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이프 - 라이프스타일

네이미스트 김희수 화룡에 점정하듯 단어 하나로 생명.. 2005-02-23
어릴 적부터 자동차나 과자, 옷 등의 이름 짓기 공모에 종종 응모한 적이 있다. 내가 지은 이름이 곳곳에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반, 상금이나 상품에 대한 욕심 반이었다. 사전을 뒤적거리며 좋은 이름을 찾아 후보를 뽑아 놓고 고심하기를 며칠. 가장 맘에 드는 이름을 보내 놓고도 맘이 놓이지 않아 후보작을 모두 보낸 뒤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했다. 하지만 당첨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수백수천 대 1의 선택을 위한 고행 “전공을 살릴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멋 모르고 발을 들여놓았죠. 하지만 지금은 광고보다는 네이밍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네이밍 전문업체인 메타브랜딩의 실장으로 일하는 김희수 씨의 대답이 무척이나 시원스럽다. 프랑스까지 가서 공부한 광고이기에 아쉬움이 남을 법도 하지만 주저없이 네이밍에 손을 들어준다. “이름을 짓는 것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에요. 장님 코끼리 다리 더듬듯 시작하는 작업이죠. 게다가 단순히 맘에 드는 단어를 찾아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마케팅 분석은 물론이고 법률검토와 영업력까지 모두 갖추어야 해요. 브랜드에 관해 A부터 Z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5~6명이 팀을 이뤄 하나의 이름을 짓는 데는 보통 한 달이 걸린다. 한 프로젝트에 올라오는 후보작은 수백 개에서 수천 개. 이를 감당해 내려면 해당분야에 전반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붙잡아 두는 작업은 필수.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족족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된다. 매일매일 수십 수백 개의 이름을 생각해 내야 하는 일은 고역 중의 고역. 스트레스도 엄청나다. 이 때문에 메타브랜딩에서는 직원에게 1년에 한달간 해외에 나가 재충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받아 하는 일이므로 이름을 붙일 상품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만 한다. 대개는 상품개발단계부터 긴 시간을 보고 경험하기 때문에 저절로 애착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오로지 그것에만 집중해요. 철저하게 미쳐서 마지막까지 애정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죠.” 식품에 대한 이름을 짓는다고 하면 마트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해서 시장조사를 하고 경쟁사 제품까지 다 먹어 볼 정도로 철저하게 파고든다. 이렇게 공들여 이름을 짓지만 한번에 만족스런 이름을 얻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서 작업을 했는데 클라이언트가 만족하지 못할 때나 가장 적합한 이름이라고 제안했지만 계속 다른 이름을 요구할 때 가장 난감해요. 끝이 안 보이는 작업을 시킬 때는 한 번 이상 크게 울곤 하죠. 플래너라면 누구나 다 그럴거예요” 그녀의 손을 거쳐간 주요 작품은 ‘로디우스’(쌍용자동차), ‘에쿠스’(현대자동차), ‘엔요’(매일유업), ‘하우젠’(삼성전자), ‘클라우드9’(KT&G), ‘엔프라니’(엔프라니), 하이페리온(현대건설) 등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너무나도 쟁쟁한 이름들이다. 그 가운데 가장 애착심을 갖고 있는 작품은 뜻밖에도 담배 브랜드인 ‘클라우드9’. 구름의 단계 중 신의 자리인 10단계를 빼고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 속뜻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어 더욱 애정이 간다고.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네이미스트란 직업에 대해 조금씩 빠져드는 기자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해달라는 주문에 그녀가 한마디 했다. “남들은 재미있고 멋있는 일 한다고 부러워들 해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커서 만만하게 볼 일은 아니랍니다.” 그렇다고 해도 TV나 길거리에서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직업이 그리 흔한가. 네이미스트가 멋진 직업인 것만은 틀림없다.
가수 겸 배우 황치훈 추억 속의 가수, 자동차 세일.. 2005-02-18
우리에게 연예인으로 잘 알려진 황치훈, 그가 어느새 자동차 딜러로 변신해 자동차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 평소 재규어의 팬이었던 그는 브리티시 모터스의 신익수 사장과의 친분을 계기로 수입차업계에 공식 입문하게 되었고 지난달 영업 교육을 마치고 2005년 1월부터 과장 직급으로 재규어 및 랜드로버의 영업을 담당하고 있다. “연예인 시절 재규어를 좋아해서 매장에 자주 들렀는데 지금은 이렇게 자동차를 팔게 됐습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습 사원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사실 직급은 과장이지만 낙하산 인사나 다름없지요.(웃음) 열심히 일을 배워 과장이라는 직급에 어울리는 세일즈맨이 되고 싶어요.” 황치훈 씨의 입사와 관련해 브리티시 모터스 신익수 대표는 “재규어&랜드로버가 가진 고급스러운 브랜드 이미지를 고려, 오랜 연예활동을 통해 얻은 황치훈 씨의 다양한 경험과 네트워크가 영업에 좋은 성과로 반영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라고 밝힌다. 황 과장의 이유 있는 변신 4살 때부터 아역배우로서 연예계에 입문한 그는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해 일찍이 아역 스타로 자리를 굳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호기심으로 기타를 배우러 갔다가 재미를 붙여 계속해서 음악을 공부, 89년 히트곡인 ‘추억 속의 그대’를 불러 그해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수상,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로 제2의 히트곡을 내놓지 않고 돌연 방송활동을 중단해 버렸다. 그가 연예활동을 중단하고 대중의 기억에서 희미해지게 된 것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었다. “제가 연예인이 되어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의 노력 때문이었지요. 어머니는 제게 가장 소중한 분이셨고, 제작자이며 매니저이기도 하셨어요. 89년 가요 시상식에 제가 신인상을 받던 바로 그해 어머니가 저혈압으로 돌아가셨어요. 당시 제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 어머니의 빈자리는 감당할 수 없이 컸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반년 이상 술만 마셨고 그 이후로 계속해서 안 좋은 일만 생기더군요.” 그 후, 그는 마음을 잡고 방송활동과 음반작업을 다시 시작했고 새 앨범을 내놓았다. 그러나 때마침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고 앨범 홍보 부족으로 예전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제대 후 다시 가수활동을 준비했으나 인지도 하락과 음반 제작사와의 음악적 견해 차이로 재기가 쉽지 않았다. “가수활동을 중단하고 안 해본 것이 없어요. 노동판에서 막노동도 해봤고, 광고회사에 입사해 잡일부터 배운 후 독립하여 광고기획사도 차려봤고, 인터넷 유통사업에 손을 대보기도 했지요. 성인방송국 관리자 일도 해본 걸요.(웃음)” 아역배우와 가수로서 잘 나가던 그에게 닥친 시련은 그를 강한 생활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보통 연예인이라면 하기 꺼려할 잡일도 마다하지 않고 소신껏 일을 해왔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망설이는 일이 한가지 있다. 바로 야간업소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리 큰 경제적 압박이 와도 한번도 이른바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러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밤무대에서 노래한다고 나쁜 건 아니지요. 그냥 제 나름대로의 소신을 지킬 뿐이에요.” 오래간만에 만나본 그에게는 예전의 미소년 이미지와 일반 사회인의 분위기가 섞여 있었고, 인터뷰를 하면서 받은 인상은 가식 없는 솔직함이었다. 보통 영업이라는 분야는 속성상 포장을 잘해야 하는 직업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만의 영업 노하우가 있다. “없는 사실을 부풀려서 말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재규어가 가진 성능을 있는 그대로 고객에게 설명하는 것이 제일 좋은 영업 방법 아닌가요? 일단 자동차 세일즈맨이 됐으니까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아 최고의 자동차 세일즈맨이 되려면 배워야 할 게 많아요.”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다시 돌아온 추억 속의 황치훈, 앞으로 펼쳐질 그의 활약상과 새로운 분야에서 이룰 ‘화려한 재기’에 기대를 걸어본다.
