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Mercedes-Benz E-Class Experien.. 2007-02-14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중앙아시아 에카테린부르크까지의 2,700km. 현대의 수도 모스크바를 거치는 이 코스는 러시아의 심장부를 가로지른다. 메르세데스 벤츠 E320 CDI 군단은 화려한 현대도시와 광막한 대평원, 초라한 농촌풍경과 열악한 도로와 맞섰다. 옛 러시아 수도를 떠나 새 수도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구 소련 시절에는 레닌그라드라 불렸다. 볼셰비키 혁명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을 딴 혁명의 발상지. 물론 그 뒤 수도는 모스크바로 옮겨 앉았다. 페테르부르크 시내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에르미타즈 미술관과 에카테리나 궁전을 비롯하여 문화유산이 많다. 잘 정리된 운하의 도시로 북구의 베네치아라고도 한다. 푸틴 대통령의 정치근거지이기도 해서, 도시 일대가 외국 메이커를 비롯한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2레그 참가자들은 호텔에서 1레그를 달려온 참가자들을 만나 E320 CDI 인수인계를 마치고 함께 축하행사에 참석했다. 하룻밤을 보낸 이튿날 아침 7시 30분.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아직 어둠에 싸였고, 매서운 칼바람이 광장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각국의 국기 색으로 장식한 32대의 E320이 20여 대의 지원차와 함께 줄지어 서 있었다. 첫날의 목적지는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거리는 700km를 넘었다. 당장 출발하지 않으면 밤중에야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서둘러 루트 확인방법을 배웠다. 이 나라에서는 일반적인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장정 참가자들은 소형 GPS와 정밀지도를 비교하면서 달려야 했다. GPS에는 지나가야 하는 체크포인트가 표시되어 있다. 그보다 더 세밀한 지도에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갈 때의 거리와 방향이 그림과 숫자로 나와 있다. 아울러 그 지점에서 회전이냐 직진이냐, 또는 주의사항이 무엇인지를 적어놓았다. GPS 모니터에도 지도가 있기는 하지만 아주 엉성했다. 거의 아무 표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한 번 길을 잃으면 궁지에 몰린다. 따라서 내비게이터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다. 그런데 지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체크포인트는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출발지점인 페테르부르크 광장을 떠난 뒤 두세 번 좌우로 회전하고 나면 어디를 가나 직진. 처음으로 조작해야 하는 지점은 200km나 떨어진 Y자 갈림길이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직진, 직진, 직진에 우리는 어리둥절했다. 레그별로 교대하는 각국 저널리스트들과는 달리 벤츠 관계자들은 전 구간을 달려야 한다. 그중 전속 카메라맨이 1레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폴란드 이후 도로는 거의 이처럼 직선의 연장이라고 무선을 통해 알려주었다.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이 점점이 박혀있는 광대무변한 대평원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나라마다 국토가 상대적으로 좁아 국경을 넘는 변화가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러시아에 들어온 뒤로는 중앙아시아의 목적지까지 오로지 한 나라.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저 아득했다. 좁은 땅에서 살아온 우리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첫날의 목적지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수도. 출발지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에 이은 제2의 도시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로 문화의 향기 높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정치 중심 모스크바를 잇는 지역은 러시아의 심장부인 셈. 멋진 고속도로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도시 부근에는 분명히 6차선은 됨직한 도로가 있었다. 그러나 1시간을 달리기도 전에 중앙분리대도 없이 좁은 한 줄기 도로가 막막한 광야를 꿰뚫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물딱지 라다마저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렸다. 이쯤 되면 마주 달리는 차들은 시속 200km가 넘는 스피드로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과연 제한속도가 얼마인지 알고 싶어 도로표지를 살폈다. 모두가 알 수 없는 러시아의 키릴 문자로 쓰여 있을 뿐이었다. 노면에도 제한속도 표시는 없었다. 게다가 대도시를 벗어나면 도로는 어째서 그렇게도 나쁜지 강대국 러시아의 현실에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틈이 갈라지고, 구덩이가 곳곳에 나 있었다. 바퀴자국인지 도로가의 배수로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서방 국가의 도로에 비해 너무 뒤떨어진 노면에 입이 딱 벌어졌다.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고 보았던지 재포장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우리가 달린 구간을 재포장하는 데도 오랜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다. 보수해야 할 도로가 너무나 많았다. 게다가 공사현장에서는 일을 다그치는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차와 카이엔이 뒤섞인 도로 러시아에서는 새로운 현재와 낡은 과거가 뒤섞인 장면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도시든 교외든 어디나 마찬가지다. 대도시에는 고급 브랜드 전문점이 즐비하고, 초호화 호텔이 거대한 성처럼 우뚝 솟아 있다. 하지만 그런 대도시에서 1시간만 달려 나가면 초라한 오두막이 여기저기 박혀있다. 상수도마저 없을 듯 퇴락한 집들이 을씨년스러웠다. 1989년 소비에트 체제의 몰락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에 맞선 세계 제2의 초강대국 소련의 자취는 참담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사이에 끝없이 펼쳐지는 빈곤지대는 새 러시아가 맞서야 할 중대한 도전이었다. 도로를 달리는 차도 사정은 비슷했다. 낡아빠진 구시대의 유물과 서방에서 흘러들어온 고성능차가 뒤섞여 있었다. 마차와 포르쉐 카이엔 터보가 같은 길을 달렸다. 러시아인들의 운전 자세는 너무나 공격적이어서 간담이 써늘했다. 밀어붙이다 안 되면 들이받을 자세였다. 맹수가 득실거리는 정글을 연상시키는 아수라장. 결국 압도적인 파워를 믿고 우리도 밀어붙이기로 했다. 둘쨋날.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 대열은 모두 크렘린 앞 붉은 광장에 모였다. 최근에는 라이브 록 공연 등으로 광장이 개방되었다. 그러나 지난날에는 사회주의 종주국의 군사 퍼레이드로 이름난 무력 시위장이었다. 게다가 자본주의 선진국의 첨단 브랜드 벤츠, 그것도 최신 E320 CDI 32대에 지원차를 합쳐 50여 대가 포진했다. 제2일의 목표는 볼가 강변에 자리잡은 니즈니 노브고로드. 상공업도시로 옛날에는 고리키라 불렀다. 군사요충지이기도 해 16년 전까지 외국인은 고사하고 소련 민간인도 들어가기 어려웠던 곳이다. 점점 소련 사회주의 연방의 색채가 희미해지는 지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서의 거리는 424km. 비교적 짧은 거리였지만 노면은 한층 거칠었다.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피로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참가자들은 밤늦게야 시내에 들어왔다. 자작나무로 유명한 러시아 숲 속 임도로 빠져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영혼마저 빼앗는 그 무한 자연의 품속은 황홀했지만, 마침 하늘은 흐렸고 해가 지자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혔다. 헤드램프가 100m쯤 앞을 비췄지만 그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데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난데없이 불쑥불쑥 사람이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다. 사방 어디를 보나 줄잡아 50km 이내에는 도시도 마을도 없었던 듯했다.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지……. 그날 저녁 호텔에서 식사를 하며 러시아 도로표지판, 특히 제한속도 표시에 대한 비밀을 알아냈다. 마침 러시아 지식인이 자리를 같이하여 우리에게 교통규칙을 알려 주었다. 러시아의 도로 속도는 천편일률적. 편도 2차선 이상의 도로는 시속 110km, 편도 1차선은 시속 90km, 그리고 시내에서는 시속 60km. 너무나 명쾌하여 굳이 장소에 따라 제한속도를 표시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시내 입구는 흰 바탕에 검은 키릴 문자로 적어놓은 표지판이 알려준다. 똑같은 표지판에 붉은 사선이 그어져 있으면 시내를 벗어난다는 표시. 카잔에서 페르미까지 폭설 뚫고 달려 이 때까지는 대장정을 잘 견뎌냈다. 그러나 3일째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타타르 공화국 수도 카잔을 향해 달리는 길이었다. 참가차 중 한 대가 크레바스처럼 쩍 벌어진 구멍을 피하지 못하고 오른 타이어 사이드월이 펑 뚫렸다. 스페어타이어로 바꾸는 것만으로 일은 끝났다. 그러나 러시아 도로사정은 정말 심각했다. 그런 가운데 4일째 아침을 맞았다. 페르미까지 690km를 달려야 했다. 차 안에서는 대화마저 끊어지고, 싸늘한 샌드위치를 씹어야 했다. 참가자들은 화장실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호텔에 가면 맑은 물이 나올까 하는, 실로 하찮은 걱정거리에 정신을 빼앗겼다. 즐거운 대화를 찾아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발 이후의 경험에 비추어 690km를 어둡기 전에 주파하기란 불가능했다. 도중에 본격적으로 눈이 오기 시작하면서 참가자들은 달리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대열의 E클래스는 미쉐린의 겨울 타이어 파일럿 알핀을 신고 있었다. 현지 차들은 정체불명의 여름 타이어를 그대로 신고 달리는 장면이 자주 눈에 띄었다. 여기저기서 사고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바퀴가 잠긴 채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트레일러마저 있었다. 교통량이 많은 도로를 계속 달리자니 겁이 나 사타쿠니가 시큰거렸다. 그때 마침 옆길로 우회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향을 틀었다. 그것도 잠시. 하늘을 찌르는 시커먼 숲속에 뚫린 좁은 길로 들어섰다. 영락없이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나직이 덮이고 눈이 펑펑 쏟아졌다. GPS가 약간 빗나갔는지 앞길이 불안하기만 했다.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고가 나서 숲 속에서 위기에 몰려도 누가 찾아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절로 등골이 오싹했다. 그나마 신뢰성과 안전성이 높은 벤츠여서 천만다행이었다. 잔뜩 겁에 질려있을 때 마침 ‘페르미’라고 알아볼 수 있는 도로표지판이 나왔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시무시했던 숲도 이튿날 해가 떠오른 뒤 바라보니 아름다운 침엽수림이었다. 5일째가 되자 참가자들은 노하우가 쌓여 자신이 붙었다. 러시아의 길이 익숙해져 한결 마음이 놓였다. 며칠에 불과했지만, 사람들은 실로 오랜만에 느긋하게 목적지를 향했다. 필요한 사진 촬영에도 시간을 많이 내며 한껏 장정을 즐길 수 있었다. 2레그의 최종목적지 에카테린부르크까지는 비교적 순조롭게 달렸다. 에카테린부르크는 우랄산맥 너머에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대척추 우랄을 넘었기 때문에 사실상 아시아의 서쪽 끝이다.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달된 문화의 경계임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2레그 마지막 날 컴퓨터 기록에 따르면 전체 주행거리는 2,779km, 평균시속은 62km, 연비는 11.6km/ℓ 였다. 3레그에 참가할 팀의 도착날짜가 하루 남아 있는 탓에 멋진 인수인계식이 없어 허전했다. 자동차를 무사히 넘기고 난 뒤 참가자들은 보드카로 축배를 들었다. E320 CDI의 모든 성능을 발휘하여 지형과 기후를 극복하고 러시아 대륙을 횡단한 뜻깊은 대장정의 한 토막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
Koln Karneval 부어라 마셔라, 쾰른의 다.. 2007-02-12
