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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 소장 방대한 자료에 .. 2004-09-14
국내에서 자동차와 관련해 가장 많고 다양한 자료를 갖고 있는 사람은? 차에 관심이 있거나 본지 필자를 유심히 살펴본 독자는 금방 눈치채겠지만, 바로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 소장이다. 전 소장에게는 자동차의 역사가 태동하던 600년 전의 자료부터 자동차산업의 최신 현황까지 자동차와 관련된 자료라면 없는 것이 없다. 자료를 모아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정리되지 않은 자료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전 소장은 힘들게 모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지난 20여 년 동안 각종 방송과 인쇄매체를 통해 자동차관련 이야기를 들려주고 척박한 국내 출판현실 속에서도 꾸준히 자동차관련 서적을 내고 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사무실 가득 쌓여있는 그의 자료들은 단지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지닌 ‘생명’으로 재탄생한다. 하동환자동차에서 출발, ‘자동차 연구가’로 변신 “6·25 직후 미군이 철수하면서 버리고 간 자동차 잡지를 수집하게 된 것이 자동차관련 자료를 모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쌍용자동차 홍보실에 있을 때는 자료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회사에 건의해 자료실 겸 도서관을 만들기도 했지요. 아무리 귀중한 자료라 하더라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어요. 예전 쌍용이 평택에서 서울 도곡동으로 이사갈 때 자료를 한 트럭 버리는 것을 제가 다 주웠습니다. 큰 메이커들조차 자료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이 무척 부족합니다.” 전영선 소장의 전공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는 64년 계명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50∼60년대에 영문학도로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특이하게도 그의 관심은 온통 자동차에 쏠려 있었다. 특히 전 소장은 당시 자동차 디자인에 관심이 무척 많았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외국잡지를 보고 혼자 자동차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행복했다”는 그는 멋진 차를 디자인하는 카 디자이너가 꿈이었다. 그의 꿈은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 졸업 후 64년에 입사한 하동환자동차에서 그가 맡은 일은 당시 주력 생산차종인 버스의 페이스리프트 모델 디자인 또는 부품 설계였다. 멋진 스포츠카와 고급세단을 꿈꾸었던 그는 버스를 설계하면서도 틈틈이 멋진 스포츠카를 그렸지만, 이를 지켜본 하동환 사장의 반응은 늘 싸늘했다. “이런 차를 국내 기술로 어떻게 만들 수 있겠어요. 만들 수 있는 차를 디자인하세요.” 사실 그의 디자인은 철골을 용접해 섀시를 만들고 드럼통을 펴서 보디를 만들던 당시 국내 자동차공업의 수준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다. 이후 전영선 소장은 신진과 GM코리아, 동아, 쌍용자동차 등에서 29년간 자동차 디자인과 설계, 제조, 정비, 부품개발, 홍보, 기획 등의 부서를 두루 거친 후 92년 독립해 본격적으로 자동차산업과 문화를 연구하는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전 소장은 한창 때 KBS와 MBC TV는 물론 하루 10여 회 전화로 방송에 출연하고 한 달에 20여 건의 원고를 쓰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지금은 방송과 원고를 많이 줄이고 책을 집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이미 , , 등 몇 권의 책을 펴낸 전 소장은 지금도 6권의 책을 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이미 탈고한 책도 있지만, 147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발명품으로부터 시작해 지난 600년간의 자동차 역사를 총망라한 처럼 10년째 집필중인 책도 있다. 현재 전 소장이 가장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책은 본지에도 연재중인 다. 500∼600p 분량 3권으로 나올 이 책은 2001년에 구상해 2002년부터 쓰기 시작했고, 현재 80%쯤 완성된 상태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역사책을 뒤져 탈것에 대한 거의 모든 자료를 찾다보니 쌓아놓은 자료서적만 해도 수십 권에 이른다. “오래된 자료를 활용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사진입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나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인 수레는 제대로 된 그림 한 점조차 남아있지 않아요. 최근 중국이 왜곡하고 있는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살펴보면,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길을 잘 닦고 수레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수레와 길의 모양을 그린 그림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요. 간혹 침몰된 상태로 발견된 배는 복원이라도 할 수 있지만, 수레는 남아있는 게 거의 없지요. 이럴 때는 모든 문헌을 찾고 당시 정황을 감안해 직접 수레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실물이 남아있지 않으니 누군가는 해야 할 작업이지요.” 전 소장의 연구소에서는 역사적 고증을 통해 수십 세기 전의 ‘탈것’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그는 ‘자료수집가’가 아니라, 오래되고 귀중한 자료에 생명을 불어넣는 진정한 ‘자동차 연구가’다.
이장복 서천해양박물관장 평범한 갯마을을 서해안 .. 2004-09-01
하루 종일 큰 솥에 조개껍질을 삶고, 물고기 살을 발라내서 씻고 말리고 스티로폼으로 본을 뜨는 사람이 있다. 괜찮은 물건(?)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간다. 모두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보통 여자라면 싫어하겠지요. 집사람도 처음에는 불만이 많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포기했는지 조용해요. 이것저것 집으로 끌어들이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장복(43) 서천해양박물관장은 남 얘기하듯이 무심하게 말하면서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것 보세요. 모든 작업을 직접 하다 보니 손이 이렇게 험해졌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조개껍질 모아 이 지역에서 나고 자라 바다가 앞마당처럼 느껴진다지만 그에게는 바다 냄새가 안 난다. 그리고 갯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조개껍질을 모으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비인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사업가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하니 넉넉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셈이다. “고등학교 때 바닷가에 놀러 가서 조개껍질을 주워 온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나중에 외국에 사는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예쁜 조개와 고둥, 산호 등을 모으다 보니 가짓수가 늘었어요. 20년이 넘으니까 수집품이 너무 많아져서 박물관을 차리지 않으면 안되겠더라구요.” 