가수 진주 싱글 앨범, 새 분위기로 우리 곁을 찾아.. 2005-02-18
당차 보이던 열 여섯 살 여고생은 어느덧 숙녀가 되어 있었다. 사내아이 같던 얼굴에서도 이젠 제법 숙녀 티가 묻어난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짧은치마도 어색하지 않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는가보다. 우렁차게 내지르던 그녀의 목소리도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진주가 가수로 데뷔한 지도 벌써 10년. 10년 전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데모 테이프를 들고 음반사며 기획사를 직접 찾아다녔다. 가수가 되기 위해. 그러다 가수 박진영의 눈에 띄었고 ‘난 괜찮아’란 노래로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앨범을 내기까지 힘든 일이 참 많았어요. 한번은 찾아오라는 말을 듣고 직접 음반회사에 갔는데 저를 보더니 ‘사장님이 지금 안 계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발길을 돌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그 회사 사장이더라고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얼마나 서럽던지…….” 그녀가 외모 때문에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핑클, SES 등 예쁘고 깜찍한 여자가수들 틈에서 ‘노래만 잘 하는 가수’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상했던 적이 많았다. 지난해 8월 출연했던 뮤지컬 ‘탐풀즈’에는 그녀의 이런 모습이 담겨있다. ‘탐풀즈’는 노래는 잘 하지만 얼굴이 못 생긴 네 명의 여성 그룹이 얼굴만 예쁜 여성 4인조 그룹 ‘사파이어 걸스’의 노래를 대신 불러주다가 마침내 외모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공한다는 내용의 뮤지컬이다. 감독은 대본을 보자마자 진주를 떠올렸다. 그만큼 그녀의 삶은 ‘탐풀즈’ 주인공들과 닮았다. “대본을 읽는데 ‘울컥’ 하고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동안 서러웠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가는데 장면 하나 하나가 다 제 얘기 같았지요.” 새 앨범에서 피아노 실력 유감없이 뽐내 진주는 2집 활동을 마치고 2001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버클리음대에서 4년 동안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잘 나가던 그녀가 미국행을 택했을 때 많은 팬들은 아쉬워했지만 그녀를 격려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만큼 좋지 않았다. 1, 2집이 화려하게 주목받았던 것에 비해 3, 4집은 그리 눈길을 끌지 못했다. 여기에 소속사와의 갈등이 커지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힘든 시기를 겪어야 했다. “어렵게 결정한 유학이었는데 공부를 하면서 앨범활동을 한다는 게 쉽지가 않더군요. 미국과 한국을 왔다갔다하는 것도 그렇고요. 둘 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한 가지 일에만 충실하자는 생각에 유학생활을 잠시 접고 한국에 들어왔지요. 그런데 한국에 들어와 보니 여러 가지 문제들이 얽혀 있더군요. 소속사에서 그동안 저에게 거짓말을 했던 부분도 있고. 그때 처음 사람에 대해 실망을 했어요. 그래서 두 달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말도 안하고 집에만 있었어요.” 실어증에 걸릴 정도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그녀가 다시 일어선 데는 지금 소속사의 대표인 김성현 씨의 노력이 크다. 어린 시절부터 진주와 가깝게 지내왔던 그는 그녀를 다독이며 앨범작업을 시작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지난 12월 발매를 시작한 싱글 앨범 ‘진주&웨딩’. 그녀의 새 앨범은 지금까지 그녀가 불렀던 노래들과는 사뭇 다르다.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번안해 부른 타이틀곡 ‘Run to You’를 비롯해 앨범에 들어있는 노래 모두 사랑하거나 사랑 받는 내용의 곡들이다. “지금까지 이별 노래만 줄곧 불렀는데 덜컥 겁이 났어요. 이러다 정말 노래처럼 되는 게 아닌가 하고요. 가수는 자신의 노랫말처럼 산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즐겁고 기쁜 내용의 노래를 부르려고 해요.” 5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던 그녀는 이번 앨범에서 피아노 실력을 유감없이 뽐냈다. 전곡의 피아노 연주를 혼자서 소화한 것.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과 흡입력 있는 목소리가 더해져 앨범은 한층 깊이가 있어졌다. 18살이 되자마자 운전면허를 따고 고등학교 졸업식 날에는 학교에 트럭을 몰고 가기도 했던 그녀는 연예계에서도 소문난 스피드 매니아. 생방송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3시간만에 도착한 적도 있다니 그 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길을 잘 모르는 매니저 탓에 운전대는 주로 그녀 차지다. 물론 주변사람들은 그녀가 운전석에 앉기만 하면 안전벨트부터 찾는다. “속도감을 느낄 수 있는 차가 좋아요. 빠르게 달리다보면 우울했던 일, 기분 나빴던 일들을 잊을 수 있거든요. 지금은 르노삼성 SM525를 타는데 좀더 작고 스피드한 차를 몰고 싶어요. 작지만 힘있는 로버 미니 같은 차요. 제 이미지와 비슷하지 않나요?” 작고 귀여운 미니가 그녀와 닮은 것도 같다. 어쩌면 올 가을쯤에는 빨간색 로버 미니를 운전하는 그녀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최무배 무서운 의지로 열도를 뒤흔든 대한의 격투사 2005-01-19