쾰른은 남부독일의 중심지로 로마시대 때부터 번영을 누린 곳이다. 로마는 사방으로 영토를 넓혀 라인강을 북쪽 국경으로 삼았는데, 북쪽 변방의 중심지가 쾰른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식민지라는 뜻의 Colonia에서 유래한다. 쾰른은 795년 카를 대제가 대주교구를 이곳에 설치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중세에는 한자동맹의 일원으로 상업과 교역 중심지 역할을 했다. 2차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복원작업을 거쳐 산뜻한 느낌을 주는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했다. 세상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있을 뿐이지만 쾰른에는 제5의 계절이 있다. 바로 도시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드는 쾰른 카니발 기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비슷한 시기에 축제를 벌이지만 쾰른 카니발에만 제5의 계절이란 별칭이 붙은 것은 축제에 대한 쾰른 시민들의 애정이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이다. 1823년 시작된 유럽 최대의 카니발 1823년 시작된 쾰른 카니발은 세계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로 자리잡아 브라질의 리우, 이탈리아의 베니스 카니발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카니발은 원래 사순절(부활절까지 40일의 금욕기간)이 오기 전에 먹고 마시며 놀던 전통에서 비롯된다. 쾰른 카니발도 종교적 제의에서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오락과 유희적인 성격만이 남았다. 유럽 최대의 축제답게 쾰른 카니발 기간 중에는 각국에서 관광객이 모여들어 광란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2005년에는 15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쾰른을 찾아 카니발의 열정을 마음껏 즐겼다. 카니발 기간에는 상점은 물론이고 쾰른의 상징인 대성당도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축제를 만끽한다. 축제기간 중 거리와 술집에서 만나는 독일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따뜻하고 쾌활하다. 쾰른 카니발은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 11분 쾰른 시내 구시가지 광장에서 수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흥겨운 공연과 함께 시작되어 3개월간 이어진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거나 춤을 추며 자축하고, 술을 나눠 마시기도 한다. 각양각색의 복장과 페이스페인팅을 한 사람들이 하루 종일 춤추고 마시고 노래 부르며 흥을 돋군다. 이날이 지나면 축제기간이라는 걸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는 2월이 되면 도시 전체가 열광의 도가니탕으로 돌변한다. 쾰른 카니발은 사순절 전의 6일간 절정에 달하는데, ‘여인들의 목요일’로 알려진 목요일에 시작되어 다음주 화요일까지 계속된다. 여인들의 목요일에는 이른 아침 전통의상을 입거나 독특한 분장을 한 여인들이 구시가지 광장에 모이기 시작해 11시 11분 공식적인 축제의 개막을 알린다. 여인들의 목요일은 글자 그대로 여자들의 날이다. 여자들이 떼지어 다니며 보이는 대로 남자들의 넥타이를 잘라 버린다. 길거리는 물론이고 학교와 회사에서도 넥타이를 잘라 버리기 때문에 이날만큼은 넥타이를 매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여인들의 목요일부터 도시는 흥청대는 축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든다. 시민들은 일손을 놓고 카니발을 마음껏 즐긴다. 쾰른 카니발이 열리는 기간에 라인강 유역 도시들도 카니발을 펼치지만 많은 사람들이 쾰른 카니발을 즐기기 위해 모여든다. 이른 아침부터 쾰른역은 독일 전역에서 모여드는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이들에게는 공동점이 있는데, 각양각색의 복장과 분장을 하고, 손에는 술병을 들었다는 점이다. 술 취하고, 싸우며 즐기는 축제 축제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이지만 쾰른 카니발은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니발의 참가자들은 대부분 아침부터 밤 늦도록 술을 마신다. 시민뿐만 아니라 관광객도 술병을 들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축제기간 중에 소비되는 술만 수백억 원어치에 달한다고. 가장 많이 마시는 술은 쾰른 근처의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맥주 쾰슈(Kolsch)로 맥주로 유명한 독일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맛이 일품이다. 평소에는 조용한 이곳이 축제 기간만큼은 시내 곳곳에서 경찰차와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끊이지를 않는다. 카니발 기간에는 곳곳에서 과음으로 쓰러진 사람, 사소한 시비로 뒤엉키는 사람 등 평소 독일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일탈행동이 자주 목격된다. 쾰른 카니발은 일탈행위조차 관대하게 수용한다. 적당한 일탈과 파격은 카니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쾰른 카니발은 ‘장미의 월요일’로 불리는 로젠몬탁(Rosenmontag)에 절정에 달한다. 이날은 모든 상가가 문을 닫고 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뒤엉킨 가운데 11시 11분부터 화려한 도심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퍼레이드의 앞에서 수십 팀의 악대가 길을 트면 무개차, 기마대, 광대 등 다양한 행렬이 뒤를 따른다. 가장행렬이 지날 때면 거리에 늘어선 구경꾼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초콜릿을 달라며 “카멜레” 하고 외친다. 그러면 무개차에 탄 사람들이 과자와 사탕, 초콜릿, 꽃다발 등을 마구 뿌린다. 카니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행사로 꼬마들은 맨 앞에 서서 봉지를 들고 무언의 압력을 넣기도 한다. 시민들은 보안관, 신부, 수녀, 광대, 카우보이, 경찰, 중세기사, 인디언, 꿀벌 등 다양한 복장을 갖춰 입고 퍼레이드 뒤를 따른다. 카니발 기간에 참가자들이 써대는 카니발 의상과 소품비가 3억 유로가 넘는다니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상의 억눌림 훌훌 털어 버리는 자리 6∼7시간에 걸쳐 벌어진 흥겹고 떠들썩한 퍼레이드가 끝나면 사람들은 바나 펍, 댄스홀, 레스토랑 등에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카니발 노래를 부른다. 이처럼 흥겨운 축제 분위기는 화요일까지 이어지다 ‘재의 수요일’이 되면 서서히 막을 내린다. ‘재의 수요일’에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축제 기간 동안 벌인 방탕한 생활에 대한 속죄의 표시로 누벨(Nubbel) 인형을 태우는 행위가 벌어진다. 카니발이 종교적인 색채에서 놀고 즐기는 유희와 공동체를 단결시키는 기능으로 변했듯이 누벨 태우기 또한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축제기간의 방탕한 생활과 일탈에서 벗어나 일상생활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축제가 끝나면 부활절까지 40일 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 금욕기간이 시작된다. 한마디로 카니발은 금욕기간 전에 실컷 먹고 마시면서 일상에서 억눌렸던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다. 쾰른 카니발은 ‘축제의 본질은 인간의 의식을 지상에서 가장 즐거운 상태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는 프랑스 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참가자 모두에게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쾰른 카니발에서는 구경꾼은 찾아보기 힘들다.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축제의 열정과 흥겨움을 만끽한다. 질서와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독일 사람들도 축제기간만큼은 일상생활을 지배하던 이성을 접어두고 광란의 세계로 돌아가 억제된 감정을 한껏 발산한다. 박제된 일상의 공간과 생활에서 무뎌진 가슴에 다시금 삶의 열정을 불어넣어 주는 쾰른 카니발은 새로운 1년을 버텨 나갈 힘의 원천이요 희망인 것이다. 여행정보 교통 우리나라에서 쾰른까지 바로 가는 비행기는 없다. 아시아나항공이나 독일항공을 이용해서 프랑크푸르트로 간 다음에 비행기를 갈아타거나 기차로 쾰른으로 들어간다. 쾰른은 라인강 유역의 교통 중심지로 프랑크푸르트(1시간 30분), 뮌헨(4시간 30분), 하이델베르크(2시간), 베를린(4시간 30분) 등 독일 주요도시는 물론이고 암스테르담, 브뤼셀, 파리 등으로 매일 국제선 열차가 연결된다. 관광안내소 쾰른 중앙역 옆 대성당 맞은편에 있다. 쾰른 카니발의 일정과 퍼레이드 코스가 그려진 지도를 얻을 수 있다. 호텔 정보와 간단한 기념품도 판다. www.koeln.de 여행 팁 쾰른은 볼거리가 많은 곳은 아니다. 게다가 카니발 기간에는 모든 상점과 박물관이 문을 닫는다. 쾰른의 대표적인 볼거리는 기차역 옆에 있는 대성당이니 도착하면 대성당을 돌아본 후, 카니발 퍼레이드를 즐기도록 한다. 라인강이 대성당 뒤로 흐른다. 호텔 카니발 기간 중에는 예약 없이 호텔을 구하기가 힘드니 가능하면 예약을 하고 간다. 예약을 못했다면 관광안내소에서 약간의 수수료를 받고 예약을 대행하니 고생하며 직접 찾아다니지 말고 관광안내소를 이용하자.
BVLGARI RESORT 2007-01-16
에메랄드빛 바다와 이국적인 풍경, 다채로운 민속축제까지 발리에서의 즐거움은 끝이 없다. 바로 이곳에 로맨틱한 즐거움을 더할 공간이 하나 더 생겼다. 신들의 놀이터라고 불러도 부족함 없을 불가리 리조트. 최고 브랜드에서 만든 리조트답게 불가리와 메리어트호텔 럭셔리그룹이 공동운영한다. 인테리어는 이탈리아의 유명 건축 디자이너 안토니오 치테리오가 맡았다. 오션 뷰를 자랑하는 최고급 풀 빌라 2006년 9월 문 연 불가리 리조트는 발리 섬 남단, 짐바란 반도 남쪽 끝 울루와뚜 사원 근처에 있다. 해안가에 수직으로 150m나 치솟은, 깎아내린 듯한 높은 절벽 위에 자리해 인도양이 시원스레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매력이다. 덴파사르 공항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린다. 불가리 리조트는 기본형인 침실 1개짜리 오션 뷰 빌라와 오션 클리프 빌라, 침실 2개짜리 투 베드룸 빌라 3채와, 최고급 불가리 빌라 한 채를 포함해 총 59채의 풀 빌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독립된 형태인 빌라는 두개의 메인 침실, 침실과 똑같은 크기의 욕실, 바가 있는 안락하고 커다란 거실, 넓은 테라스를 갖추고 있다. 모든 객실은 수영장이 딸린 ‘풀 빌라’로 완벽한 프라이버시와 고품격 휴식을 추구한다. 독특한 구도로 지어진 빌라에는 발리인들의 고전적인 예술의 조각들이 가득하다. 이 조각들은 현대적인 느낌과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환상적인 것은 전망이다. 모든 객실에서 인도양의 멋진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오션 뷰가 자랑. 수영장의 끄트머리를 지워 버릴 정도로 물이 가득한 개인 풀장 끝으로는 바다가 이어지는 듯하다. 머나먼 바다로 둥실 떠내려갈 것 같은 환상을 품에 안을 수 있는 특별한 추억은 불가리 리조트 에서만 가능하다. 휴식도 명품, 불가리 스타일을 만나다 불가리의 모든 객실에는 대리석 욕조, 스테레오 시스템, 각종 편의용품을 비롯해 금고, 무선 인터넷 커넥티비티 등이 준비되어 있다. 빌라 침실에는 ‘메이드 인 이탈리아’ 침구와 발리 공예인들이 짠 침대보가, 또 발리 골동품과 ‘뱅앤올룹슨’ TV가 ‘믹스 앤 매치’되어 있다. 리조트 안의 이 모든 물건에는 ‘불가리’라는 브랜드가 쓰여 있다. 브랜드의 힘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불가리 리조트는 선탠하고 스파에 들렀다 앤틱 쇼핑을 즐기는 정도로, 휴식다운 휴식을 찾는 여행자들을 위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리조트 부대시설은 스파, 레스토랑 2곳, 야외 바, 수영장, 헬스장 정도뿐인데, 하나씩 따져 보면 그 멋과 품위가 다르다. 특히 불가리 리조트의 스타일은 ‘발리의 전통과 이탈리아 미감의 만남’으로, 전체적 인테리어는 발리 가옥의 전통을 살리면서 이탈리아적 감각으로 마무리해 이국적인 멋을 더한다. 불가리가 자랑하는 스파 하우스는 자바 섬에서 통째로 옮겨온 200년 넘은 목조건물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곳 불가리 리조트에 짝퉁은 없다. 미니바의 티스푼 세트부터 마치 갤러리처럼 보이는 매장에서 판매하는 골동품, 기프트 숍에서 판매하는 명품 불가리 상품까지 모두 오리지널이다. 독특한 멋과 함께 즐기는 레스토랑 밀라노의 불가리 호텔에서 이름을 딴 ‘the bar’는 깔끔한 이탈리아 스타일에 발리 장인의 기술이 만나 독특한 멋을 자아낸다. 바닷가 절벽의 가장자리에 있어 하루 종일 상쾌한 바람을 느낄 수 있으며, 웅장한 일몰을 바라보기에도 명당이다. 열대 아일랜드의 신선한 칵테일과 풍부한 맛의 이탈리아 커피를 즐기는 것도 특별하다. 인도네시안 새장의 이름을 딴 ‘산카르’(SANGKAR)는 전통적인 수탉의 새장에서 영감을 받아 테마로 했으며, 아시안 요리와 전통 발리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심플하면서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발리의 장인이 디자인한 SANGKAR의 테이블보는 발리와 이탈리안 스타일을 모두 담고 있다. 70석의 좌석은 나무와 돌을 패널기법을 이용해 디자인되었고, 실외공간은 인도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태양이 하루 종일 들어오도록 설계되었다. 발리 최상의 레스토랑 ‘일 리스토란테’(IL RISTORANTE)도 불가리 리조트와 함께 오픈했다. 큰 유리잔, 이탈리안 린넨, 최상의 유기농 재료 그리고 빈티지 와인을 나무랄 데 없는 서비스와 함께 만날 수 있다.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이곳은 발리문화와 이탈리안 스타일을 완벽하게 조화시켰다. 특히 태국 왕실의 플라워 디자이너 사쿨 인타쿨(Sakul Intakul)이 디자인한 꽃장식과 캔들 라이트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한층 더 자아낸다. 로맨틱 패키지도 불가리! 불가리만의 특별한 로맨틱 패키지도 지나칠 수 없다. 신혼부부라면 헬리콥터 투어 코스 ‘불가리스 시그네쳐 익스피리언스’(Bulgari’s Signature Experience)를 놓치지 말라. 헬리콥터 안에서 매혹적인 울루와뜨 사원의 전망과 그림 같은 짐바란 해변을 관망한 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비치에 착륙하여 둘만의 로맨틱한 순간을 보낼 수 있으며, 최고급 요리로 준비된 피크닉 런치를 즐길 수 있다. 타바난(Tabanan)의 서쪽 블라유(Blayu) 마을의 로얄 패밀리를 방문해 세기에 걸친 그들의 문화와 부유함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엣 홈 인 발리’(At Home In Bali)와 성스러운 바뚜르(batur) 산에 올라 해맞이를 볼 수 있는 ‘선라이즈’(Sunrise)도 기억에 남을 것이다. 또한 그룹과 함께 산악자전거를 타고 조용한 페카투(Pecatu) 마을을 도는 코스와 짐바란 해변의 피시마켓투어를 하며 발리 어부들의 애환을 나누어 보는 코스도 마련되어 있다. 문의l제이슨여행사 02-515-6897, www.jasontravel.co.kr