이장복 씨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다니다 앞이 툭 터져 있고, 해돋이와 해넘이를 모두 감상할 수 있는 마량리 바닷가 언덕에 터를 잡았다. 박물관은 2002년 3월 문을 열었다. ‘비인’이라는 낭만적인 이름과 달리 이곳은 볼 것도 없고, 거대한 화력발전소가 오히려 풍경을 망쳐 놓은 평범한 갯마을이다. 이런 곳에 요즘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서천해양박물관이 개장한 이후에 생긴 변화다. “박물관이 들어선 뒤에 주변 땅값이 열 배나 올랐다”는 그의 말에서 애향심과 함께 자부심이 묻어 났다. 건평 600평의 박물관에는 30마리가 넘는 상어떼와 거북이, 고래, 가오리 등 볼거리가 가득하다. 특히 하얗거나 분홍색을 띤 조개껍질이 많은데, 모두 14만5천 점에 이른다. 전시실 중앙에는 공룡을 연상시키는 ‘브라이드 고래’ 뼈(9m)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 2002년 10월 부안 격포에서 잡힌 것을 3천만 원에 사서 고기는 팔고 뼈만 추려낸 것이다. 하얀 나뭇가지처럼 만들기 위해 일곱 번 삶아서 우려내고 포르말린(방부제) 처리를 했다고 한다. 상어나 가오리 같은 큰 물고기는 박제 전문가와 공동작업을 하지만 작은 물고기는 직접 손질한다. 그러다 보니 박제 전문가가 다되었다며 으쓱한 표정을 짓는다. 박물관에서 일하는 직원은 진주 판매대와 기념품 코너를 포함해서 7명. 개인 박물관치고는 인원이 많은데, 과연 운영비는 나오는 것일까? 참고로 관람료는 어른 4천 원, 어린이 2천500원으로, 박물관 입장료를 사면 입체영화를 함께 볼 수 있다(현재 ‘해룡’을 상영하고 있다). “직원들 월급 주려면 한 달에 적어도 3천만 원은 필요해요. 다행히 많은 사람이 찾아 주어 현상유지는 하고 있습니다. 관장인 저도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니까 그 정도 되는 거예요.” 2개의 주유소를 운영하면서 에쿠스를 탈 정도면 사장님 소리 들으면서 편안하게 살만도 한데 그는 안락한 생활에는 관심이 없다. 해양생물이 좋아 틈만 나면 수산시장을 뒤지고 다닌다. 이런 열정이 있기에 우리는 백상아리와 멸종위기의 장수거북, 반토막짜리 물고기 개복치 등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올 여름에는 서해안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서해안 고속도로 춘장대IC로 나가면 시원한 해수욕장, 쭉 뻗은 방파제, 푸근한 갯마을, 노을 지는 마량포구가 반긴다. 서천해양박물관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서천해양박물관 (041)952-0020 www.scmm.co.kr
노바렉스와 이재천 RC에 인생 승부를 걸었다 2004-08-31
인생을 한 점에서 출발해 다른 한 점에 도착하는 직선이라고 가정하자. 누구든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점에 부딪히고, 어떤 점은 인생의 방향을 틀어 놓기도 한다. 이재천(31) 씨도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점 하나를 만난다. 중학교 때 정규수업 외에 취미활동으로 일주일에 한 시간을 보내는 ‘특별활동’ 시간이 있었다. 어느 날 친구가 특별활동으로 RC카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 신기한 모습에 홀려 버렸다. ‘어떻게 하면 RC카를 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신문을 한 달만 배달하면 3만 원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수업이 끝난 뒤 석간신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일해서 번 돈으로 찜해둔 2만5천 원짜리 ‘록버스터’를 사는 데 성공했다. 부품제작 위해 직업전문학교 수료 “신문배달하는 것이 들통나 호된 꾸지람을 들었지만 애초 필요한지조차 몰랐던 4만 원짜리 조정간과 배터리를 선물받았으니 일거양득 아닌가요?” 그 뒤로 타미야의 RC들과 와일드 윌리, 클로드 버스터, 킹 블랙 풋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몬스터 RC카를 굴리며 세월을 보냈다. 중2 때 만난 점의 실체를 알아본 것은 2000년 10월이었다. 취미로 들락거리던 인터넷의 몬스터 RC 동호회에서 마음이 맞은 두 사람과 RC 관련사업을 벌이기로 한 것. 2001년 12월 직장을 그만둔 뒤 몬스터 RC숍을 열고, 프레임 등 부품도 제작했다. 하지만 RC 인구가 많지 않은 탓에 사업은 신통치 않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창일 때 가게 문을 닫고 말았어요. 금전적인 손해도 컸지요. 서너 개의 경쟁업체가 있었지만 그곳도 마찬가지였습니다. RC카 10대 분인 휠 40개를 만들어도 1년이 지나야 다 팔리는 현실이었으니까요.” 불확실한 전망 때문에 두 동업자는 떨어져 나갔지만 그는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4평 남짓한 지하에서 시작한 숍은 임대료가 싼 곳을 찾아다니느라 종로를 거쳐 양천구 목동으로 옮겨졌다. 지금도 지하에 머물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 RC 수입업체들이 부품제작을 맡겨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브랜드 ‘노바렉스’(Novarex)의 인지도도 제법 높아졌다. “지금도 많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아주 고단한 시간이었어요.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RC에 매달렸으니까요. 광고도 안했는데 알음알음 숍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만나면 눈물이 나오려고 해요.” 지난해 11월에는 200만 원을 들여 한 공업사에 부품제작을 맡겼는데, 치수가 틀려 폐기 처분하면서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 어째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스스로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몬스터 RC를 좋아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몬스터 RC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우람한 모습에, 작은 덩치로 박력 있게 달리는 모습에 반했고, 제 삶도 그 모습을 닮고 싶어요. 국내 몬스터 RC 시장이 보잘 것 없지만 저 나름대로 저변확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강한 의지를 내보이는 이재천 씨. RC에 빠진 남편을 둔 죄(?)로 신혼시절부터 고생만 하고 있는 동갑내기 아내 김미경 씨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이해해 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재천 씨의 RC에 대한 열정과 지식은 듣고 또 들어도 끝이 없었다. 부품 가공기술을 배우기 위해 직업전문학교도 수료했다. 선진국의 RC문화를 자세히 설명하고, 국내 RC문화와 산업의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진단하기도 했다. 앞날의 계획도 RC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재천 씨는 한마디로 인생의 승부를 RC에 걸고 있는 매니아였다. “실제로 탈 수 있는 버기를 만들고 싶어요. 몬스터 RC와 버기의 구조가 똑같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버기 제작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버기를 제작하면 실차와 똑같은 정교한 RC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예요.”
