷰 도중 느닷없이 최문규 씨가 꺼내든 물건은 리브리에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 소니의 e북 리더기였다. 기자 눈에는 PDA나 다름없어 보이는 제품. 하지만 “디스플레이 밑에는 실제 잉크가 담겨 있고, 40미크론 크기의 미세한 잉크 입자가 전기신호를 받아 글자를 만들어낸다”는 최 씨의 설명에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최근의 디지털 기기들은 편리하지만 너무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통에 일반 고객들이 자신의 주관만으로 구입을 결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얼리어답터의 역할은 이런 데서 시작됩니다. 먼저 사서 충분히 써보고 소비자에게는 과연 살 만한 제품인지, 기업에는 ‘이런 기능들을 개선하고 보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웹 에이전시 회사를 운영하던 중 동호회 개념으로 문을 연 얼리어답터 홉페이지는 쥐 죽은 듯 살던 전국 ‘얼리’들을 끌어 모으면서 순식간에 아이디어 넘치는 최신 상품의 리포트 보고(寶庫)로 돌변했다. 신상품 출시를 앞둔 기업들은 얼리어답터 사이트 안에서의 홍보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최근에는 제조업 분야의 다양한 회사들에 컨설팅을 해주고 있습니다. LG나 CJ 같은 대기업에는 가까운 미래 출시할 제품의 컨셉트나 마케팅 전략을 제시한다거나 중소업체에게는 품질 보완에 대한 조언과 유통망 소개 등으로 숨통을 틔워주는 거지요.” 최문규 사장 앞으로 하루에 많게는 100여 건의 컨설팅 의뢰가 들어오기도 한다. 중소기업 제품이 워낙 많지만 그 중에는 출시 자체가 무리인 것도 적지 않다고 한다. 지난 2~3년 동안 그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오며 바라본 제조산업의 현실은 그리 밝지 못하다. 대기업은 뻣뻣하고 보수적이라 재미없고 중소기업은 품질이나 아이디어가 떨어져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다. “소비자들이 품질 낮은 제품을 별다른 불만 없이 잘 쓰니까 기업도 더 잘 만들어볼 노력을 하지 않아요. 우리나라가 일본을 능가하는 제조왕국이 되려면 제조업체나 소비자 모두 제품 얘기를 정말 많이 해야 되요. 중소기업이 살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건전한 소비를 촉진하는 ‘오피니언 리더’로서 저를 포함한 얼리어답터의 역할은 앞으로가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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