서른 무렵인 기자와 연배가 비슷한 남자라면 누구나 레슬링에 대한 각별한 추억이 있을 듯하다. 코찔찔이 시절에는 박치기로 일본을 점령한 김일이나 화끈한 파이터 이왕표를 따라 아무하고나 머리를 부닥치고 땅바닥에 뒹굴기 일쑤. 그때 흘린 눈물과 코피는 양동이 하나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은 미국의 프로레슬링 WWF의 차지였다. 토요일 오후 혹은 일요일 새벽녘이면 부모님 몰래 안방으로 기어 들어가 TV 볼륨을 줄여놓고 터질 듯 팽팽한 근육에 개성 강한 필살기, 화려한 쇼맨십으로 무장한 ‘마초’들의 세상을 숨죽이고 바라본 기억이 생생하다. 레슬링 국가대표에서 종합격투기 선수로 ‘진짜 남자란 저런 것’이라는 환상까지 심어준 프로레슬링의 세계는, 그러나 WWF가 실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소문을 구체적인 사례까지 제시하며 설파하는 대다수 친구들의 말에 슬며시 시시한 작당으로 전락해버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설 즈음에 이르러 프로레슬링은 급기야 어린것들이나 보는, 아니 완전히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기자가 종합격투기 선수를 인터뷰한다는 사실은 넌센스에 가까웠다. 어른이 된 뒤로는 프로레슬링은커녕 최근 2~3년 부쩍 인기를 끌고 있는 K-1이니 이종격투기니 하는 쪽으로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는데……. 최무배(36) 씨를 만나러 가기 전까지도 ‘레슬링(혹은 종합격투기)은 각본 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마음 속 벽은 높이 둘러쳐 있기만 했다. “상대선수를 어떻게든 링 바닥에 눕혀놓고 주먹으로 연신 쥐어박는 경기가 뭐 재미있을까 싶었어요.” 케이블 방송에서 간혹 지나치듯 보았던 종합격투기의 경기장면을 떠올리며 그에게 던진 이 한마디는,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실수였다. “사람은 충분히 이성적이고 문화적인 존재이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본능이 남아있습니다. 예쁜 여자를 보고 노골적인 시선을 던지는 남자들 있죠? 격투기에 대한 생각도 신체적인 사인에 반응하는 개개인 나름이라고 봅니다. 종합격투기에는 현대전투에서 찾을 수 없는, 전투에 대한 로망이 있어요.” 스스로는 인상 좋다고 해도 그의 눈은 똑바로 마주볼 수 없을 만큼 형형한 빛을 뿜어낸다. 더구나 190cm의 키에 몸무게만 100kg이 넘는 거구. 당장 잘못했다고 빌고 싶은 심정이다. 최 씨는 아마 레슬링 그레코로망형의 국가대표였다. 98년 사고로 현역에서 물러난 뒤 레슬링 도장을 열고 후학 양성과 레슬링 보급에 골몰하던 그가 종합격투기 선수로 선뜻 나선 것은 겨우 지난해의 일. “2003년 말 있었던 일본 프라이드 GP 파이널 라운드를 보러갔었어요. 티켓을 추첨해 유명선수의 기술을 관객이 직접 체험하는 행사를 했는데 마침 제가 올라가게 됐지요. 그때 나왔던 선수가 프라이드 대회의 헤비급 챔피언인 효도르 선수였어요. 뒤에서 절 감싸안고 넘기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꿈쩍도 하지 않으니까 이 친구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대놓고 겨뤄보자는 기세로 나오더라구요. 상대가 진지하게 나온다면 저 또한 물러서지 않고 맞서야하는 게 정상인데, 이벤트에서 그럴 수는 없잖아요. 더 버티다가는 ‘진짜 경기’가 될 것 같아 마지못해 넘어가는 척 했어요.” 최무배 씨는 당장 프라이드 대회 운영자의 눈에 띄었고 지난해 2월 프라이드 FC의 하위리그격인 부시도(武社道) 대회에서 공식 데뷔전을 갖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이마무라 유우스케 선수와 가진 첫 경기에서 목조르기 기술로 4분8초만에 승리를 거둔 최 씨는 이후 5월의 부시도3에서도 일본 헤비급의 강자로 꼽히는 야마모토 요시히사를 상대로 심판판정승을 거뒀다. 최 씨의 무서운 기세는 본선인 프라이드 무대에서도 이어졌다. 지난해 10월 31일 있었던 소아 펄럴레이와의 경기. 그가 갑자기 컴퓨터 모니터에 당시 경기 녹화 화면을 띄운다. “좀 길텐데, 그래도 한 번 보세요. 1라운드 10분, 2라운드 4분여 경기인데 저 되게 맞거든요.” 아닌게 아니라 최무배 선수는 정말 엄청 두드려 맞고 있었다. 1라운드 중 그의 얼굴에 쉴새 없이 쏟아진 상대방의 펀치가 얼추 20여 대 남짓. 이것 말고도 위기는 많았고 경기 내내 뭇매를 맞으며 일방적으로 밀리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렇게 흠씬 두드려 맞고도 그는 서 있는 자리에서 물러날 기색이 없다. 한 대 맞고 앞으로, 두세 대 더 맞고 또 앞으로……. 2라운드가 시작되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로는 상대편 선수도 기가 질린 모습이었다. 순간, 최무배 선수가 기습적으로 파고들어 상대선수를 쓰러뜨리고 강한 목조르기에 들어가자 경기는 허망하게도 끝이 났다. 최무배 선수의 기권승. “비장의 무기 하나로 적을 단숨에 쓸어버리는 울트라맨처럼 단 한방의 공격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자 장내가 난리가 났어요. 그럴 만도 했겠죠. 경기를 본 제자가 제가 맞은 펀치를 세어봤는데, 대충 200 몇 십대 정도나 되더래요. 나중에 만난 복싱 선배들도 그러더군요. ‘그 정도로 몰렸으면 쓰러지고 싶었을 텐데 왜 안 쓰러졌냐’고요. 간단해요. 쓰러지고 싶지 않았거든요. 더 싸울 힘도 남아있었고.” 예의 살아있는 눈빛으로 그가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기자의 가슴은 꿈틀대고 있었다. 야성? 남자의 본능? 그것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설 수 없다” “비껴나지 않는다”는 인간 최무배의 자세가 이끌어낸 삶에 대한 의지일 것이다. 그의 꿈은 소박하다. 힘닿을 때까지 선수로 뛰고, 자신이 몸담은 레슬링을 배드민턴처럼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생활체육으로 정착시키는 것. 프라이드FC용 글러브를 끼고 불끈 움켜쥔 남자의 주먹이 그제야 아름답게 빛나 보인다.