Karl-Heinz Kalbfell 21세기 롤스로.. 2004-08-23
롤스로이스는 한 세기 전 태어날 때부터 원한다고 해서 누구든 탈 수 있는 차가 아니었다. 최상의 기술과 품위, 장인들의 자부심과 정성을 가득 담은 롤스로이스는 ‘영국의 전통과 명예’로까지 받들어진 명차. 지난 7월 1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롤스로이스 쇼룸에서 열린 팬텀 론칭 행사에 크리스토퍼 로빈 주한 영국 대리대사가 직접 참석한 것도, 또 그가 “롤스로이스는 단순한 고급차가 아니라 영국의 아이콘”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 같은 상징성 때문이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기계 예술의 극치’라는 평가를 받은 첫차 실버고스트(1906~25년)는 롤스로이스의 화려한 출발을 알린 서곡이었다. 최고의 자재와 최상의 기술력을 구현하기에는 지상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지, 롤스로이스는 콩코드기의 이글 엔진을 만드는 등 세계 최고의 항공기 엔진 메이커로도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항공기 엔진 분야에 대한 과도한 투자는 롤스로이스의 발목을 붙들었고, 결국 1971년 파산한 뒤 질곡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1998년 폭스바겐(유형 자산)과 BMW(브랜드 소유권)로 나눠 매각된 롤스로이스는 지난해 1월 1일 영국 굿우드 페스티벌에서 팬텀을 발표하며 21세기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21세기에 부활한 영국 프레스티지카의 전통 “한국 시장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커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한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중요한 축을 형성할 것입니다. 목표는 한국 프레스티지카 시장 넘버원입니다.” 팬텀 론칭에 발맞춰 서울을 찾은 칼 하인츠 칼프펠(55세) 롤스로이스 회장의 첫마디는 당당한 체구만큼이나 자신만만했다. 1977년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로 BMW 근무를 시작한 칼프펠 회장은 이후 BMW 모터 스포츠 회장과 그룹 브랜드·제품 전략 담당 부사장, 그룹 마케팅 총괄 수석 부사장 등을 거쳐온 ‘정통 BMW 맨’ 출신 경영인. 지난 1999년 롤스로이스 프로젝트 담당 이사를 겸하며 롤스로이스의 새로운 출발을 첫 단계에서부터 지휘해온 그는, 롤스로이스 비상임 이사를 거쳐 올해 5월 롤스로이스 회장에 선임되었다. “롤스로이스는 지난 18개월 동안 한국을 비롯해 호주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홍콩, 중국, 일본 등 아시아태평양지역 판매망 구축을 마무리했습니다. 아시겠지만 롤스로이스는 판매대수만으로 시장을 평가하지 않아요. 가능성과 잠재력, 기타 브랜드 영향력 등을 고루 감안합니다. 베이징과 상하이, 광조우 등 3곳의 거점을 마련한 중국 시장의 미래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만 한국 역시 일본과 더불어 이 지역 3대 잠재 시장으로 꼽고 있습니다.” 한국 내 잠재고객들과의 사전면담을 통해 10% 안팎의 구매 의사를 확인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연간 15대 정도의 판매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 시장에 대한 분석은 팬텀을 선보이기 이전에 이미 낱낱이 마친 상태. “공식수입원인 HBC 코오롱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수입차 시장에 대한 깊은 분석을 해왔습니다. BMW 그룹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시장 정보 수집에도 유리한 조건이었지요. 국내외에서 모아둔 탄탄한 시장 자료를 바탕으로 완벽한 애프터서비스 준비까지 마쳤습니다.” 98년 이전 판매 모델에 대한 부품 공급은 유형자산과 함께 폭스바겐 그룹으로 넘어간 벤틀리가 맡기로 되어 있어 구형 롤스로이스를 갖고 있는 고객들의 애프터서비스도 문제될 게 없다. 아무리 철저히 준비했어도 BMW에서만 27년을 일해온 독일인으로서, 영국의 전통을 모조리 담아냈다는 롤스로이스를 경영하기란 말처럼 간단치만은 않았을 터. “롤스로이스는 BMW 그룹의 일원이지만 메커니즘 등 모든 면에서 철저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인수 초기부터 ‘역량은 공유하되 부품은 공유하지 않는다’는 모토를 내걸고 업무에 집중해왔어요. 98년부터 휴가는 무조건 영국에서 보내며 영국을 배웠고, 그 덕분인지 프로젝트는 대성공이었습니다. BMW의 손길이 닿았어도, 우리의 결과물은 완벽한 영국차입니다.” 지금 영국 굿우드 공장에서는 자동차는 물론 가구와 가죽 가공, 오디오 등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해마다 1천 대 정도의 팬텀을 수작업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인수 당시 롤스로이스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숙련공들 상당수가 인수대상에서 빠졌어도 최상의 인력을 충분히 보강해 제작과정에서 달라진 점은 전혀 없다. 수제작 공정의 비율 또한 예전과 비슷한 수준. “팬텀은 완전히 새로운 시설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력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롤스로이스입니다. 첨단장비와 현대적 기술을 많이 접목했지만, 굳이 영국에 디자인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클래식 롤스로이스에서 스타일링 영감을 얻어왔을 정도로 전통의 계승에 정성을 기울였어요. 고유의 문화와 전통, 확고한 신뢰성은 팬텀을 말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둘러본 팬텀은,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화려했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고고한 기품은 분명 ‘영국 프레스티지카’의 그것이었다.
롤스로이스 칼 하인츠 칼브펠 회장 “한국 럭셔리카 .. 2004-08-17
롤스로이스 팬텀 발표회에 참석하기 위해 롤스로이스의 칼 하인츠 칼브펠 회장이 우리나라를 찾았다. 행사가 끝나고 기자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그는 “한국 시장에 거는 기대가 크다”며 말문을 열었다. 롤스로이스보다 한달 먼저 진출한 메르세데스 벤츠의 마이바흐를 의식한 듯 한국 럭셔리카 시장에서 1위를 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1999년까지 BMW의 전략담당 부사장으로 일하던 칼브펠 회장은 1998년 BMW가 롤스로이스의 브랜드사용권을 사들이자 롤스로이스 프로젝트의 담당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BMW 마케팅총괄 수석 부사장과 롤스로이스 비상임 이사를 거쳐 올해 5월부터 롤스로이스 회장직을 맡고 있다. 4년여 동안 팬텀 개발과정 함께 해 칼브펠 회장은 롤스로이스 팬텀이 탄생하기까지 전과정을 함께 했다. 영국 굿우드에 공장을 짓고 디자인을 짜고 부품을 만들고 첨단 기술을 불어넣기까지 4년여 동안 어느 것 하나 그의 손과 머리를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제로’ 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가져온 것은 단지 ‘롤스로이스’라는 이름뿐이었지요. 저는 그 이름이 지닌 전통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굿우드를 롤스로이스의 공장부지로 선택한 것도 영국의 전통이 그대로 남아있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BMW에서 롤스로이스의 이름을 가져간다고 했을 때 한쪽에선 롤스로이스의 전통이 끊어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BMW와 롤스로이스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칼브펠 회장은 단호히 대답했다. “롤스로이스는 BMW와 독립적으로 움직입니다. 명령은 공유하지만 부품은 공유하지 않습니다. 팬텀 역시 완전히 다른 차입니다. 결과물을 보면 BMW에서 만든 차라기보다 영국차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BMW와는 완전히 독립된 새로운 차를 만들겠다던 그의 의지는 어느 정도 실현된 셈이다. 