빙하가 흐르는 알프스의 땅을 걷다 2007-01-16
유럽 여행자들에게 스위스와 알프스는 동경의 장소다. 하지만 스위스 인터라겐에서 출발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기차역인 융프라우요흐(3천454m)를 단 하루 만에 둘러보는 여행만으로는 2% 부족하다. 봉우리 밑에 둥지 튼 산악마을에 머물며 알프스의 ‘흙’을 밟고 ‘향기’를 맡아야 유럽인들이 그토록 칭송하는 융프라우의 진정한 멋을 느낄 수 있다. 융프라우와 그곳에서 뻗어나온 알레치 빙하가 알프스 최초로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이곳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늘고 있다. 산악열차를 타고 아이거 북벽을 거쳐 융프라우요흐에 오르는 설렘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빙하 위에 자리잡은 산악마을 그린델발트는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기점일 뿐 아니라 다양한 체험의 숨은 아지트다. 이곳의 빙하는 아직도 움직이고 있고,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 등 세 개의 봉우리는 신나는 체험을 숨겨놓은 채 나란히 그린델발트를 에워싸고 있다. 그린델발트에서의 체험은 융프라우요흐에 오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봄, 가을이 되면 그린델발트는 호흡이 빨라진다. 하이킹, 바이킹, 트레킹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겨울, 해질 무렵 문을 닫던 거리의 상가들은 이때만 되면 밤 10시까지 문을 연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배낭족들과 어울리며 고요한 마을이 흥청거린다. 배낭족들은 마르마르부루흐 계곡에서 번지점프를 하거나 자전거를 빌려 인터라겐까지 질주하기도 한다. 빙하가 녹은 뤼취넨계곡으로 래프팅 매니아들도 몰려든다. 수천m 설산 속을 가르는 패러글라이딩은 인터라겐 공원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패러글라이딩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듯 그린델발트는 작은 산악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트레킹과 각종 액티비티의 보물창고라는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거리의 상점들 역시 일상적인 관광상품이 아닌 트레킹, 액티비티 매니아들을 위한 용품들로 채워진다. 각종 장비를 배낭에 잔뜩 실은 채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거나 곤돌라에 오르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융프라우 지역에만 76개, 총 200km 트레킹 코스가 있고, 능선과 능선을 잇는 트레킹 코스는 꼬박 한나절이 걸린다. 바흐알프 호수가 만들어낸 데칼코마니 융프라우 일대 트레킹의 최고봉은 피르스트에서 체험할 수 있다. 해발 2천168m의 피르스트 마을에서 바흐알프 호수까지 이르는 트레킹 코스는 평이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어 이곳을 찾는 트레킹족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린델발트역에서 걸어서 10분. 피르스트로 향하는 곤돌라에 오르면서 가슴 설레는 트레킹은 시작된다. 곤돌라 아래로 펼쳐지는 정경 자체가 농익은 계절의 흐름과 짙은 알프스의 향기를 담고 있다. 세모지붕 샬레풍의 집들이 옹기종기 늘어선 가운데 양곱창처럼 지그재그로 늘어선 오솔길이 스쳐 지난다. 푸른 풀밭은 짙은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단풍숲과 어우러지고 그 시선은 하얀 설산으로 이어진다. 정상으로 향하는 산악열차들이 마을을 강처럼 에워싸며 고즈넉하게 오르는 모습도 보인다. 봉우리마다 흰눈이 덮였지만, 산마루로 내려오면서 집집마다 푸른 정원에 야생화를 피어낸다. 간이정거장인 보르트와 쉬렉펠트를 지나면 곤돌라의 종착점인 피르스트다. 이곳 피르스트에는 ‘마운틴 로지’라는 산장이 이방인들을 먼저 반긴다. 하루 묵을 수도 있고, 등산화도 빌릴 수 있으며 설산을 바라보며 그윽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이다. 로지 앞에는 설산이 내려다보이는 교회당이 자리잡았는데 이 고요한 산자락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한다. 열 평 남짓한 교회당이지만 창밖에 펼쳐지는 풍경만으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웅장한 결혼식이 될 것이라는 상상에 빠지게 만든다. 교회 밑은 이 일대 최고의 패러글라이딩 출발 포인트가 자리잡았다. 2천m 넘는 곳에서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를 바라보며 하늘을 나는 체험은 피르스트 트레킹의 또 다른 흥분촉진제다. 피르스트에서 시작되는 산행길은 키 작은 풀과 야생화로 가득 채워진다. 이곳은 낮은 평균 기온 탓에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단풍과 낙엽으로 채색된 산 아래 공간은 관목지대를 벗어나면서 푸른 풀밭으로 이어진다. 그 지리한 풀밭은 알프스의 젖소들에게는 귀한 터전이 됐다. ‘딸랑’거리며 귓전을 간지럽게 하는 소 방울소리는 산등성이를 가득 메우더니 산자락을 갈색 톤으로 뒤덮는다. 부드러운 풀에 매혹돼 쉴새없이 되새김질을 하던 이곳 소들은 가을을 넘어서면 보금자리로 돌아가는데 이 시기가 되면 소들의 행렬이 그린델발트 도로를 빼곡히 메우는 이색 광경을 볼 수 있다. 산행길에는 소들이 함부로 지나다닐 수 없도록 지그재그형 나무문을 만들어 놓았다. 나무가 자라지는 않지만 바흐알프 호수로 향하는 트레킹 코스에는 족히 4m는 됨직한 나무기둥들이 듬성듬성 꽂혀 있다. 이곳 산악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눈이 쌓였을 때를 대비해 길을 표시하려고 꼽아놓은 것이라는데 그 높이를 보면 이곳에 얼마나 눈이 많은 오는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산행길에는 융프라우에서 내려오는 거친 빙하수와 달리 산길을 따라 냇물이 졸졸 흐르는 정겨운 장면이 연출된다. ‘끼익끼익’ 새소리를 내며 알프스 바위에서만 서식하는 두더쥐과의 마벗도 발견할 수 있다. 1시간 30분 남짓 여유롭게 계속된 산행은 그 높은 산자락에서 그림 같은 호수를 만나는 것으로 큰 숨을 돌린다. 바흐알프는 이곳 스위스 홍보책자에 단골로 등장하는 호수로 설산과 베르니즈 알프스의 봉우리가 데깔코마니로 찍어낸 듯 대칭을 이루며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대부분의 산행객들이 갈 길을 멈추고 호수의 정경에 한동안 넋을 잃거나 아예 바닥에 주저 앉아 간식을 먹기도 한다. 빙하가 녹아 형성된 이곳 호수는 물이 너무 차가워 고기도 살지 못하고 수영을 할 수도 없다. 피르스트 산행의 재밋거리는 하산길에도 숨어 있다. 곤돌라를 타고 보르트에 내리면 짜릿한 그린델발트까지 신나는 액티비티를 체험할 수 있다. 이곳에서 대여해주는 스쿠터 바이크를 타고 꼬불꼬불 오솔길을 따라 알프스마을의 구석구석을 더듬으며 질주하면 페달도 없는 자전거가 웬만한 스피드 바이킹을 능가하는 재미를 선사하다. 그린델발트의 곤돌라 출발점까지 스릴 넘치는 코스가 이어지며 산행의 땀방울이 알프스의 산바람과 함께 저절로 식혀지는 묘미가 있다. 120m 빙하계곡에서 스릴 넘치는 점프를 산행을 마친 뒤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이색체험을 즐기고 싶다면 그린델발트 인근의 마르마르브루후 협곡으로 향한다. 깎아지른 절벽이 양쪽에 내리꽂힌 협곡 사이에 덩그러니 점프대가 놓여 있는데 국내 번지점프대의 높이가 50m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무려 70m나 더 높은 곳에서 극한체험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점프대 양쪽에는 빙벽들이 날카롭게 솟아 스치기만 해도 몸이 박살날 것 같은 공포감을 불러 일으킨다. 협곡 사이에서 뛰어내리는 점프는 이곳 사람들에게 ‘캐니언 점프’(canyon jump)로 불리며 아래로 급강하한 뒤 매달린 줄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협곡 사이를 가로지르게 된다. 위아래에 보호장비가 완벽하게 착용되면 서명부터 받는데 대충 훑어보면 ‘이대로 죽어도 괜찮다’는 내용으로 서약서의 마지막 내용마저 가슴을 섬뜩하게 만든다. ‘어머니는 내가 이곳에 온 것을 모른다.’ 몸무게를 잰 뒤 손에 써준 몸무게 숫자가 천당행 번호표 같다는 몽롱함을 뒤로하고 뛰어내리면 멀리 발 아래로 그린델발트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고개를 쳐들면 알프스의 준봉들이 우뚝 솟아 있다. 1초. 2초. 공중 부양된 몸이 가속도를 받아 아래로 꽂힐 때의 아득함. ‘샤악 샤악 ‘ 귓전을 가르는 제트기 소리들. 뚱딴지 같은 생각 속에 단 2초 동안 느끼는 쾌감이지만 알프스, 그것도 융프라우에서 번지점핑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뿌듯하게 만든다. 심장 뛰는 감동의 체험은 융프라우 일대 곳곳에서 가능하다. 100년 넘은 오래된 톱니바퀴 열차를 타고 쉬니케 플라테에 오른 뒤 정상 산장에 묵으면 융프라우의 3형제 봉우리들이 태양의 방향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얼굴을 바꾸는 장면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야외콘서트가 펼쳐지기도 하며 알파인 야외식물원을 감상한 뒤 야생화를 보며 트레킹을 하는 코스도 마련되어 있다. 인터라겐의 숨겨진 명소인 하더쿨룸 역시 로프 기차를 타고 올라 이 일대 봉우리를 여유롭게 조망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노곤한 산행 후, 땅거미가 내리면 그린델발트 마을 노천 바에 앉아 이곳 전통맥주인 뢰겐브로이 한 잔을 마신다. 한낮에 눈을 지치게 했던 화려한 경관은 알코올에 희석돼 몽롱하고 아득하게 뇌리를 스치고 지난다. 아이거 북벽과 융프라우를 바라보며, 빙하가 녹아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알프스 정상으로 별이 쏟아지는 정경만 바라봐도 융푸라우와 그린델발트는 지우지 못할 진한 추억이 된다. 교통 스위스의 관문인 취리히나 베른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인터라겐으로 간다. 인터라겐 서역(west)에 도착한 뒤 동역(ost)으로 이동해 산악열차를 타고 그린델발트로 향한다. 산악열차는 그린델발트행과 라우터브루넨행이 구분되니 주의할 것. 단체의 경우 좌석 예약 확정서를 제출하고 반드시 지정된 좌석에 앉아야 한다. 열차 밖 창가에 예약석이 표시돼 있다. 왕복구간에서 검표원이 항상 표를 검사하니 반드시 기차표를 소지할 것. 융프라우 구석구석을 즐기고 싶은 트레킹족이라면 3일 동안 융프라우 철도 노선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융프라우 VIP 패스를 이용하는 게 편하다. 융프라우 철도 한국지점인 동신항운(www.jungfrau.co.kr, 02-756-7560)에서 이곳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숙소 그린델발트는 호텔 위치에 따라 아이거, 융푸라우의 조망이 달라진다. 이곳의 캠핑장 시설은 호텔급이며, 클라이네 샤이덱을 지나 자리한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아이거그렛처에 숙소를 잡은 뒤 아이거 북벽 인근 하이킹을 즐길 수도 있다. 그린델발트역 앞의 레지나 호텔은 채시라 부부가 허니문을 즐긴 곳으로 스파시설도 갖추고 있다. 환율 1스위스 프랑=750원. 콘센트는 구멍이 세 개. 대부분 특급호텔에는 220, 110V용 어댑터가 마련되어 있다. 음식 인터라겐 지역의 전통 맥주인 뢰겐브로이를 마시는 기회를 놓치지 말 것. 또한 스위스에서 반드시 먹어야 할 것이 치즈 퐁듀와 와인이다. 퐁듀는 알프스 고지대 사냥꾼들이 모닥불 옆에서 굳은 치즈를 녹인 뒤 빵을 찍어 먹은 것에서 유래한다. 2, 3종류의 치즈에 와인을 넣고 끓인 치즈 퐁듀가 대표적이다. 기다란 포크에 찍어 먹는데, 화이트 와인을 곁들이는 게 좋다. 스위스의 화이트 와인은 대부분 내수용으로 하우스 와인이 주종이다.