인라인 스케이트 국가대표 궉채이 차보다 날쌔게 달리.. 2005-01-13
최근 기아 쎄라토의 신문광고와 TV CF를 보면 차보다도 더 눈길을 끌며 시원스럽게 달리는 여자가 등장한다. 멋진 포즈로 달린 후 앳된 얼굴로 환하게 웃는 그녀는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인라인 스케이트 국가대표 궉채이 선수다. 일찍부터 국내의 각종 인라인 스케이트 경기에서 우승을 놓치지 않았던 그녀는 지난 2001년 프랑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이후 여러 해외 경기에서도 늘 우승을 하거나 아깝게 준우승을 하는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 특히 궉 선수는 지난해 이태리에서 열린 인라인 스피드 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3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따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궉채이 선수는 지난해부터 기아와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국제인라인롤러경기연맹(FIRS)의 공식대회인 WIC(World Inline Cup)를 후원하는 기아가 세계여자인라인마라톤팀인 베르두치인터내셔널팀(Verducci International Team)과 손잡고 기아-베르두치팀(KIA-Verducci International Team)을 창단하면서 국내 인라인 스케이트 최고의 간판스타인 궉채이 선수를 영입했기 때문이다. 면허 따면 스포츠카 타겠다는 당찬 여고생 올해 안양 동안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궉채이 선수는 경기 때와 달리 운동복과 헬멧을 벗으면 아직 앳된 얼굴과 표정을 지닌 영락없는 18세 여고생이다. 예쁘장한 외모와 훤칠한 키(168cm), 52kg의 호리호리한 몸매 덕분에 일찍부터 온라인 카페에 팬클럽이 생겼을 정도로 인기 높은 ‘얼짱’ 스포츠 스타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그녀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다부지게 만들기 위한 연습에 한창이다. 이제까지 출전했던 주니어 클래스를 지난해로 마감하고 올해부터는 시니어 클래스로 출전하기 때문이다. 시니어는 주니어와 달리 선수들의 테크닉이 뛰어나고 체격도 훨씬 크기 때문에 몸싸움이나 자리다툼에서 뒤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몸을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문에 경기가 없는 요즘 궉 선수는 힘겹기로 유명한 산악훈련과 타이어 끌기에 주력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관왕을 차지하고 지었던 궉채이 선수의 해맑은 미소 뒤에는 성공한 스포츠 스타들이 그렇듯이 피나는 훈련과 자기와의 싸움의 흔적이 짙게 배어있다. “요즘처럼 경기가 없는 겨울에는 오전 5시에 일어나 요가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전에는 웨이트 트레이닝, 점심식사 후에는 산악훈련과 타이어 끌기로 몸을 만들고, 오후 4시가 되면 스케이트 자세훈련을 시작하지요. 하루 6시간 이상 고된 훈련을 하지만 그래도 경기가 없는 비시즌이라 마음이 편한 편이에요.” 운동을 하지 않을 때는 박미경과 마야 등의 음악을 옆에 끼고 살고, 치즈라면이나 치즈돈까스 등 치즈가 들어간 음식이라면 뭐든지 좋아하는 궉채이. “편식이 안 좋은 것은 알지만 콩나물과 회는 죽어도 못 먹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여느 10대 소녀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훈련이 고되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세상에 어디 힘들지 않은 게 있나요”라고 응수하는 모습에서는 제법 어른스러움도 엿보인다. “운동이라는 것이 다 그렇지만 힘들 때가 참 많아요. 높은 산을 한달음에 뛰어 올라가거나 무거운 타이어를 끌 때는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아요. 고된 훈련도 힘들지만 해외 경기에 참가한 후 10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귀국해 다음날 또 다른 경기를 위해 출국할 때는 정말 지쳐서 몸이 말을 듣지 않지요. 그러나 지난번에 경험해보니 쉬울 것 같던 스튜디오 촬영도 무척 힘들더군요. 역시 세상에서 힘들지 않은 일은 없나봐요.” 운동을 워낙 좋아해 훗날 결혼을 한 후에도 선수생활을 계속 하고 싶다는 궉채이 선수. 궉 선수의 올해 목표는 지난해와 조금 다르다. 지난해 초에 가진 목표는 ‘세계에서 인정받는 선수가 되자’는 것이었는데, 2004년 세계 주니어 클래스를 석권하면서 목표를 어느 정도 이루었다. 궉채이 선수의 올해 목표는 이제 시니어 클래스에서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성적을 얻는 것이다. “자동차요? 무척 좋아하지요. 앞으로 면허를 따면 가장 먼저 멋진 스포츠카를 사서 타고 다닐 거예요.” 인라인 스케이트뿐만 아니라 어릴 때 배웠던 무용도 하고 수영에도 도전하고 싶다는 당찬 10대 소녀 궉채이가 꿈꾸는 또 하나의 멋진 자신의 미래상이다.
연기자 김규리 ‘불멸의 이순신’ 통해 사극 연기에 .. 2005-01-13
김규리가 데뷔를 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모 화장품 CF였다. 앳돼 보이는 여자 모델이 코에 하얀 시트 같은 것을 붙이고 나와서는 거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쩍’ 하고 뜯어냈다. 시트에는 거뭇거뭇한 작은 알갱이들이 붙어 있었다. 광고를 본 여자들은 ‘내 코에도 저런 지저분한 것들이 있으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에 너도나도 화장품 가게로 달려가 제품을 샀다. 당시 코팩의 인기는 대단했다. 다른 화장품 회사에서는 앞다투어 비슷한 제품을 내놓았고 여자들은 저녁나절 20분을 하얀 시트를 코에 붙이는 일에 투자했다. 처음 코팩을 시중에 내놓은 화장품 회사는 매출이 급격히 올랐고 어린 여자모델도 단숨에 스타로 올라섰다. 그 모델이 바로 김규리다. TV와 스크린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 CF로 얼굴을 알린 그녀는 영화 ‘여고괴담‘, ‘산전수전’, ‘가위’, ‘리베라메’, 그리고 SBS 드라마 ‘팝콘’ 등을 찍으며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드는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MBC 드라마 ‘선희, 진희’를 찍을 때까지……. “드라마 ‘선희, 진희’를 찍고 나서 솔직히 많이 지쳐 있었어요.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하고 싶은 배역이 올 때까지 푹 쉬자고 제 자신에게 약속을 했어요.” 김규리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다. 그녀는 2004년 개봉한 영화 ‘분신사바’에서 은주와 춘희 두 인물을 번갈아 연기하며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고괴담‘, ‘가위’에 이어 세 번째 공포영화 출연이다. ‘가위’를 찍고 이제는 공포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그녀가 또다시 공포영화를 찍게 된 배경에는 안병기 감독의 끈질긴 구애가 있었다. 그녀는 ‘분신사바’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를 보여주며 안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1인 2역을 소화하는 것이 힘들었어요. 특히 영화 마지막 부분에 핏물을 뒤집어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걸 찍는 것이 가장 힘들었지요. 저는 누워있고 위에서 계속 피를 들이붓는데 눈이며 코에 피가 들어가 며칠 동안 고생을 했어요. 하지만 힘든 만큼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예요.” 김규리는 지금 KBS 1TV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연인인 미진과 미진의 딸 초희를 연기한다. 사극은 처음이라 대사를 외우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다. 겹겹이 입어야 하는 한복때문에 여름에는 등이며 팔에 땀띠가 돋기 일쑤였다. “처음 접하는 장르라 많이 생소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생각만큼 쉽지가 않아요. 많은 네티즌들이 제 얼굴이 사극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세요. 그럴 땐 정말 속상하지요.” 발랄한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일까? 그녀의 변신에 시청자들은 낯설어하고 있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이고, 그만큼 더 노력하려고 한다. 그 사이 그녀는 영화도 하나 찍었다. 1970년대 ‘무등산 타잔’으로 불리며 광주 빈민들의 우상이 되었던 박흥숙의 삶을 그린 영화 ‘무등산 타잔, 박흥숙’에서 그녀는 광주 모 여고의 칠공주파 짱인 장영신 역을 맡아 열연했다.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권투, 태권도, 합기도 등을 6개월 동안 배웠다는 후문이다. “영화와 드라마 모두 각각의 매력이 있어요. 영화는 최고의 장면을 찍기 위해 몇 날 며칠 촬영을 거듭하죠. 반면 드라마는 진행이 굉장히 빨라요. 스릴이 있다고 할까요?” 그녀는 2003년 3월 메르세데스 벤츠 E320을 손에 넣었다. 스물 여섯이라는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조금 의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E 클래스의 둥근 헤드램프는 그녀의 커다란 눈과도 닮았다. 우아하면서 날렵한 보디라인 역시 그녀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예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차 값이 비싸 선뜻 사지 못했어요. 주로 소속사 차로 이동을 하기 때문에 특별히 차가 필요하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2년 전인가, 갑자기 차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래도 제 차가 있으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나만의 공간도 가질 수 있으니까요.” 보디 컬러는 은색이다. 깔끔하면서 냉철해 보이는 그녀의 이미지와 어울린다. 그녀는 차 안에서 음악을 듣는 것으로 하루의 피로를 푼다. 바빠진 스케줄 속에서 그녀를 생기 있게 만드는 것은 음악이다. 시트를 완전히 뒤로 젖히고 볼륨을 크게 올린 후 음악을 듣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확 가신다고. 물론 시트도 시트 나름이겠지만.