롤스로이스라는 아버지와 BMW라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새 팬텀은 외모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물론 속은 BMW의 첨단기술로 꽉 차 있지만. “전체적인 디자인은 팬텀Ⅱ에서 가져왔습니다. 롤스로이스의 고급차 이미지를 이어가기 위해 각 분야의 숙련공들이 작업을 함께 했지요. 직접 보면 우리가 부품 하나 하나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수제작 공정의 비율은 예전의 롤스로이스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칼브펠 회장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기대를 모으는 시장으로 중국, 일본에 이어 한국을 꼽았다. 그는 당장의 판매대수만이 아닌 잠재력까지 생각했을 때 “중국, 일본, 한국이 롤스로이스의 아시아 3대 시장이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보였다. 새 딜러망을 갖추기 위해 한국의 딜러들과 여러 차례 접촉한 끝에 롤스로이스는 HBC 코오롱을 파트너로 선택했다. 열정이 풍부하고 완벽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강하며 추진력도 뛰어나다는 것이 이유였다. 칼브펠 회장은 “올해로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에 HBC 코오롱이라는 파트너를 맞아 한국에서 롤스로이스 사업을 시작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만족감을 내비쳤다. 새 팬텀의 AS는 롤스로이스의 공식 수입업체인 HBC 코오롱이 전담한다. 이전 모델의 부품은 벤틀리에서 가져와야 하므로 딜러의 결정에 따라 HBC 코오롱에서 제공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마이바흐에 이은 롤스로이스의 진출로 국내 초대형 럭셔리카 시장이 한층 뜨거워질 전망이다. 6억 원이 훌쩍 넘는 차를 누가 사느냐에 모두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지만 롤스로이스 측은 구매자 정보를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다. 칼브펠 회장은 “다음에 한국을 찾았을 때는 거리에서 팬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인터뷰를 끝맺었다. 칼브펠 회장의 바램은 실현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HBC 코오롱은 “지금까지 80여 명의 고객과 상담을 했는데 그 가운데 8∼10명 정도가 구입의사를 내비쳤다”며 올해 말까지 15대를 팔 계획이라고 밝혔다.
휠 디자이너 타츠야 카타오카 ⑥디자이너 인터뷰.. 2004-08-13
자동차의 외관 디자인에서 휠은 단순히 타이어를 잡아주는 기능 이상으로 전체 스타일을 결정짓는 중요 포인트가 된다. 양산차에 처음 달려나오는 순정 제품보다 애프터마켓용 제품이 더 관심을 끄는 것은 똑같은 보디에서 차별화 된 휠 하나만으로도 남다른 개성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휠 디자인 또한 진화를 거듭해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제품이 많이 선보이고 있다. 그런 한편 휠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유명한 휠 디자이너인 타츠야 카타오카(Tatsuya Kataoka)씨가 한국에 왔다는 연락이 본지 편집부로 날아들었다. 록음악 추구하다 우연히 휠 디자이너 입문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히트, 아이디어 많아 타츠야 카타오카 씨는 일본에서 매우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졸업만의 학력으로 세계적인 휠 디자이너가 되었기 때문인데, 최고의 디자인 학부나 톱클래스의 휠 회사 또는 자동차회사를 거치지 않은 그의 성공스토리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큰 용기를 주는 것이었다. 서울 강남의 IBIS 호텔에서 만난 타츠야 카타오카 씨는 큰 키에 패셔너블한 옷차림이 첫눈에 보기에도 디자이너다운 모습인데, 실제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그는 곧 패션쇼가 있다며 식사 때 거의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최근에 디자인한 휠 제품을 한국 시장에 선보이기 위해 왔습니다. 세계적인 휠 디자이너라고 하면 미국의 마크 니퍼(mark nipper)와 마리 니체(marie niche), 그리고 저 이렇게 세 사람입니다. 워낙 유명한 디자인이라서 카피가 많아요. 그래서 이들 제품은 의장등록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찾은 이유와 대표적인 휠 디자이너를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최근 국내 휠 업체는 중국의 저가제품 공세에 고심하고 있는데, 뛰어난 품질 바탕 위에 디자인으로 승부한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카타오카 씨에게 제품 디자인을 의뢰한 것이다. 카타오카 씨는 20대에 MHT사의 ‘카오틱’(Kaotik) 브랜드를 맡아 현재 ‘스포르자’(Sporza)의 메인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고 전세계 20여 개 휠 메이커의 의뢰를 받아 디자인 작업을 해오고 있다.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 휠 디자인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있었을까? “정말 우연입니다. 전 디자인을 공부한 적도 없고 디자이너가 되려는 생각도 없었어요. 휠이라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동차에도 흥미가 없었지요. 방황하던 스무살 무렵, 당시 제 형이 미국에서 휠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었어요. 형을 따라 MHT(미국에서 가장 큰 휠 회사)의 공장에 갔다가 신제품으로 나온 휠을 보게 되었지요. 그런데 저는 그 휠의 디자인이 별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면 이런 식으로 디자인할텐데’하고 스케치를 해보았지요. 그런데 우연히 그 스케치를 본 MHT사의 사장이 관심을 보였어요. 그게 계기가 된 것이지요.” MHT사는 그 스케치를 가지고 휠을 만들고, 그해(1996년)에 세계적인 자동차 부품쇼인 SEMA쇼에 출품하게 된다. 림까지 함께 디자인되어 당시로는 획기적이었던 이 휠(‘Skater’라는 이름)은 업계의 화제를 모으며 대히트를 하게 된다. 원래 그는 뮤지션이었다. 록음악을 추구했는데 레코드사에서 댄스음악을 하라고 해서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그룹에서 나와 신주쿠 등지를 히피처럼 떠돌아다니다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형을 만나러 미국에 간 것이다. 그런 이력 때문일까, 그에게 디자인은 어떤 철학이나 예술세계와는 관계없는 자유로운 영감일 뿐이라고 한다. “디자인을 할 때 이렇게 그려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음악을 듣거나 술을 마시면서 자유롭게 떠오르는 대로 그립니다. 하나의 작품을 디자인하는 데 단 5분이 걸릴 때도 있고 3일이 걸릴 때도 있습니다. 1년에 500∼600개 정도의 디자인을 하는데 그중 상품이 되는 것은 50∼60개 정도입니다.” 디자인은 의뢰를 받을 때도 있고 먼저 디자인을 해서 회사에 선보일 때도 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휠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리고 휠 디자인 분야의 무한한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저는 자동차는 잘 모릅니다. 그냥 디자인을 할 뿐입니다. 차를 좋아하면 디자인을 할 수 없습니다. 차를 빼고 그냥 휠만을 디자인합니다. 유명 배우가 제가 디자인한 휠을 달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너무 기뻤습니다. TV 드라마에서 제가 디자인한 휠이 장식품으로 나오는 때도 있어요. 그럴 땐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일본에서는 술집이나 집에 휠을 장식품으로 놓는 경우도 많습니다.”