매혹적인 남인도 순례여행 인도 남부 타밀나두(Tam.. 2007-01-16
타밀나두의 따스한 기운 퐁갈 축제가 열리는 타밀나두 주는 탄자부르, 티루치라팔리, 마두라이의 사원촌에 있는, 화려하게 조각된 사원탑과 고프람이 하늘을 향해 꽃을 피운 곳이다. 이런 고대 문화유산과 함께 프랑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폰디체리(연방정부 직할구), 코다이카날(Kodaikanal)의 아름다운 구릉지, 땅끝 마을 카니야쿠마리가 묘하게 조화를 이룬 도시다. 타밀나두의 주도이며 문화 중심지인 첸나이로 순례여행을 떠나보자. 35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첸나이(Chennai)는 고대 유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는 남부지방의 관문이다. 사원과 성지에서 성채와 궁전까지, 풍부한 사적과 과거의 영광이 현재와 어우러져 생생하게 살아 있다. 특히 촐라 청동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미술관은 꼭 들러보아야 할 곳이다. 건축물 중에 가장 눈을 휘어잡는 것은 카파레스와라루 사원. 복잡하게 조각된 거대한 고푸람(관문)이 하늘 높이 솟아 있어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8세기에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로, 크리슈나 신에게 봉헌되었다는 파르타사라티 사원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사무국과 입법 회의소로 사용되고 있는 세인트 조지 성은 첸나이 역사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성 안에 있는 세인트메리 교회는 서기 1680년에 헌당되었으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 된 영국 성공회 교회다. 이 외에도 아름다운 교회인 산톰 사원이 있는데, 이 곳은 서기 52년 인도에 기독교를 전도한 세인트 토마스라는 전도사가 마지막 안식을 구한 장소다. 건축순례가 끝났다면 마리나와 아름다운 엘리어트 해변으로 가 보자. 구인디의 사슴 공원과 뱀 공원도 빼놓을 수 없다. 고대의 전통과 문화가 현대적인 문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곳, 공존의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 것임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부 인도인들의 퐁갈 축제 타밀나두가 따뜻한 이유는 퐁갈(Pongal) 축제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퐁갈은 남부 인도인들이 풍성한 추수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4일 동안 여는 축제로 우리나라의 추석과 비슷하다. 타밀나두에서는 퐁갈(Pongal), 인도 중부지역에서는 산크란티(Sankranti), 아쌈(Assam)에서는 부갈리 비후(Bhugali Bihu) 등으로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4일 간의 축제는 첫날인 보기(Bhogi Festival), 둘쨋날인 수르야 퐁갈(Surya Pongal), 셋째날인 마투 퐁갈(Maatu Pongal), 그리고 마지막날인 카눔 퐁갈(Kaanum Pongal)로 진행되고, 올해에는 1월 14일부터 17일까지 축제가 열린다. 첫날 보기에는 오래 되고 낡은 옷가지며 물건들을 내다 버리고 불태우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한 해를 맞이하는 의식을 행한다. 다음날에는 축제의 이름과 같은 퐁갈을 준비하는데, 퐁갈은 아침에 신선한 우유를 데우는 것을 말한다. 이때, 우유가 끓어 넘치도록 그냥 놓아둔다는데, 바로 한 해 동안의 번영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이 날은 햅쌀로 밥을 지어 이웃, 친지들과 음식을 나누며 한해 인사를 나눈다. 셋째 날은 1년 농사를 함께 한 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날로, 지역에 따라 소 경주가 열리기도 하고 쇠뿔에 지폐를 달아놓고 젊은 남성들이 이를 잡아채는 놀이가 진행되기도 한다. 마지막날에는 친지들을 찾아 집안 어른에게 인사를 한다. 인사를 받은 어른들이 답례로 아랫사람들에게 작은 돈을 건네주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네 설날과 비슷한 풍습이다. 그 밖의 볼거리 탄자부르(Thanjavur) 카르나티크 음악, 악기, 춤, 전통 수공예품의 본고장 탄자부르는 브라하디스와라르 사원으로도 유명하다. 미술관과 사라스와티 마할 도서관 역시 흥미로운 장소로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티루바이야루, 티루칸디유르, 쿰바코남, 티루후바남, 다라수람 모두 40km 반경에 있어 일주가 가능하다. 티루치라빨리(Tiruchirappalli) 티루치라빨리는 높이가 83m가 넘는 석축 요새와 사원으로 유명하다. 티루바나이카발에 있는 스리 랑가나타스와미 사원(스리랑감)과 시바 사원 그리고 사마야뿌람 마리암만 사원도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마두라이(Madurai) 타밀나두 제2의 도시로서 뾰족한 고플람과 희귀한 조각이 있는 미낙시 사원으로 유명하다. 놓쳐서는 안될 볼거리로는 티루마라이 나이케르 궁전에서 열리는 빛과 소리 공연, 마리암만 호, 쿠달 아쟈가르 사원, 간디 박물관 등이 있다. 카나쿠마리(Kanyakumari) 해변 인도의 땅끝. 카냐쿠마리 혹은 코모린곶이라 불리는 이 곳은 벵골만, 인도양 그리고 아라비아해의 3대양이 둘러싸고 있는 독특한 장소로, 3대양이 합류하는 지점을 ‘트리베니 상가맘’이라고 부른다. 아름다운 해돋이와 낙조를 볼 수 있으며, 다양한 색깔의 모래가 특징이다. 코다이카날(Kodaikanal) 마두라이에서 약 120km 거리에 있는 코다이카날은 해발 2,133m에 위치해 있으며 녹음에 둘러싸인 별 모양의 호수가 유명하다. 코다이시에서 21km 떨어진 곳에 골프장, 쿠린지 안다바르 코일 사원, 녹색 계곡, 셴바가누르 박물관, 돌고래 코, 베리잠 봉 등이 있다 자료제공: 인도관광청 ☎ (02)2265-2235 www.incredibleindia.co.kr
장강을 거슬러 중경에 이르다 유구한 중국 역사 품에.. 2007-01-15
‘강 중의 강’ 양자강(揚子江)을 중국 사람들은 그저 장강(長江)이라 부른다. 히말라야 만년설이 흘러내리는 청해성(靑海省)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물길을 동쪽으로 돌려 드넓은 중원을 굽이굽이 사행(蛇行)하다 바다로 빠져 나간다. 위나라 오나라 자웅을 겨루니 적벽강의 전함들 한 번에 쓸어 버렸구나 열화는 타올라 운해를 비추나니 주유가 이곳에서 조조를 깨트렸네. 유장하게 흐르는 장강을 내려다 보며 시인(詩人)은 조조의 대선단이 적벽을 붉게 물들이며 화염에 휩싸이는 환영에 눈을 비비며 이렇게 노래한다. 장강은 넘실넘실 동쪽으로 흐르는데 물거품처럼 사라진 영웅들이여 시비승패 모두 눈 깜짝할 사이에 공으로 돌아갔구나. 청산은 옛날 그대로인데……. 장강이 빠진 삼국지를 상상할 수 있을까. 갑옷에 창검을 든 수십만 군사들 앞에 붉은 깃발 푸른 깃발을 펄럭이며 장강을 붉게 물들이던 영웅들이 사라진 지 1,800여 년이 지난 지금 장강은 어떤 모습일까? 강줄기 따라 깃든 중국 근대사 말없이 흐르는 장강은 변함이 없건만 조조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와 영채를 세웠던 자리엔 빌딩 숲이 하늘을 찌르고, 주유가 휘몰아치던 말발굽 자리엔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른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장강 없는 중국은 없다. 그 하구(河口)엔 상해, 상류(上流)엔 중경이 있다. 자, 장강의 물길을 거슬러 중경(重慶)으로 가보자. 중국 대륙의 남서쪽, 사천성은 삼국지에서는 유비가 또아리를 튼 촉(蜀)나라의 노른자위다. 사천성에서 촉의 수도였던 성도(成都)와 쌍벽을 이루는 도시가 중경이다. 지세는 험하지만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성해 조조와 손권이 호시탐탐 노리던 땅이다. 장강은 5,400km로 세계에서 네 번째, 동양에서는 가장 길다. 하구에서 2,500km 상류에 있는 중경까지는 300톤급 배가 사시사철 운항할 수 있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경은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였다. 장개석이 이곳을 임시수도로 정한 이유는 양자강과 그 지류인 가릉강이 중경을 에워싸고, 분지인 탓에 언제나 안개가 덮여있어 일본 전폭기의 폭격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국이 일본에 점령당했을 때도 일본군은 중경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이 같은 이점을 노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이곳에 있었다. 모택동과 장개석이 치열하게 공방전을 펼치다 공동의 적, 일본을 물리치자고 국공합작을 해서 대일항전을 벌이던 중 일본이 패망하고, 중국을 어떻게 요리할까 담판짓기 위해 모택동과 장개석은 중경 홍안촌에서 40일간 회담했다. 지금 이곳은 사회주의 혁명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성도는 지금도 여전히 사천성의 성도(省都)로 자리잡고 있지만 중경은 중국에서 4개 직할시 중의 하나로 중앙정부가 직접 통치한다. 중국 서남부 내륙 개발의 베이스캠프로 낙점 받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첫발을 디디면 중국의 다른 도시와 확연히 다르게 자전거를 볼 수 없다. 중국의 샌프란시스코답게 온 시가지가 언덕과 구릉으로 이어져 자전거는 비효율적이다. 하늘을 찌르는 빌딩, 아파트 숲, 반듯하게 정돈된 꽃길, 자동차의 물결, 도시를 휘돌아 흐르는 장강……. 중경은 아름다운 도시다. 중경의 진면모는 어둠살이 내려야 드러난다. 온 도시가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뒤덮여 중국 사람들은 이곳을 야광(夜光)의 도시라 부른다. 가로등부터 포도송이 같은 수많은 전등이 한데 모여 불꽃송이가 늘어지고, 아파트도 외관이 수많은 고추등으로 은하수처럼 반짝이는데 하물며 상가와 빌딩은 오죽하랴. 사연 많은 야경의 도시 중경 초대형 네온사인이 좌르르 좌르르 오르고 내리며 도시의 밤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더구나 장강이 요새의 해자처럼 이 야광의 도시를 휘돌아 감아 불빛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강 위에서 춤춘다. 양자강가의 보석인 중경은 도시만 아름다운 게 아니다. 흔히들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를 역대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는다. 그런데 월나라의 왕소군과 당 현종의 애첩 양귀비가 바로 중경 출신으로, 예부터 중경은 미인소굴(?)로 널리 알려졌다. 오목한 분지에 자리잡은 중경은 넘치는 물의 도시로 지형상 음기가 충만할 수밖에 없다고들 말한다. 양자강이 중경을 휘돌아 흐르며 기름진 사천분지를 만들어 오곡백과가 풍성하고, 양자강에서는 온갖 물고기가 잡혀 중국 4대 요리의 하나 사천요리의 터전을 만들었다. 사천요리의 특징은 강렬한 향신료로 맵지만 담백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파두부가 사천요리의 하나다. 중경이 중국의 직할시가 된 것은 미인들이 많아서도 아니요, 사천요리 때문도 아니다. 중경은 예로부터 공업도시다. 가릉강과 장강의 합류지점으로 수운(水運)의 요충이자 성유철로의 기점임은 물론 모든 공로(公路)의 교차점이자 중국 서남부의 중심공항이다. 사통팔달 교통중심지로 지하자원을 쉽게 반입할 수 있고 제품수송도 수월해 기계와 철강, 방적, 시멘트, 전력 등 중국 근대공업의 발흥지가 되었다. 현대 공업의 꽃인 자동차가 빠질 수 없다. 스즈키와 합작한 중경 장안 자동차 공장을 두고 중경 사람들은 “일본이 중경엔 한 발짝도 못 들여 놓았는데 이제야 들어왔구먼”하고 말한다. 대부분 스즈키에서 들여와 조립하는 수준이라 국산화율은 미미하기 짝이 없지만 매년 기술이전을 받으며 그 비율을 높여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1,300cc 링양은 자가용과 택시로 중국에서는 스테디셀러다. 링양과 함께 2,000cc 및 2,500cc 소형 화물차와 1,500cc 미니버스가 주생산 품목이다.