시인 정일근 돌아 오라 귀신고래여, 동해 앞 바다로 2005-01-13
참 맑아라/겨우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열이, 열이가 착하게 닦아 놓은/유리창 한 장 먼 해안선과 다정한 형제 섬/그냥 그대로 눈이 시린/가을 바다 한 장 열이의 착한 마음으로 그려 놓은/아아, 참으로 맑은 세상 저기 있으니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는 ‘바다가 보이는 교실’의 저자 정일근 시인은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라는 시로 당선되었고, 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인의 첫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에 실려 있는 위의 시는 대학 졸업 후 국어 교사로 첫 발령을 받은 진해남중학교에서 쓴 것으로 같은 제목의 연작시 가운데 10번째로 ‘유리창 청소‘라는 부제가 붙은 시이다. 울산에 거주하고 있는 정 시인을 서울 인사동의 찻집 인아에서 만난 것은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본심 심사를 보고 난 다음날이었다. 한때 신춘문예에 한번 응모해 보지 않은 문학청년이 어디 있을까. 요즘의 열기는 어떤지 궁금했다. “20년 전에 저를 뽑아준 이근배 시인과 함께 심사를 보았어요. 그동안 상금도 많아지고 문학적 환경도 좋아졌지만 원고를 보니 예전보다 열기가 식은 것 같아요. 요즘은 대부분 워드 프로세서로 쓰니 밤새워 원고지에 정서하던 때와는 다르지요. 문학이란 사람의 향기, 체온일텐데 그런 부분에서 기계의 냄새가 난다고 할까요?” 시대가 어려울수록 문학의 꽃이 핀다는 말이 있다. 경제위기 탓인지 작품 수는 많아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열기란 과거 20대의 응모작이 많았다면 지금은 40대가 많은 식이다. 예전의 그 20대가 아직도 응모한다는 얘기는 문학의 단절, 혹은 문학적 열정의 차이가 그만큼 벌어졌다는 게 아닐까. 귀신고래는 생명의 복원, 통일의 아이콘 사실 정 시인은 신춘문예 얘기보다 고래이야기를 하고싶어 했다. 그것도 귀신고래. 귀신고래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귀신처럼 잘 도망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새끼고래를 업고 가는 고래는 귀신고래라 보면 되요. 언양 반구대의 선사시대 암각화 200여 점 중 50점이 고래 그림이에요. 바로 귀신고래지요. 3천~4천 년 전부터 한국인과 친숙했던 고래지요.” 우리가 먹는 미역을 고래의 선물이라 한다. 그 이유는 고래가 미역을 뜯어 새끼에게 먹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따라 먹기 시작했기 때문. 고래만큼 모성애가 강한 동물도 드물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해바다를 뒤덮었던 그 많던 고래는 다 어디 갔을까? “예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래를 먹지 않았어요. 일본사람들이 고래를 먹게 만든 것이지요. 일본은 원래 포경업이 발달했던 나라로 고래고기를 미친 듯이 좋아해요. 포경의 역사는 곧 남획의 역사입니다. 육지에서의 36년 수탈뿐 아니라 바다에서는 아예 씨를 말린 것이지요.” 1912년 미국의 탐험가 앤드류가 장승포에 와서 귀신고래를 찍은 사진이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귀신고래의 유일한 사진이다. 오호츠크해에서 우리나라로 회유하는 고래를 일컬어 ‘코리아 그레이 웨일’(korea Gray Whale)이라고 앤드류가 명명했다. 그 귀신고래가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하자는 운동에 정 시인은 발벗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울산사랑 시노래회 푸른고래의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내년 울산에서 열리는 2005년 IWC(국제포경위원회) 연례회의의 성공을 위한 ‘시노래 콘서트’를 개최, 고성, 양양, 울진, 울산 등 동해안 고래 출몰 지역을 돌면서 귀신고래에 대한 관심을 호소해나갔다. “김남조, 고은 등 대표시인들이 참여하는 고래시집을 영문으로 만들고 있어요.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문화예술적 심성을 전달하고 코리아 그레이 웨일이란 이름을 찾는 것이 목표예요. 귀신고래가 한국으로 회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본인들이 그 이름을 없애려 하기 때문입니다. 독도 문제 못지 않게 심각한 일입니다.” 고래의 회유는 숙명적인 것이다. 그래서 왜 귀신고래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남북한의 공동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알래스카의 얼음에 갇혀있던 귀신고래를 구하기 위해 미국과 구 소련이 처음 만나면서부터 데탕트가 시작되었듯이 귀신고래를 통해 통일의 길도 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서 귀신고래는 통일의 아이콘입니다. 그리고 고래가 돌아오려면 바다가 변해야 합니다. 바다가 변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변해야 하겠지요. 바다를 살리는 것은 곧 우리들을 살리는 길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통로에서 공연예술의 미래를 외치다.. 2004-12-20
계 분침은 약속한 시간을 넘어섰고, 눈앞에는 브레이크등이 반복적으로 점멸하는 차들로 가득하다. 애꿎게 클랙슨만 눌러댄 도심 한복판의 초조한 순간에 그가 보낸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천천히 오세요. 극장은 제게 있어 집이며 공부방입니다. 공부하고 있겠습니다.” 그 진지함, 그리고 그 섬세한 배려란 정말 누구에게나 대접받을 만하며 안심을 주는 것이었다. 연극인이자 ‘마지막 변사’ 신출 선생의 수제자인 정찬교(42) 씨의 첫인상은 이렇듯 따사로웠다. 20년 연기생활 거쳐 변사의 후예로 정찬교 씨는 지난 10월 12일 극단 양산박 퍼포먼스가 주최한 ‘마지막 변사 신출 선생님의 첫 제자 뽑기 오디션’을 통해 변사로 입문했다. 변사(辯士)는 1940년대 이전의 무성영화 시대에 움직이는 성우이자 배우 혹은 감독이었다. 하지만 무성영화가 사라지면서 그 속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변사 역시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고 지금은 신출(76) 선생만이 이 시대의 ‘마지막 변사’로 남아계실 뿐이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없는 세상도 만들어내고 멀티채널 서라운드 시스템이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하는 사운드를 뽑아내는 지금의 영화 세상에서 그는 왜 마지막 변사의 후계자가 되었을까. “1984년 극단 예맥에서 ‘이상의 날개’라는 작품으로 연극생활을 시작했어요. 지난 20년 동안 서른 편이 넘는 연극과 실험극에 출연했고요. 막힌 공간인 소극장과 열린 무대 등에서 다양한 연기를 펼쳐왔지만 좀더 진취적인 연극을 하기 위해서는 스펙트럼을 더욱 넓혀야 했지요. 연기력은 물론 경험 면에서도 많은 공부가 필요한 시점이었어요.” 변사 공개 오디션에는 약 200여 명이 지원했다. 하지만 실제 접수자는 100명 남짓, 오디션 장소에 찾아온 이는 20여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실제 무대에 올라 변사의 자질을 시험받은 응모자는 10여 명 안팎. 