명주사 고판화 박물관장 최선학 “물건을 모을 생.. 2004-07-26
중앙고속도로 신림IC에서 빠져나가 주천, 영월로 이어지는 88번 지방도로는 고향의 이미지로 채워진, 푸근한 드라이브 코스다. 도중에 치악산, 감악산 등산로가 시작되고, 쌀 찐빵과 면발이 툭툭 끊기는 시원한 막국수로 유명한 황둔리가 있다. 주천강과 동강도 한달음이다. 최근 이곳에 명소 하나가 더해졌다. 신림터널을 지나 6km 지점, 깊은 산 속에 들어선 ‘명주사 고판화 박물관’이 그곳으로 6월 20일 개관식을 가졌다. 박물관을 만든 주인공 최선학(48) 씨는 명주사 주지를 겸하고 있다. 그가 일러준 대로 신림터널을 지나서 ‘치악산 명주사’ 푯말을 보고 왼쪽 산길로 접어들었다. 하얀 감자꽃이 만발한 밭과 계곡 사이로 대충 닦아 놓은 길을 따라 얼마쯤 올라가니 갑자기 앞이 시원스럽게 열리면서 멋스런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명주사와 박물관이다. 군더더기 없는 60여 평의 건축물 안에는 거무튀튀한 나무판들과 그것으로 찍어낸 책, 그림 등이 정갈하게 전시되어 있다. 그가 소장한 작품은 판화 원판 1천800여 점, 판화로 찍어낸 서적 200여 권, 판화 작품 300여 점, 판화 관련자료 200여 점 등 2천500점이 넘는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티벳, 몽골, 인도, 일본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이퇴계의 ‘성학십도’, 조선조 임금의 음식메뉴를 적은 ‘진찬의계’ 등 목판으로 찍은 서적들 외에 중국의 ‘오대산성경전도’가 눈길을 끈다. 마을과 계곡, 도로, 300명이 넘는 사람이 나오는 오대산 그림은 가는 붓으로 그린 것처럼 세밀해서 일부러 알려주지 않으면 목판화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다. 명주사를 명성센터로 만들고 싶어 최선학 관장이 컬렉션을 시작한 것은 7년 전 서울 용산에 있는 국방부 법당 신자들과 중국에 성지순례를 갔다가 항주 야시장에서 작은 도자 불상을 산 것이 계기가 되었다(그는 15년간 국방부 법당주지 등을 지내고 98년 전역했다). “꼭 필요한 것이어서 3만 원 가량 주고 사 왔는데, 인사동에서 똑같은 것이 기백만 원에 팔리더군요. 많이 놀랐지요. 이를 계기로 골동품의 매력에 눈을 떴습니다.” 처음에는 귀해 보이는 것을 무조건 사들였으나 불교 승려인 자신의 생활과 관계 있는 유물로 범위를 좁혔고, 다시 목판화 분야로 압축되었다. “제가 동국대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했어요.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고미술에 대한 열정이 뒤늦게 되살아난 것이겠지요.” 컬렉션을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가족들의 비협조와 넉넉지 않은 자금. 대부분의 컬렉터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고 전한다. “불교에서는 가진 것을 다 버리라고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자꾸만 모으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괴로운 적도 있었어요. 목판화 수집은 저의 업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젠 그것을 많은 사람과 나누기로 했습니다.” 박물관 개관과 맞추어 판화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근처 산골짜기를 명상센터 및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며 나갈 계획이다. 최선학 관장의 수집 편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굉장히 힘이 드는데다 끝이 보이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물건을 모을 생각하지 말고 그저 감상하고 즐기도록 하세요. 그것이 진짜 행복입니다.” 올 여름 명주사 고미술 박물관으로 피서를 가도 좋을 듯하다. 귀한 유물을 둘러본 뒤 시원한 계곡에 발 담그고, 하늘을 가린 숲길에서 산책을 하고, 감자부침과 시원한 막국수 한 그릇을 먹는 것이 진정한 웰빙 라이프가 아닐까 싶다. 명주사 진입로는 비포장인데다 구불거리고 경사져서 4WD차를 몰고 가면 제격이다.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 박물관 (033)761-7885
류재현의 ‘외유내강’ 뉴 코란도 소프트톱 오프로.. 2004-07-26
류재현 씨의 뉴 코란도 소프트톱을 만나면서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느낌은 ‘여성스럽다’는 점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욕(?)이 될는지 모르지만, 험한 길을 누비는 차답지 않게 아기자기하게 잘 정돈된 모습 때문이다. 그는 “제가 감히 어떻게 매니아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지 어리둥절하다”면서도 “이럴 줄 알았으면 세차라도 하고 올 걸 그랬다”며 웃었다. 자동차 튜닝이 아직도 밝은 곳으로 선뜻 나서지 못하는 현실은 그에게도 그늘을 드리운 적이 있었다. 어머니와 여자친구를 태우고 지방에 갔다가 그만 불심 검문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나마 운이 좋아서 ‘불법 부착물 부착’쯤으로 무사히 넘어갔지만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런가 하면 이미 잊고 지내던 악연이 발목을 잡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기도 했다. “전에 타던 승용차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튜닝 핸들로 바꾼 채 차를 그냥 팔았는데, 지금 타는 주인이 자동차검사를 받다 덜컥 걸려 버렸습니다. 그것을 단 사람을 역추적해서 결국은 저한테 화살이 날아오더군요. 난생 처음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고 나니 참 기가 막혔습니다.” 장애물들을 극복해 나가는 데에 매력 느껴 오프로드 튜닝으로만 치자면 그는 스스로 평범하다고 평가한다. 차 높이를 심하게 올린 것도 아니고, 괴물 같은 타이어를 달지도 않았으며, 탱크나 장갑차처럼 중무장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렇지만 꼭 필요한 만큼씩 튜닝해 놓은 그의 뉴 코란도는 오프로드에서 뛰어난 성능을 여러 차례 입증했다. 그러나 그는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는 튜닝 파츠보다 결국 소프트웨어격인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오프로드를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여러 가지 성향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튜닝 그 자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튜닝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에 그쳐야 하고, 험한 길을 헤쳐가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는 여느 동호인들처럼 작업을 할 때는 늘 공구를 쥐고 손수 해야 직성이 풀린다. 얼마 전에는 바위를 타넘다가 망가진 머플러를 손수 세팅해서 다시 달아 놓았다. 하지만 그다지 여유가 없는 건설회사 현장 근무를 하느라 늘 시간이 모자란다. 거친 오프로드를 헤쳐 가면서도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그에게 어쩌면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바쁜 일상인 듯하다. 오프로드 출정을 위해 어렵사리 짬을 내야 하는 터라 가끔 무리한 일정을 잡을 때도 있었다. 차 꽁무니에 붙여 놓은 영문 이니셜을 보니 두 사람 몫이어서 슬쩍 묻자 내년 봄쯤에 결혼할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오프로드를 다닐 때도 늘 함께 한다는 여자친구 덕분인지, 그의 차는 여느 오프로드 튜닝카처럼 거칠어 보이지 않았다. 온갖 수리용품이나 구난장비 같은 것들은 뒷좌석 뒤에 따로 만들어 놓은 박스에 잘 갈무리해 놓았다. 그런 탓인지, 그의 차에서는 기름 냄새도 나지 않고, 진흙 자국도 거의 없다. 언뜻 거칠게 보이기 십상인 오프로드 매니아에게 여자친구의 존재는 ‘절제와 조화’를 위해 소중해 보였다.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얻어 온 장식품이 글러브 박스를 장식하게 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는 결코 티 내지 않으면서 알차게 내실을 다지는 참된 매니아라는 생각이다.