Berlin 옛것과 모던함이 공존하는 역동의 도시 2007-01-09
그동안 베를린은 유럽 어느 도시보다 볼거리가 많으면서도 여행지로서는 저평가되어 왔다. 파리보다 더 많은 공원과 울창한 숲, 오래된 건축물, 유럽 최고 수준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산재해 있지만 많은 사람이 베를린은 매력 없는 도시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 여행자 중 베를린을 찾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0년이 넘은 지금 베를린은 독일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로 자리를 잡았다. 과거 서베를린 지역은 세련된 건축물이 속속 들어서면서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동베를린 지역 또한 사방이 건설현장일 정도로 역동적으로 바뀌고 있다. 냉전의 상징이었던 독일의 수도 19세기 프로이센 제국의 수도로 정치와 경제, 문화 중심지였던 베를린은 1920년대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2차대전을 겪으면서 잿더미로 변했다. 종전 후 미국과 소련이 분할점령하면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었다. 수십 년간 긴장상태에 놓여 있던 베를린은 1990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통일수도로 재도약을 하게 된다. 통일 이전부터 베를린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영화제, 박물관과 미술관이 풍부해 문화도시로서 높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여기에 통독 후 새로운 문화시설이 더해지면서 베를린은 명실공히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도약하게 된다. 베를린은 규모가 꽤 큰 편이라 계획을 세워 돌아보지 않으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쇼핑센터와 문화시설은 대부분 서베를린 지역에 있으나 볼거리는 통독의 상징으로 알려진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운터 덴 린덴’을 지나 알렉산더 광장에 이르는 동베를린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베를린에서 가장 먼저 봐야 할 곳이 카이저 빌헬름 교회다. 독일 제2제국의 초대황제인 빌헬름 1세를 기념하기 위해 손자인 빌헬름 2세가 19세기 후반 건립한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로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2대전 때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파괴된 이 건물은 전쟁의 잔학상과 비참함을 후세에 알리고자 폭격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교회를 복원하는 대신에 옆에 파란 유리를 이용한 현대적인 예배당을 세웠는데, 검게 그을린 빌헬름 교회와 교차되면서 전쟁의 참상이 더욱 극명하게 대비된다. 오늘날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평화를 추구하는 베를린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런던의 하이드 파크와 함께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티어가르텐(Tiergarten)이 있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이 공원은 규모가 너무 커서 거대한 숲을 연상케 한다. 티어가르텐은 제후들의 사냥터였으나 18세기 공원으로 바뀌었다. 티어가르텐은 도시 내 녹지조성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건축물에 둘러싸인 베를린에서 생명의 숲 역할을 하고 있다. 티어가르텐은 매년 7월 100만 명 이상이 참가하는 베를린 러브 퍼레이드가 열리는 장소. 공원의 중앙에는 전승기념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다. 1873년에 세워진 이 탑은 과거 프로이센 제국이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높이 69.27m의 꼭대기에는 8m 크기의 금박으로 장식된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 상’이 있다. 빅토리아 여신상 아래 전망대에서는 티어가르텐과 베를린의 전망이 한눈에 펼쳐진다. 이 탑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무대가 되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독일 분단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티어가르텐에서 동쪽으로 쭉 뻗어 있는 6월 17일 거리를 따라가면 브란덴부르크 문이 나온다. 베를린의 18개 성문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문이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프로필레아를 모방한, 베를린 최초의 고전양식 건물로 베를린이 새로운 아테네, 즉 학문과 예술의 도시가 되었음을 상징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 있는 여신을 태운 4두마차 동상은 1806년 나폴레옹이 베를린을 함락했을 때 파리로 가져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한 것을 나폴레옹 패망 후 되찾아온 것이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에는 독일 분단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1990년 독일이 재통일되던 날, 수십만의 군중이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에 모여 환호하는 장면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분단의 상징에서 재통일의 상징으로 세계인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박물관 섬까지는 동베를린 최대의 번화가인 운터 덴 린덴 거리가 펼쳐진다. ‘보리수 아래’라는 뜻을 가진 이곳에는 이름 그대로 보리수 나무가 늘어서 있다. 폭 60m, 길이 1천460m의 이 대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가 1647년 왕궁과 성벽 너머의 티어가르텐을 연결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당시 국왕들은 이 거리의 동쪽에 있던 베를린궁에서 출발해 보리수가 심어진 길을 따라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하여 티어가르덴 숲속에서 사냥을 즐겼다. 운터 덴 린덴거리는 베를린이 동서로 양분되기 전에는 베를린의 실질적인 중심지였다. 거리 주변에는 독일역사 박물관, 국립오페라 극장, 훔볼트 대학, 황태자 궁전 등 역사적인 건축물이 밀집해 있다. 운터 덴 린덴거리를 따라 박물관 섬 방향으로 걷다 보면 왼쪽으로 베를린 최초의 대학이자 ‘근대 대학의 어머니’로 불리는 훔볼트 대학이 나온다. 1810년 빌헬름 훔볼트가 세운 이 대학은 2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고, 헤겔, 역사학자 랑케, 아인슈타인 등 쟁쟁한 인물이 교수로 재직했다. 공산주의 이론을 집대성한 칼 마르크스 또한 이 대학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훔볼트 대학은 나치집권 당시 수많은 교수와 학생이 총살당하고 장서가 불태워지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최근에는 대학 광장과 입구 주변에 헌 책을 파는 노점들이 들어서 관광객에게 또 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훔볼트 대학에서 동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베를린 돔과 박물관 섬이 나타난다. 베를린 돔은 1893∼1905년에 지어진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왕실교회로 독일 신교의 본산이라 할 수 있다. 이 교회도 2차대전 때 크게 손상되었으나 복원되어 그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베를린 돔 뒤쪽으로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박물관 섬이 있다. 구 국립미술관과 보데박물관, 페르가몬박물관 등 다섯 개의 박물관이 모여 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베를린의 문화 1번지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도 어마어마하거니와 웅장한 고전주의 건축물 또한 매력적이다. 다섯 개의 박물관 모두 볼만하지만 페르가몬 박물관과 보수공사를 마치고 2006년 말 새로 개장한 보데 박물관은 돌아볼 만하다. 독일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고고학 박물관 페르가몬 박물관은 세계적인 고고학 박물관으로 독일 학자와 탐험가에 의해 발굴된 그리스, 로마, 소아시아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지금의 터키)에서 발굴한 페르가몬 제단은 헬레니즘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BC164∼156년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대리석 제단은 승리를 기념함과 동시에 수호신인 아테네 여신에게 바쳐진 것으로, 1878년 독일의 칼 후만과 베를린 박물관팀이 발굴하여 베를린으로 옮겨온 것이다.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밀레투스의 아고라 문’과 바빌론의 ‘이시타르 문’ 등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인류문화유산이 전시되어 있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페르가몬 박물관 옆에 자리한 보데 박물관은 네오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로서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르네상스, 바로크시대의 이탈리아 그림,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의 회화와 조각, 이집트 예술품이 전시되었으며, 몇 년에 걸친 보수공사를 마치고 최근에 다시 문을 열었다. 현재의 베를린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역시 도시 전체가 건설현장일 정도로 활기에 찬 역동성이다. 베를린은 오랜 분단이 가져온 온갖 혼란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유럽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도약하고 있다. 여행정보 교통 한국에서 베를린까지 바로 연결되는 비행기는 없다. 대한항공이나 루프트한자를 이용해 프랑크푸르트까지 간 다음 비행기나 기차로 갈아타야 한다. 기차는 독일의 주요도시는 물론이고 암스테르담, 브뤼셀, 코펜하겐 등 유럽 주요 도시와 매일 연결된다. 베를린 버스투어 시간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투어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베를린의 주요 관광지를 15∼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투어버스를 이용하면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돌아볼 수 있다. 중간에 내렸다 다시 탈 수도 있다. 투어버스는 여러 회사에서 운영하며 요금은 18∼20유로. 관광안내소에 문의하면 자세한 내용을 알려준다. 인터넷 카페 베를린은 유럽에서는 드물게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비교적 많다. 베를린에서 가장 찾기 쉬운 인터넷 카페는 동물원 역 Bahnhof Zoo 건너편에 있는 ‘easyEverything’이며, 대학가 근처에도 인터넷 카페가 여러 곳 있다. 축제 및 행사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베를린 국제영화제가 2월에 개최된다. 2주 동안 수백 편의 영화가 베를린 시내의 여러 극장에서 상영된다. 7월 중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테크노 파티인 러브 퍼레이드가 열린다. 100만 명 이상이 참가하는 러브 퍼레이드가 열리는 날은 베를린 전역이 광란의 도가니로 변한다. 호텔 저렴한 숙소부터 특급호텔까지 다양한 숙박시설이 많다. 따라서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계절에도 숙소를 잡기가 어렵지 않지만 예약하는 것이 좋다. 저렴한 숙소는 구동독 지역에 몰려 있고 비싼 호텔은 서베를린에 많다.
스위스 제네바, 취리히 화려한 겨울을 보내고 싶다.. 2006-12-13
핫초코가 가장 맛있을 때는 찬바람을 피해 후다닥 피난을 했을 때다. 더구나 회색빛 서울거리에서는 더더욱. 손으로 감싼 머그잔으로 전해오는 온기는 잠시잠깐이지만 퍽 안온하다. 초콜릿으로 유명한 스위스이니 핫초코(쇼콜라 쇼)의 명성은 생략해도 될 듯. 쇼콜라 쇼 한 잔을 들고 제네바의 야경을 본다면 생애 가장 화려한 겨울이 될 것이다. 제네바는 지금 겨울 축제가 한창이다. 제네바, 나무와 빛 페스티벌 제네바에서 열리는 나무와 빛 페스티벌(Trees and Lights Festival)의 겨울 야경은 퍽 이색적이다. 현대적이면서도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장식을 통해 한 해가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너도밤나무, 포플러, 가지만 남은 가로수는 다채로운 전구 장식과 음악, 그림을 걸고 화려하게 태어났다. 스위스를 포함한 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제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제네바 나무와 빛 페스티벌’은 제네바의 겨울을 가장 특별하게 만든다. 특히 까만 호수에 비치는 불빛은 가장 낭만적인 겨울을 선물할 것. 페스티벌은 11월 30일에 시작해 2007년 1월 7일까지 이어진다. 문의 www.festivalarbresetlumieres.ch 제네바 크리스마스 수영 대회 ‘크리스마스에 수영을 한다?’ 제네바에서는 가능하다. 제네바의 크리스마스 수영대회는 1934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한겨울에 열리는 수영대회로 제네바의 전통이 되었다. 13세 이상의 600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차가운 제네바 호수에 뛰어드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이 용감한 행동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물론 당신도 함께 참여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요즘은 인기 덕분에 우스꽝스러운 수영복을 장만하는 참가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단다. 문의 www.geneve-natation-1885.ch 제네바 최대의 축제, 에스깔라드 제네바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다. 오랜 옛날부터 프랑스는 호시탐탐 제네바를 넘보았다. 1602년 12월 12일 프랑스 남동부를 지배하고 있던 사보이(Savoy)가의 군대가 제네바를 침공했는데, 제네바 부인 한 명의 힘으로 이 군대를 무찔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가 제네바 최대의 축제인 에스깔라드 축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사보이 군사들이 실수로 로욤 부인네 창문 밖을 기어오르고 있을 때, 하필이면 그녀가 수프를 만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솥채로 수프를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고, 적의 군대를 사살(?)함으로써 제네바를 지켰던 것. 우리나라로 치면 행주산성을 지켜낸 부인네에 비유하면 될까? 축제는 2006년 12월 8일에서 10일까지 열린다. 에스깔라드(Escalade)가 열리는 제네바 구 시가지는 빈티지한 분위기로 변한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쓰 끄 레노’(CE QU’E LAINO)라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옛날 제네바 사투리로 불리는 노래는 1602년 사보이가와의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가사가 담겨 있다. 창을 갖춘 전통 복장의 ‘1602 부대’가 말을 타고 순찰을 돌고 전통 의상을 입은 아이들은 가게를 돌며 군것질거리를 얻어내기도 한다. 어둑해진 구 시가지 골목은 일요일 저녁이면 천명 이상의 전통 복장을 갖춘 사람들이 큰 횃불이 지펴진 대성당 광장을 서서히 메운다. ‘에스깔라드’ 축제 기간 중 1년에 단 한번 대중에게 몬띠에(Monetier) 통로가 개방된다. 대성당 지하에 있는 옛 요새의 벽으로 이어지는 이 통로는 옛날 제네바를 그대로 보여주는데, 깜깜한 밤 이 통로를 통과하는 용감한 자에게는 추위에 특효인 ‘뱅 쇼’(Vin Chaud)라 불리는 따뜻한 와인 한 잔이 선사된다. 또 다른 비밀 하나는 빌 호텔(Hotel de Ville) 건너편 옛 무기고에 가면 따끈따끈한 수프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욤(Royaume) 부인이 벽을 타고 기어올라오던 사보이 군대에게 들이부었던 바로 그 뜨거운 수프를 맛볼 수 있다. 제네바의 가장 매력적인 풍습 역시 로욤 부인으로부터 기인한다. 12일 밤 각 가정에서는 제네바 특유의 장식에 야채 모양의 마찌팬(Marzipan)이라 불리는 아몬드 설탕 과자가 채워진 초콜릿으로 만들어진 가짜 냄비를 먹는다. 먼저 손으로 초콜릿 냄비를 부수고 마찌팬 과자를 너나 할 것 없이 낚아채 먹는데,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풍습이다. 2006년 12월 8일에서 10일까지 열린다. 축제가 있는 주말 패키지를 제네바 관광청에서 판매 중이다. 문의 www.compagniede1602.ch 취리히의 송년 축제, 새해맞이 불꽃놀이 당신은 새해를 어디에서 맞고 싶은가. 취리히의 송년축제는 새해를 특별하게 맞는 법을 제안하고 있다. 12월 31일 저녁 8시부터 새벽 3시까지 취리히 호수와 리마트(Limmat) 강은 또 다른 축제의 장으로 바뀐다. 새해맞이 불꽃놀이는 송년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매년 15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몰려든다. 선박 두 척이 취리히 호수에 정박하고, 24시 정각에 형형 색색의 불꽃을 쏘아 올려 새해가 다가옴을 알린다. 선박 위에서는 다양한 콘서트가 열리고 맛깔스런 음식도 맛볼 수 있다. 취리히의 트램은 1월 1일 새벽 4시까지 운행해 취리히 시민들과 여행자들의 멋진 밤을 더욱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문의 www.silvesterzauber.ch travel tip 쇼핑정보 크리스마스마켓 스위스의 성탄 장식은 보는 것만으로도 로맨틱하다. 취리히는 역에서 이어지는 쇼핑거리, 반호프슈트라세(Bahnhofstrasse)에 트램선을 따라 막대형태의 전등으로 밤길을 수놓는다. 크리스마스마켓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취리히(Zurich) 중앙역 시장: 2006년 11월 24일∼12월 24일 구 시가지 시장: 2006년 12월 18∼29일, 월∼금요일 오전 11시∼저녁 8시/토요일 오전 11시∼저녁 6시 글로부스(Globus) 백화점: 2006년 11월 24일∼12월 31일, 월∼금요일 오전 9시∼저녁 8시/토요일 오전 9시∼저녁 6시(11월 27일 오후 5시까지) 일요일(11월 5일, 12일, 19일, 12월 3일 오전 11시∼오후 5시) 제네바(Geneva) 2006년 11월 24일∼12월 24일 먹거리 스위스 장터를 훈훈하게 데워주는 명물은 바로 따뜻한 와인. 레드 혹은 화이트 와인에 정향과 계피, 설탕 등을 커다란 들통에 넣고 따뜻하게 데워 국자로 떠준다. 불어권에서는 뱅 쇼(Vin Chaud), 독어권에서는 글뤼바인(Gluhwein), 이태리어권에서는 비노 깔도(Vino Caldo)라 불린다. 스위스 트레블 스위스 트레블 시스템의 패스는 기본적으로 스위스를 여행하는 외국인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할인 패스. 한국에서는 여행 대리점에서 구입이 되는데 스위스 국내에서는 한정된 역에서만 판매하므로 한국에서 구입하는 게 편리하다. 문의: 서울항공여행사 ☎ (02)755-1144 www.MySwitzerland.co.kr 스위스 관광청 ☎ (02)3789-3200 www.MySwitzerland.co.kr