이 날 오디션을 통해 모두 5명의 제자가 뽑혔지만 지금은 정 씨와 최초의 여성 변사로 기록될 가애(26) 씨 두 명만이 남아 있다. “연극 연기자로의 생활도 풍족하지 못한 마당에 하물며 설 기회조차 변변치 않을 무성영화의 변사가 된다는 데는 그만큼의 각오와 앞날을 위한 스스로의 계획이 필요했던 거지요. 더구나 신출 선생님은 자신의 제자가 연기자가 아닌 ‘쟁이’가 되기를 원하세요. 하지만 저 역시 변사로서만 기억되고 싶진 않습니다. 우선은 변사로서의 실력을 키워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무성영화의 시대를 복원하는 데 만족하진 않을 겁니다. 무성영화를 공연예술의 새로운 장르로 발전시키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장르화된 무성영화는 21세기인 지금에도 실제로 존재한다. 이태리의 시골마을인 포르데노네에서 매년 10월에 열리는 무성영화의 축제 ‘포르데노네 영화제’는 올해로 벌써 23회 째를 맞이할 만큼 꾸준하고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변사 없이 오케스트라나 재즈 뮤지션 등이 효과음만을 더하는 것이 우리네 무성영화와의 차이점일 뿐이다. “아시아권에서는 기술적인 한계로 기계에 의존하는 대신 변사가 배우들의 대사며 지문 등을 일일이 읽고 연기해주었지요. 현대적인 변사의 역할을 여기서 찾을 수 있어요. 유성영화를 무성영화화해 저와 같은 변사가 음향기기의 역할을 대신하는 겁니다. 연극과 영화의 접목을 통해 매우 색다른 감성의 공연이 탄생할 수 있을 겁니다.” 정찬교 씨의 변사 수업은 이미 시작되었다. 지난 10월 2일 시작한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의 전국순회공연 투어 3회 째에 합류했고 거의 매주 전국 방방곳곳을 도는 강행군을 소화해왔다. 스승은 매일 침을 맞고 허해진 심장을 다스리면서도 연기의 전부를 책임지고, 제자에게는 영사기조차 만지지 못하게 할 만큼 변사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정 씨가 스승에게 처음 한 달간 들었던 얘기라고는 “목소리가 그래서 되겠어? 목청 키우고 대본 빨리 외워야 돼”가 전부였지만 지난 11월 13일의 울릉도 공연 뒤에는 “그래, 그거야”라는 칭찬까지 얻었다. 그리고 정 씨는 내년 2월부터 정식으로 무성영화 연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선생님은 폭포수 밑에서 피 토해가며 목소리를 얻었다는데, 그 성량은 정말 대단해요. 머릿속에는 온통 변사 연기에 대한 생각뿐이시지요. 어렵고 부담스런 상황이라 정수리는 무겁지만 기분은 황홀할 만큼 좋아요. 연극, 영화, TV 드라마 그 어떤 종류의 연기라도 이제는 소화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고 사라질 뻔했던 변사의 후계자로 창조적인 공연을 만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으니까요.” 테이프 레코더를 켜고 ‘검사와 여선생’을 연기하는 스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그의 눈가에선 어느새 촉촉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왜 울고 있는가? 그리고 눈물 아래 비치는 그 웃음은 또 무엇인가? 과거와 현재의 통로에서 만난 변사 정찬교의 모습은 그렇게 진실되고 아름다웠다.
연기자 진재영 ‘색즉시공’, ‘낭만자객’으로 화려하.. 2004-12-14
10년쯤 전이었던가? 부산사투리를 쓰던 갈래머리 소녀가 있었다. 청순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맛깔스런 경상도 사투리는 시청자들을 브라운관으로 끌어 모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겹치기 출연과 방송 스케줄……. 그렇게 그녀는 1998년 KBS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를 찍을 때까지 그야말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 그녀가 돌연 브라운관에서 자취를 감췄다. 스캔들에 휩싸이면서 주변의 눈총에 견디지 못해 연기생활을 접은 것. 그리고 4년. 그녀의 얼굴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갈 즈음 ‘색즉시공’이란 영화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제는 편안한 역 하고 싶어요” 진재영은 2002년 12월 ‘풍기문란 섹시코미디’로 자청하며 웃기고 야한 장면은 다 집어넣어 관객을 포복절도하게 만든 영화 ‘색즉시공’에서 육감적인 몸매를 과시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결과는 420만 명이라는 관객 동원으로 이어졌다. 그녀조차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안 좋은 일을 겪고 나니 연기생활이 싫어졌어요. 그래서 다 접고 조용히 지냈지요. 그랬더니 정말 아무 곳에서도 연락이 없었어요. 그렇게 4년이 흘렀는데 윤제균 감독님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어요. ‘이런 영화가 있는데 혹시 출연해보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시나리오를 읽어봤는데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당장 감독님께 전화를 해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어요.” ‘색즉시공’에서 그녀가 맡은 역은 극중 하지원과 섹시 대결을 펼치는 에어로빅부 학생 김지원. 완벽한 에어로빅 동작을 선보이기 위해 크랭크인 3달 전부터 훈련에 들어갔고 낮에는 연기, 밤에는 연습으로 쉴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1년 후. 진재영은 영화 ‘낭만자객’으로 다시 스크린에 섰다. 이번엔 얼굴은 왕조현인데 입만 열만 상소리가 튀어나오는 귀신 ‘향이’였다. “향이는 얼굴만 보면 청순하고 예쁜 귀신이에요. 하지만 입만 열만 사투리와 욕이 쏟아지죠. 전 그런 솔직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어요. 관객들 반응이요? 물론 천차만별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에 연연해하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이렇게 봐주세요’라고 해도 그렇게 안 봐주시잖아요. 연기는 연기일 뿐인데…….” 그녀는 ‘낭만자객’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를 보였다. 무술을 해야하는 역 때문에 틈틈이 칼을 쥐고 다녔고 와이어 연기를 선보이기 위해 강도 높은 스턴트 훈련을 받았다. 과격한 행동이 많아 영화를 찍을 때는 온몸에 멍이 들기도 했지만 다시 시작한 연기인 만큼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꾀를 부릴 수 없었다고. “그래서 대역도 거의 쓰지 않았어요. 촬영이 끝나면 거의 녹초가 되곤 했지요. 하지만 정말 재미있게 찍었어요.” 지난 9월 막을 내린 MBC 드라마 ‘황태자의 첫사랑’을 끝으로 그녀는 잠시 쉬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섹시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편안한 얼굴로 다가가고 싶다는 진재영. 그래서 다음 작품을 고르는 일도 조심스럽다. “다양한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하나의 이미지에만 묶여 있으면 여러 모습을 보여줄 수 없잖아요. 정신병자 같은 역할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이 귀여운 부산아가씨는 2편의 영화로 연기자로 돌아왔다. 어쩌면 내년쯤에는 갈래머리 소녀였던 진재영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보다 성숙해진 배우의 모습으로…….