홍종호 & 아우디 RS4 ‘산적’ 감독, 음악과 영.. 2004-07-22
홍종호 감독과의 인터뷰는 섭외과정부터 마무리까지 그의 업(業)인 뮤직비디오처럼 리드미컬하고 쿨하게 진행되었다. 단 한번의 전화통화로 인터뷰 OK. 1시간 30분의 시한부 대담을 제시한 홍 감독은 약속했던 12시 30분에 꼭 맞춰 도착해 1시간 10분 동안 속내를 털어놓고, 자신의 애마인 아우디 RS4를 몰고 남은 20분을 화끈하게 마무리했다. 참고로 홍종호 감독이 뮤직비디오 연출을 시작한 지는 올해로 만 10년째. 한정된 시간 동안 원하는 메시지를 담아내는 것은, 그에게 이제 일도 아니다. 리듬과 독창성 살아있는 음악편지 지난 95년 R.E.F의 데뷔곡인 ‘고요 속의 외침’을 시작으로 이제껏 홍종호 감독의 손을 거쳐 완성된 뮤직비디오는 200여 편 이상. 90년대 중반의 국내 음반 시장은, 노래와 영상을 조합했을 뿐인 조잡한 음악편지가 한편의 훌륭한 영상예술로 발전하면서 중흥기를 맞는다. 그 시기를 관통하며 손꼽히는 거물로 성장한 홍 감독의 영상에는 항상 분명한 리듬과 눈길을 사로잡는 감각적인 색감 등 이른바 ‘홍종호 스타일’이 존재했다. “뮤직비디오는 음악과 함께 움직일 때 생명력을 얻는다고 생각해요. 노래에 담긴 메시지를 따라 적절한 아이템과 특수효과를 찾고, 그림의 길이도 그 곡의 비트에 맞춰 조절합니다. 최근 철저한 각색으로 드라마틱한 느낌을 살린 뮤직비디오가 각광을 받고 있지만 썩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봐요. 화려하고 보는 재미도 필요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뮤직비디오를 보는 시청자가 음악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거든요. 그림이 음악을 끌고 가서는 안되요. ‘홍종호 스타일’이라면 음악과 어울리는 그림, 리듬이 살아 있는 스토리를 얘기하는 걸 거예요.” 90년대 대중음악과 한국 문화의 대표 아이콘으로 꼽히는 서태지와의 조우는 연출가 홍종호에게 행운이었는지 모른다. 아이들 시절 ‘교실이데아’ ‘영원’ ‘컴백홈’ 등을 영상으로 그려내며 홍 감독은 ‘뮤직비디오 잘 찍는 감독’이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얻었고, 2000년 서태지의 두 번째 솔로 앨범 중 ‘울트라맨이야’와 ‘인터넷 전쟁’을 연출하며 그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졌다. 음치가수 이재수 측의 컴백홈 패러디 뮤직비디오 의뢰가 들어온 것은 서태지가 2집 활동을 마치고 한국을 떠난 지 얼마 뒤의 일이었다. 홍 감독은 쉽게 수락했고 작품도 완성되었지만 그 생명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서태지 쪽이 저작권 침해로 민사소송을 걸었고 결국 이재수의 앨범과 홍 감독의 뮤직비디오는 판매 및 방송금지 판결을 받고 사장되었다. “촬영 전부터 양쪽 기획사 사이에서 중재하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소송이 벌어졌을 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고, 저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만든 작품에 대한 패러디, 언젠가는 해보고 싶었던 작업이에요. 컴백홈 뮤비가 제 스스로도 만족스러웠던 작품이라 패러디에 대한 욕심은 더욱 컸지요. 실제로 ‘컴배콤’ 촬영은 원작과 같은 장소에서 진행되었고 영상 구성과 컷 수도 컴백홈과 똑같았습니다. 음악으로서 패러디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요.” 홍종호 감독은 어느새 뮤직비디오 계에서 후배들을 리드하고 올바른 방향까지 제시해야 할 위치에 올라서 버렸다. 책임감 못지않게 지금의 제작 풍토에 안타까움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재능 있고 뛰어난 감각을 지닌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반가운 일이지만 오래 전부터 만연했던 ‘표절’을 이제는 만성적인 수준을 넘어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최근 외국 유명 여가수의 뮤직비디오를 토대로 색감과 구성, 조명과 앵글까지 거의 그대로 옮겨 담은, 작정하고 베껴 만든 작품을 내놔봤어요. 표절에 대한 심각성을 수면 위로 올려 화두를 던진 셈이었는데, ‘홍종호가 표절했다’는 말이 잠깐 들리고는 이내 잠잠해지더군요. 참 허탈한 일이었습니다.” 뮤직비디오 연출가와 380마력의 괴력을 토해내는 아우디 RS4는 쉽게 매치하기 어려운 조합. 더구나 4년 전만 해도 ‘차가 무서워 운전하지 않겠다’며 운전석에 앉기를 꺼리던 홍종호 감독이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2000년 1월 운전면허를 따고 아우디 S8을 두 번째 애마로 맞이하면서 그의 인생은 180° 달라졌다. 무척이나 빠르고 안정적인 S8의 운전석에서 ‘속도감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 지상 최고의 승용 4WD로 평가받는 콰트로 시스템에 매료된 순간, 그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스피드 매니아로 부상했다. 도로에서 산적처럼 생긴 운전자가 모는 검은색 아우디 왜건을 만난다면 섣불리 덤벼들지 말 것! 순식간에 달라붙어 등뒤에서 시퍼런 눈빛을 부라리는 RS4를 떨쳐낼 자신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글 | 김형준 사진 | 박창완
Fabrizio Giugiaro 카로 체리아의 21.. 2004-07-22
올해 서른 아홉 살인 이탈디자인의 후계자와 마주앉기까지는 갖은 우여곡절을 거쳐야 했다. 지난 5월 말 사업차 한국을 찾은 파브리치오 쥬지아로 부사장은 인천공항을 나서자마자 그 날 오후에만 서로 다른 두 업체를 찾아 각각의 비즈니스를 처리했다. 진작부터 인터뷰 요청을 해둔 터였으나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재촉할 틈을 못 찾을 정도. 워낙 바쁜 일상에 익숙하게 살아온 듯 보이는 이 글로벌 비즈니스맨은 잠시 숨돌릴 새도 없는 스케줄을 놀라운 에너지로 소화해내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첫날 일정은 밤늦도록 이어졌다. 귀국 이틀째. 아침 9시 반부터 시작될 업무를 마치자마자 일본으로 떠난다는 그의 ‘전쟁 같은’ 스케줄에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창간 13주년 기념호를 위해 벼르고 벼른 인터뷰이(interviewee)를 자칫 눈 벌겋게 뜨고 날려보낼 지도 모를 일. 다행히 약속시간이 잡혔다. 