필리핀 라스피나스 필리피노들의 손재주가 빛나는 2006-12-13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20km쯤 가면 라스피나스(Las Pinas)라는 소읍이 있다. 이제는 비대해진 메트로 마닐라에 거의 삼켜지기 직전이지만 아직도 시골내음을 많이 풍긴다. 라스피나스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대나무 파이프 오르간이다. 1821년 스페인 점령시대, 이곳 산호세성당의 파드레 디에고 세라 신부가 열악한 성당재정 때문에 954개의 오르간 파이프를 금속 대신 왕대나무로 박아 넣은 것이 그 유래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 또한 금속 파이프 오르간과 전혀 달라 세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비용절감 차원에서 만든 대나무 파이프 오르간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 마닐라 근교의 이름없는 소읍 라스피나스도 함께 유명해졌다. 지금도 매년 2월 둘째 주가 되면 세계 각국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들과 파이프 오르간 음악 애호가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대나무 파이프 오르간 페스티벌을 즐긴다. 그들은 세계에서 유일한 대나무 파이프 오르간의 독특한 음색에도 매료되지만 어떻게 정교한 파이프 오르간의 그 많은 파이프를 대나무로 만들어 냈을까 하는 엔지니어링 측면의 불가사의에도 감탄을 연발한다. 그것은 오로지 필리피노(필리핀 사람)의 창의력과 손재주의 산물이다. 대나무 파이프 오르간을 만든 지 200여 년이 된 지금 필리피노의 기발한 창의력과 뛰어난 손재주는 바로 이곳 라스피나스에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바로 사라오 지프니(Sarao Jee Pney) 공장이 그것이다. 필리핀의 탈것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외국에서 수입한 정상적인 차들은 제껴놓고 필리피노(필리핀 사람)들이 멋대로 만든 탈것들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흥미진진하다. 따그닥 따그닥 마차가 달리고, 자전거 오른편에 리어카 같은 것을 붙여 하늘을 가리는 포장만 씌운 페디캡(Pedi Cab)은 말하자면 개량된 자전거 인력거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페디캡과 모양은 흡사하나 동력원이 사람의 두 다리가 아닌 모터를 단 것은 트라이시클(Tricycle)이라 한다. 페디캡과 트라이시클은 필리핀에서는 택시 역할만 한다. 페디캡은 동남아 어딜 가나 볼 수 있고, 트라이시클 또한 태국에서 ‘툭툭이’로 불리며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필리피노들이 창작한 필리핀 고유모델은 단연코 지프니(Jee Pney)다. 마닐라 거리는 지프니로 덮였다. 형형색색, 요란 찬란한 지프니의 모습은 달리는 예술작품이다. 언제나 흥에 겨운 필리피노 기질처럼 지프니도 달리는 것이 그렇게 신바람이 날 수 없다. 우선, 그 요란뻑쩍한 지프니의 화장 치례는 처음 보는 사람의 넋을 빼기에 부족함이 없다. 알록달록한 원색에 갖은 영문글자체로 온갖 문구를 빈틈없이 써 바르고 틈틈이 환상적인 문양을 빼곡히 채워 지프니 한 대 한 대는 개성미 넘치는 정열적인 적도의 걸작이다. 어디 그 뿐인가. 오만 가지 장식 소품들이 무당집 신당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 어떤 지프니는 보닛 위에 수십 개의 백미러를 달고, 어떤 지프니는 보닛 위에 작은 말 수십 마리를 싣고 함께 달린다. 원색의 예술품 지프니가 야자수 가로수 아래 적도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거리를 달릴 땐 뮤직 박스가 된다. 미국의 록 음악이 신바람을 돋우는가 하면 스페인의 탱고가 감미롭게 길바닥에 깔린다. 우리 돈으로 200원쯤 되는 승차요금으로 지프니를 타보면 음악을 크게 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지독한 엔진 소음과 매연에 군용 트럭처럼 마주보고 앉는 불편한 승차감을 쿵작쿵작 신나는 음악만이 무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자가용 지프니는 녹색 번호판을 달았고 정기노선 버스 구실을 하는 지프니는 노란색 번호판을 달았다. 출퇴근 러시아워 때 마닐라의 거리는 정말로 가관이다. 울긋불긋한 지프니 뒤로 옆으로 사람들이 매달리고 차체 지붕 위에도 사람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사라오(SARAO) 지프니 공장은 마닐라에 있는 다섯 개의 지프니 공장 중에서 제일 큰 곳이다. 사라오 지프니 공장에 첫발을 딛는 순간 세월은 5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일본에서 폐차 처분된 이스즈 엔진이 검은 기름을 뒤집어쓰고 한마당 빼곡히 앉아 있는 곳에서부터 지프니는 만들어진다. 그러니, 금방 출고된 새 지프니도 지독한 엔진 소음과 매연을 뿜어내는 것은 당연지사! 1950년의 한국전쟁 이후, 폐차된 미군 트럭 엔진으로 드럼통을 잘라 뚜당땅땅 버스를 만들었다는 우리나라의 하동환자동차와 현대자동차 정비공장들이 아마도 이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라오 공장은 우리나라 1급 정비공장 규모다. 지금부터 기가 막히는 풍경들이 펼쳐진다. 뚝딱뚝딱 못 박는 곳으로 발길을 돌려보면 대패질도 안한 각목을 톱으로 잘라 못을 박아 얼기설기 뼈대를 만들고 판자를 박고 그 위엔 뒤엉킨 마닐라 삼을 얹는다. 다시 그 위에 재봉틀로 박은 비닐을 씌워 좌석을 완성시킨다. 수세미처럼 뒤엉긴 마닐라 삼을 보니 초등학교 시절 외가에 갈 때 덜컹거리는 시외버스 좌석의 찢어진 비닐 틈으로 볏짚이 삐죽이 올라오던 생각이 나, 혼자 빙긋이 웃는다. 거의 모든 자동차의 기계적인 구성품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폐차에서 떼어 온 것이 틀림없다. 갈고 닦고 칠해서 조립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과연 저 차가 시동이 걸리고 땅바닥을 굴러갈 수 있을까 궁금하다. 양철을 잘라 차체의 한 부분을 만드는 걸 보면 그대로 서울 변두리의 어느 함석집을 빼다 박았다. 도색과정도 걸작이다. 아래로 위로 도색공들이 달라붙어 손으로 샌드페이퍼를 문지르고 피스로 도료를 뿌리고 구석진 부분은 페인트 통을 들고 붓질을 한다. 초등학교 6학년인 에두아르도는 토요일과 일요일, 학교가 쉬는 날이면 사라오 공장에서 떨어진 볼트, 너트, 못을 주워주고 우리 돈으로 하루에 2,000원 남짓 받는다. 40대 초반의 사장 사라오 씨는 항상 싱글벙글 웃는 친절한 뚱보다. 사라오 자동차 공장은 1953년에 지금 사장의 아버지가 설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기지화 된 마닐라에서 미군 트럭이 폐차되면 엔진을 뜯어 철판을 우그려 만들던 지프니 공장은 50여 년의 세월이 흐를 동안 10만 대 이상을 만들어냈지만 폐차구매선만 미국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바뀌었을 뿐 지금까지 초기의 방식 그대로 만들어지고 있다. 친구와 술은 옛날 것이 좋다지만, 여자와 자동차는 그게 아니다. 자꾸 자꾸 더 좋은 걸로 바뀌어야 한다. 요즘 사라오 공장에서는 하루에 열 대 가량의 자동차가 생산된다. 사라오의 생산 품목은 단 두 가지, 표준형과 수퍼 디럭스다. 수퍼 디럭스라야 스테인리스 차체에 요란한 장식품을 더하는 것에 불과하다. 표준형은 약 700만 원. 수퍼 디럭스는 800만 원이 조금 넘는다. 필리피노들의 손재주가 만들어낸 지프니도 점점 사양길로 들어서고 있다. 세월이 더 좋은 더 안락한 차를 원하는 탓이다. 그러나 아직은 필리피노들의 지프니 사랑은 변함이 없다.
천상의 호수 티티카카로 가는 길 모랫길 뚫고, 강을.. 2006-12-11
우리는 떠나야 할 우유니에서 발이 묶였다. 일요일 오후라 트레일러 타이어의 튜브를 갈아 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트레일러 타이어 양쪽 튜브가 모두 터졌다. 어느 버스 운전수가 중심가 입구 가까이 정비사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먼지가 풀석거리는 곰보딱지 도로를 몇 차례 돌고 돌아 드디어 낡아빠진 자동차 몇 대가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가건물 서비스센터 앞이었다. 볼리비아 험로를 달려 라파스로 기름투성이 두 청년이 바로 찾아왔다고 말했다. 고물차의 액슬을 고치고 있는 중이었다. 13살이 될까 말까 한 소년이 우리 일을 돕겠다고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튜브를 구하러 떠났다. 물론 그 가게에는 튜브가 없었다. 소년이 빈손으로 돌아와 우리는 막막했다. 할 수 없이 직접 해결할 길을 찾아나섰다. 여러 가게를 뒤지고 다니다가 마침내 튜브를 사서 서비스센터로 돌아왔다. 일단 우리 목적지는 콜차니. 살라르에서 나오는 소금을 트럭에 싣는 작은 도시다. 그곳으로 가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에 들어섰을 때는 벌써 어스름이 깔렸다. 우리는 사방으로 도로 사정을 알아보았다. 물을 건널 곳도 아주 드물고, 별문제가 없다고들 했다. 우기가 끝난 지 몇 달째여서 어디를 가나 깊은 물은 없다는 말이었다. 반가운 소식. 실은 우기에는 다닐 수 없는 도로가 아주 많다. 어둠이 다가왔을 때 첫 번째 물길을 별 탈 없이 잘 건넜다. 밤에 물길을 건너면 위험하다. 물이 우중충하여 쉽게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바위와 다른 장애물도 두렵다. 차 밖으로 나가 살펴보지만 모두 가려내기는 불가능하다. 리오 물라토스 강의 불빛에 다가갔을 때 우리는 차를 멈추었다. 강 한복판 흙탕에 대형 트럭이 꼼짝 못하고 박혀 있었다. 운전수와 조수가 뒷바퀴 주변의 물속을 휘젓고 다니며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세닉은 짐을 잔뜩 실어 바닥이 내려앉았다. “하류로 가라구!” 운전사가 고함을 질렀다. “내려가면 다른 건널목이 있고, 물이 더 얕으니까 괜찮을 거라구요!” 우리는 돌아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바퀴 자국이 깊고 좁은 길이었다. 거기서 길은 희미하게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다. 다시 강둑에 다다르자 길을 잘못 짚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는 거의 지나갈 수 없는 지경이었다. 모험을 하지 말고 강둑에서 천막을 치고 밤을 새우기로 했다. 내일 해가 뜬 뒤에 건너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길을 잘못 왔다는 것을 알았다. 건널목은 훨씬 아래쪽에 있었다. 1970년대의 고물 닷선이 내는 팍팍거리는 배기음으로 미루어 알 수 있었다. 닷선은 우리 천막을 지나 시내로 향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도시를 지나 겨우 15km를 갔을 때 다시 넓은 물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대형트럭이 끊임없이 지나다녀 건너편에 진흙이 잔뜩 패여 있고, 타이어 자국이 깊었다. 세닉이 그대로 건너가다가는 흙바닥에 얹히고 말 처지다. 로랑이 물을 건너가 돌과 진흙을 판판하게 골랐다. 남은 사람들도 따라가 힘을 합쳤다. 물을 건너다 신경이 곤두섰다. 모래가 점점 더 깊어졌고, 차를 세웠다가는 갇히고 말 것이 분명했다. 다른 차가 지나가면서 우리를 끌어내려면 몇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속도를 조절하면서 세닉은 앞으로 나아갔다. 이따금 꼬리를 살짝 흔들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다. 세바루요에 도착하고서야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장 넓은 강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깊이 숨을 들이쉬고 미니밴을 바싹 뒤따라 건너기 시작했다. 건너편에 도착하기 직전에 도랑에 빠졌다가 강둑을 타고 올라갔다. 물이 들어간 엔진이 풀풀거렸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 그런데 포장도로에 올라서자 앞바퀴가 이상하게 흔들거렸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도 라파스에 들어가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엘 알토였다. 고원지대를 따라 도시 외곽에 끝없이 펼쳐진 판자촌이다. 그 속에 짓다만 폐허 같은 콘크리트 건물, 매연을 내뿜는 버스와 쓰레기가 널린 거리가 어지러웠다. 거기서 우리 마음을 달래 준 것은 믿을 수 없는 코르디엘라 레알의 장관이었다. 평평한 땅 위에 장엄하게 솟아 있었다. 한데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이 장관의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시내보다 기온이 몇 도나 낮았다. 일단 톨게이트를 지나자 라파스가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분지에 자리잡은 이 도시의 불빛은 깊은 분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우리는 분지를 빙글빙글 도는 길을 따라 내려갔다. 원래 라파스는 1548년에 세워져 지금의 라하에 자리잡았다. 현재의 도심에서 약 20km 떨어져 있다가 오늘날의 리오 초퀘야푸 계곡으로 옮겨왔다. 한때 아야마라 광부들과 금광이 있던 곳이었다. 광물이 풍부한 포토시와 리마 광산의 중간에 자리잡아 스페인으로 가는 은 가운데 상당량이 이곳을 지나갔다. 일대의 광산에서 금이 바닥이 나자 은이 이 고장의 운명을 좌우했다. 이 도시의 정식명칭은 요란하다. 라 시우다드 데 누에스트라 데 라 파스(평화의 성모 마리아의 도시). 평화의 도시라지만 과거에 수많은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1825년 볼리비아가 독립한 이후 정권 또는 최고권력자가 192회나 바뀌었다. 정권이나 집권자의 수명이 평균 1년도 안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우리에게는 다행히 요즘 정세는 비교적 조용하다. 볼리비아인들의 기질 탓인지 으레 벌어지는 데모를 제외하고 말이다. 시내는 시끌벅적 활기가 넘쳤다. 어디를 가나 사람이 가득하고, 인도에는 각종 판매대가 꽉 들어찼다.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물건들이 도로까지 넘친다. 미니밴 택시가 버스와 그보다 작은 합승택시 트루피와 거리를 비집고 다니며 경쟁을 벌인다. 중심가 한줄기가 도시 한복판을 자르고 지나간다. 그보다 작은 사잇길은 분지를 타고 올라가는데 사람이 북적거리기는 마찬가지. 고도가 너무 높아 어지럽도록 공기가 희박하다. 이 고장 속담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천천히 걸어라. 적게 먹고, 혼자 떨어져 자라.” 코파카바나로 가는 길 뜨거운 디젤을 들이마시며 며칠을 지낸 뒤 세닉은 다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앞쪽 댐퍼를 새로 갈고 짐을 실었다. 티티카카 호반의 코파카바나를 찾아가는 길. 잉카시대에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종교적 순례지. 세계적인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이슬람 양식의 대성당이 도심에 우뚝 솟아 있다. 그리고 도시 주위에는 험준한 바위산과 잉카시대와 그 이전의 유적지가 널려 있다. 호수를 가로질러 가면 잉카의 탄생지 이슬라 델 솔이 나온다. 낮에는 온화한 날씨가 우리를 감쌌다. 그러나 다시 우리가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이 고장에서는 성당에서 사람만이 아니라 자동차도 축복을 받아야 무사하다고 믿는다. 헌금을 얼마쯤 내자 우리와 함께 세닉도 축복을 받았다. 자동차의 축복 ‘베네디시온 데 모빌리다네스’였다. 우리 여행의 세례명을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우리 여행길은 남아메리카 남쪽 끝을 떠나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로 이어진다. 아프리카 대륙을 종단한 뒤 지중해를 건너 프랑스로 돌아갈 것이다. 6년이 넘는 세계여행. 우리 믿음직한 세닉은 계속해서 달린다!