언강 윤병훈 명장 40여 년, 꼿꼿한 오죽을 닮은 .. 2004-12-14
그리 오랜 세월 동안 오죽(烏竹)을 붙잡고 살게 될 거라고는 그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40여 년 전, 우연히 오죽을 마주했을 때 언강 윤병훈(70) 옹은 헌 교과서를 모아 시골에 파는 일을 하던 범부였다. 그날도 충남 부여의 어느 중고등학교에 책을 납품하고 오는 길이었다. “농부들이 대나무를 베어내고 있는데, 가만 보니 오죽이더군요. 쓸모가 없고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고 해서 그렇게 베어 버리는 거였지요. 오죽은 이율곡의 고향 강릉 오죽헌이나 정몽주가 순절한 선죽교 등 선비의 절개가 서린 곳에서만 자생한다는 대나무예요. 인공 재배가 불가능한 만큼 귀하게 취급되어 조선시대에는 ‘선공감’이라는 관청에서만 오죽으로 공예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오죽이 함부로 버려지는 것을 보니 이대로는 안되겠다, 무언가를 만들어 보존하고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군요.” 10여 년 연구 끝에 독특한 기하화법 완성해 그 뒤 오죽을 찾아 우리나라 곳곳을 헤매고 다녔다. 전국을 돈 것만 5차례. 오죽의 분포를 기록하고 닥치는 대로 모아 쌓아두기 시작했다. 더불어 오죽공예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대나무를 가공해 수출하는 공장에 들어갔지만 별다른 기술은 배우지 못했다. 일반적인 대나무 공예는 대나무의 가닥을 서로 얽고 짜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오죽공예는 일일이 조각을 내고 빈틈없이 붙여야 완성품이 태어나므로 기법 자체가 달랐다. “오죽공예를 하는 이가 없어 배울 방법이 없더군요. 옛 문헌과 작품들을 보며 혼자 공부를 시작했지요. 하루 15시간 이상 10여 년을 집요하게 매달려 제작기술을 익혔고, 80년에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현판 ‘염원’을 만들었습니다.” 공방에 틀어박혀 보낸 10여 년 동안 배운 것은 제작기술만이 아니었다. 그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편광에 의한 기하화법’을 완성했다. 오죽은 부위에 따라 25가지의 색을 내는데, 그 부위를 조화롭게 잘라 붙여 빛을 받는 방향에 따라 무늬가 다르게 보이는 독특한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80년부터 전승공예대전에 참가해 입선과 장려상, 문화체육부장관상(94년) 등 수많은 상을 받았고 94년에는 태국 왕실 초청 아시아 죽제품 전시회에 출품, ‘오죽신품’으로 찬사를 받는 등 우리나라 죽장공예의 독창성을 세계에 알렸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95년 그는 ‘명장’의 칭호를 받았고 96년에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15호로 지정되었다. 끝내는 영광이었지만, 마디마디 두툼한 굳은살이 붙고 손가락 끝마디가 ㄱ자로 굽은 채 굳어버린 손은 그가 걸어온 외길이 얼마나 험하고 고단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오죽에 미쳐 94평짜리 집을 날리고, 하루아침에 변한 가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과 헤어지는 아픔도 손마디가 울퉁불퉁 굳어버릴 때까지 오죽을 다듬고 붙이며 잊었다. “한길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그러니 개인적으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멈출 수가 있었겠습니까. 변하지 않는 건 40년 애인, 오죽밖에 없더군요(웃음).” 2002년에는 죽제품의 제작방법에 관한 특허도 따냈다. 어떠한 자연조건 아래에서도 조각이 떨어지거나 뒤틀리지 않는 죽제품 제작기법을 고안해냈지만, 아직까지 든든한 후원자나 후계자를 찾지 못한 것이 우리나라 유일의 죽장 명장 윤병훈 옹의 안타까움이다. 오죽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는 데다 때 맞춰 오죽을 베어 실어 오려면 짐차라도 한 대쯤 갖고 있을 법하지만, 그는 항상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닌다. 먹고 자는 일 외에 온 신경이 오죽에 쏠려 있는 터라 운전면허도 따지 않았고, 버스에서 내려 이곳저곳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샅샅이 둘러보아야 오죽과 눈이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윤병훈 명장이 “주인 잘못 만나 몸이 고생”이라며 얼마 전부터 영 불편한 허리를 매만진다. 명장이 혼자 살아가는 곳이기도 한 북촌 한옥마을의 언강 죽장전시관(☎02-3676-7519)은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해 현재 개점휴업 상태. 명장, 인간문화재라는 칭호가 장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뿐 아니라 전통의 보존과 발전에도 의의를 두고 있다면, 우리 정부나 서울시는 지금 눈부신 ‘직무유기’중이다.