평소 같으면 아직 집에서 나서지도 않았을 이른 아침에 숙소인 서울 신라호텔에서 젊은 쥬지아로를 만났다. 이탈디자인의 역할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 “늘 이렇게 정신 없이 바쁩니까?” “저는 디자이너예요. 디자이너에게는 스튜디오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지요. 그 시간을 벌기 위해 해외 업무는 몇 가지 스케줄을 모아 한꺼번에 해결하는 편입니다. 외국에서는 늘 바쁠 수밖에 없어요.” 일본에서도 도쿄와 나고야 등 세 도시를 사흘 동안 누벼야 한단다. 그 바쁜 스케줄 틈새를 비집고 그와 마주앉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 올 봄 제네바 오토살롱에서 화제를 모은 컨셉트카 도요타 알레산드로 볼타와 알파로메오 비스콘티로 얘기를 시작했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엔진 파워를 끌어낼 수 있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엔진과 기어박스 등 고전적인 메커니즘에서 볼 수 있는 출력 손실이 거의 없고 에너지와 무게 배분도 탁월하지요.” 쥬지아로 씨는 하이브리드가 가장 중요한 미래 메커니즘 중 하나이므로, 단순 양산 모델뿐 아니라 이를 이용한 스포츠카 개발 등 좀더 다양한 연습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태리 토리노 모터쇼에 대해서는 냉정한 진단을 내렸다. 제네바 오토살롱 등 탁월한 모터쇼가 득실대는 유럽에서 빠른 국제화에 대응하지 못했으니 낙오는 당연하다는 말. 시대의 흐름을 차분히 짚어내는 냉철함과 변화에 대한 유연성이 전해온다. “대부분의 주요 자동차 메이커들이 독자적인 디자인 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량생산 및 이를 통한 원가절감, 또 이 모두를 가능케 하기 위한 규격화는 피할 수 없는 대세지요. 이탈디자인의 자동차 관련 비즈니스의 95%도 완성차 메이커와의 공동작업으로 진행됩니다. 예전부터 양산 메이커들과의 관계는 좋은 편이어서 달라진 환경이 크게 낯설지는 않아요.” 이태리 토리노 공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토리노 비즈니스 스쿨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디자인 능력과 경영 실무를 고루 갖춘 인물. 컨셉트카 마치모토(86년)와 아즈텍(88년) 프로젝트 참여를 시작으로 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이탈디자인에서의 활동은 알파로메오 시게라와 폭스바겐 W12(이상 97년), 부가티 EB 시리즈, 애스턴마틴 트웬티 트웬티(2000년), 시보레 코베트 모레이(2003년)와 같은 컨셉트카들을 빚어냈다. 그가 디자인한 양산차는 대우 마티즈와 다이하쓰 무브(이상 98년), 마세라티 스파이더(2001년), 피아트 이데아와 알파로메오 156(이상 2003년), 람보르기니 가야르도 등. “기성복 시대일지라도 맞춤복을 찾는 고객들이 꾸준하듯 개성적인 맞춤 자동차에 대한 시장의 수요도 계속 존재할 겁니다. 디자인 팀은 공동작업을 통해 안정적인 제품을 만들어낼 확률이 높지만, 단 한 명의 디자이너에게서 ‘상상초월 아이디어’가 나올 가능성도 큽니다. 묻혀질 수도 있는 작은 아이디어를 현실로 이어가는 끈이 바로 카로체리아의 몫이지요.” 이탈디자인의 힘은 세 가지. 세계 곳곳에서 쌓은 다양한 경험과 빠른 업무 속도, 시간낭비 제로의 효율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아무리 잘 짜여진 대규모 메이커라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 자신한다. 차와 디자인,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는 남자 “이탈디자인 최고의 차는 무엇인가요?” “피아트 판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피아트 판다는 GM대우 마티즈Ⅱ보다도 작은 꼬마 해치백 아닌가. 너무나 뜻밖이고, 놀랍고, 그래서 신선하기까지 한 대답이었다. “판다는 완전히 제로인 상태에서 출발해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낸 ‘제로 베이스’ 차입니다. 그 과정이 너무 소중해요. 또 상업적으로도 가장 성공한 제품 중 하나이며 회사 재정에 큰 도움을 준 차입니다. 디자인 측면에서 탁월하지는 않지만 상업적인 면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골프? 물론 빼놓으면 안 되지요.” 그의 차가 궁금했다. 별 생각 없이 던진 이 질문은, 뜻밖에도 한 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통틀어 쥬지아로 부사장이 가장 어렵게 대답한 ‘고난이도 문제’가 되어버렸다.“너무 많아서……. 새로 개발하거나 디자인한 차는 모조리 타다보니 나도 헷갈릴 때가 있을 정도인데요, 평소 출퇴근할 때는 마세라티 쿠페를 주로 탑니다. 아! 쌍용 렉스턴도 종종 타고 다니지요.” 이탈디자인은 렉스턴 디자인 마무리 작업을 맡았다. 쥬지아로 부사장은 젊은 시절부터 이름을 날려온 스피드 광이다. 오죽하면 그의 부친이 “파브리치오가 운전하는 차 옆자리에는 타지 않는다”고 선언을 했을까. “요즘도 운전습관은 여전한가요?”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박장대소가 터져 나온다. 운전이라는 말만 들어도 즐거운가보다. 웃음 속에 차와 운전에 대한 사랑이 철철 끓어 넘친다. “아, 여전히 미친 듯 달리고 있습니다.(웃음) 그래도 프랑스 남부지역에 있는 F1 스쿨의 정식 교육과정을 모두 이수하는 등 스피드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준비는 충실히 갖췄어요. 막무가내 속도광은 절대 아닙니다. 몬자와 이몰라 서키트에서 F1 머신도 몰아봤지요. 지금껏 20년 운전하면서 큰 사고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변명이 필요했을까, 유난히 자신의 운전 성향에 대한 많은 말들을 쏟아낸다. “빠르지만 안전하게 운전합니다(Fast but safe).” 내내 이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빼어난 디자인 실력 못지않게 탁월한, 자타 공인의 드라이버. 그의 초고속 드라이빙이 안전하리라는 점, 믿어 의심치 않는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을 숱하게 찾았어요. 서울 도로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클래식’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온통 세단뿐이에요. 