화산 품은 태평양 보물섬 하와이 마우이·빅아일랜드 2006-12-11
지리한 사고들은 엉뚱한 연상을 낳는다. 한때 여행바닥에 유행했던 ‘죽기 전에 가보시라’는 신드롬이 하와이에서 생각난 데는 분명 사연이 있었다. 하와이하면 떠오르는 와이키키나 진주만의 해묵은 사고들. 그나마 한국판 블록버스터로 이름을 날렸던 한편의 영화가 그동안의 낡은 편견을 의미 없이 덧칠했을 뿐이었다. 호놀룰루와 와이키키로 대변되는 오아후섬에 비하면 132개나 되는 하와이군도 중 빅아일랜드나 마우이섬은 생소하면서도 가슴 설레는 곳이다. 빅아일랜드는 하와이의 나머지 섬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거대하고 다채로우며 마우이섬에는 ‘즐길 것이 100개가 넘는다’는 책자가 버젓이 안내센터에 꽂혀 있다. 우리가 몰랐던 하와이의 감춰진 보물이 이들 섬들 속에 숨어 있다. 할레아칼라에서 달과 태양을 만나다 마우이. 이 섬, 사람도 섬도 참 매력적이다. 육감적인 몸매의 가이드가 “오∼여러분, 사람 모습을 닮은 마우이에는 변화무쌍한 풍경이 담겨 있죠”라는 말을 할 때만 해도 시니컬하게 웃음을 던졌다. 매년 겨울이면 고래와 함께 스노클링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은 다소 과장이려니 생각하기도 했다. 새벽 3시. 할레아칼라라는 화산을 보러간다고 했을 때, 빽빽하게 산을 기어 오르는 자동차 행렬을 만나고 나서야 무덤덤했던 가슴은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도대체 뭐 하는 것인가.’ 졸음과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마시던 1리터짜리 커피 잔 안에서부터 잔잔한 파문은 일었다. 해발 3천58m에 위치한 세계 최대의 휴화산은 영하로 내려앉은 추운 날씨에도 빼곡히 사람들을 채우고 있었다. 어둠과 구름을 걷어내고 할레아칼라 분화구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이들은 외투 깃을 동여매고, 우비를 뒤집어 쓰고 웅성거리며 자리를 지켰다. 분화구와 맞닿은 난간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태양을 부르는 원주민 여인의 주문이 끝나자 귀신이 장난을 친 듯 갑자기 태양이 솟았고 막 달궈진 붉은 분화구가 자태를 드러냈다. 이곳 원주민말로 ‘태양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할레아칼라는 꼭 달 표면을 닮았다. 둘레 34km의 거대한 분화구 안에는 9개의 크고 작은 분화구가 성긴 그늘을 드리우며 담겨 있었다. 감동이 시공을 초월해 조우한다면 수십 명이 포옹하는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분명 내가 서 있었다. 달을 배경으로 한 헐리우드 영화들만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대부분 이곳에서 촬영됐다. 할레아칼라에서 인기 높은 레포츠는 분화구에서 일출을 본 뒤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는 ‘다운힐’ 프로그램이다. 구름을 뚫고 마우이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내리꽂는 것은 감동과 스릴과 땀으로 뒤범벅된다. 할레아칼라에서는 하와이 고산지대에서만 자생한다는 희귀식물인 행운의 은검초도 만날 수 있다. 고래와 서퍼가 함께 뛰노는 섬 할레아칼라 한 곳만 내세운다면 마우이의 찬사가 과장일수도 있다. 승용차를 몰고 북쪽해안인 후키파 비치에 들리면 피를 뜨겁게 달구는 역동적인 하와이가 펼쳐진다. 하와이 여기저기서 서핑을 즐기는 초보자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이곳 저스 해변은 ‘뛴다 난다’하는 베테랑 서퍼들만 모이는 곳이다. 에도 나온 서퍼들의 천국이다. 집채만 한 파도를 보드로 재단하는 서퍼들의 몸짓은 파란 파레트 위를 오가는 힘찬 붓질을 연상시킨다. 파도가 높아지는 계절이면 차를 댈 곳이 없을 정도로 해변은 분주해진다. 서핑 못하고 파도에 몸 실은 구릿빛 서퍼들만 구경해도 가슴은 콩닥콩닥 뛴다. 낭만 가득한 공간에도 수컷들의 본능이 넘실대는 곳에서는 반드시 주의할 것이 있다. 주인 없는 해변이지만 원주민과 이방인들의 서핑 구역이 정해져 있어 함부로 원주민 구역에서 폼 잡다가는 큰 코 다칠 수도 있다. 마우이섬 서쪽으로 향하면 북쪽바다와 달리 온화한 호수 같은 바다를 만난다. 육감적인 가이드가 고래와 같이 스노클링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한 바로 그 바다다. 이곳에 마우이 최대의 휴양지인 카아나팔리 해안이 있다. 군데군데 푯말에는 귀여운 고래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다. 카아나팔리 남쪽 도시인 라하이나는 하와이 왕국의 옛 수도로 19세기 포경선들이 몰려든 곳이다. 하와이 왕조를 통합한 카메하메라 왕의 궁전 잔해뿐 아니라 1901년부터 고래잡이 선원들이 묵었던 ‘파이어니어 인’ 호텔도 버젓이 남아 있다. 낚싯배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포구에서는 어른키만 한 생선 마히마히가 직접 거래된다. 게다가 이곳의 나이 지긋한 어부들은 대부분 웃통 벗고 있어도 아랫배 안 나온 근육질이다. 가만히 아랫배에 힘을 줘 본다. 라하이나 북쪽으로 펼쳐진 카아나팔리 해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조트들이 옹기종기 모인 최대의 휴양지이다. 이방인들은 낮은 모래해변과 노천바와 쇼핑센터가 어우러진 이곳에 쉼터를 마련하고 넉넉하게 마우이를 즐긴다. 인근 카팔루아 플렌테이션베이 골프 코스는 매년 PGA 첫 투어가 열리는데 해변과 함께 한 골프장이 정말 예쁘다. 클럽하우스에 가면 타이거우즈와 미셸 위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어 어깨가 으쓱해진다. 킬레아우아에서 만난 여인들 화산과 스키장이 공존하는 섬은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진짜 화산’과 ‘원조 하와이’를 보기 위해 빅아일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하와이 군도 중 가장 큰 섬인 빅아일랜드의 원래 이름이 하와이였다. 이 섬 중앙 마우나 케아산(4,205m)은 겨울이면 스키를 탈 수 있으며 빅아일랜드에는 열대기후부터 사막까지 다양한 식생이 존재한다. 빅아일랜드의 가장 큰 보물 덩어리는 동쪽 힐로 지역에 위치한 화산국립공원이다. 이곳 킬레아우아 화산 분화구에는 유황 냄새 가득한 활화산이 아직도 연기를 뿜고 있다. 화산국립공원은 마우이의 할레아칼라와 함께 하와이의 2대 국립공원이기도 하다. 지름 4.5km 킬레아우아 분화구 안에는 지름 800m의 할레마우마우라는 분화구가 또 있다. 1974년 화산활동을 일으킨 곳으로 불의 여신 펠레가 살고 있다는 전설 때문에 원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긴다. 연기 때문인지, 유황 때문인지 할레마우마우에 고개를 살포시 기대고 연인을 향해 미소를 짓던 한 프랑스 여인의 미소가 아직도 몽롱하다. 연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유황 사우나를 하던 여인도 잊혀지지 않는다. 불의 여신 펠레의 모습이 그녀들 얼굴 위로 오버랩된다. 매캐한 연기가 솟아오르는 곳까지는 직접 걸어서 둘러볼 수 있으며 마그마가 뿜어내는 연기 속을 헤치고 달리는 드라이브족도 종종 눈에 띈다. 이곳 활화산 분화구 가운데를 트레킹하거나 1박을 하는 멋진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해질 무렵에는 마우나 케아에 오른다. 이곳 정상에는 세계 각국의 천문대가 태평양 상공에 뜬 무공해 별들을 관측한다. 우주왕복선 챌리저호 폭발 때 사망한 코나출신의 우주비행사 이름을 딴 ‘오니즈카’라는 천문대와 간이휴게소도 있다. 바람소리와 석양이 자욱한 시간이 끝나면 별을 본다. 그 별 없이도 마우나케아의 정적만으로도 신비스럽다는 생각을 해 본다. 동쪽 힐로가 화산국립공원으로 유명하다면 서쪽 코나지역의 코할라 해변은 다양한 골프 코스와 휴양시설이 들어서 있다. 비도 안 오고 1년 내내 ‘해바라기’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코할라 해변에서 커피산지로 유명한 코나까지는 분출된 용암으로 채워진 도로를 질주할 수 있다. 길가에는 현무암 위에 산호로 쓴 글씨들을 볼 수 있는데 세계 각국의 ‘선영아 사랑해’가 수십 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하와이에 대한 연상은 공교롭게도 스쳐 지난 여인들의 눈빛으로 이어진다. 고래와 스노클링을 하자던 여인. 할레아칼라에서 태양을 부르던 여인. 킬레아우아 분화구를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짓던 여인. 신비로운 섬에 갇힌 것인지 그보다 더 매혹적인 여인들의 품에 안긴 것인지 혼동되는 상상의 공간에서 다시 한번 낮게 읊조려 본다. ‘죽기 전에 꼭 다시 온다. 하와이.’ TIP 대한항공이 주 4회 인천∼호놀롤루 직항노선을 운영하며 7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호놀롤루를 기점으로 마우이, 빅아일랜드 등 다른 섬으로 이동할 때는 비행기로 30∼40분 소요. 요금은 60∼100달러선. 숙소는 마우이에서는 하얏트 리젠시 마우이 (maui.hyatt.com)가, 빅아일랜드에서는 페어몬트 오키드 마우나 라니 호텔 (www.fairmont.com/orchid)이 허니무너들이 묵기에 좋다. 하와이는 연중 기후가 온화하며 하루 평균기온이 20∼28℃다. 12∼3월까지가 관광 성수기이며 가을과 봄이 비수기이다. 남서해안은 비취빛 해변이 있으면 북동해안은 산이 많고 파도가 거칠다. 전압은 110볼트. 관광지이지만 입국 때 꼼꼼한 질문이 이어지니 묵는 숙소 등을 정확히 숙지할 것. 하와이 신혼여행은 간편해졌다. 하와이 관광청 지정 여행사를 통해 비자를 요청하면 예비신부들도 최소한의 서류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날짜에 비자 인터뷰를 받을 수 있다. 신혼여행용 비자는 이후에 미국 입국 비자로 전환된다.