탤런트 박은혜 크라이슬러 홍보대사로 활동중인 2004-11-15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다임러 크라이슬러 전시장.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박은혜가 다지 바이퍼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클러치 페달을 밟고 핸들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전시장만 아니었으면 당장이라도 몰고 나갈 태세다. 크라이슬러 홍보대사이기도 한 박은혜는 이날 PT 크루저, 그랜드 체로키, 그랜드 보이저 등 매장에 전시되어 있는 차에 모두 올라 시트를 조절하고 계기들을 조작해 보는 등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자동으로 열리는 그랜드 보이저 옆문이 신기한 듯 놀란 눈으로 한참 쳐다보는 모습이 귀엽다. 드라마 ‘대장금’ 덕에 최고의 전성기 맞아 박은혜의 얼굴이 금방 생각나지 않는다면 지난 3월 막을 내린 MBC 드라마 ‘대장금’을 떠올려보자. 주인공 장금의 친구로 수라간 궁녀였다가 임금의 성은을 입어 나중에 후궁으로 신분이 높아진 연생이, 그녀가 바로 박은혜다. “박은혜? 박은혜가 누구지?”라며 고개를 갸웃하던 사람들도 ‘연생이’라고 하면 “아, 연생이∼”라며 고개를 끄덕일 만큼, 박은혜는 드라마 ‘대장금’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확실히 얼굴도장을 찍었다. 길 가던 꼬마아이도 알아볼 정도로 인기스타가 되었다. 데뷔 6년 만이다. “드라마를 찍기 전에는 이 정도로 사람들의 호응이 클 줄 몰랐어요. 좋은 배역인 줄은 알았지만……. ” 박은혜는 1998년 SBS 시트콤 ‘LA아리랑’을 통해 연기에 발을 들였다. 그후 이런저런 드라마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려왔지만 올해처럼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지금이 그녀의 연기 인생에서 처음 맞는 전성기인 셈이다. “올해는 저에게 뜻깊은 한해예요. 드라마를 끝내고 바로 2개의 드라마에 동시에 캐스팅된 것도 그렇고 CF를 찍게 된 것도 그렇고……. 크라이슬러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기쁜 일이지요. 이래저래 행운이 가득한 한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박은혜는 지난 6월부터 크라이슬러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 덕에 1년 동안 크라이슬러 세브링 컨버터블을 탈 기회도 잡았다. 지난 10월에는 스케줄이 비는 틈을 타 동생과 함께 세브링 컨버터블을 타고 강원도에 있는 대관령목장에 다녀왔다. 몇 개월만에 처음 맛보는 달콤한 휴식이었다. “올라가는 길은 좀 험했지만 꼭대기까지 가보니 경치가 아주 예쁘더군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지붕을 오픈한 채로 달렸는데 기분이 끝내주더라고요. 기름값도 생각보다 적게 들고 아주 잘 쉬다 왔습니다. 운전이요? 물론 제가 했지요. 세브링은 핸들이 묵직해서 안정감이 있어요. 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전반적으로 단단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 차를 타면 왠지 안전할 것 같은 믿음이 생긴다고 할까요?” 이번에는 그녀가 바닐라색 PT 크루저 앞에 서서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는다. PT 크루저가 내심 마음에 드는 눈치다. 쇼룸 가운데에 전시되어 있는 300C에 대해서는 “부모님께 사드리고 싶은 차”라며 탐나는 표정을 짓는다. 홍보대사 자격으로 300C 새차발표회에 참석했을 때도 박은혜는 크라이슬러 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홍보대사라는 타이틀을 의식해서였을까, 아니면 차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지금 PT 크루저에 마음을 뺏겼다는 사실이다. 하늘색도 빨강색도 아닌 바닐라색 PT 크루저에.
도예가 김기철 자연으로 자연을 빚다 2004-11-15
‘웰빙’(Well-being) 바람이 거세다. 좋은 것을 먹고 입고 행복해지는 것이야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웰빙’이 지켜내고자 하는 ‘자연주의’를 실천하기보다 ‘웰빙산업의 소비자’ 노릇에만 몰두하곤 한다. 그래서 평생을 자연과 함께 살아온 도예가 지헌(知軒) 김기철(71) 선생에게 요즘 사람들의 웰빙 열풍은 매우 낯설다. “기계문명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기계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익숙한 구호지만, 모든 사람들이 원시적인 삶으로 돌아가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저처럼 원시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어야 기계 속에서 피폐해진 삶을 치유하는 데 조그마한 힘이 되리란 생각입니다.” 도예가이면서 ‘농사꾼’이란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그는 손수 밭을 갈고 채소를 가꾸며 산다. 물론 화학비료 하나 쓰지 않은 유기농 방식이다. 그는 도공의 삶과 농사꾼의 삶을 ‘마차를 끄는 두 바퀴’에 비유한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그에게 없어서는 안될 두 축이라는 얘기다.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그의 마음과 생활철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엉뚱하게도 그의 집 재래식 변소다. 그곳에는 오물 냄새보다 꽃향기가 그득하다. 오물 위에는 철철이 진달래꽃이며 국화꽃잎, 그리고 가랑잎과 메밀가루 같은 ‘자연’이 뿌려지고, 오물은 생명을 살리는 거름으로 태어난다. “도공의 삶과 농사꾼의 삶, 마차를 끄는 두 바퀴와 같다” 김기철 선생은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 어릴 적부터 꽃과 나무 가꾸는 데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그는 도시에 살면서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다. 서울 그의 옛집 넓은 마당은 온통 꽃과 나무로 가득했다. 어느 해 화분을 옮기다가 허리를 다쳐 요양하던 중 도자기 빚는 취미를 붙이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인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마흔다섯 살 무렵 우연히 들른 전통공예 전시회에서 나전칠기장 김봉룡 선생의 작품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평생 한길을 걸어온 위대한 장인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던 기억이 그를 도예가의 길로 이끌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살아왔나?’란 의문과 함께 더욱 진지하고 치열하게 자연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이천의 도자기 가마 곁에 허름한 움막을 하나 얻어 생활했습니다. 운 좋게 근처에 싼 땅을 소개받아서 가마도 짓고 집도 지었지만, 여간 고생이 아니었지요.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을 개간하다시피 했거든요. 지금은 ‘하늘이 내려주신 땅’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정이 들었어요.” 도자기를 시작하면서도 결코 빠른 길을 가지 않았다. 지금껏 국산 육송만을 땔감으로 쓰는 전통 용가마를 고집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에게 도자기는 사람과 감정을 나누는 유기체와 같은 것이어서 ‘인공’이 더해지는 순간 ‘생명’을 잃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물론, 유럽과 미국의 이름난 박물관에 작품이 전시돼 있음에도 웬만해서는 개인전을 열지 않던 그가 모처럼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세오갤러리(☎02-522-5618)에서 ‘자연의 숨결’이라는 주제로 도예전(10월 7일∼11월 4일)을 열고 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바깥쪽 표면에 유약을 바르지 않고 육송의 불길로만 오묘한 빛깔을 내 은은하고 신비한 느낌을 준다. 많은 비평가와 관람객들이 그의 도예작품을 ‘독창적’이라고 칭송하지만, 그는 “그저 자연을 고스란히 옮겼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번 도예전은 가을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디스플레이로도 눈길을 끈다. 트럭 세 대에 가득 싣고 온 억새와 솔잎, 나무 등으로 그가 손수 전시장을 꾸몄다. 관람객들은 작품과 작품의 배경 모두에서 ‘자연의 숨결’을 맡는다. 천상 ‘자연인’인 그에게 자동차란 어떤 존재일까. 김기철 선생은 뜻밖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며 웃는다. 그는 현재 트럭(기아 봉고 1톤 4WD)과 쌍용 렉스턴을 쓰고 있다. 한때는 도자기를 배우러 오던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기아 봉고 코치를 갖고 있었고 지금의 트럭은 농사일이나 작품활동에 필요해 마련한 것이다. 평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대중교통이 불편한 곳을 오갈 때는 운전면허가 없는 그를 대신해 차남이 렉스턴의 운전대를 잡는다. 여러모로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사실 자동차는 그에게 ‘최소한의 필요’에 따른 도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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