쿠페나 해치백은 정말 찾아보기 힘듭니다. 다행히 제가 좋아하는 마티즈를 많이 볼 수 있어 즐거웠어요.”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차를 고르거나, 아니면 정말로 차를 너무 좋아해서 타기보다는 사회 통념상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타입의 차, 즉 시각적 무난함으로 차를 고르는 듯하다는 게 한국적 차 고르기 성향에 대한 그의 조심스런 진단이다. 쥬지아로 집안은 조부가 교회 화가였고 부친이 20세기 최고의 카 디자이너인, 예술가적 기질을 이어온 가문. 하지만 그는 가풍이나 혈통보다는 일찍 찾아낸 재질과 이를 키우기 위한 교육이 더 중요했다고 말한다. “이제 한 살 된 딸은 벌써부터 차만 타면 계기판 스위치에서 손을 뗄 줄 모릅니다. 아마 머지않아 F1 최초의 여성 레이서가 쥬지아로 집안에서 나올지도 모르니 기대하세요.” 말과는 달리, 그는 딸의 장래를 오로지 딸의 선택에 맡길 작정이다. 혹시 좋은 아빠임을 강조하기 위한 ‘홍보성 멘트’는 아닐까. 그의 인생 철학을 물어보았다. “가족과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자!” 아무리 바빠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줄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그의 말. 그는 뛰어난 디자이너이기에 앞서 호방한 사나이였고 유머 넘치는 재담꾼이었으며, 감동적인 아빠이자 남편이기까지 했다. 글 | 김우성 사진 | 박창완
닛산 수석 부사장 토시유키 시가 “인피니티는 개.. 2004-07-13
닛산이 지난 6월 1일부터 18일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전세계 30개국 기자와 애널리스트 500명을 순차적으로 초청해 닛산의 현재와 미래를 소개하는 ‘닛산 360’이란 이벤트를 펼쳤다. 6월 15∼17일 3일 동안 이 행사에 참가한 기자는 닛산의 해외지사를 운영하는 토시유키 시가 부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시가 부사장은 닛산의 수석 부사장이며 해외지사 운영에 관한 모든 책임을 맡고 있다. 지난 5월 13일 닛산이 한국 시장 진출을 공식화한 기자간담회에도 참석했던 그는 현재 한국닛산의 CEO인 케네스 엔버그의 보스(직속상관)이기도 하다. 한국을 시작으로 인피니티 세계화할 계획 “닛산은 내년 4월부터 ‘닛산 밸류업’(Nissan value-up)이라는 3개년 계획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이 기간 중 닛산은 인피니티를 포함해 모두 28개의 새로운 모델을 세계 시장에 선보이고, 그동안 북미 시장에서만 판매했던 인피니티를 세계 전역에 공급할 계획입니다. 닛산이 르노와 제휴한 후 추진한 ‘닛산 리바이벌 플랜’(NRP)이나 ‘닛산 180’과는 달리 닛산 밸류업은 채산성 있는 글로벌 메이커로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의 이름인 ‘닛산 360’은 이제 닛산이 자동차 메이커로서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닛산은 밸류업의 하나로 인피니티를 북미 이외 지역에서 선보이는 첫 시장으로 한국을 택했다. 이를 시작으로 닛산은 일본에 인피니티 모델을 역수입하고 중국과 러시아, 서유럽 등에도 인피니티를 선보일 계획이다. 시가 부사장은 “한국처럼 닛산이 상륙하기에 앞서 인피니티가 먼저 선보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며 “한국에서는 이미 현대, 기아, GM대우 등이 대중차시장을 확고히 잡고 있기 때문에 현대 등과 부딪힐 수 있는 닛산의 대중차보다는 고급 브랜드인 인피니티를 먼저 소개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닛산은 인피니티를 포함해 매우 많은 차종을 갖고 있지만 우선 고급차시장이 큰 한국에 인피니티의 대표모델을 선보인 후 차근차근 어떤 차종이 한국 시장에 적합할지 연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 5월 한국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많은 기자들이 인피니티와 렉서스를 비교하는 것 같았습니다. 닛산은 한때 도요타를 따라가는데 집중하다가 1999년 실패를 맛보았어요(1999년 닛산은 르노와 제휴하고 경영권을 르노에게 넘겼다). 그러나 이제 닛산은 경쟁사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오직 ‘고객들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닛산의 관심은 렉서스가 아니라 한국 고객들입니다.” 게다가 인피니티에는 크로스오버 SUV인 FX45나 스포츠 쿠페인 G35 등 고급스러울 뿐만 아니라 다른 메이커의 차와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개성 만점 럭셔리카가 많아 한국 고객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시가 사장의 판단이다. 그는 또 닛산과 르노, 르노삼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많은 사람들이 ‘닛산의 한국 진출이 르노삼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내게 물었습니다. 르노가 삼성을 인수해 탄생한 르노삼성은 닛산의 전략이 아니라 르노의 전략이지요. 르노가 닛산의 경영권을 갖고 있긴 하지만 실제 비즈니스에서 르노와 닛산은 많은 부분 분리되어 있으므로, 르노와 닛산을 전략까지 같은 하나의 회사로 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인터뷰를 끝낼 즈음 자연스럽게 최근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TV 드라마 ‘겨울연가’의 주인공 배용준 이야기가 나왔다. 시가 사장은 “아내가 저녁 7시 30분만 되면 욘사마(일본인들이 부르는 배용준의 이름)를 보기 위해 ‘겨울연가’를 시청하는 배용준 팬”이라며 “아내와 함께 ‘겨울연가’를 몇 번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겨울연가의 인기로 모 수입차가 덩달아 잘 팔리기도 했는데, 나중에 닛산의 모델로 배용준을 쓸 생각은 없는가”하고 묻자 시가 부사장이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좋지요. 그러나 출연료가 매우 비싸지 않을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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