599 GTB 2만 마일 대장정의 절정을 달리다 페.. 2006-12-07
페라리를 몰고 남아메리카를 떠나 안데스 산맥을 타고 중앙아메리카를 거쳐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돌진한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미국 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른 뒤 다시 캐나다로 넘어간다. 최종 목적지는? 다시 남쪽으로 머리를 돌려 대서양 연안의 세계 최대 도시인 뉴욕. 거리는? 자그마치 2만 마일(약 3만2,000km). 도대체 무슨 페라리? 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최신 페라리 599 GTB 피오라노. 북미 두 대륙을 세로, 가로지르는 대장정의 당당한 주역이다. 우리는 그 가운데 한 토막인 파나마의 콜론에서 코스타리카를 거쳐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에 입성했다. 이 또한 5일에 걸친 두 아메리카 중심부 탐사의 대장정이었다. 우리 대열은 붉고 푸른 599 GTB 피오라노 2대를 중심으로 짜여졌다. 페라리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11명으로 지원부대를 만들었다. 기술진, 드라이버, 사진기자와 의사 1명이 이베코 트럭 2대(약 790kg의 부속품을 실은), 버스 1대, 피아트 도블로 마이크로 밴 2대와 깜찍한 피아트 이데아 SUV 2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One day :남북미의 중앙 파나마를 떠나 우리는 첫날을 느릿느릿 시작했다. 2대의 페라리는 7대의 지원차를 거느리고 콜롬비아에서 파나마로 화물선에 실려와야 했다. 두 나라 사이를 직결하는 도로가 없기 때문. 그래서 파나마의 항구 콜론에 도착하기까지 자그마치 3일이나 걸렸다! 그러나 페라리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파나마 시티 시내와 일대를 샅샅이 돌아다니며 즐겼다. 먼저 파나마 운하로 떠났다. 이 운하는 미국 공병대가 1904년부터 1914년까지 10년에 걸쳐 완성했다. 이 대역사의 기슭을 따라 달리는 기분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잠시 연안을 달리면서도 그 위대한 업적에 감탄했다. 운하 갑문도 두 번이나 지났다. 다시 연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파나미 시티의 스카이라인은 숨막히도록 아름다웠다. 다시 파나마 시티를 벗어나 엠베라 인디오 마을을 방문했다. 가게에 들러 모두가 샌들을 샀다. 강물을 건너 템베라 부족이 사는 곳을 찾아가게 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현대생활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원시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아이구, 깜짝이야! 그들은 속을 파낸 통나무배에 2기통 40마력 스즈키 아웃보드 모터를 달고 나타났다. 실은 차그레스 강을 우리들이 직접 노를 저어가는 광경을 상상하던 참이었다. 인디오 가이드는 정글을 지나 폭포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 일행은 모두 정신이 번쩍 드는 찬물 속에 첨벙 뛰어들었다. 인디오 마을로 돌아오자 주민들이 물고기와 바나나로 점심을 마련했다. 그런 다음 민속춤을 보여주었다. 우리도 함께 어울리려고 했지만, 힐 앤 토와 왼발 브레이킹에 중독된 우리로서는 따라 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친 김에 파나마 구(舊) 시가도 둘러보았다. 이글거리는 햇볕이 내려쬐는 후텁지근한 날씨. 우리는 차에 이골이 나고 페라리 장정에 나선 처지라 차를 몰아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다행히 파나마 콜론에서 차를 받아 파나마 시티로 오는 짧은 거리를 달렸다. 비가 내리는 어둡고 늦은 밤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중앙아메리카에서 페라리를 몰고 달렸다. Two days :파나마 시티에서 다비드로 가는 길 본격적인 장정의 첫날. 파나마 운하로 나가 미라플로레스 갑문을 배경으로 페라리와 함께 사진을 찍기로 했다. 운 좋게도 촬영을 시작했을 때 짐을 잔뜩 실은 화물선이 갑문을 지나는 장면을 잡을 수 있었다. 곧이어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그런 와중에도 마침 운하를 찾아온 단체 관광객들이 운하와 페라리를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많은 운하 관리자들도 몰려왔다. 그 중 일부는 페라리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페라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게다가 2대의 페라리가 각기 611마력의 V12 엔진을 레드라인까지 올려 위력적인 페라리 사운드를 연주하자 환성이 터졌다. 운하를 떠나 팬아메리칸 고속도로를 따라 다비드로 갈 때에도 계속 폭우가 쏟아졌다. 한 나절을 오고도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도로에 수없이 뚫린 구덩이를 피하느라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작은 마을 타타에서 차를 세우고 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1500년대 스페인 정복자들이 파나마에서 처음 정착한 곳인 타타는 아주 뜻깊은 역사적 고장이다. 근처에서 놀던 어린이들이 페라리를 보고 달려왔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꼬마들이 페라리와 포즈를 취하며 야단법석을 떤다. 그런데, 이베코 지원 트럭(모두 3대가 따르고 있었다) 한 대가 고장을 일으켰다. 때문에 우리는 빗속에서 좋이 30분 동안 길가에 앉아 있었다. 여기서 페라리팀은 스케줄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 뒤로 차를 세우고 쉴 시간이 거의 없어 화장실에 가기도 힘들었다. 우리는 하루에 세번이나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그때까지는 6주 동안 단 한 번밖에 없었다는 경찰 검문이었다. 첫 번은 시속 100km 구간에서 112km를 냈다고 모두를 끌어내렸다. 우리 모두가 내야 할 범칙금이 통틀어 2,500달러(약 234만 원)라고 을러댔다. 결국 10달러(약 9,400원)로 낙착되었고, 덤으로 페라리 T셔츠 2벌을 주어야 했다. 다음으로 임시 검문소에 두 번이나 잡혔다. 첫 번째는 단순한 검차였는데, 검차를 하는 동안 경찰관의 친구들이 나와 페라리 사진을 찍었다. 두 번째는 검문소에 과속으로 접근했느냐 아니냐를 놓고 45분이나 실랑이를 벌였다. 게다가 적신호를 무시했다는 위반사항까지 들이댔다. 하지만 우리 일행의 어느 누구도 적신호를 본 적이 없었다. 중앙아메리카의 교통단속이 이럴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도대체 법집행이란 이름이 무색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페라리 T셔츠 몇 장이 더 날아가고 나서야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이러다간 니카라과에 갈 때까지 T셔츠가 남아날지 걱정이었다. Three days :다비드서 코스타리카 산호세로 다비드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파나마-코스타리카 국경에 도달했다. 페라리팀은 국경 통과시간을 넉넉히 잡았다. 가서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코스타리카의 통관절차는 몇 시간을 질질 끌었다. 세관구역은 무덥고 숨통이 막히고 악취가 났다. 물론 바깥인데도 그랬다. 나는 에어컨이 있는 이베코 버스로 갔다. 한편 페라리팀은 세관원이 모든 차를 안전하게 통과시키는 데 몇 장의 T셔츠가 필요할지 계산하고 있었다. 구경꾼이 빽빽이 둘러싼 가운데 마침내 세관을 통과하여 2차선 도로에 들어섰다. 도로에 파인 어떤 구덩이는 파나마의 작은 양철지붕 오두막만큼 컸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페라리팀 대장 엔리코 골도니에게 차간 적정거리(약 50m)를 유지하자고 제의했다. 바퀴를 망칠 구덩이를 더 잘 보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운전 기회가 돌아왔다. 599를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몰아가야 하는 힘든 일이었다. 코스타리카는 파나마보다 더 아름답고 교통량은 적었다. 적어도 국경에서 수도 산호세로 가는 길가는 그랬다. 다행히 우리가 맞이한 코스타리카 가이드는 산호세로 가는 길을 훤히 꿰고 있었다. 코스타리카 시골은 무성한 열대식물이 짙게 덮여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탁 트인 농지가 나왔고, 각종 곡물이 자라고 있었다. 파인애플 농장도 더러 보였다. 주민들은 자기 고장을 지나가는 2대의 페라리를 보고 뜨거운 관심을 보 였다.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우리가 지나가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좋아했다. 대다수가 길가를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산호세에서는 몇 대의 차가 우리를 따라오며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우리 대열의 연료가 거의 바닥이 났다. 최대 후원업체인 쉘이 자사 주유소에서만 기름을 넣으려고 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포장이 잘 된 루트 2에 들어섰다. 그러나 산길로 들어서려는데 앞길이 막혔다. 트럭 몇 대가 앞을 가로막고 비켜주려 하지 않았다. 내리퍼붓는 비, 끈적하게 짙은 안개와 어둠이 앞길을 더욱 힘들게 했다. 고개를 올라가고 내려가는 도중 내내 넘치는 파워를 죽이고 엉금엉금 기어가자니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 대장정은 그걸 모두 참아내기로 한 고행길이 아니던가. Four days :코스타리카 산호세서 푼타레나스로 이날은 볼칸 포아스 국립공원을 출발점을 삼고, 먼저 공원 안에 있는 분화구를 구경했다. 그 곳을 떠나 푼타레나스로 가는 길. 교통경찰에 잡히는 것이 우리 여정의 목적이 되어버린 듯 했다. 몇 번이나 잡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제지당하는 이유가 도무지 분명치 않았다. 다만 7대의 피아트와 이베코가 달고 있는 다른 나라 번호판이 문제의 발단인 듯 했다. 누가 차를 운전하고, 보험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따졌다. 31달러(약 2만9,000원)와 함께 나눈 악수(이번에는 T셔츠를 주지 않았다)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 뒤 바라 브랑카에 있는 카타라타스 데 라 파스(평화의 폭포)로 올라갔다. 코스타리카의 거대한 길가 도랑은 유명하다. 그와 함께 시골을 덮고 있는 커피 밭이 장관이었다. 대체로 도로에는 갓길이 없다. 차선 밖은 낭떠러지와 마찬가지로 그냥 뚝 떨어진다. 풀밭이 아니라 깊이 1∼1.5m가 되는 도랑이나 콘크리트 벽에 나가떨어진다. 한마디로 실수하면 끝장. 비가 많이 내리는 코스타리카에서 도랑은 물 빼기에 알맞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후에 또 다시 폭우가 쏟아졌다. 때문에 해변 도시 푼타레나스로 가는 2차선 도로 85km를 가는 데 2시간 반이나 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엉금엉금 기어갔다. 코스타리카의 다차선 도로? 아예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다행히 커브길에서 한 번 멋지게 달려보았다. 여행을 시작한 뒤 처음이었다. 선두를 달리는 피아트가 추월을 해도 따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앞차와 먼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런 다음 속도를 올려 추격작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영특한 아이디어였다. 커브에서 선도차와 거리를 멀리 떼었다가 직선도로에서 고속으로 추격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왜 진작 이런 묘수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Five days :푼타레나스서 니카라과 마나과로 오늘 아침 루트 12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대열은 또다시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이번에는 과속이 아니라 제대로 보험증서를 갖고 있는지를 보자고 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그냥 페라리만 둘러보고 말았다. 입장이 바뀌면 우리도 그랬으리라 믿는다. 코스타리카를 지나면서 아름다운 경치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주민들도 무척 순박했다. 길가에는 쓰레기 하나 없었고, 파나마와는 달리 오두막에 살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자신과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누군가는 중앙아메리카의 스위스라고 했다. 어린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 페라리를 보고 환성을 올렸다. 국경을 넘어 니카라과에 들어가는 데 3시간 하고도 30분이 걸렸다. 수퍼카의 정상 페라리와 함께 가는 길이라고 해도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끄는 데는 진저리가 났다. 날씨는 무덥고 끈끈했다. 우리가 앉아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음식과 갖가지 물건을 팔려고 몰려드는 행상은 끝이 없었다. 누추하고 성가신 사람이 있기는 했어도 인상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멋모르는 관광객들을 덮치는 ‘반디토’(도둑)가 많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어 신경을 곤두세웠다. 다행히 페라리의 원래 의도에 가깝게 599를 잠시 몰 수 있었다. 제법 빨리. 일단 니카라과에 들어가자 선도차 피아트의 대장 엔리코가 부쩍 스피드를 올렸다. 교통 경찰이 별로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듯 했다. 도로는 2차선이지만 아주 느린 승용차와 트럭을 추월할 기회는 많았다. 덕택에 599의 6단 F1 패들 시프트 기어박스와 V12 6.0X 611마력 엔진을 한 번 시험할 만했다. 최고시속 230km까지 올릴 수 있었다. 우리를 기다릴 동료와 여자친구에게 자랑할 속도는 아니지만 일단은 짜릿했다. 고회전대에 올라가자 엔진은 비명을 올렸고, 기어박스는 풀 드로틀 시프트를 자신만만하게 받아들였다. 스티어링 휠 위에 달린 시프트 램프가 춤을 추었다. 미하엘 슈마허의 F1 경주차와 같다고 할까. 온/오프 드로틀 변환이 약간 돌발적이었다. 그리고 컴퓨터 다운 시프트는 일부 수동 패들 시프트만큼 매끄럽지 않았다. 그러나 599는 전체적으로 절대 지존의 스포츠카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달렸는데도 몸을 감싸주는 안락한 시트에 감탄했다. 안팎의 품질은 흠잡을 데 없었다. 게다가 이때까지 페라리는 얼마나 잘 견뎠는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도로 조건(물론 남아메리카의 도로는 이보다 훨씬 나빴다고 한다)이 페라리의 기술적 우수성을 입증했다. 니카라과를 달리고 있으면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 하다. 말, 마차, 자전거와 인력거, 스쿠터, 농기계와 길가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빨리 차를 몰아 계속해서 앞지르려고 하자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우리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식민시대에 세운 가장 오랜 도시와 2개의 화산을 배경으로 한 니카라과 호수를 찾았다. 그러나 밤이 되기 전에 수도 마나과에 입성하기로 했다. 풍문이 나도는 노상강도를 만날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후 4시 30분, 날마다 찾아오는 폭우가 또 다시 쏟아졌다. 그라나다로 가는 길이었다. 그때까지 만난 구덩이가 제일 많은 길이어서 더욱 힘들었다. 물이 고인 도로에서는 구덩이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엔리코의 피아트가 튕기는 물보라를 보고 가려내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 뒤차는 운이 나빴다. 구덩이에 빠져 휠이 부러지고 타이어가 터졌다. 다행히 페라리팀은 스페어 휠과 타이어 16개를 가져왔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라나다로 달려갔다. 그라나다를 떠나 마나과에 입성하면서 우리 장정은 막을 내렸다. 니카라과 주재 이태리 대사가 크라우네 광장에서 페라리 축하행사에 참가했다. 옥외 수영장의 무대 중앙에 페라리 2대가 올라갔다. 그리고 니카라과에 있는 유일한 페라리 308 GTS 한 대가 그 옆에 나란히 섰다. 이로써 페라리의 지존 599 GTB 피오라노를 몰고 세계에서도 가장 험악한 도로를 지나온 우리들의 황홀한 고행은 끝났다. 우리는 이번 장정과 이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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